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8
3장 눈물이 묻어 있는 목소리
그날 저녁 김우진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틀 전에 픽업하신 곡이요, 그거 다른 곳에서 가져갔으면 하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어딘데요?”
-오픈 스테이지라는 회사인데.
“아……. OST 만드는 곳이요?”
-네. 맞습니다.
김우진을 그 곡을 떠올려 봤다. 조금 장황한 느낌의 곡. 초보 작곡가 특유의 과잉된 감정이 멜로디에 묻어 있는 곡이었다.
구성도 별로. 전반적인 데모의 퀄리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거 가져가라고 하세요.”
-예? 괜찮으세요?
“네. 그쪽 주세요.”
-다행이네요. 오픈 스테이지 쪽에서 하도 강하게 요구하길래.
“그래요?”
플라지아의 메인 보컬을 솔로로 내보내면서, 미니 앨범 수록곡으로 생각했던 곡이었다.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자신이 손을 대면 명곡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이다. 신인 작곡가를 회사로 불러서,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고, 그걸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수정 작업이 반복되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타이틀은 다른 곡으로 가기로 했으니 그런 곡 하나 버리는 거야…….
“드라마 OST라……. 괜찮은 생각이네요. 분위기가 뚜렷한 곡이니까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이 곡 아니면 안 된다면서 김 실장님에게 부탁 좀 드려보라고.
“알았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가져…….”
그 순간 문득 김우진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번뜩 나타났다.
이 곡의 숨은 매력을 알아보는 사람이 또 있다고?
나 말고?
“잠깐만요. 오픈 스테이지라고 하셨죠? 그 회사 이름?”
-네. 맞습니다.
“혹시 몬스터 뮤직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지 알아봐 주세요.”
-예?
“아마 관련 있을 겁니다. 아직은 제가 수락했다고 하시지 마시고, 몬스터 뮤직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신 다음에 다시 연락 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초보 작곡가의 습작 같은 발라드 넘버였다.
음악을 자주 접한 사람이라면 처음 몇 초를 듣고서 한숨을 내쉴 만한 수준이었다.
이 곡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절한 가지치기를 통해서 깔끔하게 다듬는다면 괜찮은 수작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드라마 OST라는 기준으로 볼 때 감성적인 면을 최대한 살린다면 명작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걸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곡을 변신시킬 수 있는 능력, 그러한 일련의 작업을 막힘 없이 해낼 수 있는 뛰어난 감각.
그게 가능한 사람은 네 명이 있다.
김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 명은 자기 자신이고, 또 한 명은 다른 회사에…….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몬스터 뮤직에.
아니, 그중에서도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차서 곡을 달라고 할 정도로 감각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확인해 보니까 맞습니다. 이거 어떻게 아셨어요? 몬스터 뮤직에서 오픈 스테이지하고 협업하고 있었습니다. 그쪽에서 요구한 거라고 하네요.
김우진은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몬스터 뮤직에서 그 곡을 달라고 한 거네요?”
그쪽에서 달라고 한 것이었다. 박영민이라는 그 사람이.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보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김우진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서 눈을 감았다.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에서 음악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그 곡, 그것에 손을 대서 완벽하게 재구성한 곡을.
노래의 완성본을 만들어서 상상의 공간에서 감상해 보았다.
가창자는…….?
몬스터 뮤직 소속의 가수들을 쭉 나열해 봤지만 황유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구나 박영민은 황유미 앨범을 제작한 사람이니까.
김우진은 목소리를 만들어 보았다. 완성된 그 곡을 부르는 황유미의 목소리.
몇 번을 되돌려 들어도 훌륭한 음악이었다.
데모만 듣고 곡이 좋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그 곡을 누가 부를 것인지도 직관적으로 잡아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가수와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듣기 싫은 소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곡은…….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 앉은 김우진은 좀 더 이성적인 기준으로 생각을 이끌고 나갔다.
이 곡을 우리 회사로 가지고 왔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크지 않다.
이 곡을 가져가는 사람은 우리 회사 아티스트들과 직접 경쟁자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곡을 그에게 주었을 때 내가 받아낼 수 있는 이득은?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서 박영민의 연락처를 찾았다. 오랜만에 목소리도 들어볼 겸. 그리고 지난번에 건넨 제안은 여전히 고려 중인지도 물어볼 겸.
생색 또한 적지 않게 내야 했다. 가치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박영민이라면…….
이런 생각에 이르자 더 이상 손가락을 뻗을 수 없었다.
“김우진입니다.”
결국 전화를 건 곳은 데모를 관리하고 있는 퍼블리싱 업체였다.
“그 곡 몬스터 뮤직으로, 아니, 오픈 스테이지 쪽으로 주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대신 이것만 전해주세요. 그 곡을 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가 물었던 것을 그대로 전해주세요. 몬스터 뮤직에서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나 하고 물었던 것 말입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과연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공간에서 재현된 그 음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거기까지에는 못 미칠 것인지.
그걸 기다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 * *
곡을 만져 보기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시간 개념이 이상해진다.
30분 정도 지나지 않았나 하고 시계를 보면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언제나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야 혼자 사는 처지니까 이렇게 일하다 날밤 까버려도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가정이 있다면……. 아마 잔소리 좀 들을 것이다. 어디 가서 딴짓한 것이 아니라 곡 작업 하고 있었다는 걸 입증해야 되고, 전화는 일부러 안 받은 것이 아니라 집중하고 있느라 그랬던 것이라고…….
“박 본! 여기 있었냐?”
헤드폰 뒤집어쓰고 트랙을 조정하고 있었더니 이 녀석이 안으로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김인혁은 재생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헤드폰 안을 울리던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게 그 드라마 곡?”
내가 헤드폰을 벗자 녀석은 그렇게 물었다.
“같이 좀 들어보자. 아무도 없는데 왜 헤드폰 쓰고 있냐.”
“어? 전부 퇴근한 거야?”
“너밖에 없어.”
“아까 성식 씨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PC의 팬 돌아가는 소리만 작업실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박 본. 그런데 네가 왜 가위질하고 있어?”
“곡이 좀 난잡해.”
“그러니까 왜 이걸 직접 하냐고.”
“딱 봐도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이 만든 곡이야. 코멘트 보내줘 봤자 제대로 하지 못할 거야. 시간은 없는데, 그런 걸로 자꾸 끌어대면 진짜 곤란해지지.”
인혁이는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뉴비가 만든 곡이지만……. 뭐가 있긴 있네?”
“난 듣자마자 딱 이거다 싶었지.”
“군데군데 멜로디가 살아 있어.”
“그렇지?”
녀석은 고개를 끄덕 끄덕이며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이거 너무 손봐야겠는데? 보이싱이 엉망인 곳도 있고…….”
“할 수 없지. 뭐 밤새우면 되겠지.”
“언제까진데?”
“내일까진 완성해야 돼.”
“뭐? 내일?”
“모레부터 바로 레코딩 들어갈 거라서.”
그랬더니 부우 녀석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사람을 붙여 준다니까.”
“아직 괜찮아.”
“지금이야 괜찮지. 모레 레코딩한다고 했지?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알잖아.”
비츠걸스의 팬사인회.
우리 회사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정이었다.
“그날, 회사에 몇 명 안 남아 있을 거다.”
“알아.”
이번 팬사인회는 비츠걸스의 첫 미니 앨범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200명을 추첨했다.
사인회라고 해서 사인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콘서트홀을 대여해서 공연을 비롯해서 포토타임까지 가지기로 했다. 예정된 시간만 두 시간 정도.
현재 거의 모든 직원이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그날만큼은 다른 아티스트들의 스케줄도 잡지를 않았다.
매니지먼트팀은 1, 2, 3팀 모두 팬사인회에 투입된다.
사건이 터지기도 하고 심하면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200명의 팬들 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회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여론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더구나 첫 팬사인회.
그래서 매니지먼트팀뿐만 아니라 사무실 직원 중 일부도 스탭으로 그곳을 지킬 것이다.
“엔지니어만 남아 있으면 돼.”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리고 아이돌 그룹 한 팀의 팬사인회 때문에 회사의 인력이 대부분 투입된다는 것은, 아직 이 회사가 그것을 수용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탑 여성 솔로 가수 한 명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몇몇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는 곳.
지난 자료를 보면 회사의 업무는 탑 솔로 가수 한 명을 서포트하는 것에 치중해 있었고, 나머지는 곁가지로 뻗어 있는 식이었다. 그러니 여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러다가 그 정도 체급으로 성장할 것 같은 아이돌 팀이 하나 나와 버리니, 회사의 용량 부족이 눈에 딱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곧 있으면 이 녀석이 만드는 보이그룹까지 나올 예정이니…….
“인환이 형 진짜……. 옛날에 우리랑 재미있게 놀았는데.”
부우 녀석은 퉁퉁한 배를 앞으로 내밀며 그런 말을 했다.
“그랬지. 행사 가면 꼭 그 형이 있었어.”
“우리나 그 형이나 남들 안 오는 것만 하고 다녔잖아. 돈 안 되는 거.”
“그런데 그 형이 우리보다 페이가 더 적었을걸.”
“맞아.”
“그러면서도 술은 꼭 자기가 사고…….”
“애기 분윳값 벌겠다고 애를 썼지. 푼돈이라도 쥘 수 있으면 다 쫓아다니면서.”
그러더니 부우 녀석은 고개를 숙였다.
“죽은 애가 걔라더라. 그때 형수님 뱃속에 있던 애.”
“…….”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그때 어렸잖아. 인환이 형 결혼식, 애 돌잔치, 하나도 안 갔어. 했는지 안 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어. 부르지 않으면 안 가도 되는 건 줄 알았지. 그런데……. 그랬으면서도 나중에 이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환하게 웃으면서 반가워하더라고.”
“장례식은 갔었냐?”
“아니. 우린 그런 일 터진 줄도 몰랐으니까. 갑자기 잠적한 줄로만 알았지.”
그저께 최인환 선배를 회사에서 만났을 때에도 그랬지만,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이 녀석이 앞에 있으니 추억은 더욱 새롭고 선명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난 그래서 네가 인환이 형 앨범 맡겠다고 했을 때 고맙더라. 나 같아도 그랬겠지만……. 사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잖아.”
그러면서 녀석은 두툼한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예전에, 그 형을 만났을 때 나는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때 나는 스물네 살이었고, 어쩐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군대도 안 갔다 왔다. 갔다 오면 20대 후반. 경력이라곤 보컬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곡 하나를 히트 쳤다는 것이 전부.
대학을 다닌 것도 아니었고, 다른 분야에 재능을 보인 적도 없었다.
‘아……. 이러다가 진짜 인생 망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때.
인환이 형과 어울렸던 건 그때였다.
같이 술 마시고, 술 취하면 노래방에 가고.
그리고 또다시 술 마시고. 해가 뜨면 첫차 타고 집으로 가고.
남들 놀 시간에 연습실에서 노래만 불렀던 우리에게는 새삼스러울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 최인환 선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영민아. 너는 노래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놈이야. 야 인마, 흘려 듣지 마.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말을 해주는 건 네가 딱 두 번째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넌 노래를 해야 돼.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거야. 계속 버텨라. 버텨서 나중에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아마 너는 나 기억도 못 할 거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을 거니까.
흔한 술주정에 불과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유난히 혼란스러웠던 나는 그런 말이 참 고마웠다.
사춘기가 뒤늦게 온 것도 아니고,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살고 있는 거지?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야, 그런데 인환이 형 그저께 만났는데 마음이 좀 그렇더라.”
“왜?”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예의를 지키는 게…….”
그러지 않았다면 할 말이 참 많았을 것이다. 형이 말한 대로 노래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노래하는 사람들을 키워낼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힘들겠지만 고생 좀 해라. 그 형한테 좋은 곡 만들어줘. 잘되면 옛날처럼 셋이 술이나 한잔하자.”
* * *
데모가 통과된 후 곧바로 레코딩에 들어갔다.
“회사 진짜 썰렁하네요. 전부 다 팬사인회 갔구나.”
유미가 먼저 도착했다.
“저 택시 타고 온 거 알아요? 그런데 기사님이 저 모르시더라고요. 가수 황유미입니다, 하면서 핸드폰으로 노래까지 들려드렸는데 모르시겠대요. 앞으로 진짜 열심히 해야지.”
매니저들이 전부 팬사인회에 갔더니 유미는 회사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이번 거 잘되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몰라.”
“그럴까요?”
“아니, 알아보진 못하겠다. 그래도 노래 들려주면 아, 이 노래! 하면서 아시는 분들이 꽤 있을 거야. 드라마에 나왔던 노래라면서.”
엔지니어는 부스 세팅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트랙을 정돈시키며 보컬이 입혀질 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최인환 선배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는 꾸벅 인사를 하며 들어와서, 유미 쪽을 보며 한 번 더 인사를 한 뒤 비어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춥죠?”
“응. 쌀쌀하네.”
선배는 나에게 말을 놓았다. 어제부터.
가이드가 입혀진 데모를 전달하면서, 계속 나에게 존댓말을 하면 불편해서 작업을 못 할 것 같다고 하니 어색하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은 그 지위와 명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는 거야.’ 하고 잔소리까지 하는 걸 보니 예전 느낌이 살아나는 듯하기도 했다.
“나 때문에 이렇게 썰렁한 건가?”
스튜디오 안이 조용하자 최인환 선배는 문득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뇨. 원래 그래요.”
유미는 감정을 잡느라 혼자 떨어져 있었고, 목을 푸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오고 있었다.
유미가 먼저 레코딩을 하고 최인환 선배는 다음 프로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선배는 굳이 먼저 와서 유미가 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연인이라는 관계로 보면 이별을 하는 것이지만, 둘 다 같은 집안 사람이 되는 거니까 계속 마주칠 거잖아. 상대가 이별에 아파하는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게 되는 거야. 그러니 그분이 노래하는 걸 들으며 내 감정을 잡아야 돼.’
이별을 노래하는 유미의 감정을 접한 뒤, 그것에 화답하는 식으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선배는 그런 방식으로 곡을 해석했다.
그래서 유미가 노래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준비 다 됐습니다. 유미 씨 이제 시작하시죠.”
그리고 레코딩이 시작되었다.
* * *
유미가 지금까지 발표한 네 곡은 모두 이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별에 가슴 아파하는 것, 또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노래.
평소에는 늘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레코딩 부스 안에서는 누구보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웃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밝은 톤으로 들려왔던 목소리가, 노래를 할 때에는 전혀 달라졌다.
“어때요? 한 번 더 할까요?”
그런 말조차 슬픔을 머금고 있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노래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보컬이라고 해도 평이한 인생을 무난하게 담아낸 노래보다, 삶의 굴곡을 겪고 난 뒤 그것을 진하게 담아낸 노래가 더욱 감상자의 가슴을 울린다는 것이었다.
유미는 아직 20대 중반이었지만, 실패를 겪은 탓인지 목소리가 담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픔이 노래에 묻어 있었다.
이제 솔로 가수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기 때문에, 그런 감성이 무디어지진 않았을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아니. 방금 것 완벽했어. 더 할 필요가 없겠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목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괜찮겠어요? 중간에 살짝 피치가 떨어졌던 것 같은데.”
“아, 거기……. 괜찮아. 믹싱할 때 만져줄게.”
“네.”
그리고 여전히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모습으로 유미는 부스를 나왔다.
“선배님. 그럼 바로 들어갈까요?”
“어? 벌써?”
“좀 쉬었다 할까요?”
“나는 괜찮아. 자네는?”
최인환 선배의 레코딩은 곧바로 이어졌다.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던 그는, 마침내 마이크 앞에 섰다.
유미와는 다르게 표정이 비장했다. 마치 전투를 앞두고 있는 무사 같았다.
“시작할까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 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눈가의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같은 노래를 남주 버전, 여주 버전으로 나눈 것이지만, 배킹 트랙은 조금 다른 사운드로 구성했다. 단지 키를 조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여주 버전은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분위기로 시작하여, 현악 섹션으로 이어지는 감미로운 사운드였고
남주 버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만으로 구성된 배경이 보컬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식이었다.
극의 내용을 보면 남주는 무력한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쿠스틱 기타의 화음이 쌓이며 최인환 선배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싶을 정도로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이 스튜디오를 울리기 시작했다.
선배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동작과 함께 노래를 이어갔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멜로디 속에서 아름다운 가성이 따뜻한 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처럼 치솟는 후렴에서, 그는 조금 거친 톤을 만들어내며 화산처럼 목소리를 폭발시켰다.
두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을 정도로 처절한 외침이었다.
이별의 아픔이, 상실의 괴로움이, 듣는 이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한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온 사람 마저, 이 노래를 듣고는 괴로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래는 인생을 담고 있다고 하듯이, 그의 인생은 소리가 되어 지나온 자취를 더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처럼 지나가 버린 노래 속에서, 그는 눈을 굳게 감고서 여전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났다.
선배도, 스튜디오 안에서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엔지니어와 나도,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유미까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음악이 끝나고 텅 비어 있는 침묵 속에 그 누구도 소리를 내보낼 수 없었다.
선배는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나 또한 내 가슴으로 스며들어버린 무거운 감정 때문에 도무지 입을 열 수 없었다.
* * *
저녁까지 이어질 줄 알았던 레코딩은 일찍 끝나 버렸다. 곧바로 믹싱 작업에 들어가면서, 나는 유미와 최인환 선배를 데리고 나와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팬사인회가 잘 준비되고 있는지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오후 7시로 예정되어 있던 팬사인회는 한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한창 바쁠 것 같아서 차마 전화를 걸 순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고, 하지만 노래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가면서 식사를 마쳤다. 두 명을 돌려보낸 뒤 회사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지하로 내려갔다.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복도를 쿵쿵 울리고 있었다.
빠른 비트를 느끼고 있으면 그것에서 어떠한 열정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일곱 명의 연습생들은 여전히 굵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지 아이들은 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애들을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이날은 인혁이에게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복도를 가로질러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연습실, 남자 애들이 연습하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렁찬 인사가 나를 반겨주었다.
“어? 박 본. 레코딩 벌써 끝난 거야?”
“어. 다들 베테랑들이잖아.”
몬스터 뮤직의 남자 연습생은 모두 열한 명. 이 중에서 데뷔할 애들을 추리겠다고 한다.
“그냥 구경 좀 와봤어.”
“그래?”
김인혁은 이번 보이그룹 데뷔조 선발을 앞두고, 열한 명의 연습생들을 두 개의 팀으로 나누었다. 다섯 명과 여섯 명으로.
그렇게 해서 팀으로 뭉쳐졌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다섯 명을 선발해서 5인조 보이그룹으로 만들려고 한다.
특출난 세 명 정도는 선발이 확실시되고 있지만 나머지 두 자리는 아직 미정이었다.
그 때문인지 부우 녀석은 시간만 나면 연습실로 내려와 아이들의 상태를 엿보곤 했다.
“내가 와서 그런 거야? 다들 왜 그래? 편하게 있어. 평소처럼 해봐.”
하지만 아이들은 유난히 내 눈치를 보았다.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부우 녀석보다도 내 시선이 닿자 쭈뼛거리는 모습이 유난에 눈에 띄었다.
“우리 회사의 A&R 본부장님이 오셨는데 애들이 긴장 안 할 수 있겠냐?”
부우 녀석은 그런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연습은 곧 재개되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팀이 먼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군무, 절도 있는 동작, 때로는 저런 안무와 함께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과격한 동작까지.
모두들 실력이 대단했다. 게다가 우리 애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묵직한 박력까지 느껴졌다.
“야, 너희들 그러지 말고 이번에는 노래 좀 하자. 여기 박 본부장님 앞에서 노래해 봐. 영민아, 애들 제대로 못 하면 실컷 갈궈도 돼.”
그러자 두 팀은 번갈아가며 노래를 들려주었다.
데뷔 경쟁을 하고 있어서인지 다들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열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잘하네.”
“그러지 말고 따끔하게 지적을 해봐.”
“글쎄……. 한 번 들어서 알 수가 있나.”
이쪽에는 다른 트레이너가 붙어 있었다.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애들 연습하는 걸 부우 녀석과 나란히 앉아 구경했다.
곧 저녁 시간이 되었고, 애들은 밥을 먹으러 흩어졌다.
“같이 저녁이나 할까?”
“난 먹었어.”
“벌써?”
“레코딩이 일찍 끝나서.”
하지만 이 녀석과는 할 얘기가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이 녀석을 붙잡고 커피를 준비했다. 녀석은 배가 고픈지 두툼한 뱃살을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 * *
“노래 들어보니까 어때?”
“잘하던데.”
“그렇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이 녀석의 속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음악 만드는 것밖에 모르는 뚱뚱이인 척하고 있지만 이 녀석의 속에도 능구렁이가 열 마리 정도는 숨어 있는 듯했다.
내가 왜 연습실을 찾아갔는지, 그 너머를 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B팀이라고 했나. 다섯 명인 애들.”
“맞아. 걔네가 B팀이야.”
“거기 메보가 잘하더라. 걔 이름이…….”
“재희.”
“아, 맞아. 김재희. 걔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더라고.”
“잘하긴 하지.”
이제 이 회사에서 근무한 지 반년이 넘었더니, 내가 맡고 있는 여자 연습생들 외에 남자애들까지 전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김재희라고……. 남자애들 연습실에서 유난히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전부터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재희를 메인 보컬로 둘 거야. 이건 결정된 사항이지.”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고 그 옆에서 리드 보컬 맡고 있던 애.”
“알아. 배민혁.”
“걔도 낙점. 걔가 리더를 맡을 거야.”
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 그 애도 모를 수가 없었다. 김인혁 이 녀석이 점찍은 연습생. 회사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 친구도 잘하더라고.”
체구가 작았지만 그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서 역동적으로 퍼포먼스를 만들어낼 줄 아는 아이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그리고 만들어내는 목소리에도 근사한 멋이 깃들어 있었다.
듣기로는 그 녀석이 곡을 쓴다고…….
“미영 선생님이 고생 좀 하시겠어. 데뷔조 만들어지면 일정 팍팍해질 테니까.”
“그렇겠지.”
전미영 선생은 남자 연습생들을 전담해서 가르치고 있는 보컬 트레이너였다.
나하고는 입장이 다른 사람이었다.
전미영 선생은 몬스터 뮤직 소속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초빙하는 외부 인사였다. 몬스터 뮤직과는 타임당 페이를 정해 놓고 일을 하는 식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다음 달부터는 바빠져. 연습생 새로 받는 일을 내가 맡아서 하기로 해서.”
“그거야 알고 있지.”
원래 나와 김인혁이 함께 신입 연습생을 받으려고 했지만 이 녀석은 쏙 빠져 버렸다. 보이그룹 기획하는 일이 우선이라면서.
그리고 이 녀석은 어쩐지 회사 일보다는 외부 일에 더욱 바쁜 듯했다. 예능 출연을 하는 등등.
“2월부터는 내가 시간을 못 낸다. 그러니까 배민혁하고 김재희, 일단 걔네 둘이지? 걔네 둘 나한테 보내. 내가 목소리 잡아줄게.”
남자 애들에게는 여자 선생을, 여자 애들에게는 남자 선생을 붙인다는 것이 몬스터 뮤직의 방침이었다.
연습생들이 트레이너의 발성을 따라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내 의견을 말해본다면,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서 충분히 아이들의 장점을 살려줄 수 있었다.
그저 윽박지르면서 추상적인 얘기만 늘어놓는다면 갈피를 잡기 힘든 애들이 트레이너의 발성을 따라 하게 되겠지만.
“괜찮겠어?”
“그럼 하지 말까?”
“아니, 나야 뭐……. 네가 봐준다면 좋긴 하지.”
“미영 선생님한테 잘 말해봐. 기분 나쁘지 않게.”
“그분이야, 이해해 주실 거야.”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기 위해 음악적인 것은 이 녀석에게 맡기고 나는 절대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이들의 보컬 실력을 올려주는 것 정도는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오늘 회사 너무 썰렁하잖아.”
“다들 거기 갔으니까 그렇지.”
“이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부우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두들 유아연에게만 의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중량급 선수가 한 명 더 나오니까 소화를 못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인력으로 해내기엔 한계가 있으니까.”
“왜 그런지 생각을 해봤는데, 신뢰가 부족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인력을 충원하고 회사 자체의 용량을 늘리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걸그룹이 잘나가고 있고, 발라드 가수가 잘나가고 있어도 이게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
물론 그런 신뢰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작은 회사가 엎어지는 것은 대부분 과도한 신뢰 때문이다.
조금 잘되는 것 같으니까 무턱대고 덩치를 키웠다가 나중에는 감당이 안 되어서 무너지는 것이다.
“아무튼 걔네 둘 나한테 보내줘. 내가 S급으로 만들어놓을게.”
“자신 있나 보네.”
“오늘 하는 거 보니까 가능하겠어.”
그렇기에 신뢰를 높이기 위해선 당장 가장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시작해야 했다. 부우 녀석이 키우고 있는 애들을 정상으로 올려놓는 것. 일단은 이것이 과제였다.
* * *
결국 여주의 비밀이 밝혀졌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남주에겐 형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이 형은 그룹의 후계자를 맡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었다.
멍청하고 나태하고, 심지어는 방탕하고.
그렇기에 악역을 맡고 있는 맏며느리 입장에서는 여주가 가시 같은 존재였다.
볼품없는 집안 출신임에도 감히 이 재벌가에 들어오게 되었고, 게다가 똘똘하기까지 해서 회장의 신임까지 얻고 있었다.
만약 후계 구도가 형이 아닌 동생에게 치우치게 되기라도 하면……. 저 재수 없는 년이 그룹의 안방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시할머니와 닮은 외모. 어쩌면 한 핏줄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악역 맏며느리는 몰래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전개라고?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건 막장 드라마라서.
그리고 그 유전자 검사 결과, 시할머니와 여주에게는 유전적 일치 사항이 발견되었다.
사람을 써서 뒤를 조사해 보니, 여주의 할머니는 전쟁통에 헤어졌다는 시할머니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악역 며느리는 목적을 이루었다.
할머니 쪽 핏줄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여주는 이 가문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룹의 안방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처지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안 된다.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너희 둘 결혼은 안 돼! 어찌 피가 섞인 남매가 부부로 얽힐 수 있다는 거냐!
재벌가의 할머니는 울부짖었고 결국 남주와 여주는 헤어지게 되었다.
시청률은 무려 10.8퍼센트까지 치솟았다.
효심 지극한 남주는, 고급스러운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후 여주가 등장하는 씬으로 넘어가더니.
유미의 목소리가 음악을 타고서 스크린을 메우기 시작했다.
3분 40초에 달하는 플레이 타임이 그대로 드라마에 삽입되었다.
신입 사원과 팀장이라는 위치로 여주와 남주가 처음 만났던 장면부터 시작해서, 서로 오해를 하고 원수처럼 지냈던 일, 그러다가 오해가 풀어지며 사랑으로 이어지던 과정까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마녀 같은 남주 엄마에게 여주가 핍박을 당했던 일, 하지만 사람 좋은 회장이 둘의 관계를 인정해 주고 결혼을 승낙했던 일까지.
그러는 동안 유미의 목소리가 그들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런 뒤 악역 콤비, 맏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만세를 부르며 여주를 몰아낸 것에 기뻐하고.
천사 같은 여주의 엄마는, 재벌가의 일원이 되어 돈이 주어진들 무슨 소용이냐며, 내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취한 남주는 얼마 전 여주와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던 장소로 가서, 달빛을 맞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최인환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미처럼 풀 타임을 메운 것은 아니었지만 인상 깊은 목소리로 극을 지배하며 존재감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남주가 꼴 보기 싫었지만 최인환 선배가 부르는 노랫소리, 적당히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풍부한 느낌을 전달하는 목소리에 홀려서, 그만 남주에게 감정을 이입해 버리고 말았다.
‘안 돼! 너희들 헤어지면 안 돼!’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쳐 버린 것이다.
* * *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 등록되기까지는 3일이 더 걸렸다.
드라마용으로 손 본 것을 다시 마스터링해서 음원용으로 다듬어야 했고, 이걸 등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제목은 ‘그리워 할 수 있다면’.
급조한 제목이었다.
가사 중에 그런 게 있었다.
‘차라리 그리워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보내줄 수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가능하면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 맞추어서 음원을 공개하고 싶었지만 촉박한 일정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음원 성적이 훨씬 좋았을 텐데.
음원 발매와 동시에 유미의 곡은 56위로 진입하더니 하루가 지났을 때는 15위에 안착했다. 역시 음원 강자다웠다. 하지만 최인환 선배의 곡은 차트인에 실패했다.
OST를 쪼개서 발매하는 것의 부작용이었다. 유미의 곡처럼 중간에 끼어들어서 차트에 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지만 OST 앨범 자체가 하나로 묶이지 않다 보니 최인환 선배의 곡은 따로 떨어져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드라마가 종영하기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두고 볼 일이었다.
“본부장님! 레슨 10분 전입니다.”
“아, 그래.”
사무실에 앉아 PC로 차트 순위를 보고 있었더니 등 뒤에서 뜨끈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피곤하시죠?”
“어? 아니.”
보이그룹의 리더를 맡기로 되어 있는 배민혁이라는 녀석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저녁 시간을 할애해서 이 녀석들의 발성을 체크해 주기로 했다.
“제가 안마라도 해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피곤해 보이십니다.”
“괜찮다니까.”
부리부리한 두 눈을 하고 있는 녀석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놈 그거. 진짜 괴짜야. 이상한 놈이라니까.’
김인혁이 나에게 해주었던 충고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대로 계셔보세요. 제가 시원하게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다니까.”
“한 번 받아보시면 나중에 어깨 뻐근할 때마다 제 생각나실 걸요.”
그러면서 녀석은 막무가내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거 참…….
시원하긴 시원하네.
“본부장님께서 저희를 받아주시기로 한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재희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됐다. 거기까지 하고. 이제 연습실 가자.”
“옙!”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쩐지 어깨가 평소보다 가볍게 느껴지기는 했다.
* * *
차렷 자세를 한 채로 녀석들은 내 앞에 서 있었다.
배민혁이라는 녀석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입안 가득 머금은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재희는 낯을 가리는 편인지 간신히 눈을 마주쳤다가도 이내 고개를 떨구곤 했다.
내 기준에서 보면 둘 다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특히 재희 쪽이 그랬다.
높은 음역에서 힘이 꽉 찬 소리를 낼 줄 아는 것도 그렇고,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맛깔나게 멜로디를 소화해내는 것도 그랬다.
둘 다 열여덟 살. 잘 가르치면 물건이 될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본부장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레슨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배민혁이 또다시 잡담을 시작했다.
“그 누나들, 그렇게 뜰 줄 몰랐어요.”
“왜? 네가 보기엔 안 될 것 같았어?”
“우리 회사에서 걸그룹을 띄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헬멧 같은 거 뒤집어쓰고 우스꽝스럽게 방방 뛰지 않는 담에야……. 그런데 그런 거 없이 정면승부를 해서 이겨내셨잖아요. 진짜 존경합니다. 본부장님.”
배민혁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안 재희는 옆에서 팔꿈치로 친구를 툭툭 치고 있었다.
“아, 왜?”
“조용히 좀.”
“본부장님 만나면 나 이 말 꼭 하고 싶었단 말이야.”
“본부장님 화나셨잖아!”
“뭔 소리야?”
“화나셨다고 너 때문에.”
갑자기 녀석들은 내 앞에서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는 나에게 들리지 않게 한다는 듯이 소곤대고 있었지만 다 들렸다. 안 들릴 수가 있나.
“둘 다 조용히 해라.”
“옙.”
“레슨하는 동안 떠들지 말고.”
“물론이죠.”
하지만 레슨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이나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야 했다.
* * *
이날은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이 있었다.
비츠걸스 4인방은 새벽부터 나가서 리허설을 하고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진행 속에서 간신히 공연을 마쳤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신인상을 수상했다.
호명되었을 때 팬들의 뜨거운 함성 소리 속에서 무대로 나갔다.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두 손으로 들고 있기 힘들 정도로 많은 꽃다발을 받았다.
음방 1위를 했을 때에 너무 밋밋하게 상을 받았다는 지적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울상이 되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얼마 전 있었던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신인상. 이번이 두 번째 수상이었다.
같은 소속사의 황유미는 탑 10에 오르는 쾌거를 보여주었고, 이들은 끌어안으며 서로를 축하해 줬다.
그래도 힘겨운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인지 숙소로 돌아온 이들은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를 인사처럼 나눈 뒤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은 연말 가요제. 또다시 새벽부터 리허설이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자두지 않으면 몸이 못 버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연화가 소리를 내어보았다.
“자니?”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람을 맞춰둔 시간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어설프게 눈을 붙이고 일어날지, 아니면 밤을 새버릴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을 자는 것 어려울 듯싶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저……. 나 불렀어?”
목이 꽉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잘 거면 계속 자. 내일 얘기해도 되니까.”
“아니야. 연화야. 나 안 자.”
누가 들어도 ‘나 자다가 깨버렸음’이라고 들리는 목소리였다.
“선생님 있잖아.”
“어?”
“박영민 선생님.”
“응.”
“너, 선생님이랑 친하지?”
다은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친한가? 아닌가?
“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르겠어. 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우리 중에선 네가 제일 가까워.”
“그렇지?”
어둠 너머로 다은이의 웃는 얼굴이 느껴졌다.
연화는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영민 선생님은 다은이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런 건 지금까지 수없이 겪어왔다. 트레이너가, 혹은 프로듀서가 누군가를 티 나도록 아끼는 모습.
마치 자기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고 있듯이. 자신의 멘티가 성장하면 그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성장시키는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본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나를 챙겨주진 않는지. 왜 아무도 나를 끌어올려주진 않는 것인지.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얘기 들었어? 선생님이 오늘부터 남자 애들을 맡기 시작했어.”
“진짜? 난 몰랐는데.”
“많이 바쁘신 분이잖아. 얼마 전에는 본부장이 되셨고.”
“그렇지.”
“네가 말려.”
“응?”
“그 애들을 맡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라고.”
“내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계속 활동해야 하잖아.”
“응.”
“선생님이 그쪽에 신경 쓰시면 우리가 힘들어져.”
“그런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시기 맞춰서 신곡 내려면 다음 달부터는 준비 들어가야 되잖아. 만약에…….”
연화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멈칫했다.
“선생님이 바쁘셔서 우리 쪽에 다른 프로듀서가 붙기라도 하면.”
“에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쌤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알잖아.”
“선생님이 맡으시더라도 바쁘셔서 제때 못 들어갈 수 있어.”
말을 하면서도 연화는 가슴 한구석이 비어 있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허전하게 텅 비어 있는 그곳이.
-그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세요.
그런 말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생각해 봐. 선생님이 제대로 맡아주시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는 거야. 오픈유어아이즈 했던 그때로.”
“아…….”
“선생님이 우리한테만 집중하셔야 돼. 네가 말하면 들어주실 거야.”
“알았어. 한번 해볼게.”
“평소처럼 장난치듯 말하지 말고.”
“어?”
“진심을 담아서 말해.”
“그런데 우리 바빠서 쌤 만날 시간 없잖아.”
“핸드폰 있잖아. 전화를 해도 좋고.”
“알았어.”
후우 하는 한숨 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졌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남자 애들 가르치지 말아 달라고.”
“그 말만 하면 이상하잖아.”
“그럼 어떻게?”
“우리 말고 다른 가수들 담당하시는 거 싫다고 해.”
“엥? 쌤은 이제 본부장이라서 전부 맡아야 할 건데?”
“A&R하고 프로듀싱은 같은 업무가 아니야. 본부장이라고 꼭 프로듀싱을 직접 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그런가.”
“확실하게 말씀드리는 거야. 너는 선생님만 믿고 팀에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렇게 관심을 안 가져주시면 너무 서운하다고. 왜 가수를 계속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해. 이렇게 선생님이 이 가수 저 가수 다 맡으시고, 너는 그중 하나일 뿐이라면 더 이상 팀에서 노래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거야. 회사의 전체 관리를 하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직접 제작하시는 건 우리만 맡아 달라고……. 그리고 보컬 트레이닝도.”
“연화야. 나는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데……. 그냥 네가 말씀드리면 안 돼?”
다은이의 목소리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연화는 조금 전까지도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고 거기에 무슨 말을 적어 보낼지 한참 동안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내가 말해봤자 소용없어. 선생님은 내 얘기를 안 들어주실 거야.”
“왜?”
“그냥, 그런 게 있어.”
시간이 지나면 다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예전에, 내가 너를 아주 미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불안했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으면서, 눈에 잘 보이진 않아도 무언가를 계속 쌓아 올리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지금도 그런 불안함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현기증만 심해질 뿐이었고, 바닥은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곳으로 떨어져 버리면……. 몸이 산산 조각날 것 같다는 불안감만 더욱 커졌다.
“네가 말해줘. 팀을 위해서.”
“알았어.”
“부탁이야.”
그래도 선생님은 네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실 테니까.
사실 연화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다분히 의도적이면서도 배타적은 성향을 띄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전에도 몇 번이나 이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나쁘게 말하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이었고, 좋은 쪽으로 보자면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지 우리 팀이 계속 잘될 수 있어.”
“응.”
* * *
어린 시절의 연화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 특이한 점을 말하자면 유난히 칭찬받는 것에 집착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도 어린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였다.
“얘 좀 봐. 여보 일루 와봐. 얘 춤추는 것 좀 봐.”
아주 대단한 것을 보고 있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좋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몸 안에서 에너지가 마구 솟아나는 것 같았다.
“얘 나중에 가수 시켜야 되는 거 아니야?”
어린아이의 자존감은 칭찬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하니까.
먹기 싫은 음식을 꾹꾹 씹어 삼키기도 하고, 구역질 나는 양치질을 정해진 시간마다 군소리 없이 해낸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칭찬으로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 달콤해서.
그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노래 잘하는 아이, 춤 잘 추는 아이. 그 말이 유난히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몬스터 뮤직의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하지만 부모는 과연 그곳에 애를 보내는 것이 옳은지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런 회사에 보내면 애 학원은 안 보내도 되잖아?”
“학원하고 그런 데 보내는 건 다르지.”
“그렇다고 낮에 쟤를 혼자 집에 둘 순 없잖아.”
맞벌이하는 가정이었다.
“안 그러면 학원에 보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우리한테 어디 있어? 당신 퇴근할 때까지 애를 돌리려면 최소한 학원 두 곳은 보내야 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도 한몫했다.
학원을 돈을 내며 다녀야 했지만 몬스터는 돈을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회사에서 애 저녁까지 챙겨준대. 그럼 당신이 일찍 퇴근할 필요도 없어.”
“그렇긴 하지만.”
저녁을 먹이기 위해 눈치 보며 일찍 퇴근할 필요도 없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이를 그 회사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몬스터 뮤직은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이름 있는 작곡가가 사장으로 있었고, 소속된 가수들 또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연화는 열 살이라는 나이로 몬스터 뮤직의 연습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회사에서도 예쁘장한 아이가 당찬 모습으로 노래와 춤을 하는 것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일 년 정도만 시켜보자. 4학년부터는 그래도 공부시켜야지.”
“알았어.”
하지만 그런 계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혀져 버렸다.
직접적인 계기를 준 것은 유아연의 성공이었다.
열네 살에 몬스터 뮤직에 들어와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2년 만에 데뷔해서 당당하게 스타가 되어버린 아이.
‘우리 연화도 저렇게 될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부모의 마음을 붙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말수가 적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극히 드문 아이였지만, 몬스터 뮤직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팀장님. 그러면 저는 언제 데뷔해요?”
조그마한 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런 말을 할 때면 질문을 받는 직원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연화야. 너는 연습 더 해야지.”
“그러니까 언제까지요?”
“빨리 데뷔하고 싶어?”
“그럼요. 저도 빨리 방송 나가보고 싶어요.”
그때 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지도 몰라.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어.”
“진짜요? 그럼 얼마나 더요?”
“글쎄.”
“얼마나 더 해야 하는데요? 네?”
“아직은 연습을 더 해야 돼. 지금보다 춤과 노래를 더 잘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생각해 보자.”
연화는 그 대화에서 ‘조금만 더’라는 말을 가슴 속에 담아두었다. 그게 얼마큼일까. 아연 언니는 2년 연습하고 방송에 나갔다는데……. 그럼 나는 이제까지 1년 했으니까 앞으로 1년 더?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연화는 웃음의 일부분을 잃어버렸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열세 살이 되었고.
‘모두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열다섯 살이 되었다.
유아연이 데뷔를 했던 열여섯 살을 지나가며, 이 회사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잔인한 집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래의 아이들은 군것질을 하러 다니고, 서툴게 멋을 내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을 때, 연화는 이곳에서 사람의 껍질 안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연화는 점점 남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한시도 그녀를 쉬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어. 내후년에 데뷔시켜 줄게. 팀을 만들 거고 너를 중심으로 할 거야.”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은밀하게 다가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수를 했다. 상대를 열여섯 여중생으로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이쪽은 6년 전부터 단맛 쓴맛을 보고 자라온 베테랑이었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그냥 지금 회사에 남아 있을게요.”
그리고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피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성공과 몰락 또한 있는 그대로 목격할 수 있었다.
단숨에 성공을 거머쥔 사람.
하지만 그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가 떠밀려 사라진 사람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끌어주는 사람의 등 뒤도 무임승차한 사람들.
연습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희비가 엇갈리며 눈물을 삼켜야 했던 순간을 말해보라고 하면 연화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열아홉 살에 데뷔, 그리고 곧 스무 살을 앞두고 있는 연화는 다른 아이들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 * *
“그래서 뭐?”
-쌤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셨으면 하는 거죠.
“다은아. 너 무슨 일 있니?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냥 안 하시면 안 돼요?
“이걸 어떻게 안 해? 얘기 다 된 건데.”
-그래도…….
“너 이거 누가 시켰지? 나한테 이런 말 하라고.”
-그건 아니에요. 진짜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옆에 있지? 나 좀 바꿔봐.”
-진짜 아니에요. 시키긴 누가 시켜요.
“그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생각해 보니까 걱정돼서요. 왜 갑자기 우리는 찬밥 신세가 된 거지? 막 이런 생각 들고.
“뭐가 찬밥이야.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데.”
저녁 먹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다은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짜고짜 ‘쌤. 다른 사람들 다 취소하시고 저희만 맡아주시면 안 돼요?’ 이런 말을 하는데,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은아. 요즘 힘드니?”
-네? 아뇨. 그게 아니라.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렇게 하고 싶은 얘기 나한테 할 줄도 알고.”
-그렇죠?
“잘했어.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하도록 해. 속으로 쌓아두면 더 어긋나게 된다. 그리고 스케줄 없는 날 나하고 좀 보자. 너희 넷 다.”
-네.
전화를 끊고 나니 뒤가 찜찜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 추측이 되기는 했는데.
“본부장님. 레슨 시간 10분 전입니다.”
“알았어. 너희 말이야, 앞으로 연습실에서 대기하고 있어. 왜 자꾸 올라오는 거야?”
“저희가 모시고 가려고…….”
“오바 좀 하지 마! 특히 너.”
이쪽은 의욕이 가득 차 있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본부장님. 안마는……?”
“필요 없어.”
얘기를 들어보니 배민혁이라는 녀석은 곡을 쓰고 있었고, 팀의 타이틀곡을 내심 욕심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도 6년이나 연습생 생활을 했다고 하니까 회사 돌아가는 것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곡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냥 선택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뜯어고치기도 하는 등 적절한 어드바이스를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비츠걸스가 잘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보컬 레슨을 하는 동안에도 어찌나 자기 곡 얘기를 하는지. 레슨 중에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나 또한 이 녀석에게는 소리를 버럭 내지른 적이 여러 번이었다.
“곡 작업하는 건 나한테 얘기하지 말고 김인혁 이사님한테 말해.”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저희 선생님도, 그러니까 김 이사님도 잘 모르겠는 거 있으면 본부장님께 물어보라고 했다구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저를 믿어주시면 꼭 성공해서 보답하겠습니다. 누나들처럼 많이 띄워주실 필요는 없고 그냥 적당히……. 가수 활동 계속할 수 있을 정도라도 해주신다면 제가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너는 제발 오바 좀 하지 마.”
이윽고 연습실에 도착했다. 레슨은 배민혁과 김재희 두 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아마도 곧 세 번째 멤버가 정해질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 녀석까지.
배민혁은 음역이 높지 않았고 성량이 큰 것도 아니었지만, 목소리에 공간감이 가득했고 그루브를 타는 것에 능숙했다. 팀의 서브 보컬로 이만한 조각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공들여 가르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재희 쪽이었다. 활동명을 홍삼으로 하기로 했다나.
하여튼 이 메인 보컬감은 내 관심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마치 다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저를 때려주세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홍삼! 말 똑바로 해. 그 말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저를 때리셔도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왜 때려?”
“제가 제대로 못 하면 때리면서 가르치셔도 된다는…….”
하지만 얘도 정상은 아니었다.
“본부장님. 그러니까 얘가 하는 말은, 엄하게 가르쳐 주셔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얘는 지금 자기 나름대로 본부장님께 각오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못 하면 막 패버리세요. 아, 그런데 목은 때리시면 안 됩니다. 노래 빼면 병신인 새끼라서.”
둘 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김인혁의 아이들. 김인혁이 직접 픽업했고 6년 동안 키워낸 아이들이었다.
한 놈은 곡을 잘 쓰고, 한 놈은 노래를 잘하고.
“부럽네.”
“네?”
“아니다. 레슨 시작하자.”
* * *
어떻게 보면 줄곧 학원에서 일을 해왔기에 온실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경쟁 같은 것도 없었다. 보컬반은 내가 전담했고, 기타반, 베이스반, 드럼반, 피아노반, 다른 강사들은 각자 자기가 맡고 있는 악기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첨예한 대립을 해야 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굳이 사건이 있었다면 강사 하나가 학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수강생들을 빼돌리려고 했던 것 정도.
원장은 드러머였다. 자신이 직접 드럼반을 맡고 있기도 했다. 주말이면 재즈 클럽에서 공연도 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는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돼서 학원이 망해 버렸지만.
-박영민 본부장.
“예.”
-첫인상이란 것 말이야. 참 중요한 거야.
전무의 전화였다.
-잘못된 첫인상을 주었을 경우 그것을 깨버리는 데 200배 더 강렬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 있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요즘 들어 전무의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본부장으로서의 첫인상……. 아직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최인환 선배의 음원 성적을 말하는 듯했다.
“이제 3일 지났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괜찮은 성적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기다릴 수 있어.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힌 게 누군지 자네도 알고 있잖아. 그 책임은 나 또한 짊어지게 되어 있어.
여유가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음성도 마냥 달갑게 들려오진 않았다.
-업체 컨택해서 드라마에 집어넣고……. 좋아, 열심히 뛰어다니는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어떤 조직에도 유난히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좀 있어. 말을 만들기도 하고, 일을 키우기도 하고……. 하지만 자네가 맡고 있는 자리는 그것까지 전부 부담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조급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급하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딱 일주일만 지켜봐 주십시오. 기대하시는 것 이상의 성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자신 있는 모습은 좋아.
“이 정도도 못해낼 것 같았으면, 애초에 제가 부탁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 감각을 믿고 있기에 이 자리를 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무기는 강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곡이었다. 충분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들 앞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계속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곧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도 했고.
이런 생각에 발을 맞추어주듯 드라마 작가는 또다시 막장스러운 전개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전무님?”
대머리 본부장, 아니, 이제는 이사님이 되신 분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저 멀리서 내가 통화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더니.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 보니까 전무님이랑 통화한 거네.”
표정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아나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얼마 전까지는 이분이 이런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곧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익숙해져야 돼. 뭐 하나 삐끗하면 바로 너한테 전화 갈 거다.”
이제는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됐다는 듯이 그는 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잘하면 되는 거죠.”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심지어 그는 나를 놀리는 듯이 낄낄대는 웃음소리마저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겪어 보면 알게 될 거야. 자기가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밀어줘. 그게 그분 스타일이야.”
“아니, 전 진짜 괜찮다니까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방식을 인정하고 있었다. 저렇게 근엄한 척하는 전무를 보면서, 그리고 내 앞에서 이렇게 웃고 있는 대머리 이사를 보면서.
중요한 건 몬스터 뮤직 10년 역사에서 버려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무는 자주 저울질을 했고, 수치가 보여주는 결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각이 무뎌졌기에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손 사장도 사장 자리를 아직 유지하고 있었고, 나에게 밀려 버린 대머리 이사도 그간의 공로에 대해 충분히 대우받고 있었다.
회사의 원년 멤버 대부분이 아직 남아 있었고, 한물갔다는 가수들에게도 여전히 활동을 지원해 주고 있다.
아무도 버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전무의 계산 속에서는 그런 듯했다. 그는 누군가를 버릴 생각이 애초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늘 말하곤 하는 몬스터 뮤직의 브랜드 가치. 아마도 그 중심에는 상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을까.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려. 안 그러면 너 스트레스 받아서 못 견딘다.”
“알았어요.”
하지만 버려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마냥 긍정적인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남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조직 안에 계속 속해 있는 이상 그 욕망을 감추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난히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좀 있어. 말을 만들기도 하고 일을 키우기도 하는.
전무가 했던 그 말에 정확히 겹쳐지는 말이 또 하나 있었다. 얼마 전 부우 녀석이 나한테 했던 말.
-우리 회사 괜찮아.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만 잘 해내면 눈치 볼 것도 없어. 하지만 영민아. 이건 명심해라. 아무도 믿어선 안 돼. 누굴 믿으려고 했다간 상처받을 거야.
예전에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제야 이 녀석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보컬 트레이너 자리가 비었을 때 녀석이 나를 먼저 찾았던 일.
내가 사장의 오더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 수행하려고 했을 때 녀석이 불같이 화를 냈던 일.
앞으로는 남한테 함부로 일을 받지 말고,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언제나 자기하고 상의해서 결정하라는 일 등등.
그동안 혼자 외롭게 싸워왔던 것에 지쳤던 것일 테다. 든든한 아군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 * *
그러는 사이 드라마 방영일이 다가왔다.
나는 이번 주를 승부처로 보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급하게 진행되었던 일정 속에서 시기가 어긋나 버렸다. OST가 드라마에 노출되었던 날이 며칠 지나서야 음원으로 출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최인환 선배의 곡은 감상자들의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선택을 받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회차에서 충분한 노출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걸 예상해 보기 위해 내 나름대로 드라마의 향후 전개를 짚어보기도 했다.
비록 막장 전개로 욕을 먹긴 해도 항상 해피엔딩을 내는 작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여주와 남주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남주와 여주가 사랑의 도피? 이건 아닐 것 같다. 남주가 그룹의 후계 구도 중심에 서 있는데 그걸 버리고 도망간다면 시청자들이 납득을 못 할 텐데.
벌써 임신했으니까 못 헤어진다? 댓글 보니까 이런 얘기도 있었지만 이것도 납득할 만한 정서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서로 6촌 혈연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예고편을 보면 남주가 크게 놀라는 장면이 나왔다. 무엇에 놀랐는지는 당연히 알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잔뜩 호기심이 어린 채로 이번 주 방영분을 보고 있었는데
‘넌 사실 내 아들이 아니다.’
인자하신 회장님의 한마디가 극을 뒤흔들었다.
‘젊은 시절, 함께 고생했던 친구가 있었지. 우리 둘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어. 가족끼리도 교류를 하면서 가깝게 지내곤 했지. 그러다가 어느 날, 사고를 당해 친구 내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친척도 없이 남겨진 작은 아이를 나와 네 엄마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때 너는 아직 젖도 떼지 않은 갓난아기였다.’
지난주에 이어서 출생의 비밀 2연타가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하고 네 엄마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네 할머니께서도 모르신다. 일선에 계실 때라 가정에 소홀하셨었지. 그리고 너에게도 영원히 숨기려고 했었다.’
‘아버지…….’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구나.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네가 그 아이와 함께하고 싶다면 이 사실을 공개한 뒤 이 집안을 떠나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앞으로 가지게 될 것도 포기해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남주와 여주는 같은 핏줄이 아니었다. 남남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남주의 부모님 두 분. 심지어 할머니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룹의 경영권을 택할 것인가, 남주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이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
차를 몰고 나와 고뇌하는 남주. 도시의 야경이 배경처럼 차창 밖을 수놓고 있었다.
이때 어쿠스틱 기타의 사운드가 화면을 메우고, 최인환 선배의 목소리가 남주의 심경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풀타임이었다. 트랙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흘러나왔다.
부모를 잃어버리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잔인한 사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는 것도.
드라마의 지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가운데 최인환 선배의 부드러운 음성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강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핸들에 머리를 박고서 고뇌하고 있는 남주와 함께 최인환 선배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드라마 속으로 묻혀버렸다.
이후 엑스트라들의 티키타카하는 장면들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남주는 어느 허름한 골목가에 차를 세운다.
여주가 살고 있는 집. 그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자 여주가 밖으로 나온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면서 화면은 정지해 버리고.
이어서 최인환 선배의 목소리가 격한 후렴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차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하는 말을 혼자서 외치면서.
두 번의 노출. 그것도 매우 임팩트 있는 장면에서였다.
리프레시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습관적으로 계속 음원 차트에서 새로고침을 하고 있었다.
실패할 리가 없었다.
내 감각이 판단한 대중성이 뛰어난 곡, 그리고 최인환 선배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반드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리프레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자꾸만 가슴이 초조해졌다. 충분히 될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새로고침. 그렇게 남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 * *
“본부장님.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출근하자마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달랐다.
“역시 본부장님이십니다. 이번에도 한 건 하셨네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직원들.
“손대시는 것마다 전부 띄우시네요.”
“제가 띄웠다기보단 드라마 덕분이죠.”
“에이, 그래도 드라마에 삽입됐다고 다 뜨는 건 아니잖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차트부터 확인했다. 현재 실시간 차트에서는 46위. 아침에도 40위권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제 자리를 잡은 듯 보였다.
차트 진입은 무려 21위로 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바로 찾아보는 사람들이 몰려서인지 깜짝 놀랄 만큼 높은 순위로 들어갔다.
100위부터 위로 쭉 올리고 있었는데, 50위까지도 보이지 않아서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1위에서 최인환이라는 이름이 보였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성취감도 여느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정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린 것 같아서.
“그 곡이 드라마를 캐리했어요. 전개가 너무 억지스러워서 몰입이 안 되다가도, 최인환 씨 노래 때문에 괜히 구슬퍼지더라고요. 최인환 씨 노래 잘하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런 감성을 보여줄 거라곤 생각 못 했죠.”
반짝 21위까지 올라갔던 곡은 새벽 동안 점점 하강하더니 40위권까지 내려왔다. 하지면 추이를 보면 여기서 더 내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홍보팀장이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홍보용으로 돌릴 보도자료였다.
최인환 선배의 이력, 그리고 시련을 겪고 이번에 재기했다는 스토리. 하지만 그가 겪은 시련이 너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내용은 빼죠.”
“저도 쓸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이만한 홍보 수단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가족의 죽음만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잖아요. 특히 자식 같은 경우는.”
기사 내용이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했지만, 그래도…….
“빼주세요.”
“본인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이슈만 잘 타면 앞으로의 활동까지 보장할 만한 소재라서요.”
“본인에게 물어보기도 좀 그렇습니다. 빼주세요. 앞으로의 활동은 제가 좋은 곡 줘서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할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담아 부르는 노래. 포장하기에 이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지만 아픔을 이런 식으로 들추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거 기사로 내도 되겠어요?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선배는 나에게 실망을 할 것이 뻔했다.
* * *
차트에 오른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최인환 선배의 향후 활동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불러줄 만한 급은 아직 못 되니까 할 수 있는 건 행사밖에 없었다.
행사에서 최인환 선배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단가 자체가 가장 낮은 금액으로 책정된다. 신인과 같은 급. 경비를 제하고 나면 사실상 손에 쥐는 것은 얼마 없는 정도다.
하지만 박스권이라고 불리는 차트 100위 안으로 진입하면 단가가 배로 오른다. 50위권 안은 다시 그것의 두 배. 그리고 단지 단가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불러주는 곳의 수도 몇 배나 증가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음원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사재기 업체에 의뢰해서 차트 순위를 올리는 것이다. 포기했던 음원 수익 이상으로 행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크니까.
최인환 선배는 하룻밤 사이 단가를 네 배로 올린 셈이었다. 물론 몬스터 뮤직의 매출도 그만큼 증가할 것이다.
“야, 부우야.”
임원실을 찾아갔다. 임원실에는 손동하 사장과 김인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무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큰 소리 좀 치게.
“박영민 본부장. 축하해.”
“오오! 박 본!”
두 사람 또한 격하게 나를 반겨주었다.
“너, 이따 시간 되지?”
“없어도 만들어내야지. 오늘이 무슨 날인데.”
부우 녀석과는 전부터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인환 선배가 차트에 오르면 셋이 모여서 술 한 잔 하자고.
선배에게도 넌지시 말을 했더니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인혁이도 같이 보자. 나야 좋지.’
“인환이 형은 혼자서 애 키우고 있으니까, 우리가 그쪽으로 가자고.”
“애가 몇 살이라고?”
“일곱 살이래.”
애기 혼자 두고 선배를 불러낼 순 없으니까 선배 집을 쳐들어가자는 얘기, 혹시 집이 좁을 수도 있으니까 바깥으로 나가야 할 것도 생각을 해보자는 얘기 등등. 또한 애기가 내년에 학교 들어가니까 선물 사 가지고 가자는 얘기도.
“안 되면 편의점 앞에서 과자 하나 까서 소주 마셔도 되는 거야.”
“옛날엔 자주 그랬었는데. 그 형하고.”
이번 결과를 만끽하며 셋이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벌써부터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최인환 선배에게 문자를 남겼다. 인혁이와 같이 저녁 즈음에 찾아뵙겠다고.
선배에게는 차트에 오른 것을 확인한 즉시 바로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도착했다. ‘너한테 정말 고맙다.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 오늘 일찍 들어갈 겁니다. 일 있으면 빨리 얘기해 주세요.”
“외근 나가시나요?”
“아뇨. 축하 파티요.”
“축하 파티? 아……. 최인환 씨요?”
“오늘만 좀 일찍 들어가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러시다가 내일 출근 못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분 말술이라던데.”
“내일 저 안 보이시면 술 먹고 어디서 뻗어 있겠구나 생각해 주세요.”
그렇게 오가는 대화조차 즐거웠다. 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선배에게서 답장이 없었다.
“인혁아. 이상한데? 전화도 안 받아.”
임원실을 찾아가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기다렸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는데.
“어제 술 드신 거 아닐까?”
“그래도 지금 몇 신데.”
“메시지 남겨봐. 보면 전화해 달라고.”
“벌써 그렇게 했지.”
하지만 또 걸어도 응답은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계속 기다렸다. 즐거운 술자리를 가지게 될 거라는 기대도 이제는 걱정 섞인 우려로 변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제야 잘 풀리려고 하는데 또 다른 아픔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젊은 아저씨들아. 그냥 집에나 가. 기다리지 말고.”
손동하 사장이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네?”
“힘든 사람 붙잡고 무슨 술이야. 나중에 마음 안정되면 그때 찾아가 봐.”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인혁이도 마찬가지였다. 차트에 진입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인환이 기분이 지금 어떻겠냐. 행복이란 건 말이야, 나눌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손동하 사장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래. 인환이한테 이런 일은 없었지. 음악 하면서 순위 같은 곳에 한 번도 올라본 적이 없는 놈이야. 그랬던 놈이 이제야 자기 이름 석 자를 그런 곳에 올리게 되었어. 그게 마냥 기쁘겠냐. 그렇게 되기를 누구보다 원하고 있었던 사람이 이제는 세상에 없는데.”
무언가 내 가슴 아래로 쿵 떨어지며 먹먹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게 해줘. 출구가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야. 아마도 그 녀석은 오늘이 가장 가슴 아픈 날 중 하루일 거다.”
사장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사를 나왔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 선배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영민아.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억지로 즐거운 풍경을 상상해 봤다. 아빠가 드디어 해냈다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 네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에 젖어 있는 모습.
답장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계속 문장을 썼다 지웠다 했지만, 차마 그 어떤 말도 보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