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0
2장 네가 한번 해봐
재벌작곡가라고 불릴 정도로 손동하의 전성기는 화려했다. 90년대와 00년대, 두 세대에 걸친 손동하의 영향력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수많은 차트 1위 곡 배출, 그가 곡을 준 신인은 반드시 스타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한풀 꺾인 가수에게 곡을 줘서 다시 정상으로 올려주었다는 숱한 일화 등등.
흥행의 보증수표 같은 인물이었다.
괴물 같은 사람. 그래서 몬스터라고 불렸다지.
그 시절에는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에게 곡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스토커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그의 성격상 그는 늘 작업실에서 곡만 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표절 시비가 한 번도 없었던 사람. 아니, 다른 작곡가가 그의 곡을 표절했다는 시비는 있었지만 그의 창작품에 대한 의심은 일어난 적도 없었다.
언제나 독창적인 음악 세계로 듣는 이를 만족시켜 주었고, 다루는 음악의 스펙트럼도 넓어서 거의 모든 장르를 한 번씩 손대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넘쳤으니…….
게다가 성품이 온화하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타입이어서,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다.
제작자들뿐만 아니라 가수들까지, 그를 멘토로 삼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회사 하나 차려서 본격적으로 제작에 손을 대보지그래?”
그리고 어느 날, 그런 제안을 해온 사람이 있었다.
“내가 무슨 제작을…….”
“왜 그래? 누구보다 잘할 것 같은 사람이.”
그렇게 곡만 쓰고 있지 말고 전반적인 제작까지 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본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골치 아픈 것을 질색하는 그의 성격상, 그는 조용히 곡을 쓰고 그 곡을 가수가 부르는 것을 지켜보는 게 훨씬 좋았다.
“정 안 되겠으면 자네는 지금처럼 곡만 써.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자네를 존경한다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그 사람들과 모여서 일을 하면 얼마나 좋아.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조용히 사는 것도 일종의 죄야. 재능을 낭비하고 있는 죄.”
그 말이 꼭 귀에 와닿은 것은 아니었지만 2000년대 후반이 되어 예전 같지 않은 그의 영향력,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던 그때.
손동하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계획이 있는 거야?”
그런 제안을 해왔던 건 그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었던 박정식이라는 사람.
손동하와는 15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다.
대중음악 쪽 종사자는 아니었지만 사업 수완이 좋고 인맥이 넓어 최적의 파트너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회사가 몬스터 뮤직이었다.
대표이사는 손동하, 박정식은 전무이사. 그리고 손동하를 따르던 많은 아티스트들과 실무진들이 기꺼이 함께해 주었다.
그 뒤의 이야기까지 한다면 조금 길다. 손동하 사장의 감이 예전 같지 않아졌고 시대를 못 쫓아간다는 평을 받기 시작할 때라 손동하 사단은 힘을 쓰지 못했고.
자금을 관리하고 있던 박정식 전무는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김인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이야기까지 하려면 너무 길고, 대략 이런 경위로 회사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짚고 갈 필요가 있어서 언급해 봤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박정식 전무라는 인물.
나는 이제까지 그와 딱 두 번 마주쳤다.
박정식 전무는 앞서 말했듯이 자금 쪽을 담당하는 사람이지 뮤지션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투자를 받아오는 일이 그의 역할이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자 이 회사를 돌아가게 하고 있는 원동력.
그래서인지 그가 회사에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한 번, 전달할 내용이 있거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 때에나 회사에 들러서 일을 보곤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김인혁에게 할 말이 있어서 임원실을 찾아갔을 때였다.
언제나 비어 있던 자리에 사람이 있길래, 그리고 그곳은 박정식 전무의 자리였기에,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하고 꾸벅 인사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나에게 ‘수고 많아요.’ 하고 말을 했었지.
두 번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애들 연습실은 지하에 있었고, 사무실은 2층에 있으니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곤 했다.
그날은 박정식 전무가 회사에 나오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또 마주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츠걸스의 투자를 받아내면서, 투자자가 아이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기에 자기가 데리고 나가 인사시키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뭐 불건전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거액이 오가는 일인 만큼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애들의 실물을 보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투자자가 불건전한 목적으로 애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날 그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다.
50대 초반. 손동하 사장보다 고작 두 살 많다고 하지만 겉보기에 열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비교적 풍성한 편이었지만 흰머리가 군데군데 솟아나 있는 머리숱, 가느다란 눈과 얄팍한 인상으로 조금 차가워 보이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웃는 낯으로 깊게 패여 있는 주름 때문에 어쩐지 호감 어린 얼굴.
장신에다 어깨가 넓은 편이어서 체격도 보기 좋았다.
금융 쪽에서 오래 일을 하며 고객들을 상대했기 때문인지 깔끔한 슈트와 은은한 향기도 인상적이었고.
“바쁘지?”
전에는 ‘수고 많습니다’ 하고 경어를 쓰더니 이번에는 대뜸 반말이었다. 그렇다고 불쾌한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아랫사람을 챙겨주는 듯한 자상함이 어려 있는 말투였다.
“할 만합니다.”
“자네 능력 있다는 얘기 들었어.”
“그냥 열심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조심해.”
“……?”
“차성우 선생처럼 되지 말라고.”
“아, 예.”
“애들 건드리지 마.”
“…….”
“그런 일로 자네 재능이 묻혀 버릴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때 내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을 했는지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었는지.
그건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목소리라서 그런지 굵고 부드러운 음성이었고, 발성적으로도 듣기 괜찮았기에 그와의 대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노래 좀 하시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지.
그리고 이날, 박정식 전무는 또 한 번 회사를 찾아왔다.
비츠걸스의 두 번째 곡도 반응은 없었다.
투자자들에게서 강한 압박을 받고 있는 박정식 전무는 모든 실무진을 불러내어 원인을 찾아보고자 했다.
나 또한 애들의 보컬 트레이너 자격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다.
* * *
황유미의 그리고 다시 사랑은 여전히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4대 음원 사이트 전부 다.
이런 성과는 몬스터 뮤직의 소속 아티스트 중 유아연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의 성과였다.
홍보 문구로만 쓰이던 역대급 발라드곡이라는 얘기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차트에서 아웃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처음 만난 그 날에도 덩달아 순위가 상승 중이었다.
“전부 모였습니다.”
“그래? 그럼 시작하지.”
비츠걸스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
그래도 나는 이 회사의 자존심을 지켜낸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어깨를 펴고 있을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것처럼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고부터 시작해 봐.”
이윽고 본부장이 대표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3달 동안 비츠걸스의 활동,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는 내용.
두 번째 싱글도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고, 방송 스케줄은 잡기 어려워졌으며, 팬클럽의 증가 추이도 형편없었다.
실패했다는 내용을 간추린 보고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팬미팅을 가질 예정이고 길거리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내용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 다들 죽을상을 하고 있어? 회사 망했어? 왜 그래?”
“아닙니다.”
“고작 석 달 지났어. 내가 그랬지, 일 년은 지켜봐야 한다고.”
데뷔 후 석 달 이내에 정상급으로 올라가는 팀은 손에 꼽는다.
대형 기획사에서 내보내는 아이들이나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박정식 전무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문제는 뭐냐면…… 처음 석 달은 성과가 없어도 좋아. 하지만 앞으로 반등할 수 있다는 기대가 필요한 거야. 이 사람들아, 투자하신 분들도 데뷔하자마자 뜰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현재로썬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잡아 나갈지가 관심사겠지.”
그리고 회의 내내 김인혁은 넋을 놓고 있는 듯 눈빛이 죽어 있었다.
요즘 들어 계속 저렇다. 이번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는 사람인 만큼,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은 숨길 수가 없었다.
“다만…… 어디에서 잘못된 건지는 파악을 해야겠지. 너무 큰소리를 쳤어. 무모한 시도를 했던 거야. 비록 실패를 했지만 언젠가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무모한 시도를 반복하겠다고 하면 이제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거야.”
김인혁은 프로듀서로 데뷔 이후, 요즘처럼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인혁아.”
“네.”
“잘 안 될 때도 있는 거야. 돈 까먹을 수도 있어.”
“…….”
“하지만 중요한 건 잊지 말아야지. 몬스터 뮤직의 가치를 낮추는 일은 하면 안 되는 거야.”
“…….”
“실패를 하더라도, 우리의 가치를 낮추지는 말자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박정식 전무는 흐뭇하게 웃으며 김인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녀석은 내내 똥을 씹어 먹고 있는 얼굴이었다.
“팬미팅을 하고 길거리 홍보를 하고…… 뭐, 좋아. 우리의 스페셜리스트들이 생각해낸 것이니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겠지. 다들 고생이 많았어. 그렇다면 말이야, 인혁이는 이제 다음 프로젝트를 추진해 보자.”
“다음 프로젝트요?”
“남자 애들 좀 챙겨봐.”
“남자 애들이요?”
“다음 주까지 내가 볼 수 있도록 제안서 준비해 놔.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그러자 본부장이 끼어들었다.
“김인혁 이사는 다음 싱글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다음 프로젝트를 하기에는 시기상으로 볼 때 좀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그거 하지 말고 남자 애들 챙기라는 얘기야. 너네 나한테 그랬잖아. 돈 되는 건 걸그룹이 아니라고.”
“그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저마다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럼 뭐야. 접으라는 얘기야? 하는 표정으로.
“비츠걸스 프로젝트에는 잠깐 빠져 있어. 머리도 식힐 겸 다른 일을 하고 있으라는 얘기야. 내가 볼 때는 휴식이 좀 필요해.”
“접어버리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접어? 뭘 접는다는 거야? 난 접는다는 얘기 안 했어. 비츠걸스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인혁이는 머리 좀 식히고 있어.”
“갑자기 그러시면…….”
이제는 웅성거리는 소리까지 회의실을 메우기 시작했다.
“적당한 사람이 있겠지. 일도 인연을 타는 거야. 내가 연예계는 잘 모르지만 세상 돌아가는 거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 인혁이는 다음 프로젝트 준비해서 제안서 나한테 제출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지. 별로 할 얘기들도 없잖아?”
투자금을 가지고 와서 회사를 돌아가게 하는 인물이기에, 가지고 있는 권한도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음악 쪽 일을 하지 않아서 실무에만 개입하지 않을 뿐, 회사가 돌아가는 건 사실상 이 사람의 뜻대로 되고 있는 것이었다.
“박영민 씨.”
“예?”
“당신은 좀 남아.”
“저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자리 좀 비켜 주고. 나하고 박영민 씨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까.”
사람들은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저마다 내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식어버린 커피로 목을 축였다. 결국 회의실에는 박정식 전무와 단둘이 남겨졌다.
“인혁이 얼굴이 완전히 상했어. 그렇게나 자신만만하더니…….”
나를 여기에 왜 남긴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나는 한 마디라도 내뱉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잘 안 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를 말아먹은 건 처음이야. 하도 큰소리를 치길래 못해도 중박은 칠 줄 알았지. 반응이 이렇게 없을 줄 누가 알았겠어.”
깍지 끼운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박 전무는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정인이라고 했나. 자네가 선택한 그 작곡가.”
“예. 맞습니다.”
“인혁이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아마 걔보다 더 어렸지. 스물다섯인가 여섯인가 그랬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는군. 그런데 말이야, 그거 곡도 자네가 손댄 거라면서?”
“어드바이스만 조금 해준 겁니다.”
그러자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나타나고, 뒤이어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이 그와 나의 거리를 다시 팽팽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돈을 만지며 살면서 내 나름대로 익혀온 감각이라는 것이 있어. 이건 되겠다. 이건 위험하다. 이건 지켜봐야 한다. 이런 감각이 없으면 완전히 밑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게 내 일이었거든. 처음 인혁이를 밀어줬을 때도 그랬어. 반대도 있었지만…… 걔는 될 것 같았거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될 것 같은 사람은 밀어주고…… 잘 안 되고 있는 사람은 자극시키려고 했던 거지. 결과적으로는 둘 중 하나만 성공했지만.”
테이블의 나뭇결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던 박정식 전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거운 느낌을 품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해야겠어. 무리한 수를 한 번 둬보는 거야. 내 감을 믿고.”
한 모금도 남아 있지 않은 커피를 애써 탈탈 털어 마셨다. 달콤하면서 쓰디쓴 향내가 간신히 내 혀를 축여주었다.
“오늘부로 비츠걸스의 메인 프로듀서는 자네로 교체할 거야. 열심히 해봐.”
“감사합니다.”
“급하진 않아. 아이돌 농사를 처음 해보는 회사에서 처음부터 수확물을 거둬들일 수는 없는 거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노하우를 익히는 진통을 겪어야 하는 거지. 그렇지만…… 우리의 밭이 기름지다는 건 보여줄 필요는 있잖아. 언젠간 여기에서 싹이 틀 것이라는 기대는 심어줘야 되지 않겠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미니 앨범이 나올 때까지야. 자네를 시험해 보는 건 말이야.”
첫 미니 앨범.
현재 두 곡의 싱글을 발매했다. 여기서 두 곡이 더해져 하나의 앨범으로 묶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첫 단계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허락된 기회는 두 곡이다.
앞으로 발표하는 두 개의 곡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 곡 좋더군. 1위로 만들어낸 곡.”
“감사합니다.”
“노래 선생으로만 있기에는 답답했겠어.”
나는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이 친구라고 했지? 하지만 인혁이가 자네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일반적인 친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내가 자네들보다는 세상을 조금 더 살았잖아.”
박 전무는 이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번 보여줘 봐.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 * *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낯선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말소리가 줄어들고…… 거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날아와 박힌다.
노골적인 건 아니었고 힐끗힐끗이었지만.
“영민아. 자리 어떻게 할까? 이제 여기는 불편하지 않아?”
본부장이 묻는다.
나는 보컬 트레이너니까 신인개발팀 소속으로 있었다. 내 책상도 그쪽 부서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맡고 있는 업무의 내용이 달라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성격의 업무라고는 할 수 없고.
Artists and Repertoire.
기획을 하고 프로듀싱, 레코딩 관리 등등. 또한 신인을 발굴하는 일도. 크게 봐선 마케팅도 여기에 속한다.
쉽게 말해서 재능 있는 아티스트를 발굴해서 키워내고, 그 결과물을 팔아먹는 일.
전에는 그것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턴 업무의 영역이 조금 넓어진 셈이었다.
“전 이 자리가 편해요. 창문 바로 옆이고 해서.”
“그러던가. 그럼 이따가 김 이사랑 같이 얘기 좀 해보자. 어떻게 할 건지 좀 잡고 가야 되니까.”
말하자면 인수인계 같은 건가.
“알았어요.”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지지는 말고. 경험 쌓는 거야. 경험.”
“예.”
“우리야 맨날 하던 사람들이 해왔던 대로 하니까 틀에 박힌 그런 게 있잖아. 너는 새로운 인물이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를 해본다는 거지. 이번에 네가 만진 곡이 1위도 했으니 나름대로 명분도 있고. 야, 그런데 그거 곡 좋더라.”
“괜찮죠?”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되더라고.”
점심은 김인혁과 같이 먹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자기 자리를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를 대하는 녀석의 감정에는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야. 몇 달 동안 지켜봤으니까 어렵진 않을 거다.”
의외로 녀석은 담담했다.
다른 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아마도 김인혁은 회의 전부터 이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정식 전무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충격적인 발표를 했을 리는 없다는 얘기였다.
김인혁에게 먼저 의사를 물어보고,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이후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은 이 회사의 수석 프로듀서 아닌가. 몬스터 뮤직의 왕자. 몬스터 뮤직을 여기까지 키워낸 장본인.
그러니 비츠걸스가 나에게 맡겨진 배경에는 김인혁의 입김도 어느 정도 들어갔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무리수를 막 두지는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 충분히 상의를 해서 결정해야 돼.”
“그래. 알았다.”
“아니…… 마땅히 상의를 할 사람도 없을 거다. 애매한 거 있으면 차라리 나한테 얘기해라. 남들 보는 앞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라면 톡으로 보내고.”
“그래.”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똥을 씹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굳어 있던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왜 나를 이 회사로 데리고 온 건가.
물어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줄 수 있겠냐. 너는 왜……?
“중요한 건 말이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야. 같은 회사 안에 있다고 해도.”
마인부우 같은 녀석은 뜨거운 국밥을 입으로 훌훌 잘도 넘기며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마지막 한 모금을 탈탈 털어 넣은 뒤 손오공을 때려잡은 마인부우처럼 환하게 웃었겠지만. 그런 모습까진 보이지 않았다.
“잘해볼게.”
“그래.”
* * *
몬스터 뮤직은 음악이 중심인 회사라서 그런지 뮤직 프로듀서의 권한이 막강했다. 단지 앨범 디렉터의 역할이 아니라, 그 앨범이 나오는 것에 관한 모든 일을 이끌고 있는 셈이었다.
더구나 회사의 규모가 작아서 분업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 프로듀서 한 명이 총대를 메고서 이끌고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기에 비츠걸스가 나에게 맡겨졌다는 것은 내가 이 애들의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앨범을 기획하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멤버 구성에 관해서도 내가 손을 댈 수 있었다.
다만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 나의 책임이 된다. 10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온 프로듀서가 자기 자리를 빼앗길 정도로, 책임 또한 막중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며 뒤엉켰다. 나름대로 계획을 잡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우선은 애들 연습하는 거나 지켜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연습실을 찾았는데.
이게 웬일인지. 애들이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오늘 스케줄 있니?”
“예.”
회사에서부터 무대 의상을 입고 있는 걸 보니까 방송은 아닌 듯했고. 그렇다면 행사를 뛰러 가나 보군.
“박 선생님. 왜요?”
매니저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애들 좀 보러 온 겁니다.”
“오늘 레슨 안 돼요. 갑자기 잡힌 스케줄이라서 애들 못 뺍니다. 그렇게 아세요.”
“그런 일정 없었잖아요?”
“만들면 있는 거지, 없는 게 어딨어요?”
전부터 느꼈지만 성격 참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애들 의상이 참…….”
하얀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짧은 스커트. 애들하고 자주 어울리는 나조차 똑바로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의상은 또 왜요? 행사는 원래 이렇게 입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애들은 아직 이런 의상이 익숙하지 않은지 이따금 스커트자락을 끌어내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안무를 하면 속바지가 훤히 보일 텐데. 결국 우리 애들을 행사에서라도 팔아먹으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다는 건가.
“박 선생은 다 좋은데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게 흠이에요.”
“그건 무슨 소리예요?”
“그냥 애들 노래만 가르쳐주면 되지 왜 갑자기 와서 의상이 어떠니 하면서 참견을 하는 겁니까?”
그러자 다은이는 매니저가 안 보는 틈을 타서 검지 손가락으로 뿔을 만들어 머리 위에 붙였다. ‘쌤. 매니저 오빠 아까부터 화났어요.’ 하고 나에게 말을 해주듯이.
“그게 무슨 참견이에요. 그런 말도 못 합니까?”
“노래 선생이면 애들 노래나 가르치시라구요. 1위 한 번 만들었다고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도 보기에 좀 그래요. 야, 그리고 너네들은 빨리 맞춰보고 출발할 준비해. 지금 뭐하는 거야?”
아마도 매니저팀에서는 한바탕 시끄러웠나 보다. 전무가 아침에 그러고 다녀갔으니 그쪽에서는 얘기가 좀 나왔나 본데.
“오 대리님. 저한테 불만 있습니까? 전부터 말이 왜 그래요?”
그러자 이번에는 대꾸도 안 한다.
애들의 데뷔가 확정되었을 때 관리는 매니지먼트팀으로 넘어갔다. 비츠걸스가 배정된 곳은 몬스터의 최정예 아티스트들을 관리하고 있는 매니지먼트 1팀. 그리고 치프 매니저는 오 대리가 맡게 되었다.
이따금 마주쳤을 때에도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일적으로 부딪히게 되니 이 사람의 까칠한 모습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를 얕잡아 보는 것도 아주 노골적이었고, 자기 일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막말도 서슴지 않았지.
“알았어요. 오 대리님, 수고하시구요. 앞으로는 오지랖 좀 조심하고 다니겠습니다.”
또 대답이 없다.
“아니, 앞으로라는 것도 없겠네요. 1팀은 비츠걸스를 오늘까지만 맡아주세요. 내일부터는 3팀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뭐요?”
이런 말을 하니까 대꾸를 하는군.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행사 있다는 그거, 1팀에선 그거까지만 맡아주세요.”
“박 선생이 뭔데 그런 얘기를 해요?”
“애들 다음 싱글 제작은 오늘부터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아까 김 이사한테 얘기 들었는데, 프로듀서가 매니지먼트까지 관여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박 선생이 뭘 맡는다구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오늘 오전에 전무님 주최로 회의가 있었고 거기서 그렇게 결정되었습니다. 김 이사는 다른 일을 맡기로 했고 비츠걸스는 제가 맡습니다. 곧 있으면 오 대리님한테도 이 내용이 전달될 거예요.”
그러자 오 대리의 표정이 변한다. 좁혀졌던 미간이 조금 풀어지고, 당황스러운 빛이 눈가에 그대로 나타났다.
“아니, 그렇다고 팀을 바꾸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일하기 편한 팀을 선택하는 겁니다. 저는 3팀이 편해요.”
진짜로 그렇다. 3팀의 정영수 팀장이 훨씬 편하다.
“일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게 있는데.”
“지금까지 해오신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3팀장하고는 일을 몇 번 해봤는데 잘하시더군요.”
개인적으로도 이번에 황유미가 차트 1위를 한 것에는 정 팀장의 공로가 절반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디를 붙잡고 일주일 동안이나 통사정을 했다고…… 덕분에 좋은 샷으로 유미의 모습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일단 행사 다녀오세요. 하실 얘기 있으시면 나중에 하시죠.”
1팀에는 좋은 아티스트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치열하게 일을 하는 모습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내는 가수들이 대부분이니.
반대로 3팀의 정영수 팀장은 방송 하나 꽂아 넣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멀리서도 잘 보이고 있었고.
비츠걸스에게는 정영수 팀장이 적당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음악을 아무리 잘 만들어내도 그걸 알릴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오후에 정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더니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습니다. 또 한번 해보죠. 전 이번에도 영민 선생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당신은 원래 최고의 제작자가 되었을 겁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준 말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황유미의 싱글이 1위에 올랐던 그 날, 나는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기로 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해도. 다 믿어야지.
그렇기에 내 감각이 이끄는 대로 리드를 잡아봤다.
비츠걸스의 다음 곡은, 빅밴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펑키한 리듬의 곡. 여타 걸그룹들의 후크송과는 차별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재지한 느낌의 그루브를 최대한 살리고, 아무나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가창력을 요구하는 곡으로.
비츠걸스에는 최상급의 보컬이 두 명이나 있다. 이 점을 잘 살려보고 싶었다.
아이돌 그룹이라기보다는 보컬 그룹을 표방하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곡을 수집해 주세요. 마감은 없습니다. 완성되는 대로 계속 보내주세요.”
그리고 내 감각이 가장 강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곡으로 선택할 것이다.
음악을 잠깐 듣는 것만으로도 ‘오! 이거 누구 거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 있도록.
“틈새시장을 노리시는 건가요?”
“그것보다는 실력 있는 그룹이라는 걸 알릴 겁니다.”
김인혁이 만들었던 지난 두 곡은 너무 유행을 따르는 감이 없지 않았다. 따라부르기 쉬운 후렴구가 계속 반복되는 구성은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녀석의 장점이라면 드라마틱한 구성 속에서 뚜렷한 멜로디 라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장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시류에 편승해서 곡을 띄우는 것에만 급급했던 것인지.
그래서 반대로 가 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애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킬 겁니다.”
“영민 선생님답지 않게 그런 말씀을…….”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하면서, 저게 신인 맞아? 라는 이야기가 나오도록 할 겁니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두 번.
비츠걸스의 첫 번째 미니앨범에 수록될 두 곡을 순차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실력파 아이돌 그룹이라는 것.
이 점을 내세워서 시장을 공략해 보려는 것이다.
* * *
“가는 내내 계속 그랬다니까요. 진짜로 쉬지 않고 계속!”
승연이는 팔을 활짝 벌리면서 말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꾹꾹 참아왔다는 듯이.
“짜증 내고 욕하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뭐가 무서워? 오늘부터는 그 사람하고 일하지도 않을 건데.”
“혹시 모르잖아요. 행사 끝나고 저희 납치해서 이상한 데로 데려가면 어떡해요. 막 감금해 놓고…… 어휴, 끔찍해.”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 매니저 오 대리가 애들을 행사 장소까지 데려가는 내내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냈다면서.
“미안하다. 너희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말이야. 하더라도 행사 갔다 와서 너희하고는 볼 일 없을 때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나서 연습실 나온 담에는 계속 선생님 욕을 해대는데, 뒤에서 구시렁대는 건 또 뭐예요. 쪼잔해 보이게. 어디 감히 1위를 만들어내신 분한테…….”
그러자 리더를 맡고 있는 선하가 “그만해라” 하고 주의를 주었다.
“언니도 어제 속 시원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그게 선생님 앞에서 할 말이냐?”
연습할 때 분위기는 늘 이렇다. 팀에서 투머치토커 포지션을 맡고 있는 승연이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면 선하는 옆에서 잔소리를 하면서 말다툼이 시작되고…….
아니, 그런데 진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
“쌤. 늦었지만 축하해요!”
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은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아무튼 오늘부터는 연습만 계속 할 거야. 자잘한 스케줄은 다 쳐내고, 오직 연습에만 집중하는 거야.”
“네!”
곡이 정해질 때까지는 애들을 트레이닝만 시킬 계획이다. 최강의 라이브 머신들로 키워내기 위해서.
“두 개의 곡을 제시해 줄 테니까 이걸 카피해서 연습해 봐.”
그러면서 나는 애들에게 곡을 들려주었다.
하나는 푸시캣돌스의 곡.
뛰어난 외모와 몸매, 그리고 훌륭한 가창력과 댄스 실력을 갖춘 니콜 셰르징거가 중심이 되어 세계를 강타했던 걸그룹.
카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메인 보컬에게 요구되는 기량이 매우 높고, 안무의 난이도도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곡이야.”
가장 성공한 디바라고 할 수 있는 비욘세의 팀.
말이 필요 없는 곡이었다. 비욘세를 카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저희 보고 하라구요?”
“충분히 할 수 있어.”
“으아…….”
어떤 걸그룹도 해낼 수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 단 한 번의 무대를 통해서도 대중들에게 각인을 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푸시캣돌스의 곡은 연화가 메인 보컬, 그리고 데스티니스 차일드는 다은이가 부르도록 해.”
인혁이의 곡은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라서 애들의 가창력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10년 동안 갈고닦은 목소리를,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목소리를 유감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다은이는…… 가끔씩 내 등골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놀라운 목소리를 들려주곤 했었다.
내가 다듬어준 목소리. 그걸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이렇게 두 곡을 주신 걸 보니까……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시험해 보시려는 것 같네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연화가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의문을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야. 이런 과정을 통해서 너희를 트레이닝시키는 수준을 높이려는 거야.”
오가는 대화 속에서 잠시나마 활발해졌던 분위기였지만 연화의 목소리가 끼얹은 찬물로 인해서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의 집착하고 있다고 보여질 정도로 연화는 팀의 메인 보컬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뛰어난 마스크 때문에 회사에서는 연기를 해볼 것도 권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몬스터 뮤직이 연기 쪽을 지원해 줄 수는 없지만, 협력 회사를 통해서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지만 연화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직 가수가 되겠다고. 무대에서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러니 팀 내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를 부를 수 있는 포지션에 집착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시간은 이틀을 줄게. 이틀 동안 두 곡 다 나한테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해 놔. 선하는 안무 따서 애들 가르쳐주고.”
“네.”
연화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승연이었다.
지금이야 팀에서 서브 보컬을 맡고 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곧잘 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몬스터 뮤직에 오디션을 보러 올 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쿠스틱 기타를 가슴팍에 품고서, 능숙한 연주와 함께 잔잔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오디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스쿨밴드의 보컬로 맹활약했고, 기타와 피아노를 비롯해서 드럼까지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그리고 몬스터 뮤직에 들어오게 된 경위도 인상적이었다.
대형 기획사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작은 곳을 찾아온 다른 애들과는 달리, 승연이는 오직 몬스터 뮤직에서만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진지하게 음악을 하고 싶어서 다른 기획사는 쳐다도 보지 않고서 여기로 달려왔다고 하던데.
-인기는 없어도 좋아요. 단 한 명이라도 제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분 앞에서, 제가 만든 곡을 제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어요.
연습생으로 이 회사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명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속이 어떨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얘도 어떻게든 자신만의 무기를 돋보일 수 있게 다듬어줘야 할 텐데.
“할 수 있지?”
“해볼게요.”
“해보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 석 달 동안 활동을 하면서 대중들의 눈도장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을 거야. 내가 제시한 두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나에게 보여줘. 너희들의 새로운 싱글은 이런 스타일의 곡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 * *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곧 있으면 자정. 하지만 도로는 평소답지 않게 차들로 붐볐다.
거리에도 눈에 띄게 사람들이 늘었다. 매일 이 시간에 숙소로 돌아갔기 때문에 풍경이 변한 것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토요일이구나. 오늘.”
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선하의 눈에는 어떤 커플의 모습이 들어왔다.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 마냥 즐거워 보이는 연인은 몸을 꼭 붙인 채로 걷고 있었다.
아마 내 또래 같은데…… 평범한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건가? 대학을 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애인과 달콤한 시간을 가지고…….
“근데 선생님이 골라주신 곡 진짜 괜찮지 않아? 그런 거 제대로 해내면 어디 가서 기는 안 죽을 것 같아. 언니는 어때?”
비욘세와 니콜 옆에서 코러스만 불러 댔던 승연이는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말했다.
“안목이 좋으신 분이잖아. 황유미 씨를 단기간에 그렇게 띄워놓은 것도 그렇고…… 우리들 보컬 실력을 성장시켜 주신 것도 그렇고, 진짜 능력이 있으신 분이야.”
“난 진짜 그런 곡 해보고 싶었었는데…… 선생님이 곡 처음에 들려주셨을 때 귀가 뻥뻥 뚫리는 것 같았다니까.”
그러면서 승연이는 하루 종일 연습했던 곡을 콧소리로 흥얼거렸다.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리듬을 타고.
“난 우리 팀 잘될 수 있다고 봐.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라, 우리 네 명이라면 어디 가서도 안 꿀린다고 생각하거든.”
“그렇지?”
“개개인의 실력으로 보면 플라지아 같은 팀보다 우리가 더 나을걸.”
“에이, 걔네는 뭐 얼굴빨로 뜬 거고…….”
“그런데 문제가 있어. 우리 팀한테는.”
“……?”
“앞에 앉아 있는 두 아가씨가 아직도 냉전 중이니까. 아무리 노래를 잘하면 뭐해. 팀이 팀으로 뭉치질 못하는걸.”
앞에 앉아 있는 두 아가씨란 다은이와 연화였다.
승합차의 넓은 실내에서 두 사람씩 시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앞에는 다은이와 연화, 뒤에는 승연이와 선하.
“연화야. 네가 마음 좀 풀어야 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승연이가 시트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고, 앞에 앉은 애들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저는 김다은 씨가 싫은 게 아니에요.”
“싫은 게 아니야? 그럼?”
“오해하시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한연화는 자기 안에 자리 잡은 감정이 무엇인지 줄곧 생각해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싫어하는 거라고, 혹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는 것 같아서 방어적으로 그런 심리가 생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10년 동안. 오직 가수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시간들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타고난 재능 앞에서는 그저 초라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반발심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싫은 게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머리가 부정하려고 해도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짜요? 저도 연화 씨 안 싫은데.”
“둘 다 그게 뭐냐. 뭐뭐 씨. 뭐뭐 씨. 몇 달을 같이했는데 아직도 그래?”
“저는 예의를 지키느라고…… 연화 씨가 예의를 지키시길래요.”
“답답한 것들…… 너넨 친구도 없냐? 왜들 그래?”
친구……? 하지만 한연화에게는 정말로 친구가 없었다. 열 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지금까지 회사에서 연습만 하고 살아왔기에.
그리고 그 옆에서도 친구라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사람이 있었다.
친구…… 그런 단어가 어쩐지 손으로 만져지질 않았다.
한 명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라는 말이 떠오르면 그걸 애써 꾹꾹 눌러 담는다.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은아. 힘든 거 있으면 언니한테 얘기하고 그래.”
“네.”
“고민 있으면 털어놓고. 우리는 한 팀이잖아.”
그러자 다은이는 ‘나한테 고민이 있었나?’ 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아, 맞다. 힘든 게 있긴 있어요.”
“뭔데?”
“엄마 보고 싶어요.”
“뭐야 그게.”
여기저기서 픽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 왜요? 언니들은 엄마 안 보고 싶어요?”
“야야, 연화 봐봐. 얘도 웃는다.”
“웃는 거 아니에요.”
“웃는 거 맞는데 뭐.”
“왜 그래요? 난 진짜 잘 때마다 엄마 보고 싶어서 울 것 같은데.”
이윽고 멤버들은 숙소에 도착했다.
어두컴컴한 주택가. 가로등이 희미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로 부모님 뵙고 싶은 거면 내일 집에 갔다 오든가. 휴일이니까.”
“아니에요. 연습해야죠.”
하긴. 나도 엄마가 보고 싶긴 하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건 다은이뿐만이 아니었다.
휴일이긴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쉬면 이대로 추락해 버릴 것 같아서. 비록 사이가 좋은 팀은 아니라지만 그런 생각만큼은 모두가 똑같았다.
* * *
매니지먼트 1팀의 오 대리는 박영민에게 받은 모욕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연습실에서. 그것도 애들 앞에서.
사실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김인혁 이사가 회사 내에서 자기 세력을 넓히기 위해 투입한 인물. 한 마디로 표현해서 낙하산. 그럼에도 애들에게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리는 꼴이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그것까지만 해도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정영수랑 붙어먹다니.
정영수와 오 대리는 입사 동기였다. 같은 시기에 로드 매니저로 이 회사에 들어왔다.
오 대리는 좀 더 핵심 아티스트들을 다루는 1팀으로, 정영수는 철 지난 가수들을 관리하는 2팀으로. 그래서 자기가 한 걸음 앞서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승진. 정영수는 새로 신설된 3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그 녀석이 좀 빠릿빠릿하고 일머리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입사 후 2년 만에 팀장. 그리고 자기는 그 후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대리 승진.
박영민을 향한 반감이 더욱 커진 것은, 이처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정영수와 붙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가 박영민을 만날 때마다 틱틱댔던 건 사실이다. 말이 좋게 나올 수 없었다. 마주칠 때마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기 어려워서.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거야?”
1팀장에게 말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박영민 그 사람이 그랬다는 겁니다. 애들을 3팀으로 빼간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계실 겁니까? 우릴 우습게 보는 건데.”
몬스터 뮤직의 매니지먼트 업무에는 본부장 직급이 따로 없었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심인 회사이니 매니지먼트의 비중이 적기도 했고, 본부장이 공석이어도 지금까지 돌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이리저리 휘둘릴 것이 뻔했다.
회사 분위기를 보면 그렇다. 이사진들의 실무 개입이 막강하기 때문에 기를 펼 수가 없다. 그 대머리 A&R 본부장처럼.
차라리 실무진에서 대가리가 되어 일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것이 1팀장의 생각이었다. 매니지먼트 부서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건 1팀장이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박영민 까자고? 그게 될 것 같아?”
“액션은 취해야죠. 무시당했는데 가만히 계실 겁니까.”
액션을 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1팀장의 위치라면 판을 흔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안 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박영민 건드리지 마.”
“팀장님! 그 새끼가 얼마나 싸가지 없는지 직접 보셨어야 한다니까요.”
“너 왜 그래? 우리가 그런 일 한두 번 당해? 박영민은 건드리지 말고, 우리 쪽에선 그 사람한테 최대한 협조하는 쪽으로 갈 거야.”
“뭐라구요?”
오 대리는 귀를 의심했다. 요즘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굽히고 들어가겠다는 건가?
“비츠걸스가 그쪽으로 넘어가서 잘되기라도 해봐. 그럼 어떻게 되겠어? 만약에 그 공이 박영민에게 돌아간다면 우리는 손해 볼 거 없어. 매니지에는 문제없었고 프로듀싱에 문제 있었다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하지만 박영민은 죽 쒔는데 정영수가 살려 버리면?”
1팀장이 걸리는 것은 요즘 들어 자꾸 자기 뒤를 쿡쿡 찔러오는 정영수였다. 새파란 놈이 팀장 달더니 여기저기 나대는 꼴이 보기에도 영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는 박영민에게 협조해 주는 쪽으로 간다.”
“차라리 망하게 해버리면 되잖아요. 비츠걸스 그거 잘될 거 같지도 않던데.”
“인마. 그럼 우리 회사가 망해.”
오 대리의 의견은 결국 묵살되었다. 업무 내용에 있어서도 위계가 있는 일이다 보니 일개 매니저가 프로듀서에게 개기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박영민 그 사람 요즘 잘나가잖아. 전무 눈에 들어갔으니까 한동안은 상승세를 이어갈 거야. 그런 사람을 건드리면 안 돼.”
“…….”
“만약 삐끗해서 추락한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지. 그때가 온다면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갚아줘야 하겠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모처럼 오 대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람이 완벽할 순 없어. 실수는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그때까지 기다려라. 실수 하나라도 나온다면…… 속이 뻥 뚫리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 * *
“또 까였어?”
“추구하는 방향하고 안 맞는대요.”
“아니,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어쩌라고.”
몬스터 뮤직 전속작곡팀의 작업실도 한바탕 들썩였다. 박영민에게 곡을 제출해 봤자 맘에 안 든다는 대답 만이 돌아왔다.
“자꾸 보내지 마. 그럼 지가 알아서 하겠지.”
“얼마나 대단한 곡을 원하길래 보내는 것마다 전부 까버리는지.”
좋은 얘기가 나올 수 없었다.
보컬 트레이너 한 명 새로 들어왔다고 하더니, 그 사람이 제작에 손을 대서 곡 두 개를 띄워놨다. 그중 하나는 차트 1위.
‘우와. 대단하다. 우리 회사에 드디어 대단한 인재가 들어왔구나.’ 하는 반응은 별로 없었다. 밥그릇 빼앗기기 싫어서 아니꼬운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계속 늘어날 뿐.
“야. 막내.”
“예.”
“너 박영민이랑 친하지? 쟤 왜 저러는 거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입맛 까다로우면 지가 곡을 쓰던가. 그럴 능력이 안 되면 적당히라는 게 좀 있어야지.”
밤샘작업을 했다는 어떤 작곡가는 그렇게 툴툴대고 있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곡을 보내줬더니 딱 한 번 들어보고 ‘수고하셨지만 이 곡은 저희 애들하고 안 맞는 듯합니다.’ 하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왜 그래? 곡 까여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몰라. 저 사람은 그냥 기분 나빠. 전무가 밀어준다고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가서…….”
“원래 능력 있는 사람들은 좀 까다롭잖아.”
“능력이 있기는…… 그랬으면 저 나이까지 저러고 있었겠어?”
그러자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작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박영민이었다.
“아이고, 박영민 선생님. 여기는 어쩐 일로?”
“전달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그래요? 커피라도 좀 타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한참 같이 떠들던 작곡가는 그를 향해 ‘기분 나쁘다면서?’ 하고 묻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고, 밤샘작업을 했던 사람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윙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인 씨. 바빠요?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저요? 괘, 괜찮습니다.”
“아까 그거 들어봤거든요. 그런데 리듬이 좀…… 아니, 트랙 좀 보면서 얘기하죠.”
“아, 예.”
박영민은 들어오자마자 이정인 옆에 딱 붙어버렸다.
“그래요. 여기…… 리듬을 너무 쪼갰어요. 좀 산만해요.”
그러고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일일이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었다.
박영민이 지시를 내리는 동안 작업실의 모든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거 수정해서 다시 들어보죠.”
“예. 해보겠습니다.”
그런 뒤 박영민은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와 함께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막내야. 또 너냐?”
“아…… 그게…….”
이정인은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뒷머리만 긁어 댔다.
“저 사람 싫다면서?”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기분이 나쁘다고 했지.”
“난 저 사람이 이번에 비츠걸스 살려내면 바짝 엎드릴 거야.”
“살려내? 그게 어디 쉽나.”
“어려운 일이니까 대단한 거지.”
선배들은 그렇게 떠들고 있었고, 이정인은 조금 전 박영민이 코멘트해 준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자기가 만든 곡을 채택해 주었고 그걸 차트 1위까지 올려준 사람. 이정인은 박영민을 존경하다 못해 거의 숭배할 지경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천재야, 천재. 비트를 꾹꾹 찍어 대면서도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 * *
일주일 가까이 쉬지 않고, 보내오는 곡을 전부 들었더니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았다.
음악을 듣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곡을 정했다.
듣는 순간 느낌이 딱 왔다. 대중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내 감각이 ‘이거야!’ 하고 명확하게 말을 해준 곡.
이번에도 우리 회사 작곡가인 이정인의 곡이었다.
그가 처음 가져왔던 곡은 전혀 끌리지 않아서 퇴짜를 놨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 느낌이라며 곡 하나를 들려주었는데.
아예 그 곡을 샘플링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온 게 아닌가.
인트로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가슴이 뛸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곡이었다.
Funk와 R&B를 비벼놓은 사운드, 듣는 내내 어깨를 흔들거리게 되는 신나는 그루브, 거기에 블루지한 멜로디.
이거다, 이거!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는 곡이었다.
“이 곡으로 가죠.”
“저, 정말인가요?”
내가 곡을 듣고 있는 동안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훑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이정인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손댈 필요가 없겠어요. 기승전결, 그리고 중간중간 전조가 되는 부분까지 완벽해요.”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오명을 씻을 수 있겠죠?”
“오명이요?”
“이정인 씨가 곡을 만든 게 아니라, 제가 손을 댔다는 얘기 말이에요.”
“아닙니다. 이번에도 영민 선생님께서 틀을 잡아주셔서…….”
“에이, 제가 뭐 한 거 있나요.”
“전 영민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곡을 만든 겁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내가 제시한 가이드곡을 아예 샘플링해 버린 감각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한 걸 만들라고 했지 아예 거기서 따올 줄은.
“이 곡으로 갈 겁니다. 이제 가사 붙이죠.”
그렇게 비츠걸스의 세 번째 싱글이 결정되었다.
* * *
제목은 Bad Boy.
비욘세와 비슷한 느낌을 요구했더니 아예 비욘세스러운 가사를 만들어왔다.
바람기 많은 남자 친구에게 ‘나쁜 남자야. 난 너 없이도 잘살 수 있으니까 꺼져 버리렴.’ 하고 노래를 하는 내용.
이정인과 다른 작사가 한 명이 공동 작업을 한 것이고, 너무 센 느낌이 있어서 내가 손을 댔더니 세 명 모두 작사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자, 곡 나왔다.”
“벌써요?”
“여기로 모여 봐. 내가 설명해 줄게.”
허밍으로 가이드가 입혀진 곡을 애들에게 들려주었다.
다들 집중을 하기 위해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귀를 열고서 곡을 감상했다.
“오! 좋다.”
“이거 저희 연습시키신 곡하고 너무 비슷한데요?”
“맞아. 그거 샘플링한 거야.”
“아…….”
그리고 악보와 함께 가사가 쓰여진 프린트물을 나누어주었다.
“파트 배분해 줄 테니까 잘 들어.”
“네!”
벌스는 승연이가 불러서 곡의 기틀을 다녀놓고.
가장 화려한 테크닉이 들어가는 브릿지는 다은이에게.
그리고 후렴구는 연화가 부르기로 했다.
원래 보컬 파트를 많이 가져가지 않는 선하에게는 코러스만 맡게 했다. 하지만 얘에게는 전조가 일어나는 구간에서 댄스 타임을 만들어주어 실력을 보여줄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었다.
“괜찮지?”
그렇게 물어보며 연화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너네 둘이 파트 가지고 싸우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식으로.
“와…… 전 코러스만 할 줄 알았는데 제 파트도 많네요.”
“네 명 모두 서운하지 않게 잘 분배해 봤어.”
“고맙습니다.”
곡의 킬링 파트라고 할 수 있는 어려운 부분은 다은이에게 주었다. 대신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파트는 연화에게.
두 파트 모두 어지간한 보컬로는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노래였다.
“내일 아침까지 자기 파트 다 외워와. 내일부터 나랑 특훈에 들어갈 거야.”
“네!”
라이브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삐끗하지 않고 완벽하게 관객을 장악할 수 있도록. 애들을 괴물로 만들어놓을 계획이었다.
아니, 굳이 내가 엄하게 이끌고 가지 않아도 얘네 넷은 모두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다. 그걸 보여줄 수만 있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