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4
6장 이번에는 3파전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있었다.
새롭게 귀가 열린 이후, 지겹도록 들어왔던 음악마저 이전과는 다르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너무 신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을 다시 열어보니, 그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외전이 몇 편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원작이 확실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그런 외전이.
도대체 왜 이런 음악이 널리 사랑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이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전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 몇 년 사이 인기를 끌었던 곡들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있는 것 같은 이름.
설마 이것도? 하는 마음으로 열어봤을 때에도 어김없이 그곳에는 그 이름이 있었다.
김우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 그때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어쩌다 몇 번 마주쳤던 사람,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뭐 이 정도.
물론 이 업계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
“내일이요?”
-시간은 편하실 때로 정해주세요. 제가 맞추겠습니다.
부우하고 촬영을 하면 얼마나 걸리려나. 예능이라는 게 한 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하던데.
“죄송한데 내일은 어렵겠습니다. 이번 주는 계속 스케줄이 꽉 차 있어요.”
-그럼 다음 주는 어떠세요?’
“다음 주는…… 시간을 만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화요일 저녁에 뵙는 걸로 하죠. 괜찮으신가요?
굽히고 들어온다. 오히려 내 쪽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알겠습니다”
* * *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아니, 그렇다고 오직 그의 이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이름은 또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에 들어오던 또 하나의 이름.
“그럼 인혁 씨 친구분은 여기부터 들어가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하시면 돼요. 평소에 두 분 하시듯이요.”
“그런데 대본이 정말 이게 전부예요?”
“저희는 리얼로 가거든요.”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대본에는 아주 간략한 동선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소설로 치면 이런 느낌.
‘주인공이 태어났다. 주인공은 늙어서 죽었다. 그사이에 일어난 일은 알아서 생각하시오.’
“괜찮습니다. 평소 하시듯이 해주세요.”
어제는 한참 동안 작가와 사전 인터뷰를 했다. 그렇게 오래 떠들었는데 대본에는 그런 내용이 조금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었다.
Sx5
등장인물 : 박영민. 35세. 김인혁의 15년 지기이자 직장 동료
I. 치킨 가게
-자연스러운 모습 스케치
(함께 팀으로 활동했을 때 얘기 / 회사 업무 얘기)
그래도 두 시간 동안 떠들었던 얘기 중에 대본에 실려 있는 건 ‘35세, 김인혁의 친구’ 이게 전부.
“왜 하필 장소가 여기야?”
“전에 왔었던 곳이잖아.”
“너네 어머님 또 뭐라고 하신다.”
저 새끼 또 처먹네, 또 처먹어.
“어차피 버려진 거…… 그냥 이 컨셉으로 가려고. 이런 거 CF 찍을지도 모르고…….”
대중성의 끝판왕을 찾아다닐 때 그 목적지에 있었던 이름. 이제는 예능을 하더니 여기에서도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좁은 치킨집에서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카메라가 저격수처럼 곳곳에 숨어 있고, 커다란 반사판까지 있는 곳에서 자연스러움은 무슨…….
“작가가 나보고 포보이스 얘기 하라는데, 그거 해도 되겠냐?”
“왜? 그냥 하면 되지 뭐.”
회사 안에서는 그 얘기에 질색을 하면서.
“웃길 수만 있다면 뭘 못 하겠냐.”
그러면서 활짝 웃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른 무엇보다, 이 녀석이 아까 작가에게 했던 말이 계속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어제 인터뷰에서, 나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던 말.
-친구죠. 직장 동료이기도 하고. 저에게는 아주 복잡한 인물이에요. 연습생 친구 박영민, 포보이스 멤버 박영민, 함께 실패를 맛봤던 친구, 같은 회사 보컬 트레이너, 요즘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프로듀서…… 내가 몇 개 말했죠? 다섯 개인가…… 하여튼 이 다섯 명의 박영민들에게 가지는 감정은 전부 달라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요.
애매모호한 말이었지만 당사자인 나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무슨 곡 하기로 했는데?”
“네가 만든 거.”
“내 곡?”
“어.”
그리고 연화에게는 이 녀석이 만든 곡을 시키기로 했다. 에잇돌스 솔로 무대에서.
작곡가 김인혁의 최고 히트작. 유아연이 왜 최고인지 확인시켜 주었던 Hurt라는 곡.
“연화가 그거 할 수 있을까?”
보컬과 안무의 난이도는 최상급이고, 그저 따라 하기만 해서는 절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곡이다.
유아연은 대중들을 완전히 포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너무나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아니야. 충분히 할 수 있어.”
오히려 그 이상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다시 가죠!”
“…….”
“인혁 씨 친구분, 너무 딱딱하시다. 부드럽게 좀 가요. 또박또박 책 읽는 것 같잖아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무렵, 나는 이걸 괜히 한다고 했다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나 이거 하면서 중간에 끊어보긴 처음이네.”
“…….”
“인혁 씨 친구분. 시간 많으니까 긴장 푸시구요. 천천히 가 보자구요. 여기 우리 없다고 생각하시고 두 분이 평소처럼 얘기해 보세요.”
“아, 네.”
* * *
김우진을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볼 때마다 참 기이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제에 참석한 남자 배우처럼 근사하게 슈트를 입고 있고, 헤어 스타일 그리고 시계 등의 액세서리를 보면 자신을 꾸미는 것에 과감한 투자를 한다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라던가, 관리 좀 제법 받았을 법한 피부.
아주 준수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귀티가 흐르는 모습도 나하고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연화의 솔로 무대를 마치고 난 뒤였기에 시간은 새벽으로 곧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다음에 보자고 했지만 김우진 꼭 오늘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던 그는, 날렵하게 생긴 쿠페를 끌고 와 내 앞에서 주차했다. 어둠 속에서도 불그스름한 빛이 인상적인 자동차였다.
“실장님 되셨다면서요?”
그는 반갑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저는 저녁때를 놓쳤는데 박 실장님은 어떠세요?”
“저도 배가 좀 고픕니다. 조금 전까지 방송 있어서 끼니를 걸렀거든요.”
“방송이요?”
“케이블에서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있어요.”
“아, 그거……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 녹화 있었나 보죠?”
“예.”
“몇 등 하셨어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스포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들었어요.”
“계속 1등 하시던데.”
그러면서 김우진은 자기가 잘 아는 가게가 이 근처에 있다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배도 채우면서 술도 가볍게 하자고.
이 사람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왠지 아무거나 입에 안 댈 것 같은 느낌, 뭔가 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을 추구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는데
“돼지국밥 어떠세요?”
“전 괜찮습니다.”
“이 근처에 잘하는 집 있어요.”
입맛은 나 같은 사람하고 별로 다를 게 없나 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주로 일 얘기만 했었지만 이번에는 별별 얘기를 다 나누게 되었다. 그때보다는 좀 더 편해졌기 때문인지.
사는 얘기, 살아온 얘기 등등.
외모만 봤을 때는 동갑이거나 나보다 조금 어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세 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이력도 특이했다.
20대 초반에는 가수가 되기 위해서 연습생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데뷔에 실패하고 가요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군대에 갔다 온 뒤 전공을 살려 철강 회사에서 일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서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어느 작곡 대회에서 입상한 것을 계기로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가 아이즈 퍼블리싱에 적을 두게 되었고, 그러다가 아이즈 컴퍼니로 정식 입사하여 현재 이른 것이다.
올해 서른여덟 살. 아직 미혼. 이건 나랑 같다. 미혼이라는 거.
“애인이요? 지금은 없습니다.”
이것도 나랑 같고.
“저는 모든 것을 스테이지로 묶어놓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제 나름대로 여러 개의 스테이지로 나누어서 하나씩 클리어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거죠. 연애에 대입해 보면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는 과정까지를 하나의 스테이지로 보고 있었어요. 그걸 클리어한 다음에 긴장이 풀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잊어버린 거예요?”
“예. 진짜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이렇게 스테이지로 생각을 해버리면 클리어한 것은 뒤로 넘겨 버리거든요. 고백해서 사귀게 된 거니 이제 된 거다, 라는 생각으로 잊고 있었어요. 보름 지나서 연락 오더라구요.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자고 해놓고 어떻게 보름 동안 전화 한 통 없을 수 있냐면서.”
그러면서 그는 그게 재미있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한참 웃었다.
“그분은 보름 동안 심란하셨겠는데요?”
“그랬겠죠. 또 다른 스테이지, 싹싹 빌어서 다시 관계를 회복한다는 과제는 결국 실패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 뒤로 쭉 솔로입니다.”
엉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정도로 일에 미쳐 있으니까 그만한 곡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테이블 위로 쌓여가는 빈 병은 점점 늘어갔고, 새벽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손님들도 많이 빠지고 이곳의 소란스러움도 잦아들고 있었다.
살짝 눈이 풀리면서, 그제야 피곤하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기, 박영민 실장님.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사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야 본론을 꺼내려 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마주친 인연. 물론 가볍게 여길 수는 없었다.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넓게 보면 동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난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 말이 언제 나올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을 정도다.
“제가 오늘 여기 나오기까지 정말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게 옳은가,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솔직히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옳아요.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는 게 좋은 겁니다.”
꼬부라진 혀로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박영민 실장님. 저랑 같이 일합시다. 아까 말씀드렸죠? 저는 우리나라 대중음악 역사에 있어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박영민 실장님이 필요해요. 우리는 같이해야 하는 겁니다. 아…… 물론 당장 대답 못 하시겠죠. 그 회사에서 하시는 게 많으시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저랑 같이 일하는 겁니다. 우리 둘이 합치면 최고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 * *
남자 백댄서 네 명이 연화의 뒤를 받쳐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연화는 여왕처럼 무대를 장악했다.
유아연의 Hurt는 8년 전에 나왔던 곡이다. 그때 연화는 열두 살.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이 곡을 연습했다고 한다.
나하고 따로 연습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완성도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안무는 그대로 가고, 유아연과는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서 곡을 살짝 바꾸어봤다.
중간에 템포가 다운되며 스트링 섹션과 함께 연화의 맑은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파트를 추가했다.
-어떻게 저 동작에서 노래가 하나도 안 흔들릴 수 있는 거지?
-노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2:08 소름. 씨디 틀어놓은 건 줄 알고 계속 듣고 있다가 숨소리 확 들리면서 라이브인 거 알게 됨.
-이렇게 예쁜 사람이 이렇게 노래 잘하면 너무 반칙 아닌가.
-1:36 이건 박제다. 할렐루야…….
-유아연보다 더 잘하는 듯.
유튜브에는 경연 영상과 엠알 제거 영상 두 개를 올렸더니 둘 다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링크가 걸리며 영상이 퍼지고 있었다. 커뮤니티 반응도 뜨거웠다.
-비주얼이 아이돌에선 적수가 없겠다. 키까지 커.
-그냥 뭔가 우아해. 기품 있고 분위기 있게 생겼어.
-요즘 뭐만 하면 여신여신거리는데 솔직히 레나 옆에 있으면 오징어 될 거 같은데
└응 아냐. 비교하면 연화 압승
└미모 치트는 레나고 얘는 그냥 길 가다가 흔하게 볼 수 있는 타입
└레나는 레나고 연화는 연화죠. 비교질 좀 그만
└레나 인성논란 있지 않음?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 있네
레나는 플라지아에서 서브 보컬을 맡고 있는 비주얼 멤버였다.
현 여돌 중에서 최고의 미모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는데, 영상이 퍼진 후에는 둘을 비교하는 얘기가 흔하게 보였다.
그래도 무대 영상은 보는 내내 흐뭇했다. 무엇보다 즐기고 있다는 게 보였다. 클로즈업될 때 여유롭고 편안하게 시선을 처리하는 모습에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음원 차트에는 무려 5곡이 올라 있었다.
19위 한연화 ‘Hurt’ (8 Dols)
26위 비츠걸스 ‘Bad Boy’
28위 비츠걸스 ‘Unpretty’ (8 Dols)
36위 비츠걸스 ‘Bad Boy’ (8 Dols)
64위 비츠걸스 ‘Open your eyes’
듣보돌이라고? 지금 이런 성과를 내고 있는 애들을 무슨 듣보돌…….
경연 있던 날은 검색어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했었는데.
물론 경연 순위도 1등.
* * *
현재 음원 차트에 이름을 올려놓은 몬스터 뮤직의 곡은 모두 일곱 곡이었다. 언급한 다섯 곡 외에 유미의 두 곡.
그리고 또 다른 두 곡이 출격 준비를 마쳤다. 유미의 앨범이 완성되었다.
홍보 기사도 나가기 시작했다.
음원 강자, 발라드퀸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뭐 이 정도야.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애들의 다음 곡. 이렇게 앨범을 완성한 뒤에 몬스터 뮤직은 본격적으로 굿즈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포토북과 포토 카드를 포함한 음반, 공식 팬클럽의 1기를 모집하여 회원 카드와 카드셋, 목걸이 등을 판매하고, 응원봉까지 제작에 들어갔다.
“정 팀장님. 다음 주부터 우리 애들 후속곡 연습 들어갈 거예요. 스케줄 조정 좀 해주세요.”
“곡 정해졌어요?”
“예. 진짜 기가 막히는 걸로요.”
곡은 뼈대가 완성된 단계였다. 그리고 내 감각이 이 과정 속에서 전율하고 있었다. 이 곡이라면 아주 높은 곳까지 충분히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내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시간을 견디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이제 이런 감각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번 곡은…… 정말로 우리 애들을 높은 곳으로 올려줄 것이다.
“정말요? 무슨 곡인데요?”
“선생님, 지금 들어볼 수 있어요?”
애들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 들려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누구 곡인데요?”
“나중에 알려줄게.”
“에이, 너무 뜸 들이신다.”
듣게 되면 깜짝 놀랄 거다. 요즘 잠도 잘 못 잔다. 자려고 누우면 이 곡이 생각나고, 빨리 이걸 세상에 내놓고 싶은 생각에 심장이 너무 날뛰어서.
“그리고 정 팀장님. 이제 우리 애들 핸드폰 써도 되지 않나요?”
“핸드폰이요?”
“데뷔한 지 반년 넘었는데 아직도 데뷔준비조에 있었을 때처럼 갑갑하게 있는 건 아닌 듯해서요.”
애들은 아직도 핸드폰이 없었다.
“우와! 선생님 최고!”
데뷔를 앞둔 시점에서는 핸드폰을 빼앗는다. 사생활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인 외출도 절대 금지. 소지품 검사도 주기적으로 받았다.
어제 김우진을 만나 얘기를 들으니 플라지아도 그랬다고 한다. 소지품 검사에서 담배가 나와서 경악하기도 했었다고…… 핸드폰은 음방 1위를 달성하면 쓸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고, 1위를 했던 날 공용 핸드폰 한 개를 지급해 줬다고 한다. 멤버는 일곱 명, 하지만 한 개의 핸드폰을 돌려쓰라고.
“그럴까요?”
“우리 애들이 어디 가서 문제 일으키지도 않을 거고…… 핸드폰 정도는 쓸 수 있게 해줘도 되지 않나 싶어요.”
정 팀장은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고.
우리 애들 네 명은 한껏 초조한 얼굴을 한 채로 정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죠, 뭐.”
그러자 애들은 음방 1위라도 달성한 것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난리를 친다.
“쌤, 진짜 고마워요. 핸드폰 생기면 제일 먼저 쌤한테 톡 보내야지.”
“야, 우리 단톡방 만들자. 선생님이랑 팀장님까지 같이.”
“나, 나는?”
정 팀장 밑에서 일하는 로드 매니저가 서운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오빠도 당연히 들어와야죠.”
“그렇지?”
그리고 그날, 압수되었던 핸드폰이 애들에게 돌아갔다. 전부터 핸드폰이 없었다는 연화는 새로 하나 장만했고.
내 번호를 알려주니까 애들은 문자를 한 통씩 보내주었다.
[쌤. 저예요. 다은이. 제 거 단축번호 1번으로 해두세요ㅋㅋㅋ] [윤선하입니다.] [저 누구게요? 못 맞히면 1년 동안 삐져 있을 거임.] [한연화 010-xxxx-xxxx]“연화야, 그렇게 안 보내도 문자 보내면 여기 번호 떠.”
“아…….”
어쩐지 얘는 타이핑하는 것도 검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초보티를 내고 있었다.
“나는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으니까 할 말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보내.”
“네.”
“이제 심심할 때마다 쌤한테 톡 보내야지.”
“심심하면 안 되지. 너희들이 심심하다는 건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건데.”
숨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게 되는 것. 쏟아지는 인기를 헤치면서 잠잘 시간도 없이 무대에 오르게 되는 것. 그렇게 되어야지 내가 제대로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 * *
“왔어? 그래. 여기 앉아.”
임원실이었다.
손동하 사장도, 인혁이도 보이지 않았다. 임원실에서는 체격 좋은 전무가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 좀 커지면 독실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어. 이거 원, 중요한 얘기는 나눌 수도 없으니…… 자네가 계속 열심히 해봐. 그래서 우리도 크게 확장해 보자고.”
그러면서 그는 응접실의 테이블 앞으로 몸을 옮겼다.
“방송 잘 보고 있어. 우리 애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
“후속곡도 정해졌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래? 난 음악을 잘 모르지만 자네 안목은 인정하고 있어.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전무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해 봐. 하지만 비전은 넓게 가지고 있어야 돼. 이건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하는 충고야.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지. 그 끝이 왔을 때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넓은 비전으로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람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시종일관 자상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고 나를 보는 시선에서도 호의적인 것이 느껴졌지만, 그가 전달하는 말에는 위압감이 너무 강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고, 내 위치가 어디인지도 분명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혁이 말이야. 나는 그 친구가 안타까워.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더군. 자네를 통해서 좀 더 멀리 봐주길 바랐는데, 예전에 동하도 그랬고…… 창작하는 사람의 멘탈이란 것이, 나 같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인혁이는 내년 초를 타겟으로 해서 보이그룹을 데뷔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과 더불어서 유아연의 9집 앨범을 작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방송을 하는 일에 더욱 열정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그룹 쪽 얘기를 들어보니 토대만 만들어놓고 정작 진행은 더디게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밖에서는 부우 녀석과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회사 안에서는 잡음이 계속 나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보이그룹까지 나에게 넘어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려올 정도였으니.
“그런데…… 자네 아직 차 없다면서?”
“예. 아직 없습니다.”
“운전은 할 줄 알지?”
“그럼요. 운전은 전에도 꾸준히 했습니다.”
학원에서 일을 할 때에는 기사가 없을 때 내가 애들을 데려다주기도 했으니 운전이야 뭐.
“내가 하나 사줄까?”
“아닙니다.”
“농담 아니야. 실장 월급으로 뭐 하나 제대로 뽑을 수 있겠어? 차는 생명을 맡기고 달리는 거야. 난 박 실장을 하찮은 것에 태우려는 생각이 없어. 하나 골라봐. 애매하게 말하면 부담을 가질 테니 가이드를 정해줄게.”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내 수준에서는 생각도 못 했던 중형 수입차 모델을 몇 개 거론하면서 그 급에서 골라보라는 얘기였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 전에 계약까지 해버렸습니다.”
“그래?”
거절할 만한 구실이 없어서 그런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차를 사준다는 말에 흔들리기는 하지만 이런 것에 잡혀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 할 얘기가 있다면서?”
어제 김우진의 말을 들은 이후로 계속 고민에 시달렸다. 물론 회사를 옮길 수는 없다. 이제 막 자기 위치를 만들어가고 있는 발라드 가수와,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을 두고 어딜 간다고.
나 없이도 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은 담에야, 그들을 내버려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용의 꼬리가 되느냐 뱀의 머리가 되느냐.
그곳으로 갔을 때의 내 위치, 이곳에서의 내 위치.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는 일이 있었다.
뱀의 머리? 아직 그것도 되지 못했잖아. 그저 몸통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조금 주제넘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말해봐.”
일단 머리가 되고 나서, 최소한 머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잡혀야 그때부터 비교를 할 수 있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 * *
전무는 고민도 하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에게 입증하지 않는다면 난 자네 방식을 지지할 생각이 없어. 자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의 방식은 우리가 최적의 이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야. 자네의 방식이 그것 이상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때는 고민해 보도록 하지.”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도록 그는 못을 박았다.
그리고 나는 딱 한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 * *
비츠걸스 첫 앨범의 마지막 트랙은 김인혁의 곡으로 골랐다.
2년 전, 유아연에게 주려고 썼지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접어뒀다는 곡.
“한 번 더 들어볼게. 이렇게 하니까 느낌 괜찮은데.”
인혁이는 내가 손댄 트랙을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영민아. 이거 괜찮다. 내가 이 곡 모티브를 잡아냈을 때에는 큰 거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 줄 알고 좋아했거든. 그런데 덩어리들은 만들어냈지만 그게 이어지질 않는 거야. 그래서 치워 버렸지. 야, 그런데 이렇게 해버리니까 이게 진짜…….”
브릿지를 다듬고, 전조가 일어나는 부분을 비트까지 바꿔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가봤다.
내 귀에는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부우 녀석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래. 이거 가져가라. 비츠애들 줘. 작곡은 너랑 내가 공동으로 한 걸로 하고.”
“아니, 나는 한 거 없어. 네가 만들어낸 거지.”
“뭔 소리야. 너 아니었으면 계속 버려져 있을 곡이었는데.”
비츠걸스의 후속곡을 계속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곡가들이 많은 곡을 보내줬지만 끌리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내 감각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하고.
게다가 이번 곡이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다. 우리 애들은 이제 막 지명도를 얻어가고 있었고, 떠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대중들의 시선을 간신히 이쪽으로 모아뒀을 때 발표하는 곡. 그리고 첫 앨범. 여기서 터뜨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을 수 없었다.
부우 녀석과 함께 예능을 촬영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가 쓴 곡 좀 보내줘 봐. 버려둔 것 좀 주워 가 보자.
-내 거? 어휴, 난 이제 똑같은 것만 자꾸 나와. 한물갔어.
그랬더니 그 날 밤, 부우 녀석은 정말로 나에게 10기가짜리 압축 파일을 보내주었다. 그동안 쓰다 만 것들이라면서.
며칠에 걸쳐서 그걸 다 들어봤고, 마침내 보석 하나를 발견해내었다.
이런 걸 대체 왜 숨기고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보석.
그게 이 곡이었다.
“영민아. 너도 곡 좀 써보지그래? 나 네가 Hurt 편곡한 거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그 곡의 유일한 단점이 너무 치고 나가기만 한다는 거였는데, 중간에 스트링으로 늘어뜨리니까 듣기 좋게 부드러워지더라고. 아, 이 새끼 곡도 잘 쓰는구나 싶었지.”
“나는 잘 안 되더라고. 계속 시도해 보고 있기는 한데.”
“하다 보면 될 거야. 감각은 있으니까. 아무튼 이 곡은 공동 작곡으로 넣어. 안 그러면 곡 안 준다.”
다섯 가지 박영민에게 다섯 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회사에서 연습생으로 함께 구르던 시절의 김인혁, 데뷔한 뒤 내 파트를 탐내던 김인혁, 팀 해체 후 혼자 승승장구하는 걸 나에게 과시했던 김인혁, 그리고 몬스터 뮤직의 김인혁 이사.
짜증 나기도 하고, 내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게 꼴 보기 싫은 적도 있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모두 소비해 버렸다는 듯이 예능으로 도피하듯 가버린 이 녀석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인혁은 곡을 만들어야 한다.
“옛날 생각난다. 우리 데뷔곡도 이랬잖아. 내가 트랙은 만들었는데 멜로디가 약해서 고민이었고…… 그걸 너한테 들려주니까 네가 즉석에서 멜로디를 만들어냈었지.”
“어, 맞아. 그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작곡가 김인혁은 독불장군 같은 면이 있었다.
김우진과 비교해 봐도 그랬다. 결과물을 보면 두 사람의 만들어내는 수준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과정은 전혀 달랐다.
아이즈 컴퍼니라는 이 바닥의 정상급 기업에서 많은 지원을 받으며 여러 능력 있는 작가들과 공동 작업으로 곡을 뽑아내는 사람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혼자서 모든 걸 만들어내는 사람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도 곡 쓴 거 있으면 나한테 좀 들려줘. 나 요즘 네 노래 많이 듣는다.”
“아이고, 까다로운 박영민 실장이 그런 말을 해주다니…… 카메라 있을 때 그런 소리 좀 하지.”
“그때는 내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았어.”
“야, 그거 다 편집됐잖아.”
“아, 그래.”
“옛날에도 노래만 잘하더니…….”
* * *
사람들은 유아연을 상냥한 연예인이라고 기억한다.
어?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회사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협력 업체 종사자들을 비롯해서 팬들까지.
예를 들면 오늘 우리 회사 사무실을 찾아온 포토그래퍼.
유아연은 그에게 이런 말까지 기꺼이 해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 작업들을 이틀 만에 해내신 거예요? 사장님 맨날 밤새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건강 좀 챙기시면서 하시지.”
탑 연예인이 사근사근 웃으며 그런 말을 해주자 포토그래퍼는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계속 그려놓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연 씨 작품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했습니다. 하하.”
“너무 고마워요. 이번 앨범 잘되면 전부 사장님 덕이네요. 한 장 한 장, 퀄리티가 왜 이렇게 높은지…….”
그러면서 포토그래퍼는 세상을 다 얻은 얼굴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사진을 발로 찍은 거야 뭐야? 저 사람 사진 10년 넘게 했다면서?”
“그렇다네요.”
“아우 짜증 나. 이거 전부 캔슬시켜. 내가 그랬다곤 하지 말고. 왜 저런 사람을 데려다 쓰는 거야?”
이제는 이러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듯이 직원들은 별로 동요하지도 않은 채 일을 처리한다.
물론 비즈니스 페이스가 실제 모습과 정반대인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10초 전까지 활짝 웃는 낯으로 대하다가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뭐야? 저 새끼는?’ 하고 씹어 대는 군상들이야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탑 연예인이, 그리고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은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지.
“선배님.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그러니 레슨 시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요즘 보컬 연습 정말 열심히 하는 거 알아요? 선배님 하라는 대로 하니까 소리의 질감이 좋아지는 것 같아. 연습할 때마다 신기해요.”
유아연은 또다시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나에게도 그러는 걸까? 앞에서는 이러다가 뒤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로…….
아니, 그래도 같은 회사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는 듯했다. 나에게는 막말을 했던 전적도 있었으니.
“아연 씨. 이런 말 알아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들어봤어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요.”
베토벤이 했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순수한 마음만이 좋은 수프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아까 보기 불편했어요. 포토그래퍼 그 사람…… 뒤에서 꼭 그렇게 안 좋은 말을 해야 했습니까?”
“예?”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면 되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더니 그녀의 얼굴은 똥 씹은 것처럼 변해갔다.
“내 방식이에요. 선배님이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게 16살 때부터 이어온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승승장구했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이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활동해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회사 직원들 앞에서만 저런다고 해도, 보고 있던 직원 모두가 입이 무겁진 않으니까.
소문은 새어나간다. 팬들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중성을 꼭꼭 숨겨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명언 한 마디를 더 인용하면.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녀의 이중성이 외부로 새어나가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별 탈이 없었다. 팬들에게는 한없이 상냥하지만 일과 관련된 사람에게는 엄격하다는 것으로.
오히려 그녀의 완벽주의를 표방하는 얘기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멋진 아티스트.
“뭐가 문제라는 거예요? 어쨌든 그 사람은 기분 좋게 돌아갔잖아요. 내가 그 사람 앞에서 화를 내는 게 옳다는 얘긴가요? 억지로 웃어줬으니까 그 사람은 기분 좋았을 거고, 정중한 거절 같은 건 우리 직원들이 알아서 했을 거예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거죠?”
그녀는 따박따박 날카롭게 목소리를 세워서 말했다.
“아연 씨가 싸지른 걸 뒤처리하는 사람들만 골치 아픈 거겠죠. 그것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겁니다. 조금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게 일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없는 거예요? 하루 종일 24 시간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살라는 얘긴가요? 평생 숨 막히게 살라구요? 나 진짜 선배님 좋게 봤는데 이건 아니네. 요즘 좀 잘나간다고…….”
“계속 말해봐요. 요즘 좀 잘나간다고, 그다음은요?”
“아니에요. 됐어요.”
무대 위에서는, 그리고 화보 사진에서는 그렇게나 여유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사람이, 표독한 빛을 눈가에 세운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기분으로 오늘은 레슨 못 하겠어요. 다음에 하죠.”
“다음이라뇨? 오늘까지 아닙니까? 레코딩 전까지만 하기로 했잖아요.”
“디렉팅까지는 해주셔야죠.”
“레코딩 전까지만 하기로 했어요.”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매니저를 향해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매니저 갈아치웠지 참. 센스 없이 여왕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하네요. 아연 씨 보컬 레슨은 여기까지 하죠. 남들을 막 대하는 모습,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 피곤합니다.”
마녀처럼 차가운 모습으로, 그것도 나가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간 걸 보면 뒤에 가서 얼마나 내 욕을 할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 * *
심기가 불편해진 여왕이 향할 곳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박영민 그 사람이 요즘 잘나가고 있는 건 여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순 없었다.
박영민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 그녀는 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저 속상해서 앨범 준비 못 하겠어요.”
그녀의 입가에서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만들어졌다.
-왜?
유아연은 박영민과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당연히 그녀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녀에게 유리하도록 적절히 가공된 이야기를.
-그게 뭐가 문젠데?
“전무님……?”
-아연아. 그분은 네 선생님이잖아. 선생님이 제자한테 따끔하게 한소리 할 수도 있지 그게 뭐가 잘못이야?
“전무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보컬 트레이너는 발성을 가르치는 거지, 제 인생에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보컬 트레이너가 인생까지 가르쳐줄 수 있으면 더 훌륭한 선생 아니야?
“전무님!”
말문이 막혔다. 어쩌다 이 사람은 이렇게 됐지? 요즘 매출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프로듀서라서?
-스승을 존경할 줄 모르고, 신뢰하지도 않는다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거야. 먼저 가르쳐 달라고 했던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일 당장 박 실장한테 가서 사과하도록 해.
* * *
[황유미 정규1집, 믿고 듣는 발라드퀸의 귀환.] [겨울 감성을 안고 황유미 등 음원강자들 대거 출격.] [역시 황유미. 감성 발라드의 여왕.]간지러운 기사 제목들을 보더니 유미는 한마디 했다.
“창피해서 기사를 못 보겠어요. 제가 발라드퀸이라니…… 에이, 말도 안 되죠. 저 그냥 제목까지만 볼게요. 내용은 도저히 클릭 못 하겠어요.”
오랫동안 무명으로 있어 왔기 때문일까. 유미는 언제나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꼭 이렇게 자극적인 기사를 내야 되는 건가요? 이제 저 정도면 이런 기사 없이도 차트에서 잘 올라갈 것 같은데.”
음…… 겸손한 게 아니었나.
“농담이에요, 농담! 박 실장님은 맨날 심각해.”
드디어 유미의 앨범이 나왔다. 앨범에는 기존에 발표했던 곡 외에 두 곡이 추가로 수록되었다.
Let Down – 잔잔한 어쿠스틱 사운드 위로 유미의 목소리가 예쁘게 얹혀진 곡.
다신 만나지 말자 – 템포가 조금 빠른 R&B 발라드.
반응은 괜찮았다.
-황유미는 정말 나한테만큼은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임. 노래 하나하나가 명곡.
-다신 만나지 말자 들으니 괜히 내 마음이 슬퍼져요.
-이 사람 노래는 다 좋네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었다가 가사 쳐서 찾아 들어왔어요. 너무 좋다.
“댓글 진짜 고맙다. 이거 보셨어요? 자기한테는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래요.”
“자극적인 말은 창피하다며?”
“에이, 이건 다르죠. 맘에도 없는 소리를 써대는 기사하고, 팬이 직접 달아주는 댓글하고 어떻게 같아요.”
두 곡 중에는 ‘다신 만나지 말자’가 좀 더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발매하자마자 차트 9위로 랭크되더니 1시간 뒤에는 2위, 그다음 타임에 1위를 차지했다.
Let Down은 30위권으로 진입 후 세 시간 뒤에는 8위까지 올라갔다.
덕분에 이미 차트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머지 두 곡도 조금씩 순위가 상승했다.
이 정도면 정말로 음원 강자다.
클래스가 높아진 만큼 행사 단가도 크게 올랐고, 방송 출연도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몬스터 뮤직의 매출 그래프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유아연의 비중이 두텁게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황유미라는 이름이 눈에 띄게 자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몬스터 뮤직의 대표 아티스트 자리를 넘보는 위치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 * *
다음 타자 비츠걸스의 준비 또한 문제없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부담감이 가득한 타석이었다. 한 점 차로 뒤지고 있는 9회 말, 투아웃 주자 1루.
진루만 해도 제 역할을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게임을 끝내 버리고 싶었다. 다음 타자는 몬스터의 여왕. 거기까지 타순이 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팩트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 이번에 우리 애들은 담장을 넘겨야 한다.
판은 제대로 마련되었다.
에잇돌스에 출연한 것이 좋은 기회로 작용해 주었다.
파일럿 프로그램의 특성상 시청자들의 관심을 계속 묶고 있기에는 힘들 거라고 봤지만 현재까지의 성적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첫 회는 올유어걸의 컴백 무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높은 시청률이 나왔고.
올유어걸의 생존에 반감을 가진 다른 팬덤 때문에 이슈가 되어 그 시청률이 다음 회차에서도 그대로 유지 되었다.
그렇게 보는 눈이 많아진 가운데 연화가 보여준 무대는 팬들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는 ‘요즘 듣보돌 클라스.jpg’의 주인공이었지만, 지금은 ‘무대를 씹어 먹음’이라는 영상의 주인공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단 한 번의 무대가 가지는 임팩트는 정말 컸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터넷을 씹어 먹는 홍보 영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힘들지?”
“괜찮아요.”
“얘들아. 우리 치킨 시켜 먹을래?”
“정말요?”
늦은 새벽. 스튜디오.
보컬 레코딩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비 맞은 허수아비처럼 축 늘어져 있던 애들은 내 얘기를 듣고서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소리에 힘이 없어. 너네들, 배 좀 채워줘야겠어.”
그리고 그 옆에서도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다가 번쩍 정신을 차린 부우가 내 어깨를 꽉 붙잡고 있었다.
“영민아. 기가 막힌 생각을 해냈구나!”
스튜디오를 더럽힐 순 없어서 치킨이 도착한 뒤에는 휴게실로 이동했다.
네 명의 아이들, 엔지니어, 작곡가 김인혁, 그리고 프로듀서인 나까지. 휴게실이 비좁아졌다.
“이게 얼마 만인지.”
“나 합숙 시작한 뒤로 튀긴 거 처음 먹어봐.”
애들은 눈물을 쏟아낼 기세로 뜨거운 치킨 조각을 입으로 물어뜯었다. 아니, 애들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정확히는 다은이와 승연이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연화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해서 칼로리가 높은 것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 식단으로 기름진 것이 나오면 일부러 먹지 않고 남기는 일도 있을 정도라니까.
가수가 되기 위해 살아온 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통째로 여기에 갈아 넣은 아이.
그래도 레코딩을 앞두고 체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요즘 일정을 소화하느라 체력에 벅찬 모습이 종종 보였는데.
“연화야. 너도 좀…….”
하지만 이미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서 튀김을 조심스레 들고 있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턱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 역시 식욕 앞에서는.
하지만 선하는 옆에서 물만 마시고 있었다.
“선하야. 너도 좀…….”
“안 먹습니다.”
“아, 그래.”
자기 관리라면 얘가 제일 독종이었다. 살이 붙으면 춤선이 제대로 안 나온다면서.
“박 실장님.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유아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예. 내일부터는 그쪽으로 일정이 잡혔거든요.”
엔지니어는 슬쩍 곁눈질을 하며 내 눈치를 봤다.
“오늘 끝내야죠. 그게 이 회사의 방식이라니까요.”
그러면서 엔지니어의 시선은 김인혁 쪽에 살며시 머문다.
“하지만 이번까지일 겁니다.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네?”
“회사가 너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면 안 되죠.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충분히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번 곡은 더없이 훌륭했다. 제목은 ‘Never Mind’로 정해졌다.
마치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듯한 웅장한 브라스 샘플이 느릿느릿 인트로를 꽉 채우고 나면, 신경질적인 전자음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엇박 리듬의 트랜스가 반복된다.
순수하고 소녀적인 여성성의 일부분만을 표현하는 다른 음악과 다르게, 농밀한 멜로디가 끈적끈적 이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김인혁의 독특한 감성이 대중들을 강하게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익어가는 우리 애들의 목소리가 입혀진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한 방’이었다.
에잇돌스 마지막 무대. 여덟 개의 팀이 새로운 곡을 발표하는 무대.
시청자들은 충분히 우리 애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방의 타격으로 그들 모두를 사로잡아야 한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저 멀리서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우리 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빛이, 오직 우리 애들만을 비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 * *
반면, 눈부신 빛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찬란한 빛을 받으며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잘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틀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던 지윤이가 모처럼 얼굴을 비추더니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림자처럼 유난히 어두운 얼굴을 봤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맡았던 연습생은 모두 아홉 명. 그중에서 다은이가 에이스였고 그다음은 지윤이었다.
첫 월말 평가 때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었고, 두 번째 월말 평가에서는 음역대가 깔끔하게 높아졌다며 온갖 칭찬을 받았던 연습생.
올해 스물두 살. 몬스터 뮤직에서 4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다.
“다른 곳으로 가는 거니? 괜찮으니까 나한테는 말해줘도 돼. 이대로 노래를 포기하는 거면 너무 아쉬워서 그래.”
다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을 정도로 가창력이 출중한 아이였다.
“저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하려구요.”
“조금만 더 해보지그래. 지금까지 해온 게 너무 아깝잖아.”
“솔직히 선생님께서 보시기에도 가능성은 안 보이잖아요.”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 회사 연습생 중에서 너만큼 할 수 있는 애가 어디 있다고.”
비츠걸스의 서브 보컬 자리를 두고 승연이와 경쟁을 했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재능은 둘이 비슷해서 누구 한 명을 고르기 쉽지 않았고, 팀의 중심으로 세울 연화와의 조합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승연이가 좀 더 낫겠다는 판단으로 지윤이는 데뷔조 선발에서 탈락했다.
스물두 살.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스물세 살.
여돌 시장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리미트 라인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룹 쪽으로는 비츠걸스가 얼마 전 데뷔했고, 솔로 쪽으로는 중고 신인 황유미가 자리를 잡아버렸다. 당분간 신인을 데뷔시킬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라…… 조금만 더 다듬으면 얘도 매력적인 가창력을 가지게 될 텐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연습생들 레슨을 한 번도 빼먹지 않은 것은 지윤이 같은 훌륭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하긴.”
연습생들의 경우는 자신이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아직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었고, 연습생 계약이라는 것은 갑과 을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데뷔팀에 선발되고 전속 계약을 맺게 되면 그렇지 않게 되지만.
지윤이는 비츠걸스가 데뷔한 이후 세 번째로 회사를 그만두는 연습생이 되었다.
데뷔 팀에 있었다가 탈락한 뒤 회사에 나오지 않는 아이, 그리고 다른 회사로 옮기겠다며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남기고서 떠나 버린 아이.
흔한 일이기는 했다.
누군가 데뷔를 하여 빛을 마주하게 되면, 다른 쪽에서는 시커먼 그림자 속으로 파묻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데뷔 시즌 직후에는 그만두는 연습생들이 그렇게나 많다고 한다.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정말이에요. 이 회사에 들어와서 몇 년 동안은 시간만 허비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지만, 선생님께 배웠던 몇 달은 그렇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노래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끼는 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 걸 저에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윤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 * *
“청소 언제 끝나요?”
“30분 정도 더 걸리겠어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죠?”
“서둘러 끝내보겠습니다.”
“아니……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세요. 흔적을 깨끗이 지우시라구요.”
톤이 높은 유아연의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그녀는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그녀의 레코딩이 시작된다. 이제 이 공간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오직 이번 앨범에 관련된 사람들만이 허가된 시간에 출입할 수 있다.
“저기, 저쪽. 먼지 쌓인 거 안 보여요?”
그리고 이날은 유난스럽게 청소에 참견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청소가 다 끝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 애들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고 싶었다. 박영민 실장이라는 그 사람이 키우고 있는 그 네 명이 흔적.
아이들이 무슨 잘못인가 싶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서 만들어지는 화살은 그쪽만을 향하고 있었다.
“오빠도 어제 여기 있었다면서?”
여기서 오빠라고 호칭하는 사람은 김인혁 프로듀서였다.
“비츠애들 이번 곡, 내가 쓴 거야.”
“손 뗀 거 아니었어?”
“손을 왜 떼?”
능청스럽게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는 프로듀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가 이번 앨범 망치면 다 그 사람 때문이야.’
그리고 평소의 억지스러운 성격은 생각의 끝을 그런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을 망칠 순 없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일 생각이었다.
누가 이 회사의 주인인지, 누가 더 위에 있는지, 분명하게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원래대로 일정이 진행되었다면 비츠걸스의 미니 1집이 이번 주에 나왔어야 하고, 그녀의 9집은 약간의 텀을 두고 뒤이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 애들이 참가하고 있는 이상한 프로그램 때문에 일정이 꼬여 버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시 발매된다. 하루나 이틀 차이를 두고.
그녀의 파워라면 충분히 일정을 변경시킬 수 있었지만 그대로 가자고 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확실하게 비교될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자존심이 뭐고 다 내팽개친 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10년 동안 쌓여온 거대한 팬들의 군단이 그녀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것이다.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뭐라고?”
“아냐.”
“뭐가 망해?”
“아니라고!”
누가 주인인지 확인시켜 준 뒤, 서열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녀의 눈에 모처럼 새카만 독기가 끼어들었다. 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넘칠 것 같은 의욕이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 * *
“왜 업체가 바뀐 겁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보려고 했다. 감정을 꾹 눌러 담고서.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투가 말에 섞여 버렸다.
“스케줄이 서로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뮤비 제작 업체가 오늘 아침에 변경되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프로듀서인 나도 모르게 업체가 바뀌다니.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게 아니구요?”
“아니에요. 그냥…… 스케줄 때문에.”
“알겠습니다.”
누군가의 훼방 공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가수 유아연이 10년의 경력을 쌓으며 가요계에서 버티는 동안, 인간 유아연은 아직도 10년 전에 머물러 있나 보다. 열여섯 살의 그때로.
“본부장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하는 수 없이 대머리 본부장을 찾아갔다.
“응? 뭐가?”
“왜 우리 애들 뮤비 업체랑 재킷 촬영 일정이 막 바뀌는 거죠? 의상 제작은 또 왜 이렇게 늦어져요?”
“그래? 난 몰랐네.”
이 회사의 A&R 본부장이 이걸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나.
“내가 알아볼게.”
“뭘 알아보신다는 겁니까? 제가 지금 알아보기 위해서 여기 왔잖아요. 본부장님한테 말이에요.”
“나한테? 그거야 실무 보는 애들이 하는 거라서…….”
유난히 내 앞에서 속을 내비치지 않으며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이길래, 그저 성격이 이런 사람인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손동하 사장이 몬스터 뮤직을 처음 설립했을 때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초창기 멤버.
말하자면 전무가 이 회사의 변화를 시도할 때의 기준으로 볼 때, 구 세력 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김인혁 중심으로 바뀌고 나서도 여전히 자기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괜히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본부장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겁니까?”
“왜 그래? 아침부터.”
“아닙니다. 이런다고 저한테 말씀해 주실 분은 아니시니.”
“천천히 가. 너무 급하면 넘어진다.”
스튜디오는 3일째 접근 금지 공간이 되어버렸다. 중소 엔터 업체가 아무리 메인 가수 한두 명에게 좌우된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지난주 전무를 만났을 때 나눈 이야기가 있었다.
‘조금 주제넘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말해봐.’
‘몬스터 뮤직이라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뮤지션에게 친화적인 분위기라는 이미지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몇 달 동안 일을 해본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점이 그런지 구체적으로 말해봐.’
‘아티스트 한 명에게 집중된 구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인들을 키우기에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난 우회적인 화법을 좋아하지만 이런 건설적인 대화에서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분명하게 말해봐.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내 생각을 설명했다.
황유미와 비츠걸스의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애로 사항 등을.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겠다는 것까지 덧붙여서.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말했다. 중소 업체 특유의 경직된 문화가 남아 있다면 나는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맡고 있는 애들이 안타까워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입증하지 않는다면 난 자네 방식을 지지할 생각이 없어. 자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금의 방식은 우리가 최적의 이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야. 자네의 방식이 그것 이상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때는 고민해 보도록 하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에 저희 회사 아티스트 셋이 동시에 앨범을 런칭합니다. 여기서 제가 맡고 있는 둘이, 다른 하나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제 뜻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가져올 이익에 있어서 비츠걸스와 황유미 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면.
한마디로 말해 몬스터 뮤직의 대표 아티스트가 바뀔 수 있다면 내 뜻을 수용해 달라는 얘기였다.
‘회사를 자네 중심으로 개편해 달라는 얘기?”
‘네.’
‘둘은 첫 앨범을 내는 거고, 다른 하나는 앞선 여덟 개의 앨범에서 이미 검증이 되었어.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앞으로의 가능성은 저희 쪽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더 높게 쌓았다간 무너질 것이 위태로운 사람보다는 앞으로 쌓아 올릴 것이 많은 쪽에 가능성은 더 있을 겁니다.’
의외였다. 전무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해 주었다.
‘알았어. 그럼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자네의 두 아티스트가 이번에 보다 좋은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면, 자네를 우리 회사의 A&R 본부장으로 승진시키겠어. 그리고 아티스트 관리의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전무와 눈을 마주치고만 있었다.
‘자네는 확률이 백 퍼센트잖아. 표본이 적은 게 흠이지만 말이야. 좀 더 많은 표본을 두고 판단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아. 난 자네를 놓치기 싫거든.’
아티스트 관리의 모든 권한. 우리 회사의 소속된 모든 아티스트들.
활동하는 것, 앨범을 내는 것, 그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능력이라면 그런 권한 속에서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영민아. 그러지 말고 같이 커피나 한잔하자. 일은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잘 될 때도 있고 그러는 거야.”
“아뇨. 다음에 하죠. 지금 바로 갈 데가 있어서.”
“거 참, 너무 급하게 하지 말라니까.”
대머리 본부장은 기분 좋게 웃었다. 마음 약해지게.
“커피는 다음에 해요.”
“그래.”
* * *
연속으로 1등을 차지한 우리 애들은 여전히 가장 큰 대기실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멤버 수가 많지 않은 팀이라서 대기실은 휑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이고. 내가 급하게 오느라 애기들 간식거리를 하나도 안 사 왔네. 저기, 김 대리님.”
빈손으로 온 걸 뒤늦게 알아채고 그런 말을 했더니
“푸핫! 애기라뇨.”
“우와…… 우리 보고 애기래.”
커다란 바버체어에 앉아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보고 있던 애들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하는데.”
“큰일 났네. 이거 때문에 무대에서 웃음 터지면 어떡하지.”
에잇돌스의 마지막 무대였다. 그리고 네버마인드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방송과 동시에 음원을 공개한다.
앨범의 경우 초동 3만 장을 목표로 했었는데, 예약 판매만 벌써 만 장을 넘어버렸다.
초동 판매라는 것은 앨범 발매 후 일주일 동안의 판매량을 의미한다.
대부분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앨범 판매량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초동 판매량은 곧 팬덤의 화력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아이돌에게는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탑급 걸그룹의 경우는 5만 장 이상, 사실 3만 장을 넘기기만 해도 1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애들의 목표인 3만 장은 현실적으로 봤을 때 높게 잡은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유아연과 비교되려면 그 정도는 달성해야 한다. 유아연의 초동 판매량은 평균적으로 3만 장에서 4만 장 사이, Hurt가 수록되었던 정규 3집은 17만 장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솔로 가수의 팬덤 화력이 그룹에 비해 약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녀의 장악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3만 장 이상은 팔아치우고, 최종적으로는 6~7만 장의 총 판매량을 기록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먼저 메이크업을 마무리한 연화가 내 쪽으로 빤히 시선을 두면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연화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제 언니랑 마주쳤는데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어요.”
그 언니에게 꼬맹이라고 불리는 아이는 남은 멤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특이한 분이에요.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단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려고 하는 분이죠.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저렇게 성공하는 건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저도 저렇게 해야만 하는 건지.”
“너한테까지 뭐라고 했니? 괜찮으니까 말해봐.”
애들까지 건드렸다는 생각이 드니 안에서 뜨끈뜨끈한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이번에 진짜 열심히 할게요.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To Be Continued
알고 보니 천재 뮤지션
2권
이돌구 현대 판타지 장편소설
지은이 : 이돌구
발행인 : 권태완, 우천제
전자책 발행일 : 2020-11-04
정가 : 3,200원
제 공 : KWBOOKS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1길 38-9, 401호
ISBN 979-11-293-67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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