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212)
내게 빌어봐 <212화>(212/240)
<212화>
따끈따끈한 빵이 가득 든 바구니 다섯 개가 식탁에 오르자 아이가 손뼉을 쳤다.
“와아, 베이커리가 진짜 와써.”
엘리는 어제 늦게 잠들었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꼭두새벽에 기상했다. 그러곤 베이커리에 빵을 사러 가야 한다는 아이에게 남자는 베이커리는 찾아가는 게 아니라 부르는 거라고 가르쳤다.
사실 그 전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다시 잠들어 버렸더니 아이는 제 외투가 걸려 있는 현관을 찾겠다고 홀로 나갔다가 미로 같은 스위트룸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울지 않은 건 다행인데 복도에서 아무 전화기나 들고 ‘엘리예요. 길을 이러버려써요.’라고 해 버린 거다.
스위트룸 손님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전화를 받고 놀란 호텔 프런트에서 집사를 올려 보냈고, 결국 윈스턴가의 고용인들은 꼭두새벽부터 두 살배기와 숨바꼭질 놀이를 한 셈이 되었다.
미아가 된 ‘아가씨’를 찾아낸 장본인인 피어스는 남자의 뒤에 서서 아직도 제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무표정한 캠벨은 없는 사람으로 치기 쉽지만 감정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피어스는 그러기 쉽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아 체하겠어.”
그레이스가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남자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곧 식당에는 호텔 집사와 윈스턴가의 하녀 하나만 남았다.
“엘리는 요고.”
배가 작아 많이 먹지 못하는 엘리는 호텔 베이커리에서 올려 보낸 빵을 심사숙고해서 고르더니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엄마는 머 머글 거야?”
“엄마도 똑같은 거. 하나만.”
“쟈.”
“고마워. 아빠도 하나 골라 줘.”
그레이스는 둘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는 남자를 눈짓했다. 지금 미소 짓는 남자는 뭐라고 착각하는지 몰라도 이건 그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 하는 배려일 뿐이다.
그러자고 합의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 모두 아이 앞에서는 사이가 좋은 척했다. 두 살배기라도 눈치란 게 있으니까. 어제 잠시 아이 앞에서 언쟁을 했더니 호텔로 오는 차에서 엄마랑 아빠는 왜 싸웠냐고 집요하게 물어 곤란했던 게 한몫했다.
“아빠는 머 머글 꺼야?”
“아빠도 같은 걸로 줘.”
아이가 빵을 접시에 올려 주자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레이스는 찌푸려지는 눈살을 펴기 위해 눈에 온 힘을 주어야만 했다.
“고마워, 우리 공주님.”
스위트룸 식당의 옆에는 작은 주방이 딸려 있었다. 아침 식사를 시켰더니 요리사가 같이 올라와 즉석에서 요리를 해 주었다. 엘리의 까다로운 달걀 요리 주문을 한 번 만에 소화하지 못한 요리사가 다시 해 오자 엘리가 외쳤다.
“감샵니다.”
그 순간 흐뭇하게 웃던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엘리.”
남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아이를 부르기에 발음을 교정하려 하는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귀족은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아. 반말을 쓸 때도 고맙다는 말은 아주 드물게만 해. 평소에는 칭찬을 하지. 잘했어. 좋아. 수고했어. 이렇게.”
아이에게 귀족의 방식을 가르치는 남자를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레이스에게 곤란한 질문을 했다.
“엘리가 귀족이야?”
저를 공주라고 부르지만 놀이일 뿐이고 자신은 평민이라는 걸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맞아. 아빠가 귀족이니까 엘리도 귀족이야.”
그런데 남자는 아이에게 괜한 기대를 심어 준다. 결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귀족도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반쪽짜리 사생아는 어떨까.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저 아이의 환심만 사면 그만인 건지.
그레이스는 아이의 머리에서 장난감 왕관을 바로잡아 주면서 웃는 남자를 응시하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다.
“우리 자기, 뭐 해?”
엘리와 함께 쓰는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에서 립스틱을 바르는데 남자가 가벼운 차림으로 들어오더니 물었다.
“출근 준비.”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돈을 벌어 오면 넌 엘리를 키우겠다며?”
“하….”
남자는 실소하더니 벽에 등을 기대며 검지 끝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나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젠 회사에 갈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레이스는 그저 레온 윈스턴을 시험해 보는 것뿐이었다. 예전의 레온 윈스턴은 그레이스가 밖으로 나가는 건 물론, 다른 남자의 눈에 띄는 것조차 싫어했다. 제 말대로 정말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 좋을 대로 해.”
“네 허락을 구한 기억은 없는걸.”
“대신 경호는 붙일 거야.”
“감시를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잔당이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잊지 마.”
“이런, 잔당 검거가 늦어지겠는걸? 나를 감시할 빌미가 사라져선 안 되니까.”
남자가 픽, 맥 빠진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는 화장대 거울 옆으로 다가왔다. 그레이스는 마스카라를 바르며 엘리의 ‘보모’에게 수칙을 읊었다.
“못 먹는 것과 싫어하는 게 많은 아이니까 점심은 물어보고 주문해. 조금 전에 버섯 보고 기겁하는 거 봤지? 그리고 낮잠은 보통 1시에서 3시야. 단 거 너무 많이 주지 말고 술이나 커피가 든 디저트는 먹이지 마. 해 달라는 걸 전부 다 해 주지도 말아. 버릇 나빠져. 말 잘 알아들으니까 잘못하면 말로 잘 타이르면 돼. 크레용을 줄 거면 꼭 옆에서 지켜봐. 한눈팔았다가는 스위트룸 벽지를 전부 새로 도배해야 할 거야.”
당부가 끝난 후에도 남자는 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잘 보이는 자리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참아야지.”
여전히 다른 남자에게 보여 주기 싫지만 참겠다고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일어섰다. 그러곤 스툴에 발을 얹고 화장대에서 검은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 남자의 시선이 질척하게 달라붙는 걸 느끼면서도 종아리 위로 스타킹을 아주 느릿하게 끌어 올렸다.
이 또한 시험이었다.
굶은 지 3년째인 남자의 앞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미를 흔드는 셈이었다. 역시나 남자의 바지 앞섶 모양새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말은 예상 밖이었다. 당장 돌변해 덮칠 줄 알았더니 남자는 집요하게 구경하기만 할 뿐 하체가 갈수록 불편해 보이는데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끝내 손을 대긴 했으나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였다. 그는 반대쪽 스타킹에 가터를 채우는 그레이스가 엘리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쓰다듬더니 드레스 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런 핀잔을 던지며.
“우리 딸이 네 요부 같은 면은 닮지 않길 바라.”
시험하려다 도리어 문란한 아이 엄마 취급만 당한 그레이스의 뺨이 빨갛게 익었다.
세단이 영화사 건물 앞에 멈춰 서자 아빠의 무릎에 앉은 엘리가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 잘 가따와.”
가지 말라며 조르지 않고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 게 그레이스는 조금 서운했다. 분명 저 작은 머릿속엔 인형 놀이를 할 생각뿐인 거다.
“재밌게 놀아. 말 잘 듣고.”
“응. 엄마 일 잘하게 엘리 뽀뽀 받구 가.”
어휴,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해.
그레이스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엘리의 뽀뽀를 받고 나가려던 때였다.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더니 끌어당겼다.
“아빠 뽀뽀도 받고 가.”
그레이스는 아이 앞이라 어쩔 수 없이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눈빛으로는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주먹 뽀뽀 받고 싶어?
남자도 눈꼬리를 휘어 웃더니 능청스럽게 그레이스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뺨에 닿을 줄 알았던 입술은 한참을 내려가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아!”
살갗이 따끔거렸다. 뽀뽀를 받아 주는 것만 해도 관대하게 봐준 건데 염치없는 남자는 키스를, 그것도 목덜미에 했다. 엘리의 앞이라 화를 내지도 못하니 허리에 감긴 남자의 손을 몰래 꼬집기만 하고 차에서 내렸다.
“이따가 봐.”
남자는 무시하고 딸에게만 손을 흔들어 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핸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냈다. 거울로 조금 전 남자가 키스를 했던 자리를 비춰 본 그레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나 그 남자의 영역 표시가 붉고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그땐 이렇게 유치한 남자인 줄 몰랐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그레이스는 속으로 한탄을 하며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아 키스 마크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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