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88)
내게 빌어봐 <188화>(188/240)
<188화>
레온 윈스턴은 모든 걸 가졌으나 그레이스 리들만은 갖지 못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다.
그는 그렇게 바로잡은 잡지를 곧바로 활활 타는 벽난로에 던져 넣고 만년필을 피어스에게 돌려주었다. 본관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레온은 비웃었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더러 모든 걸 가졌다고 한다. 고귀한 귀족이자 존경받는 상원 의원, 위대한 영웅, 막대한 권한을 가진 군 지휘관, 그리고 유능한 사업가. 남자가 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성공을 젊은 나이에 모조리 이루었으니.
그러나 그런 것은 달성하려는 목표이지 가지려는 목적이 아니다. 기나긴 여정의 경유지처럼 달성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는 것들이었다. 그의 삶에서 의미 있는 종착지는 따로 있었다.
본관의 정문 밖으로 나선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에 붉고 노란 낙엽이 흩날렸다.
가을이다.
그 여자가 지독한 입덧을 겪으며 무너졌던, 그를 사랑하는 척 깜찍하고도 잔인한 짓을 했던, 그리고 숙녀와 요부의 두 얼굴로 도망쳤던 가을이 돌아왔다.
고문의 계절이었다.
그는 종소리에 침을 흘리도록 훈련된 개처럼 가을의 냄새를 맡으며 그레이스의 새로운 고문을 기다렸다.
굶주린 개에게 뼈다귀를 던지듯이 쫓을 기회는 던져 대나 붙잡을 기회만은 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러웠다. 이젠 그 살점 하나 없는 뼈다귀마저 받지 못해 그는 말라 죽어 가고 있었다.
그레이스, 어서 뼈다귀를 던져. 어디든 좋아. 던지기만 해. 미친개가 쫓아가는 걸 지켜보며 비웃고 싶을 거 아니야.
같은 말을 되뇌는 사이 그의 걸음은 자연스레 별채로 향했다.
그 여자가 도망친 후 나눴던 대화를 수없이 곱씹은 끝에 레온은 한 가지 일관된 심리를 포착해 냈다.
난 이제 네게 아무런 원망도 관심도 없어.
그 언젠가의 통화에서 여자는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이런 소리를 했다.
나를 여전히 사랑해? 그래서 불행해?
비웃음까지 곁들여.
원망이 없다더니 원망을 가득 담은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이라며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부터 그를 떨치지 못했단 증거였다.
데이지도, 샐리도, 그레이스 리들도 죽었어. 네가 죽였어.
그러니 잊어.
잊으라더니 그가 죽였다고 원망했다. 잊으라며 잊지 말라고 했다.
네가 웃다가도 문득 나를 떠올리며 아파하길, 그렇게 평생 네 속에 내가 못처럼 박혀 빠지지 않기를.
내가 곧 너의 불행이라니 난 행복해.
정신 분열증 환자의 편지처럼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저를 잊으라며 저를 못 잊어 불행하길 바라다니.
돌아보면 뉴포트항에서도 그랬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게 급하면서도 멈춰 서서 그에게 상처를 줄 법한 말과 행동을 퍼부어 댔다.
난 이제 네게 아무런 원망도 관심도 없어.
웃기지 마. 네게서 원망과 관심의 냄새가 지독하리만치 진동하는데.
그레이스는 그에게 미련이 있다.
그것이 레온이 포착한 심리였다.
그 본질이 애정이 아닌 증오라 한들 상관없었다. 무엇도 아닐 바에야 증오라도 심어 두어 다행이다. 레온이 이제 희망을 걸고 매달릴 유일한 것이 바로 그 여자의 마음에서 지우고 싶던 감정이었다.
그레이스, 내가 너를 놓지 못하길 바라?
너도 나를 놓지 못하게 해 줄게. 어디에 있든 넌 내게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해.
그래서 택한 수단이 언론이었다.
이 왕국 어딘가에 있는 그레이스가 라디오를 켤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그의 얼굴을 끝없이 보고 그의 소식을 끝없이 들을 수밖에 없도록.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 오로지 행복한 모습만 보여 준다. 그를 악당이라고 믿는 여자의 앞에서 언론이 그를 영웅이라 찬양한다. 얼마나 속이 뒤틀릴지 보지 않아도 빤했다.
네가 참지 못하고 나타나 날 괴롭힐 때까지 난 널 괴롭힐 거야.
이제 나라는 오점은 네 완벽한 인생에서 사라져 줄게.
웃기는군. 내가 널 잊지 못하듯 너도 날 잊지 못해.
º º º
노먼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스튜디오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프레스콧 시에 있었다. 다음 달에 시사회가 열릴 파라무어 극장과는 고작 한 블록 떨어진, 번화가의 식당이었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갑작스레 예약하느라….”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노먼이 이런 소리를 하자 레스토랑을 구경하던 그레이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갑자기 저녁을 먹자고 한 제 잘못이죠.”
“잘못이라뇨. 갑작스럽게라도 애나와 데이트를 할 수 있어 저는 기쁜걸요.”
생글생글 웃는 남자에게 마주 웃어 주며 그레이스는 테이블 아래에서 허전한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퇴근하려 할 때 테이트 부인이 반지는 좀 빼고 가라며 어찌나 잔소리를 하던지. 거기다 상사가 홀로 신이 나 가슴이 푹 파인 드레스를 빌려준다는 걸 거절하느라 오후 내내 진땀을 뺐다.
“애나는 어디 살아요?”
“그린필드에 살아요.”
실은 스튜디오에서 그린필드로 가는 길에 있는 헤이즐 브룩에 살았다.
“갈 때 제 차로 데려다줄게요.”
“아,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돼요.”
“그럼 늦은 시각에 혼자 전차를 타고 가려고요?”
습관적으로 제가 사는 곳을 거짓으로 대어 버리고 곤란해졌다. 그레이스는 짧은 실랑이 후 말을 돌려 버렸다.
“노먼은 몇 살이라고 했었죠?”
“서른하나예요.”
그 남자와 같은 나이였다.
“혹시 결혼해 본 적은 있나요?”
“아뇨. 성공만 노리고 달리다 보니 결혼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네요. 이젠 성공을 이뤘으니 결혼을 생각할 때죠.”
“그렇구나.”
“애나는 사별했다고 그랬죠?”
“네.”
“이런, 마음이 아프네요.”
그다지 마음 아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남자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자 그레이스는 엉겁결에 손을 내어 주었다. 낯선 감촉과 체온에 기분이 이상해졌지만 버텼다.
그러다 저 멀리서 웨이터가 요리를 가져오는 게 보이자마자 손을 뺐다. 그 후론 식사를 하느라 대화가 끊겼다. 수프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클램 차우더를 한 스푼 뜨던 그레이스는 마주 앉은 남자를 힐끔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남자와 함께 출국하면 붙잡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야 깨달았다. 아주 중요한 걸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노먼.”
“네?”
“혹시… 이곳 말고 다른 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있나요?”
“어… 어디를 말하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첫 데이트에서 꺼내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화제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레이스는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서 꺼냈다.
“컬럼비아에 이모가 있어요. 금광 개발에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됐죠. 마천루도 있대요. 이모네 부부가 아이가 없으셔서 마침 혼자가 된 제게 계속 컬럼비아로 오라고 하시는데 딸이 조금 더 크면 거기로 가서 살까 싶어요.”
역시 첫 데이트에서 꺼낼 소리는 아니었는지 남자는 당황한 낯을 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 웃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신대륙에서 새 출발이라. 좋은 선택이군요.”
“…그렇죠.”
실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윈스턴이 설령 그레이스를 포기하더라도 이곳에서 살 순 없었다.
반군의 잔당이 거의 뿌리 뽑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간간이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근거지가 소탕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오르곤 했다. 거기다 죄질이 나쁘지 않은 이들은 수용소에서 몇 년만 살다 사회로 나올 것이다. 그들이 완전히 손을 씻었건 아니건, 그레이스는 그자들의 배신자였다.
그러니 결혼을 하려면 이곳을 떠날 생각이 있는 남자를 만나야 했다.
차라리 컬럼비아에 가서 결혼할 남자를 찾을걸 그랬나?
충동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 게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제가 너무 이르게 말을 꺼냈네요. 잊어 주세요.”
“아, 아닙니다.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바다 건너에도 유능한 홍보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회사는 많을 테고요.”
남자는 화제를 자연스레 제 경력으로 옮겨 갔다.
“자랑 같지만 홍보 일을 10년 넘게 하고 나니 이젠 어디서든 모셔 가려고 하더군요.”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겠죠. 그랜트 씨가 가장 아끼는 홍보 담당자시잖아요. 그나저나 여기서 오래 일하셨나 봐요.”
“여긴 이제 3년밖에 안 됐네요. 원래는 싱클레어 자동차 사에서 일했었는데….”
싱클레어?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 일이 있곤 싱클레어가의 회사가 줄줄이 도산 위기를 맞는 바람에 그랜트 픽쳐스로 옮겼죠.”
그제야 그레이스는 떠올렸다. 언젠가 고문실에 그 남자가 이상한 수사 기록을 가져와 물었었다. 존경받는 기업가 가문인 싱클레어가가 블랜차드의 무리와 한패인지를 말이다.
그러곤 그 모략 건에 시달린 남자가 한동안 고문실에 술을 가져오더니 급기야 고문실에 스스로를 감금하기까지 했었다.
정말이지 그레이스가 알던 탐욕스러운 악마, 레온 윈스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