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19
4장 Big Picture
방송국 로고가 박혀 있는 큼지막한 밴 몇 대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오더니,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방송 장비를 나르기 시작했다.
오늘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연습실이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니 시장통처럼 분주했다. 조명이 설치되고 카메라가 자리를 잡았다. 쌀쌀한 바람이 스며들어 오는 날씨임에도 방송국 직원들의 이마로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그걸 구경하고 있었더니 배민혁이 얼른 다가와 나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야, 너 메이크업 받았구나.”
“이러니까 좀 아이돌 같나요?”
부우 녀석이 출연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배경은 우리 회사. 내용은 인혁이의 직장 생활을 보여주는 것.
출연자는 세 명이었다. 인혁이를 비롯해서 곧 데뷔시킬 남자 아이돌 멤버 두 명.
“본부장님. 김 이사님 좀 말려주세요.”
“왜?”
“팀 이름을 자꾸 이상한 걸로 하자고 해요.”
“뭔데?”
“비츠보이즈로 한대요. 저희 말이에요.”
“엥?”
“남매 그룹으로 하면 얼마나 보기 좋냐면서.”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이름을 밀고 있는 당사자는 방송 작가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 그래도 기름기 줄줄 흐르는 뚱뚱한 녀석의 이마는 벌써부터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 이번 프로젝트 실패하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 정말이야.
인혁이는 그런 말을 버릇처럼 하곤 했다. 그는 이번 보이그룹 실패를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보이그룹의 모든 역사를 살펴봐도, 데뷔 초반 1년을 실패한 팀이 다시 일어난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슈를 타고 뒤늦게 급부상한 어떤 그룹. 그 한 팀을 제외하고는 초반 실패를 딛고 일어선 팀이 단 하나도 없었다.
확률을 계산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지금까지 데뷔한 수백 개의 팀 중 오직 한 팀. 보이그룹은 데뷔 초반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그대로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박영민 씨, 안녕하세요.”
방송국 직원들은 나를 보며 아는 체했다. 나도 전에 잠깐 출연한 적이 있었던 프로그램이니까. 그때 부우 녀석의 친구로.
“박영민 씨도 오늘 나오시는 거예요?”
“아뇨. 저는 그냥 구경 온 겁니다.”
“잠깐 얼굴 비춰주시지.”
“됐습니다. 전 안 해요.”
“전에 호응 괜찮았어요. 박영민 씨 출연분 말이에요.”
몇 시간 찍은 거 거의 다 편집해 버리고 잠깐 내보냈으면서 호응은 무슨.
“두 분이 같이 있으면 그림이 잘 나와요.”
“아니에요. 회사에서 촬영한다기에 잠깐 구경 온 겁니다.”
그래도 방송에 내 얼굴이 나가기는 했었다. 인혁이의 친구 역할로.
그때 인혁이 어머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 하셨지.
-아이고, 저 친구 좀 봐. 친구는 저렇게 빼빼 말랐는데 우리 인혁이는 저게 뭐야.
-왜요? 조금만 살 빼시면 보기 좋은 몸인데요.
-뭐가 보기 좋아요? 맨날 처먹으니까 몸이 퉁퉁 부은 거지.
내 대사는 별로 나가지도 않았지만 어머니의 한 마디 때문에 분량이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배민혁.”
“옙!”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해라. 말실수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보이그룹의 초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팬덤의 힘이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세일즈 포인트는 완전히 다르다. 걸그룹이 대중성을 타겟으로 한다면 보이그룹은 철저하게 팬덤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간다.
쉽게 말해서 걸그룹은 조금씩 주머니를 꺼내는 다수의 대중을 노리는 것이고, 보이그룹은 자신의 아이돌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을 하는 소수의 팬덤을 노리는 것이다.
물론 탑급으로 가면 이 경계가 모호해지지만.
걸그룹의 주요 전략은 좋은 곡으로 멤버들의 매력을 어필하고, 그것이 CF와 행사 수입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보이그룹은 팬덤을 강하게 결속시켜서 콘서트 투어로 매출을 발생시킨다. 티켓 수입, 그리고 현장에서의 굿즈 판매 등등.
둘을 비교하면 보이그룹 쪽의 매출이 훨씬 크다. 탑급의 걸그룹이 아무리 활발하게 활동을 해도 2, 3 티어의 보이그룹 매출에는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김인혁은 자신의 예능 출연을 통해서 곧 데뷔할 애들을 미리 선보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팬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 영민이 왔냐.”
그리고 퉁퉁하게 몸이 불어 있는 녀석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너도 잠깐 얼굴 비추지그래.”
“난 싫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하고 나하고 한 컷에 있으면 되게 웃기대.”
“뭐가 웃겨.”
“개그 콤비 같아 보인다고.”
방송국 직원들이 날 아는 체할 때만 해도 잠깐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말을 들으니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겨 버렸다. 개그 콤비라니.
“그런데 너……. 애들 팀 이름 진짜 그걸로 할 거야?”
“비츠보이즈?”
“농담이겠지?”
“이상해?”
“그렇게 했다간 이름 때문에 망한다.”
“진짜로 이상한 건가.”
사실 중소 기획사에서 보이그룹 런칭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기획력 때문이다.
어떤 컨셉으로 갈 것인지, 멤버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치밀한 기획력이 없으면 팬덤은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해 줄 연습생들의 인력풀.
포지션에 맞추어 매력 있는 아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완성할 수 있는 걸그룹에 비해, 보이그룹은 관계성까지 확실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대형 기획사의 경우는 연습생 시절부터 멤버 조합을 짜둔 상태에서 키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미가 생명이니까.
“알았어. 팀 이름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
“혼자 결정하지 말고. 애들 의견도 들어봐.”
“그래야 하는데……. 저거 진짜 이상한 놈이라서.”
인혁이는 방송 출연을 앞두고 한껏 들떠 있는 애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보이그룹 반대하는 쪽이야.”
“그래. 안다.”
“우리 회사 규모에서 보이그룹을 성공시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야.”
“안다고.”
“네가 제작하는 팀이 아니라면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려고 했어.”
몇 년씩 트레이닝을 받아온 연습생들, 그리고 앨범 제작비, 쇼케이스와 홍보에 들어갈 금액까지.
우리 회사 1년 예산의 절반이 이쪽 팀으로 소모된다.
실패한다면 그 돈을 그대로 공중에 날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에는 그 금액의 열 배가 넘는 돈이 투자된 대형 기획사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번 보이그룹 런칭이 지난 비츠걸스 때처럼 초반에 삐끗해 버린다면, 우리 회사는 아주 어려운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 안다고.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잖아. 주위 사람들 의견 충분히 들어가면서.”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반대하는 의견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김인혁 이 녀석의 팀이니까.
멤버들을 픽업한 거부터 지금까지 트레이닝시킨 것까지. 이 녀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번 보이그룹은 김인혁의 자존심과 같은 일이었다.
반대를 하는 것보다, 내 쪽에서도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야, 그래도 비츠보이즈, 그건 절대 안 돼.”
“알았다니까. 다시 생각해 볼게.”
“애들은 괜찮은 것 같아. 트레이닝 시켜보니까 잘 따라오고 있어.”
“그래?”
“재능 있는 애들이야. 인성도 바른 것 같고.”
“그렇지?”
그리고 조명에 불이 들어오며 이제 본격적으로 촬영장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 * *
인혁이는 자기가 점찍은 아이들로 팀을 구성해서, 자신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 포부를 이입할 필요가 있었다.
“힘들지? 바쁘니까 우리 팀은 송년회도 제대로 못 하네. 매니저들이랑 다 같이 한번 모이면 좋을 텐데.”
“맞아요.”
연화와 둘이 대화를 나눌 만한 공간을 찾다 보니 작곡팀 작업실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땅한 응접용 테이블이 없어서 우리는 작업용 PC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의미 없이 마우스를 꾹꾹 누르면서, 나는 모니터 위로 길게 늘어서 있는 트랙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작년에는 송년회 했니?”
“저희 연습생들끼리는 했어요.”
“그래?”
“근데 매번 중국집이에요.”
연화와는 조만간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가장 바쁜 애들이니 만날 순 없을 것 같았고 통화를 하거나 톡으로 얘기를 하려고 했다.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하나. 애들은 저녁 일정이 취소되어 버려서 오후에 라디오 하나만 하고 쉬는 중이라고 한다.
“모처럼 쉴 수 있는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니에요. 별로 안 피곤해요.”
“안 피곤하긴. 잠잘 시간도 없을 거면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요령이 생겼어요.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좀 자고. 대기하는 시간도 꽤 있으니까 그때 자도 되고.”
연화는 그게 자랑스럽다는 듯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서론은 이 정도로 되었고, 이제 본론을 말할 시간이 왔다.
“연화야.”
“네.”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해도 되잖아. 굳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릴 필요는 없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연화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직접 얘기해 줘. 늦은 시간이라도 메시지 남겨놓으면 내가 꼭 확인할게.”
“네.”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연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다시 나와 눈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면 안 들어주실 게 뻔하니까요. 그래서 그랬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안 들어줘?”
“김다은이 말씀드리면 생각을 한 번 더 하실 거니까요.”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니에요. 연습생일 때부터, 선생님은 김다은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시기, 질투와 같은 감정이 말 속에서 훤히 보일 정도였다.
“이해할 순 있어요. 전부 그래요.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 있는 거고,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있는 거고. 그래서 저보단 김다은이 말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한참 동안 말을 골라 봤다. 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연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은이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 이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맡게 된 제자였고, 나와 같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약 다은이가 실패했다면 내가 실패한 것 이상으로 속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얘도 내가 아끼는 제자다. 어쩌면 더 아픈 손가락일지도 모르겠다. 순탄하게 함께해 온 다은이와는 달리 연화와는 우여곡절이 많았으니까.
“아무튼…….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잖아. 내가 다른 가수를 맡는 게 싫다고.”
“네.”
연화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싫어요.”
“그럼 내가 회사에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너희만 지켜보길 바라는 거야? 그게 불가능하단 건 너도 알잖아.”
“그게 아니라…….”
연화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너무 불안했어요. 저희한테 쓰셔야 할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시면, 저희는 버려질 것 같아서.”
“버려지다니.”
“너무 일을 많이 맡으시는 걸로 보였어요. 본부장이 되셨으니까 관리만 하셔도 될 텐데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맡으려고 하시고……. 특히 남자 애들 쪽은…….”
“유미는 내가 너희를 맡기 전부터 담당하고 있던 가수야.”
“알아요.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최인환 선배는 내가 여기에 오기 전부터 나랑 잘 알던 사이였어. 내가 제작을 맡게 되면 꼭 그 형과 해보고 싶었지.”
“그것도 이해해요.”
“그러면?”
하지만 연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혼나는 학생처럼,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는 아이돌이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어. 너한테 감정을 이입하면서 자기 자신보다 너를 더 아끼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네가 노래를 하는 모습, 그리고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하나하나 다 지켜보면서 거기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 아이돌에게 사실은 질투와 시기로 뒤엉킨 감정이 가득 자리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
“물론 힘들 거야. 지금까지 오랜 시간 노력해왔던 걸 보상받고 싶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러지는 말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렇게 남을 시키지 말고 직접 해. 나한테는 다은이나 너나 똑같아. 그리고 아무리 이 바닥이 경쟁으로 얼룩진 곳이라고 해도 같은 회사 가수들끼리 그런 식으로 견제하는 건 좀 아니잖아.”
연화는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티스트가 담당 프로듀서에게 다른 일은 줄여 달라고 요청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그 정도의 의견 제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화 말도 틀리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 회사에 프로듀서는 나 말고 더 있었고 보컬 트레이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네 뜻이 그렇다니까 일정 부분 수용해 보도록 할게.”
“예?”
“유미는 이제 우리 회사의 메인 가수가 되었어. 나로서는 놓치기 싫은 사람이야. 유미의 앨범은 앞으로도 내가 제작할 생각이야.”
“네.”
“하지만 네가 불편하다면 남자 애들 쪽은 손을 떼도록 할게.”
“…….”
“대신 한 달 동안은 내가 보컬 레슨을 해주기로 했었어. 이것도 약속이기 때문에 어길 순 없는 일이야. 약속했던 한 달이라면 다음 주까지니까, 그것까지만 하고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야.”
“정말이세요?”
“네 요청이니까, 그걸 들어주겠다는 거야.”
연화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 더 아끼고 그런 건 없어. 오히려 다은이는 이따금 철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어서 나한테는 더 안 먹힌다고. 만약 처음부터 네가 말했다면, 난 곧바로 네 요구를 들어줬을지 몰라.”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제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보도록 할게. 네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요구하는 걸 수용해 보도록 해볼 거야. 하지만 너도 내 말에 따라줘야 돼.”
“예? 어떤……?”
“너는 이따금 질투심과 경쟁심이 지나칠 때가 있어. 그런 걸 속에 담아두고 엉뚱하게 표출하려고 하지 말고 누구에게든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화를 나눠보도록 해봐. 꼭 내가 아니어도 좋아. 너희 팀 멤버에게 그래도 좋고, 매니저 정 팀장님과 얘기를 해도 괜찮을 거야.”
연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말 들어봤어?”
“들어본 것 같아요.”
“무조건 남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나중에는 네가 무너지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욕심이 많고, 집착이 강하고, 그리고 누구보다 성취욕이 강해 보였다.
다은이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얘네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의도로 전화를 걸어온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자기 몫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생존력은 높이 살 만하지만, 너무 표독스러워지면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나한테 자꾸 안마를 해대는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보다 우선인 것이 있으니까.
플라지아는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는 정도로 개별 활동을 시작했다. 올유어걸은 이번 컴백에 실패를 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저조했다.
걸그룹들의 컴백 대란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질 정도로 다음 달부터는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왕좌가 완전히 비어 있으니까.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애들은 그 가운데에서, 더 이상은 언더독의 위치가 아니었다. 가장 촉망받는 팀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새겨놓았다.
내년은 비츠걸스의 해로 만들어보자는 포부가 따뜻한 물처럼 내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 * *
“본부장님. 어떻습니까?”
“잠깐만. 좀 더 들어보고.”
배민혁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봤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스피커에서는 이 녀석이 만든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도감이 다소 느리게 느껴지는 힙합 비트. 어두우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쏘아 대는 랩, 그리고 겹겹이 쌓아 놓은 멜로디는 서정적인 느낌까지 담고 있었다.
작업하고 있는 곡을 가지고 와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은 무려 열두 곡을 들고 왔다.
좀 골라서 가지고 오지 만든 거 전부 가지고 온 거냐고 핀잔을 줬더니, 이번 앨범에 수록곡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본부장님! 냉철한 평가 부탁드립니다.”
마치 장난을 치듯이 내 옆에 딱 붙어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정말로 의외였다.
곡이 너무 괜찮았다.
“너 혼자 만든 거야?”
“그럼요.”
“인혁이가 도와준 게 아니고?”
“어드바이스는 많이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방금 들으신 그 곡, 그건 아직 선생님께 들려드리지 않은 거예요. 그저께 만든 거거든요.”
다시 리와인드.
들어볼 곡이 열한 개나 남아 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단조로운 베이스 라인이 다시 작업실 안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너 혼자 만들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트랙도 전부 네가 찍은 거야? 어디서 가져온 게 아니고?”
“왜 이렇게 못 믿으세요.”
아직 열여덟 살.
DAW를 다룰 줄 아는 것만 해도 칭찬을 들을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비트가 처음 들려왔을 때는‘어라?’ 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트랙들의 밸런스가 훌륭했고, 초보자 특유의 과장된 사운드도 없었다. 게다가 혼자서 랩과 보컬을 수준급으로 소화를 해내며 가이드를 넣어놓은 것까지 만족스러웠다.
중간에 이따금 엉성한 파트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우리 회사 전속 작곡가들에 비해서도 뒤질 것이 없었다.
“열심히 만들었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냉혹하게 평을 해주세요.”
“좀 더 들어보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
이번에는 자극적인 전자음을 중심으로 한 메마른 사운드. 이펙터를 걸어 일그러뜨린 보컬 때문에 산만한 느낌이 들다가도 확실한 훅이 선명하게 곡을 이끌고 나가주었다.
전반적인 사운드가 스타일리쉬한 것은 물론이고, 데모의 완성도도 훌륭했다.
우리 회사 작곡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데모를 제출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만들어서 가지고 오라고.
“작곡은 언제부터 배웠니?”
“배운 거요? 2년 전인가……. 대충 그 정도요.”
“너 여기서 연습한 지 6년 됐다면서?”
“그렇죠.”
어렸을 때부터 학교 공부하듯이 툴을 만지고 놀았다면, 이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고작 2년?
“선생님이 처음부터 작곡을 가르쳐주신 건 아니었어요.”
“그래?”
2년 만에 기성 작곡가들 뺨칠 정도로 곡을 만들어낸다……. 김인혁이 왜 이렇게 얘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내 가슴 속에서는 단어 하나만이 줄기차게 맴돌고 있었다.
천재. 이거 알고 보니 천재구나.
“깔끔하게 잘 만들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확 와닿는 게 없어.”
“아, 네.”
“대중들을 끌어당길 만한 게 없다는 얘기야.”
만약 나에게 이런 감각이 없었다면 칭찬 일색이었을 것이다.
‘네가 김인혁보다 낫다. 인혁이가 스무 살 때 만든 곡은 형편없었는데.’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곡 자체의 완성도는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대중성이 부족했다. 자기 스타일이 확실한 만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요소는 부족했다. 열여덟 살에 그것까지 된다면 천재 오브 천재겠지.
그리고 다음 곡.
이번에는 매끄러운 비트. 트렌디하면서도 산뜻한 사운드. 흡입력 있는 멜로디.
어떻게 매번 다른 스타일의 곡을 만들어내지? 하는 감탄도 잠시.
이번에는 귀가 번뜩 뜨였다.
“아니, 잠깐만. 이것도 너 혼자 만든 거야?”
“아뇨. 이건……. 선생님이 좀 도와주셨어요.”
“인혁이가?”
“네.”
따라부르기 쉬운 멜로디, 공격적인 후크.
이건 지난 두 곡과 달랐다. 내 감각이 엄지손가락을 우뚝 세우고 있었다.
“인혁이가 어떻게 도와줬는데?”
“구조를 좀 바꾸라고도 하시고……. 라인이 약하다고 강조할 곳은 좀 강조하라고도 하시고……. 그런데 본부장님. 어드바이스를 듣기는 했지만 제가 만든 겁니다.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조언을 해주셨을 뿐이지 곡에 손을 대지는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녀석은 마치 변명을 하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내 귀로 들어오고 있는 이 결과물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것이었다.
* * *
열두 곡을 다 들었더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녀석은 들어주느라 수고하셨다면서 또 안마를 해주려고 하길래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정말 이상한 놈이다.
“팀 이름은 빅픽쳐로 결정했다고?”
“제 아이디어입니다. 괜찮죠?”
“비츠보이즈보단 훨씬 낫네. 그런데 왜 빅픽쳐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럼요. 저는 팀을 계획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이 녀석은 자기 계획을 줄줄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2년 동안은 바짝 엎드려서 팀을 띄우는 것만 생각할 겁니다. 자존심 같은 거 없어요. 높으신 분들 앞에서 개처럼 기어 다닐 각오까지 하고 있습니다. 음악도 먹히는 것만 만들 거예요. 하지만 제 계획대로 잘 풀려서 2년 안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 팀 색깔을 만들 거예요.”
“어떻게?”
“저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거고, 메시지도 분명하게 제시할 거예요. 팀 멤버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2년만 고생하고, 그다음에는 하고 싶은 거 하자구요.”
녀석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꿈이 있는 거구나. 열여덟 살답게.
“본부장님. 그러면 제 곡은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다른 사람들 해주시는 것처럼 안 해주세요? 뜨는 곡 하나 딱 찝어주는 거요.”
배민혁은 기대감이 어려 있는 두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열두 개의 곡.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강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곡을 고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한 곡 정도는 잘만 다듬으면 물건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건 인혁이하고 상의해 봐.”
“엥? 왜 안 해주세요, 저는?”
요즘의 작곡 방식이라면 협업이 대부분이다. 트랙 만드는 사람 따로, 멜로디 만드는 사람 따로. 아니면 파트별로 각자 만들었다가 그걸 이어 붙이기도 하고.
그렇게 했을 때의 결과물이 혼자 만든 것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인혁이는 우직하게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공들여 키우고 있는 이 아이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곡을 만들고 있었다.
“뭐 하나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다 고만고만해.”
“그런가요?”
“인혁이한테 계속 열심히 배워라. 가능성은 보이니까.”
열두 개의 곡을 들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고 해야 하나.
천재적인 재능으로 완성도 높은 데모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중에서 김인혁의 손길이 닿은 것은 놀랄 만큼 훌륭했다는 점도.
굳이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 오만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열두 개 다 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유아연이 김인혁의 뮤즈라면 이 녀석은 김인혁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부럽네.”
“예?”
“아니야. 아무튼 열심히 해라. 보컬 레슨은 오늘까지 한 걸로 끝이지만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계속 도와줄게.”
“정말 고맙습니다!”
* * *
바깥은 아직 밝았다.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영상 하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란 나를 포함해서 정 팀장, 그리고 정 팀장 밑에 있는 로드 매니저 유 대리.
우선 정 팀장과 유 대리의 표정부터 먼저 얘기해 봐야겠다.
정 팀장은 ‘오오!’ 하는 얼굴을 하다가, ‘어……. 어!’ 하는 얼굴로 이내 바뀌고, 결국에는 ‘어우!’ 감탄이 눈가에 어려 있는 얼굴을 하고 있고.
유 대리는 그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제대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GH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번에 데뷔시킨 9인조 걸그룹 ‘에피아’.
영상은 구도가 바뀌며 아홉 명의 모습을 풀샷으로 잡았고, 에피아 멤버들은 산뜻한 안무를 딱딱 맞추며 후렴을 노래하고 있었다.
정 팀장과 유 대리의 얼굴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광대가 승천하는 미소.
전국 최강의 딸바보들이 어린 아기의 애교를 보고 있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한 번 다시 보죠.”
“또 봐요? 벌써 일곱 번째입니다. 아니, 여덟 번째인가.”
“모니터링해야죠. 모니터!”
“맞습니다!”
그리고 영상은 다시 재생되었다. 어제저녁, 음방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에피아의 무대를.
“유 대리는 누구야?”
“전 소연이요. 팀장님은요?”
“나도 어제 처음 봤을 때는 소연이었는데, 오늘 보니까 보미가 눈에 들어오네.”
“그렇죠? 눈웃음이 진짜 치명적이에요. 이 팀은 소연이로 입덕해서 보미로 넘어가는 팀이 될 겁니다.”
GH 엔터테인먼트는 대중음악계에서 아이즈 컴퍼니와 비슷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수뿐만 아니라 배우, 방송인 등을 관리하는 자회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규모 면에서는 연예계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GH 엔터테인먼트, 아이즈 컴퍼니, 그리고 다른 두 곳과 함께 업계에서는 4대 기획사로 꼽히는 곳이었다.
그런 회사에서 어제 걸그룹을 런칭했다. 오늘 연예계 뉴스는 에피아가 도배를 하고 있을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본부장님은 누구예요?”
“저는 뭐…….”
“본부장님도 소연이?”
“메인 보컬이 눈에 들어오네요. 실력이 대단해요.”
“아……. 인아!”
이 사람들은 벌써 경쟁 그룹의 멤버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었다.
“인아가 노래를 잘하긴 하죠.”
하지만 이 집 메인 보컬은 나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케이팝 보이스의 1회 우승자는 김다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마이크를 부술 듯한 포스를 보여주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었다.
그리고 케이팝 보이스의 2회 우승자는 정인아. 이번에도 열일곱 살의 우승자. 다은이와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우승 후보로 꼽히더니 별다른 경쟁 없이 무난하게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오직 가창력 하나만을 심사의 대상으로 봤던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에서 우승을 해낸 어린 소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1회는 화제성이 적었고 참가자들의 수준도 그저 그랬다. 하지만 1회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쟁쟁한 실력자들이 2회에 몰렸다.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2회가 더 높다는 얘기가 나오곤 했다.
그렇다고 우승자의 실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인아라는 애. 노래 잘하죠? 얘 혼자 잘하는 게 아니라 받혀주는 리드 보컬들도 실력이 장난 아니에요.”
플라지아의 활동 중단으로 빈집털이가 될 줄 알았는데.
이런 복병이 나타날 줄이야.
“와, 그런데 이 팀은 진짜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또 그 옆에 예쁜 애……. 애들이 번갈아 가며 나오는데 눈을 깜빡일 수도 없어요. 놓치기 싫어서.”
정 팀장은 내내 호평.
그것도 아빠 미소를 입에 가득 머금은 채로.
“곡도 잘 뽑혔고, 안무 수준도 높고……. 컨셉도 잘 잡았네요. 옛날에는 섹시 아니면 큐티 중에서 한쪽을 밀었다지만 요즘엔 이런가 봐요. 한 팀 안에 다양한 색깔이 다 모여 있어요.”
말을 하면서도 좀처럼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선하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모니터링 좀 하느라.”
“어제 데뷔한 팀이 있어서 그래. 팀 이름이 뭐라고 그랬죠?”
“에피아?”
정 팀장과 유 대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 애들에 비해선 퍼포먼스가 약해.”
“선하 같은 애가 안 보여요.”
“연화처럼 비주얼 쇼크를 주는 애도 없고.”
“밋밋하죠.”
“소속사 빨이지 뭐.”
영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몽환적인 곡, 하지만 거기에 멤버들의 다양한 매력이 얹히며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GH 엔터라는 큰 회사에서 선택받은 아홉 명의 멤버들은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선하야.”
“예.”
“너도 여기로 와서 같이 보자.”
나는 선화를 옆으로 앉혔다.
“에피아라는 팀이야. GH 엔터에서 어제 데뷔시킨 애들.”
“알아요. 저희도 봤어요.”
“얘네와 경쟁해서 이겨야 돼.”
“…….”
“너희가 최고가 되려면.”
“꼭 최고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잘하면 되니까요.”
“아니, 나는 너희를 최고로 만들고 싶어. 너희는 그럴 수 있는 애들이야.”
“부담되는데요.”
“충분히 할 수 있어. 너희 넷이라면.”
* * *
-사업을 하자는 사람이 있어. 내 자산을 관리해 주고, 투자도 잡아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회사 하나 만들어서 한번 같이해 보자고 하더라고.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무슨 사업이야. 몇 번 거절을 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나쁘지만은 않아.
오래전의 일이었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자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자네가 도와준다면 해볼 만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
작곡가 손동하는 그런 제안을 했었다. 지금 매니지먼트 1팀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손동하는 줄곧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직원이 두 명, 가수가 두 명이 전부였던 회사.
그곳에서 매니저를 맡아 혼자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애처로워 보였다.
책임감이 강하고, 꿋꿋하게 이 바닥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 사업을 시작한다면 저런 사람이 도와줬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1팀장이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면 몬스터 뮤직의 출발은 순조롭지 않았을 것이다. 매니지먼트에 관해 어깨너머로만 알고 있었던 손동하는 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의 1팀장은 아직 로드였고 나이도 어린 편이었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성실함까지 갖추고 있어서 손동하의 눈에 단단히 들어왔던 것이다.
몬스터 뮤직은 막 시작하는 회사였기에 팀장급 매니저를 빼 오긴 어려웠고 딱 그 정도의 사람이 적임자였다.
“처음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와보니까 매니저는 나 포함해서 세 명이야. 셋이서 이걸 어떻게 다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 손 사장님 그때는 너무 했어. 곡만 만들던 양반이라서 그런지 현장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1팀장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언젠가는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전만 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가수를 행사장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다른 가수 스케줄을 챙겨주고,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가서 그 가수를 데려오고, 그리고 다른 매니저의 일까지 떠안게 되어서 그것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와. 내 손에 계속 핸들이 쥐어져 있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미친 건가 걱정했다니까.”
유아연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애가 어렸을 때는 하도 힘들다고 징징대는 통에 달래느라 진을 다 뺐고, 조금 커서 인기를 얻었다 싶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기 시작했다.
활동 기간 동안 매니저가 수도 없이 교체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녀를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1팀장은 유아연이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치프 매니저를 맡고 있었다.
“이 회사는 아연이로 10년을 먹고 살았어. 그런데 그거 알어? 나 아니었으면 아연이는 가수 그만뒀어. 다 때려치우고 안 하겠다는 사람 붙잡았던 것만 세 번이야. 그냥 액션을 취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만두려고 작정을 했더라고. 재계약할 때 우리 회사 쪽으로 붙들어놓은 것도 내 덕이었어. 아연이 집 앞에서 꼬박 열한 시간을 기다렸지. 내 말 한마디에 빈정 상했다고 얼마나 사람을 벌레 보듯 하던지.”
그동안 있었던 숱한 사연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일들을 얼마나 힘들게 헤쳐왔는지.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수없이 있었지. 이 정도 경력이면 다른 곳에 가도 충분히 내 몫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 회사는 너무 프로듀서 중심이야. 잘 되면 프로듀서가 잘 만들어내서 그런 거지, 현장에서 구르고 있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아. 가수랑 하루 종일 붙어다니면서 받아줄 거 다 받아주면서 이 회사를 돌아가게 하고 있는 게 누군데.”
특히 유아연의 성공을 김인혁이 독차지하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만이 생겼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재미없어.”
그럼에도 회사에 남아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세월을 부정하는 것. 그렇게 되면 게임에서 패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팀장님, 기운 내세요.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박영민을 중심으로 회사를 개편한 것도 서운한 일이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받아들일 순 있었다. 하지만.
만약 전무가 자기하고 한 마디라도 상의했다면. 이렇게 속이 끓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급에서 누락되고, 새파란 것들을 더 밀어주었을 때도 참을 수 있었다. 매니저로 버티고 있다는 게 보통 멘탈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는데.
한마디 상의라도 했다면.
“됐다. 이런 소리를 해서 뭐하냐.”
팀원들과 담배를 쭉쭉 빨아 대며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이제 팀장이라는 직책에 머물러 있기엔 그의 나이가 너무나 많아졌다.
경력도, 그리고 이 회사에 이루어낸 것도.
그런 푸념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이번에 A&R 본부장으로 올라간 박영민에게서.
“무슨 일이죠?”
-팀장님, 내일 시간 되십니까?
“내일이요?”
-일정표 보니까 점심에는 시간 괜찮으신 것 같던데요.
불편한 전화였다.
몬스터 뮤직의 역사와 함께한 그였기에, 박영민이라는 사람이 단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해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대단하다. 그 역시 마음속으로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 회사를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자기가 꼭 앉고 싶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이 좋게 보일 수는 없었다.
-내일 점심 같이해요. 괜찮으십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알겠습니다. 점심 시간 맞춰서 회사에 들어갈게요.”
* * *
“바쁘신 본부장님께서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농담처럼 실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의 끝에는 불편한 심기가 약간 묻어 있었다.
숨기기는 싫고, 그렇다고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불편함.
회사 근처, 그리고 후미진 골목에 있는 국수집이었다. 1팀장은 입맛이 없을 때마다 이곳을 찾곤 했다.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는 1팀장이 찾아낸 보물 같은 맛집이었다. 회사 직원 중에도 이곳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10년 동안 이 회사의 토박이로 살아온 그였기에 알 수 있는 정보 중 하나였다.
“와, 국물 시원하네요.”
물 마시듯 따뜻한 멸치국물을 후루룩 마셔 댄 박영민은 국수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는 웃음이 걸쳐져 있었다.
“부족하시면 더 드세요. 여기 면 추가 됩니다.”
“그래요? 팀장님은요?”
“저는 됐습니다.”
국수 맛이 어지간히 좋았는지 박영민은 면을 추가로 시켰다.
국수 정도.
1팀장이 박영민을 생각하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일단은 여기까지 열어 보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무시하기엔 너무 커버린 존재였고, 대립각을 세우기엔 이쪽이 불리했다. 그렇다고 손바닥을 보여주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1팀장은 저 자리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팀장님, 요즘 바쁘시죠?”
“저희야 늘 그렇죠.”
“1팀이 유난히 바쁜 것 같아요.”
“다른 팀으로 사람 자꾸 빼가는데 안 바쁠 수가 없죠.”
하지만 정작 일이 몰려 있는 곳은 3팀이었다. 비츠걸스와 황유미만큼 이 회사에서 잘나가는 가수들은 없었다. 1팀의 일정 대부분은 외국을 들락날락하는 유아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최인환 선배 말이에요. 1팀장님이 안 받아주시겠다고 하셔서 3팀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요? 안 받아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아뇨. 서운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2팀으로 넘기기에는 좀 아쉬워서요.”
무슨 의도로 이런 얘길 하는 것인지 1팀장은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한 팀에서 아티스트 두세 명을 관리하는 식으로 가고 있는데, 저희 같은 작은 회사에서는 좀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건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본부장님이 오시기 전부터요. 아마 본부장님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를 겁니다.”
“예. 제가 잘 모르는 일이기는 하죠. 하지만 돌아가는 걸 지켜보게 되니까 이건 비효율적인 듯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상의 좀 드리려고 모셨습니다. 2팀을 없애고 팀 두 개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팀장님이 중심인 팀과, 정영수 팀장이 이끄는 팀. 이렇게 두 개로만요.”
1팀장은 다 먹은 국수 그릇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상대의 눈치를 차분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건 무슨 의도일까?
“저 이번에는 정소정 씨 앨범 맡을 겁니다.”
“소정이요?”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본부장님 이제 보니까……. 고물상이라도 하려고 하시나. 한물 간 사람들 하나둘 살려보려고 하시나 보네.”
“네. 맞습니다.”
박영민은 두툼한 국수 한 젓가락에 김치까지 함께 말더니 그걸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좋은 가수에게 좋은 곡을 주는 건 제가 자신 있습니다. 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현장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왜요? 본부장님 예전에 가수 하셨다면서.”
“그래도 관리자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죠.”
“…….”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는 일 못 합니다.”
“본부장님한테는 정영수 있잖아요.”
“맞습니다. 정 팀장도 우리 회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분이죠. 하지만 앞으로 일은 계속 늘어날 겁니다. 김인혁 이사도 팀 하나 낼 거니까요. 1팀장님이 중심이 되어서 현장 쪽을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힘들 겁니다.”
“그래서요?”
“팀장님하고 저하고 힘을 합쳐야지 저희 회사가 잘 될 수 있어요.”
1팀장은 식어가고 있는 국물을 입에 넣었다. 다른 곳으로 데려갈 걸 그랬나.
“내일 전무님 만나려고 하는데, 그전에 팀장님하고 상의 좀 하려고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참에 우리 회사 매니지먼트 체계를 좀 바꿔봤으면 하는데요.”
* * *
-자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자네가 도와준다면 해볼 만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
사무실로 돌아오니 오 대리가 출장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분주하게 가방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어? 팀장님 오셨어요.”
“그래.”
그러면서 오 대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심 시간이라 사무실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팀장님……. 박영민이랑 점심 드신 거예요?”
“어.”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자식 물 먹이는 거요.”
“뭘 물 먹여?”
“기다리라면서요. 꼬투리 하나 잡히면 제대로 잡아보시겠다고.”
오 대리의 눈가에는, 그런 모략으로 하나가 된 관계가 아니냐는 듯이 1팀장을 향한 동질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뭘 꼬투리 잡어? 손 대는 것마다 전부 잘 해내는 사람한테.”
“에이, 그래도.”
“그런 얘긴 집어치우고. 넌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
“예?”
“2팀 없애고 우리랑 정영수네랑 둘로 가는 거.”
“2팀 없앤대요?”
“그런다는 게 아니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러자 오 대리는 가방 챙기는 것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2팀……. 쟤네들 하는 거 별로 없잖아요. 우리끼리도 맨날 그런 얘기해요. 2팀 가면 꿀 빠는 거라고.”
“그렇긴 한데.”
“아니 솔직히, 2팀장님은 창립 멤버라고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거지 맨날 사무실에서 바둑 두고 있어요. 바쁠 땐 서로 도와주고 그래야 하는데.”
1팀장은 2팀장의 자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몬스터 뮤직의 설립 당시 매니저는 세 명이었다. 그리고 한 명은 힘들다고 관둬 버리고 둘만 남았다. 그게 1팀장과 2팀장이었다.
22시간씩 운전을 하고 다닌 것도 세 명이 둘로 줄어든 이후였다. 그래도 그는 힘든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곳을 나를 필요로 하고,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같아서.
“생각 좀 해보자.”
“박영민하고 그 얘기 하신 거예요?”
“박영민? 본부장님이 네 친구냐?”
“아, 아뇨.”
“말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아직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꼭 앉고 싶었던 자리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직 괴로운 일이었다. 그것도 낙하산처럼 들어온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는 일 못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어버리기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이고, 가깝게 옆으로 다가가기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본부장님에 대해선 존칭 똑바로 하도록 해. 그만두고 나갈 거 아니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점심에 뭐 받으셨어요?”
“받긴 뭘 받아! 신기해서 그런다. 신기해서. 최인환 그 양반 살려내는 게 하도 신기해서.”
“아……. 하긴 최인환…….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온갖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드는 날이었다.
오래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런 열정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 * *
“빅픽쳐? 누가 정한 이름이야?”
“연습생이 직접 지은 거라고 합니다.”
“연습생이?”
“배민혁이라고 있습니다. 팀의 리더를 맡기로 했어요.”
“민혁이 알지. 그 녀석 꽤 똘똘해.”
점심에는 1팀장과, 저녁에는 전무와. 모처럼 한가한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편의점 도시락으로 사무실에서 때웠는데.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은 놈이야. 인혁이가 애는 참 잘 뽑았어.”
전무에게선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흐르고 있었다.
음식이 앞에 있기에, 그래서 그 향기가 지워졌지만 그를 앞에 두면 내 후각은 자꾸만 그것을 찾으려고 했다.
너무 강렬한 향이 아니고,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묻어 있는 상쾌한 향기.
그게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는 무슨 향수를 쓰시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차마 그걸 물어볼 엄두를 내진 못했다. 그런 향은 저 정도 되는 위치가 되어야만 가질 수 있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외모에 풍기는 느낌은 그런 향과는 전혀 달랐다. 구릿빛 피부, 군살이 없는 몸매, 늘 서글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주름이 깊게 패어 있어서 자칫하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
전무에게서 받는 인상은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굴곡이 많은 조각상 같았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명암을 가지게 되는 그런 것.
“박 본부장이 보기에는 그 팀 어떨 것 같아?”
그래서인지 마치 안부를 묻듯이 툭 던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낼 순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음악적인 성과 같은 건 계산해 보지도 않는다. 오직 그에게 필요한 것은 숫자였다.
“가능성은 충분히 보입니다. 김인혁 이사가 여러모로 애쓰고 있습니다.”
“박 본부장이 좀 도와주지그래.”
“아뇨. 오히려 관여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일 같습니다. 그 팀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인혁 이사의 손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서는 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작은 방을 우리 둘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나 같이하지? 그 말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다. 나도 마침 할 말이 있었고.
“예술하는 사람의 감각……. 뭐 그런 건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자네를 아껴두고 싶지가 않아. 아직까지 적중률 백 퍼센트를 유지하고 있는 무기를 왜 창고에 두고 있어야 하나?”
“저도 보컬 레슨부터 시작해서 손을 얹어보려고 했지만,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자네의 감각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거지?”
“네.”
그러자 전무는 금세 잔을 비워 버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잔을 다시 채워놓았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전무는 걱정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 오가는 숫자의 단위가 훨씬 커질 테니까.
“그런데……. 아까 했던 얘기는 좀 의외인데?”
“전부터 줄곧 하고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의외라는 거야. 갑자기 든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
* * *
허리를 숙여 세면대 앞에서 한참 동안 손을 비비며 씻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우진은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듯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넘겼다. 매끈한 피부가 거울 속으로 드러났다.
라이트 그레이 색상의 수트. 그는 아직 물기가 머금고 있는 손으로 주름이 잡힌 부분을 조심스럽게 폈다.
이윽고 전화가 울렸다.
-김 실장님. 본부장님 들어오셨습니다.
“어. 알았어. 곧 간다고 말씀드려.”
김우진 실장은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양옆으로는 커다란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가 키워낸 아티스트들. 그리고 플라지아의 멤버들이 화사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을 지나서 본부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 그래. 김 실장. 들어와.”
전부터 몇 차례 얘기가 오간 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자 온 것이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분명한 모습으로 출발선을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전에 올려 드린 사업계획서 관련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 그거? 결재 떨어졌잖아.”
“다음 달부터 시작할 겁니다.”
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용 테이블 앞으로 몸을 옮겼다. 김 실장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았다.
“팀을 새로 만드는 거?”
“예.”
“이제 시작하려고?”
“예. 다음 달부터입니다.”
* * *
“팀을 새로 만들겠다니…….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땐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어.”
전무는 다시 잔을 비웠다. 말술이었다. 따라가다간 내 쪽에서 흐트러질 것 같았다.
“비츠걸스가 잘되고 있는데 새 팀 만드는 걸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무슨 의도로 그런 얘길 한 거지?”
입가에 미소를 만들고서, 전무는 내 눈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나도 잔을 비웠다.
“당장 팀을 만들어서 활동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길게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비츠걸스를 키우는 일에만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비츠걸스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고 싶습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무는 아무 말 없이 나와 계속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눈은 ‘그런데?’ 하고 묻고 있었다.
“내후년 즈음에는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입니다.”
“잘 풀린다면 그렇게 되겠지. 요즘 추세가 그러니까.”
얼마 전에는 뜬금없이 비츠걸스의 네버마인드가 베트남 차트에 오르기도 했었다. 가시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순위가 높진 않았고 금방 차트아웃 해버렸지만, 거기에 의미 정도는 둘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런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도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청신호였다.
“비츠걸스가 해외로 진출할 즈음 해서, 국내에 데뷔시킬 팀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걸 지금부터 준비하겠다?”
“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어떤 팀을?”
“걸그룹을 만들 겁니다.”
나도 내 손으로 직접 팀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인혁이 자기 애들을 데리고 팀을 만드는 모습을 보니 내 안에 애써 잠재우고 있는 욕망이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고 있었다.
-당신이 가르치는 네 명의 아이들을 위해서 이 능력을 먼저 사용하세요. 성급한 욕심이 당신의 앞길을 막을까 봐 제한을 거는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되지 않을까? 활동 영역을 해외로 늘릴 만큼 팀이 키워놓은 뒤라면.
“왜? 여자애들 다루는 게 편해?”
“보이그룹 쪽은 김인혁 이사가 하고 있으니까요. 겹치는 건 회사의 손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자 전무는 희미하게 머금고 있던 미소를 터뜨려 버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럼 자네는 그 정도로 한계를 정하고 있었던 건가.”
“예?”
“인혁이가 만드는 팀 말이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솔직히 그게 내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 신입 연습생 리쿠르트에 예산을 가져가겠다는 것이었군.”
“맞습니다.”
“그럼 시간은 얼마나 보고 있는데?”
“사람을 찾는 일인 만큼 그건 예상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네가 새로 만드는 팀을 데뷔시키는 것 말이야.”
웃음이 잦아들면서 전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2년 보고 있습니다.”
“2년 뒤?”
“예. 지금부터 멤버를 모으고 트레이닝을 시켜서 2년 뒤에 데뷔시킬 겁니다. 그리고 비츠걸스는 그 2년 안에 해외로 나갈 수 있을 만큼 키우겠습니다.”
“2년 뒤라…….”
* * *
“왜 2년 뒤인 거지?”
본부장이 물었다. 김우진 실장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내비치는 것이니까.
“너무 길지 않아? 플라지아는 멤버를 조직해서 1년 정도밖에 연습을 안 시켰어.”
“연습생을 새로 뽑을 겁니다. 지금 인력으로는 제가 원하는 그림이 안 나옵니다.”
“그럼 새로 사람 뽑아서 가르치는 것에 2년을 쓰겠다? 이건 너무 짧은데?”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기까지 연습생들은 평균적으로 5년 정도 트레이닝을 받는다는 통계가 있었다.
갑자기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서, 다음 달에 데뷔하는 팀에 곧바로 합류하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그런 케이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고 해도 마치 전설처럼 취급될 정도였다.
하지만 고작 2년.
이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김우진 실장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의 감각이, 마치 야생 속에서 먹이를 찾아내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 자신이 책임지고 연습생 한 명을 가수로 키워내는 것에 걸리는 시간……. 그것을 최소한으로 잡으면 2년이었다.
“제 나름대로 시장을 분석해 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예측해 봤을 때 내린 결론입니다.”
“제안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던데?”
“수치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용이라서 누락시켰습니다.”
“그래?”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내고 싶다. 수많은 대중들의 우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 자신은 될 수 없었지만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얻었으니까.
“이사회는 김 실장은 지지해 주고 있어.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고.”
“본부장님께서 늘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아냐. 자네가 실패 없이 잘해왔기 때문이지.”
2년 뒤,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 그것이 김우진의 목표였다.
* * *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네는 실패가 없었어. 적중률 백 퍼센트라고 내가 늘 칭찬하잖아. 최인환 건도 그래. 난 솔직히 이번에는 실패할 줄 알았지. 하지만 그런 우려도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어.”
전무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나도 시야가 조금씩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고민 많이 했어.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순리 같지만……. 그랬다간 자네를 놓쳐 버릴 것 같았거든.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그때의 결정은 옳았어.”
“감사합니다.”
“자네가 뭘 하든 지원해 주기로 결심했지. 열심히 해봐.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밑그림이 그려지면 나에게도 좀 보여주고.”
“예. 그러겠습니다.”
취기 때문에 말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최고의 팀을 만들어내겠다는 포부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 *
비츠걸스에게 있어서 연말 일정은 지옥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기억해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방송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행사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또 어디에 갔었더라.
자고 일어나니까 무대에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고, 어딘지도 모른 채 습관처럼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여기가 어디지? 우리를 부른 건 뭐 하는 사람들이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얼굴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아닌 남들이 얼굴을 만져주는 것에 더욱 익숙해졌다.
그저 껍질을 가지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남들이 예쁘게 만져준 껍질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그것을 통해 노래를 부른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시간은 무엇엔가 쫓기는 것처럼 너무 빨리 달아나고 있었다.
뒷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두 언니는 잠에 빠져 버렸다. 입을 헤 벌리고, 뺨으로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은 채 모자란 잠을 간신히 채워가고 있었다.
“김다은.”
“응?”
“너는 안 자?”
“난 올 때 많이 자서.”
막내 라인 두 명은 깨어 있었다.
창밖으로 금요일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속도로 옆으로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층층마다, 저 창문마다 각자의 삶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금요일 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삶들. 그럼 이 승합차 안의 삶은 어떤 것인지.
“그저께 선생님한테 내가 말씀드렸어.”
“어? 진짜?”
“미안해. 너한테 말씀드리라고 시켜서.”
“아냐. 근데 내가 말하니까 하나도 안 먹힘. 아 진짜 쌤은 은근히 꼰대 같은 게 있다니까. 근데 네가 말하니까 뭐래?”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진짜?”
“남자애들은 안 하시겠대.”
“아 뭐야. 내가 말할 땐 막 짜증 내더니.”
“그런 게 아니라……. 두 번 부탁하니까 들어주신 거야. 순서가 바뀌었다면 네가 말했을 때 들어주셨을 거야.”
“그런 거야? 난 또.”
다은이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가 쌤한테 그런 말 해도 되는 건 맞지?”
“우리도 이제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팀이 됐잖아. 그런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응.”
“근데 쌤이 다른 팀 맡으면 안 되는 것도 맞는 거지?”
연화는 철없이 마구 떠들어 대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는지 뒤를 바라보았다. 언니들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되니까.”
“옛날?”
“우리가 막 데뷔했을 때.”
“아, 그때……. 난 나름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특히 그 능력. 이 회사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음악적인 감각.
이걸 독차지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 그래서 이 능력이 다른 사람을 향할 때 마음이 그렇게나 불편했던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곤 했다. 연화가 바라는 것은 오직 가수로 좀 더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이제 이틀 뒤면 스무 살.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은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서툰 것이 많은 것도. 오직 자신의 주변만을 바라보는 시야마저도.
“다은아.”
“어?”
“내년에도 잘해보자.”
“아, 그래.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