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62)
내게 빌어봐 <162화>(162/240)
<162화>
“그래도 네겐 정말 잘됐군. 내 겉모습만은 좋아했으니. 적어도 성격은 닮지 않길 기도해 봐.”
내 알 바 아니야! 난 여길 떠날 거야. 내 모든 과거를 버리고. 거기엔 물론 너와 네 아이도 있어.
외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고문실에 요람이 잘 어울리는군.”
고문실? 그 말에 놀란 그레이스는 그제야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천장, 검은 벽에 박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족쇄와 수갑, 모서리가 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뜩이는 철제 테이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레이스는 고문실에 있었다.
잘그락. 손발을 움직여 본 그레이스는 잔인하도록 익숙한 소음과 무게감에 탄식했다. 그녀는 족쇄와 쇠사슬이 사지에 감긴 채 고문실의 일 인용 침대에 묶여 있었다.
“대체 언제…. 당장 풀어! 풀어 줘! 응? 제발!”
결국엔 애걸까지 했지만 남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만 어를 뿐 그레이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약속과 다르잖아! 이젠 가두지 않는다며?”
“그 약속은 네가 순순히 돌아올 때만 유효한 거였지.”
“네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 이 비열한….
“개…자식…. 헉!”
그레이스는 눈을 번쩍 떴다. 천장의 야자수 무늬 벽지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아파트였다. 고문실이 아니라.
그걸 확인하고도 방 안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훑었다. 다행히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도 턱 끝까지 찬 숨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꿈에서도 지독한 그 개자식….”
악몽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잠옷이 축축했다. 그레이스는 머리칼이 땀에 젖어 달라붙은 이마를 쓸어 올리다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아기 침대에서는 여전히 울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흰 천을 가장자리에 둘러 둔 탓에 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아이를 낳은 직후만 해도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더니 한숨 푹 자고 나자 한결 가뿐해졌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이는 저도 힘들었는지 밤새 죽은 듯 잠만 자더니 지금은 기력을 회복한 건지 발을 힘껏 차며 목청껏 울고 있었다. 기저귀를 확인해 봤지만 젖어 있지 않았다.
‘배고플 때도 됐지.’
그레이스는 주방으로 가 젖병에 분유를 조금 타 왔다. 지치지도 않고 우는 아이를 침대에서 꺼내 창문 앞의 안락의자로 갔다. 아이를 안는다기보다는 허벅지 위에 눕혀 두고 머리만 살짝 들어 젖병을 물려 주었다.
“아니…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아이는 젖병을 물려 줘도 젖꼭지를 뱉어 내고 빨지 않았다. 굶겨서 짜증이 날 대로 났는지 발버둥에 손까지 휘저으며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어 댔다.
“그래, 늦게 줘서 미안해. 그만 짜증 내고 먹어, 응?”
울음을 좀 그치면 먹을까 싶어 젖병을 치우고 안아서 달래 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참을 고전하던 그녀는 정말 하기 싫던 짓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도했다.
“하… 너 정말 웃긴다.”
그레이스는 제 가슴 끝을 물자마자 얌전해진 아기를 내려다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오지도 않는데….”
어젯밤에는 산파의 눈치가 보여 억지로 젖을 물렸었다. 하지만 모유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젖을 물리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좋자고 분유를 타 왔더니….
“벌써 까다롭네.”
등 뒤에서는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품 안에서는 자그마한 입술로 힘주어 젖을 쪽쪽 빠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기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그레이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작니?”
배 속에서 그녀를 짓눌렀던 무게에 비해 아기는 너무나도 작고 가벼웠다.
그레이스는 제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젖을 빠는 자그마한 생명을 좀 더 성의껏 안아 주었다.
“네게 무슨 죄가 있겠어.”
태어난 건 죄가 아니다. 탄생은 언제나 타의에 의해 일어나니.
죄라면 이 아이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만든 그 남자에게, 애초에 범죄에 가담해 붙잡힌 저에게, 그리고 그녀를 속여 범죄에 가담하게 만든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레이스가 이 아이에게 거리를 두는 건 미운 탓이 아니었다. 미안한 탓이었지. 그녀는 어머니의 일기장에 담겨 있던 그 수많은 고뇌와 갈등의 대부분을 벌써 이해하게 되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니….”
그 남자에게 잡히지 않고 무사히 낳는 일에만 온통 신경을 쓰느라 아이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저 어딘가에 줘 버리면 된다. 쉬운 일 같으면서도 쉽지 않았다.
이 아이에게 밝고 평범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게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속죄 같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길로 가야 그런 미래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길은 단 세 갈래뿐이다. 그 남자에게 보내는 것, 고아원에 주는 것, 또는 손수 적당한 가정에 입양시키는 것.
그 남자에게 주는 건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오로지 그녀를 묶어 두기 위해 만든 아이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그 남자가 어떻게 취급할지 걱정스러웠다.
고아원에 보내는 건 그녀로선 가장 손쉽지만 아이에겐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지였다.
말랑한 뺨을 손끝으로 간질였더니 아이가 눈을 떴다.
어두운 파랑.
아이의 눈동자 색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레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갓 태어났을 때엔 이런 눈이었다는 걸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읽었다. 그 말은 이 아이의 눈동자 또한 저처럼 청록색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고아원에 아직도 블랜차드의 잔당들이 손을 뻗치고 있다면, 그래서 이 아이가 잔당의 손에 들어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들은 눈동자만 봐도 이 아이가 그녀와 윈스턴의 아이란 걸 알아챌 것이다. 그 남자에게 복수하거나 왕당파와 협상을 하는 데 아이를 이용하려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하필 남자아이도 아니고 여자아이라니. 이 아이마저 저와 같은 운명이 되게 둘 순 없었다.
“정말 널 어쩌지? 응? 말해 봐. 넌 어디로 가고 싶어?”
그레이스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기에게 덧없이 물었다. 아기는 이토록 가벼운데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는 근심은 너무도 무거웠다.
“그래, 네가 뭘 알겠어.”
그나마 현명한 답을 아는 건 그레이스뿐이었다.
좋은 부모가 되어 줄 사람을 손수 찾아 준다.
아이의 눈이 설령 청록색으로 변하더라도 이 왕국의 수많은 가정 중 하나에 숨은 아이를 그 남자든, 반군이든 찾아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제가 증오와 계략의 산물이라는 진실을 평생 모르고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적어도 다른 길보다는 나을 거야.
그레이스는 품속의 아이를 다독이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이게 최선이야.”
누군가를 설득하듯 구는 그레이스를 머릿속의 그 남자가 힐난했다.
“넌 이미 내 계획 알잖아.”
닥쳐. 넌 불행해야 해.
º º º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는 시신이 놓여 있었다. 온몸이 흰 천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으나 체구와 어렴풋이 드러나는 윤곽으로 보아 여자인 게 분명했다.
시신의 주위를 둘러선 남자들이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안치소의 직원으로 보이는 자가 불편한 정적을 깼다.
“오늘 낮에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입니다. 남편도 가족도 없는지 혼자 병원에 왔다는 데다가 실종자 전단에 적힌 인상착의와 맞아떨어져서 연락을 드렸는데….”
직원이 설명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또다시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흰 천으로 감싸인 시신을 눈으로 가볍게 훑어본 레온은 고개를 들자마자 입매를 비틀었다. 안치소의 직원도, 캠벨도 모두 암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시한부 선고를 내리러 온 의사처럼.
보기도 전에 왜 벌써 저런 얼굴을 하는지.
º º º
그는 피식, 코웃음을 치곤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가린 천을 걷으라는 지시였으나 직원은 머뭇거리며 그를 힐끔거렸다. 딱하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이 천 아래의 여자는….”
내 여자가 아닐 텐데. 인내심이 바닥난 레온이 스스로 천을 걷은 순간, 시한부 선고는 사망 선고가 되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의 삶도 끝이 났으니.
이건 말도 안 돼.
청록 빛 눈동자가 저토록 혼탁한 건 생명의 빛이 완전히 꺼졌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믿지 못하고 핏기가 완전히 가시다 못해 푸른빛이 어렴풋이 도는 얼굴에서 놀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캠벨이 직원을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지고도 오래도록 굳어 있던 레온이 돌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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