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73)
내게 빌어봐 <173화>(173/240)
<173화>
완전히 떠나려는 거다. 그래서 여태 품고 있던 아이를 주려고 했겠지.
어디로 떠나려는지야 뻔했다. 컬럼비아로 가는 여객선을 타려면 지금 즈음이 올해의 마지막 기회였다. 왕도에서 항구로 가는 수단은 기차밖에 없었다.
기차역. 그레이스는 기차역으로 갔을 것이다.
현관 밖으로 나가려던 레온은 급히 돌아서 집사에게 지시했다.
“경호원들 또한 부르도록.”
그의 개인 경호를 담당하는 자들이 단숨에 중앙 홀에 집합했다.
“왕도 내 모든 기차역으로 흩어져 검은 유모차 혹은 생후 6개월가량의 아기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를 찾도록. 여자의 특징은 20대 중후반에 청록색 눈동자, 붉은색의 모자. 남부행 열차를 탈 가능성이 높으니 샅샅이 뒤지고 수소문해. 당장.”
레온은 명령을 내리자마자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그레이스가 걸어갔던 방향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조금 전 본 그 모습을 찾아 창밖을 샅샅이 훑는 그의 심장이 거칠게 질주했다.
그레이스를 보았다. 먼발치에서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만 거의 1년 만에 그레이스가 내 앞에 나타났다.
빌어먹을. 감을 믿었어야 했는데.
후회 속에서도 레온은 일말의 환희를 느꼈다.
그레이스가 아이를 다시 찾아갔다. 아이를 보지 못한 건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여자가 그의 아이를 품에서 놓지 못한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레이스에 관한 수많은 바람 중 적어도 하나는 그의 뜻대로 된 셈이니.
창밖을 계속해서 살피던 레온은 문득 눈매를 날카롭게 좁혔다. 그런데 그 여자 왜 이쪽으로 간 걸까. 이 방향으로 가면 중앙역이 나오지 않는다. 남쪽으로 가는 길이니 남부역으로 갔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해답이 되긴커녕 의문만 더했다.
가까운 중앙역을 두고 굳이 먼 곳으로 가는 이유는 뭘까.
º º º
아침 8시, 업무 시간이 되자 등록소 정문의 자물쇠를 연 경비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마자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물러서자 젊은 여자가 검은 유모차를 밀고 들어왔다. 비장한 각오라도 한 얼굴이었다.
경비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정말로 비장한 각오를 한 끝에 딸의 출생을 신고하러 등록소로 왔으니.
“출생 신고를 하러 왔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카운터 뒤에 앉은 직원 중 그나마 덜 깐깐해 보이는 중년의 여직원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커피를 홀짝이던 여자가 카운터 위로 고개를 쭉 빼더니 유모차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아기에게 눈길이 닿는 순간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어머, 예뻐라.”
그레이스는 이젠 모든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린 덕에 당당하게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 여자는 표정을 공무원답게 딱딱하게 고치더니 물었다.
“혼인 증명서는 가져왔나요.”
“어… 그런 건 없는데요.”
여태 등록소에 와 본 건 가짜 신분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건을 훔치려고 청소부인 척 잠입했을 때뿐이었다. 그러니 출생 신고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 리가 없었다.
없다는 말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여자가 눈을 깜빡이자 그레이스는 급히 핑계를 만들어 냈다.
“시골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목사님께서 그런 건 안 주시던걸요.”
그럴듯한 핑계였는지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시골의 행정을 중얼중얼 비난했다.
“이런… 그러면 출생 등록이 안 되는데….”
그레이스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혼자 잘 놀고 있는 딸을 안아 올렸다.
“어떡해, 아가. 등록이 안 된대. 오늘은 꼭 해 주려 했는데.”
어리둥절한 아기를 꼭 끌어안고 훌쩍였다. 직원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비치자 그레이스는 중년의 기혼녀라면 공감할 하소연을 쏟아 내며 있지도 않은 남편을 헐뜯었다.
“가장이란 남자가 얼마나 게으른지 딸이 태어난 지 여덟 달이 되도록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거 있죠?”
“저런, 사내들이 참 그런 일엔 게을러요. 그러면서 맥주가 다 떨어지면 나더러 게으르다고 욕하지.”
“그 맥주를 다 누가 마신 건데 말이죠.”
“맞아, 맞아.”
“그 남자, 분명 출생 신고를 했다길래 전 그런 줄 감쪽같이 속고 있다가 어제야 알았던 거죠.”
“세상에 거짓말까지….”
“정말 세상에 무슨 이런 아버지가 다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 왜 그 무책임한 남자랑 결혼을 해서…. 아니야, 아가. 그래도 널 만나서 기뻐.”
아기가 왜 우냐고 묻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레이스의 뺨에 작은 손을 서툴게 문댔다. 눈물을 닦아 주려는 것 같았지만 힘 조절이 엉성한 탓에 뺨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아가. 엄만 괜찮아.”
그녀는 아기를 토닥거리며 불쌍한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에서 비치던 곤란하다는 기색이 벌써 ‘딱하다’로 변해 있었다. 거의 다 넘어왔단 뜻이었다.
“어제 하숙집이 떠나가라 싸우고 저라도 우리 딸을 등록해 주겠다고 새벽부터 와서 밖에 앉아 기다린 건데… 흑….”
“어쩌면 좋아. 이 추운 날에….”
여자가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두꺼운 기저귀 탓에 빵빵한 아기 엉덩이를 안타깝다는 듯 두드리더니 중얼거렸다.
“아휴… 여기서 혼인 신고도 할 수는 있지만 원랜 남편을 데려와야 하는데….”
“그 인간은 밤새 술을 마셨으니 지금 코를 골면서 자고 있을 거예요.”
소매 끝으로 가짜 눈물을 훔친 그레이스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척 핸드백 안을 뒤적이며 물었다.
“남편 신분증은 있는데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어떻게 되고도 남는 일이었다. 그레이스의 연기에 넘어온 직원이 혼인 신고용 양식을 만년필과 함께 내어 주었다.
그레이스는 신부와 신랑의 정보를 채워 직원에게 신분증 두 개와 함께 돌려주었다. 신부는 그녀가 내일 출국을 시도할 때 쓸 가짜 신원이었으며, 신랑은 원래 출국 때 쓰려던 가짜 신원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남자로 변장해 출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데려가기로 결심하면서 남장은 포기해야 했다. 남자 혼자 아기를 데리고 여행하는 건 수상해 보일 테니.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를 모자챙 아래에서 만지작거리며 직원의 눈치를 살피던 그레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나 자신과 결혼하는 셈이라니.
그녀는 유모차에 앉아 이 낯선 곳의 구석구석으로 커다란 눈을 굴리는 아기에게 웃어 주며 다짐했다.
내가 엄마도, 아빠도 해 줄게.
아직 그레이스의 실력은 죽지 않았다. 신분증이 감쪽같았는지 직원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혼인 증명서에 등록소의 스탬프를 찍었다. 신부의 신분증에 줄을 긋고 성을 남편의 성으로 고치는 것도 잊지 않더니 증명서와 신분증 두 개를 카운터에 놓았다.
그다음은 이곳에 온 목적인 출생 신고를 할 차례였다. 신고 양식의 빈칸을 채워 나가던 그레이스는 제일 위에 있는 칸 하나를 채우지 못하고 망설이다 직원에게 물었다.
“요즘 가장 흔한 이름이 뭔가요?”
“엘리자베스.”
“아….”
올해 초 그레이스의 딸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난 공주의 이름이었다.
“그건 피하도록 해요. 너무 흔해서 4, 5년 후에 탁아소에서 엘리자베스라고 외치면 스무 명은 돌아볼걸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빈칸을 주저 없이 채웠다.
“…….”
빠짐없이 채운 신고서를 받아 든 직원의 눈썹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엘리자베스.”
흔하디흔해 피하라는 이름을 굳이 하나뿐인 딸에게 붙인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야 가장 흔하니까.
그레이스도 물론 예쁘고 특별한 이름을 딸에게 지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리고 아마 신대륙에서도 두 사람은 그 남자에게 쫓기는 신세일 것이다. 저야 이름을 바꿔 가며 사는 데 익숙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 이름이 자주 바뀌면 혼란스러워할 테니 일부러 가장 흔해 빠진 이름을 고른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저처럼 이름이 여러 개인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흠, 아이 엄마 마음에 든다면야.”
직원이 출생증명서를 발급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스는 문득 든 깨달음에 실소했다.
‘엘리자베스라니, 그 남자 모친의 이름이잖아?’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윈스턴 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래로 처지던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곧 다시 휘어 올라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역발상이자 교란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 남자, 그레이스가 제 모친의 이름을 아이에게 절대로 붙일 리 없을 거라 믿을 테니.
“자, 여기 있어요.”
직원이 보람된 일을 했다는 미소를 크게 지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출생증명서를 받아 읽어 본 그레이스는 아이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껏 여태 외면했던 엄마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출생 신고를 했지만 이름도, 성도 모두 도망 다니기 편한 대로만 정했다.
심지어 생일마저 그 남자에게 편지로 알려 줘 버린 탓에 엉뚱한 걸 써 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추적을 피하기 쉬워지라고 두 달이나 앞당겼다.
벌써 몹쓸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야. 그 남자가 몹쓸 아빠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