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24)
내게 빌어봐-124화(124/240)
게다가 그가 데이지에게 느끼는 순수한 애정이라도 이용하고 싶을 정도로 그레이스는 절실했다.
날 괴물로 만든 건 너야.
아픈 곳을 건드리는 건 잔인한 짓인 거 안다. 그래서 저 남자는 이미 제게 더한 짓을 했다는 걸, 부른 배를 내려다보며 되새겨야 했다.
사실 가장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얼떨결에 버리고 간 돌고래 인형은 어쨌냐고. 그 인형이 대체 뭐기에,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 그 행방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저번처럼 저 남자의 분노를 돋우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한 초콜릿을 화제로 올렸으나 그는 그것도 충분히 아픈 이야기인지 서릿발처럼 굴었다.
“그런 건 왜 묻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어떻게 했나 싶….”
“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게 준 게 아까워?”
“어떤 맛이었을지 궁금해서! 못 먹어 봤거든?”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가 저 남자도, 그레이스도 모두 그 순간은 철없는 아이로 돌아갔다.
“그거 내가 심부름으로 번 돈을 모아서 산 건데…. 아끼느라 한 입도 못 먹어 본 걸 선물로 줬더니….”
돌아누워 이불 속에서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더니 남자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싸구려 초콜릿조차 사 주지 않는 부모라니 아주 좋은 부모를 뒀군.”
물론 아무 말 없었던 건 잠시뿐이었다.
“수뇌부면 착복해 둔 재산도 제법 될 텐데. 그런 모친과 양부도 존경스럽다며 아직도 믿고 따르다니….”
그는 계속해서 등 뒤에서 부모님을 헐뜯었다. 게다가 ‘양부’란 표현으로 그레이스가 잊으려 애쓰던 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도리어 멋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뒀다. 저 남자가 저를 측은하게 여기도록.
부모님이 서로를 연인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며 약한 모습을 보인 게 뜻밖의 효과가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도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기에 그게 어떤지 잘 안다고, 남자가 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 벽을 허무는 척했더니 남자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 후로 그레이스는 약한 모습을 조금씩 드러냈다. 그래서 초콜릿 얘기가 부모님의 비난으로 이어진 날도 시무룩한 척만 하다 자 버렸다.
그러곤 다음 날이었다.
남자가 출근하기 전 여전히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던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상표 기억나?”
내내 마음에 걸렸던 건지. 그는 이미 오래전에 단종됐을지도 모르는 싸구려 초콜릿의 상표를 물었다.
“아니.”
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잊을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본거지가 있는 지역에서만 팔던 물건이기에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그랬더니 그날부로 그레이스의 곁에는 이 크리스털 그릇이 항상 놓였다. 그 안에 든 초콜릿은 매일매일 바뀌었다.
그레이스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윈스턴에게 내밀었다. 그는 눈을 살짝 치뜨고 그녀를 바라보나 싶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요즘 남자는 그레이스가 주는 걸 별다른 말 없이 받아먹었다.
심장은 보기보다 쉬운 남자구나.
그러나 두뇌 싸움은 쉽지 않았다.
윈스턴은 폰을 체스판 끝으로 기어코 보내 퀸으로 승격시켰다. 앞서 퀸을 빼앗은 게 무의미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가장 강력한 말을 기껏 살리고도 방어적으로 굴며 아끼기만 했다. 승부욕이 불타오른 그레이스가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며 전세가 기우는 상황인데도 킹이 아니라 퀸을 지키는 사람처럼 굴었다.
퀸을 왜 지켜?
체스의 목적은 상대의 킹을 잡는 것이다. 퀸은 그저 그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루해진 그레이스가 다른 쪽으로 공격의 초점을 옮기는 순간 남자는 돌변했다. 극도로 아끼던 퀸을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쓰더니….
“체크메이트.”
결국 그레이스의 킹을 제 손에 넣었다.
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승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가 쓰러트린 킹이 아니라 킹을 몰아세우다 그레이스에게 다시 빼앗긴 퀸을 언짢은 눈으로 응시했다.
어째서일까. 그날 내내 그 눈빛이 그레이스의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았다.
레온 윈스턴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
어느덧 낙엽은 모두 지고,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던 한 해의 끝자락이 성큼 다가왔다.
아기 구세주가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온 날을 겨우 며칠 앞둔 어느 아침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다.
처음엔 몰랐다. 배 속에서 거품이 보글거리는 것만 같은 그 생소한 감각이 바로 아이가 움직이는 느낌이라는 걸, 오후에 정기 검진을 위해 찾아온 의사가 말해 주고서야 알았다.
살아 있다.
그레이스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제 배를 떨리는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 이 속에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커져 가는 배는 외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시에 찾아오는 움직임은 외면할 길이 없었다.
이 낯선 존재는 잊지 말라는 듯 온몸에 울리도록 아우성쳤다.
너는 레온 윈스턴의 아이를 가졌어.
저 남자의 앞에서만 그런 척했을 뿐, 제 처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 없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일삼는 그레이스를 미약한 움직임이 그렇게 궁지로 몰았다.
그레이스는 맞은편에 서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윈스턴을 응시했다. 이제 제 감정을 숨기고 체념한 척하는 데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빛에서 원망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저 남자가 저를 사랑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마저 치밀었다. 너무 미워서. 그리고 너무 버거워서.
절망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무너지는 마음을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기댈 곳이라곤 이 절망을 손수 심어 준 악마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약하게 매달려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네가 너무 미워!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당장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소리 없이 절규하던 그레이스는 맥 빠진 웃음을 조용히 흘렸다.
용서를 빌라니. 이건 빈다고 용서해 줄 만큼 가벼운 죄도 아닌걸.
저 남자도 똑같은, 아니, 더한 고통을 겪는 꼴을 보아야만 그레이스는 원망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용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 미울수록 사랑하게 만들어야만 해. 저 남자에게 복수할 길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얼마나 커야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지?”
“장거리 여행이라 하시면….”
그레이스는 의사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남자를 응시하며 흔들리는 의지를 다잡았다.
늦은 밤의 욕실은 전등을 켜지 않았는데도 글자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욕조 가장자리와 선반 곳곳에서 향초가 은은히 불을 밝힌 덕이었다.
찰박. 부스럭.
습기를 머금은 타일 벽에 물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 부딪쳤다. 욕실을 맴도는 건 잔잔한 소음만이 아니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촉촉한 공기에 향초와 비누 거품의 향, 그리고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파르페의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거품 목욕에 파르페는 지금 그녀와 몸을 겹치고 욕조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발상이었다. 어째서인지 제가 어울리지도 않게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었다. 거품 목욕에 독서라니 말이다. 욕조를 가로지르는 트레이에 비스듬히 세워진 책은 더 어울리지 않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상식 백과.
남자가 매일 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작 수작을 부리는 건 저면서 남자에게 무슨 수작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펼쳐진 책장을 노려보다 눈을 돌리는 찰나였다. 배 속에서 또 무언가가 보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입 안에 든 크림과 초콜릿이 역하게 느껴졌다.
적과 적이 만든 아이. 절대로 잉태되지 말았어야 하는 금지된 존재.
마치 나처럼.
아니야. 난 아니야.
그레이스는 입에 든 걸 억지로 삼키고 윈스턴에게 물었다.
“넌 언제쯤이면 태동을 느낄 수 있대?”
“글쎄. 그런 건 아직 책에 안 나왔는데.”
“너도 얼른 아기를 느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 고통을 나 혼자 감당하긴 억울하니까.
그는 그레이스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수면 아래로 손을 넣더니 태동을 느껴 보고 싶은 사람처럼 배를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으니.
“책에서 그러던데…. 아이의 입맛에 맞는 걸 먹으면 태동이 활발해진다고.”
“그래서 자꾸 움직이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건 아이도 좋아하나 봐”
그레이스가 파르페 잔을 들어 보이며 억지로 웃던 찰나였다.
“그럼 아이가 나를 좋아하겠군.”
그레이스의 미소에 설핏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