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190)
내게 빌어봐 <190화>(190/240)
<190화>
“보모에게 전화부터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늦어진다는 말은 해야 해서….”
“아, 그렇죠.”
“그럼 그사이에 먼저 씻고 올래요?”
“아… 그러죠.”
마음이 급해 씻지도 않고 덤비려 했다는 걸 깨달은 노먼이 뒷머리를 긁으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레이스는 스타킹 밴드에 감아 둔 권총집을 풀어 바닥에 떨어진 핸드백 속에 넣었다.
“후우….”
한숨이 작은 호텔 방을 울렸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단추가 두어 개 풀려 나간 블라우스를 내려다본 그레이스는 손을 들었다. 하지만 잠그지도 더 풀지도 못하고 손을 내리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안 내켜.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두근두근 설레는 나쁜 짓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에겐 좋은 복수가….
아니야. 내가 왜 그 남자에게 복수하려고 딴 남자와 자야 해? 내가 자고 싶어서 자야 하는 거잖아.
요즘 성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끓는 걸 보면 남자와 자 보고 싶은 건 맞는 듯했다. 노먼은 키도 크고 외모도 매력적인 편에, 몸도 탄탄해 보였다. 하룻밤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란 거다.
그런데 내키지 않는다.
한번 눈 딱 감고 해 보면 괜찮을지도 몰라. 자 본 남자가 그 남자뿐이라서 그래.
창밖의 붉은 네온사인 빛으로 물든 침대에 앉아 그레이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밖에서는 재즈를 연주하는 소리와 이따금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거리와는 달리 어두운 호텔 방에서는 샤워 소리와 그레이스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또다시 어렴풋한 담배 냄새를 맡는 순간, 그레이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불빛이 닿지 못하는 어느 모퉁이에 그 남자가 기대어 서 있었다.
그래, 거기서 얌전히 내가 다른 남자와 헐떡이는 꼴이나 구경해.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 선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 들린 시가의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시가의 끝은 이따금 붉게 타오르며 흰 연기 한 줄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다 검게 사그라들고 또다시 붉게 타오르길 거듭했다.
초조하게 깜빡이는 네온 빛 속에서 그레이스는 숨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마른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결국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그레이스는 네온사인이 꺼지는 순간 하이힐의 굽으로 카펫을 찍으며 침대 위로 몸을 물렸다.
그 찰나 발목을 덥석 잡혔다. 움직이는 낌새도 전혀 없이 침대로 다가와 발목을 감싸 쥔 남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입에 문 시가를 다른 손으로 옮겨 연기를 길게 내뱉더니 침묵을 깼다.
“그레이스.”
꺼졌던 네온사인이 다시 켜졌다. 버림받은 소년의 연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었다.
빠앙!
때마침 창밖에서 경적이 크게 울리자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꺼져.
그레이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외쳤다.
내 호텔 방에서 제발 나가, 레온 윈스턴.
그 남자가 차지한 곳은 실은 그녀의 머릿속이었다.
“애나?”
저를, 아니, 제 가명을 부르는 소리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 나온 건지 노먼이 샤워 가운을 입은 채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걱정의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올려다보다 그레이스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노먼….”
º º º
“이맘때면, 마을 아이들끼리 가, 강가의 숲에서 밤을 줍거나 버섯을 채집하곤, 했어.”
제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는 것을 지미도 똑똑히 들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끔….”
금속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악마가 손을 뻗는 찰나 지미는 움찔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윈스턴은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재떨이에 시가를 대수롭지 않게 털더니 겁에 질려 숨죽인 지미에게 명령했다.
“계속해.”
“가, 가끔은….”
입을 열자마자 또 목소리가 떨렸다. 테이블 아래로 숨긴 손도 그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레이스에게 광기로 빚어진 저 악마를 손에 넣으라고 시켰던 일이 후회되었다. 지난 3년, 레온 윈스턴을 직접 겪어 보고 나니 알게 되었다. 그건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뇌부의 모두가 선악을 모르는 어린아이 앞의 개미처럼 잔학한 괴롭힘과 고문을 당하다 죽은 지 오래였다. 가장 마지막에 죽이겠다던 둘은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데이브는 낸시가 잡힐 때까지 목숨을 보장받았으나 지미는 그러지 못했다. 언제 저 악마의 변덕이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처형될지 모르는 그는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낚시를 하기도 했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을 잘못해 처형당할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어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그럴 거면 저 악마도 죽여 버리고 싶으나 그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저자가 아직 그레이스를 찾지 못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레이스도?”
역시나. 윈스턴은 재를 턴 시가를 다시 입에 물며 그레이스에 관해서만 집요하게 물었다. 지미가 고개를 끄덕였더니 윈스턴이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레이스도 지렁이 같은 미끼를 만졌다는 건가.”
그런 건 왜 묻는지 모르겠으나 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남자가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땐 그저 소꿉친구였으니까….”
“숙녀를 배려할 줄 모르는군.”
숙녀라기엔 그때의 그레이스는 어린아이였다.
“계속해.”
윈스턴은 늦은 밤 그를 조사실로 불러 독대하곤 했다. 그럴 때면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행동도 말투도 흐트러진 구석이 전혀 없었으나 독주의 냄새가 진동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곤 이것저것 물었지만 신문은 아니었다. 그레이스에 관한 시시콜콜한 추억만 듣다가 가는 게 다였으니.
“그….”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뻔한 지미는 잠시 멈칫했다.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 혀를 잘라 버리겠다던 협박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그 녀석은 참을성이 별로 없어서 다 낚은 고기를 놓치기 일쑤였지.”
악마가 나직이 웃었다.
“그 여자, 성질 급한 구석이 있지.”
그러더니 흰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며 물었다.
“나무는 언제부터 탔지?”
시답지 않기 짝이 없어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글쎄…. 너무 어릴 적이라. 마을 아이들은, 다, 다들 숲에서 뛰어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웠거든.”
윈스턴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신음하더니 재떨이에 시가를 털었다. 그러곤 뭔가를 떠올리는지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회색 벽을 응시하다 느닷없이 말문을 열었다.
“난 여자아이가 나무를 타는 건 난생처음 봤어.”
그러곤 옛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양 회색 벽을 응시한 채 픽, 웃었다.
“그러다 내 품으로 떨어졌지.”
“…….”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예뻤어.”
악마가 천국 속을 거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위화감에 소름이 돋은 팔을 조용히 문지르는 그에게 윈스턴이 돌연 물었다.
“우리의 역사가 오래된 건 알고 있나.”
역사라니. 또 한 번의 위화감에 지미는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 대꾸했다.
“어릴 때 마주쳤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레이스가 뭐라고 했었는지 말해.”
“그날 같이 어울려 놀았다고….”
“하….”
윈스턴이 실소를 흘리는 찰나 지미는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악마가 이를 악무는지 턱에서 힘줄이 솟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시가를 쥔 채 미간을 짓누른 마른 손에서도 힘줄과 핏줄이 불거졌다.
“놀았다.”
“…….”
“소꿉놀이를 한 걸 놀았다고 하지, 키스를 한 걸 놀았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 난 그, 그 녀석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야.”
레온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여자가 제 입으로 이런 소리를 했었으니.
“너와 논 걸 들키면 부모님께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 소릴 했어.”
어떻게 그걸 놀았다고 말해.
“나도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어.”
그러면서 어떻게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다는 거야. 도대체 그레이스가 말하는 ‘좋아한다’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 걸까. 그 여자는 이제 그 얕은 물에 담그고 있던 발끝조차 뺐을지도 모르나 레온은 홀로 심해 깊이, 더욱 깊이 잠겨 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곤 시가 연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여 입 안에서 굴리다 물었다.
“그레이스의 첫 키스 상대가 나인 건 알고 있나.”
“…몰랐…어.”
얼굴에 뼈와 가죽만 남아 유독 퀭해 보이는 눈에 당황의 기색이 어리자 레온은 그제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