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50)
내게 빌어봐 <150화>(150/240)
<150화>
수요일 오후 2시 던위치 카페 달리아.
그레이스는 카페 달리아를 찾으려고 중부의 던위치 시로 며칠 전부터 와 있었다. 택시 기사들에게 묻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지역 전화번호부까지 사서 수소문했는데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뒤에 앉은 중년의 남자는 이런 도심지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초면이지만 벌써 ‘동지’의 냄새가 풀풀 났다.
그레이스는 등 뒤의 남자가 내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이미 무너졌는데 그 밑에선 아직도 속고 속이려 한다. 도망친 수뇌부의 일원들이 피라미드를 다시 세우려 하는 걸지도 몰랐다. 알면 알수록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였다.
광신도 집단이 따로 없어.
눈으로는 계속 신문을 훑던 그녀가 멈칫했다. 도축업자를 찾는 수상한 광고를 또 하나 찾았다. 그레이스는 핸드백에서 연필과 수첩을 꺼냈다.
‘목…. 오전 10시….’
광고 마지막에는 전화번호 여러 개가 적혀 있었다. 이건 숫자마다 철자가 할당되어 있는 암호였다. 예전에 지겹도록 썼던 덕에 암호 해독표를 외우고 있었던 그레이스는 곧바로 암호를 풀어 나갔다.
“후….”
위치를 해독하는 순간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이번엔 거기까지 가야 해?’
기차를 네 시간 넘게 타야 하는 거리였다.
‘제발 한곳에 모여, 응?’
속으로 푸념하는 찰나 웨이터가 크림 티 세트가 담긴 쟁반을 한 손에 들고 다가왔다. 그레이스는 얼른 신문과 수첩을 핸드백 속으로 치웠다.
“주문하신 크림 티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고마워요.”
웨이터가 친절하게도 따라 주고 간 차는 딱 알맞게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크리머에 담긴 우유를 부어 넣자 붉은 찻잔 속에서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찻잎을 좋은 걸 쓰네.’
설탕을 듬뿍 넣고 저은 밀크 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접시에 놓인 스콘을 집어 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환상적이었다. 따끈따끈한 스콘을 반으로 갈라 한쪽에 딸기잼을 바르기 시작하는데 단것만 먹으면 춤을 추는 아이가 또 배 속에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알았어. 기다려 봐.’
딸기잼 위에 클로티드 크림을 두껍게 얹고 스콘을 한 입 베어 물던 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등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청년이 문 앞에 서서 안을 두리번거렸다.
‘왔네.’
웨이터가 다가가자 청년이 고개를 젓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레이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스콘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등 뒤에서는 도축업자를 찾는 분이냐는 대화가 짧게 오가더니 의자를 드르륵 끄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 속닥대다 점점 경계가 느슨해지는지 그레이스에게 충분히 들리고도 남는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스콘을 입에 문 배고픈 임산부는 전혀 의심스럽지도 무섭지도 않겠지.’
그레이스가 스콘의 나머지 반쪽에 잼과 크림을 바를 즈음 대화는 접선의 목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저희 쪽은 저까지 포함해서 셋입니다.”
“비좁아서 불편하긴 하겠지만 셋까지는 감당할 수 있어. 나머지 둘은 지금 어딨나.”
“여기서 전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두 사람은 나머지 일행까지 데려와 밤에 이 부근에서 다시 만날 계획을 세우고는 접선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레이스는 찻잔을 급히 비우곤 지갑에서 금빛 동전 네 개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두 사람보다 그레이스가 먼저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두 건물 떨어진 모퉁이 뒤에 서서 카페 입구를 주시했다. 얼마 후 젊은 남자가 먼저 나오더니 반대편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2분 정도 흐른 후에 드디어 중년의 사내가 카페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자 그레이스는 가방을 열어 잽싸게 무언가를 꺼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사이 그레이스는 등을 돌리고 화장을 고치는 척했다.
‘화장은 성가셔, 정말.’
콤팩트의 거울에 비친 입술에서 립스틱이 군데군데 지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레이스는 립스틱을 꺼내 재빨리 빈자리를 채우며 골목길의 끝을 곁눈질했다. 남자는 제게 미행이 붙은 줄도 모르는지 유유히 어딘가로 걷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간격을 넉넉히 둔 채 남자를 따라갔다. 상점이 점점 드물어지더니 건물 사이에 걸린 빨랫줄이 머리 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남자는 근처의 빈민가로 향했다.
“후우….”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계속 따라가는 건 위험했다. 값비싼 옷차림은 윈스턴의 추적을 따돌리기엔 효과적이지만 미행을, 그것도 빈민가에서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레이스는 골목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꼬마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얘들아.”
손에 쥔 분필 토막으로 길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놀던 아이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금방 지나간 아저씨 봤지?”
“네.”
꼬마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대답했다.
“어디 사는지 알아?”
“저어기 모퉁이에서 맨날 왔다 갔다 하던걸요.”
아이는 조금 전 사내가 사라진 모퉁이를 가리켰다. 그 이상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쫓아가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보고 와 줄래? 너무 가까이 가거나 말 걸진 말고.”
은빛 동전 하나를 꺼내 들어 올리자 소년이 벌떡 일어서서 손을 털더니 모퉁이를 향해 달려갔다.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서는 신이 나 설명했다.
“저쪽 골목 끝에 파란 건물이 있거든요. 거기로 들어갔어요. 근데 거기서 몇 층으로 갔는지는 보지 못했어요.”
거기까진 필요 없었다. 어차피 군에서 알아서 쥐 잡듯 뒤질 테니.
그레이스는 눈을 반짝이는 소년에게 동전을 주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는 가방에 든 초콜릿을 꺼내 하나씩 나눠 주었다.
“누가 물어봤다고 얘기하지 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번화가로 나왔다. 눈에 보이는 아무 은행으로 가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월말이라 은행이 북적여서 아무도 이 시간에 전화를 쓴 여자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윈스포드의 버크셔 웨스트 5214로 연결해 주세요.”
그레이스는 익숙한 전화번호를 대고는 아무 이름이나 되는 대로 덧붙였다.
“브리지트 데이비스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1특수임무단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늘 그렇듯 군기가 잔뜩 들어간 말투였다.
“안녕하세요. 수배 전단에 있는 번호를 보고 걸었어요. 거기가 반군 제보를 받는 곳이 맞나요?”
그레이스는 제보가 처음인 척 다 아는 걸 물었다.
[네, 맞습니다.]“그게, 제가 아는 사람이 반군인 것 같아서요.”
그 후로 그녀는 카페에서 본 두 남자의 인상착의와 은신처의 위치, 그리고 그들이 오늘 밤 접선할 시각 및 장소를 전해 주었다.
그렇게 던위치로 온 목적을 무사히 달성하자마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떠나야 했다. 제1특수임무단의 그 눈치 빠른 지휘관이 제보자의 정체를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곧장 묵고 있던 호텔로 가 컨시어지에 맡겨 둔 짐을 택시에 싣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러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열차표를 샀다. 열차는 30분 후 도착 예정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긴 추워 플랫폼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드문드문 비어 있는 자리를 둘러보던 그레이스는 어느 기둥 앞의 벤치에 앉았다.
“여기 놓아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짐 가방을 들어 주었던 짐꾼이 가방을 발치에 반듯하게 놓아 주었다. 금빛 동전 하나를 주자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가진 짐이라곤 몸통만 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홑몸이었다면 남의 도움 없이 가뿐히 들고도 남았을 거다.
“휴….”
그레이스는 발끝을 위로 당겨 저린 종아리를 풀며 눈앞의 기둥을 노려보았다.
20대 중후반. 청록색 눈동자. 왼쪽 눈 밑의 작은 점. 마른 체형. 5월경 출산을 앞둔 임신부.
기둥에는 그녀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콧잔등에 얹힌 선글라스를 슬쩍 밀어 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다를 떠는 노부인들, 그리고 출장을 가는 듯 서류를 뒤적이는 중년의 사내, 모두 그레이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무슨 사연일까.”
한 자리 건너 옆에 앉은 젊은 여자가 전단을 읽어 보다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사연을 같은 벤치에 앉은 임신부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건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비싼 옷을 입고 화장을 화려하게 하는 건 이 때문이었다. 가난해 보이면 전단 속의 여자일 거라는 의심을 받기 쉽다. 그러나 부유한 여자라면 대개 떠올리는 실종자의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