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1
1장 몬스터 뮤직의 연습생들(2)
비츠걸스는 베트남 활동을 마치고 컴백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팬카페에서는 쉬지 않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빛걸 어디 갔나요? 돌려주세요ㅜㅜ
-왜 안 나오는 거야! 왜!!
팬카페를 비롯해서 멤버들의 인스타그램에도 꾸준히 베트남 활동 사진이 업데이트 되었다. V LIVE 방송도 꾸준히 했다.
이런 걸 알고 있으면서도 성화를 부리는 것이었다. 국내 활동이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앨범 나오긴 하는 건가요? 박영민 피디님 미국의 누구랑 작업하신다는데.
└저도 걱정되네요. 그거 하면 비츠걸스에는 소홀해지겠죠?
└프로듀서가 너무 능력 있으면 이래서 문제.
└이러다가 박 피디님 미국으로 가서 안 돌아오시면 어떡하죠.
심지어는 이런 얘기도 자주 보였다.
하지만 비츠걸스의 새 앨범 작업은 곧바로 들어간다. 이제 회사도 새 건물에 자리를 잡았고, 해야 할 일은 앨범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는 공식 팬클럽을 창단하고, 가을 즈음에는 비츠걸스의 콘서트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가서 안 돌아오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선생님. 조금만 뒤로요. 너무 앞으로 가셔서 얼굴이 안 나와요.”
채아는 핸드폰으로 구도를 만들어내며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나는 PC 앞에 앉아서 곡 작업을 하는 시늉을 했고, 내 핸드폰을 가져간 채아 쪽에서는 셔터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됐어요!”
그러면서 채아는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근사한 사진을 하나 만든 뒤에 내 인스타그램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저녁 레슨 중에 나온 얘기였다.
요즘에 내 인스타 디엠으로 비츠걸스 팬들이 왜 신곡 안 나오는지 자주 묻는다는 말을 했더니 이런다.
이렇게 곡 작업하는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 좋을 거라고. ‘선생님도 팬관리 하셔야 돼요.’ 하고 말하면서.
“어? 그냥 올리시게요?”
“왜?”
그랬더니 채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사진을 톡으로 자기한테 보내 달라고 하더니, 아예 작업실 의자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림이라도 그리는 듯이 액정 위를 검지 손가락이 휘젓고 있었다.
“요즘에는 외모가 경쟁력이라고 하잖아요. 이거 이렇게 올라가면 비츠걸스 팬들이 찾아와서 볼 텐데 이왕이면 멋진 모습으로 올려야죠.”
작업실에는 작곡가와 엔지니어 몇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이 흥미로운지 자꾸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 평소에도 이렇게 꾸미고 다니면 진짜 멋있을 것 같아요.”
채아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감상한다는 듯이 팔을 쭉 펴고, 멀어진 핸드폰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봤다.
“보세요. 진짜 잘 나왔죠? 잘생긴 거 봐. 아이돌 하셔도 되겠어요.”
채아가 건네준 핸드폰을 보니 정말로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눈빛이 선명해졌다.
낯간지러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인스타에 이 사진을 올렸다. 비츠걸스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코멘트와 함께.
“박영민 피디님 부럽습니다. 저도 저런 제자가 있으면 일할 맛 날 텐데.”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직원이 그런 말을 했다.
“채아가 지금 연습생 중에서 에이스죠?”
“그럼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슬쩍 채아 쪽을 바라보니까 벌써 입가에 미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나중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우리 회사에 이런 보컬이 있었나 하고요.”
채아는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런 욕구가 유난히 강했다.
애정이 결핍된 건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러한 애정이 충족되었을 때 나타난 모습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기에 일단은 맞춰주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은설이에게는 채찍을, 얘한테는 당근을.
프론트 페이지에 들어올 때에도 그랬다고 한다.
파인애플 엔터의 사장이었던 김종성 씨는 오디션을 봤던 채아가 자기 회사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너무 뛰어난 보컬이라서 오라고 하는 곳이 많을 것 같았다면서.
아마도 당사자가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러한 태도가 드러났던 것일까.
채아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곳을 택했다. 자기를 최고의 보컬이라고 칭찬해 주는 곳으로 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한테 과분한 애들인 것 같아.’ 하고 자책하는 김종성 씨의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내가 오라고 했을 때에도 ‘우리 사장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훌륭하신 분이에요. 저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어요.
어쩌면 아주 약한 것이 이 아이 안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흐느적거리는 것이. 그리고 기댈 곳을 찾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자존감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모른다.
“그럼 연화, 다은이하고 비교하면 어때요? 누가 더 나아요?”
채아가 내 옆에 있는 걸 빤히 바라보면서, 짓궂게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셋 다 색깔이 달라서 비교할 수는 없죠.”
“그래도 한 명을 선택하신다면요?”
“선택이요? 선택은 벌써 했어요. 꼭 데리고 있고 싶어서 다른 팀에 있는 애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잖아요.”
이렇게 대답할 줄 알고 물었던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 말에 채아는, 원하는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이전 팀에서는 섹시한 컨셉을 가지고 있었고, 오묘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채아는 그런 걸 잘 소화했었다. 색기가 있다는, 조금은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말도 곧잘 듣곤 했으니까.
하지만 바로 곁에서 지켜본 나에게는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이렇게 칭찬 들었다고 그 감정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걸 보면.
그리고 그게 그렇게나 기뻤는지 작업실을 나온 뒤에도 채아는 나를 졸졸 따라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커피 타드릴까요?”
“내가 알아서 먹을게.”
“저 진짜 커피 잘 만들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뜨거운 물에 커피 믹스를 하나 넣는 것이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미묘하게 다른 거요. 그런데 저는 진짜 잘 만들 거든요. 제가 타드린 거 한 번 맛보시면 나중에 커피 마실 때마다 제 생각나실 걸요.”
가슴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것이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는 듯이, 채아는 이날 따라 유난히 밝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은 알림을 받으며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효과가 있는 한 건가. 댓글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좋은 앨범 만들어주세요.
-저메인 존스도 비츠걸스는 이기지 못했다. 하긴 나 같아도 말 안 통하는 외국 아저씨보다는 어리고 이쁜 여자애들이지.
-계속 기다렸습니다. 박영민 프로듀서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드디어! 이제야!!
채아가 정성껏 다듬어준 사진 밑으로,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 * *
대체적으로 한 팀의 음악적인 능력을 판가름할 때는 메인 보컬의 기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곤 한다.
아무리 좋은 곡이 주어지고 멤버들의 매력이 뛰어나도 메인 보컬이 곡을 소화하지 못하면 그 팀의 음악성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채아를 확보했다는 것은 새로운 팀의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의 실력이 점점 상향 평준화되면서 메인 보컬을 받쳐주는 리드 보컬의 존재감이 커졌고, 때로는 서브 보컬이 곡의 킬링 파트를 책임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제 비주얼 원툴로 가수를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승연이가 서브 보컬이긴 하지만 다른 멤버들에게는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고 해야 하나.”
정 팀장과 승연이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이 나와 버렸다.
“우리 애들이 매번 다른 스타일의 곡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그 곡에 딱 맞는 톤과 발성으로 노래를 이끌고 나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승연이는 그걸 잘해요. 넷 중에서 이걸 월등하게 잘합니다.”
“그래서 피디님이 보시기에도 승연이에게 연기 재능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노래를 부를 때에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는 얘기이긴 한데…… 하지만 전 그런 쪽은 잘 몰라요. 연기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도 없고…… 단지 그 친구 얘기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죠.”
얘기를 듣고 보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만약 승연이가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역할을 맡아 그것을 연기한다면…… 그런 상상을 해봐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본부장님은 허락하시는 건가요?”
“허락이요?”
“민태 씨가 승연이를 데리고 오디션 보러 다닌다는 거요.”
“그건 안 되죠.”
정 팀장이라면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팀원을 챙겨주려는 마음은 알겠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안 됩니다. 우선은 당장 직면해 있는 스케줄 때문입니다. 정 팀장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이제 팬클럽을 챙겨야 하고, 콘서트도 준비해야 돼요. 승연이의 개인 스케줄이 가장 적기는 하지만 삐끗해서 팀 연습에 문제가 생겨버리면 리스크가 훨씬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허락할 수 없어요. 또 하나의 이유는…….”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 방송국 피디에게 승연이의 출연을 사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피디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내 요구를 가로막았다. 반박을 할 수 없도록 분명한 이유를 대면서.
한 회사의 본부장이 요청하는 것도 그렇게 거부하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신입 매니저가 그 자리에 있게 된다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건 됐구요. 하여튼 팀 스케줄이 우선입니다. 아직 그럴 수 있는 여유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 팀장의 팀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될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정 팀장이기에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 친구 오래 버티네요.”
“오래 버티다뇨. 이제 우리 식구예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요.”
정 팀장은 그 신입 사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승낙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자기가 관찰해 보니까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이 보였고 그걸 살려보고 싶다…… 맡고 있는 가수한테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겠죠. 부럽네요. 제가 어렸을 때 저한테 그런 매니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농담처럼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피디님은 아직 아쉬우신가 봐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아쉬운 것도 없어요. 저를 대신해서 노래 불러줄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많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그 친구에게는 잘 말씀해 주세요. 적당한 때가 반드시 올 거고 그때가 되면 열심히 해달라고요. 지금의 그 애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요.”
“알겠습니다.”
* * *
잡지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루 종일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피곤했는지 멤버들은 시트에 파묻혀 버릴 것처럼 기대어 있었다.
“어? 이거 봐봐. 이 사진 진짜 우리 선생님 맞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승연이가 유난히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예? 뭔데요?”
“이거.”
“그게 뭔데요?”
“선생님 인스타.”
그 말을 듣고 다은이도 핸드폰을 열어서 그 사진을 찾아냈다.
“오오! 곡 작업하시나 봐. 사진 진짜 잘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연화도 그쪽으로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에는 육상 트랙처럼 길게 이어진 칸칸마다 요란한 웨이브 파형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박영민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우스를 건드리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 하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비츠걸스의 다음 앨범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진이었다.
“댓글에 영어 많은 거 봐. 이러다가 선생님이 월드 스타 되는 거 아니야?”
연화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진을 화면 가득 띄워놓았다.
“누가 찍은 걸까?”
“응?”
“누가 찍어준 거잖아. 이거.”
무언가 불편한 듯이 연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회사에서 누가 찍어준 거겠지. 홍보용 사진 같으니까.”
“글쎄.”
사진이 올라온 날짜. 올라온 시간.
아마추어틱하게 다듬어진 화질, 그리고 피사체에 대해 애정이 담겨 있는 듯한 구도.
늦은 시간이었다.
승합차는 비어 있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핸드폰을 꺼버렸지만 그 사진이 아직 눈가를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연화는 눈을 감아버렸다.
* * *
김우진은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묻더니 “저메인 존스와 일을 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축하합니다.” 하는 말을 건네왔다.
-개업식 때 못 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너무 큰 화환을 보내주셨어요.”
정말로 큰 걸 보내줬다. 그것도 두 개나.
하나는 아이즈 컴퍼니에서 온 것이었고 또 하나는 김우진의 이름으로 온 것이었다.
아이즈 컴퍼니에서 온 것은 이전을 축하한다는 말을 담고 있었고, 김우진은 내 이름까지 넣으며 ‘박영민 피디님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어주시길’이라고 적어서 보냈다.
-어지간하면 잠깐이라도 들리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김우진이 반드시 와야 하는 자리라고 할 수 없었지만 굳이 그는 반복해서 사과했다.
그런 뒤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쪽에서 키우는 애들은 어떤지, 이쪽에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리고 요즘은 이러이러한 게 유행이더라 하는 얘기도.
-그러지 말고 한 번 만나죠. 개업식 못 간 벌로 제가 밥 사겠습니다. 이번 주말 어때요?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면 회사 구경 좀 시켜주세요. 신사옥이 그렇게나 근사하다면서요?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저도 아이즈 구경하고 싶은데요? 이번에는 저를 그쪽으로 초대해 주시죠.”
-그래요?
그는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토요일 오전에 나는 아이즈 컴퍼니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 * *
거대한 리조트처럼 외벽이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지상 9층에 지하 5층, 그리고 가장 높은 층에는 아이즈 컴퍼니의 로고가 자랑스럽게 박혀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놔두고 올라가려고 하니, 높은 층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1층으로 가니 사방이 탁 트여 있는 로비가 나왔다.
“어…… 저기, 박영민.”
“진짜?”
도착했다고 김우진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더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야, 박영민이 여기에 왜?’
“닮은 사람 아니야? 진짜 박영민인가.”
다 들렸다. 청력이 열린 이후로 난감한 일이라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일찍 오셨네요.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하는 수 없이 계속 로비를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어? 박영민? 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계속 마주치면서.
역시 대형 기획사답게 내부는 크고 깔끔했다. 우리 회사와의 공통점이라면 1층에 카페가 있다는 것. 차이점이라면 우리 회사는 1층을 카페로 임대 내준 것이고 여기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로비의 한 부분으로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모습들이 이곳에 있었다.
깔끔하게 와이셔츠를 입고 목에는 사원증을 걸고 다니는 회사원들. 두 명, 세 명 몰려다니면서 어쩐지 생산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 같았던 그런 모습들. 아이즈 컴퍼니의 1층 로비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별로 부럽지 않다.
토요일에도 이렇게나 많이 출근해 있다니. 아이즈도 직원들을 어지간히 부려 먹나 보다.
“오랜만입니다. 박 피디님!”
그리고 김우진과 다시 만났다.
이번이 다섯 번째 만남. 얼마 전 드라마 기획 회의 때 만난 이후로 또다시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와의 만남이라고 하면 작년 가을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때 우리는 종로에서 돼지국밥을 함께 먹었다.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고,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자기는 역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 이후 비츠걸스는 승승장구했다.
그때 우리는 무척 어색한 사이였다. 경쟁자, 또는 동업자. 어떻게 규정하기도 어려운 관계였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료가 되고 내일은 또 적이 된다고 하지만…… 이 분야는 유난히 그런 것이 심했다.
사실 적이나 동료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 * *
연습실은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위화감이 들었다. 크기가 지나치게 큰 것도 그랬는데, 하나의 연습실 안에 탈의실과 샤워장이 함께 있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들어가자 안무를 맞춰보고 있었던 연습생들은 화들짝 놀라며 나와 김우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희 애들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몬스터 뮤직의 박영민 프로듀서님. 누군지 알지?”
그러자 아이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얘네들은 더블 에이입니다. 저희 사장님이 야구광이시거든요. 그래서 연습생들을 이렇게 분류해요. 싱글 에이, 더블 에이, 트리플 에이.”
이해하기는 편한 명칭이었다.
“그리고 데뷔조는 40s라고 부르죠. 40인 로스터라고요.”
남자 아이들 여덟 명이었다. 주말이라는 것을 잊은 채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연습실이 크다는 것 외에 놀랄 만한 점은 계속 나타났다. 회사 안에 피트니스 룸이 있는 것도 그렇고, 보컬 레슨룸의 음향 시설이 스튜디오급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도.
또한 생각도 못 했던 요가 레슨 같은 것도 있었고, 외국어 교습을 위한 시간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형 기획사라고 불릴 수 있는 네 곳 중 하나. 역시 입이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굳이 우리 회사로 오겠다는 걸 만류하며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이렇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있어서였다.
어쩌면 규모를 늘리게 된 몬스터 뮤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자리를 잡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대형 기획사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중견 기업 정도의 규모. 그리고 안정성이 없는 직종. 그럼에도 장기간 정상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만큼 내실이 탄탄하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그렇다고 층마다 다 돌아다니며 살펴볼 수는 없기에 연습실과 스튜디오를 슬쩍 구경한 뒤 우리는 김우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저희는 보안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거 안 보여드려요. 박영민 피디님이니까 이러는 거죠. 하하.”
그는 선심을 쓰듯이 웃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플라지아의 커다란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전 세대의 걸그룹이었던 데이지의 브로마이드가.
각각 한 세대를 대표하는 걸그룹들이었다. 데이지에서 플라지아로.
아이즈 컴퍼니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준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이었다. 그리고 두 그룹의 프로듀서는 김우진이었다.
“9월 중순에 컴백한다고요?”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뒤로하고 커피 머신을 작동사키고 있던 김우진은, 나에게 등을 보인 채로 물었다.
“그렇게 잡고 있어요.”
비츠걸스의 컴백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츠걸스는 9월 중순에 앨범을 발표하고 다시 국내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알고 계시죠? 에피아랑 겹치는 거요.”
“그렇게 되었어요.”
그는 쟁반에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게 박영민 피디님하고 저하고의 차이인 거 같습니다. 저라면 약간의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컴백 일정을 미루겠어요.”
데뷔 시점과 컴백 시점은 그야말로 눈치 싸움이었다.
연예인이란 이슈를 먹고 사는 셈인데, 대중들은 결코 두 가지의 이슈를 모두 주목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어느 한쪽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특히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가수가 컴백 일정을 잡아버리면, 그걸 피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컴백 시점을 겹치게 하는 걸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저희처럼 작은 회사는 그렇게 맘대로 일정을 조율할 수 없어요. 이번에 컴백 시기 놓치면 그다음으로 예정된 다른 팀들의 일정도 전부 뒤로 미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나름대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빅픽쳐가 데뷔한 뒤로 아이돌 그룹이 하나 늘어버려서, 두 팀을 번갈아가며 꾸준히 노출 시킬 필요가 있었다. 큰 회사처럼 여러 팀을 동시에 돌릴 수 있는 여력이 안 되는 것이다.
“저는 박영민 피디님이 계속 그 위치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불패의 신화를 계속 쓰시는 거죠. 내년 말까지.”
“내년 말이면 그거요?”
그러자 그는 커피의 향을 맡으며 살며시 웃었다.
“내년 말에 그거 꼭 하자고요. 아이즈 컴퍼니와 몬스터 뮤직에서 각각 새로운 걸그룹을 런칭하는 겁니다. 방송을 통해서요. 저 그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이지와 플라지아의 계보를 잇는 걸그룹과, 세계적인 프로듀서가 만드는 걸그룹이 대결을 하는 겁니다.”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적지근 했던 김우진도 요즘에는 나하고 통화할 때 빠짐없이 이 얘기를 하곤 했다.
“재미있는 그림이 많이 그려져요. 우리 둘이 팀을 바꾸어서 가르쳐 보기도 하고, 자극적으로 편집해서 애들의 캐릭터를 미리 만들어주기도 하고…… 좀 울리기도 하고 말이죠? 괜찮을 거 같아요. 플라지아와 비츠걸스가 출연해서 후배들을 응원해 주기도 하고……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따뜻한 드라마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는 상상을 하듯이 벽에 걸린 브로마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전까지 절대 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한테도 지지 않는 겁니다. 국내에서는 실패가 없는 프로듀서, 세계적인 뮤지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최고의 프로듀서…… 저는 박영민 피디님이 계속 그 위치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저를 띄워준 후에 김 실장님이 저를 꺾으시는 장면을 연출하시려고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내년 말에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주목도를 높이자는 거죠. 최고의 프로듀서가 만드는 걸그룹. 이런 타이틀을 위해서요.”
“그럼 제가 질 것 같으세요? 이번에?”
주말의 느긋한 만남.
하지만 지금까지 그와 나 사이에는 비즈니스적인 분위기가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내 쪽에서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시종일관 나에게 호의적이기는 했다.
그래서인가,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비츠걸스의 컴백 일정을 조절하자는 얘기는 회사 내부에서도 몇 번이나 나온 적이 있었다.
에피아는 이미 9월 10일에 컴백하기로 예고가 되어 있었다. 그걸 피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다.
“전에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박영민 피디님은 가수로 실패하셨고, 그 때문에 재능 있는 아이들을 무대로 올려보내는 일을 하면서 대리만족하고 싶으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에고가 무척 강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여요?”
“왜냐면 저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가수로 데뷔한 적도 없어요. 연습생으로 몇 년 있었던 것도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제가 누구인지 몰라요. 플라지아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팬들은 잘 알겠지만요.”
실제로 김우진이라는 이름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음악을 들을 때 그 곡을 누가 작곡했는지, 누가 프로듀싱했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특별하게 대중들에게 노출된 작곡가 몇 명을 제외하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희 몬스터 뮤직은 안 그렇습니다. 하나를 최고의 위치로 올려놔야 그다음이 나올 수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재능 있는 제 아이들을 무대로 올려보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에 이겨야 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난이도가 무척 높은 게임을 하고 계신 셈이네요.”
김우진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기는 모든 것을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고 눈 앞에 닥쳐 있는 일을, 그리고 앞으로 닥칠 일을 하나 하나의 스테이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런 의미로 보면 내가 직면한 스테이지는 무척 어려운 판이었다.
이곳 아이즈 컴퍼니보다 더욱 큰 회사 GH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프로듀서라는 포포가 만든 에피아라는 걸그룹.
비츠걸스의 지난 앨범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아직 에피아를 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런 게 도움 되실진 모르겠지만 GH나 에피아 관련해서 잡히는 정보가 있으면 박 피디님과도 공유할게요.”
김우진은 그런 말까지 했다. 내가 지는 건 진심으로 싫다는 듯이. 자기하고 붙기 전까지는 무패의 승자로 있어주길 바란다는 듯이.
“꼭 승패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저야 뭐, 늘 해왔듯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보다 음악을 못만든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김우진과의 만남에는 의미가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를 둘러본 것도 나름대로 소득이 있는 일이었다. 나하고 같은 레벨에서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것도.
그렇다고 그와 나눈 대화로 내 생각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에피아는 9월 10일에 컴백하기로 되어 있었고, 비츠걸스도 그 시기에 새 앨범이 나올 것이다.
음악에 승패를 따지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는 했지만 같은 시장을 노리는 두 개의 그룹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충돌을 예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도 분명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누가 더 강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돌 그룹인지, 누가 더 흡입력 있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프로듀서인지, 그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 *
공식적으로 내 직위를 ‘이사’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박영민 이사’ 이런 말은 듣기에 거북했다. 아직 상장되지도 않은 작은 회사에서 이사회가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동안 본부장이라고 불린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프로듀서라고 불러주세요.
음악 만드는 사람이란 걸 분명하게 내세우고 싶었고, 이 회사의 음악에 관한 것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박영민 피디’ 이렇게 나를 부르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호칭이었다.
“박영민 피디. 꼭 그렇게 해야겠어?”
김인혁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월요일 오전 회의는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안 될 이유가 없잖아?”
“걔네 데뷔 때 그렇게 하다가 묻혀버렸어.”
“그때는 쌩신인이었고 지금은 다르지.”
에피아는 9월 10일 컴백. 그리고 나는 9월 15일에 비츠걸스를 컴백시키자고 했다.
“그럼 아예 10일로 딱 맞춰서 내보내지그래?”
“그럴까도 생각 중이야.”
“뭐? 너 제정신이야?”
우리 둘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참석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우리 두 사람이 워낙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으니 한 발 빼는 모양새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목소리로 대립했던 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기에 말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도 알아. 요즘 가장 잘나가는 팀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획사의 지원을 받고 있어. 보나 마나 다음 앨범도 좋은 성적을 거두겠지. 하지만 음악으로는 우리가 이길 수 있잖아? 그래서 그걸 증명하고 싶다는 게 잘못이야?”
“너 그거 책임질 수 있어?”
“그래. 잘못되면 전부 내가 책임질게.”
회사의 규모를 키운 뒤 처음으로 내놓는 앨범이었다. 상징적인 의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앨범이 실패하면 우리가 받게 될 타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이틀곡을 괜찮게 뽑아낼 수 있어. 이미 90퍼센트 정도 완성을 했어. 내 기준으로 볼 땐 지금까지 그쪽 회사에서 나왔던 어떤 음악보다도 훨씬 나아. 대중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우리가 훨씬 우위에 있다고.”
“거의 완성했다고? 그럼 이따가 나한테 그거 들려줘 봐. 들어보고 판단할 테니까.”
“들려 달라고? 이 회사의 음악에 있어선 내가 최종 결정권자야. 그렇게 하기로 했을 텐데.”
“영민아, 아니, 박 피디. 내가 이 회사의 사장이야.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몰라?”
새로운 장소로 옮겨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리더는 이 녀석과 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찰이 발생해 버렸다.
김인혁은 안전하게 몇 주 딜레이시켜서 10월 초에 애들을 내보내자고 했고.
나는 에피아와 맞붙어서 이번에 꺾어보자고 했다.
1년 전, 이처럼 자신만만하게 강자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녀석은 패배의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었고.
나는 음악으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 아니, 회의라기보다는 인혁이와 나의 의견 대립, 또는 마찰.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이날 회의는 종료되었다.
* * *
“아이고, 그동안 사이가 좋던 두 양반이 싸워 대니까 아주 살벌하네요.”
회의를 마치고 티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김인혁은 대표실로 들어갔고 공교롭게도 내 주위에는 내 의견을 지지해 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언제나 나에게 든든한 느낌을 주는 정영수 팀장, 그리고 1팀장. 이렇게 두 사람.
“일하다가 두 분 우정에 금이 가겠습니다. 거 참…….”
“괜찮아요. 일은 일이고, 친구는 친구죠.”
생각해 보면 인혁이와 의견이 엇갈렸던 적은 지금까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마찰이 생긴 적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둘 중 하나가 물러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내 의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은 없었다. 나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아니라고 하니까 반발심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
“김인혁 이사…… 아니, 지금은 사장이지. 김인혁 사장, 가끔 저래요. 다른 사람들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래야 하는데 자기 원칙을 딱 세워놓고 거기에서 아니다 싶으면 저렇게 고집을 부린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박 피디님 심정을 잘 압니다. 이번 일에 있어서는 무조건 박 피디님 편입니다. 책임…… 그거 혼자 지실 필요 없어요. 같이 가는 겁니다.”
1팀장은 오히려 기운이 나는 듯했다. 살짝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정영수 팀장과는 대비가 되는 모습이었다.
이제 1팀장과 김인혁은 파워 게임을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져 버렸다.
몬스터 뮤직이 성장하고 있던 시점에는 둘의 지분이 비슷했다고 해도, 지금은 위치가 전혀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아군을 얻었다는 생각이려나. 그게 아니라면 이쪽으로 붙는 것이 반기를 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오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번 타이틀곡은 자신 있습니다. 물론 저쪽에서 더 매력 있는 곡을 가지고 나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지난번의 인마이드림보다 더 나은 걸 들려줄 자신이 있습니다.”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흡입력이 있는 곡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걸 어서 대중들에게 공개하고픈 마음에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이 곡을 우리 애들이 어떻게 소화해낼지, 어떤 목소리로 완성시킬지, 그리고 이 곡에 감동을 받을 수많은 대중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어서.
그런데 강한 상대가 나오니까 그걸 비켜서 가라니.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마음에 누군가 재를 뿌리는 기분이었다.
그저께 김우진도 같은 말을 하더니, 인혁이까지……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곡인데요?”
정 팀장이 물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그는 실내 조명이 비치는 눈동자를 하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저희 이사하던 날 있잖아요. 사다리차 오고 그랬던 날이요.”
“예, 알죠.”
“그때 저는 3층에 있었어요. 스튜디오 장비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니까 그거 포장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죠. 그러다가 마지막 장비가 빠져서 스튜디오 안이 휑-하게 비워진 것까지 보고 나왔어요.”
무척 낯선 모습이었다.
고작 1년 동안 이 회사에 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많은 작업을 했었다. 유미의 첫 싱글을 만들 때에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고, 비츠걸스의 곡을 낼 때에도 아이들과 함께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인환이 형의 깊이 있는 목소리가 울리던 모니터 스피커도, 에너지가 넘치는 유아연의 목소리를 담아냈던 일도.
마치 그런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텅 빈 스튜디오 안에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어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새 건물의 새 스튜디오에서 세팅을 다시 해야 하니까 그걸 감독하러 억지로 출발을 했는데…….”
강한 영감이 다가온 것은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나는 핸들을 붙잡고 있었고 어디에선가 희미한 소리가 나를 사로잡는 느낌이었다.
“그날 제가 이동하는 데 유난히 시간이 많이 걸렸잖아요? 정 팀장님이 왜 안 오냐고 전화도 하시고 그랬었죠. 왜 그랬냐면 너무나 강한 영감이 저를 사로잡아서 곡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리듬과 멜로디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버리고 온 스튜디오가 나를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 같았다.
거기에 있는 어떤 영혼이.
혹은 살아 있는 스튜디오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지 말아 달라는 외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었어요. 가지 말라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무언가 저에게 애타게 애원하고 있는 듯했어요. 그것이 멜로디가 되어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가수들이 자신의 혼을 담아 소리를 만들어냈던 곳. 그런 기운이 서려 있는 곳.
다시는 그곳에서 음악이 울리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있는 무언가는 온 힘을 다해 가지 말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미친 듯이 곡을 써서 그날 완성했습니다. 두 시간 정도…… 정말로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차를 세워놓고 뒷좌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무엇엔가 홀린 듯이 곡을 만들어나갔습니다. 평소라면 막힐 때가 있어서 머리가 복잡해지곤 했지만 그 날엔 그런 것도 없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냈습니다.”
“강한 영감을 받으신 거였네요.”
“그런 거였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곡을 만든 것은, 수많은 경우를 나열해 놓고 내 감각이 선택한 한 가지를 고르는 식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느낌을 만드는 것이었다. 블록을 쌓아 올리듯이, 여러 종류의 멜로디를 만든 뒤에 모양이 맞는 블록을 맞추어 나갔다.
하지만 이날의 경험은 특별했다.
처음으로 창작이란 것을 해낸 느낌이었다.
“그날 두 시간 동안 작업한 것은 거의 완벽해서,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건드릴 것이 없어요. 가사 때문에 지금까지 끌고 있는 거죠. 곡 자체는 이미 완성을 한 겁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명의 매니저는 그 곡에 강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들려달라고 하길래 망설임 없이 들려주었다.
핸드폰을 켜고,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인트로는 모던한 느낌의 일렉트로 팝 비트로 시작되었다. 조금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사운드로 시작된다. 마치 무언가를 버리고 가는 냉정한 사람처럼.
그리고 어눌한 듯한 멜로디로 감정을 다스린 뒤, 청량감을 주는 세련된 선율로 듣는 이의 몰입감을 확 이끌어낸다.
떠나지 말아 달라고, 날 이렇게 혼자 두지 말라는 처절한 느낌이 높은 음역대로, 마치 격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처럼 곡을 지배한다.
단순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강력한 흡입력을, 그 어떤 곡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
곡이 끝났지만 두 명의 매니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노래가 흐르고 있었던 공간을 침묵이 메우고 있었다.
“이건 너무 놀라운데요.”
1팀장은 감탄은 멈출 수 없다는 듯이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맞붙으려고 하시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 곡을 들으니까 이해가 됩니다. 그래요, 당연하죠. 이런 곡을 세상에 내보낼 건데 피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정 팀장의 소감이었다.
* * *
“그런 느낌인 거야. 그때 차 안에서 만든 곡이지.”
비츠걸스 애들에게 곡 소개를 하고 있었다.
“오오! 쌤…… 그러니까 진짜 예술가 같아요. 막 영감을 받아서 창작을 하고.”
“이거 예능 나가면 써먹어도 되죠? 우리 프로듀서님이 이사하는 날 갑자기 영감을 받아서 두 시간 만에 완성한 명곡! MSG 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해도 먹히겠는데요.”
무엇보다 곡의 느낌을 잘 표현하려면 어떻게 곡을 썼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반응이 이렇다.
“정말로 영혼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연화는 그렇게 물었다.
“그 안에 있는 영혼이, 다른 사람은 가버려도 괜찮지만 천재 프로듀서 박영민은 안 돼!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지.”
“혹시 거기서 죽은 사람 있었던 거 아니에요?”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어떤 느낌인지 이해를 하라는 의미에서 얘기해 준 거야. 좀 진부하긴 하지만 그런 느낌을 담은 곡이야. 가지 말라고, 떠나지 말라고 외치는 거지. 물론 가사는 이사 떠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지 말라는 거고.”
가사는 90퍼센트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연습을 시키고 싶었다.
“아직 파트는 못 정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너희에게 숙제를 줄 거야. 선하는 댄스 파트를 맡으니까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 너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완창할 수 있도록 준비해서 나에게 들려줘.”
“처음부터 끝까지요?”
“그래. 기존의 메인 보컬, 리드 보컬, 서브 보컬 포지션은 신경 안 쓰기로 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파트를 줄 거야.”
그랬더니 연화는 살짝 굳은 눈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곡의 중요한 파트는, 가장 이 곡을 잘 소화해낸 보컬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틀의 연습 시간을 주겠어. 그래서 이틀 뒤, 내 앞에서 이 곡을 들려줘. 그걸 들어본 뒤 파트를 배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