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85)
내게 빌어봐 <185화>(185/240)
<185화>
잡지와 신문은 보지도 않고 말아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빈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비친 여자를 보고 그레이스는 픽 웃었다. 금발에, 입술을 붉게 칠하고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 제 모습은 여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뭐, 그래도 예쁘네.
주말에 백화점에 가면 새 귀걸이도 사 볼까?
그레이스는 귓불 아래로 늘어진 물방울 모양의 진주 귀걸이를 창문에 비춰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더 화려하고 큰 걸 시도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
선글라스는 쓰지 않았다. 눈을 가리고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다 이젠 직장 밖에서도 쓰지 않게 됐다. 어차피 사시사철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게 더 수상쩍을 거다.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은 지 2년이 넘어가니 아무래도 느슨해졌다. 요즘은 실종자 전단도 보이지 않았다.
이젠 진짜 포기했나? 그래, 저번에 질릴 만도 했지.
손끝이 핸드백에서 삐져나온 신문지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결혼 임박이라.
결혼하려는 걸 보면 날 더는 쫓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럼 난 엘리를 데리고 떠날 거야. 얼른 결혼해 버려.
전차는 벌판 한가운데의 거대한 영화 세트장 앞에서 멈춰 섰다.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그레이스도 전차에서 내려 가장 높은 건물로 들어갔다.
최상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고풍스러운 문을 열자 먼저 와 있던 상사가 책상 뒤에서 커피 잔을 기울이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애나.”
“좋은 아침이에요, 테이트 부인.”
그레이스는 방 한가운데의 손님용 소파로 곧장 다가가 핸드백을 열었다. 오는 길에 산 잡지와 타블로이드지를 꺼내 커피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는데 때마침 출근한 다른 사무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애나가 잡지를 사 오는 차례가 아닐 텐데?”
“어… 그냥 겸사겸사….”
“가십지?”
테이트 부인이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타블로이드를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애나가 읽고 싶었나 봐.”
“그건 아니고, 하하….”
그레이스는 멋쩍게 웃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타블로이드지를 접어 테이블에 올려 두고 잽싸게 제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는 어젯밤 사장이 남기고 간 듯한 메모가 있었다. 이 편지를 타이핑해 오전 중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맨 끝에 굵게 휘갈겨 쓰여 있자 그레이스는 영화사 로고가 금박으로 멋들어지게 새겨진 고급 종이를 꺼내 타자기에 끼워 넣었다.
그레이스가 일하는 곳은 영화사였다. 원래는 저 밑의 2층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로 취직했다. 그런데 한 달 전 어쩌다 사장 비서인 테이트 부인의 눈에 들어서 사장 비서실의 사무 보조로 발탁된 거였다.
벌이가 훨씬 좋아 거절하지 않았다. 비서 보조 따위가 그 남자와 마주칠 리도 없을 테고.
돈만 벌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으로 직장을 가져 본 건 처음이지만 역시나 불순하게 가명을 써야 했다. 혹시 모르니 사는 곳도 엉뚱하게 댔다.
[블랙번의 영웅: 최후의 승자]그 이유인 영화 포스터를 그레이스는 잠시 노려보다 타자기로 시선을 내렸다.
[윈스턴 백작과의 티타임]그레이스는 휴게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테이트 부인의 손에 들린 잡지 표지를 노려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저 잡지 기자가 어떻다고 날조해 놓았는지는 읽어 보지 않아 모르겠다만 그 남자와 티타임을 강제로 수도 없이 가져 본 사람으로서 별로 추천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저게 도색 잡지였으면 사실에 가장 가깝겠지.
속으로 빈정대는데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잡지를 보던 테이트 부인이 감탄했다.
“정말이지, 멋있어. 타고난 영화 주인공 감이라니까?”
타고난 주인공이라니. 타고난 악역이면 몰라도.
그레이스는 또 빈정대며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먹었다.
블랙번 소탕 작전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빈민가에 숨어 육아만 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랐던 그레이스는 고용 계약서에 서명하고서야 제가 하필이면 그 영화의 제작사에 취직했다는 걸 알았다.
‘악연도 참 질기지.’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살 때가 좋았다. 그땐 신문 가판대와 라디오에서 저 남자를 매일같이 보고 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블랙번의 영웅’이 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화제를 몰고 다니는지. 군인이면 맡은 임무나 조용히 할 것이지 왜 언론과 노닥대는 걸까.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젊은데도 어쩜 이렇게 능력이 뛰어난지 몰라.”
테이트 부인이 또 그 개자식에게 찬사를 퍼붓자 그레이스는 사과를 크게 베어 물고 와작와작 씹었다.
소탕에 성공한 게 다 누구 능력 덕인데.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 남자의 능력 덕이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평생을 가족이라고 여기고 헌신했던 이들을 단번에 배신하게 만든 건 결국 그 남자였으니.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했잖아요.”
다른 여사무원의 말에 테이트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잘생겼다, 이 정도가 아니야. 사진보다….”
부인은 잡지를 돌려 굳이 그레이스가 이미 잘 아는 얼굴을 보여 주더니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심지어는 본인 역을 맡은 배우보다도 훨씬 잘생겼다니까? 보고 있으면 숨이 멎을 정도야.”
숨이 멎기는 하지.
그레이스의 얼굴이 심드렁한 이유를 오해한 상사가 덧붙였다.
“애나가 실물을 못 봐서 그래.”
그 남자의 실물을 나체까지 빠짐없이 본 유일한 사람은 그저 입술을 꾹 깨물며 실소를 참았다.
2년여 전 영화 제작 논의가 오가던 때에 사장을 수행하다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 테이트 부인은 오늘도 볼을 붉히며 찬사를 넘어 찬양을 시작했다.
“타고난 기품이 있어. 태도가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게감이 있는 데다 언변도 굉장히 뛰어나더라니까? 세련되고 우아해, 정말.”
겉은 고귀한 그 남자가 제 앞에서만은 어떻게 천박한 짐승으로 돌변하는지를 너무도 잘 아는 그레이스의 속이 뒤틀렸다.
“매력이 철철 넘친단 말이지. 그날부로 내 사전에서 매력의 정의는 레온 윈스턴 백작이잖아.”
입맛이 떨어진 그레이스는 먹던 사과를 놓았다. 울렁대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차를 한 모금 넘기던 순간이었다.
“금욕적인 군인이어서 도리어 야한 남자야.”
“푸웁….”
마시던 차를 뿜어 버렸다.
“괜찮아?”
“응, 으응.”
옆자리의 동료가 냅킨을 내밀고, 테이트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레이스는 입가를 얼른 닦고 찻잔을 챙겨 일어섰다.
금욕적…. 뭐, 겉보기엔 그렇지.
싱크대에서 찻잔을 헹구는데 테이트 부인이 멋도 모르고 그녀를 놀렸다.
“어머, 애나는 아이도 있으면서 아직 모르나 봐. 금욕의 화신인 남자가 침대에서 절제를 모르는 짐승으로 돌변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데.”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인 거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티 타월로 찻잔을 닦는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오늘 아침의 꿈이 되풀이됐다.
미쳤어, 정말.
“죽기 전에 한번쯤은 그런 남자의 권총에….”
테이트 부인은 권총이란 말을 은밀하게 속삭이며 장난기 많은 10대 소녀처럼 웃었다.
“맞아 봐야 하는데.”
테이트 부인이 말하는 ‘권총’부터 진짜 권총까지. 그 남자가 그녀에게 휘둘렀던 그 모든 게 떠오르자 무릎 뒤가 찌르르하게 저렸다. 그레이스는 인상을 팍 구긴 채 찻잔 위로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진짜, 그 저질스러운 미치광이….
테이트 부인이 쓸데없이 권총이란 소리를 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그레이스가 겨눈 권총의 끝을 물고선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혀끝으로 총구를 핥아 올렸다. 그녀의 몸을 애무할 때처럼.
망할….
그때처럼 또 다리 사이가 찌릿했다.
나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는데 뒤에서 동료가 소리쳤다.
“애나! 넘쳐!”
“아, 헉!”
찻잔에서 콸콸 넘친 차가 싱크대 배수구까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나사가 빠졌어? 으응?”
“아… 딸이 꼭두새벽부터 깨워서요, 하하.”
그레이스는 결국 차를 마시는 걸 포기하고 빈손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나저나 난 시사회 때 윈스턴 백작의 실물을 또 보게 생겼지.”
“부러워라.”
테이트 부인의 자랑에 동료가 시무룩해졌다. 그레이스는 태연하게 먹던 걸 정리했다. 한 달 후 열리는 시사회에 보조 사무원은 필요 없어 다행이었다.
“대공녀랑 오겠죠?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지 않나요?”
동료가 앞에 놓인 타블로이드지를 펼치는 바람에 1면의 사진과 눈이 마주친 그레이스는 불에 덴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백작과 비교하자면 대공녀는 너무 평범한 얼굴이긴 하지. 그래도 애정 없는 정략결혼에 외모가 중요할까.”
“그렇지만 애정 없이 하는 결혼이 아닌 것 같던걸요.”
테이블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쓸어 모으던 그레이스의 손이 뚝 멎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태 윈스턴 백작의 이야기에 시큰둥하기만 하던 ‘애나’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는 걸 두 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