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39)
내게 빌어봐-139화(139/240)
죄 없는 너를 미워하고 버거워했던, 그 어른스럽지 못했던 시간이 후회되는구나. 그 시간이 지난 후에는 네게 정을 주고 싶어도 주변의 눈이 무서워 그러지 못했어. 어리석었지.
진작에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것도 참 비겁하기 짝이 없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란 걸 난 내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볼 때마다 절감하는구나.
그레이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네겐 아무 잘못이 없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부디 네 몸을 소중히 해. 그 더러운 개자식들에게 함부로 내어 주지 마.
그 악마의 무리가 네 ‘희생’을 고마워해 줄 거라고 절대로 기대하지 마. 그들에게 넌 수단일 뿐이야.
그러니 제발, 제발 떠나렴.
그렇다고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찾아볼 생각은 하지 말아. 네게 상처만 더 될까 걱정이다.
그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여기고 네 삶을 살아.
난 비록 어머니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몹쓸 인간이지만 마지막으로 네가 이 모든 걸 뒤로하고 오로지 네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구나.
수도로 가. 로열 헤리티지 은행의 본점에 네 출생 신고서에 적힌 이름으로 된 금고가 있어. 거기 든 물건을 찾으렴.
그렇다고 돈으로 그간 내가 저지른 잘못을 무마하려는 건 아니야. 네가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란다.
그레이스, 어릴 때 본 플로렌스 이모를 기억하니? 컬럼비아 합중국에 사는 내 동생 말이다.
플로렌스에게 말해 뒀어. 네가 거기서 자리를 잡고 싶어 하거든 언제든 도와주라고.
네가 이 땅에 있는 한 그들은 너를 계속해서 이용하려 할 거야. 그러니 멀리 떠나.
넌 부디 너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길 남자를 만나렴. 모든 걸 잊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거야.
이제 와 후회하는 것도 우습지만 난 잘못 살아도 너무 잘못 살았어.
모두가 평등한 삶이라는 이념은 훌륭하지.
그래, 이념은 잘못이 없어. 잘못은 언제나 인간이 저지른단다.
인간은 그 숭고한 대의를 이루기엔 너무 탐욕스럽지 않니? 그 탐욕으로 대의를 무기 삼아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소위 깨어 있는 자보다 거지에게 제가 가진 푼돈이라도 아낌없이 주는 무지한 자로 사는 게 세상에는 더 이롭지 않을까 싶구나.
나도 참….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네. 이만 줄이마.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뻔뻔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염치없지는 않아.
그저 네가 행복을 찾기를, 영원히, 지옥에서 기원하마.
안젤라
***
진실만큼이나 매서운 겨울바람을 마주한 채 쉼 없이 걸었다. 바람이 채 흩뿌리지 못한 눈물이 이따금 무거운 배 위로 떨어졌다.
“흑….”
바퀴에 마모된 철로가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어렴풋이 빛났다. 그걸 길잡이 삼아 그레이스는 걷고 또 걸었다.
열차가 모두 끊긴 야심한 시각이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선로의 끝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는 한낮의 기차역처럼 수없이 많은 목소리들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그레이스 리들, 네가 바로 블랜차드 반군이 더러운 미인계를 쓴다는 증거야.”
처음엔 단순한 잠입 임무인 줄 알았더니 조니가 자꾸만 더한 요구를 한다. 수뇌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뇌부가 모범을 보여야 해.”
“너, 네 약혼자에게서 나를 유혹하란 지령을 받았다고 했잖아.”
“지옥에나 떨어져야 할 개자식! 그 빌어먹을 자식이 뭐라고 약속했는지 알아?”
“리들 양, 포주 따위와 약혼을 하니까 창녀로 전락하는 거야.”
“너 설마 이걸 과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악마의 무리가 네 ‘희생’을 고마워해 줄 거라고 절대로 기대하지 마. 그들에게 넌 수단일 뿐이야.
“그 이상향은 혁명군의 피를 먹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나. 어머니, 수용소에서 죽은 그 고아, 그리고 이름 모를 그 수많은 여자들. 우리는 모두 무엇을, 누구의 이상향을 위해 피를 흘렸을까.
숭고한 대의도, 피보다 진한 전우애도 모두 허상이었다.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세상, 그레이스가 유일하게 아는 그 세상은 모두 허상이었다.
새가 눈을 떴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직시하자 간과했던 그 모든 모순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균열이었다.
“흐흑….”
발을 질질 끄는 소리 사이로 이따금 들리던 흐느낌이 점차 길어지더니 고통에 찬 울음으로 변해 갔다.
태어나는 일에는 고통, 그리고 파괴가 수반된다. 새는 스스로 알을 파괴해야만 태어날 수 있다.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
제 세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려 다시 태어나기로 각오한 여자의 절규가 밤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
성탄절을 하루 앞둔 아침, 체스터필드 임시 작전 본부는 어젯밤보다 훨씬 침착한 분위기였다.
전화벨이 울리고 여자의 행방을 묻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건 여전했으나 추적 범위가 좁혀진 덕에 그 빈도가 줄었다.
하지만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캠벨은 서부 사령부에 보고할 사항을 정리하다 문득 창가에 선 상관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위는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다.
누군가를 고문하려는 것처럼.
지금 그가 거꾸로 매달고 싶어 할 사람들의 명단이 캠벨의 머릿속을 줄줄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정작 고문을 당하고 있는 이는 대위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위압적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대위는 그 여자를 찾을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을 사람처럼 굴며 밤새 이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다 아침에 잠시 호텔에 들러 샤워에 면도도 하고 옷을 갈아입었을 텐데….
캠벨은 의아한 눈으로 상관의 셔츠 깃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분명 옷을 갈아입었을 텐데, 넥타이의 비뚤어진 매듭만은 똑같았다.
옷차림에 강박적일 정도로 규칙을 정해 두는 대위가 다시 저런 모양새로 넥타이를 맸을 리는 없다. 그 말은 옷을 벗을 때 끈만 살짝 당겨 고리를 느슨히 만들어서 벗었다가 목에 올가미라도 걸듯이 다시 걸어 매듭을 조였다는 뜻이다.
설마 그 여자 작품인가.
캠벨은 눈매를 구겼다.
도망치기 전에 올가미를 걸어 주고 가다니. 지독한 여자군.
총 여덟 곳의 플랫폼에는 그 여자의 인상착의를 전달받은 사병 수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풀어놓고도 레온은 모든 플랫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 여자가 탔던 열차, 그리고 조나단 리들이 사는 곳으로 향하는 지역 열차 편, 거기다 환승역과 종착역까지. 샅샅이 수소문한 결과 그의 추측이 맞았다.
기차에서 여자를 보았다고 어느 차장이 증언했다. 레드힐 농장과 가장 가까운 시골 역의 역장 또한 몸에 맞지 않게 큰 코트를 입은 임신부가 어젯밤 마지막 열차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다시 역에 나타났는지, 열차 운행이 재개된 시각부터 매시간 전화로 확인하고 있으나 매번 보지 못했단 대답만 들었다.
조나단 리들의 밀착 감시를 너무 늦게 재개한 걸까. 감시자는 그자나 그자의 거주지에서 여자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몰래 숨겨 놓았을지도 모르니 인원을 추가해 그쪽을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조나단 리들의 동태를 24시간 주시하되 아직은 접근하지 말도록 했다.
‘그러다 언젠가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날에….’
멀리서 열차가 곧 철도 건널목을 지나 기차역으로 들어올 예정이라는 걸 알리는 종이 울리자 레온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검지 끝으로 짓눌렀다. 18번째 듣는 소리였다. 즉, 이 자리에 선 후 17번 좌절했다.
“하….”
멍청한 짓이었다. 열차의 시간표를 모르지 않는데.
그 여자는 분명 제 오빠에게 갔다. 그곳으로 도망치면 그에게 잡힐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야만 한다는 건 그자에게 용건이 있다는 뜻이다.
무슨 용건일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끝에 어젯밤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 여자,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나 첫차를 탔다면 체스터필드로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각은 훌쩍 지났다.
1초가 1분처럼,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니, 제발 오늘의 마지막 열차마저 떠나기 전에는 나타나 주길.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순간, 8번 플랫폼으로 열차가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열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수십 개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플랫폼에 일정 간격을 두고 선 사병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객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확인했다.
가장 가까운 객차부터 눈으로 훑던 레온의 시선이 어느 이등석 객차에서 멈췄다. 익숙한 옷차림에 이어 익숙한 얼굴이 세 번째 객실 밖으로 나타나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