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82)
내게 빌어봐 <182화>(182/240)
<182화>
왜 이딴 꿈을 계속 꾸는 거야?
베개에 파묻은 얼굴이 뜨거웠다.
“그레이스.”
꿈속에서 그 남자가 애정의 상징과 욕정의 상징을 그녀의 몸에 한꺼번에 끼우며 귓가에 애무하듯이 쏟아 낸 속삭임이 집요하게 뇌리를 맴돌았다.
네가 언제부터 나를 그레이스라고 불렀다고 당당하게 불러 대는 거야?
2년 전 여객선에서 마주친 후로 그 남자는 꿈에서 그녀를 그레이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그때 잡혔더라면, 하는 꿈을 꿨다. 가장 불안했던 때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싶었지만 요즘 갈수록 꿈이 음란해지는 이유는 뭘까.
욕구 불만인가?
제게 그런 욕구는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가진 원초적인 욕구라고 생각했을 때 야릇한 꿈을 꾸는 건 정상이라고 친다 해도 조금 전 꾼 건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빠와 아이가 나눠 쓰라고 신께서 젖을 두 쪽으로 만드셨는지도 모르겠군.”
심지어 이 변태적인 말은 그 남자가 실제로 한 적도 없었다. 순전히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란 거다.
“으아….”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야. 난 그런 변태가 아니야. 그냥 그 남자가 하고도 남을 말이라서 꿈에 나온 것뿐이라니까? 내가 그 남자를 쓸데없이 잘 아는 것뿐이라서 그래.
“엄마 모 해?”
괴로워하는데 그녀의 품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엘리가 고개를 불쑥 들려 했다. 그레이스는 아이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감싸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30분만.”
부끄러워서 엘리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º º º
“…데이지.”
아니, 네 이름은 그레이스야.
“더, 더러운 돼지 새끼!”
가지 마!
레온은 도망치려는 그레이스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 검게만 보이는 아버지의 실루엣을 향해 외쳤다.
당장 돌아가요!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샐리 브리스톨이라고 합니다.”
네 이름은 그레이스라고 몇 번을 말해. 그리고 넌 하녀가 아닌 첩자야.
“너 설마 나를 좋아해?”
그래, 좋아해. 아니, 사랑해.
레온은 그레이스의 가느다란 목에 감긴 올가미를 걷어 냈다.
넌 고문실에 어울리지 않아. 우리 함께 네 오빠에게 찾아가. 네가 모친의 일기를 읽고 진실에 눈을 떠 복수를 하는 그 모든 순간, 난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모든 굴레를 마침내 벗어던지는 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석양이 지는 해변에서 나를 기다려 줘. 우리 딸과 나란히.
하지만 그레이스는 사라졌다.
모든 실수를 되돌아보며 다른 선택을 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으니.
그나마 이 꿈을 수없이 반복한 게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는지 그레이스와의 마지막 순간만은 그가 원하던 결과로 바꿀 수 있었다.
결국 배에서 도망치지 못한 그레이스가 제 발로 그의 객실에 찾아왔다. 발코니 밖에서는 검푸른 바다에 흰 물거품이 거칠게 일고, 침실에선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흐흑….”
레온은 아이를 안은 채 서럽게 우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것이 과연 내가 원하던 결과가 맞는 걸까.
난 네가 없으면 끝난 인생인데 넌 내가 있어서 인생이 끝난 것처럼 운다.
언젠가 그런 결심을 했었다. 이 여자가 다시 제 앞에서 우는 날, 비웃지 않고 안아 주리라고. 하지만 레온은 그러지 못했다. 그레이스를 울게 만든 건 자신이었으니.
어떠한 말도, 손길도 건네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그에게….
“아우-.”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기가 손을 내밀었다.
“…….”
불러 보고 싶었으나 레온은 그러지 못했다.
안녕, 내 딸. 이름이 뭐야?
그렇게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포동포동한 손이라도 이번에는 잡아 보려던 찰나였다.
“…….”
손이 닿기 직전 잠에서 깨어 버렸다.
레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시야 속의 창문 너머는 푸르스름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르디이른 아침이었다.
왜 벌써 깬 건지. 용량을 늘려야 하나.
이르건 아니건, 예전의 그는 눈을 뜨면 곧바로 침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살아 있는 인간의 구실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손에 닿는 시트가 싸늘했다. 저도 모르게 옆의 빈자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레온은 냉기에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손을 뗐다. 습관적으로 침대 한쪽을 비워 두는 자신이 우스웠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를 비웃는 건 그 여자의 몫이었으니.
비웃을 거면 내 앞에서 비웃어.
조롱 어린 키스를 날리던 그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자 오기가 생겨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조롱이라도 한 번 더 받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욕실로 들어서고도 이 모든 것이 꿈같은 몽롱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언제 튼 거지?
레온은 세면대 속으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그는 세면대 위의 선반에 놓인 유리병을 노려보았다. ‘바르비탈’이라는 라벨이 붙은 약병에는 하얀 알약이 들어 있었다. 새 병을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바닥이 보였다.
인간은 왜 잠이 필요한 건지.
이젠 수면제 없이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바르비탈 탓에 그는 매일 밤 꿈을 꾸었다. 악몽이든 행복한 꿈이든, 깨고 나면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찰그락. 약병을 낚아채자 속에 든 알약들이 거슬리는 비명을 질렀다. 욕실 구석의 쓰레기통 속으로 병을 내던지려 손을 든 자세 그대로 레온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못된 여자가 사랑스럽게 물었다.
“불행해?”
꿈에선 행복했어.
달칵. 약병은 다시 선반으로 되돌아갔다.
이 빌어먹을 바르비탈이 없으면 매일 밤 꿈을 꾸지 못한다. 악몽이든 행복한 꿈이든, 그는 꿈이 아니면 그 여자와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정말 운이 좋은 날에는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을 꿈에서 되풀이했다. 2년 전 항구에서 그레이스와 아이를 놓쳤던 그날 말이다.
결과가 불행한데 과정이, 그 여자와 아이를 안았던 그 단 한순간이 행복했었기에 그날은 우습게도 그의 생에 행복했던 날로 남았다.
체취와 온기, 모습, 그리고 목소리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모든 감각이 현실에서는 희미해졌으나 약 기운에 취해 꿈을 꿀 때에는 그 순간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그래서 저 저주받은 약을 레온은 오늘도 끊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꿈도 제법 행복한 축에 들었다.
행복했다니. 그레이스가 우는 모습을 본 걸로 행복한 꿈이었다고 정의하다니.
흐르는 물로 얼굴을 씻어 내린 레온은 조소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무너져 반밖에 남지 않은 거울 속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녹이 슬고 금이 간 얼굴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표정이 없어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그 여자가 아직 죽지 않아 죽을 수 없지만 그 여자가 곁에 없어 산 것도 아닌 자신은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º º º
엘리는 유독 아침잠이 없었다.
“엄마, 이러나아!”
“그럼 딱 5분만.”
“안 대.”
‘30분만’을 ‘10분만’으로 줄이고, ‘10분만’을 ‘5분만’으로 줄였지만 상대는 타협을 몰랐다. 고집도 세고 자비도 없는 게 딱 제 아빠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아야만 했다.
“엄마도 일어나고 싶은데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해서 엄마가 녹아 버렸어.”
그레이스도 아침잠이 없는 편이다만 자의로 일찍 일어나는 것과 타의로 일어나야 하는 건 달랐다. 늦가을의 포근한 침대 속은 늪이었다. 계속 뭉그적댔더니 엘리가 일어서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럼 엄마는 집 지켜. 엘리가 가따 오께.”
“으응?”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이불 밖으로 빼꼼히 눈을 내밀었다. 엄마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아이가 두 살 반 정도가 되자 슬슬 독립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벌써 저런 소릴 한다고?
엘리는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침대 아래로 영차영차 내려가더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도도도 뛰어갔다. 정말 혼자 나갈 생각인지 다시 침실로 돌아온 아이는 목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외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입혀죠.”
참 나, 어디까지 하나 보자. 픽 웃으며 잠옷 위에 외투를 입히고 단추를 여며 주었더니 엘리가 협탁으로 몸을 돌렸다.
“엄마는 무슨 빵 머그 꺼야?”
“어? 엘리 지금 뭐 해?”
“돈.”
빵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아이가 협탁에 놓인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어 가자 그레이스는 백기를 들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