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based wizard RAW novel - Chapter (2)
2화
턴제의 모래시계
상황을 파악하는 데 5초.
전략을 강구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55초.
······라고 생각하면서 또 1초를 손해 봤다.
‘생각해. 생각.’
이 위기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모래시계 위에는 행동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행동력 : ■■■■]본래 컴퓨터로 게임을 할 때 행동력이 4점이라면 10미터 이상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 몸은 꼼짝달싹을 못했다.
그 이유도 짐작이 된다.
지금 주어진 60초는 생각할 시간일 뿐.
사실 내 행동력은 0.0몇초의 그 찰나의 순간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에 힘을 주어 억지로 들어보았다. 손이 3센티미터 쯤 움직이자 행동력이 한 칸 줄었다.
[행동력 : ■■■□]‘안 돼.’
이 방법은 안 된다. 행동력을 전부 써도 완드를 들어서 저 칼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피하는 건?
내가 피할 수 있을까?
남은 행동력을 쥐어짜서 머리를 숙이면?
칼날은 내 목의 경동맥 대신 광대뼈를 칠 것이다.
즉사하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존나게 아프겠지. 그냥 즉사할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실수하면 눈알도 날아간다.
그리고 생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칼에 맞으면 그 충격에 고개가 돌아갈 것이고, 내 시야가 놓쳐버린 고블린 2번이 창으로 내 폐부를 찔러버릴 테니까.
아니 그럼 시발 잠깐만.
이 60초가 대체 뭔 소용인데?
죽기 전에 그냥 기도할 시간 주는 거 아냐? 이게 광신도한테나 좋지 나한테 무슨 쓸모가 있냐?
“하아.”
무심코 한숨을 뱉은 다음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거 봐라?
좀 이상하잖아?
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한숨은 어떻게 쉬었지? 0.0몇 초 동안 이렇게 느린 한숨을 토할 수 있나?
아까 세상 만물이 정지했을 때 나도 모르게 ‘뭐야?’하고 말을 해버렸다.
“말을······할 수 있나?”
조심스럽게 성대 밖으로 목소리를 꺼내보았다.
정말 된다.
나는 말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이 게임은 최대 4인까지 멀티플레이를 지원한다. 아무도 멀티를 하지는 않아서 싱글 게임 취급받지만.
‘채팅 기능이다.’
그건 멀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게임 중 엔터를 치면 채팅창이 뜬다. 거기서 문자를 치면 캐릭터 위에 말풍선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채팅의 일종으로 판정되는 게 아닐까?
전투 중에 아무리 채팅을 쳐도 행동력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창도 할 수 있을까?’
이 게임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때 항상 영창을 한다.
그러면 채팅을 할 때와 똑같이 말풍선으로 마법사 캐릭터 위에 영창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 영창 메시지는 물론 플레이어가 엔터키를 치고 입력한 건 아니다.
캐릭터가 마법을 쓰면 자동으로 뜬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타입의 말풍선이다.
그럼 혹시······.
‘제발.’
나는 손목을 돌려서 완드의 방향을 조정했다. 눈앞의 고블린을 겨누었다.
[행동력 : ■□□□]손목의 움직임과 함께 행동력은 두 칸 줄었고, 모래시계의 시간은 4초 남았다.
3초.
2초.
“파이어볼.”
영창 주문을 외는 순간,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행동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턴을 종료합니다.]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쿨타임 : 60초]콰아아앙!
지혜 10점의 파이어볼이 완드 끝에서 분출했다. 그 화염은 눈앞의 고블린과 그 뒤에 창을 들고 있던 고블린 2번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
“끼이이이이이아아아아아악!”
불이 붙은 고블린 둘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그것은 마치 지옥이 뿜어내는 비명 같았다.
잠시 후에 그들이 축 늘어진 다음.
“헉···!”
비로소 나는 긴장으로 막혀있던 숨이 탁, 하고 터졌다. 마치 댐이 무너져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입에서 날숨이 꿀렁거렸다.
“헉······. 헉······.”
목이 따끔하다. 고블린 1번이 파이어볼에 처맞고 날아갈 때 그놈의 칼끝이 내 목을 얼마간 파고들었던 것이다. 찢어진 틈에서 피가 흘러서 뜨거웠다.
‘죽을 뻔했다.’
미친.
죽을 뻔했다고!
태어나서 처음 겪어본 죽음의 공포에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추운 날 오줌 싸면 부르르 떠는 거랑 같은 수준으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거렸다.
“흑······흑흑.”
뒤에서 엘프녀가 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 새삼 다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대체 나한테 왜 지랄이야.’
그 쓰레기 같은 게임 클리어한 게 무슨 잘못이라고!
엄한 사람을 여기로 끌고 와서 이딴 진창에 처박아놓은 신인지 개발자인지 우주 물리학의 어떤 쓰레기 같은 법칙인지를 저 고블린처럼 태워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과정에서 부정 다음이 분노라고 했던가?
고백하건대 처음 마법 대학에서 완드를 집어들고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부정을 실컷 했다.
이건 멍청한 악몽의 하나일 거라고. 곧 깨어날 거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그리고 이제는 분노의 턴이다. 왜 하필 나야! 난 착하게 살았잖아! 하는 분노가 불처럼 들끓었다.
‘침착하자.’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악을 썼다. 침착해야 한다. 냉정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분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난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나는 턴제 마스터를 깨고 개발자 난이도에 도달한 플레이어다. 이 게임의 마법사 육성의 달인이다. 나만의 빌드업으로 그 누구보다도 이 마법사를 잘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 나다.
나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을 거다.
***
머리가 좀 식으니까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서기 시작했다.
일단 턴제의 모래시계.
그 용법을 알려주는 친절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턴제의 모래시계는 60초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법은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입니다.] [턴제의 모래시계는 응급 상황에서 자동 발동됩니다.]홀로그램으로 된 마법 모래시계가 일정한 거리에서 나를 따라왔다.
언제든 그걸 뒤집기만 하면 60초의 시간을 벌고 전략을 짤 수 있다.
뒤집는 방법은?
손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겐 보이지도 않고, 나도 만지는 것 자체가 안되는 물건이니까.
다행히 손대는 것보다 사용법은 더 간단했다.
그냥 뒤집겠다 마음을 먹는 것.
그거면 모래시계를 발동할 수 있다.
‘이거면 당장 죽을 위험은 없다.’
다만 항상 무적은 아닌데, 모래시계는 한 번 쓰면 60초를 기다려야 다시 재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모래시계는 발동 이후 재발동할 때까지 60초의 대기시간을 갖습니다.]아까 고블린 둘을 처치한 후에도 ‘모래시계가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실제로 마법 모래시계는 그때 뒤집어져서 모래가 반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쿨타임으로 보건대 아마 실제 전투에서 모래시계를 쓸 수 있는 횟수는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모래시계의 남은 쿨타임은 17초.
가능하면 이 시간을 모두 소진한 다음 움직이는 게 좋겠군.
이전에는 다들 멘붕한 상태로 멍청하게 있다가 불시의 습격을 받은 것이지만, 이제부턴 사방을 경계하면서 진행해야겠다.
난 어떻게든 출구 게이트를 찾아내 탈출할 것이다.
난 절대로 죽지 않을 거다.
‘그리고 파밍.’
마법 대학에서 주는 초반 완드는 각자 1등급 마법이 하나씩 담겨 있다.
내 것은 ‘파이어볼’이었고, 뚱뚱이의 것은 ‘염력’, 광신도의 것엔 ‘얼음송곳’이 담겨 있었다.
난 그들의 완드를 챙겼다.
“이 중에 쓰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요······.”
엘프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쪽은 완드에 무슨 마법 들어 있어요?”
“번개 쇼크요······.”
“몬스터가 가까이 붙으려고 하면 그거 쓰세요.”
“네······.”
고블린 시체에서 마석 두 개, 아군 시신에서 감자 두 알을 챙겼다.
나는 엘프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갑시다.”
솔직히 전력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
엘프녀가 정신을 놔버린 줄 알고 약간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그녀는 10분 쯤 걷자 아주 미약하게나마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내게 이런 질문을 던져왔다.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이런 짓이요?”
“비싼 돈 주고 노예로 사들여서 청소나 빨래 같은 걸 시킬 줄 알았어요. 왜 우리를 미궁에 보내는 걸까요······?”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게임 시나리오상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생성하는 시점보다 몇 년 전.
미궁이 분출했다.
그로 인해서 수많은 모험가들이 죽었다. 이제 마법 대학의 마법사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래서 마법 대학은 미궁 탐험 마법사를 속성으로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 방법이 바로 ‘대량의 노예들을 미궁에 던져넣고 살아남는 사람을 마법사로 키우기’였다.
그 근거 첫 번째. 완드 하나 들고 미궁에 들어가서 출구를 찾아 나올 정도면 미궁 마법사로서 재능이 출중하다고 볼 수 있다.
근거 두 번째. 노예의 몸값은 매우 싸다. 엘프녀 기준에서나 ‘비싼 돈’이지, 마법 대학이 한 해 굴리는 자본을 기준으론 푼돈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지식들을 엘프녀에게 나눔하진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 이곳 세계와 백 퍼센트 일치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하는 것이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엘프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중에 누가 살아 나오는지 내기라도 하나 보죠.”
열패감에 찌든 평범한 인간 노예가 동료 노예에게 분을 털어놓듯 할 만한 답변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라는 그녀의 질문에도 내 대답은 망설여졌다.
가능하면 그녀와 인간적인 대화를 섞고 싶지 않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정을 붙이는 것은 질색이다.
하지만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위급 상황에서 ‘엘프녀! 바닥에 엎드려!’라고 외칠 수는 없으니까.
“케일럽이라고 부르세요.”
계정을 생성할 때 쓴 이름이다.
“그쪽은요?”
“예르닐이에요.”
그녀는 내 옆을 쪼르르 따라오며 또 질문했다.
“케일럽 씨는 여기 오기 전엔 뭘 하셨나요?”
이런 질문 곤란하다.
나는 캐릭터 생성 이전의 기억이라곤, 팬티 바람으로 허벅지 긁으면서 개발자 난이도를 켠 게 전부니까.
“케일럽 씨는 과묵하시네요.”
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가 멋쩍어하며 혼잣말을 했다.
“노예상선에서 다른 분들하고는 꽤 살갑게 대화하셨던 것 같은데.”
뭐?
그럼 마법 대학에 도착하기 전의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이건 좀 걱정스럽다.
여길 탈출한 후에,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저는 동쪽 끝에 요정 숲에서 살다가 플랑도르 시로 갔어요.”
예르닐이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길 시작했고 난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마법 대학이 미궁에 처넣는 바람에 생긴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상실.’
이런 변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길 탈출하는 것 자체가 고비인데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일을 걱정할 여력 따윈 없다. 현재에 집중하자고.
“거기서 심부름센터에 취직해서 소포 배달하는 일을 했거든요.”
옆에서 떠드는 예르닐의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그 심부름센터가 소포로 위장해서 마약을 공급했던 거예요. 저는 당연히 몰랐죠! 근데······결국 마약 운반책으로 몰려서요. 벌금 못 내서 노예가 됐어요.”
그 팔자 넋두리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예르닐.”
“네.”
“조용히 하세요.”
짜증부린 건 아니다. 파티를 위한 조언이었다. 소음을 듣고 어떤 몬스터가 찾아올지 모르잖아.
이건 게임하고 달리 실제 상황이라고.
“죄송해요······.”
생기가 푹 꺼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새삼 내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는 뚱뚱이와 광신도가 죽은 충격으로부터 이렇게라도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기구한 운명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대한 일말의 위로라도 얻어야만 했다.
그녀에겐 지금 이 미궁의 삶을 이어갈 최소한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요했다.
“······목소리 낮춰서 얘기하면 괜찮아요. 너무 크면 몬스터······.”
철컥.
예르닐의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당신의 턴입니다] [행동력 : ■■■■]모래시계가 뒤집어졌고 시간이 멈췄다.
“하.”
탄식이 절로 터졌다.
“이러지 마 제발.”
절망감에 눈을 꾹 감았다.
예르닐이 함정을 밟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