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 Begging RAW novel - Chapter (240)
내게 빌어봐 <240화>(240/240)
<240화>
차는 익숙한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숨어 살던 도시였다.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다.”
“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차역 근처의 한산한 골목에 트럭이 멈춰 섰다. 아저씨가 지갑을 꺼내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받아.”
그레이스는 돈을 받지 않고 아저씨에게 매달렸다.
“아저씨, 저를 보내 줄 게 아니라 엘리를 보내 주세요.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복수를 하고 싶으시면 저한테 하시면 되잖아요! 손톱을 뽑아도 좋고 손가락을 잘라도 좋아요. 그래도 성에 안 차면 죽이세요.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아이는 제발 제 아빠에게 보내 주세요!”
그를 붙잡은 채 빌고 울부짖었지만 아저씨는 그레이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코트를 주워 주머니에 지폐를 쑤셔 넣기만 했다.
“아저씨, 제발요. 제 딸은 살려 주세요.”
아저씨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너를 보내 주는 게 아니야.”
“네?”
“게다가 난 복수할 생각도 없다. 낸시는 다르겠지만.”
“그럼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네가 낸시의 복수를 해 주거라. 그럼 낸시도 원한을 풀고 너와 네 딸을 놔주겠다는구나.”
아저씨가 좌석 뒤로 손을 뻗더니 무언가를 꺼내 그레이스의 무릎 위에 놓았다. 바이올린 케이스였다.
“네 딸은 내가 잘 돌봐 줄 테니 넌 네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해.”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자마자 아저씨가 말한 복수의 의미를 깨달은 그레이스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네가 해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내셔널 트리뷴 지에 광고를 내서 접선할 장소와 시각을 알려 주마.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그럼 이제 가거라.”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꿈쩍도 하지 못했다. 차창 밖만 바라보며 기다리던 아저씨가 겁 많은 아이를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잖니.”
“…….”
아저씨가 그레이스를 돌아보더니 멈칫했다. 충격적인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멈추며 그레이스를 엄하게 노려보았다.
“어려운 일이 아니길 바란다.”
아저씨는 그래도 내리지 않고 버티는 그레이스를 억지로 끌어냈다.
“우린 이제 거기 없을 테니 신고할 생각은 말거라. 낸시를 자극하지 마.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딸을 돌려줄 거다.”
“그럴 리가 없는 건 아저씨가 더 잘 아시잖아요!”
“네 딸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마. 난 네게 진 빚도 있잖니.”
“제게 목숨을 빚졌으면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어요!”
그는 매달리는 그레이스를 떼어 내고 코트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떠안기더니 운전석에 올랐다.
“아저씨! 아저씨, 제발!”
쾅.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의미가 없는 줄 알면서도 트럭을 쫓아가다 다리의 힘이 풀리며 넘어졌다.
“흐흑….”
주저앉은 그레이스의 눈에 조금 전 내던진 바이올린 케이스가 들어왔다. 버클이 풀려 열린 틈으로 안에 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기관단총.
차가 사라진 골목길 모퉁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아저씨가 살인의 수단과 함께 던진 말이 메아리쳤다.
“윈스턴, 그 악마를 죽이는 일이 네겐 잔인하니?”
내겐 당신들이 악마야.
고문과 겁탈과 살인을 서슴지 않고 어린아이까지 인질로 붙잡는 악마들. 그 악마들의 손아귀에 내 딸이 붙잡혀 있다.
엘리를 홀로 두고 떠나던 순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이가 초라하게 뒤집어쓰고 있던 종이봉투의 틈으로 눈물을 머금은 청록 빛 눈동자가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금방 올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던 그녀에게 아이의 눈이 말했다.
엄마, 엘리 무서워.
그 모습이 내겐 네 마지막 기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번뜩 드는 찰나 그레이스의 눈빛이 돌변했다.
“엘리….”
그레이스는 힘이 풀린 다리를 거친 흙길에 질질 끌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향해 기어갔다. 날카로운 자갈과 모래가 무릎과 정강이에 박혔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혼미한 머릿속으로는 오직 이름 하나만이 메아리쳤다.
“엘리….”
총이 든 가방이 엘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양 끌어안았다.
아니,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잖니.”
어렵지 않은 일이야.
º º º
이미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각이었으나 회색빛 먹구름이 짙게 낀 탓에 사방은 새벽처럼 어두웠다.
차가 윈스턴 저의 정문에 다다르자 헤드라이트 불빛을 본 문지기가 뛰어와 문을 열었다. 이윽고 저택을 빠져나온 세단은 포화처럼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헤치고 텅 빈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캠벨은 몇 년째 해 왔던 대로 오늘의 일정을 읊으려다 관두었다. 어차피 뒷좌석에 앉은 소령은 듣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그를 코앞에서 불러도 듣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눈은 항상 초점이 없었다. 말수도 현저히 줄었다.
시체 같았다.
소령은 다시 눈을 뜬 날 후로 왕성하던 언론이나 사교 활동을 완전히 멈추고 저택에 칩거 중이었다. 그럼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사령부로 출근하니 칩거라는 말은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소령이 오랜 세월 군에 몸담으며 몸에 붙은 습관대로만 일해도 특임단은 평소처럼 돌아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젠 다른 사람들마저 윈스턴 소령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엄격하던 상관이 이젠 부하들의 실수나 잘못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습격 사건의 진실을 모르는 이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나니 사람이 너그러워졌다는 소리를 하지만….
글쎄.
그가 보기에 소령은 삶의 의지를 버린 사람 같았다.
그러던 소령이 며칠 전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여자와 아이의 출국 금지령을 해제하라는 것이었다.
캠벨은 그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명령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던졌다.
그리고 그날 후로 소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는 건 내 과도한 걱정일 뿐일까.
모든 걸 가진 남자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자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버리려 한다.
소령의 결단이라면 아무리 무모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무조건 따르는 캠벨이지만 이것만은 죽는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령이 밤낮없이 여자를 찾아 온 왕국을 뒤지던 그 혼란스러웠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캠벨은 지금의 평화가 두려웠다.
이대로 영원히 끝이 아니길. 총성이 다시 빗발치기 직전의 숨죽인 정적이길.
평화를 위해 살아야 하는 군인이 전쟁을 기원했다.
캠벨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레온은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렸다.
나를 죽여 줘.
하지만 그의 사신은 답이 없었다.
그래, 넌 여전히 내가 불행하길 바라는 거지. 그러니 자비는 베풀어 주지 않겠지.
그레이스는 다시 전화를 하겠단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저 빈말로 한 약속을 믿고 온종일 전화가 울리기만을 기다린 자신이 한심한데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기다린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전화를 주겠지.
어쩌면 그렇게 기대하라고, 그렇게 영원히 가망 없는 희망 속에서 기다리라고 한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레이스의 고문법이 통했다는 말은 하지 말걸 그랬다.
그렇지만 이게 맞아. 난 영원히 불행해야 해.
그는 그 여자의 자비 따위 누릴 자격이 없었다. 그녀가 언젠가 제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려 주기 전까진 산지옥에서 그레이스가 내린 형벌을 달게 감내해야 한다. 그렇게 오늘도 그레이스의 리볼버를 제 턱 아래에 찔러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때였다.
끼익.
미끄러지듯 달리던 차가 급작스럽게 멈춰 섰다.
“미친 여잔가….”
운전수가 욕설을 중얼거리는 찰나 레온의 직감이 번뜩였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죽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눈이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유령처럼 창백한 여자가 서 있었다.
레온은 문을 벌컥 열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 그레이스에게 주저 없이 다가갔다. 단 한 걸음만이 남은 순간, 그녀의 등 뒤에 줄곧 숨겨져 있던 손이 나타났다.
두 손에 들린 건 기관단총이었다.
여자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을 보고 뛰어나오려던 캠벨에게 레온은 오지 말라 손짓했다. 시선은 줄곧 그레이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있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가? 아니면 성탄절이 석 달 늦게 왔나?”
석 달 만에 처음으로 휘어 올라가는 입꼬리의 느낌이 낯설었다.
“뭐든, 죽는 날인 건 확실하군.”
여자는 유령이 아니라 사신이다.
그 이름 그대로 내 인생에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이자 나의 유일한 은총인 여자가 나를 죽이러 왔다.
레온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겁도 없이 사신에게서 죽음의 키스를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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