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228)
내게 빌어봐 <228화>(228/240)
<228화>
“크억!”
“꺄아악!”
장내가 혼란의 도가니에서 공포의 도가니로 삽시간에 변모했다. 인간과 동물이 한데 뒤엉키고 짓밟히는 가운데 그레이스는 저를 억세게 끌어당기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뛰었다. 그 순간 전기가 나가며 불빛은 불길밖에 남지 않았다.
난간과 서커스 소품을 바리케이드 삼아 총알을 피하는 사이 불길은 더더욱 안으로 번져 서커스장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검은 연기가 거대한 천막을 삽시간에 메웠다.
“엘리, 울지 마.”
“흐끅….”
“울면 안 돼. 제발 울지 마.”
이곳에 아이는 엘리뿐이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즉시 셋의 위치가 발각되는 셈이다. 놀라 끅끅거리는 아이의 입을 어쩔 수 없이 틀어막으며 빠져나갈 길을 절박하게 모색하던 때였다.
“레온 윈스턴, 가장 잔인한 복수가 뭔지 아냐고 물었나?”
잔당 중 하나가 영화의 대사를 입에 올리며 외쳤다.
“오늘 그 답을 알려 주마!”
총알은 출구에서만 쏟아지는 게 아니었다. 들리는 총성으로 보아 총기는 적어도 네 개였다. 사방에서 소름 끼치는 총성과 참혹한 비명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세 사람이 숨은 곳의 건너편 관객석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오직 오늘을 위해 3년을 기다렸다! 이곳이 너희 더러운 왕정의 돼지 새끼들의 도살장이 될 것이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여자 목소리라는 생각을 그레이스가 문득 하던 찰나였다.
끼이익.
불길한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남자가 자욱하게 연기가 차오른 천막의 천장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기둥이 머리 위에서 검은 연기를 헤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
또다시 남자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뛰던 때였다. 등 뒤에서 쾅, 무너진 기둥이 땅을 울림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를 무언가가 치고 들어왔다. 붙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며 그레이스는 그를 놓쳤다. 넘어지자마자 일어섰지만 두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엘리!”
“엄마아!”
“그레이스!”
서로를 불렀지만 보이지 않았다. 텐트의 절반이 무너지며 남은 절반을 흙먼지와 연기로 채운 탓에 눈을 뜨고 있기조차 어려웠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었으나 발이 계속해서 시체로 느껴지는 덩어리에 걸리며 그레이스는 한 걸음에 한 번씩 넘어졌다.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딸을 불렀으나 비명과 굉음에 목소리가 묻혔다.
“콜록, 콜록.”
매캐한 연기 탓에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던 때에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쪽으로 더듬어 가던 그레이스는 누군가가 천막을 찢어 둔 듯한 자리를 발견했다.
“엘리!”
탈출구를 찾았으나 혼자 탈출할 순 없었다. 계속해서 아이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끼이이익.
또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레이스는 보지 못해도 알 수 있었다. 천막은 곧 무너진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내몰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장 가까운 엄폐물로 뛰었다. 어느 동물의 우리 뒤에 몸을 숨기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우지끈, 굉음이 지축을 흔들고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완전히 무너져 화마에 삼켜진 천막을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넋을 놓았다.
“아니야…. 아니야….”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속에 그녀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주변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살아 나온 사람들을 확인한 그레이스는 결국 망연히 멈춰 서서 활활 타오르는 천막과 그 위로 날아오르는 검은 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흑….”
고통스러운 울음이 울컥 터져 나오려던 찰나였다.
드르르르륵!
멀리서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탕!
뒤이어 권총의 격발음까지 들리는 순간 그레이스는 기쁨에 찬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살아 있다.
반군의 목표물은 그 남자와 그레이스뿐이었다. 먼저 들린 총소리는 잔당의 것이다. 그러니 경호원이 잔당을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잔당이 그 남자를 죽이려는 중이었다.
총소리가 난 곳을 머리에 새기며 다급히 핸드백을 뒤졌다. 권총을 꺼내 드는 순간 카메라가 딸려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그레이스는 알지 못하고 뛰어갔다.
엘리. 엘리, 제발.
엘리가 그 남자와 함께 있길. 그리고 제발 무사하길.
어느 순간부터 더는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불안을 억누르는 사이 소리가 나던 서커스단 부지의 외진 곳에 가까워졌다. 짐승 우리와 나무 궤짝들 사이로 몸을 숨겨 가며 부근을 샅샅이 뒤지던 때였다.
‘헉.’
지푸라기가 잔뜩 쌓인 어느 수레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지 않았으나 옆에 덩그러니 놓인 기관단총만 보아도 잔당인 건 알 수 있었다.
“엘리?”
분명 그 남자가 잔당을 죽인 거다. 그러니 둘은 이 근처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답이 들리지 않아 점점 불길해지던 때였다. 차곡차곡 쌓인 건초 더미 뒤로 돌아간 그레이스는 얼어붙었다.
남자도, 아이도 그곳에 있었다.
건초의 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검은 양복과 코트가 젖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물은 아니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으니.
어딘가에 총상을 입었는지 발작적으로 들썩이는 가슴팍에 아이가 토끼 인형을 꼭 붙든 채 매달려 있었다. 피와 재투성이가 된 꼴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 엘리?”
새파랗게 질린 눈꺼풀은 미동조차 없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상이 무너지려던 찰나였다.
“엄마, 왔네….”
남자가 힘겹게 웃으며 아이에게 속삭였다.
“어, 엄마….”
아이가 눈을 뜨더니 제 아빠의 품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안도하며 그녀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레이스는 흙바닥에 찧은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주저앉아 아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 매달리는 작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아이가 겁에 질려 떠는데 그것도 살아 있는 증거라며 안도하는 자신이 미워지려 했다.
“…착해. 울지도, 않고.”
남자는 힘이 드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그레이스는 돌연 시선을 아이에게로 떨어트리며 물었다.
“아픈 덴 없어?”
아이는 겁에 너무도 질린 탓인지 대답 대신 고개만 어렴풋이 저으며 그녀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창백한 손이 그레이스의 팔로 툭 떨어졌다. 그의 손이 제 손목을 감싸 쥐려는 순간 그레이스는 일어섰다. 스르륵 힘없이 미끄러지던 손이 돌연 아이의 발목을 턱 붙잡았다.
남자는 엘리를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겐 그레이스를 이길 힘이 없었다. 끝까지 일어서자 손이 덧없는 저항 끝에 떨어져 나가고, 그 바람에 엘리의 구두가 벗겨지며 남자의 손 위로 툭 떨어졌다.
그레이스는 엘리를 안은 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한 발짝 떼던 순간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총을 남자가 집어 들었다.
넌 죽을 거야.
그러니 네가 포기해.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어 눈으로 전하며 뒤로 끝내 발을 내디디던 때였다.
총구가 옆으로 돌아가더니….
탕!!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윽!”
신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레이스는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낸시였다.
천막에서 들은 목소리가 익숙했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흑…. 끅….”
그레이스는 엎어져 흙바닥을 손톱으로 긁는 낸시에게로 다가갔다.
휙.
낸시가 떨어트린 총을 멀리 차 버리곤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어스름한 조명 아래의 남자는 총을 떨어트리며 안도의 숨을 버겁게 내쉬었다.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낸시가 떨어트린 총을 멀리 차 버리곤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어스름한 조명 아래의 남자는 총을 떨어트리며 안도의 숨을 버겁게 내쉬었다. 눈빛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눈빛은 변했다.
아빠의 피로 젖은 딸을 안고 서서히 뒷걸음질 치던 그레이스는 끝내 뒤돌아 뛰었다.
난 못 해. 난 도저히 못 해.
그의 삶이든 죽음이든, 제가 어느 것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남자에게서 또다시 도망치는 내내, 마지막으로 본 눈빛이 공포에 질린 그레이스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딸의 구두 한 짝을 손에 쥔 남자의 창백한 눈동자에 차오른 슬픔은, 어릴 적 그 소년의 것보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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