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58)
내게 빌어봐 <158화>(158/240)
<158화>
“어떻게 알아냈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금괴를 팔더군. 일꾼의 품삯으로 병원비를 대는 건 무리일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
“…….”
“그게 유산이었던 건 오늘에야 알았어. 네 덕분에. 그 말은 그 여자도 금괴를 받았다는 소리겠지. 네가 판 금괴는 모두 로열 헤리티지 은행에서 주조되었고 일련번호가 이어졌어. 네 모친이란 자는 분명 비슷한 시기에 금괴를 매입했을 테고, 네가 팔았던 것과 그 여자가 가진 것의 일련번호가 꽤 가깝겠군.”
윈스턴은 혼자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또 혼자 결론을 내렸다.
“아, 금괴로 그 여자를 추적하면 되는 건가?”
놈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좋아. 새 실마리가 생겼군. 고마워.”
창밖으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오더니 얼빠진 조의 어깨를 격려라도 하듯 툭툭 쳤다. 조가 무어라 한마디 하기도 전에 창문이 위로 올라가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조는 뒤늦게 혀를 찼다.
저 지독한 악마.
언젠가 동생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볼 것이다.
그레이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 악마가 네게 집착하는 거야?
º º º
거듭 울리는 자동차 경적과 주말 인파의 소음을 덮고자 틀어 둔 라디오에서 경쾌한 노래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호텔 침대에 목욕 가운 차림으로 앉은 그레이스의 기분은 전혀 경쾌하지 않았다.
이 짓도 더는 못 해 먹겠다.
그게 그레이스가 도주 2개월 만에 내린 결론이었다.
“후우….”
신문을 넘기는 소리에 한숨이 섞여 들었다. 괜찮은 곳을 찾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부동산 임대 광고를 손끝으로 훑어 내려가며 그레이스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별 소득 없이 보던 걸 접고 다른 신문을 펼치던 때였다. 라디오에서 길게 이어지던 전주가 끝나더니 노랫말이 나왔다.
[우리 자기는 어디로 간 걸까.]그 순간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경쾌한 멜로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간절한 노랫말이라니.
“우리 자기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내 품을 두고 어디를 헤매는 거야. 응? 걱정되잖아.”
애타는 속내를 능글맞고 가볍게 포장해 뱉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절로 떠올랐다.
[오늘 밤 우리 자기는 어디 있는 걸까.]어디긴. 네 자기는 웨이크필드 시 프레이저 호텔 1115호에 있어.
“그나저나 우리 아이는 잘 있고?”
너무 잘 있어서 탈이야.
그레이스는 협탁에 올려 둔 케이크를 작게 떠서 먹자마자 진저에일을 한 모금 마셨다. 배 속의 무단 거주자가 요즘 부쩍 커진 탓인지 소화가 잘되지 않아 진저에일을 입에 달고 살아야만 했다.
무단 거주자의 퇴거까지 이제 10주 남았다.
욕조를 쓰는 것도 버거워서 못 할 만큼 무거운 몸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호텔 방에서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분명 그 남자, 온 왕국의 병원에 수배령을 내려 놨을 거다. 10주 후면 쥐가 알아서 덫으로 걸어 들어올 줄 알고 기대에 차 있겠지.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그레이스는 생활 정보 면에서 어느 광고를 톡톡 두드리다 옆에 엎어 둔 지도책을 뒤적였다.
“흐음….”
위치도 가격도 적당했다.
[경비원 24시간 대기, 컨시어지 서비스.]거기다 안전하다. 심부름을 해 줄 사람이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나갈 필요도 없고. 하지만 문제는….
[활발한 입주자 교류.]달리 말하자면 파티 같은 입주자 친목 행사를 정기적으로 연다는 뜻이었다. 교류가 활발하면 소문도 잘 돌게 마련이다. 분명 새로 이사 온 여자의 집에 남편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없다는 둥, 수상쩍다는 둥 그레이스를 두고 소문이 돌 것이다.
그러다 전단 속의 여자가 나라는 결론까지 가는 건 시간문제겠지.
“하아… 정말, 어디로 가야 해?”
하루 벌어 하루 사느라 바빠 남에게 호기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빈민가나 이곳 말을 잘하지 못해 전단을 읽지 못하고 전화 통화나 공권력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민자 지구로 가는 게 그 남자의 추적을 따돌리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런 데선 의식주부터 신변의 안전까지, 도와줄 사람 없이 혼자서 많은 걸 해결해야 했다. 홑몸이었으면 거뜬했겠지만 이런 몸으론 무리였다.
그러니 그런 곳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고 적당한 곳을 찾아 며칠째 신문을 뒤적이는 그레이스에게 그 남자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네게 가혹하게 굴었던 거, 너를 증오했던 거, 모두 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네가 내게 한 짓도 용서할게. 난 모든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줘.”
연필로 신문지를 멍하니 두드리던 그레이스는 한참 후에야 중얼거리며 광고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웃기지 마.”
다시 잡아 가두려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그 오만한 인간의 입에서 사과가 그토록 쉽게 나오는 것도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것 같아 불쾌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하는 사과도 아닌 주제에. 그건 기만이지.
비열한 개자식. 두고 봐.
그레이스는 눈에 띄게 들썩이는 배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10주 후면 내게서 네 흔적을 완전히 지울 테니까.
신문 세 개를 더 뒤지고서야 적당한 아파트를 딱 한 곳 찾았다.
‘내일 전화해 봐야지.’
군용 단검으로 광고를 오려 내던 그레이스는 임대료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 가진 현금으론 안 될 텐데.’
곧 시선은 화장대에 올려 둔 핸드백으로 향했다.
‘금괴를 몇 개 팔아야겠네.’
º º º
지미는 악마를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테이블 없이 두 발짝 거리에 마주 앉아 있자니 맹수 앞에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진 심정이었다.
그러나 테이블이 사이에 있다 해도 저 악마의 광기 어린 폭력을 피할 수 없는 건 이미 잘 안다. 팔걸이에 묶인 손에 ‘사형수’라는 문신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북부에서 서부의 새 수용소로 옮겨 온 지 정확히는 몰라도 한 달은 넘은 듯했다. 동지들이 주로 수감되는 거번 수용소로 갈 줄 알았으나 수뇌부는 윈스포드 근교의 감옥에 세워진 임시 수용소로 옮겨졌다. 사령부의 가까이에 두고 계속 신문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추측이 무색하도록 꽤 오래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독방에 갇혀 미쳐 가기 직전일 즈음에야 윈스턴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반가울 리 없었다.
왜 갑자기 온 거지?
갑작스럽지 않은 건 질문의 내용뿐이었다.
“그 여자를 내 밑에 잠입시키게 된 경위, 빠짐없이 말해.”
또 그레이스에 관한 질문이었다.
다만 행방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뜻밖이었다.
저자가 중간중간 끼어들며 던지는 질문을 따라 그레이스를 윈스턴 저에 하녀로 잠입시키게 된 과정을 설명할수록 상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아,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그쪽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했어.”
잠시 침묵하던 윈스턴이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그 여잔 잠입하겠다고 한 적 없는 거군. 네가 강요했을 뿐이지.”
지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강요라니.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밀어 넣은 건 아니었다. 설득을 다소 했을 뿐, 결국 잠입하는 쪽을 선택한 건 그레이스였다.
“강요가 아니라 설득이야.”
“설득?”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깍지 낀 두 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윈스턴이 코웃음 쳤다.
“그 설득을 어떻게 했을지 안 봐도 뻔하군. 그 여자의 머릿속을 휘저어서 세뇌하는 데는 도가 텄을 텐데. 친애하는 블랜차드 씨, 수업 시간에 존 모양인데 그런 걸 강요라고 정의하는 거야.”
그러더니 윈스턴은 미인계를 지시하게 된 과정과 그 당시 그레이스의 반응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결국 그 여자 말이 맞았잖아….”
홀로 중얼거리는 윈스턴의 낯빛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어째서 격노한 얼굴인지. 지미는 제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지만 무엇이 저자를 자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고와 행동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악마의 밑에서 그레이스는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젠장할.
그 배만 봐도 뻔한 이야기였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레이스의 마지막 모습을 떨치려 고개를 젓던 찰나였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윈스턴이 일어서서 문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가.
안도감 탓에 지미는 잠시 잊었다. 저 악마의 사고와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문으로 향하던 윈스턴이 돌연 멈춰 섰다.
“아, 맞아. 선물을 가져왔는데 잊을 뻔했군.”
놈이 순식간에 권총집을 열더니 총을 뽑아 들자마자 슬라이드를 당겼다.
탕.
“으악!”
미처 피해 볼 겨를도 없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발등을 관통했다.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지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윈스턴이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건 내가 아니라 조가 주는 선물이야.”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