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202)
내게 빌어봐 <202화>(202/240)
<202화>
잽싸게 라운지 구석의 접이식 칸막이 뒤에 숨자마자 문이 열렸다. 3년이나 듣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익숙한 발소리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였다.
제발 이쪽으로는 오지 마.
그러나 그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남자, 빈다고 들어준 적이 없었던 걸 잊고 있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가는 가운데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펼쳐졌다.
잡히면 엘리와 나를 떼어 놓을지도 몰라.
칸막이 너머에서 그 남자의 기척도 모자라 향수 냄새까지 느껴졌다.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칸막이의 한 걸음 뒤에서 발소리가 멈추더니 달칵, 전화기의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벨뷰 호텔 2101호.”
남자가 전화를 걸자 안도했지만 긴장을 완전히 풀 순 없었다. 저 남자와 그녀의 사이에는 얇은 실크 칸막이 하나가 전부였다. 값비싼 실크에 새겨진 화려한 자수가 저를 가려 주길 바라며 그레이스는 꼼짝 않고 남자의 통화를 엿들었다.
“캠벨을 바꿔.”
캠벨도 프레스콧에 있는 건가. 무슨 일이지?
“그래, 진척은.”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아침에 바로 프레스콧 교외 전역에서 탐문을 실시할 수 있게 오늘 밤 내로 준비 완료해 두도록.”
두근두근, 귓속을 울리는 맥박 소리가 크다 못해 남자의 목소리를 묻어 성가실 지경이었다. 그러니 캠벨의 목소리까지 엿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 두 곳을 중점적으로.”
듣지 못해도 상대가 캠벨인 걸 보면 내용은 뻔했다. 극장에 폭탄을 심어 둔 잔당을 추적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곧 전화를 끊더니 곧바로 멀어졌다. 소파에 털썩 앉는 소리가 들리자 그레이스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속으로만 외쳤다.
제발 나가.
“제발….”
그때 칸막이 뒤에서 남자가 갑자기 혼잣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이어진 이상한 소리에 그레이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칸막이가 접히는 부분의 틈새에 눈을 대자 가죽 소파에 홀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이번에도 얼굴은 보지 못했다. 흰 천에 묻혀 있는 탓에.
저건….
분홍 리본과 레이스 프릴이 달린 보닛이었다. 엘리가 2년 전 버린 보닛이 저 남자의 손에 있다는 것보다 놀라운 건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발….”
애원의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레이스는 애써 외면하며 되뇌었다.
웃는 거야. 저건 웃는 거야. 웃는 것이어야만 해.
“다행이야, 그렇지, 엘리?”
그레이스는 어둠 속에 누워 곤히 잠든 엘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경관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나 봐. 제보를 받았더라면 그 남자가 라운지에서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으니.
그럼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겠구나.
“다행이야.”
됐어. 그러니까 이제 안심하고 자. 그레이스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굴며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마자 괴로운 한숨을 쏟아 내며 돌아누웠다.
불현듯 폭탄 속을 빽빽이 채우고 있던 서슬 퍼런 못들이 떠올랐다.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한 발 늦었다. 그 남자에겐 이미 그레이스 리들이라는 못이 엘리라는 뿌리까지 돋아난 채 깊숙이 박혀 있으니.
평생 그 남자의 속에 박혀 빠지지 않는 못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럼 기뻐야지.
“하….”
웃었으나 한숨처럼 들린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스, 기뻐해. 기뻐야만 해.
경쾌한 재즈를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에 웃음소리와 크리스털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화음처럼 어우러졌다.
파티장 한가운데에서는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저질스럽다며 경멸 어린 눈을 했을 춤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추는 가운데 레온이 앉은 주빈 테이블에서는 영화사 사장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 여직원이 아니었더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오늘 밤 재즈가 아니라 장송곡을 들을 뻔했죠. 하여튼 놈들 뜻대로 되지 않고 무사히 끝났으니 군과 저희 쪽이 또 한 번 승리한 거 아니겠습니까.”
레온의 위스키 잔이 비자 그랜트가 웨이터라도 되는 양 잽싸게 병을 집어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시사회가 아무런 소동 없이 무사히 끝났다는 기사가 내일 나갈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는 병을 놓더니 파티장의 창가에서 젊은 여자 하나와 잡담을 나누는 남자에게 손짓을 했다.
“이봐, 노먼!”
남자와 여자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그랜트가 그 둘을 그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노먼은 제 홍보 담당자입니다.”
귀찮았던 레온은 오늘 내내 무수한 사업가들과 여배우들에게 그랬듯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악수조차 해 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유능한 전문가죠. 노먼이 잡음이 나지 않도록 기자들을 잘 구워삶을 겁니다. 흥행에 아무런 영향 없을 테니 걱정 마시죠.”
영화가 흥행하든, 참패하든 알 바 아니다. 기계적으로 끄덕이기만 하던 레온의 고개가 사장이 여직원을 소개하는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여기 샐리는 제 비서, 테이트 부인의 조수이죠.”
레온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샐리’라는 이름의 여자가 움찔했다. 여자가 저속하게 혀를 꺼내 입술을 적시곤 그에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찰나 레온은 줄곧 닫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제 추측이 틀렸군요.”
“네?”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저, 저를 보셨다고요?”
여자가 꼴사납게 목소리를 떨더니 발을 어린애처럼 동동 구르며 손뼉을 쳤다.
“샐리보다는 에바 같은, 좀 더 원숙한 이름을 상상했었거든요.”
“세상에, 제 이름을 궁금해하셨다고요? 어머나 어쩌면 좋아. 꿈만 같아. 그게 사실은 저도 제 이름이 촌스러운 시골 소녀나 하녀 같아서 바꾸고 싶던 차였거든요.”
“새 이름 후보에 부디 잊지 말고 에바를 넣어 주세요.”
“네! 정말 영광이에요, 각하.”
그래, 네 주제에 그 여자의 이름을 여태 멋대로 썼으니 영광이겠지.
레온이 다시 잔을 들어 기울이자 그랜트가 두 직원의 주변을 눈으로 훑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애나는 어디 갔나.”
직원들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그새 도망쳤군. 하여튼 내빼는 것 하나는 잘한단 말이야.”
레온은 잔을 기울이다 말고 픽 웃었다. 내빼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여자를 그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애나가 말입니다.”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그랜트가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각하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사장을 구박하는 대단한 직원입니다. 사실 사무원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아까운 인재라 오늘 꼭 데려와서 에이전트들에게 소개시키려 했는데….”
그랜트가 아쉽다는 듯 쩝, 소리를 내더니 레온은 아무 흥미도 없는 말을 이었다.
“이 아가씨, 아, 아가씨는 아니지만…. 여하튼 이 친구가 배우의 눈을 가졌단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사람을 잡아끄는 그 눈동자의 오묘한 빛깔을 영화에서는 보여 줄 수 없다는….”
그 찰나 기울어진 크리스털 잔 위의 연푸른 눈동자가 불현듯 이채를 띠었다. 레온은 잔을 곧바로 내리곤 한마디를 던졌다.
“청록색.”
그랜트가 얼빠진 낯을 하더니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질문은 저자가 아닌 그의 몫이었다.
“그 직원, 오늘 폭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겠죠?”
“네, 네. 맞습니다.”
“그리고 두어 살 된 딸이 있을 겁니다.”
“아, 아니.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그 오묘한 눈동자에 빠져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 여자, 사제 폭탄을 제조할 줄 아는 반군 출신이니까.
그 여자의 딸, 내 딸이니까.
그는 그제야 소리 없이 대답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º º º
비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동료가 그레이스의 얼굴을 보더니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인사 대신 했다.
“오늘도 딸이 꼭두새벽부터 깨웠어?”
“어? 어….”
실은 밤새 뒤척이다 한숨도 자지 못했을 뿐이다.
“어제 별일 없었어?”
그레이스는 책상 앞에 앉으며 물었다.
“그냥 파티장 테이블 위에서 춤추다 떨어져서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이 둘. 이 정도?”
어지간히 정신 나간 파티를 벌였구나. 그레이스는 웃으며 오늘 할 일이 정리된 수첩을 펼쳤다.
“귀빈들 체크아웃 확인 및 환송….”
“아마 다들 숙취 때문에 늦을 거야.”
저도 숙취 때문에 죽겠다며 이마를 짚고 있던 동료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전했다.
“윈스턴가는 이미 체크아웃했대. 기차역까지 환송은 노먼과 그랜트 씨가 맡으신다고 호텔로 바로 가셨어.”
“그래? 잘됐네.”
그 남자가 곧바로 여길 떠난다니. 들키지 않았다는 걸 또 한 번 확인한 그레이스는 한시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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