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based wizard RAW novel - Chapter (104)
턴제의 마법사 104화
예르닐은 속상하다
암향소영과 영체 수렁이 시전되던 시점.
집정관과 함께 마법 대학 기숙사로 돌아온 예르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숙사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 변환 때문에 철근과 벽돌의 위치가 어지럽게 뒤섞여 재배치되면서 학생들은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와 비명을 질러댔다.
한밤중의 그 소동은 흡사 12년 전 그날처럼 아비규환이다.
‘케일럽!’
308호엔 이미 케일럽이 없었다.
케일럽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미끄럼틀로 뛰어드는 멜디니 교수의 뒷모습만 목격했을 뿐이다.
방의 내부에는 벽 곳곳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새겨졌고, 사파이어색 영체의 파편이 액화되어 흐르고 있었으며, 거대한 검흔이 거실 전체에 걸쳐 음각됐다.
바닥에는 빗물과 피. 살아 움직이는 안개가 흩어져 있었다.
“케일럽!”
예르닐은 그대로 멜디니를 뒤쫓아 미끄럼틀에 뛰어들었고,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헉…….”
복부에 칼 조각이 박힌 채 주저앉는 케일럽이었다.
* * *
“케일럽.”
예르닐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평소 생각 없이(?) 헤실거리거나, 겁에 질리거나, 거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쫓아갔어요……?”
지금은 좀 달랐다. 예르닐은.
‘화가 났잖아?’
처음이다. 얘가 화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니.
진심으로 원망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 심층 모험가들이 케일럽 방에서 탈출했다면서요. 도망치는 걸 왜 굳이 쫓아갔어요……?”
차분한 질문에 그렇지 못한 눈가가 벌써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내면서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옛날 동료들이라서 그래요?”
“네?”
“하지만 케일럽은 심층 모험가가 아니잖아요. 왜 쫓아가냐고요! 그냥 교수님들이랑 치안관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였잖아요!”
결국 예르닐은 내 어깨에 얼굴을 콩 들이받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보고는 먼저 도망치라고 했으면서! 교수님들 불러오라고 했으면서!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근데 왜……. 왜 그렇게까지…….”
원망감 가득한 주먹이 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심층의 2인조가 문밖에 서서 현관에 노크했을 때.
나는 예르닐에게 먼저 탈출하라고 했다.
예르닐은 싫다고 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만약 저 혼자 살아남았으면……. 저는 어떤 기분일지.”
흐느끼는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것도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녀는 교수들을 불러와야만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살아남기’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나였다.
나보다 훨씬 강한 적들을 상대로 무리하게 추격해 내 목숨을 함부로 걸었으니까.
“……미안해요.”
“케일럽이 전에 그랬잖아요. 쉽게 목숨을 던지지 말라고.”
3층에서 나 대신 죽으려고 예르닐이 늑대들 사이로 파수꾼 재배치를 썼을 때 말이다.
그 전투를 마치고 생환했을 때 나는 예르닐에게 정색하고 그렇게 말했었다.
너무 쉽게 목숨을 던지지 말라고.
“근데 케일럽은 왜 그래요……?”
“미안해요. 조심할게요.”
예르닐은 훌쩍훌쩍 눈물을 닦아냈다.
“혜담 때문이죠?”
엥?
“그 요호족이랑 연인 사이였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리고 그 요호족이 빙의자였다면서요. 아까 그 두 명이 혜담을 죽인 거죠? 그리고 케일럽한테 덮어씌운 거예요. 그렇죠?”
예르닐이 아까 했던 추리에 확신을 가져 버렸다. 내가 턴제 명령으로 주입한(?) 생각이었는데, 이거 완전 자승자박이 되었잖아?
“그래서 케일럽은 감정적이게 된 거야! 그 두 사람을 그냥 놔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추격한 거예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거 아니야!
“많이…….”
뭔가 이상한 오해가 생겼다.
“많이 사랑했어요?”
울면서 발갛게 변한 얼굴로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요호족을 아직도……?”
쓰벌 나는 혜담의 얼굴도 모른다.
“나 같은 건 혼자 남겨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쓸 정도로…….”
겨우 그쳤던 예르닐의 눈물이 다시 눈가에 차올랐다.
“예르닐. 진정해요.”
일단 좀 달래주자.
“그래서 추격한 건 아니에요. 위험인물들이니까 붙잡아두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 두 사람보단 훨씬 약하지만, 작전이 있었거든요.”
“…….”
“하지만 다음엔 조심할게요. 미안해요.”
“이……이제…….”
예르닐이 코를 흡 들이마시더니 다소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제가 지켜줄게요.”
“네?”
“제가 혜담처럼 심층 모험가는 아니지만, 케일럽도 저한테 좀 의지해요.”
“…….”
“제일 위험한 자리에 혼자 남을 필요 없다고요. 대장장이랑 싸우든, 신령족이나 호인족이랑 싸우든, 이제 제가 항상 옆에 있을 거니까.”
그리고 예르닐은 다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절대 안 놓칠 거야…….”
가슴께 위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너무 가깝다.
“다음엔 블랙호넷 알집도 제가 입을 거예요.”
“큽.”
진지하게 한 얘기였지만 좀 웃겼다. 이 분위기에서 에그 플레이트 체스트 아머가 나오다니.
“왜 웃어!”
예르닐은 얼굴이 빨개져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철컥!
문을 열고 신관이 들어왔다. 엠마였다.
“어머.”
예르닐이 내 침대 위에 거의 올라타기 직전이었다.
* * *
“여기가 아무래도 환자들 돌보는 곳이라서 그건 안 돼요.”
“으앗!”
예르닐은 얼굴이 빨개져서 후다닥 내려갔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장난이에요.”
엠마는 그녀에게 웃어주고 내 옆으로 다가와서 이불을 걷어낸 후 복부의 상처를 체크했다.
“몸은 좀 어때요?”
이미 힐링 마법으로 치료해서 상처 자체는 아물어 있었다.
“움직일 만합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신전에서 요양하세요. 호인족이 깨물어서 부숴버린 칼 조각이었잖아요? 어떤 마법적 내상을 입었을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나타니엘의 신전은 소헨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이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글쎄.
그 이상으로 안전해야 하는 마법대학 기숙사 안에서 습격을 당한 지금, 소헨에 안전하다고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지금 몇 시예요?”
창밖이 밝은 걸 보니 이미 해가 뜬 모양이다.
“아침 여덟 시예요.”
의외로 늦잠을 자진 않았다.
부상도 입었고, 지난밤을 꼬박 새웠기 때문에 오후쯤 됐을 줄 알았는데.
“이틀 자고 나서 아침 여덟 시요.”
젠장.
이틀을 내리 잤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지. 지난밤, 아니, 이틀 전 밤이 말이다.
클로렌스에게 테라몬드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답사하고, 비파와 무골을 만나고, 두 녀석이 쳐들어오고, 기숙사에서 교수들과 힘 합쳐 싸우고.
어?
잠깐만.
“클로렌스!”
“네?”
“예르닐! 클로렌스가 우리 방에 들어와서 보안 마법을 걸었었잖아요!”
“그랬죠?”
“그래서 무골이 창문을 깨버렸을 때 사이렌이 울렸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그 녀석이 현관문 고리를 부숴버렸을 때는 안 울렸어요!”
“……!?”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윈덤 2인조 때문에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그러네? 그때 클로렌스가 현관에도 마법을 걸지 않았어요?”
“걸었죠.”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누군가 보안 알람 마법을 해제했다.’
아마 테라몬드를 살해한 그 범인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비파와 무골은 진범 같진 않았단 말이야. 묶어두려고 그놈들이 범인 같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아니. 잠깐만.
그럼 그 진범의 동선은 어떻게 되는 거지?
대충 다음과 같은 순서인가?
1. 테라몬드를 살해하고 현장 정리.
2. 나와 예르닐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사이, 클로렌스가 와서 사이렌과 알람 마법을 설정.
3. 나와 예르닐이 밖에 나간 사이에 사이렌과 알람 마법을 해제.
4. 밤늦게 우릴 다시 죽이러 찾아왔지만 심층 괴수 대전이 벌어지는 중이라 피신.
“헉……?”
예르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그때 누구 만났는데……?”
“네?”
“빨간 머리 여자 마법사랑 부딪혔어요.”
* * *
12년 전 미궁 분출은 소헨 시 전체에 걸쳐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때 파괴된 구역 중에서는 아직 제대로 재건되지 않은 곳도 많다.
소헨 외곽의 허름한 폐건물.
심층의 모험가 두 명은 초주검이 된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늘은 좀 어떠냐? 무골.”
비파가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부상이 심했지만, 호인족 무사는 한때 상처가 덧나 위험한 수준까지 갔었다.
마탑 군주의 일격이 호인족의 외투는 물론이고 단단한 가죽까지 찢어버렸던 것이다. 출혈은 엄청났다.
“그럭저럭.”
하지만 호인족 특유의 생명력과, 일류 심층 도사의 놀라운 치유술이 어우러져 이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미궁에 들어갈 때처럼 갑옷을 입고 올걸 그랬군.”
“그랬으면 돌아다니기 불편했을 거야.”
비파는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
쭈글쭈글한 주름이 잔뜩 져있었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착벽인광의 리스크는 크다. 마법으로 젊음을 유지하던 신령족 도사는 힘이 바닥나서 급속도의 노화가 진행되었다. 이 상태는 단시간에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파는 없는 에너지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기어이 무골의 목숨을 건져냈다.
게다가 본인도 마탑 군주의 대검에 찔렸던 상처를 치료해서 생명에 지장 없는 수준까지 회복시킨 것이다.
과연 심층 모험가라고 할 만한 실력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네 힘을 아껴야 돼. 네 도술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소헨에서 탈출할 수 없다.”
“탈출할 생각은 있고?”
“승강기 문제만 해결되면.”
“……케일럽. 아마 살아있겠지?”
“급소를 노렸지만 빗나갔어.”
호인족은 아쉬움에 그르렁 소리를 냈다.
본래 같았으면 그는 그 칼조각을 정확히 케일럽의 머리에 꽂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발밑이 영체 수렁으로 불안정했고, 마탑 군주와 힘싸움을 벌이던 중이었으며, 뒤에서는 치안관들이 공격할 각을 재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살아있을 거다.”
“치안관들에게 얘기했을까? 승강기 위치를?”
“글쎄.”
“…….”
“…….”
잠깐 침묵이 흐른다.
비파는 지난 이틀 동안 몇 번 나눴던 주제를 다시 꺼냈다.
“대체 정체가 뭘까.”
“케일럽이지. 빙의자는 아니야. 봤잖아? 거짓말 방지 마법이 안 통했어.”
“멜디니가 마법을 봐줬을 가능성은……? 없겠지?”
“없지. 케일럽이 빙의자면 우리보다 먼저 멜디니 손에 죽을 텐데.”
“하지만 우리가 알던 그 애송이랑 차원이 달라. 그냥 아예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이런 풋내기 애송이와 대체 왜 사귀냐고 혜담을 놀려댔는데, 어쩌면 진짜 그를 제대로 알아본 것은 혜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제안했던 거래 말이야.”
비파가 말했다.
“이젠 늦었겠지?”
그때 케일럽은 혜담의 정보와 승강기 정보를 교환하자고 했다. 비웃음으로 응수하는 심층 모험가 두 사람에게 ‘마지막 기회’ 운운하며 윽박질렀다.
당시만 해도 코웃음을 쳤는데, 놀랍게도 이제는 진짜 그때 케일럽이 제안했던 기회가 아쉬운 입장이 되고 말았다.
“연락해 볼까?”
비파는 부채만 사용하고 마법 완드 같은 건 쓰지 않지만, ‘메시지 전송 완드’만큼은 예외다. 그 편의성 때문에 한 자루 챙겨다닌다.
“지금에라도 정보 교환과 협력을 해볼 생각 없느냐고…….”
“크르르…….”
무골의 그르렁 소리가 좀 더 거칠어졌다. 그는 비파처럼 사교적인 성격이 못 되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 방법이 최선이다. 무골. 시간을 더 주면 결국 케일럽이 치안본부에 알려줄 거야. 승강기가 치안본부에 넘어가면 그때부턴 끝장이다.”
“정말.”
무골의 이빨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마음에 안 드는군. 좋을 대로 해라.”
비파는 수첩을 꺼내어 메시지를 썼다. 교양을 갖춘 신선답게 차분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격식을 차려서.
[케일럽.네가 이미 우리에게 한 번 기회를 베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복을 걷어차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으니, 다친 몸으로 소헨 전체에서 수배된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너에게 큰 부상을 입혔으니, 그 또한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 패전의 욕됨이 결국은 내가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으니 용서를 구하기도 민망하구나. 하지만 케일럽. 우리의 지난 정을 생각해서라도 염치불구하고……]
“아니. 쓰벌 뭐 이딴 식으로 써!”
무골은 수첩을 빼앗아서 종이를 마구 찢어버렸다.
“이건 아니지! 이 정도로 우리가 고개 숙일 건 아니지! 자존심도 없냐!”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펑!
비파의 눈앞에 갑자기 쪽지가 나타났다.
저쪽에서 선수를 쳤다.
[케일럽입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