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23
3장 연습생 오디션
기획팀장은 나에게 컨셉이 뭐냐고 물었다.
“컨셉이요?”
“이제는 신인이 아니에요. 2집 앨범입니다. 컨셉을 확실하게 잡지 않으면 1집 만큼의 성과도 거두기 어려울 거예요.”
좋은 곡을 만들어주는 것.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본부장님 계획은, 이 곡을 타이틀로 밀겠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무조건 이 곡으로 갑니다.”
“그럼 컨셉을 곡에 맞춰야겠네요.”
거꾸로 가는 것이었다. 컨셉을 정한 뒤 거기에 맞는 곡을 고르는 것이 아니고, 곡의 느낌을 전체적으로 확장시켜야 했다.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몽환적인 느낌, 그러면서도 뚜렷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구조.
컨셉이 정해지면 의상과 메이크업도 거기에 따라간다. 무대 구성과 안무 등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츠걸스의 경쟁력이라면 애들이 네 명 다 길쭉길쭉하다는 것이고, 개인 실력으로 빠지는 멤버가 없어서 퍼포먼스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이번 곡의 분위기도 그렇고, 이제는 좀 공격적으로 가야 돼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들었다. 공격적으로 가자는 것은 섹시한 포인트를 두자는 것인데.
“본부장님이 그런 쪽으로 가는 걸 싫어하시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제 막내 라인 애들도 성인이 됐으니 공격적으로 가는 걸 생각해 보세요.”
“아직 애기들이에요.”
그런 말을 했더니 기획팀장은 또다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본부장님하고 연습할 때는 애기들일지 모르겠지만 무대에서는 안 그래요. 곡은 되게 야한 걸로 가져오셨으면서 말씀은 그렇게 하시니, 좀 이상하네요.”
“야해요? 이 곡이?”
“처음 들었을 때부터 딱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곡이 섹시하게 잘 빠졌어요. 걸크 이런 쪽은 절대 아니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몇 개 없네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 옆으로는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아직은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곡, 하지만 다은이와 연화의 목소리로 가이드가 새로 입혀져서 듣기에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자꾸 들으면 닳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곤 했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진 않았지만.
“저도 그런 쪽 이미지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그게 반대하시는 거잖아요.”
“해야 된다면 해야겠죠.”
“우리는 상업 음악을 하는 거잖아요. 팔릴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면 그쪽을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합니다. 결정은 본부장님께서 하시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곡을 들으면서 무대를 상상해 봤다. 확실히 큐티한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섹시 컨셉으로 가기는 싫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하곤 한다. 섹시 컨셉은 독이 든 성배와 같다고.
성공 확률을 높여주는 만큼 이미지의 소모가 심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 애들에게는 좀 더 우아하고 세련된 것을 씌워주고 싶은데.
“새로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더 예뻐져야 해요. 생명력이라는 게 결국은 언제까지 더 예뻐질 수 있고, 질리지 않는 신선함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거잖아요. 아직 우리 애들은 생명력이 한참 남아 있어요. 잘 활용해 보세요.”
* * *
GH 엔터테인먼트의 에피아는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이 세상을 마구 씹어 먹는 듯했다.
아니, 괴물에 비유하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긴 했지만.
9인 9색을 표방하는 만큼 다양한 매력이 한 그룹 안에 있었다.
멤버 구성부터 컨셉까지 역시나 대형 기획사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차트 1위, 음방 1위 같은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휩쓸었다.
주간 1위, 월간 1위 전부 차지해 버리고, 누적 수치라고 할 수 있는 팬클럽 회원 수도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의 강점이라면 충분한 인재풀에서 만들어지는 기획력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영업력이었다.
GH 엔터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에피아 멤버들을 온갖 공중파 예능에 모조리 꽂아 넣으며 적극적으로 대중들에게 노출시켰다.
조금 과장 보태서 얘기하면, TV를 틀면 거기에 에피아가 있었다.
홍보 기사도 연일 쏟아지고 있었고, 극성스러운 팬들이 점점 뭉치자 이들을 통해 팬덤이 커나가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좋은 인재를 영입하고, 그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컨셉을 입혀주고, 엄청난 영업력으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노출시키니.
이건 뭐 따라 할래야 따라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팬클럽에서는 벌써 투정 어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피야 요즘 왜 이렇게 잘나가지. 난 별론데.
-애들 와꾸만 봐도 우리 빛걸이 훨씬 괜찮음
└와꾸? 물건입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ㅈㅅ
-비주얼은 연화 한 명만 내보내도 쟤네들 다 발라 버려요. 라이브 실력도 차이가 크죠.
-중소돌의 한계인가.
중소돌의 한계?
댓글에 폭행당한다는 게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멤버들의 재능은 대형 기획사 못지않지만, 회사가 못 키운다…… 꼭 이런 뜻으로 들려서.
어쨌든 아이돌 그룹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은 대형 기획사와 중소 기획사의 차이가 생각 이상으로 컸고.
아이돌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대형 기획사로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소 기획사에서 어설프게 데뷔할 바엔 차라리 꿈을 접어버리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그런데…… 왜 저희 회사에 지원하신 거죠?”
신입 연습생을 모집하는 2차 현장 오디션. 거기서 이런 말을 내뱉게 하는 지원자가 있었다.
아니, 정말로 왜 여기에 지원한 거지? 큰 데로 가지 않고?
* * *
‘유은설’이라는 아이였다. 열여덟 살.
1차 온라인 오디션에서는 간신히 합격했다.
보내온 영상은 노래를 부르는 부분 2분가량, 그리고 춤을 추는 부분이 30초 정도였다.
노래는 무난한 정도였다. 타고난 성대가 강하지 않아서 보컬 라인 쪽으로 키울 만한 역량은 되지 못했고, 그래도 가지고 있는 톤이 예뻐서 잘 키운다면 1인분 정도는 하지 않을까 기대해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노래가 끝난 뒤 댄스 실력을 보여주었는데, ‘이거 얼마 전에 배운 거예요. 한번 해볼게요.’ 하고 음악 없이 혼자 팔다리를 흔드는 것이 전부였다.
춤인지, 무술을 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되는 그런 것이었다.
1차 심사를 맡았던 나와 신인개발팀장의 평가는 이랬다.
나 – 가수가 되기에는 부족한 가창력. 끼가 보이지도 않음. 불합격.
신인팀장 – 비주얼이 괜찮으니까 현장에서 한번 보죠? 합격.
1 대 1이었지만.
둘 중에서 발언권이 강한 것은 내 쪽이었으므로 유은설은 사실 1차에서 불합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인개발팀장은 나와는 다른 쪽으로 보고 있었다.
“본부장님, 얘 마스크는 진짜 괜찮은 거예요. 폰으로 찍어서 이 정도로 담아낼 수 있는 얼굴이라면 카메라도 잘 받습니다.”
“외모만 보고 뽑자는 말씀이네요?”
“팀에 이 정도 비주얼 멤버는 있어야 하잖아요. 실력은 좀 부족하더라도요.”
“…….”
“얼굴 예쁜 애가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케이스는 연화밖에 없어요. 다른 팀들 보세요. 그런 애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나 강하게 집착하길래 나도 그만 합격을 줘버렸다.
그랬었는데.
현장에서 마주한 유은설은 신인팀장의 말대로 독보적인 비주얼을 자랑했다.
탑급 여배우들 사이에 있어도 밀리지 않는다는 연화만큼 뚜렷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개성이 있으면서도 시선을 붙잡는 오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순해 보이고, 어떻게 보이면 요염해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깜찍해 보이기도 하고.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표정이 바뀔 때마다 눈빛 또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 버리는 듯했다.
“유은설 씨. 그럼 시작해 보세요.”
그녀가 들어오자 심사위원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비주얼에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니 기대치도 그만큼 올라간 것이었다.
나하고 신인팀장은 이미 영상을 접했기에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인혁이와 매니저 1팀장.
나와 신인팀장을 포함해서 이렇게 네 명이 현장 오디션의 심사를 보고 있었다.
“그럼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연습실에서 무반주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유은설은 비츠걸스의 배드 보이를 선택했다.
네 명이 불러야 하는 걸 혼자서 부르기에 호흡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가지고 있는 성량의 한계 때문에 고음은 억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노래만 보면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 줄 수 있으려나.
비주얼에서 50점은 먹고 들어갔기에 총점은 높겠지만.
“잘 들었습니다.”
인혁이와 1팀장의 얼굴을 슬쩍 보니, 만족스럽지는 못한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저런 노래를 듣고 만족스러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 그러면 댄스 보죠.”
안무 심사는 준비된 음악을 틀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이미 접했듯이 춤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팔다리가 길어서 선은 예쁘게 나왔지만 느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쁘장한 얼굴만큼이나 몸매의 균형도 잘 잡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유은설의 현장 오디션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2차 심사는 이렇게 두 가지가 전부였지만, 그걸로는 판단을 하기가 어려울 때 즉석에서 추가적인 요구를 할 때도 있었다.
다른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는가 하면, 방금 했던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해보라는 등, 참가자들의 재능을 찾아내기 위해서 충분한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은설에게는 노래를 더 시켜볼 이유가 없었다. 대신 엉뚱한 질문이 오갔다.
“유은설 씨. 여기 어머니 성함이 김진희 씨라고 되어 있는데…….”
“어? 김진희?”
“혹시 영화배우 김진희 씨 아닙니까?”
김진희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배우였다. 내가 꼬맹이였을 적에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네. 맞아요.”
“아, 그래요?”
저 사람이 김진희의 딸이라고? 이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1차 심사 때 간단한 이력서를 함께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부모님의 이름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말 그대로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 정도를 요구한 것이라서.
“그러고 보니 닮았네.”
“와, 정말 김진희 씨 젊었을 때랑 비슷해.”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맹활약하던 여배우였다.
트로이카로 다른 여배우들과 함께 묶이곤 했지만 김진희 씨는 차별화되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청순하면서도, 어딘가 퇴폐적이면서 반항적인 이미지까지 가지고 있는, 그런 배우였다.
한때는 신드롬을 일으키며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람이었다.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는 연일 기사에서 다루며 난리가 나기도 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결혼!
“아니, 잠깐만요. 김진희 씨의 따님이라면…… 혹시 아버지가 유성그룹의 유장훈 부회장님 아닙니까?”
“아, 맞아요. 우리 아빠예요.”
탑을 찍고 있던 여배우 김진희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그 대상은 놀랍게도 유성그룹의 차남이었다. 재계서열 2위의 그 유성그룹.
심사를 보던 네 명의 얼굴은 잠시 굳어졌고, 우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유성그룹의 딸이 아이돌 오디션을 보러 왔다고?
“저 혹시…… 지금 오디션 보는 거, 부모님 허락을 받고 오신 건가요?”
“그럼요.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엄격하기로 소문난 그 재벌가, 게다가 장래에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여기엔 왜?
게다가 우리 회사를 통째로 사버릴 수도 있는 집안인데.
‘딸! 몬스터 뮤직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빠가 그 회사 사줄까?’
이래야 정상인 거 아닌가.
“그래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디션 결과는 다음 주에 개별적으로 통보해드릴게요.”
“예.”
“그런데…… 왜 저희 회사에 지원하신 거죠?”
“아, 저요? 저는 뭐…… 비츠걸스 같은 팀에 들어가고 싶어요.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 * *
네 명의 심사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1팀장 – 유성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합격
김인혁 – 그게 꼭 좋은 건 아닙니다. 잘못하면 연습생한테 우리 회사가 먹힐 수 있어요.
신인팀장 – 마케팅 쪽으로는 엄청나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본인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홍보 기사를 계속 낼 수 있는 소재예요.
남은 건 내 의견이었는데…… 나도 합격을 주었다.
현장에서 직접 보니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배경을 차치하고 인물 자체만 보면 그랬다.
채아가 합류했으니 보컬 라인은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나머지 멤버의 보컬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밸런스만 맞출 수 있다면 상관없는 셈이었다.
1차 오디션 때는 실력 부족으로 불합격을 줬지만, 2차 때는 마음이 바뀌었다.
비주얼 라인으로 들어온다면 괜찮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었다.
비츠걸스만큼 실력파 걸그룹이라는 말을 들을 순 없겠지만.
그렇게 합격이 정해진 뒤, 신인팀장과 유은설은 이런 통화를 나누었다.
“유은설 씨. 저희 신입 연습생 모집에 합격하셨습니다.”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번 주 안으로 회사 방문하셔서 연습생 계약을 맺으면 되구요, 아직 미성년자이시니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회사로 오시면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럼 회사로 가면 되는 거죠?
“예. 방문해 주세요.”
-회사가 어딘데요?
“예?”
-회사로 찾아오라면서요?
“아…… 그저께 오디션 봤던 곳으로 오시면 돼요.”
-예? 그게 회사였어요?
“…….”
-헐……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거기가 회사라구요?
나중에야 들은 얘긴데, 앞으로 가혹한 길이 열릴 것이니 각오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로, 일부러 허름한 곳으로 부른 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 곳이 정말 회사일 줄은 몰랐다고.
* * *
연습실 안으로 지민이가 들어왔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하긴 저 녀석, 이런 오디션은 처음일 거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민이라고 합니다.”
부트컷 청바지에 스트라이프 티셔츠. 무난한 핏이었다.
나하고 아는 척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뒀더니 내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그래도 힐끗힐끗, 자기도 모르게 내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요. 노래 들어볼까요?”
“예.”
지민이는 이번에 발라드곡을 선택했다.
긴장한 걸 감출 수 없다는 듯이 첫 소절은 음정마저 불안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끝까지 불렀다.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잘 묻어 나왔고, 기술적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를 해도 충분히 합격권이라고 할 만했다.
“노래 잘하네요.”
인혁이가 그렇게 말해주자 지민이는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혼자 연습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배웠나요?”
“학원 다녔어요.”
“아, 학원…… 혹시 어딜 다녔지요?”
“그건…….”
지민이는 난처한 듯 이마를 긁었다.
“말해줄 수 없어요?”
“예.”
“……?”
“우리 선생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이요?”
“여기 와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구요.”
“여기 와서……?”
내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변해가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지민 씨, 광명에 사시네요?”
“맞아요!”
“그 학원…… 작년에 없어졌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더니 인혁이는 내 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말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런 사정이 있는 거겠죠.”
다음으로는 댄스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나는 새로운 팀을 구상하면서, 안무의 비중은 조금 낮게 두는 편이었다.
비츠걸스의 경우는 안무 실력이 출중했다. 그중에서 선하는 손에 꼽히는 실력이었고, 연습 벌레인 연화도 높은 수준의 안무 실력을 보여주곤 했다.
남은 두 멤버가 조금 처지는 편이었지만 선하와 연화가 확실하게 중심을 잡고 있으니 무대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 수준은 꽤 높은 편이었다.
우르르 나와서 군무를 보여주는 다른 팀들에 비해, 고작 네 명이 채우는 무대였지만 꽉 차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정예 멤버가 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새로 구상하는 팀이 그 정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었는데.
“오오! 잘하는데?”
“안무도 따로 배운 건가요?”
“아뇨…….”
격한 동작을 소화해낸 지민이는 헥헥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답했다.
“안 배웠어요? 그럼 혼자 익힌 거예요?”
“네.”
얼마나 힘들었는지, 혀까지 낼름 내밀며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그래요.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꾸벅 인사를 하고 지민이가 나가자, 네 명의 심사위원은 각자의 평가를 말해주었다.
“노래도 저 정도면 평균 이상이고, 무엇보다 안무 실력이 대단하네요.”
“춤에 느낌이 담겨 있어.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자기가 뭘 표현하고 싶은지 뚜렷하게 보이는 애가 있고, 그저 동작만 소화해내는 애가 있거든. 그런데 쟤는 표현하려는 게 분명해.”
이 정도인 줄은 나도 몰랐었다.
온라인 오디션 때도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만 달랑 보내왔기에 춤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저 몸치만 아니기를 바랐는데.
“얘는 무조건 합격.”
그렇게 지민이는 몬스터 뮤직의 연습생이 되었다.
* * *
오디션을 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
“한 번만 다시 해보면 안 돼요?”
두 손을 모으고 통사정을 하는 지원자도 있었다.
“벌써 다섯 번이나 하셨잖아요.”
“아니, 근데…… 제가 진짜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잘하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안 돼요.”
“그래요. 한 번 더 해보세요. 기회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더 해보겠다면서 시간을 끄는 경우는 정말 많았다.
아마 본인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심사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니, 이대로 돌아가면 떨어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아니, 저 진짜 컨디션이 지금 안 좋아서…… 동영상 보셨잖아요. 제가 이거보단 더 잘하거든요.”
“영상하고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요.”
“저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이거 꼭 붙어야 되거든요.”
“알았어요. 그럼 한 번만 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온라인 오디션 때에도 간신히 합격한 사람이었고, 현장에서 보니 영상보다도 실력이 떨어졌다.
“저 사람은 안 되겠죠?”
“집념은 있는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죠.”
결국 불합격.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 주었다.
채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수수해 보이는 노란 A라인 원피스, 그리고 그 안으로 레깅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헤어 스타일부터가 ‘나 연예인입니다.’ 하고 말을 해주고 있었다.
웨이브를 준 곳이 매일 스타일링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화려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심사를 맡은 직원들도 그녀가 들어오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활동을 하신 경력이 있네요. 프론트 페이지…… 아니, 지금 활동하는 팀 아니에요?”
“두 달 전까지 활동했습니다.”
“두 달 전? 그럼 지금은요?”
“쉬고 있어요.”
“해체된 거예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해체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채아하고, 그리고 파인애플 사장하고도 그동안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더 이상 팀을 유지시킬 수 없어서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힘들게 음원을 발표하고 음방 무대를 잡아서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기대와 반대였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섹시 컨셉을 잡아서 싸구려 행사 무대라도 돌리면 최소한의 돈벌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사정을 모르는 소리였다.
거기에 필요한 의상 비용, 스타일링 비용, 또한 식대와 차비 등의 경비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에 돈이 들어가니 적자를 안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결국 막다른 길에 도착한 파인애플 사장은, 이제 백기를 들어야겠다고 했다.
“그럼 계약 문제는 어떻게 되죠? 아직 그 회사와 계약이 남아 있을 텐데요?”
“여기 오디션에 합격하면 해지해 주신다고 했어요.”
“확실해요?”
“예.”
“나중에 딴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단지 오디션 장소에 채아가 나타났을 뿐이지만 심사를 맡은 직원들을 술렁이고 있었다.
채아에게는 안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3년 전에 데뷔한 팀인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해지해 주면 아무 상관 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쪽 소속이라는 거잖아요?’
‘일단 노래부터 들어보고 생각해 보죠.’
‘예.’
“알겠습니다. 그럼 노래 들어볼게요.”
그리고 채아는 준비해 온 것을 시작했다. 프론트 페이지의 마지막 곡이었다.
반주는 없었지만, 안무까지 함께 소화하며 노래를 들려주었다.
조금은 탁한 듯한 목소리, 성대가 불안정하게 접촉하고 있었지만 거기서 만들어지는 톤이 매력적이었다.
발성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걸 익히는 사람이 있었다. 노래 실력을 타고난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채아가 그랬다. 아마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을 받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힘 있게 쭉쭉 뻗어가는 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울렸다.
그래. 이거야, 이거. 듣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게다가 안무를 소화하면서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호흡.
이건 연습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음…… 잘 들었습니다.”
슬쩍 옆을 바라봤다. 아마도 인혁이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원석인지.
하지만 녀석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방금 안무와 함께 노래하셨는데요, 안무를 따로 보여줄 건가요?”
“예. 준비한 게 있습니다.”
“그럼 보여주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댄스에서도 채아는 유감없이 자기 실력을 보여주었다.
난이도가 높은 동작을 부드럽게 소화해냈고, 무엇보다 즐기는 듯 여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요. 잘 봤습니다. 결과는 따로 통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채아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나하고 한 차례 눈이 마주쳤다.
잘했어. 하고 눈빛을 보내주었다.
“잘하는데? 프론트 페이지…… 저런 애가 있었는데 왜 못 뜬 거지?”
1팀장이 먼저 소감을 말해주었다.
“저도 괜찮게 봤어요. 계약 문제 깔끔하게 정리해서 온다면 당연히 받아줘야겠죠.”
신인 팀장도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계속 입을 닫고 있었던 인혁이는 표정이 제법 무거워 보였다.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연습실 구석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채아에 대해 알고 있는 신인팀장은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우선 인혁이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었다.
“괜찮게 봤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인혁이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하는 아이예요.”
“그 정도인가요?”
“오디션 마치고 나가려는 애를 붙잡고 싶을 정도였어요. 행여나 저 문으로 나가 버린 다음에 다시는 안 돌아올까 봐. 그 정도로 엄청난 재능입니다.”
“노래를 잘하긴 하더라고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보여주는 모든 것에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저 친구 몇 살이라고 했죠?”
“스무 살이요.”
“스무 살이면 연화하고 동갑인데, 어쩌면 더 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키우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 * *
현장 오디션에 참가하는 지원자는 모두 56명이었고, 4일에 걸쳐서 오디션을 진행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세 명이었다.
53명이 오디션을 봤고, 우리는 그중에서 다섯 명을 합격시켰다.
지민이와 채아는 합격했고, 재벌집 따님 유은설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가능성이 보이기에 연습생으로 받아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었다.
“박 본.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커피 타임을 가지는 동안 인혁이가 다가와서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티 내진 말라고. 애들이 노래 마치자마자 네 얼굴부터 보더라.”
실망스러운 빛이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기대했던 것보다 인재가 없어. 영상 봤을 땐 그래도 열 명 정도는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뽑힌 애들은 괜찮던데. 그 두 명은 네가 데리고 온 거지? 2년 뒤에 데뷔시킨다는 그 팀에 넣을 애들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하다 왔다는 애는 진짜 괜찮더라. 걔 놓친 회사에서는 진짜 아쉬울 것 같은데.”
할 말이 참 많았지만 이 얘기를 하려면 시간이 부족했기에 다음으로 미뤘다.
“팀 구성은 몇 명으로 할 건데?”
“다섯 명에서 여섯 명 정도.”
“그 정도라면…… 아직 한참 더 구해야겠네. 이제 세 명 모은 거니.”
“세 명?”
“재벌집 아가씨도 네 플랜에는 넣어야 할 거 아냐.”
“두고 봐야지. 아직 실력은 부족하니까.”
“걔는 무조건 넣어야 돼. 화제성만 해도 데뷔하기 전부터 먹고 들어가는 건데.”
물론 비주얼이 되니까 팀의 한 조각으로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할 것 같았다.
“들어가자. 아직 세 명 남았으니까 그중에 깜짝 놀랄 만한 인재가 있을지도 모르지.”
기대는 별로 되지 않았다. 남은 세 명이 어떤 애들인지, 영상으로 먼저 접했기에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굳이 현장 심사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본은 된다 싶은 애들을 남겨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조금 놀라웠다.
엄청난 재능을 만났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이가 있었다.
* * *
그녀는 자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예음. 이름에 미음 받침이 두 개나 있어서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을 소개할 때면 언제나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해줘야 했다.
심. 예. 음. 입니다.
뜻은 더 맘에 들지 않았다. 예음. ‘예수님의 음악’.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게 뭐야?’ 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럼 내 이름 누가 지은 건데?’
‘엄마랑 아빠랑 같이 만들었지.’
‘그런데 뜻이 왜 이래? 우리 집 교회 안 다니잖아.’
‘옛날엔 열심히 다녔어. 너 가졌을 때에는.’
그렇다고 그녀의 사상이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종교색을 띠는 이름은 별로였다.
나중에 이름을 꼭 바꿔야지, 하고 생각을 하곤 했지만.
뜻이야 갖다 붙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술과 음악. 뭐 이러면 되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심. 예. 음. 이라고 합니다.”
“신예은 씨?”
“심 씨입니다. 심청이 할 때 심이요.”
“아, 심!”
“그리고 은이 아니고 음입니다. 음악 할 때 음이요.”
“미안합니다. 심예음 씨. 맞죠?”
“네.”
오디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름을 설명하는 것에 이골이 날 정도였다.
“이사님, 여기 이름 써 있는데 안 보시고 뭐하세요?”
“아, 여기 써 있구나.”
장난을 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사람은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프로듀서. 대중적인 감각이 좋다고 하던데.
하지만 심예음에게 있어서 그런 감각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음악을 많이 팔아 대는 능력일 뿐이지.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기타는 연주하려고 가져오신 거예요?”
“예.”
“그럼 노래 들어볼게요.”
심예음은 의자에 앉아 허벅지 위에 기타를 올려주고 줄을 튕겨보았다. 부드러운 스트링 사운드가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인트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은 평가받는 게 아니야. 함께 즐기는 거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던 그녀가 평가를 받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거부감이 앞섰다. 다들 수영복을 입고 있는 곳에서 혼자 평상복을 입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함께 음악을 해왔던 동료는 그녀가 연예기획사에 오디션을 보러 간다고 하자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너 진짜 그런 데 가서 음악하게?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돈을 벌기 위해서? 색다른 경험을 해보기 위해?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한 말이라서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노골적으로 돈 되는 음악만 하는 기획사에는 갈 수 없었고, 그나마 생각해 본 곳이 몬스터 뮤직이었다. 싱어송라이터가 활동하기에는 적합한 것 같아서.
“잘 들었습니다.”
어떻게 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감정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긴장을 했는지 이마 위로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럼 다음으로 댄스를 볼게요.”
“저는 춤을 안 춥니다.”
“예?”
“춤은 안 춰요. 오직 노래만 합니다.”
당당하게 말했더니 심사위원들은 당황하는 빛을 내비친다.
“모집 요강 안 보셨나요? 저희는 노래와 안무를 심사하기로 되어 있는데요.”
“보기는 했는데 그래도 전 춤은 안 춰요. 그것 때문에 떨어뜨리신다면 할 말 없구요.”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
아이돌만 뽑는 회사라면 이쪽에서 알아서 나가줄 생각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 * *
영상에서 봤을 때에도 묘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였다.
그때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귀에 쏙 들어올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소설의 프롤로그라고 치면, 글을 아주 잘 쓰는 것은 아니었고 소재가 기발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다음 편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그런 소설과 비슷했다.
1차 오디션에서 합격을 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계속 읽을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다음 편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괜찮아요. 춤은 안 춰도 돼요.”
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방금 부르신 곡은 자작곡인가요?”
“예.”
제출한 이력서가 흥미로웠다. 나이는 스무 살. 어쿠스틱 듀오를 결성해서 인디씬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저는 제가 만든 곡만 부른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소개도 눈에 띄었다.
“1차 오디션 때 보내온 영상도 자작곡을 노래한 건가요?”
“예.”
갈색빛의 숏컷, 수수한 스트레이트 핏의 청바지. 그리고 커다란 두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태도 또한 내내 당당했다.
“다른 곡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요청했더니 심예음은 다시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시작했다.
평범한 목소리. 하지만 꾸밈이 없어서인지 진솔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곡이 괜찮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목소리 때문인가. 묘하게 끌리는 음악이었다.
많이 팔 수 있는 음악은 아니었지만 이 느낌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푹 빠질 수 있을 듯한.
“잘 들었습니다.”
노래를 마친 후에도 다른 지원자들과는 달리 움츠러드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력서에 적으신 것도 그렇고, 아까 하신 말씀도 그렇고, 댄스 그룹 쪽을 희망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네요?”
“그런 건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럼 솔로를 희망하는 건가요?”
“팀이라도 상관은 없는데, 저는 제가 만든 음악을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돌 그룹은 절대 안 하시겠네요?”
“아이돌 그룹이요? 그런 건 할 생각이 없어요. 진짜 싫어요.”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추구하는 게 분명한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아이돌 멤버만 모집하는 오디션은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아무 기대 없이 지켜본 것이었지만 수확이 있었다.
나는 심예음에게 합격을 주었다. 함께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평은 엇갈렸지만 인혁이도 합격 쪽에 무게를 실어주었기에 최종 결과는 합격이었다.
음악적으로 고집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과연 이 합격을 수긍하고 우리 회사로 들어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 * *
“본부장님은 눈에 불을 켜고 보시네요.”
오디션이 모두 끝난 후,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1팀장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제가 직접 가르칠 애들이니까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오디션을 기점으로 해서,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심사는 원래 나와 인혁이, 그리고 신인팀장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장 경험이 풍부한 매니저 쪽에서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직접 요청을 했고, 그 대상으로 1팀장을 거론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고맙다는 뉘앙스를 은근히 흘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무대의 뒤편에서, 가수를 서포트하며 키워내는 재미로 일을 하는 사람이니, 그런 스타를 발굴해낼 수 있는 기회라면 그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재능 있는 사람을 한 명의 가수로 키워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제가 느낀 바로는, 본부장님은 팔리는 음악을 추구하시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에 봤던 그 애는 전혀 그런 쪽이 아니란 말이에요.”
“심예음이라는 아이요?”
“제가 아까 왜 반대했냐면, 혼자 무대에 세울 만큼 카리스마가 강하진 않았어요. 그럼 팀을 짜줘야 하는 건데, 저렇게 자기주장이 강하면 그것도 힘들거든요. 애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를 담당했던 매니저이니, 어쩌면 솔로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그가 더 정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최고의 여자 솔로 가수를 키워낸 프로듀서는 그 말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아직 스무 살이잖아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음악적인 가치관이 변할 나이입니다.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안 추겠다던 춤을 제일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저도 한 명 알거든요. 락발라드 아니면 절대 안 부를 거고, 죽어도 팀은 안 한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 나를 넌지시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야? 내 얘기야?”
“기억 안 나냐? 죽어도 팀은 안 할 거니까 쟤네 셋만 내보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지.”
내가 그랬었나?
“재수 없어서 한 대 치고 싶었거든.”
“오래된 일이라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어. 너는 그때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을 거라서 기억 못 하겠지만.”
그때 신인팀장이 끼어들면서 “그때는 본부장님이 이사님보다 더 잘나가셨나 봐요?” 하고 눈치 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얘가 우리 연습생 중에서 에이스였어요. 제가 얘보다 몇 달 늦게 들어왔었는데, 오자마자 이런 말을 들었어요. ‘쟤가 여기서 노래를 제일 잘하는 애야. 이 회사에서 활동하는 애들 중에도 쟤보다 잘하는 애가 없어.’ 하고요.”
정말로 그랬었나?
기억이란 건 각자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남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까마득한 얘기를 이 녀석은 이렇게 생생하게 말하는 걸 보니까.
“얘는 데뷔가 확실한 연습생이었죠. 다들 얘랑 친해지고 싶어서 난리였고…….”
“이사님도 그러셨어요?”
“아뇨. 저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나도 저 정도는 부를 수 있는데 왜 쟤만 밀어주는 거야? 하고 투덜댔죠. 그런 와중에 자기는 팀 하기 싫다면서 뻐기는 걸 보고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었는데.”
오랜 추억을 이야기하듯 웃으면서 오간 대화였지만,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느라 애쓰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네.
“이러지 말고, 나가면서 우리끼리 소주 한 잔 어때요?”
1팀장은 분위기를 그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일요일이었다.
다음 날 출근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도 살짝 들뜨는 기분을 안고 있었기에 술 한 잔 하는 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뇨. 저는 일찍 들어갈 겁니다.”
“그래요? 우리 김 이사님이 빠지면 하나 마나인데.”
“죄송해요. 오늘은 좀 피곤합니다.”
치킨 먹자고 회유를 해봐도 녀석은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술자리는 나중으로 미뤄졌다. 나중이라고 해서 언제 이런 자리가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인혁이와 내 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까지 함께 걸어왔다.
삑, 삑. 각자의 차를 열고서 떠날 준비를 했다.
“저 사람은 좀 불편해.”
운전석 문을 열고서,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진 않은 채로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1팀장?”
“어.”
인혁이는 방금 1팀장의 차가 빠져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그 자리에 오를 때, 나이도 어리지 않은 편이었고 실적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였지. 하지만 난 아니었어. 그때 나는 어렸고, 완전히 초짜였거든.”
이번 추억은 그다지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듯이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 전까지도 많은 감정의 대립을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를 겪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았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고.”
어쩌면 내가 이제까지 이 녀석의 겉모습만을 쫓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는 있었던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기도 했었다.
회사 초기에, 유아연을 성공시킨 공을 가져가기 위해 어린 프로듀서와 창립 멤버인 매니저가 기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사장과 인혁이의 업무적인 대립, 거기에 전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등, 나 또한 이 작은 회사에서도 그렇게나 많은 정치적인 갈등이 있는 것을 보며 혀를 찬 적이 있었다.
그 중심에서 인혁이는 어린 나이에 많은 걸 감당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알고는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전해주는 말의 느낌은 그저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마치 내 일처럼 여기게 해주었다.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
그리고 그 시절, 나에게 이따금 걸려오는 녀석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랑을 하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을 때, 높은 곳에서 작곡가로 자기 자리를 찾은 이 녀석은 자신의 지난 열등감을 이렇게 해소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나는 이만큼 성공했어! 네가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런 말인 줄 알았었는데.
“어휴, 다 지난 일이지. 예전에 안 좋은 일이 좀 있어서 아직까지 저 사람이 불편한 거야. 특히 술자리에선 더 그럴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힘들어서 나를 찾은 거였구나.
“지금은 다 풀었어. 맨날 얼굴 보는 사람이니까. 다 지난 일이지.”
그러면서 녀석은 차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라.”
“그래.”
창문이 위로 스르륵 올라오면서 녀석의 퉁퉁한 손을 가리고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괜찮아요. 좋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면 잘된 일이죠.”
김우진은 메인보컬감으로 점찍어둔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가게 된 것이냐고,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궁금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말을 끊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것을 습관처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대답을 원하는 자와 그 대답을 가지고 있는 자. 어느 쪽이 위에 있을 것인지는 굳이 계산해 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실장님. 준비 다 됐습니다.”
“예. 곧 나갈게요.”
부산의 한 문화센터.
이곳에서는 아이즈 컴퍼니 13기 연습생의 공채 오디션이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는 영상으로 응시하는 온라인 오디션이 없었고 지원자들은 곧바로 현장에서 심사를 받았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서울, 다섯 개의 도시에서, 그리고 보컬, 랩, 댄스, 연기, 모델로 분야를 나누어서 심사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그 첫날. 13기 연습생을 선발하는 부산 지역의 오디션이었다.
아이즈 컴퍼니의 이번 연습생 공채 모집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부산에서만 900명가량이 지원했다. 이 중 김우진이 심사하게 될 보컬, 랩, 댄스 분야는 600명이 넘었다.
강당을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로 쓰이고 있는 강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산 지역 오디션은 이틀에 걸쳐서 진행된다. 오늘은 지원번호 1번부터 450번까지. 아침부터 시작하는 오디션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날 것이다.
“실장님 정도면, 한 번 보기만 해도 가능성 있는 애인지 아닌지 딱 보이시죠?”
함께 이동하고 있는 스탭이 물었다.
“아뇨.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도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대단하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내일 데뷔하는 팀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요. 꼭 잘될 것 같은 사람이 실패하기도 하고, 전혀 의외인 곳에서 떠오르는 사람도 있고…… 이런 오디션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이즈 컴퍼니는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쓰고 있었다.
“저희가 연습생을 많이 뽑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죠. 어떤 애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약간의 재능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일단 뽑고 보는 거예요. 계속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그 재능이 꽃을 피우면 데리고 가는 거고,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죠.”
아이즈 컴퍼니의 오디션은 회사의 명성만큼 난이도가 높지 않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다른 곳에서 탈락해도 아이즈에서는 합격했다는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연습생으로만 머물다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 300명 정도 보게 될 건데, 다 잘하면 전부 데리고 가는 거구요. 한 명도 없으면 아무도 합격 못 하는 거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300명 정도가 오디션을 본다면 그중에서 합격하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다섯 명 정도였다. 수백 대 일에 이르는 다른 기획사 오디션에 비해 경쟁률이 낮을 뿐이지, 그래도 아무나 뽑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연습생으로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매년 20명 정도. 회사 안에서는 1군에서 3군까지로 나누어서 따로 관리한다.
“그래도 그 애들을 하나하나 전부 집중해서 보시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어요. 늦은 밤까지 쉬지도 못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이에요.”
김우진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그 과정 중 하나였다.
그러니 겨우 이 정도에 힘들다고 엄살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하나씩 스테이지를 깨고 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어요. 스테이지를 깰 때마다 성취감도 있고, 최종 목적지까지 진행률이 얼마큼 됐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고요.”
“스테이지요?”
“그런 게 있습니다.”
강당을 지나가는 동안 지원자들의 눈이 일제히 김우진 쪽으로 향했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즈 컴퍼니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찾아본 사람이라면 이름 정도나 알고 있을 뿐, 외부에 노출하는 걸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유명세는 적은 편이었다.
지원자들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심사위원 같은 포스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이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겠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심사실로 들어가자 함께 오디션을 지켜볼 프로듀서들과 트레이너들이 미리 와 있었다.
지원자들을 겨냥하겠다는 듯이 작은 카메라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오늘 오디션을 본 사람이 훗날 스타가 된다면 ‘누구누구의 오디션 영상’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보죠. 1번 참가자부터 들어오라고 하세요.”
* * *
이렇게 비유하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채아의 얼굴을 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본 아프리카 아이들’이라는 영상이 떠올랐다.
난민후원단체의 지원을 받아 북미에 정착을 하게 된 아프리카 가족이, 처음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중에서 압권은 어린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눈을 처음 보고는 ‘이게 도대체 뭐지?’ 하고 신기하게 바라보는 얼굴.
그게 갑자기 떠올랐다.
“우와…… 여기가 연습실인 거죠?”
채아의 얼굴이 꼭 그랬다.
요염한 느낌을 담아 팀에서 색기를 담당했던 멤버가, 넓은 연습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감탄하고 있었다.
“설마 연습실 처음 보는 건 아니겠지? 프론트 페이지 때는 어떻게 했는데?”
“안무팀 연습실로 갔었죠. 안무 배우러 가는 김에 저희 연습 시간도 따로 받아내곤 했어요. 그런데 거기는 여기처럼 넓고 깨끗하지 않아요.”
의외로 연습실이 없는 기획사들은 많았다. 파인애플 정도의 작은 곳이라면 그렇게 다른 곳을 대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길 맨날 쓸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니야. 미리 시간을 잡아야지. 우리 회사에는 다른 팀들도 있으니까.”
몬스터 뮤직의 연습실은 세 개였다.
가장 큰 A 연습실. 채아가 구경하고 있는 이곳.
가장 넓은 곳이고 한쪽 벽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어서 안무 연습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B 연습실. A와 비슷한 구성이고 좀 더 작은 곳이었다. 예전에 밴드가 소속되어 있을 때 사용하던 곳이라서 한쪽 구석에 드럼 세트가 아직 남아 있었고,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곳이었다.
C는 보컬 레슨을 위해 음향 장비와 마이킹 시스템이 잘 되어 있었고, 대신 면적은 가장 좁았다. 내가 레슨을 해주는 방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비츠걸스도 연습하고 유아연도 연습하던 곳이란 말이죠?”
“맞아.”
“와…….”
“뭘 그렇게 놀라? 큰 회사 연습실 보면 깜짝 놀라겠다. 탈의실하고 화장실이 붙어 있는 연습실도 있다고.”
“전 그런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회사 안에 휘트니스 룸이 있는 곳도 있어.”
“그런 건 상상도 잘 안 돼요.”
서울 구경하는 시골 아가씨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채아의 곁에서, 은설이는 매의 눈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공산품에 하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검사관처럼.
“선생님, 그런데요. 공기청정기 이거 계속 쓰시는 거예요?”
“그건 왜?”
“안 좋아 보여서…….”
은설이는 유독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제가 다른 거 사와서 여기에 놔둬도 돼요?”
“네가 사온다고?”
“저희 엄마가 그러는데요, 폐는 한 번 손상되면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대요. 그래서 제가 좀 허름한 회사에, 아니, 이게 아니고, 그냥 좀 작은 회사에 가게 되었다고 얘기하니까요 거기 공기청정기를 잘 보라고 하셨어요. 폐 망가지면 안 된다고요.”
은설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서 네가 사온다는 얘기야? 그건 안 돼. 연습생이 회사 물품을 뭐하러 사. 내가 건의해서 좋은 걸로 바꿔보자고 할게.”
“아니에요. 이따 엄마가 오셔서 사줄 거예요.”
“됐다니까.”
누가 재벌가 따님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뭘 사온다고.
“다 구경했으면 나가자. 여기는 너희가 안무 트레이닝을 받을 때 오게 될 거고, 나하고는 C룸에서 레슨하게 될 거야.”
애들을 데리고 C룸을 향해 앞장섰더니 지민이가 곁으로 다가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저 진짜 행복해요. 선생님한테 다시 배울 수 있게 되다니.”
“그게 그렇게 좋아?”
“엄마가 막 저한테 사인 받았던 거 아세요? 우리 집에서 연예인이 나오게 됐다고.”
나한테 배우게 되어서 행복하니까 엄마한테 사인을 해줬다? 오랜만에 지민이의 화법을 접했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예전에 지민이를 처음 만났을 때 이 화법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들뜨지 마. 연습생 중에서 데뷔까지 가는 사람은 극소수야. 그리고 어렵게 데뷔를 하게 되어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선생님이 전에도 말해줬지? 스타가 되기 위해 노래하려고 하지 말라고.”
“알아요.”
어쨌든 이렇게 세 명을 한 조로 묶어서 레슨해 주기로 했다.
내 계획으로는 2년 뒤에 데뷔시킬 애들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공연히 알리지는 않았고, 정식으로 데뷔조가 편성된 것도 아니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명 중 누가 여기서 제외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이 세 명을 중심으로, 여기에서 두 명 내지는 세 명을 더 보강해서 아이돌 그룹을 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발굴해낸 아이들로 팀을 만들고, 내 손으로 직접 키워내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을 만들어내고, 내가 고른 곡으로 무대에 세워주는 것.
그 꿈을 향해 이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아직 미성년자인 은설이와 지민이 부모님이 오셔서, 연습생 계약을 마무리했다.
은설이의 어머니, 한때 충무로를 주름잡았던 대배우 김진희 씨는 여전한 미모를 뽐내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세월을 속일 수 없다는 듯이 중년의 느낌을 담고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나이보다는 훨씬 젊어 보였다.
청순한 느낌과 반항적인 느낌을 함께 가지고 있는 눈은 여전했고, 이제는 재벌가의 사모님답게 귀부인 같은 부티가 온몸에 가득했다.
“반갑습니다. 어머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단지 신입 연습생의 어머니가 회사를 방문한 것이었지만 손동하 사장까지 나와 그녀에게 인사했다.
과거의 스타 배우, 지금은 재벌가의 사모님, 그녀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설이 엄마입니다.”
손동하 사장 정도면 예전에 김진희 씨를 만난 적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초면이라고 했다.
김진희 씨가 활약하던 시기는 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이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이었다. 손동하 사장보다도 더 먼저 연예계에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나누는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은설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일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었다.
김진희 씨는 세 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가 아들이었고, 막내가 은설이었다.
두 아들은 엄격하게 키운 편이었고, 첫째는 외국에서, 그리고 둘째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뭐 보나 마나 경영학을 배우게 하면서 그룹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겠지.
“자기 자리를 잡을 때까지 집안 배경은 숨겨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중소 기획사라고 우리를 무시하는 태도는 없었다. 오히려 우리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하곤 했다.
하지만 은설이의 배경에 대해서는 절대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약 은설이가 똑바로 못하면 가차 없이 내쫓아주세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은설이가 허락을 받고 이곳에 온 건 아닌 듯했다. 자세한 사정까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날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천만 원이 넘는 공기청정기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런 거 세 대를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그날 이후로 연습실의 공기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