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69)
내게 빌어봐 <169화>(169/240)
<169화>
“하….”
그것도, 이곳에 널 데려오다니. 애틋한 사랑의 결실이라도 이룬 걸 자랑하듯이.
이 아이는 그 다정한 소년의 아이가 아니다. 애빙턴 비치의 소년은 죽은 지 오래다. 그러니 데이지도 죽었어야 하건만. 그녀는 그레이스 리들조차 아직 죽이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시작된 자리로 돌아왔다.
아니야. 나를 죽일 거야. 나를 버리고 떠날 거야.
그레이스는 졸리는지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만 보내면 떠날 거야.
º º º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접어드는 11월임에도 남쪽은 트렌치코트가 두껍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했다. 창을 열자 선선하고 습한 공기가 바다 내음과 함께 택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차역 부근을 벗어난 택시가 상점가와 해변을 가르는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성수기에는 자정이 넘도록 북적이는 번화가이지만 비수기인 지금은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창밖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던 레온은 카니발의 입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고개를 들었다. 곧 검은 하늘로 우뚝 솟은 대관람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도 저 자리에 있다니.
불이 모두 꺼진 채 멈춰 선 모습은 마치 시간이 영원히 멈춘 것 같았다. 그 시절 그 순간에 말이다.
추억이란 저런 것일지도 모른다. 폐장한 카니발처럼 불을 끄고 잠들어 있다가 추억을 찾는 순간 불이 켜지며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추억의 스위치가 딸깍,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대관람차의 꼭대기에 앉아 소녀에게 키스를 하던 소년이 돌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리 없는 외침이 곧 그의 귓가를 울렸다.
머저리.
내가 모르는 걸 말하랬잖아.
차창에 팔을 기대고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사이 택시는 언덕을 두어 개 넘어 흰 벽돌로 된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레온은 정장 재킷의 앞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선글라스를 썼다.
“넌 여기 있도록.”
피어스를 택시에 두고 캠벨과 함께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캠벨이 정문의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사내가 두 사람에게 초조한 미소를 지었다.
“호퍼 씨?”
“네, 맞습니다. 들어오시죠.”
부동산 중개인이 두 사람을 3층으로 안내하며 땀이 맺힌 이마를 손수건으로 연신 눌렀다.
“저는 그 금괴가 수배된 건지 전혀 모르고….”
“범죄에 연루된 건 전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교복을 입은 젊은 남자의 말에 호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난봄에 임차인에게서 임대료로 받은 금괴 하나와 여름에 추가로 샀던 두 개를 일주일 전 은행에 팔았다가 오늘 군에서 전화를 받은 후로 온종일 불길한 상상만 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303호 앞에서 멈춰 서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곧 천천히 문이 열리고, 가구와 집기가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흔적과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2개월 전 떠났다고 했나.”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명령조로 물었다.
“네.”
기껏해야 조카뻘로 보이는 청년이 오만하게 굴었지만 호퍼는 공손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복을 입고 있어 신분이나 직위는 모르겠으나 온몸에서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와 태도만 봐도 군의 고위 간부로 보였다.
“왜?”
“사실 베이커 부인이….”
설명하려는 순간 남자가 픽, 코웃음을 쳤다.
“그 여자, 혹시 제 이름을 메리 베이커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레온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치미는 부아를 삭였다. 그 여자, 마치 그가 이곳을 추적해 낼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친절하게 조롱의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계속해.”
“네, 실은 부인이 계약을 한두 달 정도 더 연장하고 싶어 했지만 집주인이 그렇게 짧은 계약은 여름철에만 가능하다며 퇴짜를 놓았죠.”
그 후로 아파트는 계약이 되지 않아 줄곧 비어 있는 상태였다.
레온은 또 한 번 화를 삭여야 했다. 계약이 연장되기만 했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레이스와 아이를 되찾아 1년이 가까워져 가는 추적을 끝냈을 것이다.
그래도 절망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반년의 고통은 끝이 난 셈이었으니. 그레이스도, 아이도 살아 있다. 고작 그 한 가지를 알아내는 데 지난 반년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는 혼자 살았나?”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퇴거할 때 아이를 데리고 갔겠지?”
중개인은 그런 당연한 걸 묻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
또 한 가지를 더 알아냈다. 그레이스는 그의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 그 여자를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놓치고도 웃음이 나오는 건 그 덕이었다.
역시, 그 외로운 여자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아이를 버리지 못하는 거다. 그에게서 도망치더라도 아이라는 족쇄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닐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족쇄는 무거워진다. 그러다 결국 잡히게 되겠지.
레온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그건 모릅니다. 제가 근처의 다른 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지만 베이커 부인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어디로 갔을까.
최종 목적지는 안다. 컬럼비아에 있는 이모에게 가려 할 것이다. 모든 항구의 출입국 사무소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으나 수배된 여자가 나타났다는 신고는 아직 없었다.
그 여자, 대체 언제 출국하려는 건지. 레온은 작년 성탄절 즈음 별채에 검진을 하러 왔던 의사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생후 6개월이면 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해도 될 시기였다.
슬슬 그 여자가 덫으로 들어올 때가 다가오는 건가.
질문을 몇 가지 더 던졌지만 중개인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계약이나 금괴 매입을 위해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고 하니 그럴 법도 했다. 레온은 중개인을 내보내고 캠벨에게 명령했다.
“가서 이웃들 탐문해.”
남의 집 문을 두드리기에는 늦은 시각이었지만 모두 장교복을 보는 순간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묻는 말에 순순히 답했다.
“혼자 살았으며 거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끔 아이를 안고 외출하는 걸 본 적은 있으나 성별이나 이름 같은 건 알지 못한답니다. 맞은편 집에 사는 여자가 말하길 매일 하녀가 드나들었다니 하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여기 남아서 하녀를 찾도록. 또 한 가지, 해가 뜨면 등록소로 가 베이커라는 성으로 지난 5월 이후 출생 신고가 된 아이는 없는지 확인해.”
그러나 그 여자가 조롱조로 쓴 성을 아이에게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다른 성에 안젤라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여아가 있는지도 알아보도록.”
그레이스라면 존경했던 제 모친의 이름을 따서 여자아이의 이름을 지었을 거란 추측이었다. 다만 남자아이라면 어떤 이름을 붙였을지는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오랜 관습대로 그 여자가 첫아들에게 그의 이름을 붙이는 건, 물론 꽤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편으론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조사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지시를 마친 레온은 그의 아이와 여자가 살았던 빈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새 입주자를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를 해 둔 공간에는 여자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내내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침실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워졌다.
작은 침실에는 침대가 두 개였다. 2인용 침대, 그리고 난간이 달린 아기 침대. 문을 연 순간 아기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 건 착각이 아니었다.
아기 침대로 다가가는 레온의 입꼬리가 서서히 휘어 올라갔다. 그는 침대의 난간이 아이라도 되는 양 맨손으로 쓰다듬으며 텅 빈 매트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내 아이가 있었다.
그는 돌연 뒤돌아 침대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저곳에서 내 아이가 태어났겠지.
레온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매트리스를 쓰다듬으며 그는 모르는 순간들을 그려 보고 있자니 여전히 남아 있을 리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낯선 감정이 벅차올랐다. 간질간질한 전율 같던 것이 곧 채찍으로 변해 심장을 거칠게 후려쳤다.
“하….”
감정은 그대로 심장을 휘감고 옥죄어 오더니 욱신거릴 정도로 쥐어짰다. 분명 아파야 하는데, 웃음만 거듭 터져 나오려 하다니. 나쁘지 않았다.
레온은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나와 그레이스의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가 사랑하는 여자를 닮는 것도 좋지만 레온은 그를 빼닮은 아이를 그려 보았다. 그레이스가 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녀의 품에서는 그의 외양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그나 다름없는 존재를 그 여자가 품에서 떼어 놓지 못하다니. 어쩌면 그레이스의 가슴속에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나 그를 사랑하는 마음의 씨앗을 뿌려 줄지도 모른다. 비겁한 희망이 싹트는 기분이었다.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상상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레온은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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