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5
1장 예상할 수 없었던 일
윤정아 기자가 미디어 허브라는 곳에 입사했을 때, 그녀의 사수는 이런 말로 사무실을 묘사했다.
문서가 마구 날아다니는 곳.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윤정아 기자는 나름대로 상상을 해봤다.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문서 더미를 마구 집어던지나?
누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파티션 사이로 종이를 흩뿌리는 모습……. 그런 걸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비유적인 표현인가?
열심히 쓴 기사가 마치 날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디론가 떠다니는 걸까?
그녀는 한동안 기사가 날아다닌다는 것에 신경을 세우고 있었다. 날개 달린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없도록 공중에 떠버리는 것, 그녀 나름대로 의미를 짐작해 본 것이 있었지만 무엇 하나 뚜렷한 대답이 되어주진 못했다.
연예부 기자의 삶.
그런 걸 살고 있다 보니 사수가 했던 얘기는 점차 잊혀져 갔다.
이따금 생각날 때가 있었지만 사수와는 다른 팀으로 떨어져 버렸고 그녀도 자신만의 경력을 계속 쌓아가고 있었다.
이제 10년 차 기자.
누군가 물어보면 대답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사무실은 문서가 마구 날아다니는 곳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요…….
사수가 말했던 그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그 의미를 말할 수는 있게 되었다. 정말이었다. 이곳은 문서가 날아다닌다.
“얘네들 음원 성적 얼마큼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10년의 경력 중 6년을 같이했던 임 대리가 그녀에게 물어봤다. 윤정아는 조금 전 비츠걸스의 기사를 마무리하고 방송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르지. 지금은 상위권이 너무 견고해서.”
케이블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네 명의 아이들은 신곡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각에 음원과 뮤직 비디오 공개.
윤정아는 기사를 이미 마무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 가지 버전으로.
대박, 중박, 쪽박.
세 가지를 준비해 놓고 상황에 맞는 내용을 골라서 전송하는 것이다.
“얘 마스크가 괜찮아.”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멤버 한 명을,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가 걔 아니에요? 솔로 영상으로 난리 난 애. 잘하더라고요. 그룹으로 나올 애가 아닌데.”
아이돌 그룹의 멤버라면 어느 한쪽에 뚜렷한 장점이 있어야 한다. 대신 팀의 구성원이 아니면 혼자서 빛나기 힘들 정도로 단점 또한 분명한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작자라면 이렇게 여럿을 모아놓고 각각의 장점만을 노출시키고 단점을 감추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래도 이 팀은 좀 심심해요. 재미가 없어.”
지난번에도 준비된 기사를 클릭 한 번에 전송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뒤 방송을 모니터했었다.
비츠걸스의 경우 1위를 할 경우 그간의 고생을 전부 풀어내겠다는 듯이 눈물바다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그들의 리더는 덤덤하게 마이크를 붙잡고서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끝이었다.
“심심하지.”
가십거리가 없었다. 멤버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을 접수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잡혀주지 않았다. 아직 신인이라서……. 10년 차 기자의 눈에 하나라도 들어오면 그럴듯하게 짜 맞출 수 있을 텐데.
“음악이 참 괜찮아.”
“그렇죠?”
“뭔가 있어. 이 사람 음악은.”
프로듀서 박영민에 관한 자료도 충분히 수집했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아주 조금. 정말로 2% 정도.
“전에 말씀하셨던……. 박영민인가 그 사람이요?”
“어, 맞아.”
“그런데 이거 보니까 작곡에 김인혁도 참여했는데요?”
“그래?”
몬스터 뮤직에서 보내온 보도자료였다. 너무 장황하게 쓰여져 있어서 쳐낼 걸 쳐내버렸는데 그 부분은 놓친 것 같았다.
제작은 박영민이, 곡은 박영민과 김인혁의 공동 작업.
“그렇네?”
그녀의 머릿속에 몇 가지 시나리오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수집한 박영민의 자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여기는 김인혁이라는 작곡가. 둘은 예전에 같은 팀이었고…….
“26위?”
“26위야?”
그리고 정시가 되었을 때 비츠걸스의 네버마인드라는 신곡이 차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낮네요?”
일단 방송 내용에 관한 기사는 벌써 나갔다. 서바이벌 무대에서 모두 1위, 덤덤한 듯 감사를 표하는 멤버들. 실력파 걸그룹. 유난히 눈부시게 빛나는 네 명의 재능.
“확 치고 올라올 줄 알았는데 26위는 좀…….”
“아직 신인이잖아.”
발매하자마자 1위로 진입할 수 있는 탑티어하고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는 곡이 진짜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아까 제 자리로 돌아가서도 계속 흥얼거리게 되더라고요. 한 번 들은 건데 잊혀지지가 않고…….”
팬덤의 크기가 작으니까.
하지만 윤정아 기자의 의견도 그녀의 후배와 다르지 않았다. 곡이 좋다. 분명히 반등하게 될 것이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곡들을 전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박영민이 손댄 곡들. 거기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었다.
-들으면 잊혀지지 않고, 계속 머리에 남아 있게 된다.
수많은 음악을 접하고 있기에 그러한 특이한 점은 금방 각인될 수 있었다.
이번 곡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곡이었다.
그리고 한 타임이 더 지나갔을 때.
“팀장님! 1위예요, 1위!”
후배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조용히 해봐. 기사 보내고 있어.”
그녀는 준비했던 기사를 전송했다. 세 가지 중에서 하나로.
비츠걸스의 신곡 네버마인드가 실시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곡은 박영민이 제작했다는 것, 조금 전까지 1위를 지키고 있었던 곡 또한 박영민의 곡이었다는 것.
그녀가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내용이 활자가 되어 세상으로 퍼졌다.
이윽고 수많은 어뷰징 기사들이 그녀의 문서를 담고서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음원 사이트의 비츠걸스 앨범란에 댓글들이 주르륵 채워지고 있었다.
-타팀 팬이지만 이 앨범 너무 좋아요ㅜㅜㅜㅜ.
-아무도 모를 줄 알고 네버 마인드 부르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옆에서 다 따라 부름.
-요즘 청순 컨셉만 듣다가 간만에 고퀄.
-원래 걸그룹 노래는 몇 번 들으면 질리게 되는데 이 곡은 안 그렇네요.
대부분 호평이었다. 평점은 4.8
팬카페도 난리였다.
-안녕하세요! 방금 가입했어요.
-1위다! 1위!
-뒤늦게 덕통사고 나서 여기까지 실려 왔습니다.
-스밍 인증.
-가입했어요!!!
-너무 연화연화한 사진.jpg
-연화 여친룩.jpg
회원 수 늘어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음원 차트에서 1위를 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아직은 걸음마를 뗀 것에 불과했다.
음원 수익만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앨범 및 굿즈 판매, CF 수익 등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직은 성공했다고 하기에 이르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차트 1위라는 타이틀 때문에 방송 섭외를 잡아내는 건 훨씬 수월해진다. 유미의 사례에서 나는 그걸 제대로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매니저들은 갑자기 숨 돌릴 틈 없이 바빠지게 되었지. 1위를 하고 나니까.
“피곤하시죠?”
신인개발팀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계속 혼자서 어깨를 스스로 주무르고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더니.
“아뇨. 그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애들과 함께 연습실에 있었다. 연습을 하는 건 아니었고, 다 같이 둥글게 모여 앉아서 초조한 마음으로 순위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다 같이 끌어안고 소리를 질러 댔다.
있는 힘을 다해 부둥켜안고, 철썩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때리고, 펄쩍펄쩍 뛰는 애들도 있었고…….
애들 힘이 얼마나 센지. 맨날 춤추는 애들이라서 그런지. 그래서 어깨가.
“우리 애들한테는 박 실장님이 구세주겠어요.”
“뭘요. 저 혼자 해낸 것도 아니고. 팀장님도 같이 고생하셨잖아요.”
“그래도 초반에는 너무 성적이 안 좋아서 말이 많았잖아요. 오랫동안 같이해온 애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빤히 보이더라구요. 어린 애들이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가 힘들었는데……. 박 실장님이 맡으신 뒤로 잘 풀리기 시작한 거죠.”
신인개발팀장은 자기도 감사하다는 듯이 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아……. 하지 마세요. 이게 결린 게 아니라…….”
그리고 그러는 사이 정영수 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박 실장님?
“네.”
-지금 통화되시죠?
“그럼요. 저희 1위 한 건 보셨죠?”
-봤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구요.
정영수 팀장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방금 전 차트 1위를 찍었던 팀의 치프 매니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지금 애들 숙소로 가고 있어요.
“숙소요? 우리 애들이 지금 회사에 있는데요.”
-알아요. 숙소에 뭐가 도착했나 봐요.
뭐가 도착해?
-택배로 왔길래 그냥 두고 가라고 했죠.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우리 애들 숙소 옮긴 지 얼마 안 됐어요. 누가 어떻게 택배를 보낸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언뜻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애들은 이제 핸드폰을 쓸 수 있으니까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렸을 것이고, 그래서 애들 부모님이 반찬 같은 것이라도 보내줬다는 이야기 정도가.
-느낌이 이상해서 우리 애를 보냈어요. 역시 그 내용물이 좀…….
“누가 보낸 건데요?”
-확인이 안 돼요.
“내용물은요?”
정 팀장의 목소리가 심각해진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가 보려고 하는 겁니다.
바쁜 사람이 다른 일을 마다하고 갈 정도로 중대한 일.
-박 실장님께서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오픈하지 말기로 하죠. 당분간은 말이에요.
“그래야겠죠.”
-박 실장님하고 저. 그리고 우리 팀원까지만 알고 있는 걸로 할게요. 애들에게도 얘기하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분명하게 확인되기 전까지는 정 팀장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숙소 도착하면 전화 드릴게요.
* * *
네버 마인드가 1위 자리에 앉게 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미디어 허브의 윤정아 기자는 여전히 숨 쉴 틈 없이 기사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세 가지로. 대박, 중박, 쪽박.
아니, 그렇지만 쪽박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위는 여전히 그 신인 걸그룹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곧 있으면 괴물 엔터사의 괴물 솔로 가수가 컴백한다.
이번이 9집 앨범.
“요즘 몬스터 잘나가네요. 이거 잘하면 자기들끼리 1위를 돌려먹기 하겠는데요.”
유아연의 프로듀서는 박영민이 아니었다. 김인혁과 유아연의 공동 프로듀싱.
이건 어떤 음악일지? 이것도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일 수 있는 음악이 될 것인지.
그리고 그녀의 궁금증이 점점 증폭되고 있을 때, 신규 앨범 카테고리에 새로운 이름이 나타났다. 몬스터의 여왕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 * *
이날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출고되었다! 드디어 나의 첫 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박 실장님. 차 뽑으셨어요?”
주차장에 기가 막히게 차를 대놓고, 그 자태를 구경하고 있었더니 벌써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무가 사준다고 했던 그런 고급스러운 수입차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실속있는 SUV 모델로 선택했다.
연습실에 들어가니 애들은 모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트 1위를 차지한 뒤 방송 섭외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중에서 몇 가지는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지만 아직 일정은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신곡 프로모션 스케줄 외에는 이렇게 회사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날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너희들, 오늘 몇 시에 끝나니?”
“저희요?”
“일정표 보니까 하는 거 없던데.”
“예. 오늘 스케줄은 없는데요?”
“그러니까 몇 시에 끝나는데?”
그렇게 묻자 애들은 자기들끼리 눈치를 봤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려구요. 정 팀장님이 그러셨는데, 이제부턴 잠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질 거니까 쉴 수 있을 때 쉬라고 하셨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연습 안 한다고 내가 잔소리할 줄 알았나 보다.
“이따 숙소 갈 때 내가 데려다줄게.”
“네?”
“내 차 타고 가자고.”
“어? 선생님 차 사셨어요?”
승연이가 놀라며 묻길래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엥? 그럼 쌤 지금까지 차 없었어요?”
“없었잖아.”
“어른들은 다 하나씩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나랑 제일 오래 연습했다는 이 녀석은 나한테 관심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듯했고.
“저희 데려다주신다고요? 선생님, 운전은 배우신 거죠? 가다가 저희 다 죽으면 안 되는데.”
“나 운전 잘해!”
“믿어도 되는 거예요?”
“이 녀석들이 진짜…….”
“그래도 1위는 해보고 죽는 거니까 다행인 건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르나 보다. 생애 첫 차에, 가장 먼저 태울 사람으로 선택한 건데.
“그럼 너희 차 타고 가든가.”
“아니에요. 선생님, 축하해요!”
* * *
그리고 이날 오후에는 작은 소란이 한차례 일어났다.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회사로 들어왔다.
연습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꼬마였고, 무언가를 찾고 있듯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조금 엉뚱해 보였다.
“너, 거기서 뭐 하니?”
내가 그 아이를 발견한 것은 지하 2층 복도. 애들의 연습실이 있는 곳이었다.
여덟 살? 아홉 살? 그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너 누구 찾아?”
“아뇨.”
“그럼 뭐 하는 거야? 여기 어딘 줄 알고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
이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꼬마가 지나다니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여기 회사야. 너 잘못 들어온 거 아니니?”
“아니, 알아요.”
“여기 음악 만드는 회사야.”
“안다구요.”
얘하고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듯이 허리까지 숙여서 말해봤지만, 이 녀석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너 누구 찾고 있지? 아저씨한테 말해봐. 아저씨는 이 회사에 있는 사람이야.”
그래도 묵묵부답.
이제는 내 쪽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연습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키에선 닫지 않는 쪽창을 바라보기 위해 폴짝폴짝 뛰면서.
우리 회사도 카드 찍고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던지 해야 하는데, 이런 잡상인이…… 아니, 잡상인은 아니고 이런 엉뚱한 꼬마까지 마구 들어오다니.
누구 동생? 아니면 꼬마팬?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 녀석은 도무지 묻는 말에 대답하질 않았다.
“아!”
그리고 폴짝폴짝 뛰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그런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었다.
벌컥, 연습실을 문을 제집처럼 열고 들어가더니.
“누나!”
우리 애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름은 남중연. 올해 아홉 살. 승연이의 동생이라고 한다.
* * *
“야, 네가 걔지? 급식 반찬으로 소시지 나온 게 맛있어서 주머니 넣어왔다는 애.”
“누나가 말했어요?”
“너 그리고 집에 오다가 똥 마려워서…….”
“언니,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까!”
꼬마 녀석은 승연이 품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나올 줄을 모른다. 승연이도 그런 동생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아홉 살이라면……. 열한 살 차이네?”
“그렇죠.”
“나는 네가 맨날 동생 얘길 하길래, 두세 살 차이 나지 않을까 했는데…….”
승연이 동생이라면 우리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존재였다. 승연이가 하도 썰을 풀고 다녀서.
그런데 애들 사이에서는 디테일한 얘기가 오갔기에 애가 아홉 살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본데, 나는 건성으로 들은 것인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중고등학생은 된 줄 알았고, 그래서 ‘다 큰 애가 그런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하고 생각했었다.
아홉 살이라는 것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니까 그 얘기들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누나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예.”
누나 보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견딜 수가 없어서 찾아왔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승연이에게 핸드폰이 생겨서 목소리를 듣게 되니 그리움이 더욱 커졌다고.
“이야, 남승연. 동생하고 사이가 좋네.”
“아니, 원랜 심심할 때마다 내가 두들겨 패는 앤데, 떨어져 살게 되니까…….”
“너도 며칠 전에 동생 보고 싶다고 울었으면서.”
그러면서 승연이는 아홉 살짜리 동생을 꼭 껴안고 있었다. 녀석도 흡사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이처럼 파묻혀 버릴 듯 누나에게 붙어 있었다.
열한 살 차이라면……. 그래, 누나와 동생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이긴 하겠구나.
“너, 아까 아저씨가 물어봤을 때 왜 대답 안 했어? 아저씨가 너희 누나 선생님이야.”
“…….”
“또 대답 안 하네?”
어른을 무서워하는 건지, 애들이 묻는 말에는 곧잘 대답하면서도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쳐도 무서운 걸 봤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돌려 버리곤 했다.
혹시 어른을 두려워하는 건가? 부모님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그래서 가혹한 삶을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를 하며 버티고 살았다거나…….
에이, 이건 너무 나간 것일 테다. 그랬다면 승연이 성격이 저렇게 밝지 않았겠지.
* * *
“안전벨트 하고.”
“예.”
“할 줄 몰라?”
“아뇨. 알아요.”
나의 생애 첫 차에 생애 처음으로 태우게 된 사람은 결국 이 녀석이 되었다. 승연이 동생.
요렇게 작은 녀석을 집으로 혼자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안 이르실 거죠?”
“그렇다니까.”
“진짜죠?”
“안 일러. 난 너희 부모님이 누군지도 몰라.”
“휴…….”
내 질문에 그렇게나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자기 부모님한테 이를까 봐 두려웠던 것이라고 한다. 부모님 몰래 여기까지 온 것이라서.
그러니까 어른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어른은 다 한통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누나 보니까 좋아?”
“예.”
“그렇게 보고 싶었어?”
“…….”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모험을 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아홉 살이면……. 대개 혼자서 버스도 못 타지 않나?
회사 주소는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으니까 인터넷으로 찾아봤다고 하고, 교통편은 어떻게 찾아낸 거냐고 물으니까 이것도 인터넷으로 알아낸 것이라고 했다.
“너, 똑똑하구나.”
칭찬을 해줬더니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면 어떡하냐. 너희 누나 바빠. 회사에 없을 때가 많거든.”
“그래서 그저께 통화할 때 물어봤어요. 회사에 언제 있냐고.”
“그랬냐? 똑똑하네.”
그래도 남매 사이가 돈독해 보여서 흐뭇하게 보였다.
“앞으로 누나 보고 싶으면 무작정 찾아오지 말고 아저씨한테 전화해.”
“이제 안 올 거예요.”
“왔다고 혼내는 게 아니야.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그러는 거야.”
“아니, 진짜 안 올 거예요. 다음에 또 오면 누나가 때릴 것 같아서.”
“아까 보니까 둘이 꼭 껴안고 있더만.”
“평소에는 맨날 괴롭혀요. 때리고 조르고…….”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 테고, 너무나 보고 싶으니까 숙소에서 같은 사는 사람들에게 동생 얘기를 맨날 했던 것이겠지. 승연이 동생 얘기는 나까지 알 정도니까.
“그런데 아저씨. 진짜로 엄마 아빠 만나면 안 돼요.”
“인사만 하고 갈 거라니까.”
“그것도 안 된다구요. 전 지금 친구랑 놀다가 들어가는 거라구요.”
“알았어.”
아니면 얘를 먼저 들여보내고, 나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집에 들들까? 스무 살짜리 귀한 딸을 보내놓고 마음이 편치는 않을 테니.
‘저는 승연이 보컬 선생님인데 마침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인사드리려고…….’ 아니다. 오바하는 거라는 생각이 가로막았다.
“그래도 너희 누나가 부모님께 전화 드리지?”
“저번 주부터요.”
“그래. 그럼 됐지.”
이제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며 도로에 차들이 늘어갔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고, 붉은 후미등의 행렬이 내 앞으로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누나가 요즘에 TV에 나오니까 좋지? 부모님도 좋아하시니?”
“저는 좋은데……. 엄마 아빠는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하신다고?”
가수하는 걸 반대하셨나?
“맨날 들러리만 선다고.”
“아…….”
“별로 안 좋아해요. 노래는 쥐꼬리만큼 하다가 뒤로 도망간다고.”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아?”
“제가 말한 게 아니라 엄마가 그랬다구요.”
* * *
“아저씨 앞에! 앞에!”
“알았어.”
잠깐 핸드폰에 한눈을 팔았더니, 생애 첫 차에 생애 처음으로 태운 꼬마 녀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정체가 시작되었다. 슬금슬금,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브레이크를 꾹 밟고서 핸드폰을 꺼낸 것이었는데 이 녀석은 야단이었다.
“아저씨!”
“알았다고.”
출발하기 전까지 차트 1위는 비츠걸스의 네버마인드, 2위는 유미의 다신 만나지 말자.
그 장면을 스크린샷으로 담은 것만 해도 수십 장이었다.
나에게 자동차가 생긴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일이었다. 내가 맡은 가수들이 나란히 1위와 2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이게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까 전에 유아연의 9집 앨범이 풀렸다. 이제 곧 차트에 반영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회사의 대표 아티스트가 컴백하는 것이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잠깐만.”
하는 수 없이 갓길에 차를 댔다. 이건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저씨, 왜요?”
“뭣 좀 할 게 있어서 그래.”
-난 자네를 놓치기 싫거든. 하지만 자네가 이 회사에서 일을 한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유지되어온, 이 조직의 룰이라는 것이 있어. 그걸 깨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해. 자네가 그 이상의 성과를 보여줘 봐. 비슷하거나 조금 뒤처지는 정도로는 불가능해. 누가 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앞서는 결과. 나는 자네에게 그걸 요구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한 달 안에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에는 결과가 나타났다.
유아연의 팬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아연의 정규 9집 앨범. 그리고 타이틀곡은 ‘비너스’.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로 데뷔했던 유아연은 그 후 꾸준하게 이미지 변신을 시도해왔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양한 이미지를 모두 소화해낼 만큼 매력이 넘치는 가수였다.
청순한 컨셉을 잡아 한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도도한 컨셉을 가지고 갈 때에는 불쾌하게 콧대 높은 모습과 시크한 모습의 경계를 잘 타며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섹시한 컨셉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찔한 모습으로 무대를 장악하며 그녀가 얼마나 다양한 이미지를 소화해낼 수 있는지 세상에 알리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발적인 시도였고, 소녀의 이미지를 완전하게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무장한 것은 지난 8집 앨범부터였다.
성적인 행위를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안무, 눈길을 함부로 두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노출, 언론에서는 파격적이라는 말이 심심하면 나오곤 했다.
8집 앨범도 결과만을 보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지난 일곱 장의 앨범과 비교해서 차이가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앨범이 대중적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글쎄.
내 감각이 느낀 섹시한 대중성이라면 저렇게 퇴폐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시각적으로 뚜렷한 자극을 주기보다는 관능적인 이미지가 매력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 그런 것이 음악에 잘 녹아들었을 때 대중적으로 훌륭하다는 판단이 서곤 했다.
물론 유아연의 경우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강한 관성을 가지고 있는 팬들이 쭉쭉 밀어주는 덕택에 음악적인 성과와는 별개로 늘 좋은 성적을 기록하곤 했지만.
이번 앨범도 그럴 수 있을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 *
그래도 당연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처럼.
9집 앨범의 타이틀곡 비너스는 음원으로 출시되자마자 1위를 기록했다.
우리 애들과 유미의 곡이 한 계단씩 내려왔다.
인터넷 기사는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몬스터 뮤직의 대반란, 바톤을 넘기듯이 1위를 이어가고 있다고 난리였다.
“모두들 수고했어. 회의 분위기 이렇게 좋은 거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승연이 동생을 데려다주고 오자마자 주간 회의가 시작되었다. 빈말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박영민 실장 없이 회의할 수 없잖아.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
라고 한다.
차가 막혀서 회의 시간에 지각한 내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본부장의 말대로 분위기는 좋았다. 다들 얼굴에 환한 꽃 한 송이씩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회의 시간을 이때로 잡았다고 한다. 유아연의 앨범이 차트에 오른 직후로.
유미의 앨범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뮤직의 작품들이 차트 상위권을 휩쓸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들의 앨범도 치고 올라오지 못했다. 우리의 아티스트들은 철벽같은 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몬스터 뮤직 전성기였다.
직원들은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어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얘기 들었어. 꼬마 녀석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라면서?”
하필이면 본부장 오른쪽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가 그곳에 앉자 본부장은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내년 상반기 사업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이날은 가볍게 안건을 꺼내는 자리였고, 이제부터 거듭되는 회의들 속에서 내년 농사의 계획이 수립된다.
예산이 정해지고, 그것을 승인받아야 하고, 쉽게 풀리지 않으면 끝없이 조정에 들어간다.
내년에 앨범을 내고 활동할 가수들, 그리고 그 가수들에게 편성될 예산액 등등.
“이제 슬슬 영민 실장 후임도 뽑아야 하지 않겠어?”
그런 와중에 본부장은 문득 그런 얘기를 꺼내었다.
“제 후임이요?”
“혼자 이거저거 다 하고 있는 게 좀 벅차 보여. 이제 영민이는 프로듀싱 쪽으로 전념하고 트레이너는 새로 뽑자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얘기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뇨. 괜찮아요.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힘들잖아? 내년 되면 더 바빠진다. 혼자 다 못 해.”
“그래도 이건 제가 할 겁니다.”
연습생들의 보컬 레슨을 해주는 일. 이건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도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일곱 명의 연습생들을, 모두 가수로 키워내는 것이 내 목표였다.
지윤이처럼 안타깝게 돌아가는 아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나중에 바빠져서 사람 뽑아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얘기 나왔을 때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 게 좋지.”
“차라리 다른 쪽으로 지원해 주세요. 연습생들 레슨은 내년에도 제가 전담하고 싶습니다.”
“다른 쪽……?”
전무에게 호기롭게 내 계획을 전달했을 때에도 연습생들을 키우는 일은 포함되어 있었다. 전무의 약속대로 내가 이 대머리 본부장의 업무를 맡게 된다고 해도 그건 놓치기 싫은 일이었다.
“알았어. 나는 너 생각해서 그런 거지 뭐. 안 힘들겠냐?”
힘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없었던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그걸 생산적인 것에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치 나에게 의무와 책임이 생긴 것 같았다.
아이들의 보컬 능력을 내가 업그레이드해 줄 수 있는 한,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싫었다.
그리고 또 하나 논의된 것은 상반기 연습생 모집 건.
남녀 연습생들을 새로 뽑는 것이었고, 이번에는 여자 연습생 쪽을 중점적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비츠걸스 데뷔로 여자 연습생 쪽이 확 줄어버렸으니까.
“이건 1차 오디션부터 제가 참여하겠습니다.”
“이것까지 하겠다고? 어떻게 다 하려고?”
“괜찮아요.”
신입 연습생 모집은 1차 온라인 심사, 2차 현장 심사로 이루어진다.
“지난번에는 1차에 몇 명 지원했나요?”
“2,000명 정도.”
“2,000명…….”
그 동영상들을 전부 보고 심사해야 한다는 건데……. 뭐 잠 좀 줄이면 할 수 있겠지.
“이것도 제가 할게요.”
“그러니까 후임을 두고 일해야 한다니까.”
“지원만 확실하게 해주세요. 지난번처럼 일 흐트러지게 가만두시지 마시구요.”
“지난번? 아……. 그거.”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내년 상반기에 앨범을 발매할 몇몇 아티스트의 기대 수익을 분석한 자료가 오갔고, 그걸 토대로 예산안이 논의되었다.
실무자들은 저마다 좀 더 밀어주고 싶은 가수가 있게 마련이고, 해도 안 될 것 같은 일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회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음원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차트 순위라는 것은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고, 해당 가수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이니 그만큼, 내년 상반기라는 것은 그 결실을 수확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얼굴을 어둡게 하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영민아. 너 맨날 저녁 혼자 먹는다면서?”
회의실을 나오는 중에 본부장이 가깝게 다가오며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능구렁이다. 능구렁이. 하지만 하도 겪었더니 이제는 속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바쁘다 보니까요.”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오늘 같이 먹을까?”
“오늘은 안 돼요. 약속이 있어서.”
정 팀장을 만나야 했다. 수상한 선물이 애들에게 도착했다고 해서.
“그럼 내일은?”
“내일이요?”
“그러고 보니 너하고 밥 한 번 먹은 적 없는 것 같아서.”
“그래요.”
* * *
음원 차트에는 줄 세우기라는 것이 있다. 어떤 아티스트의 앨범 수록곡 전체를 1위부터 주르륵 줄 세우듯이 상위권에 올려준다는 것이다.
팬덤의 힘이 강력한 남자 아이돌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수많은 팬들이 특정 앨범의 곡을 반복해서 스트리밍하는 것이고, 이게 잘 통할 경우 앨범 수록곡 모두가 차트를 장악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아연의 경우는 여자 솔로임에도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팬덤의 힘이 강해서 그렇게 줄 세우기 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앨범 발매 직후, 차트에서 줄을 세워 버려서 여솔 일인자의 파워를 느끼게 해주는 건 그녀에게 흔한 일 중 하나였다.
다만 이번 9집 앨범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오직 타이틀곡 하나만 1위 자리에 올라와 있었다. 나머지 수록곡들은 그저 몇 개만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앨범이나 그녀의 팬덤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고, 음원이 릴리즈된 시간이 활동 시간인 오후였기 때문에 그랬다.
남돌만큼 화력이 강하진 않기 때문에 팬들이 선택한 시간대는 새벽. 사람들의 접속이 뜸해서 집단 스밍을 할 경우 효과가 가장 강한 시간대.
따라서 팬들에게는 이날 새벽이 바로 승부의 시간이었다.
하루 전 만들어졌던 ‘스밍총공방’은 유아연의 오랜 팬들로 북적였다.
오랜만에 컴백하는 유아연을 위해 새벽에 잠을 자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람, 매크로 쓰면 굳이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면서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다들 가만히 있지 말고 주기적으로 인증샷을 올려야 된다고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 등등.
총공방은 대화를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공지)‘권장스밍리스트’ 이거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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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연의 9집 앨범은 총 아홉 개의 곡, 하지만 같은 곡이 두 개의 다른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트랙은 모두 열 개였다.
이들의 목표는 9집의 열 곡이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 차지하는 것.
-비츠걸스 순위 내려가겠네. 난 요즘 얘네들 좋던데.
-미쳤나요? 갈아 타신다구요?
-그래도 아연이가 먼저죠.
-상호존중 해주세요.
-빛걸 생각보단 많이 못 뜨는 듯
-지금 2윈데요?
-갑자기 기계들 튀어나오고 막 그러지 않겠죠?
-미치지 않고서야. 여왕이 컴백하는 날인데.
그리고 이들의 공격이 시작될 새벽 한 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분 전ㄷㄷㄷ
-난 벌써 듣고 있는 중.
-개인행동 금지요. 1시 정각부터 리스트대로 가셔야 됩니다.
-네, 죄송.
스트리밍이 점수에 반영되는 것은 한 시간에 1회. 배포된 리스트는 이것까지 철저하게 고려해서 만든 것이었다.
-1시!!!!!
-갑니다
-ㄱㄱ
-다들 고고
여솔 최강의 팬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10곡 모두 차트인!!!
-레드부츠까지 차트인 완료!!
-수고하셨어요.
-여러분 긴장 늦추지 마세요. 이제 시작입니다.
-근데 느리네요.
-계속 분발합시다.
-전 자러 갑니다. 매크로 돌려놓을게요.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차트가 변경되는 시각마다 단톡방은 시끄러워졌다.
이들의 목표는 1위부터 10위까지를 점령하는 것. 그저 차트에 오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빛걸 왤케 쎄죠? 안 넘어가네.
-3위를 못 넘네요.
-황유미도 장난 아님
-빛걸 뭔데? 왜 안 넘어가?
하지만 예전만 못했다. 이들의 총공세가 유아연 9집 수록곡들을 차트에서 상위권으로 올리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1위부터 10위까지 점령하겠다는 건 쉽게 되고 있지 않았다.
-환장하겠네. 이거 뭐죠?
-다들 뭐하세요? 주무시더라도 매크로 돌리라니까요.
-왜 이런 거지?
심지어는 2위로 내려갔던 비츠걸스의 네버마인드가 다시 1위로 올라오는 현상까지 발생해 버렸다.
-아 빛걸 진짜 뭐야.
-님들 아연이 안 듣고 빛걸 들으심?
결국 줄 세우기는 실패.
탑10에 6곡을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네 곡은 비츠걸스와 황유미의 곡들.
특히 1위 네버마인드는 도저히 끌어내릴 수 없었다.
-그래도 몬스터가 10위까지 다 먹었네요.
-14위까지예요.
-아 맞다. 14위.
-이걸로 만족하죠 뭐.
-소속사가 잘되면 아연이가 잘되는 겁니다.
-우리는 지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진 건 아닙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 *
인혁이와 내가 속해 있었던 포보이스가 두 번째 곡에서 폭망하고, 간간이 잡히는 지방 행사나 돌고 있을 무렵
회사에서는 5인조 걸그룹을 급조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얘네, 데뷔했네.”
“벌써?”
그때 우리가 속해 있었던 소속사는 몬스터 뮤직처럼 남녀를 따로 트레이닝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애들을 잘 알고 있었다.
좀 싸하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일이었다.
데뷔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죽 쑤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라도 만회를 해보겠다는 계획이야 이해가 되는 일이었지만, 그 다섯 명의 아이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던 우리는 성급한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빵 떠오르네?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음악 방송에 곧잘 출연하고, 차트에서도 중위권을 기록하고 있었다. 방송에 나와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는‘아니, 어쩌다가 쟤네들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물론 예쁘기는 참 예쁜 아이들이었다. 연습생 때에도 우리 남자애들끼리 있으면 얼굴을 붉혀가며 걔네 얘기를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데뷔해서 조금 활동을 해봤다고, 우리는 이 바닥 생리에 대해 뭔가 아는 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패배자의 푸념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려면 소속사가 빵빵해야 할 텐데? 우리 회사에서 어떻게 저런 푸쉬를 해준 거지?’ 하는 생각이 질투심처럼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차트에서 훨씬 높은 순위를 기록했지만 방송 스케줄이 저 애들에 비해 훨씬 적었던 우리를 생각하면 그 차이가 너무 확연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만큼 매력이 있고, 대중들의 구미를 잘 맞추었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속사의 힘이 없다면 저렇게 단기간에 떠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때 우리 회사에서는 도저히 밀어 넣을 수 없었던 예능 프로그램까지 그 애들은 쉽게 들어갔었다.
“영민아, 좀 이상하지 않냐?”
우리 포보이스 멤버들을 비롯해서 남자 애들끼리 있을 때 조금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 애들 밤에 어디 좀 다니는 것 같다고.
상상은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또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의문스러운 정황들이 눈에 들어오곤 했었던 것이다.
팀은 잘나가고 있었지만 지옥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눈빛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애들. 활동하는 거 잘 보고 있다는 인사를 건넸더니 죽고 싶다는 대답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같이 몇 년 동안 연습을 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해 보려고 애썼다. 생각하면 나도 덩달아 괴로워지곤 했다.
꿈속에서, 그 애들이 시커먼 남자들과 몸을 섞고 있는 장면이라도 접하게 되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진짜 쓰레기 같은 곳, 쓰레기 같은 회사,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지방으로 행사를 가던 어는 날,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매니저에게 넌지시 그 사실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왔던 대답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네들이나 잘해!”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사실이구나.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 * *
사람은 참 여러 부류가 있다.
“생각해 봐. 너한테 돈이 엄청나게 많아. 그런 애들 사는 데 쓰는 건 푼돈이나 마찬가지야. 그럼 넌 안 그러겠냐? 이쁘장하고 어린 애들 옆에 끼우고 술 마시고, 뭐 그리고 따로 데려가서……. 게다가 나 아니면 자기 인생 망가질 수 있으니까 내 앞에서 살랑살랑 대기라도 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새끼가 있어서 단호하게 대답해 줬다.
“난 안 그럴 건데.”
하지만 저렇게 더러운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유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좀 어린 사람들, 재벌 2세나 3세 또는 졸부 중에서도 젊은 축에 있는 사람들은 연예인에게 다이렉트로 연락해서 어울린다고 한다.
비슷한 또래니까 보기에 위화감이 적고, 친구처럼 어울릴 수 있으니까. 물론 안의 내용을 보면 갑을관계가 분명하겠지만.
그러나 나이가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들은 소속사를 통해서 연락한다. 뒤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거나 저거나 있는 놈들이 어린 애들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려는 심보는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한밤중에 일어나는 일이야 큰 차이 없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려는 나약한 심리와,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에 재미 삼아 예쁜 것을 취해보겠다는 욕심.
그런데 그러한 케이스 중에서도 좀 악질적인 것이 있었다.
정 팀장은 승합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새카만 박스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포장끈이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붉은 박스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리고 ‘첫 번째 앨범 발매를 축하합니다’라고 써 있는 작은 쪽지 하나.
그날 바로 정 팀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정 팀장은 그날따라 유난히 스케줄에 허덕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어서 애들 숙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만난 것은 그다음 날, 그리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차를 타고 가서야 그를 볼 수 있었다.
“누가 발송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발송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기는 했지만, 걸어 보니 받질 않아요.”
“내용은 확인하셨나요?”
“예. 주로 가방, 구두, 핸드백, 향수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 애들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팬들로부터 이따금 선물이 도착하곤 했다. 이런 걸 조공이라고 한다지.
그런데 이번 일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선물이 애들 숙소로 직접 배송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얼마인지 대충 계산을 해보니까 전부 2억 정도 되네요.”
너무 비싼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상대는 2억이라는 돈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을 정도의 큰 손이라는 것이고, 이만한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한다는 의미였다.
비슷한 일을 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포보이스가 해체되고 소속사를 옮겼을 때, 함께 있었던 배우 중 한 명이 이런 일에 제대로 엮여 버려서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박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회사에 알리지 않기로 하신 건 잘하셨습니다.”
몬스터 뮤직은 이런 일에 있어서 깨끗한 회사이긴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실적에 잔뜩 고무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어두운 뒷골목을 통해서 든든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걸 왜 마다해야 하냐는 목소리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저 우리 쪽을 흔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조공은 일절 받지 않는다고 공지를 하죠. 팬카페에, 그리고 애들 인스타 같은 곳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보내줘도 우리 애들한테는 전달이 안 되니 절대 보내지 말라고 단호하게 적을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숙소는……. 이거 진짜 골치 아프네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우리 애들을 시커먼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구역질 나도록 싫었다.
“제가 애들 스케줄 따라다니면서 다른 회사 매니저들하고 어울릴 때도 있거든요. 가끔 이런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 은밀하게 보내놓고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거예요. 아마 우리 쪽으로 곧 연락이 오긴 할 겁니다.”
“무시해야죠. 그리고 우리 애들이 좀 더 높은 위치로 가면 이런 일도 사라질 겁니다.”
정말로 그렇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 있는 대상에게는 귀신같이 발톱을 숨겨 버리곤 한다.
“더 올라가야 돼요? 우리 애들 지금도 차트 1위예요.”
정 팀장이 그렇게 말하자 우리는 둘 다 한참 웃었다.
“그런데 박 실장님 차 멋진데요?”
“어제 나왔어요.”
“안에 좀 봐도 돼요?”
“그럼요.”
기분이 확 다운되어 있던 두 남자는 차 얘기를 하면서 간신히 기분을 전환했다.
회사 사람들이 봤다간 엉뚱한 말이 나올 수 있다면서 여기로 온 것이었다. 한적한 거리. 커다란 화물차들이 주차장처럼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
“그런데 우리 여기서 이게 뭐 하는 거죠?”
“그러게요.”
아직 비닐도 다 뜯지 못한 실내를 구경하다가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애들이 저걸 직접 받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에 그렇게 되어서 꼬여 버리기라도 했다면…….”
잠깐 상상을 해봤다. 우리 애들이라면…….
“에이, 우리 애들은 안 그래요. 그럴 리 없어요.”
* * *
유아연의 9집 앨범 발매 후 4일이 지났을 때, 이제는 너무 티가 나는 기사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차트 성적으론 평가할 수 없는 유아연의 변신.] [이번에도 섹시퀸으로 돌아왔다. 음원 성적은 다소 아쉬웠지만 파격적인 변신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욱 뚜렷해진 유아연 만의 색깔, 트렌디하고 중독성이 강한 음악에서 벗어나 스타일리쉬한 자기만의 음악으로 표현하는…….]그걸 보고 있던 유아연이 한마디 했다.
“이거 나 먹이는 거지?”
음악 방송 대기실이었다. 이날은 그녀의 컴백 스페셜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매니저는 땀 한 방울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니야.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왜 꼭 기사에 이런 말을 써야 되는 거냐고? 이거 우리 회사에서 나간 거야?”
“아닐 거야. 내가 좀 알아볼게.”
매니저는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댓글을 열어볼까 봐.
거기에는 정말 지독한 언어의 결정체가…….
“짜증 나.”
다행히 유아연은 내던지듯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매니저는 길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출발은 좋았다. 발매하자마자 모든 음원 차트 올킬.
눈에 거슬리던 둘을 끌어내리면서 올라간 자리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유난히 좋아했다.
이제 수록곡으로 주르륵 채워 버리면, 꼴 보기 싫은 것들은 물에 떠내려가듯이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릴 텐데.
그걸 지켜보기 위해서 잠도 안 자고 새벽을 버텼었다. 그걸 보면 속이 뻥 뚫릴 것 같아서.
하지만 꾸물꾸물 올라오던 수록곡들은 힘을 잃어버렸고, 심지어 물에 떠내려갈 줄 알았던 것들이 다시 1위 자리로 기어 올라가는 끔찍한 광경마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작하듯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쪽에서도 무슨 수를 쓴 거 아니냐고 알아보라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정황은 없었다.
다음 날 수록곡들은 도망가듯이 모조리 빠져 버렸고, 타이틀곡마저 4위로 주저앉았다.
지금은 10위권에 간신히 걸쳐 있다. 어떤 차트에서는 20위 바깥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눈매가 자꾸 가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보통 멘탈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기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비츠걸스 네 명이 뭐가 그리 반가운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왜?”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그리고 저희 앨범 나온 것도 아직 전해드리지 못해서.”
“회사에서 주면 되잖아. 여기서 꼭 이래야겠니?”
싸늘한 눈빛, 칼끝처럼 뾰쪽한 말투.
같은 회사 후배 네 명의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언니 지금 바쁜 거 알지? 너네들도 알잖아. 그런데 꼭 이 시간에 와서 그렇게 인사를 해야 했니? 회사에서 봐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유아연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가면을 만들어내자. 지금은 그게 필요할 때다.
“알았어. 가져와 봐. 넷 다 여기 좀 앉고.”
“네.”
아무리 그래도 이 바닥에서 10년을 굴렀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일에 준비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팬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팬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니까.
“이게 너네 앨범이야?”
“네.”
“잘 나왔네. 수고했어.”
선배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마조마한 애들은 물끄러미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주 연화를 내세우기로 작정을 했구나.”
“…….”
“팀인데 이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그녀는 꼬맹이 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언젠가는 쟤가 너처럼 될지도 몰라.’ 그런 말이 종종 들렸던 아이.
“언니, 진짜 멋있어요!”
“뭐?”
“뮤비 봤다가 빠져드는 줄 알았다니까요. 와. 진짜 어떻게 그런 노래를 소화하시는지……. 진짜 멋있어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났을 때에도 좀 바보 같다고 느껴졌던 아이. 옆에 있던 멤버가 팔로 툭툭 치며 눈치를 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창력만큼은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아이였다.
“알았어. 가 봐. 힘든 일 있으면 언니한테 말하고.”
“네.”
네 명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이 바닥에서 10년을 굴렀기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차트 성적, 앨범 성적, 방송 성적은 저 애들이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팬투표에서도 밀릴 것이다. 새벽 줄 세우기도 안 되는 실정이니.
게다가 이 방송은 몬스터 뮤직과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회사에서 힘을 썼다면 이번 주 1위는 이쪽으로 줄 것인데, 그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 저 애들이 될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컴백 첫 방송을 여기서 한다는 딜이 있었을 것이고.
전부 알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 어디에 뭐가 있을지. 댓글을 굳이 안 열어본 것도 거기에 뭐가 있을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유아연은 갑자기 깔깔대는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드디어 미친 건가?’ 하는 눈빛으로. 하지만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면을 써야 했다. 같은 소속사 후배들이 1위를 한 것에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단 한 번 눈을 찡그리는 것만으로도 가십거리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가 필요했다.
뒤이어 나올 기사가 세대교체, 새로운 여왕, 몬스터의 주인이 바뀌었다 등등 온갖 더러운 것들이라고 해도 그녀는 웃을 수 있어야 했다.
다만 이번에는 아주 두터운 가면이 필요했다. 가리고 있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 * *
-저희 지금 끝났어요! 오늘 인사 드릴 분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 축하해.”
연화의 목소리가 유난히 들떠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녀석인데. 아마도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을 본 적이 드물어서 잘 상상되지 않았다. 웃을 듯 말듯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는 건 많이 봤지만.
-방송 보시고 계셨죠?
“당연하지. 현장에서 못 본 게 얼마나 아쉬운데.”
통화 볼륨을 낮춰야 할 정도로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음악 방송 1위. 데뷔 후 6개월 만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어떡해요? 우리 팬들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수화기를 통해 현장의 분위기가 들려왔다. 축하한다는 말이 시끄럽게 오가고 있었다. 꺅꺅 소리를 질러 대는 팬들의 함성까지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애들에게 가서 밤새 술 마시며 떠들고 싶었지만, 다음 날 곧바로 스케줄이 있다고 하니 그럴 순 없었다. 몇 시간 못 자고 바로 나가야 한다고.
-선생님.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맥주 사드릴게요.
“맥주?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전에 그러셨잖아요. 치킨 드실 때 맥주 땡기신다고.
“아, 그때.”
-꼭 사드릴게요. 그리고 저희 계속 맡아주셔야 돼요. 좋은 곡 주셔야 하고, 계속 가르쳐주셔야 되고……. 앗, 선생님 잠깐만요. 저 좀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저기 팬분들이 저 찾으세요.
이제 애들은 방송에서 서로 모셔가려는 위치가 되었다.
내보내면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검증된 카드여서가 아니라, 아직 하나도 소비되지 않은 신선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랬다.
어떤 아이들인지, 어떤 말을 하는 애들인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사람들은 알고 싶어 했다.
음원 차트 1위, 음방 순위 1위, 그리고 이제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올라왔다고 할 수 있었다.
* * *
퇴근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3층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는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계왕이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어? 사장님?”
“이제 퇴근하는 거야?”
“아, 예.”
밤 열한 시. 손동하 사장을 이 시간에 마주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늦게 들어가시네요.”
“나 곡 작업 하느라고.”
그는 아직 현역 작곡가였다. 예전만큼 히트하는 곡이 없어서 그렇지.
“차 샀다면서?”
“어떻게 아세요?”
“소문 들었지. 가는 길에 나 좀 태워줘. 종로까지만. 어차피 집에 갈 때 종로 지나서 갈 거잖아?”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가져 왔는데, 나 지금 술 마시러 가는 길이거든. 그냥 두고 가려고.”
그래서 이번 퇴근길에는 사장과 함께하게 되었다. 생애 첫 차에 두 번째로 태우는 손님.
그리고 영차!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내 차에 올라탄 사장은, 그 퉁퉁한 몸집으로 실내 공간을 잔뜩 채워버렸다.
“요즘 재미있지? 아까 들어보니까 음방 1위 했다는 것 같던데.”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애들이잖아요. 다들 재능이 넘쳐요.”
그랬더니 사장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게 진짜 재미있지. 재능 있는 가수한테 좋은 곡을 주고, 그걸로 그 가수를 빛나게 해주는 것. 그 맛을 한 번 보면 빠져나올 수 없어.”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
‘그 맛’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저 이번에 최인환 선배 맡기로 했습니다.”
“인환이를?”
“복귀하신대요. 제가 그 선배 앨범 맡아서 해보려구요.”
“복귀하는 거야 알지.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했으니까.”
지난 주간 회의 때 정해진 내용이었다. 내년 상반기 계획에 최인환 선배가 포함되어 있길래 그 건은 내가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전에 나한테 그런 말 하지 않았나? 미숙한 애들을 키워서 하나의 가수로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그랬었죠.”
“인환이가 미숙해 보인 거야?”
그 선배가 미숙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건 아니구요. 불완전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인환이가?”
“그런 일을 겪고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랬더니 계왕은 또다시 끄덕끄덕.
“제가 활동했을 때에도 존경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은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네 커리어에 흠집 생기는 거 아니야?”
“흠집이라뇨?”
“제작 맡은 뒤로 손만 대면 1위잖아. 인환이는 그럴 수 있는 가수가 아니니까 말이야.”
손만 대면 1위. 회사에서 그런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 그냥 좋은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사장님께서 예전에 그러셨듯이요.”
“아부는…….”
늦은 시간이라서 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VIP 손님만 아니었어도 액셀을 깊게 밟았을 것이다.
새 차의 기분 좋은 엔진 소리가 음악처럼 실내를 메우고 있었다. 사실 퇴근길에는 언제나 음악을 들으며 운전했지만 어쩐지 원조 몬스터 앞에서는 음악을 함부로 틀 수 없었다.
“영민아.”
“예?”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이 바닥에선 버틸 수 있다는 게 능력이야.”
“알겠습니다.”
“급하게 가면 안 된다. 급하게 가는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더라고. 그래도 내가 너보단 음악을 오래 해왔잖아.”
“예.”
“옛날에 그런 사람들 진짜 많이 봤어. 이 바닥이 곡 하나 잘되면 인생역전이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뭐든 하나 터뜨리려고 무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면 끝이 안 좋더라고. 아……. 그래, 영민아. 난 저기에 세워줘라. 횡단보도 옆에.”
차를 인도에 바짝 대자, 손동하 사장은 문을 열고 둔중한 몸을 풀쩍 뛰어내렸다.
손을 흔들어주길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손동하 사장은 지금도 꾸준히 곡을 쓰고 있었다. 비록 앨범의 타이틀을 차지하진 못한다지만 소속 가수들의 앨범 수록곡으로는 크레딧에 가끔 이름을 올리곤 했다.
사실상 경영에서는 손을 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몬스터 뮤직이 시작했을 때, 음악은 손 사장이 만들고, 그렇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은 박 전무가 조성하겠다고 했지만, 김인혁의 급부상으로 회사의 체계가 바뀌자 몬스터 뮤직은 박 전무 중심으로 완전히 개편되어버렸다.
회사에 이름만을 올리고 있었던 박 전무가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시점부터였다.
스스로 음악을 잘 모른다는 말을 거침없이 해대며,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한 사람.
그렇다고 철저하게 실적 위주로만 선을 그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밀어주는 라인과 그렇지 않은 라인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눈에 띌 정도로 회사의 지원을 차별하기는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손 사장은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신세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창작을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기는 하지만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을 보면 사장이라는 직함이 의문스러워질 때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전무는 또 다른 개편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제안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게 회사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 * *
유아연의 9집 앨범은 오히려 그녀의 하락세를 증명해 준 꼴이 되어버렸다.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하며 앞으로 음악적인 변신을 예고했던 청사진 마저 빛이 바래 버렸다.
나에게 패인을 분석해 보라고 하면 할 말이 꽤 있었다.
가장 먼저, 지난 앨범에서도 좋은 평을 받지 못했던 섹시 컨셉을 도리어 더욱 안 좋은 형태로 반복해서 보여줬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매력이 가지고 있는 유통기한이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굳건했던 팬덤이 이제는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팬들의 주요 연령층 또한 이제는 사회에서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통하는 곳이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속도는 한층 더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매니지먼트 1팀은 급하게 스케줄을 조정해서 국내 활동을 조기에 접고 해외 쪽 활동을 늘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같은 커다란 시장은 현지의 매니지먼트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성과가 나온다고 해도 몬스터 뮤직으로 들어오는 수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거의 날강도나 다름없을 정도로 현지 회사에게 뜯긴 뒤에야 우리 쪽으로 수익이 잡히는 식이었다. 그래서 규모가 있는 엔터사의 경우는 무리를 해서라도 현지 법인을 만들곤 하는 것이다.
“잘 이겨낼 거야. 아연이가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계속 정상에 있었던 것 같지만, 현장에서 직접 보고 있었던 우리는 알고 있거든. 힘든 일이 참 많았지. 그래도 그걸 다 이겨내며 여기까지 온 거야.”
본부장은 뜨끈뜨끈한 국밥을 한 입 넣으며 말했다.
모처럼 이분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수고했다며 한 턱 쏘겠다고 비싼 곳을 얘기하길래 그냥 회사 앞에서 국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래도 이걸론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잘 삶아진 수육 한 접시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우리 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앨범 레코딩까지 끝냈는데 엎어질 뻔한 적도 있었고……. 지금이야 자금 회전이 잘 되니까 그런 일이 없지만 회사 초창기에는 어려웠어. 직원들 불안해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거든. 이 회사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그걸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 시절을 회상하듯이, 본부장은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를 드러냈다.
“그때 참……. 아연이를 아이돌로 키우면서,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예상 못 했던 곳에서 자꾸 지출이 늘어나니까 감당이 안 되는 거야. 앨범 내놓고 활동 시작했는데 돈이 뚝 떨어졌지. 메이크업 할 돈 없으니까 직접 했고, 의상은 입었던 거 또 입을 수 없어서 집에 있는 거 가져와서 입고. 직원 월급은 몇 달씩 밀리지, 사무실 임대료도 계속 재촉 들어오지, 진짜 힘들었지. 그러다가 아연이 활동한 거 정산 떨어지면 그제야 숨통 트이면서 살아나고 그랬었어. 아이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본부장은 눈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는 고마운 분이었다. 처음 이분을 만난 것은 내가 데뷔했던 회사에서였다. 나는 연습생, 이분은 기획팀 직원.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곳은 그 당시 중소 기획사의 병폐를 모두 떠안고 있는 회사였다. 연습생을 노예 같은 걸로 보며 인간 취급도 안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트레이닝을 하면서 폭언, 폭력 등이 수없이 오가고, 데뷔 준비를 할 때에는 그런 게 극에 달했었다. 이 사람들 이거 하기 전에 조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을 정도로.
그런 중에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우리의 힘든 점을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잊을 수 없었다.
나이 차이가 났지만 친해지기 전까지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인사를 했을 때 눈을 흘기며 제대로 받아주지도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같이 고개를 숙여주며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주는 것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잘 몰라. 너희가 지금은 아무도 몰라주는 연습생에 불과하지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대스타가 되어서 음악계를 호령하고 있을 줄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런 걸 생각하면 너희를 막 대하는 사람들은 뭘 모르는 거지. 내가 너희한테 잘해주는 건 그래서 그런 거다. 나중에 잘되면 잊지 말고 나한테 보답해야 돼. 그러라고 이렇게 너희한테 열심히 잘해주는 거야.
이런 말을 해주면서 그때 피자를 사줬었나 그랬었는데.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 언젠가 잘될 수 있다는 말이, 그렇게 가능성을 인정해 주는 한 마디의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그래서 몬스터 뮤직에 들어와서 본부장을 처음 봤을 때, 훤하게 벗겨진 머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요즘 마누라가 좀 아파.”
“예?”
“어휴, 회사 분위기 좋아서 티는 안 내고 있었지만 요즘 죽을 맛이다.”
“많이 안 좋으세요?”
얘기를 들어보니 꽤 심각한 것 같았다. 수술을 마치고 장기 입원 중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사람 낫기만 하면 무슨 짓이라도 못 하겠냐 싶었지. 그런데 막상 돈 문제가 터지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는 거야. 애들은 아직 어리지, 간병인한테 나가는 돈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애들이 몇 살인데요?”
“큰 애는 중3, 작은 애는 아직 초등학생.”
“아이고…….”
그런 말을 하면서 허탈하게 웃고 있는 그의 눈에는, 아까 몬스터 뮤직 초창기 때 힘들었다는 얘기와는 전혀 다른 무게의 고초가 매달려 있었다.
“팀으로 내보낸 애들 잘 안 되고, 회사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앞이 캄캄했어. 그래서 영민이 너한테 고마운 거야. 내가 이 나이에 이제 어딜 가서 뭘 하겠냐.”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새삼스럽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애들 앨범 내기 전에 일정 꼬인 걸 가지고 본부장에게 짜증 섞인 말을 해버린 것도.
아무리 일은 일이고 개인사는 개인사라지만, 그런 것을 짊어지고 나와서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있는 본부장의 모습은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너는 더 크게 될 거야. 나중에 잘되더라도 나 모른 척하지 말고 챙겨달라는 얘기야. 그것 때문에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로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거지. 하하.”
그러면서 본부장은 한바탕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일 아니더라도 본부장님을 어떻게 외면해요. 저 데뷔할 때 제일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너 데뷔할 때? 내가 뭘 한 게 있나.”
“본부장님 아니었으면 제 멘탈 완전히 나갔을 거예요.”
“내가?”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다.
“그런 게 있어요. 주는 사람은 늘 그랬으니 기억이 안 날지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었죠.”
“뭐길래 그래?”
“자세히 말하긴 그렇고. 있어요 그런 게. 피자 사주셨잖아요.”
“피자?”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너 피자 좋아했냐? 그럼 오늘도 피자 먹으러 갈 걸 그랬나.”
“그런 게 아니구요. 그것보단, 힘내세요. 전 본부장님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반짝반짝한 머리를 빛내며 멋쩍게 웃었다.
* * *
한 달까지 걸릴 것도 없었다. 승패는 초반에 결정되었다.
상대 선발 투수는 1회에 대량 실점을 해버리고 강판 되어버린 상황. 상대는 승리의 의지를 잃은 채 패전조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타자들은 뻥뻥 공을 날리며 득점을 추가하고 있었다.
비츠걸스의 첫 앨범은 발매 일주일이 지난 지금, 총 3만 2천 장 판매. 예상을 웃도는 초동판매량이었다. 타이틀곡은 아직도 가장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듯이 내 눈앞으로 나타났다.
연습생 레슨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오니 복도부터 시끄러웠다.
복도에 모여 있던 직원들은 내 쪽을 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다가가자, 마치 무서운 악령이라도 접했다는 듯이 저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건지 모르겠지만.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박 실장님, 아니, 이제 본부장님이라고 불러야 하겠네요.”
그들은 웃음을 만들어내며 나에게 악수를 권했다.
보란 듯이 사무실 입구에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승진 공고.
그것에는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속 : A&R 사업부
이름 : 박영민
내용 : 실장에서 본부장으로 승진
“정말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저희 회사를 이끌어주세요.”
“당연히 올라가실 분이 올라가셨죠. 몇 달 동안 회사를 뒤집어놓을 실적을 내셨으니.”
“승진턱 쏘셔야죠. 하하.”
“축하합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