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77)
내게 빌어봐 <177화>(177/240)
<177화>
“우리 아이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어?”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누가 그래? 만들어 줄 거야! 너보다 훨씬 좋은 아빠 후보가 세상엔 넘쳐나거든?”
“기회도 한번 주지 않고 내가 어떤 아빠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글러 먹은 남자인 건 이미 잘 알아.”
그레이스는 계단참을 재빠르게 돌며 위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굴욕감이 심장을 한바탕 할퀴고 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치는 찰나에 보아도 티가 날 정도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제야 그레이스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저 남자를 괴롭히며 느끼는 뒤틀린 희열은 그가 저를 고문하며 느끼던 희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은 똑같은 괴물이, 저 남자는 이해할 수 있는 괴물이 되어 버리자 그레이스의 손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야, 난 똑같지 않아. 난 당한 일을 갚아 주는 것뿐이야.
난간을 꽉 붙들며 어느 층의 계단참을 휙 도는 찰나였다.
“그레이스, 제발!”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린다 싶더니 남자의 손끝이 그녀의 손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화들짝 놀라 난간에서 손을 떼는 순간 그레이스는 중심을 잃었다.
“헉!”
안 돼.
아이를 감싸며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찰나 그녀의 손목을 윈스턴이 낚아채듯이 움켜쥐었다. 안도하자마자 붙들린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아파….”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더니 익숙한 향수 냄새가 숨길로 쏟아져 들어오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다 다쳐.”
남자는 그레이스를 당겨 품에 안고 귓가에 타이르듯이 속삭였다. 가쁜 숨소리에서 희열이 느껴졌다.
“아이까지 위험하게.”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 사람의 사이에 낀 아이가 담요 아래에서 옹알대며 꼼지락거렸다.
“정신이 있는 건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 남자를 노려보던 그레이스는 악문 잇새로 사납게 씹어 뱉었다.
“내가 안 미치게 생겼어?”
“나도. 나도 미치겠어.”
미치겠다는 남자가 입꼬리를 크게 올려 웃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좋아 미치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뒷덜미를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더니 모자 속으로 들어왔다. 머리칼 사이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그레이스는 칼에 찔린 것처럼 몸을 움찔 들썩였다.
“짧아. 남장이라도 하려 한 건가?”
나직한 웃음이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이 얼굴, 이 몸매로 남장이라니. 누가 속아 넘어갈지.”
팔꿈치를 쥐고 있던 다른 손이 팔을 천천히 더듬어 올라왔다. 세 겹의 천도 소용없었다. 손길이 스친 자리에 소름이 아스스하게 돋아났다. 그레이스는 가쁜 숨을 죽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네가 나를 벌레라도 보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난 그것마저 좋은 걸 보면….”
선이 날카로운 남자의 턱 아래에서 굵게 도드라진 목울대가 크게 들썩이는 순간 그레이스의 심장도 들썩였다.
“난 네게 제대로 미친 거지.”
“…….”
다행이네. 그게 내가 바라던 바야.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복수의 절반일 뿐이야.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면 복수는 완성될 수 없었다.
복수가 여전히 미완이라는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빛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밝디밝은 안색에, 1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완벽한 모습만 봐도 이 남자가 그간 진심으로 괴로워하긴 했는지 의문이었다. 사람을 쫓는 일을 무엇보다도 즐기는 이 미치광이에겐 그녀를 쫓는 일이 흥미진진한 게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땀투성이에 머리는 남자처럼 짧게 자르고, 블라우스는 아이가 남긴 얼룩과 주름으로 엉망인 제가 더 비참한 꼴이었다.
결국 예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잖아. 실망을 넘어 화가 나려 했다.
그레이스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말아 쥐는 사이 남자는 의도가 다분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노골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끝이 식은땀으로 끈적하게 젖은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올라오더니 뜨거운 손바닥이 뺨을 뒤덮으며 엄지가 그레이스의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남자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 맹수가 입맛을 다시자 그레이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새빨간 입술이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손에 맞닿은 살갗은 따뜻하고 촉촉했다. 그레이스의 몸이 뜨겁다. 꿈속의 차가운 몸이 아니었다.
악몽 속에서 죽은 여자만을 만지다 마침내 살아 있는 여자를 만진다. 지금이 도리어 꿈처럼 느껴졌다.
레온은 달콤한 숨을 쉴 새 없이 뱉는 입술로 고개를 숙였다. 꿈같았다. 입술에 뜨거운 살점 대신 차가운 금속이 닿았으니. 정말 꿈처럼.
“당장 놔.”
그레이스는 총구를 남자의 입술에 짓누르며 위협했다. 그는 시선을 권총으로 잠시 내렸다가 올리더니 그레이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넌 날 못 죽여. 아니, 죽일 생각도 없잖아.’
조롱기 어린 목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듯했다. 과연 그럴까. 잘 보라는 듯 그립을 쥐고 있던 엄지를 슬라이드 아래의 안전장치로 가져가던 때였다.
미친놈.
남자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새하얀 이가 총열의 끝을 물었다. 그는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혀끝으로 그녀의 몸을 애무할 때처럼 총구를 핥아 올렸다. 그 찰나 저 부드럽고 끈적한 살점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자 그레이스는 움찔, 숨을 멈췄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남자가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미친 새끼.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이어지던 때였다.
“아우-.”
엘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린 그레이스는 총구를 남자의 입에서 뽑아냈다.
이것 봐. 넌 날 못 죽여.
레온이 눈을 뜨는 찰나였다. 권총 그립의 바닥이 그의 눈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안면을 후려치려는 그립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레이스는 그 틈에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꾀를 부린 모양이지만 레온은 도리어 총을 쥔 손목을 낚아채 안쪽을 엄지로 세게 눌렀다.
“아앗!”
손이 저절로 벌어지며 권총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마자 레온은 그걸 옆으로 걷어찼다. 권총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카펫 위로 미끄러지더니 계단 옆 복도의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아프다고 했잖아, 이 개자식아!”
“그래. 나도 사랑해, 자기야.”
남자는 그레이스의 손목을 던지듯 놓아주자마자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곧바로 다른 손이 치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미친놈,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서 뭐 하는 거야?”
“무장 해제. 제발 전쟁은 관두고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뜻이지.”
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청소부가 경악에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더니 입을 틀어막으며 황급히 사라졌다. 경비원을 부르려는 걸까. 그래 봤자 이 남자의 신분을 알면 간섭하지 않는 걸 넘어 도리어 그레이스를 이 남자의 객실에 집어넣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사이 남자는 그레이스가 주먹질을 하든 할퀴든 신음 한번 내지 않고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더니 기어코 군용 단검의 홀스터를 풀어 계단 아래로 던졌다.
“몸속도 수색해 봐야겠군.”
“흣….”
블루머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순간 그레이스는 얼어붙었다.
“물론 그건 침대에서.”
다행히 손은 들어오자마자 빠져나갔다. 치마 밖으로 나온 손이 턱을 밀어 올리자 그레이스는 남자와 억지로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정염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레온 윈스턴은 벼랑 끝에 선 눈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 벼랑 끝에 선 사람이 누구인데. 부아가 치밀었다.
“대화부터 해.”
“대화 같은 소리 집어치워.”
남자가 한숨을 짧게 토해내더니 막막한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다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말해줘. 네 용서를 받으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뭐?”
그레이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 용서라니 꿈도 커. 그리고 잊지 마. 난 네게 관심도 원망도 없어.”
코웃음을 치는 그레이스를 길 잃은 눈으로 바라보며 침묵하던 남자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네가 없는 것보단 낫지.”
팔이 허리를 옥죄어 왔다. 남자가 그레이스를 끌어안고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그녀의 귓가를 안도의 한숨이 스쳤다.
이제 저항할 수단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꼼짝없이 이 남자의 객실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절망하는 때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으아아앙!”
“미쳤어? 아기 숨 막혀!”
남자가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레이스는 그의 다리 사이로 왼쪽 무릎을 찍어 올렸다. 맞히는 데는 실패했지만 남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가 틈을 보이자마자 그레이스는 복도로 뛰어가 권총을 집어 들었다.
“하… 정말 미치겠네.”
레온이 지친 한숨을 내쉬며 한 발짝 다가가려 하자마자 철컥,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졌다. 그레이스는 오지 말란 경고 한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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