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61)
내게 빌어봐 <161화>(161/240)
<161화>
정도를 넘는 발언에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사령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생각이 짧았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좋아. 나도 자네도 손 떼도록 하지.”
그 찰나 소령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그 아이를 놓아주자는 말일세.”
그 아이가 저 미치광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러다 최악의 경우에는 저도 그 아이도 죽여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설령 감당할 수 있더라도 둘을 붙여 놓는다면 재앙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떼어 놓으려는 것뿐이라고 해명한들 윈스턴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역시나, 눈먼 미치광이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손은 그레이스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쪽이 떼야지.”
“소령,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잃은 것 고작 하나 때문에 가진 것 모두를 잃지는 말게.”
하나라니.
레온은 주먹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잃은 것 하나가 그에겐 전부였다.
그런데 고작 하나라니.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켜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착각하시는데 따님 덕분에 가진 것 모두를 잃을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 애가 내 비밀을 알든 말든 죽일 생각이 없어.”
“죽이든 빼돌리든 제겐 다를 게 없죠.”
사령관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를 향한 윈스턴의 집착과 광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겨우 넉 달째가 이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눈앞이 깜깜했다.
이런 미치광이인 것을 다른 이들은 꿈에도 모르고 그를 부러워했다. 윈스턴을 발탁해 소탕 작전의 지휘권을 준 그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찬사를 들을 때마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한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고 보니 눈앞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건….”
신분증을 찍은 사진이었다. 노라 왓슨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분증, 즉 안젤라 리들이 그의 밑에 잠입할 때 썼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약속과 다르지 않나.”
사령관은 분개했다. 소탕 작전의 지휘권을 윈스턴이 가져가는 대신 선왕 시해 작전의 기록과 증거 중에서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모조리 그에게 넘기기로 합의하지 않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여태 이를 갈던 놈이 태도를 단숨에 바꿔 능글맞게 굴기 시작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사령관님께서 요구하신 것 중에 안젤라 리들의 소지품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만.”
“이래서야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겠나. 자네와 나 사이의 신뢰에 벌써 금이 갔지 않은가.”
“사령관님께서 제 밑에 첩자를 심으셨을 때에는 신뢰 관계가 멀쩡했습니까? 애초에 이 관계가 신뢰에서 시작된 건 아닌 걸로 압니다만. 잊으신 것 같아 상기시켜 드리자면 협박과 강요로 시작됐죠.”
윈스턴은 딱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빈정대더니 그를 한 번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것 말고도 제겐 안젤라 리들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사령관은 이미 이 대결에서 얻어맞을 대로 얻어맞아 링 밖으로 나가떨어진 상태였으나 집요한 미치광이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살해당하면 이 안에 든 걸 폭로하시오.’ 이런 이름의 금고가 윈스턴가에 있다는 사실, 잊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둘 다 거기 넣어 두었다는 소리인가. 사령관이 사색이 되었다.
“물론 제가 아니라 그레이스가 살해당해도 폭로되는 겁니다.”
“좋아. 이 일에서 난 완전히 손 떼지. 자네는 정신 나간 레밍 떼처럼 낭떠러지로 질주하든 말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낭떠러지 아래라도 그레이스가 있다면 기꺼이.
레온은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나왔다.
“이래서 위험하다고 한 건데, 그 망할 여자….”
제1특임단 본부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폭우가 내려치는 창문을 등진 채 서류에서 같은 자리만 읽고 또 읽다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소령님.”
캠벨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캠벨의 손에는 메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무엇에 관한 메모인지 알게 된 순간 레온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웨이크필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가 여자를 추적하기 위해 고용한 탐정이 무언가를 찾았다는 뜻이었다.
[3월 초중순 15박. 혼자 장기 투숙. 프레이저 호텔. 검은 머리. 방문객 없었음. 건강해 보임. 임신 중. 자발적으로 체크아웃함. 이후 목적지는 말하지 않았음. 이후 웨이크필드 지역 내 다른 호텔에서는 투숙 기록 없음.]메모에 적힌 건 결정적인 실마리는 아니었지만 뻣뻣하게 당기던 레온의 뒷덜미를 느슨히 풀어 주는 데는 한몫했다.
적어도 무사하다는 건 확인했으니.
남중부에 있는 웨이크필드 지역으로 추적 범위를 좁힐 수 있었던 건 금괴 덕분이었다. 3월 초, 조나단 리들 주니어가 그간 팔았던 금괴의 일련번호를 감시 기록에서 확인해 그 번호와 가까운 번호가 각인된 금괴의 수배령을 금을 매입하는 곳마다 내렸다.
그리고 일주일 전, 그의 추론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웨이크필드의 한 은행에서 선글라스를 낀 임신부가 3월 7일에 1트로이온스짜리 금괴 두 개를 팔았다고 신고해 왔다.
비록 신고가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그간 몇 달째 비어 있던 행방의 공백을 메웠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수확이었다.
그 여자는 금괴를 두 개나 팔았다. 임대료 혹은 출산 비용이 목적이라는 게 레온의 추론이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레이스는 웨이크필드에서 아이를 낳을 생각이란 뜻이었다.
“병원과 조산원 계속 주시하라고 전해.”
“네, 이미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좋아. 나가 보도록.”
은행의 제보를 받은 즉시 웨이크필드 및 근교의 병원과 조산원에 수배령을 집중적으로 내렸다. 물론, 예측이 틀릴 가능성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전국의 병원과 조산원에도 전단을 배포해 두었다.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산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는 산모. 가족 없이 홀로 온 산모.
어떤 특징이든 흔치 않으니 의료진과 산파의 눈에 쉽게 띌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갖게 한 건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녀가 그의 덫으로 걸어 들어오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테니.
출산 예정일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4주.
그럼 곧 그레이스도, 아이도 안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연 비가 멎고 구름이 걷혔다. 창을 넘어 쏟아져 내리는 햇빛 속에서 레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그의 심기만큼이나 변덕스러운 4월이었다.
º º º
울음소리는 멎을 줄을 몰랐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단잠을 방해하더니 그 습관을 그레이스의 배 속에 버리지 못하고 나온 듯했다.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 어떻게 보아도 그 남자의 아이였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
“쉿, 아기가 듣잖아.”
아기 울음소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이 앞에서 아버지를 헐뜯는 건 교육상 좋지 않아.”
그 순간 그레이스는 온몸을 관통하는 예리한 전율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드는 창을 등진 검은 인영 또한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했다.
“불과 얼음을 섞으면 뭐가 될지 궁금했는데….”
남자는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든, 예쁘네.”
눈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심경은 애틋한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아름다워.”
남자는 칭얼대는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어째서.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만 반복됐다.
저 남자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한두 달여 전 숨기에 적당한 아파트를 찾았다. 그러자마자 집 안 곳곳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 남자 물건으로 채웠다. 누가 들어와 보면 남편이 잠시 부재중인 줄 알도록.
물론 산파를 속이려고 한 수고였다. 어제 낮, 예정일을 나흘이나 넘기고서야 진통이 시작되고 예약해 둔 산파가 왔을 땐 때마침 남편이 출장을 간 척했다.
거기다 일부러 커튼을 치고 방을 어둡게 했다. 조명은 붉은 기가 강한 전구만을 써서 눈동자가 청록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보이게 했다.
산파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그저 홀로 아이를 낳는 그레이스와 아이의 탄생을 놓친 ‘남편’을 딱하게 여겼을 뿐.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산파가 끝내 나를 알아보고 제보한 걸까. 좌절하는 순간 아기를 어르던 남자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만 닮지 않으면 된다더니…. 내가 뭐랬어? 그런 소원은 함부로 비는 게 아니라니까.”
그는 저를 노려보는 그레이스는 안중에도 없이 아이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