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37)
내게 빌어봐-137화(137/240)
집에 다녀온 오빠의 손에는 낡은 일기장과 색이 바랜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일기장만 그레이스에게 주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는지 문밖에서 성냥을 긋는 소리와 욕지거리가 나직이 울리는 가운데, 그레이스는 오래전 죽은 어머니의 묘지를 파헤쳐 관 뚜껑을 여는 심정으로 일기장을 열었다.
처음은 평범했다. 아버지, 아니, 이제 그녀에겐 양부인 조나단 ‘조니’ 리들과의 신혼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불공평함과 왕정에 대한 비판을 휘갈긴 글이 조금씩 나오더니 대의를 이루기 위한 목표와 헌신을 또박또박 적은 글이 이어졌다.
제 일기장과 다를 게 없는 페이지를 재빠르게 넘긴 그레이스는 문득 손을 멈췄다.
『처음엔 단순한 잠입 임무인 줄 알았더니 조니가 자꾸만 더한 요구를 한다. 수뇌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이시여, 이게 진정 옳은 길인가요.』
『더러운 왕당파들의 비위를 맞춰 주며 정부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여전히 구역질 나지만 그래도 내 희생이 결국 저들의 몰락을 가져올 거라고 생각하면 버틸 만하다.』
『내가 다른 남자와 사는 걸 조니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지켜보는 걸까.』
그 후론 그레이스가 자주 외우던 혁명군의 신조가 한 장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둘째가 생겼다. 그래도 아이는 언제나 축복이다. 그럼 이제 한동안은 그 임무를 맡지 않아도 되려나?』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분명 태어났을 땐 어두운 파란색이던 그 아이의 눈동자가 청록색으로 변했다.
조니에게 공작 대상의 아이를 가진 줄도 몰랐다니 멍청하다는 욕설을 듣고 온종일 울었다. 이 끔찍한 실수를 어쩌면 좋지?
저 아이의 절반은 왕당파라니. 천사 같았던 아이가 이젠 더러운 괴물로 보인다.』
『그 아이를 고아원에 주자고 했지만 모두가 반대한다. 심지어 처음엔 찬성하던 조니도 제임스 블랜차드와 독대를 하고 나오더니 돌변했다.
추악한 왕당파의 자식인데 왜 키우길 강요하는 걸까. 괴로워.』
『그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려 했는데 도중에 붙잡혔다.
원탁의 모두에게서 세 시간 넘게 호되게 질타를 당했다. 그들은 내가 한 번만 더 도망치려 하거나 규율을 어기면 내 아들을 다른 부부에게 주겠다고 했다. 제발, 그건 안 돼.』
그 후로 이어진 토로를 그레이스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재빠르게 넘겼다.
『그래서, 왕정은 언제 무너뜨리겠다는 거야?
블랜차드는 아무래도 자신이 왕인 줄 아는 것 같다. 아니, 신이라고 생각하려나?』
『그레이스가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블랜차드가의 지하실에서 소수의 수뇌부 아이만 가르치다니. 사실 학교가 아니라 광신도의 교회 같다.
어젯밤에야 조니가 이유를 말해 줬다. 간부들이 그레이스를 키우라고 했던 이유 말이다.
그걸 듣고 나니 그 아이가 가엾어져 오늘 아침엔 머리를 직접 땋아 주었다. 그랬더니 그레이스가 집 앞에서 마주친 친구들에게 오늘은 내가 제 머리를 땋아 주면서 예쁘다고 해 주었다고 신이 난 목소리로 자랑했다.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에게서 눈총을 받았다. 멍청한 짓이었다.
그나저나 개가 개를 잡아먹고 돼지가 돼지를 잡아먹게 하는 작전이라니 곱씹을수록 역겹다. 왕당파가 멋도 모르고 아군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작전이라고.
아무래도 그자들은 거기서 변태적인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아이를 언젠가 왕당파를 흔드는 데 쓰겠다는 심산이라니. 기가 막힌다. 왕족이 적과 만든 사생아라 그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왕족의 내부 분열을 꾀하는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아무래도 블랜차드의 발상인 것 같다.
왕당파와 협상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아이의 친부를 압박할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건 나도 공감했다.
그런데 선전용이라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왕당파의 딸이자 왕실의 핏줄인 여자가 혁명에 가담한다. 왕족조차도 타락한 왕정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에 가담한다.
이런 식으로 선전하면 왕당파는 명예에 타격을 입긴 하겠지.
그런데 그러려면 결국 그 애에게 제 친부에 대해 알려 줘야 하지 않나? 그렇게 물었더니 조니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혁명군의 밝고 희망찬 면모만 보여 주어야 한단다. 제 비밀을 알아도 아이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그게 과연 가능할까.
조니는 철저하게 숨기고 가르치면 될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이 내 귀엔 ‘세뇌한다’로 들렸다.
학교에 가면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그 아이가 딱하다. 수뇌부에서는 아이가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걸 경계했다. ‘완성’되기 전에 외부 사람들에게서 부적절한 정보를 주입받아선 안 된다며 진짜 학교에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 자그마한 아이가 뭐라고. 비밀 병기라도 대하는 것 같아 어처구니가 없다.
결국 괴물은 아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내가 하는 일을 아이들이 아는 건 절대로 원치 않는다. 특히 그레이스가 너무 어릴 때 알게 되어 여자 동지라면 당연히 하는 일로 여기게 될까 봐 걱정이기도 하다.
남자아이였으면 좋았을걸. 아니면 적어도 보기 흉한 외모였어야 했는데.』
『열한 살이나 된 아이를 대체 언제까지 마을에만 가둬 키우려고 하는 건지.
이번 작전에 조를 데리고 가자는 걸 우겨서 그레이스를 데리고 왔다. 저 애도 바깥세상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기차 타는 법조차 모르는 바보를 어디에 써먹으려 하냐며. 이번엔 설득이 통했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모르고 난생처음 떠나는 여행이라고 들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사실 난 그런 마음이다. 저 아이가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애빙턴 비치에 휴양하러 온 어느 마음씨 좋은 가족이 저 아이를 데려가 버렸으면.
어쩐지 저 아이, 나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 같아 갈수록 초조해진다.』
『애빙턴 비치로 데려갔던 건 아무래도 실수였다.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은….
그레이스가 변했다. 맹목적으로. 조나단 리들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따라 이곳에 막 발을 들였을 때의 내 눈빛 같아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젠 나도 다를 바 없는 괴물일지도 몰라. 화장품을 덕지덕지 바른 거울 속 내 얼굴이 그렇게 추해 보일 수가 없다.
블랜차드가 아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결국 말했나 보다. 그 녀석, 오늘 나를 묘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내 아이들이 알게 될까 두렵다. 그럼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그레이스는 고작 열네 살이다. 그런데 그 악마가 작전에 데리고 나가 사람을 쏘아 죽이게 했다. 그 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조니는 돼지 새끼가 돼지 새끼를 죽였다며 술에 취해 통쾌하게 웃었다.
역겨워.』
『그레이스, 제발. 그 녀석은 절대 좋은 남자가 못 될 거야.』
『빌어먹을. 조니가 그레이스의 생일에 립스틱을 선물했다. 그것도 창부나 바를 새빨간 립스틱을.
죽여 버릴 거야.』
『그 악마가 드디어 죽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탁. 더는 볼 수 없어 덮어 버렸다.
“그래, 나도 그 일기장을 처음 봤을 때 그랬었지.”
그레이스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찬 바람이 부는 문간에 선 조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거칠게 던지더니 발로 짓이겼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돌연 일어섰다. 저도 왜 갑자기 일어섰는지 알 수 없었다.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고, 갑자기 치미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다가 일그러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곤 테이블 앞을 실성한 것처럼 서성이기만 했다.
너무도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 모든 것이 상쇄된 느낌이었다. 마비되어 버린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 돌아왔다.
그레이스는 일기장을 들어 오빠에게 내밀었다. 손이 적나라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 언제부터 알았어?”
“어떤 걸?”
그는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되물었다.
“네가 아버지의 아이가 아닌 건 내가 다섯 살 때. 아직도 기억해. 그때 한 살배기였던 네 눈동자 색은 무슨 크레용으로 칠해야 하냐고 물었다가 집이 발칵 뒤집혔거든.”
조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른들이 네가 알면 상처받는다면서 반드시 비밀로 하라길래 숨겼어. 그런데….”
조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시커먼 목적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그건 언제 안 거야?”
“네 역할, 어머니의 역할…. 그런 건 전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오빠는 한 발짝 더 다가오더니 한 손으로 뺨을 거칠게 문지르며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마치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그레이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하지만 어머니는 작전 중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