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2
2장 음악 하는 사람들은
뽀송뽀송한 애기 피부가 유난히 귀여워 보이는 애들 사이에 있다가, 그리고 이제는 스타가 되었다고 화려한 치장이 제법 어울리는 비츠걸스 애들과 함께 있다가도, 유미와 같이 있으면 자연스러운 그 매력에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외모를 평가한다는 게 아니다. 가볍게 베이스만 바른 얼굴로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미소가 만들어졌다.
“박 피디님. 오늘은 아예 제가 편의점에서 도시락 두 개 사왔으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같이 먹어요. 알았죠?”
그러면서 유미는 넓은 비닐봉지 안에 담긴 도시락을 가슴팍까지 올려서 흔들어 보였다.
“알았어.”
유미가 연습생들 보컬 트레이닝을 맡은 이후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녁 같이 먹자는 말을 습관처럼 해왔지만, 바쁘다 보니 나는 늘 편의점 도시락을 때웠다.
‘뭐예요? 오늘 저녁 같이 먹자니까요!’ 하고 투정을 부리면 ‘밖에 나갔다 올 시간이 없어.’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예 도시락을 두 개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내 거 뭐 샀는데?”
“고기팍팍이요.”
“어? 내가 그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맨날 그거 드시던데요?”
그러면서 유미는 전자레인지가 있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내 건 내가 할게.”
그런 말을 하며 들어왔지만 고기팍팍 도시락은 벌써 전자레인지 안으로 들어가서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저한테는 의미가 있는 거 아세요? 제가 밥 한 번 사겠다고 맨날 얘기했지만 1년 동안 못 샀잖아요. 지금 처음으로 피디님한테 밥을 사는 거예요. 고작 이런 도시락이지만.”
“나 저번 달에는 한가했는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박 피디님이 한가하면 제가 바쁘고, 제가 한가하면 박 피디님이 바쁘고. 시간 한 번 맞추기 진짜 힘들어요.”
지난달까지 유미는 보컬들이 대결을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고(거기서 꽤 오래 살아 남았다.) 게스트로 출연하는 방송 스케줄이 꽤 잡혀 있어서 무척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좀 한가한 편이었고 유미가 그런 일정을 전부 소화한 뒤 이제 한숨 돌리나 싶으니까 내가 비츠걸스 앨범 작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정말로 둘이서 밥 한 먹기도 힘들었다.
“애들 레슨해 주는 건 어때? 할 만해?”
“노트 덕분에 연습생들 한 명 한 명 파악하는 게 쉬워요. 저 진짜 그 노트 보고 놀랐잖아요.”
유미가 말하는 노트란 내가 연습생들에 대해서 정리해 둔 자료였다.
“매일매일 애들의 변화를 자세하게 기록하셨더라고요. 그런 거 언제 다 정리하신 거예요? 꼼꼼하게 다 적혀 있던데요.”
“그런 재미로 하는 거지 뭐. 애들 실력이 늘어나는 거 보면서.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기록을 해놓은 거고.”
잠시 후, 전자레인지는 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도시락이 익었음을 알렸다. 꺼내려고 했더니 유미가 손으로 막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 봐요. 제가 차려드릴 거니까.”
그러면서 나를 테이블 앞으로 앉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겨우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었다.
유미는 도시락 뚜껑을 뜯어서 내 앞에 내려놓았고, 나무젓가락도 조심스레 갈라서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로 고마워요. 그저 그런 가수로, 제대로 활동도 못 해보고 사라질 뻔한 저를 이렇게 만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왜 그래. 닭살 돋게.”
“밥 사면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요.”
유미는 평소에도 이런 말을 곧잘 하곤 했다.
걸그룹 하다가 실패해서 다시는 무대에서 노래를 못 부를 줄 알았고, 몬스터 뮤직에 들어와서도 과연 가수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를 만난 뒤로는…….
“그래. 잘 먹을게.”
“이게 평범한 도시락 같아도 얼마나 힘들게 사 왔는지 몰라요. 모자 쓰고, 선글라스 쓰고, 마스크까지 쓰고…… 그랬더니 일하는 사람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고요.”
“매니저는 뭐하고?”
“그쪽에 사람 부족해서 저한테 붙어 있는 매니저 없어요. 그리고 저 지금 가수로 여기 있는 게 아니고 몬스터 뮤직 직원으로 있는 거잖아요. 보컬 트레이너.”
그러면서 유미는 자기 몫을 가지고 와서 내 앞에 앉았다.
“같이 밥 먹는 건 이걸로 퉁친다고 해도 술 마시는 건 아직 남아 있는 거 아시죠? 그건 진짜 제대로 해야 돼요.”
“그래, 알았어.”
“날 잡아서 밤새워 마시는 거예요. 쓰러질 때까지!”
유미는 딱!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젓가락을 힘차게 뜯으며 말했다.
“그래.”
* * *
이렇게 회사 안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건 생각 이상으로 크다.
우르르 몰려 나가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나갔다 오는 것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비되고, 주문을 하고 기다리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다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등 쓸데없이 소모되는 시간까지.
하지만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때우면 후다닥 먹고 바로 업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촉박한 삶을 살고 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였다. 지금의 이 능력이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려면 이러는 걸로도 부족했다.
-이건 원래 당신의 능력입니다. 당신이 타고난 재능입니다. 하지만 지독하게 운이 없었기 때문에 이 능력이 깨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에피아네요?”
유미와 나는 커피를 손에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내 옆으로 다가온 유미는 모니터 안에서 아름다운 춤선을 그리고 있는 걸그룹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니터하는 중이야. 이번에 얘네랑 우리 애들이랑 같은 시기에 앨범이 나오거든.”
“얘기 들었어요. 정면승부하신다고.”
유미는 모니터 속 영상을 한참 바라봤다.
“얘네들 얼마 전에 저랑 같이 방송한 적 있어요. 다들 착하더라고요. 인사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무엇보다 애들이 한 명 한 명 다 예뻐요. 걸그룹 보면 그중에 몇 명은 개성으로 승부하려는 애들이 끼어 있는데 여기 애들 다 예뻐요.”
“개성도 있어.”
“그런 개성이 아니라…… 있잖아요. 외모 안 되는 애들한테 억지로 컨셉 줘서 꾸며놓은 거. 하지만 에피아에는 그런 멤버가 없어요.”
무엇보다 아홉 명의 멤버들이 모두 무대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계속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 소절씩 번갈아가며 하나하나 새로운 매력들이 교차했다. 귀여움, 섹시함, 청순함, 도도함, 보이쉬한 매력까지.
과연 아이돌의 명가라고 하는 GH 엔터테인먼트에 내놓은 그룹다웠다.
음원을 그저 귀로만 들으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저 그런 후크송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상을 보면 멤버들의 비주얼과 잘 짜여진 안무가 눈에 들어오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자꾸만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악과 안무는 멤버들의 매력을 치장해 주는 액세서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하나.
“와우! 얘 노래 진짜 잘하는데요?”
에피아의 메인 보컬 인아 파트가 나오자, 유미도 깜짝 놀라며 감탄하는 것이었다.
“실력이 있더라고.”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얘가 나오니까 갑자기 귀가 확 트이면서 곡의 몰입도가 달라져요.”
유미 또한 보컬 실력에 있어서는 정상급이었기에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금방 알아챈 듯했다.
그저 그런 후크송이었지만 메인 보컬의 압도적인 기량이 곡을 살리고 있었다.
“GH 쪽의 메인 보컬은 약하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얘는 전혀 다르네요.”
가창력보다는 비주얼의 매력을 우선시하는 것이 GH 엔터테인먼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창력까지 뛰어난 멤버를 내세웠다.
케이팝보이스의 2회 우승자 정인아.
에피아의 모든 곡은 그녀의 목소리를 돋보이기 위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연화, 다은이하고 비슷한 레벨이야. 그 나잇대에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걸 노래로 부르고 있어.”
“맞아요. 저도 그 생각했어요. 우리 애들하고 비슷한 수준이라고.”
“그런데 비슷해서는 안 돼. 대중들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훨씬 잘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번 곡의 메인 보컬은 아직 정하지 않은 거야. 더 잘하는 녀석한테 메인을 주기로 했어.”
* * *
“나는 포기. 하이를 못 올리겠어.”
비츠걸스의 신곡 메인 보컬을 결정하는 경쟁에서 승연이는 일찌감치 빠졌다.
“억지로 소리를 끌어올리면 되긴 되는데, 톤이 너무 깨져.”
“난 듣기에 괜찮던데?”
“언니는 괜찮을지 몰라도 선생님한텐 아니겠지. 게다가 쟤네 둘이 하는 거 봐. 나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잖아.”
비츠걸스 네 명은 연습실 하나를 잡고서 보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게 한 사람당 하나씩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몬스터 뮤직이 그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나마 회사를 넓히면서 연습실 두 개가 늘어났기에 이렇게 하나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냥 다른 파트를 제대로 챙길래.”
지금까지 비츠걸스의 보컬 파트 배분에는 멤버들의 불만이 없었다.
메인 댄서인 선하가 가장 적은 분량을 맡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나머지 세 명이 대부분의 파트를 맡았다.
일곱 명, 아홉 명, 또는 열 명이 넘는 그룹이라면 정말로 한 소절씩 맡아서 번갈아 불러야 했지만 보컬 파트가 세 명뿐인 비츠걸스는 한 사람이 맡게 되는 파트가 꽤 길었다.
그중에서도 메인 보컬이 차지하는 높은 음의 후렴은 대부분 연화가 맡았고, 이따금 다은이와 번갈아 부르기도 했다. 1절은 연화가, 2절은 다은이가 맡는 식으로. 그래서 두 사람 모두 프로필에는 메인 보컬로 기재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곡은 오직 한 명에게 후렴을 맡긴다고 한다. 그리고 곡을 불러보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멤버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떠나지 말라는 느낌을 담고 있는 슬픈 곡조의 후렴은, 그 부분만 떼어놓고 봐도 멜로디에 힘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부르기도 어려웠다.
음의 변화가 심하고 호흡을 할 수 있는 포인트가 멀리 있었다. 노래 좀 한다는 보컬도 일정한 톤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난이도 무척 높고, 강력한 인상을 줄 수 있는 파트이니 이걸 소화해낼 수 있는 한 명이 후렴을 독차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언니,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경쟁을 하듯이 연습하고 있던 두 명 중에서, 먼저 연습을 끝난 건 다은이였다.
“다 끝났어?”
“저는 다 했고, 연화는 계속할 건가 봐요.”
그렇게 해서 세 명만 먼저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제 연화 몇 시에 들어왔어?”
“제가 두 시까지 깨어 있었는데 그때도 안 들어왔었어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어릴 때부터 매일 저렇게 연습했다니까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는 거겠지만.”
“근데 평소하곤 완전히 달라요. 말도 함부로 못 걸겠어요.”
이제까지 연화가 연습에 몰두한 것은 수없이 봐왔지만 이번에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어제, 파트 배분을 위해 이틀 동안 연습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이후 연화는 다른 멤버들과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 직후 바로 연습에 들어가서, 마치 자기 배역에 심하게 이입한 배우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버렸다.
“저러다 목이 다치면 안 되는데.”
선화가 말했다.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힘들게 다져진 팀워크가 이번 일로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느 한쪽이 물러나 주면 좋겠는데. 음역이 너무 높다고 포기해 버린 승연이처럼.
“다은이도 그 파트가 탐나는 거지? 후렴 그 부분.”
“저요? 저는 뭐 그냥…… 아무거나 불러도 상관없어요.”
“그래? 그 부분을 연화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고.”
“저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면……”
일부러 져주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 져준다는 것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음악은 스포츠처럼 승부가 갈리는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저도 쌤한테 좋은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저한테 진짜 신경 많이 써주셨는데…… 이제 이만큼 부를 수 있게 됐다고. 그런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아…… 나도 남아서 더 연습할 걸 그랬나.”
“적당히 해. 그러다가 성대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연화 쟤는 어릴 때부터 저렇게 하는 게 익숙해져서 가능한 거고.”
“맞아요. 연습은 짧고 굵게!”
노래에 있어서는 천재라는 말을 자주 듣는 아이라서인지, 짧고 굵게 연습한다는 말도 어쩐지 무섭게 들려왔다. 자기는 남들처럼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같아서.
어쨌든 박영민 프로듀서가 이들에게 준 시간은 이틀.
오늘로써 그 이틀이 지나가 버렸다. 이제 내일이면 파트를 정하기 위한 심사에 들어간다. 모두가 웃을 수 있을지,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일을 마치니 열두 시 반. 오늘도 자정을 넘겨 버렸다. 타이틀곡 말고 앨범에 수록할 나머지 곡들도 손을 보고 있었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지하로 내려가니 역시나 연습실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하나는 빅픽쳐 애들. 슬쩍 안을 쳐다봤더니 연습은 안 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앉아 있는 애들, 바닥에 엎드려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애들, 그리고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붙잡으며 낄낄대고 있는 녀석까지.
어쨌든 사이가 좋은 건 괜찮은 일이었다. 멤버 간의 케미만 돋보여도 그게 곧 돈으로 이어지는 애들이다.
팬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두 명 또는 세 명씩을 묶어서 조합을 만들며 즐기고 있었다.
계속 좋은 케미를 보여준다면 팬픽 등의 2차 창작까지 나오게 되고, 그러면 팬덤은 더욱 굳건해진다.
그리고 거길 지나쳐 다음 룸으로 넘어가니 연화가 혼자 남아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였더니, 내가 과제로 내준 곡을 아직 연습하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높은 음역이 있는 파트를 반복해서.
목이 상할까 봐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멈추게 하려는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연습에 있어서는 베테랑인 아이였고, 가만히 들어보니 목 상태를 감안해서 적절하게 호흡을 끊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놔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알아서 잘하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마지막으로 불이 켜져 있는 연습실에 가 보니, 이번에는 의외로 은설이가 혼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슬쩍 엿보니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더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끊임없이 그 동작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 생각했지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어쩐지 뜨거운 땀방울과 거친 호흡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은설이에 대해서는 회사에서 기대감을 반 정도, 그리고 부담감을 반 정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안 배경에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재벌가의 자녀가 연예인이 된 경우를 꽤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딴따라로 천대받던 직업이라서 있는 집에서는 근처에도 못 가게 막곤 했지만, 이제는 화려한 매력과 더불어서 높은 인지도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되고야 말았다.
자신의 배경을 숨기며 활동하는 연예인도 많지만, 아예 드러내며 자신이 있는 집 자식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미지를 잘 쌓으면 재벌가에서도 득이 된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연습생으로 있는 것이니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데뷔를 하게 되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잘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간섭을 하려고 들지도 모르니.
“이제 퇴근하시나 봅니다.”
“아, 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새카만 대형 세단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나를 보더니 얼른 나와서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은설이는 더 걸릴 것 같던데요?”
“괜찮습니다.”
이 사람은 운전기사. 매일 이렇게 은설이를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은설이의 아버지 유장훈 부회장은 유성 그룹 창업주의 차남이었고, 대부분의 경영권은 장남과 장녀에게 돌아가서 그룹 내에서는 힘이 없다고 한다.
신경이 쓰이는 집안이니 몬스터 뮤직에서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본 것이었다.
그래도 가지고 있는 자본의 규모는 우리 같은 사람과 전혀 달랐다.
“들어가세요.”
운전기사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 *
새 건물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보컬 트레이닝 룸이었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는 연습생들 우르르 데리고 들어가면 내가 민망할 정도로 비좁았는데, 이제는 안에서 안무 연습을 해도 될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목 풀기 위해서 스케일 연습부터 하고 시작해 보자.”
오늘은 비츠걸스 네 명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신곡의 파트 배분을 위해 이틀의 연습 시간을 주었고 이제 그것을 들어보려고 한다.
“승연이 먼저 해보자.”
한 사람씩 노래를 들어보기로 했다.
승연이의 경우는 후렴보다는 다른 파트를 확실하게 챙겨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후렴에서는 고음을 가성으로 처리하며 대충 넘기는 듯하면서도 자기가 맡을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느낌을 살려서 확실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 잘 들었어. 한 번만 다시 해보자. 내가 악보에서 파트A라고 표기한 부분 말이야. 거기만 해봐.”
“네.”
파트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각각 A, B, C로 표기했다.
A는 인트로부터 벌스까지, B는 브릿지와 후렴의 일부분, C는 메인 보컬에게 맡길 가장 강렬한 후크 파트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세 명에게 나누어 줄 예정이었다.
“그래. 좋아. 디테일한 건 레슨을 하면서 잡아보자.”
“그럼 저는 파트A를 맡는 거죠?”
“그래.”
승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수준급의 보컬이 파트 욕심 없이 보조 역할을 자청하는 건 팀에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승연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서운한 내색도 없이 당연한 듯이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은이 나와봐.”
“네!”
이렇게 과제를 내준 것에는 한 가지 목적만이 있었다. 다은이와 연화 중에서 누구에게 가장 중요한 파트를 맡길 것인지. 이걸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같은 파트를 두 명에게 한 번씩 번갈아 부르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 팀의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에피아가 그랬듯이. 또한 메인 보컬의 기량으로도 우리 쪽이 한 수 위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잘 들었어.”
다은이는 모든 걸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었다. 어디에 강세를 주어야 하고, 리드미컬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디를 당겨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부르는지, 어떤 부분을 살짝 죽여주어야 하는지, 또는 악보에 나와 있지 않은 미세한 음정 변화나 꾸밈음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면 좋은지.
이 모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다.
아무런 지시 없이 단지 이틀 동안 곡을 연습해 오라고만 했음에도 이런 것들을 거의 완벽하게 습득해서 부르는 것이었다.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노래로 부를 수 있는지,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천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재능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연화가 해보자.”
반면 연화에게는 이런 재능이 없었다. 연화 또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분한 성량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같은 팀에 이런 천재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주일, 열흘, 아니, 어쩌면 한 달 내내. 그렇게 연습을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불과 이틀 만에 쉽게 차지해 버리는 동료를 보면서, 연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레슨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은이의 경우는 연습생 시절에 이미 발성을 완성한 단계였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가르쳐준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곡의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간단한 지시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연화는 매일매일 몇 시간씩 하나하나 다 짚어줘야 곡을 완전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그래. 잘 들었어.”
두 사람의 노래는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딱 그 정도의 것을 보여주었다.
둘 다 고음을 올리는 것이나 성량을 유지하는 것에는 지적할 것이 없었다. 중요한 건 가장 핵심이 되는 이 멜로디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다시 다은이. 둘 다 한 번씩 더 불러보자.”
그렇게 한 번 더 들어봤고.
“이번에는 둘이 같이 불러보자. 연화가 파트B, 다은이가 파트C를 해봐.”
그런 방법으로도 들어보고 반대로 파트를 바꿔서도 들어봤다.
애들은 불만 없이 잘 따라주었다. ‘예전에는 그냥 정했으면서 이번에는 왜 이러지?’ 하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두 사람 모두 예상했던 만큼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다은이는 이 정도를 할 것이다, 연화는 이 정도까지 연습을 해왔을 것이다, 하는 것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 그대로라면 굳이 이렇게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내 상상 속에서 이 아이들이 불렀던 목소리로는 판단을 할 수가 없었기에 이번에는 색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승연이는 아까 얘기했던 대로 파트A를 하기로 하자. 오늘부터 그 부분을 나하고 연습하게 될 거야.”
“네.”
“그리고 나머지 두 파트…… B하고 C는 오늘 결정을 못 하겠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럼…….”
“연화하고 다은이는 파트가 정해질 때까지 B와 C를 함께 연습하게 될 거야.”
당장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다은이가 곡을 훨씬 잘 이해하고 소화해내고 있었다. 이쪽이 훨씬 듣기에 좋았다. 하지만 연화는 가르쳐주면 가르쳐주는 대로 스펀지처럼 흡수를 하니까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아직은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래서 이날 바로 결정을 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혹시 둘 중에서 이 파트는 꼭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게 있다면 지금 말해봐.”
그랬더니 연화가 고민도 안 하고 손을 들었다.
“저는 C파트를 하고 싶어요.”
“그래?”
“…….”
그리고 다은이는 이렇게 받아주었다.
“그럼 저는 B 해도 돼요.”
“사이 좋게 나눠 가지겠다 그거네.”
“저는 아무거나 해도 괜찮아요. 진짜로요.”
하지만 그런 말 뒤에도 차갑고 경직된 분위기가 숨어 있는 걸 모를 수는 없었다. 아마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얘네 네 명도.
“그런 자세가 좋기는 하지만, 우리 팀워크가 좋다고 곡이 많이 팔리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음악으로 보여줄 결과물이야. 훈훈하게 양보하는 것보다 좀 더 완성도가 높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야. 아무튼 그 의견은 참고하도록 할게.”
* * *
연화와 다은이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아이들과 동갑내기인 채아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이걸 해보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데모를 들려줄 테니까 멜로디를 익혀서 지금 들려줘 봐.”
“이거 누구 노랜데요?”
“이번에 새로 만든 곡이야.”
“선생님께서요?”
“그래. 비츠걸스의 다음 앨범 타이틀로.”
“네?”
채아와 레슨을 하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한 번 시켜봤다. 얘는 어떻게 부를지 들어보고 싶어서.
“너무 높은데요? 저 이렇게 F까지 계속 올라가는 건 잘 못하는데.”
“너도 올라가잖아.”
“되긴 해도 힘들어요.”
“너희가 부를 노래는 아니니까 부담 없이 한 번 해봐.”
그러면서 채아는 데모에서 들었던 멜로디를 허밍으로 암기하며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아까 전 비츠걸스의 두 보컬이 열띤 경쟁을 펼쳤던 파트C를 부르기 시작했다.
채아는 다은이만큼 테크닉이 뛰어나지 않고 연화만큼 소리를 찔러주지 못하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스키한 톤은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귓속말을 하듯이 간드러지는 창법 또한 능숙하게 잘 구사했다.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있는 목소리는 아이돌 그룹의 전형적인 메인 보컬 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런 목소리로 아이돌 음악을 부르게 하는 건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색다른 시도였다.
하지만 톤 자체가 주는 위압감, 풍부한 성량이 보여주는 시원함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에잇돌즈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이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조금 무리를 해서 데려온 아이였다.
“야, 누가 그렇게 부르래?”
“죄송해요. 갑자기 기억이 안 나서.”
잘 부르다가 마무리를 어설프게 하길래 한소리 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실력이었다. 내가 손을 댄 이후 채아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만약 채아가 비츠걸스의 멤버였다면 나는 파트C를 두고 세 명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저 잘했죠?”
“그렇게 마무리해 놓고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그러지 말고 말해주세요. 저 괜찮지 않았어요?”
귀여운 눈웃음을 만들며 채아는 그렇게 물었다.
이럴 땐 좀 엄하게 나가야 하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웃는 얼굴 앞에서는 나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선생님. 너무 늦은 시간이죠? 하지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연화는 핸드폰 화면 속의 빈 여백 위로 문장을 만들었다 지웠다 반복했다.
‘선생님. 아까 레슨하시는 걸 들었는데,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구요, 익숙한 노래가 들려와서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 노래를 부르시게 하는 건…….’
하지만 이 문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화는 액정을 꾹 눌러서 한참 써내려갔던 문장을 지워 버렸다.
‘선생님. 제가 아까 그 파트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이유는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저도 이제는…….’
이것도 탈락. 또다시 지워 버렸다.
연화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사람들은, 그녀가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알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도 참아낼 줄 아는 아이로 여기곤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연습생 생활을 해왔으니 차분하게 하나씩 쌓아 올릴 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당장 성과를 얻고 싶어서 조급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먼 곳을 보면서 느긋하게 차곡차곡 올라가는 것처럼.
누가 뭐라고 해도 연습실에 혼자 남아서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고, 하루 정도는 모든 걸 내려놓고 쉴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아까 왜 그러셨나요?’
하지만 그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 마음 편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연습한다는 것은, 매일 끓어오르는 가슴 속을 간신히 잠재우는 일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는 10년 동안 매일 그렇게 연습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쟁취하고야 말겠다, 라는 독한 마음이 있어야만 그럴 수 있었다.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 그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기필코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말겠다는 병적인 집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내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드러날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연화는 독종이라고 불렸다. 남들은 연습량이 많다고 독종이라고 부른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런 연습을 이끌어내는 강한 동기가 그런 것이었다.
‘선생님. 저하고 약속하신 대로 앨범 제작을 추가로 더 맡지 않으시는 건 정말 고마운데요,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연습생도 그만 맡으시면 안 돼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제가 잘 따르면 제 요구도 들어주시겠다고.’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삭제.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사람은 안 맡으시면 안 되나요? 느낌이 안 좋아요.’
이것도 삭제.
‘혹시 둘 사이에 뭐 있나요? 그렇죠?’
새벽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요즘 좀 이상해지신 거 아세요?’
‘선생님. 너무 늦은 시간이죠?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연락 드려요. 아까 연습을 할 때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프로듀서와 가수의 이상적인 관계란 말이죠.’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 사실은…….’
‘요즘 왜 그러세요?’
‘우리 회사의 발전과 선생님의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 제가 제안드릴 것이 있는데…….’
수많은 문장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지만 끝내 전송 버튼은 누를 수 없었다.
새벽의 끝 무렵이 되어 바깥에선 희미한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한순간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연화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그녀의 가슴처럼 따갑게 아파 오기 시작했다.
* * *
신곡의 제목으로 여러 개를 추천받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두 개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나는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두 개였다.
Never Let You Go의 경우는 부르기에 너무 길다는 의견과, 입에 착착 감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반면 가지 마는 직관적인 제목이었기에 나도 마음에 들었다.
결국 타이틀곡의 제목은 로 결정되었다.
그 외에 내가 작곡한 R&B 발라드곡 , 그리고 얼마 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함께했던 핫이슈의 를 리메이크한 것, 또 하나는 우리 회사의 전속 작곡팀에서 내놓은 조금은 전위적인 곡이 선택되었다.
그렇게 네 곡 외에 의 인스트루멘탈 버전, 방송에서 핫이슈와 함께 무대를 가졌던 의 리마스터 버전이 실려서 총 6개의 트랙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컴백 날짜는 9월 15일로 정해졌다.
이 건을 두고 인혁이와 끝까지 의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앨범 제작 및 발매에 관한 것은 내가 주관하기로 했으므로 내 뜻대로 하기로 되었다.
-너 그거 책임질 수 있어?
-그래. 잘못되면 내가 전부 책임질게.
그때 내뱉었던 말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진 셈이다.
“다음 달 15일이니까 이제 레코딩 시작하셔야죠?”
“그래야죠.”
“스튜디오 일정 잡을까요?”
“아직은 안 됩니다. 타이틀곡 때문에요.”
“타이틀곡이요?”
“파트 배분을 아직 못 했습니다.”
“아…….”
그동안 연화와 다은이를 데리고 꾸준히 레슨을 해왔지만 아직 파트를 지정해 주지는 않았다.
“그거 너무 오래 끄시면 애들 사이에 경쟁심만 심해질 텐데요.”
“오늘 정할 겁니다. 결정을 했어요.”
“그럼 다행이구요.”
“말씀하신 대로 경쟁이 너무 치열해졌나 봐요.”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신경이 쓰여서 편히 쉬지 못하는 건지.
이날 아침에는 이런 메시지까지 도착했다.
[선생님.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보낸 사람은 연화.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설마 이 시간까지 연습을 한 건지, 아니면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못 잔 건지.
연화에게서는 가끔 이런 메시지가 오곤 했다. 새벽 네 시나 다섯 시 정도에 도착하는 메시지가.
하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그 짧은 말에서도 예민한 감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여튼 이제는 결정을 내리고 레코딩을 위해 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 파트 정해서 본격적으로 연습을 하면 금방 준비가 마무리될 겁니다. 3일 뒤로 일정을 잡죠. 그때부터 레코딩 들어갈게요.”
* * *
아이돌 그룹에서 불화가 발생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자주 발생하곤 한다.
하나는 멤버별로 방송 출연 빈도에 차이가 발생해서 누구는 주목을 받고 누구는 찬밥 신세가 된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또 하나는 발표하는 곡의 파트 분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두 가지 경우 모두 관리하는 쪽에서 신경을 못 쓴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멤버들끼리 감정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정해준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
그중에서 파트 분배는 멤버 당사자들에게 가장 예민한 일이기도 하고, 또한 팬들에게도 민감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 이런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비츠걸스 멤버별 파트 시간 분배.’
이런 제목으로 올라온 영상은 In My Dream에 맞춰서 멤버 네 명의 파트가 그래프로 올라가는 식이었다.
멤버별로 몇 분 몇 초의 파트를 받았는지, 그게 전체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등등.
-몬스터야. 다은이 파트 너무 적은 거 아니니? 분량 배분 좀 제대로.
-선하 5.7초…… 이게 말이 되냐.
그리고 한 팀의 팬이라고 해도 최애 멤버는 따로 정해져 있으니까 이렇게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네 명의 멤버에게 각각 25퍼센트 내외로 공평하게 맞춰주지 않는 한 이런 불만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오늘 파트 정해줄 거니까, 이제부터는 자기 파트만 연습하도록 하자. 알겠지?”
“네.”
재미 삼아 이번 곡의 경우 각 파트 시간을 재어보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게 나왔다.
파트 A, 파트 B, 파트 C 이렇게 세 부분의 시간은 엇비슷했다. 선하가 맡게 될 부분도 5.7초보다는 훨씬 많았고.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다. 정작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주목도가 높은 파트를 더 선호할 테니까.
“파트 B를 연화가 하고 파트 C를 다은이가 부르자.”
이번 곡의 핵심인 후렴구는 다은이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왜 대답이 없어? 못 들었어?”
“아뇨…….”
“A는 승연이, B는 연화, C는 다은이. 이렇게 결정했으니까 오늘부터는 자기 파트만 연습하도록 해.”
실망스러운 빛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얼굴이 어두워진 연화, 그리고 오히려 미안한 마음에 혀를 낼름거리며 입술을 한 차례 훑는 다은이, 나머지 두 멤버는 그런 두 사람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곡에 있어서는 연화가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연화는 후렴 파트를 하고 싶다고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기도 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연화의 얼굴은 가시가 돋친 장미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기에, 만약 엇비슷하다면 연화 쪽으로 주려고 했었다.
내가 상상했던 그림 속에서도 그런 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고 있는 다은이는 빠르게 곡을 습득하지만, 연화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곤 했다.
이번 곡도 그랬다. 곧바로 정하지 못하고 계속 연습을 시키며 시간을 끌었던 까닭은 연화가 어디까지 끌어올리는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화는 충분히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기가 낼 수 있는 최대치를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였다면 연화에게 그 파트를 주려고 했다.
“얼굴이 왜 그래? 세상 무너졌어? 곡 하나만 부르고 가수 활동 끝낼 거 아니잖아. 연화 너에게 어울리는 곡은 당연히 네가 중심이 되는 거고, 다은이가 더 잘할 수 있는 곡이 있다면 다은이가 맡기도 하는 거야. 고작 한 곡이야. 이 한 곡에서 중심을 빼앗겼다고 네가 쌓아온 게 무너지는 건 아니야.”
“알아요.”
그런데 연화보다도 그 옆에서 차마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술만 핥고 있는 다은이가 더 애처로워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연화가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면 둘이 비슷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 다은이 또한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렸고 나는 그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약간은 밋밋하게 들려오던 다은이의 목소리가 언젠가부터 진한 감정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떠나가지 말라고 애처롭게 외치는 파트. 이건 다은이를 위한 멜로디였다.
“그럼 오늘은 개인 연습을 통해 자기 파트를 확실하게 숙지하도록 하고, 내일부터는 레코딩 준비에 들어갈 거야. 그리고…… 연화는 나를 따라와 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 * *
“저 진짜 괜찮아요. 하고 싶었던 파트를 못 하게 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맡은 걸 열심히 할게요.”
서운해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얼굴이 어두워지길래 따로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그랬다는 듯이, 조금 시간이 지나자 굳어졌던 얼굴은 풀리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나도 다 같이 웃으면서 일을 하고 싶지. 하지만 끝까지 웃으려면 이번 곡이 성공해야 하는 거고, 그러기 위해선 냉정하게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저 진짜 괜찮아요.”
달래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신 이렇게 해줄게.”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기도 했다.
* * *
다은이와 연습을 할 때에는 아주 간단한 요구를 덧붙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상황이란 말이야. 그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야.”
“알았어요.”
기술적으로는 상당히 완성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밋밋하게 들리는 것은 그 목소리가 가슴까지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다은이의 표현력을 위해 그런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정말로 이해할 수 있어?”
“대충은요.”
하지만 그 정도의 어드바이스로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연애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던가.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애타는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이별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테니 이런 감정을 노래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꼭 남자 친구가 아니어도 돼. 그런 거 있잖아. 네가 아끼는 거. 물건이나 애완동물이라도 좋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어떤 것이 너에게서 사라지는 거야.”
“아…….”
“무슨 일이 있어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 그런 것이 너에게서 영영 사라지는 느낌이야. 그래서 떠나지 말라고 노래하는 거지.”
이렇게 말해주면 이해할 수 있을까 했는데, 다은이는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지더니 갑자기 눈 밑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그때가 되어서야 아차 싶었다. 다은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다은이한테는 있었다.
그런 뒤에 나에게 노래를 들려줬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갑자기 가슴으로 밀려드는 진한 감정에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였다.
그때 이미, 어떤 파트를 누가 부를지는 결정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래. 그런 느낌을 계속 유지해 보자.”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음악마저 정복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작곡 분야에서는 이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고, 이제는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인간의 섬세함을 흉내 내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노래라면…….
아주 먼 훗날에는 기계가 만들어내는 목소리와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의 성대를 재현해서 그 목소리까지 복원하는 기술이 나왔다고 하니까.
하지만 자기가 경험했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까지 가능할지는…… 그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인생이 담겨 있는 노래만큼 듣는 이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 * *
노래의 깊이에 있어서는 연화도 다은이와 비슷했다.
살아온 날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이 애들의 노래를 평가하면서 ‘그 나잇대에서는’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살아온 내용은 다르다 보니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서로 달랐다.
다은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연화가 잘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이번 곡 같은 경우는 연화의 감성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연화도 곡을 잘 소화해냈는데, 이번에는 다은이가 너무 잘했어. 이 곡은 다은이한테 맡기자. 팀이 잘 되기 위해선 양보할 때도 있어야 하는 거야.”
“저 진짜 괜찮아요. 위로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렇게 불러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다. 필요하다면 내가 예전에 인혁이와 파트 분배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얘기도 들려주려고 했다. 그런 갈등이 없었다면 팀이 어려울 때 똘똘 뭉쳐서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수도 있을 거라면서.
“며칠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다은이가 부르는 걸 바로 옆에서 들으니까…… 이 곡은 얘한테 안 되겠구나 하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죠. 그래서 저 아무렇지 않아요.”
“아까 보니까 툭 건드리면 바로 눈물 뚝뚝 흘릴 것 같던데.”
“제가요? 저 진짜 안 그랬어요.”
구질구질하게 내 옛날이야기를 할 필요까진 없는 듯 보였다.
아까 파트를 나눠줄 때까지만 해도, 무너지고 있는 바닥 위에 서 있는 듯이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어느덧 평소처럼 차분하면서도 맑은 눈동자를 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곡 좀 들어봐.”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 나는 곧바로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번 앨범에 수록될 곡. 라는 제목이 붙여진 R&B 발라드곡이었다.
“어? 선생님도 곡 내실 거예요?”
“뭐? 내가 왜?”
“이거 선생님 곡 아니에요?”
“내가 가이드 넣은 거잖아.”
“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이라서 가이드를 열심히 부르긴 했다. 키가 안 맞아서 하이는 가성으로 처리해버렸지만.
“이번 앨범의 서브 타이틀곡이야.”
“아, 네.”
“여기 메인 보컬은 네가 맡게 될 거야.”
“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건조한 대답이었다. 하긴 설명을 제대로 안 해주긴 했다.
“이 곡은 메인 보컬이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부르게 돼.”
“아…….”
“왜냐면 하나의 감정선이 곡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하는 곡이라서.”
리드미컬한 미드템포의 R&B 곡이었다. 복고풍의 뉴잭스윙 사운드로 구성했고, 전반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다.
“알앤비 사운드지만 보컬에는 기교가 안 들어갔어. 소녀 같은 느낌으로 조금은 밋밋하게 그리고 톤을 정직하게 잡아서 불러야 하는 곡이야.”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앨범에선 더블 타이틀에 가까울 정도로 서브 타이틀곡도 밀어줄 거야. 이거 끝나면 콘서트 준비할 거니까.”
“네.”
“ 같은 경우는 시장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돼서 타이틀로 정한 거고 이 곡 는 내 취향이 많이 반영된 곡이야. 곡을 만든 사람으로서 신경을 많이 썼다고.”
그리고 연화에게 곡에 대한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별의 아픔을 강한 어조로 표현하는 에 비해, 는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달달한 느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감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메인 파트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런 설명을 들려주었더니 연화의 얼굴도 평소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이 곡은 구상할 때부터 네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야. 네가 잘 부를 수 있는 멜로디고, 네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감성이야. 할 수 있겠지?”
“네.”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럼 내일부터 새로운 곡도 연습을 해보자. 파트가 기니까 시간 좀 많이 내야 돼. 내가 알려줄 게 많거든.”
“알았어요.”
* * *
음악 만드는 사람이라면 사람 대하는 일이 잦을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만나는 사람이 거기서 거기고, 특정 직종의 사람들만 접하는 게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창작을 한답시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에 비해 매니저라면 활동폭이 넓기 때문에 사람들과 꽤 어울리는 편이다. 영업 다닐 때에도 그렇고, 그러다 보면 다른 회사의 매니저와 얽히는 일도 잦고,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정영수 팀장은 이번에 재미있는 소식을 들고 왔다.
“GH에서 이번에 불쾌하게 생각하나 봐요. 꼭 그때로 잡아야 했냐면서.”
에피아가 소속된 GH 엔터테인먼트의 매니저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쾌하대요?”
“우리 애들 컴백일을 자기네 애들이랑 그렇게 딱 붙여놓을 필요가 있냐고 그러네요.”
“그렇게 따지면 저희가 더 불쾌해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9월 10일이라고 못 박아놓으면 나머지 회사들은 알아서 피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깡패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죠.”
우리가 9월 15일을 컴백일로 잡은 이후 언론에서는 이걸 가지고 난리였다.
[에피아X비츠걸스 10월 걸그룹 대전.] [매월 가요계는 뜨거운 컴백 전쟁. 이번에는 에피아 vs 비츠걸스] [걸그룹 컴백 전쟁 후끈 달아올라.]같은 성향의 팀이 함께 컴백하는 일은 종종 벌어지곤 했다. 이런 뉴스가 나오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좀 특별하긴 했다. 비슷한 성향의 두 팀, 그것도 해당 분야에서 원탑과 투탑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분야에서 최정상급에 단 두 팀이 존재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그러한 두 팀이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쾌하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합니다. 둘 중 하나가 죽는 게임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주목도가 높아져서 두 팀 모두 이득을 볼 수도 있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이너스가 된다고 해봤자 손실을 걱정해야 될 정도까지는 안 간다고 보지만…… 그런데 저쪽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나 봐요.”
정 팀장은 눈썹을 살짝 구기면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쪽 매니저한테 들은 얘긴데…… 대응팀을 구성해서 강하게 나올 거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마른 입술을 한 차례 훑었다.
“어떻게 나온다는데요?”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 그러니까 음원이나 방송 등의 순위에서 절대 상위권을 내어주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우리가 컴백 날짜를 그때로 발표했을 때 GH에서는 이걸 도전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에피아뿐만 아니라 소속 아티스트들의 팬덤을 이용해서 강하게 나올 건가 봐요.”
GH 엔터테인먼트가 가지고 있는 가수들의 라인업은 무척 화려했다.
작년에 데뷔한 에피아는 등장하자마자 최고의 걸그룹으로 올라섰고, 2년 전에 데뷔한 ‘U5’라는 보이그룹은 국내를 비롯해서 아시아권에서 가장 잘나가는 팀이었다.
그 외에 지난 세대의 보이그룹 두 팀과 걸그룹 한 팀 또한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아직도 팬덤은 건재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쌓여온 노하우 덕분에 GH는 팬을 관리하는 것에 능숙했다. 만약 그 모든 팬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인다면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게는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도 있었다.
“싸우자는 거네요?”
“그렇죠.”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 정도로 나갈 것이니 겁이 난다면 피해라, 이런 뜻일 테고요.”
“맞습니다.”
아마도 내부적으로 기밀일 듯한 사항을 이렇게 정 팀장에게 노출한 것을 보면 후자의 의미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투자금을 늘릴 것 같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이돌 그룹의 데뷔와 컴백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단순히 앨범을 내고 홍보를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뮤직 비디오를 제작하는 비용, 쇼케이스 대관비와 무대 설치비, 그리고 음악방송 무대도 별도 제작을 한다면 거기에도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투입된다.
쉽게 예를 들어서 몬스터 뮤직에서 쇼케이스를 한 번 여는 것에 수천만 원 정도의 투자금이 들어간다면 GH에서는 그것에 열 배 가까운 돈이 들어갈 것이다.
그 밖에 곡을 만들고 안무가를 섭외해서 안무를 만드는 것도.
아마도 곡은 지금까지 해왔듯이 프로듀서 포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쪽을 택하겠지만 GH의 스타일을 보면 안무 쪽에는 세계적인 안무가를 섭외할 것이 뻔하므로 이쪽으로 나가는 돈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나 나가는 돈이 많음에도 이번에는 투자를 더 늘려서 우리 쪽의 기를 죽이겠다는 심산인가 본데.
“그래도 겁을 준다고 물러설 수는 없잖아요.”
“강행하시려고요?”
“당연하죠.”
하지만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15일이라고 발표를 해버렸는데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우리 쪽에서 백기를 들었다고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아마도 GH에서는 그렇게 나와주기를 원한 것 같지만.
“우리는 음악으로 승부를 내야죠.”
GH 엔터와 비교해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멤버들의 매력, 그리고 음악. 단지 이것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해야 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른 정보가 잡힌다면 또 박 피디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 * *
그날은 저작권료가 정산되는 날이었다. 국내 저작권이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오는 돈이.
유아연의 에 관한 일본 쪽 저작권료가 나에게 들어오는 날이었다.
지난주에 정산 내역서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통장에 찍힌 돈을 보니까 그제야 입이 쩍 벌어졌다.
뗄 거 다 떼고 나서 내 손에 쥐어진 게 3억가량.
고작 곡 하나 가지고 한 분기에 이 정도를 벌었다. 확실히 세계 2위의 음악 시장이라고 할 만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벌어들인 저작권료를 다 합쳐도 1억이 되지 않았다. 발표한 곡 중에서 내가 단독으로 만든 곡은 인환이 형의 곡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전부 공동 작업이었다.
“별일 없으시죠?”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대뜸 그런 소리부터 하셨다.
“아들 전화를 그렇게 퉁명스럽게 받는 사람은 세상에 엄마밖에 없을 거야.”
-업무 시간 아니냐. 일해야 되는 놈이 전화하니까 그렇지.
“아직 업무 시작 안 했어요. 지금 출근 중이에요.”
-지금? 무슨 놈의 회사가 11시에 출근해?
“원래 그래요. 어제 새벽까지 일해서.”
돈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부모님을 떠올린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 아 역시 나는 괜찮은 놈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흐뭇해하고 있었다가 어머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듯싶었다. 게다가 이런 잔소리까지.
-너 그럼 운전 중이냐?
“아니에요.”
-운전 중이네. 차 소리 들리는 거 뭐야? 내가 운전하면서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
“주차장이에요. 주차장! 시동 켜놓고 차 안에 있는 거라고.”
잔소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본론을 바로 꺼냈다.
“엄마, 요즘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이번에 돈 좀 들어와서.”
-필요할 게 뭐 있어. 너 결혼해서 손주나 보면 그만이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아버지 차 바꾸실 때 되지 않았어요? 내가 하나 해드릴 수 있는데.”
-야, 그런데 네 아버지 요즘 기분 좋아 보이더라. 내 아들이 박영민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란대.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몬스터인지 뭔지 그런 데서 음악 만드는 일 한다니까 이름이 뭐냐고 물어. 그래서 박영민이라고 하면 진짜냐고 난리야.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 젊은 애들이.
도대체 누구한테 내 얘기를 했길래.
“아무튼…… 내가 바빠서 그래요. 이왕이면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한동안은 바빠서 못 가요. 아버지 차 한 대 해드리려고 하니까 말씀 좀 드려봐요. 엄마 옷이나 구두 같은 것도.”
-야 그런데 네 아버지는 차 사주고 나는 고작 옷이야?
“그럼 차 값만큼 옷 사드릴 테니까 명품으로 쫙 고르세요. 그것보다 진짜 죄송해요. 너무 바빠서 갈 시간이 없어요.”
이 정도면 아들 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돌아오는 건 또 잔소리였다.
-됐으니까 너 장가갈 때나 보태라. 야 그런데 너 그렇게 바쁘면 연애할 시간이나 있냐.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면 뭐해. 짝을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애도 낳고 그러고 살아야…….
* * *
결국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은 뒤에야 사무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갑자기 큰돈이 들어온 것에 어안에 벙벙했다.
이제부터 내 단독 작업곡들이 세상에 점점 풀리게 될 텐데…… 사람은 정말 간사한 동물인지, 이제까지는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띄워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면, 그게 돈이 되어 나에게 들어올 것에도 은근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부자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일을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카랑카랑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죠?”
관리팀 사무실이었다. 세금 문제를 의논해 보기 위해서 잠깐 들렸던 차에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일 제대로 안 해요?”
“아연 씨. 왜 그러시죠?”
“매니저 한 명만 달랑 내보내고…… 그럼 저한테 어떻게 하라는 거죠?”
유아연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쩐지 언짢은 기색이었다.
“사람이 부족해서 그래요.”
“부족하면 더 뽑아야죠. 뭐하고 있어요?”
“안 구해져서 그렇습니다. 요즘 매니저 구하기 힘들어요.”
“힘들다는 사람들이 그러고 있어요? 나 방금 여기 문 열고 들어올 때 보니까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만 보고 있던데요?”
유아연이 언짢은 것은 자기 일정에 매니저를 한 명만 보냈다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두 명 정도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관리팀이 뭐 하라고 있는 건데요? 사람이 없으면 나가서 구해오라고 하세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퇴근 제시간에 하고 주말 쉴 거 다 쉬고 그러는 건가요?”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 가수한테 사고 생기면 관리팀이 책임질 거예요?”
“저희도 구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아, 그럼 저도 그렇게 핑계 대면서 살까요? 저는 잘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이러면 되는 거죠? 그게 프로가 할 말이에요?”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사무실 안을 훑어보던 유아연은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했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여기에 계시네요.”
나를 보더니 그나마 굳은 표정이 풀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고 보니 아연이와는 오랜만에 마주친 것이었다.
“아연아. 그러지 말고 나가자.”
그렇게 억지로 끌고 나온 다음에야 관리팀은 조용해질 수 있었다.
나와서 내 사무실로 함께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조금 진정이 됐는가 싶었지만, 막상 나하고 둘이 있게 되자 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제가 틀린 말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선배님도 잘 아실 거예요. 선배님이 저한테 뭘 요구하시면 전 그게 될 때까지 연습을 해서 그다음 날 제대로 보여줬어요. 그렇죠?”
그랬던 것은 사실이다. 정상에 있는 가수는 과연 다르구나 하는 걸 아연이와 일하면서 느꼈으니까.
“돈을 받는 프로라면 자기가 맡은 일에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진 않겠는데, 그런 말을 할 거면 직접 하지 말고 차라리 매니저를 시켜서 해. 거기서 그런 말을 하면서 네 이미지를 깎아 먹을 이유는 없잖아.”
“매니저가 없으니까 그렇죠.”
“한 명 있다면서.”
“미덥지 못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투정을 부리듯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지 마요?”
“……?”
“선배님이 하지 말라면 안 하죠,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열여섯 살의 유아연이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무 살의 유아연도.
자기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 눈 딱 감고 미친 여자를 연기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벌어오는 돈이 어디로 새어 나가는지도 모른 채 자기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어린 광대가 되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었고, 이 회사에 있어서도 그럴 만한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내가 말했지? 삐뚤어진 마음으로는 음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고. 좀 나아지나 싶더니 왜 또 시작이야.”
“그럼 진짜 하지 마요? 제가 막 무시당해도?”
아연이는 펄쩍 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말했다.
“누가 무시한다고 그래?”
“오늘도 보세요. 로드 한 명 보내놓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잖아요.”
잔뜩 토라진 투로 말하는 걸 보면, 자기편을 만나 고자질하는 어린 학생 같아 보였다.
“너 자꾸 이러면 나하고 일 못 해.”
“…….”
그래도 아연이와 함께 작업을 한 덕택에 많은 걸 얻었다.
금전적인 건 물론이고 저메인 존스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아연이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저메인 그 사람하고는 얘기가 잘 된 거예요?”
“조만간 만나기로 했어.”
“잘됐네요. 진짜 지긋지긋한 아저씨였는데.”
일본은 저메인 존스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연이와도 안면이 있다고 했다.
“맨날 추근거리는 거 지긋지긋했는데, 그게 또 이렇게 풀리네요.”
여자를 좀 밝히는 남자라고 한다. 그래서 아연이에게도 관심을 보였고, 아연이의 음악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 나온 곡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운드를 접하고 놀랬다고.
“그 사람하고 어울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닮지는 마세요. 정말이에요. 절대 닮으면 안 돼요.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고요.”
“어떻길래 그래?”
“여자를 끔찍하게 밝힌다니까요. 선배님하고는 이미지가 완전히 반대인 사람이니까, 그냥 음악 작업만 같이하세요. 알았죠?”
그럼 내 이미지는 어떻길래.
“아니면 온라인으로 작업하면 안 되나. 요즘 그렇게 많이 하잖아요. 직접 만나진 않고 온라인으로 곡 주고받으면서.”
“내가 알아서 할게.”
“선배님은 너무 순진해서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아연이는 근심 어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뭐 어떻다고.
“그 사람하고는 같이 음악만 하세요. 그냥 음악만.”
* * *
비츠걸스 2집 앨범 레코딩에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그래도 퍽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저는 박영민 피디님이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어요.”
작업을 모두 마쳤을 때, 함께 작업했던 엔지니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제가 화를 냈어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애들한테 언제나 나긋나긋하시더니, 이번에는 막 호통을 치시던데요.”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인지,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저도 무서웠다니까요. ‘다시!’ 이렇게 소리치실 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고요.”
하긴 이번 레코딩을 하면서 ‘다시!’라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다. 그 말을 어찌나 많이 했는지…….
“그런데 정 기사님, 전에 GH에서도 잠깐 일을 하셨다고 했죠?”
“그랬었죠.”
“그럼 그쪽 사람들도 좀 아시겠네요?”
“알기는 알죠. 스튜디어에서 일하면서 대부분 한 번씩 만났으니까요.”
우리 회사의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GH 출신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함께 믹싱 작업을 하면서 넌지시 그 회사에 대해서 물어봤다.
물론 GH는 워낙 큰 회사니까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도 수많은 정보들이 나와주었다. 예를 들면 GH의 사장 이름이 안근형이라는 것도.
“안근형…… 그럼 사장 이니셜을 딴 거네요. 근형 엔터테인먼트?”
“그렇죠. 그 시절에는 그런 식이었잖아요.”
그리고 안근형 대표는 매니저 출신이라고 했다. GH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할 때는 무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고 한다.
“그럼 정 기사는 그쪽 프로듀서도 만나 보셨죠?”
“포포요?”
“예. 그 사람이요.”
GH는 처음에 그저 그런 가수 몇 명을 데리고 있는 소규모의 신생 기획사였지만, 작곡가 포포가 함께한 뒤로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돌 음악이 한국에서도 먹힐 것을 예감하고 국내 최초로 아이돌 그룹을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처음 선보인 보이그룹이 그야말로 대박을 내면서 지금의 GH 엔터로 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GH가 회사는 큰데 프로듀서는 한 명이잖아요. 그냥 프로듀서가 아니라 그 회사의 음악을 총지휘하는 음악 감독 같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가 아이돌 음악을 이끌기 시작하면서 국내에서 아이돌 붐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후 걸그룹, 비주얼 록밴드, 힙합 듀오 등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키워내며 GH 엔터테인먼트를 국내 최고의 연예 기획사로 키워냈다. 철저하게 10대의 팬심을 공략하면서.
“그런데 저도 그 사람은 만나 본 적이 없어요. 제가 GH에서 거의 2년 정도 일을 했던 것 같은데…… 한 번도 만나질 못한 거죠. 어떤 사람인지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알려진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앨범 크레딧에 언제나 등장하는 라는 글자뿐이었다.
“처음에 그 회사가 시작할 때에는 포포가 직접 회사에 나와서 앨범 작업하고 가수들도 가르치고 그랬나 봐요.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나서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요. 제가 거기 있을 때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포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사람의 정체에 관한 것은, 예전에 내가 가수로 활동했을 때에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10대의 천재 소녀라는 얘기도 있었고, 미8군 시절부터 록음악을 해온 60대의 거장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심지어는 개인이 아니라 팀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음악으로 번 돈을 남들 모르게 쓰며 인생을 즐기고 있는 건지, 그런 건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그 사람의 존재감은 엄청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 사람의 승인이 있어야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어요.”
“회사에 나오지도 않으면서요?”
“네. 업무 지시가 내려오는 라인이 따로 있어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지시 내린 걸 어디서 모니터하는지 진짜 꼼꼼하게 분석을 해서 다시 코멘트를 내려주고 그럽니다. 레코딩할 때도 절대 나오는 법이 없어요. 그런데 보컬 레코딩 한 프로가 끝나면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 곧바로 수정 사항이 내려와요. 그럴 땐 진짜 소름 끼치곤 했었죠.”
대부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그 회사에서 일을 했던 당사자가 들려주는 것이라서 그런지 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쨌든 GH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가 컨트롤 한다는 것,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 쪽을 짓누르겠다는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에피아는 2집 앨범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다. 은둔하고 있는 괴짜 프로듀서의 새 작품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에피아의 2집 타이틀은 이라는 곡이었다.
이틀 전 18초짜리 티저가 공개되었다. 홍보 기사로는 ‘상큼한 이미지’를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티저가 보여주는 것은 농염하면서도 섹시한 모습이었다.
각선미를 강조한 매끈한 다리가 클로즈업된 샷이었고, 흑백 톤의 배경에서 새빨간 구두가 강조된 모습이었다.
첫 티저에서는 에피아 멤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얀 맨살을 노출하고 있는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빨간 구두가 역동적인 스탭을 밟고 있는 모습이 짤막하게 소개되었다.
‘상큼한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선정적인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다음 날 또 다른 티저가 공개되었다. 이번에도 18초짜리.
이번에는 에피아의 멤버 한 명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듯한 고딕풍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여, 허벅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멤버가 어디론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흑백 톤. 그러나 빨간 구두만큼은 진한 색을 품고 있었다.
도망치다가 넘어진 멤버를 전신으로 잡다가 다리 부분을 강조하며 빨간 구두를 가득 담은 샷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선정적인 이미지.
하지만 오늘 발표한 1분짜리 티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화처럼 원색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을 배경으로, 마치 뮤지컬과 같은 구성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은 동화 ‘빨간 구두’의 주인공을 뜻하는 것이었다.
장례식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갔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되었다는 비운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장례식에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가는 것이 예의였지만, 매혹적인 빨간색에 빠져 버린 카렌은 빨간 구두를 신고 가서, 그만 영원히 춤을 춰야 하는 저주에 걸리고 만다.
욕망을 이기지 못해 금기를 깨뜨리면 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화였다.
이번 티저에서는 동화 ‘빨간 구두’에 맞추어 아홉 명의 카렌이 빨간 구두를 선택해서 저주에 걸리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동안 부드러운 스트링 사운드 위에 입혀진 플루트의 소리가 의 메인 테마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5초. 배경이 애니메이션에서 현실의 무대로 옮겨지더니 선정적으로 다리를 노출한 아홉 명의 에피아 멤버들이 시원한 동작으로 의 후렴구를 안무와 함께 보여주었다.
그 부분은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반복해서 감상했다.
음악만 떼어놓고 보면 평범한 후크에 불과했지만 세련된 안무와 그걸 근사하게 잡아낸 구도 때문에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선정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퇴폐적이지는 않았고 마치 아름다운 조형물을 감상하는 듯했다.
우리 애들도 충분히 저런 느낌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개개인의 매력만을 보면 무엇 하나 뒤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라면 우리 애들 쪽이 훨씬 뛰어났다.
아홉 명과 네 명이라는 숫자의 차이 때문에 무대가 가득 차는 느낌이 적을 뿐, 퍼포먼스의 수준을 보면 우리 애들이 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었다.
* * *
그렇게 한참 영상을 분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 실망이에요.”
“왜?”
“언니들한테 다 일러야지.”
옆에 앉아 있던 지민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뭘 일러?”
“비츠걸스의 프로듀서가 경쟁 그룹한테 푹 빠져서 보컬 레슨도 안 하고 영상만 보고 있다고요.”
티저 공개 시간이 하필 연습생들 레슨 시간과 겹쳐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곳은 연습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피아의 티저 영상을.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이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지 말고 너희들도 이거 봐봐. 공부가 될 거야. 팬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런 걸 지켜보라고.”
“됐어요. 핑계 대도 안 통해요. 다음에 언니들 만나면 진짜로 일러야지.”
지민이는 정말로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가장 기특한 연습생이었다.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내가 학원에서 일할 때 데리고 있던 제자이고, 연습생 오디션을 보라고 내가 권했다는 것도.
자칫하면 지난 연습생 선발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민이 또한 내 빽으로 들어왔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을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지민이는 당당하게 실력으로 자기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보컬 실력은 중간 이상, 그리고 안무에 있어서는 역대급 댄서를 키우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떡볶이 사주면 입이 찢어지게 웃었던 애기가 어느덧 이만큼이나 훌쩍 커버려서 몬스터 뮤직의 미래를 책임지는 인재가 되어버렸다.
“예음아. 나한테 좀 와봐.”
“저요?”
심예음은 얼마 전부터 내가 맡고 있는 A반에 들어와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독특한 음악 세계를 가지고 있는 애라서 내가 계속 담당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구상하고 있는 팀에 넣고 싶기도 했다. 스스로 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 팀을 키워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울 거 같아서.
춤을 질색하는 애니까 댄스의 비중을 대폭 축소하더라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댄스 쪽으로는 쑥쑥 성장하는 아이가 있어서 그쪽으로 몰빵하면 되니까.
하지만 예음이는 상업적인 음악에는 질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사람들 누군지 알지?”
“이름은 알아요. 에피아라고.”
“이거 봐봐. 내일 컴백한다고 올라온 영상인데, 보고 나서 어떤 느낌인지 말해봐.”
“에피아요? 저는 그런 음악 진짜 싫어하는데.”
예음이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음악을 다양하게 들어보라고 했잖아. 싫어하는 것도 들어보면서 듣는 귀를 넓히라니까.”
“근데 진짜 그런 음악은 음악 같지도 않아요. 예쁜 애들 나오니까 눈으로 만족하는 거 아닌가요? 음악이야 뭐…….”
“그럼 비츠걸스는?”
“비츠걸스는 다르죠. 선생님이 만든 음악이기도 하고, 슈프림즈처럼 음악적으로 들어볼 가치도 있고…… 제 느낌은 그래요.”
사실 이건 문제가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기획사에서 트레이너가 연습생에게 어떤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을 때 ‘내 취향 아닌데요.’ 하고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는 예음이에게 그런 걸 터치하지 않았다. 반대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비틀즈를 만났을 때 놀랐던 것은, 비틀즈의 멤버들은 네 명 모두 악보를 볼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나 훌륭한 곡을 쓸 수 있으면서 악보를 못 본다고? 하지만 정말이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기타 코드만 종이에 적어놓고 그걸 보면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조지 마틴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 애들에게 악보 보는 걸 가르쳐주지 그래요? 그러면 그 애들도 음악가로서 더 성장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그런 말에도 조지 마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예술가에겐 뭘 주입시키면 안 돼요. 악보 보는 걸 억지로 가르쳤다간 그들의 위대한 음악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의미였다.
나 또한 예음이에게 무언가를 일부러 주입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예음이가 그렇게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은 아니고…… 아직 성장할 것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맞는 말일 것이다.
“예음아. 만약에 말이야. 네가 에피아 같은 이런 음악을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이런 음악을 만들라는 제의가 너한테 갔다면?”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전 안 해요. 돈은 밥 굶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니까요. 아니, 조금 굶어도 상관없어요.”
“앨범 두세 장 정도만 내는 걸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면? 그렇게 두세 장만 내고 남은 인생은 너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살 수 있어.”
“그래도 안 해요.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말죠.”
당돌하게 고집부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예음이와 나는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누곤 했다.
“그 두세 장은 가명을 써서 내고, 이 세상 어디에도 네가 그런 걸 만들었다는 흔적을 지워 버린다면?”
“그냥 그런 걸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한다고 해도 그렇게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곡은 못 만들 것 같아요. 선생님이 그런 질문 하는 건 꼭 이런 거 같아요. 살면서 마주칠 일도 없는 여자 연예인 두 명 정도를 두고 둘 중에 누구랑 사귈래? 남자들 이러고 노는 거요.”
이렇게 반응하는 게 재미있어서 자꾸만 얘한테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툭툭 건드리면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자기 생각을 밝히곤 해서.
“선생님. 은설이는 아직 여기로 못 오는 건가요?”
이번에는 채아가 물었다.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리고 목소리마저 낮고 허스키한 애가 이렇게 물으니 슬픈 드라마 속의 대사처럼 들렸다.
“맞아요. 은설이 언니 너무 보고 싶어요.”
“아직은 안 되지. 다음 월말 평가 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한 사람 빠지니까 텅 빈 것 같아요.”
매일 세 명이 같이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빠지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그렇다고 예음이 언니가 불편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채아는 자기가 말실수라도 했다는 것처럼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오해하실까 봐요.”
“아니에요. 정말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번에 뽑은 연습생 중에는 성격이 모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아가 강하거나 관심에 목마른 애는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것도 스타가 될 수 있는 자질이었다.
“은설이 언니까지 와서 네 명이 같이 있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 나중에 팀 만드실 때는 은설이 언니 데려오실 거죠?”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지민이는 애원을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 * *
그리고 하루가 지나 에피아의 2집 앨범이 발표되었다.
온라인에서는 가는 곳마다 에피아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찼고, 오프라인에서도 타이틀곡 이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었다.
은 뚜껑을 열어보니 평범한 곡이었다.
흥겨운 스윙 리듬에 브라스 사운드가 전면에 나서며 그루브를 강조하고 있었다.
멜로디가 뚜렷하고 구성은 아주 단순했다. 두세 번 듣는 것만으로도 곡을 외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곡이었다.
뮤직비디오는 마지막 티저의 내용과 같았다. 동화 ‘빨간 구두’의 내용에 맞추어서 마치 판타지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한 영상이었다.
의상도 그다지 선정적이지는 않았다. 안무를 소화하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로 각선미를 강조한 것 외에는, 그다지 노출이 심하지도 않았다.
다만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사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의도한 듯 보였다. 금기를 깨버렸기에 빨간 구두를 신고 평생 춤을 춰야 하는 고통이 주어진 것, 마치 이것은 섹스라는 금기를 넘어섰을 때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일이 더없는 쾌락이라도 된다는 의미로 들려오기도 했다.
‘빨간 구두를 신고 멈추지 않는 춤을 추는 것이 너무 너무 짜릿해.’ 라는 가사도 있듯이.
어쨌든 에피아는 성공적으로 2집을 세상에 내보냈고, 모두 예상했듯이 차지할 수 있는 1위 자리는 모조리 차지하며 자신들이 걸그룹 중에 최고라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5일 뒤. 우리 애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맹추격할 것이다.
준비는 모두 마쳤고 이제 우리는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비츠걸스의 컴백은 문제없이 준비되었다. 사실 그동안 정영수 팀장과 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지저분하게 나오면 어쩌나 했습니다. 그렇게 나올 걸 대비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방송국 쪽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누구 누구가 출연하는 방송에는 우리 애들을 못 내보냅니다.’ 하고서.
실제로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소속사 차원의 일이 아니라 연예인이 개인적으로도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싫다는 뜻을 밝히는 일도 있었다.
만약 이번에 ‘비츠걸스가 출연하는 방송에는 에피아를 안 내보낼 겁니다.’ 하고 나왔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저도 좀 강하게 나가려고 했었는데…… 별문제는 없었어요. 방송 일정도 무난하게 잘 잡혔습니다. 그중에는 에피아랑 같은 무대에 서는 것도 꽤 있어요.”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거네요?”
“그런 뜻으로 읽힙니다.”
그쪽 회사와 그쪽 프로듀서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은 올라가는 일이었다. 실력으로 판가름을 내자, 이런 뜻으로 읽혀졌다.
그런데 그쪽에서 생각하는 페어플레이의 범위가 조금 넓은 것 같기도 했다.
에피아의 팬카페, 여러 단톡방, 갤러리 등에서 일제히 공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10월 15일 스밍 총공 가이드.]타겟은 비츠걸스의 앨범이 발매되는 날이었고 시간 마저 오후 6시였다. 비츠걸스의 새 앨범은 그날 오후 6시에 일제히 음원 사이트에 등록된다.
게다가 GH 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큰 팬덤을 가지고 있는, 현재 최고의 보이그룹인 U5에서도 같은 내용의 공지가 올라왔다.
[10월 15일 U5&에피아 스밍 총공 들어갑니다.]역시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얘네 둘뿐만 아니라 GH 쪽 팬덤에는 전부 15일 스밍 공지가 돌아다닌다네요.”
“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아이돌 시장은 사실 경쟁과 전쟁으로 굴러간다.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아이돌을 덕질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에는 숫자가 있고 순위가 있으며 그걸 비교를 할 수 있다.
음악 방송에서는 매주 순위를 매겨서 발표하고, 음원 사이트에서 스트리밍 순위를 발표하는 것도 예민한 사항이고, 음반 판매량은 그 아이돌의 시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어준다.
그렇기에 경쟁 그룹을 견제하기 위해서 스트리밍 공격을 하는 일은 흔하게 있어 왔다. 이렇게 여러 팬덤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뭉치는 일이 드물어서 그렇지.
“에피아의 팬덤과 U5의 팬덤은 전혀 겹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집단인데, 과연 힘을 합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GH는 팬 관리에 능숙한 회사라서…….”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스밍에 들어가는지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단지 10월 15일 오후 6시부터 에피아의 앨범과 U5의 앨범의 수록곡들이 나열된 리스트를 반복해서 스트리밍하여 이들의 곡을 차트에서 줄 세우겠다는 것.
단지 이런 내용만이 공지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팬덤 내의 네임드들은 분위기를 점점 잡아가고 있었다.
-15일 스밍데이 놓치지 마세요!! 꼭!!
-다들 자극 좀 받으세요. (기사 링크) 나중에 후회하면 늦으니까 제발 스밍 좀 열심히 합시다. 사담은 적당히 + 스밍 인증 열심히
-유파는 우리가 해달라는 브이앱 바쁜 시간 내서 항상 해주고 자기들 청춘 바쳐서 좋은 음악 들려주고 위로도 해주잖아. 근데 우리가 스밍 한 번 못 해준다는 게 말이 돼?
-10월 스밍 이벤트 : 10월 15일 오후 6시 ~ 10월 31일 자정까지 17일 동안. 스밍 캡쳐 후 답멘 다세요. 상품은…….
네임드들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니 뭔가 똘똘 뭉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야죠. 이제 비츠걸스의 팬덤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힘을 발휘해 줄 거예요.”
10월 15일 당일에는 앨범 발매 쇼케이스가 오후 8시부터 있을 예정이었다. 팬 쇼케이스로 꾸며진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팬들을 집결시킨 뒤 우리의 힘도 뭉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15일은 금방 다가왔다.
* * *
앨범 작업을 마무리 짓고 15일이 되기까지 인혁이와는 몇 마디 나누질 않았다.
지난 회의에서 언성을 높인 이후 다소 멀어졌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 녀석과는 늘 이런가 보다.
가까워졌다 싶으면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으면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있었다.
8시로 예정된 쇼케이스는 7시 반부터 입장이 가능했다. 음원 출시 시간인 6시부터 공연장 앞으로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쇼케이스에 입장 가능한 팬들은 모두 500명이었다. 곧 있으면 공식 창단될 팬클럽에 가입 신청을 해둔 사람이어야 하고, 비츠걸스의 지난 앨범을 구매한 사람이어야 이번 쇼케이스에 응모할 수 있었다.
팬들 중에서도 열성 팬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기실로 들어가 보니 애들은 리허설을 마친 후 메이크업을 고치느라 다들 바버체어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는 것이라서 그런지 인사 소리부터 유난히 기운에 차 있었다.
안무는 레코딩이 끝난 이후에 만들었다. 늘 해왔듯이 팀의 메인 댄서인 선하가 처음부터 끝까지 안무를 짰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고수했던 지난 앨범과 다르게 에서는 다소 도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떠나지 말라는 외침 이면에, 이렇게 아름다운 나를 두고 떠날 거냐는 의미를 만들어두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허리의 아름다운 곡선을 강조하는 동작이 주를 이루었고, 특히 후렴에서는 섹시하게 골반을 움직이며 도발적인 자세를 만들어냈다.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를 떠나갈 거야? 비츠걸스의 네 명은 몸으로 이것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의상도 그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파격적인 노출 같은 건 없었지만 가슴에서부터 골반까지 내려오는 라인을 강조한 미니 드레스와 A 라인의 짧은 스커트 등이 주를 이루었다.
“와…… 너는 완전히 딴 사람 같다?”
“그쵸?”
그중에서 다은이는 상당히 밝은 골드 계열로 머리를 염색해서 가장 많은 변화를 준 멤버가 되었다.
곡의 중요한 파트를 책임지는 만큼 이미지 변신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조명이 반사되며 샛노랗게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으니 티 없이 맑은 피부와도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멤버들의 메이크업도 조금 강한 톤으로 선택되었다.
특히 팀의 비주얼을 책임지는 연화의 스타일링에 대해서는 몇 차례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결정이 되었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컴백을 할 때마다 더 예뻐져야 한다.’ 이건 걸그룹의 숙명이었다.
“이제 자주 못 보겠네.”
연화 옆으로 가서 그런 말을 슬쩍 건넸다.
를 연습하느라 한동안 붙어살다시피 했다. 레코딩 때는 다은이와 더불어서 나한테 가장 많이 혼난 멤버였다.
그러면서 달래주고, 다음 날 다시 스튜디오 안에서 고성을 내지르고, 그런 끝에 앨범이 완성되었다.
“선생님. 저 가끔 문자 보내도 되는 거죠?”
“그래. 힘든 일 있으면 언제라도 보내. 새벽도 괜찮으니까. 전화해도 괜찮아.”
“알았어요.”
그리고 한쪽에서는 쇼케이스 준비 과정을 영상으로 담느라 분주했다. 내 모습까지 함께 잡고 있길래 쓸데없이 표정을 관리해 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후 6시. 비츠걸스 새 앨범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음원 사이트에 앨범 수록곡들이 올라갔고,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객석을 향해 이동하면서 나는 핸드폰을 열고 무사히 음악이 등록되었는지 확인했다.
이제 한 시간 뒤면 그 결과물이 숫자가 되어서 돌아올 것이다. 초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자꾸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 * *
텅 비어 있는 객석에 유난히 눈에 띌 정도로 뚱뚱한 녀석이 앉아 있었다. 개업식에 그랬던 것처럼 어울리지 않은 정장을 입고서 머리에도 힘을 주고 있었다.
“왔어?”
“어, 그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따금 지나치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것에 외에, 이렇게 이 녀석과 한자리에 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살이 더 찐 것 같네.”
“나?”
“전에는 이렇게 삐져나오지 않았었는데.”
나란히 앉아 있는 내 자리를 침범하는 녀석의 허릿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얼마 전 빅픽쳐의 데뷔 무대도 이곳이었고, 그때도 우리는 함께 앉아 있었다. 이 정도로 살이 퍼지진 않았었는데…… 스트레스받는다고 마구 먹어 댄 건지.
“대기실에는 왜 안 왔어?”
“애들이 부담 느낄까 봐 그렇지.”
“부담은…….”
“네가 갔다 왔을 거 아냐. 그럼 된 거야.”
시간은 점점 7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서로 뜻이 달라서 갈등은 있었지만 그래도 목표로 하는 바는 같았다.
새롭게 사장이 된 인혁이는 처음 내놓는 앨범을 성공시키고 싶어 했고, 나는 내가 공들여 만든 앨범이 세상에서 빛을 보길 바랐다.
중요한 건 결과다.
아무리 첨예한 갈등이 만들어지고 있어도 쏟아져 들어오는 돈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마련이었다.
6시 50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번갈아가며 시간을 확인했다.
6시 55분.
아직 7시까지는 시간이 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리고 57분……. 58분…… 7시가 다가올수록 산만한 어린아이처럼 계속 시간을 바라보았다.
7시.
느긋한 척하기 위해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하면서 일부러 눈을 가늘게 떴지만, 다급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실시간 차트 1위는, 에피아의 .
후우, 하고 한숨이 나와버렸다.
1위 진입은 실패.
하지만 그 밑으로도 차트는 보기 좋게 정리된 물건처럼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피아, 에피아, 에피아, 에피아…….
1위부터 6위까지가 에피아의 곡이었다.
화면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에 이제는 신경질이 묻어버렸다.
태연한 척 표정을 만들고 있던 것도 이제는 사납게 구겨지고 있을 것이다.
7위는 U5.
그리고 그 아래로도 아티스트의 이름은 반듯하게 정렬이 되어 있었다.
U5, U5, U5……
7위부터 11위까지가 U5의 곡이었다.
다른 음원 사이트로 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1위부터 6위까지가 에피아, 7위부터 11위까지가 U5.
비츠걸스의 는 모든 음원 사이트에 12위로 진입했다.
옆에 앉아 있는 인혁이 쪽에서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다려보자. 고작 한 시간 지났을 뿐이니까. 지금은 팬덤의 힘으로 차트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니, 곧 있으면 반등할 수 있을 거야.’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한참 입가를 맴돌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인혁이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비츠걸스 애들도 차트를 확인했을까? 무대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애들에게는 차트를 보여주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말처럼 지켜질 수 있을까?
그런 우려 속에서 무대가 시작되었다.
8시가 되어서 무대에 밝혀지고 있을 때에도 나는 차트를 확인했다.
여전히 1위부터 11위까지는 GH 엔터테인먼트의 가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팬들도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커지고 있었다.
* * *
쇼케이스가 끝났을 때에도, 그래서 수고했다는 덕담을 주고받은 뒤 스태프들과 가볍게 술자리를 가졌을 때에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씻고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에도.
차트는 변동이 없었다.
10월 15일 실시간 차트.
1 에피아
2 에피아
3 에피아
4 에피아
5 에피아
6 에피아
7 U5
8 U5
9 U5
10 U5
11 U5
12 비츠걸스
13 비츠걸스
마치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안을 파고들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에피아의 2집 앨범 타이틀곡 은 6일 연속 1위, 그리고 비츠걸스의 새 앨범 타이틀곡 는 12위로 진입하였다.
음악으로 승부해서 이겨보겠다는 순진한 생각은 거대한 인파 앞에서 산산조각 나버리고야 말았다.
아침부터 뉴스의 연예계란은 에피아 소식으로 시끄러웠다.
에피아의 2집 앨범 판매량이 36만 장을 넘어버렸다.
일주일 동안 판매된 양, 그러니까 역대 걸그룹 초동 판매량에 있어서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그렇게나 지독하게 스트리밍을 반복하는 사람들이니 앨범 구매에 있어서도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걸그룹 초동 판매량은 10만 장만 넘어도 대박이라고 보는데 무려 36만 장…… 아마도 다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 될 것이다.
음원 순위에서 완전히 패배한 우리는 방송 성적 또한 기대해 보기가 힘들었다.
그쪽에선 더 벌어지면 벌어지지 간극을 메우긴 어려울 것이다.
“애들 좀 어떤가요?”
이럴 때 비츠걸스 멤버들을 눈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불안요소였다.
성적에서 밀린 것은 내 책임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이것으로 내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보다는 이번 일로 인해 애들이 의기소침해질까 봐 걱정되었다. 중요한 건 그거다.
-많이 피곤해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짬 날 때마다 쉬고 있어요. 잠깐 잘 때도 있고…….
매니저 김민태 씨는 아직 내가 어려운지 말끝을 자꾸 흐리곤 했다.
내가 직접 현장에 나가볼 수 없으니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렇다고 애들에게 바로 연락을 하면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하고 생각을 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자주 연락 오지 않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연락이 오면, 도대체 무슨 일이기래? 하고 의심이 드는 것처럼.
정 팀장은 아이들하고 함께 움직이는 일이 별로 없으니 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현장에는 유 대리와 김민태 씨가 나가 있는데, 둘 중에서는 김민태 씨 쪽이 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애정으로 보면 김민태 씨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애들이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같은 걸 신경 쓰면서 피곤해할까 봐 그렇습니다. 민태 씨가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 습관처럼 브라우저를 열었다. 북마크 바에는 음원 사이트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클릭해 봤지만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12위. 그대로였다.
-잘못되면 내가 전부 책임질게!
내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쇼케이스 날, 모든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인혁이와는 딱 한 마디를 나누었다.
-들어가라.
그리고 다른 어떤 말도 하질 않았다.
이 회사에 들어온 이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고, 내가 책임질 것이 있다면 그걸 짊어져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을 제대로 읽지 못한 건가. 음악 하나로 모든 걸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던 것인가.
아직은 기회가 많이 남아 있고, 어쩌면 앞으로 더 어려운 일에 직면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날 내가 겪은 감정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내 가슴을 누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 * *
김민태 씨와 통화를 마친 후 정영수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팀장님. 해주실 일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시를 내릴 것이 있었다.
“우리 팬들한테 타이틀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곡은 스트리밍하지 말아 달라고 해주세요. 차트에 타이틀곡 하나만 남겨두는 겁니다.”
-예? 왜 그런 거죠?
“보기에 안 좋습니다. 차트에서 아이돌 그룹 세 팀이 줄지어서 있는 것 말입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앞의 두 팀과 그 아래에 있는 한 팀이 서로 다른 회사라는 걸 알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아이돌 세 팀이 줄지어 있는 걸로 보고 그걸 건너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아…….
차트에서 순위가 고정되는 가장 큰 이유는 ‘TOP100 듣기’라는 것 때문이다. 차트 1위에서 100위까지를 들어볼 수 있는 기능이다.
특히 가게 같은 곳에서는 매장 안에 음악을 틀어놓을 때 TOP100 듣기로 해두면 최신곡들을 손님에게 들려줄 수 있으므로 많이 이용하곤 한다.
하지만 개인이 음악을 감상할 때는 다르다. 자기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서 듣거나, TOP 100을 듣더라도 특정 아티스트의 곡을 제외해서 듣는 기능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이번처럼 줄세우기가 심할 경우, 그 아티스트들은 제외해 버리고 나머지를 듣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애들의 곡까지 거기에 포함되어서 걸러질 수 있어요. 우리가 승부할 수 있는 포인트는 음악이니까 대중들에게 노출이 제한되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타이틀곡을 밀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열한 곡이 쌓아 올린 벽을 허물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팬심으로 음악을 들어주는 건 제대로 감상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아직 우리가 졌다고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팬의 힘으로 정상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그 팬들이 모두 에피아의 팬들은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곧 반등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올 겁니다.”
* * *
에피아의 팬매니저에게 도착한 메시지였다.
GH 엔터테인먼트 정도로 큰 회사에서는 팀마다 팬매니저가 배정된다. 말 그대로 팬을 관리하는 매니저를 말한다.
작게는 팬카페 관리, 팬들과의 소통을 맡고, 크게는 팬미팅과 이벤트 등을 기획하기도 한다.
회사의 입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고 회사에서 나오는 급여를 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회사의 직원이 아니었고 열성 팬이었다가 회사와 가까워지며 팬매니저 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팬들은 회사에 대한 불만이 생길 때마다 팬매니저에게 항의하고 때로는 팬매니저를 욕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같은 팬이었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계속 얘기하고 있다고요.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강요하면 반발이 생기잖아요.
에피아의 팬매니저도 그렇게 시작했다. GH 엔터테인먼트의 이전 걸그룹의 광팬이었고 에피아 멤버들이 연습생일 때부터 지켜보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팬매니저가 되었다.
-피디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요청하신 적이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는 요 며칠 회사로부터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단계별로 구성된 플랜에서 첫 번째 단계 ‘음원 순위 10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성공하기 위해, 회사는 지독하게도 그녀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잘되고 있잖아? 방금도 찾아봤는데 비츠걸스는 12위였어. 뭐가 문제라고 그러는 거야?’
반발심이 생긴 건 그녀였다.
일이 어긋난 것도 아니고 잘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재촉하는지…… 그녀는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눈썹을 꾹 구겼다.
[또 톡 왔음] [또?] [빛걸이 10위 안으로 들어가면 나 죽일 거 같음] [울 매니저님 고생이 많다ㅜㅜ] [잘되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몰라. 불안한가 봐요.]에피아의 팬 중 몇 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이었다. 팬덤에서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팬매니저가 그나마 속 얘기도 좀 할 수 있는 그런 곳.
[빛걸 이번 곡 진짜 좋음. 불안한 거 이해돼요] [그거 듣지 마요.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어쩌다가 우연히 듣게 된 거라서…… 쩝……]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우리 프로듀서님이 저번에 그거 때매 자존심 상하셨다고] [뭐가요?] [브라이언 존스인가 그 사람이 박영민한테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요] [브라이언이 아니고 저메인 존스] [아 맞다. 암튼 그거 때문에 자존심 상하셨다고]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는데요?] [그냥 어디서 들었어요] [그게 아니라 빛걸 컴백 날짜 같이 잡은 거 때문에 그럴걸요]팬매니저에겐 이것도 일이었다. 이렇게 팬들과 소통을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나 불만사항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단톡방에서 떠들고 있다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게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몬뮤에서 초강수를 둘 만했다고 봐요] [왜요?] [곡이 진짜 좋아요] [우리가 총공 안 했으면 먹혔을 듯] [그거 제발 듣지 말라니까요!!] [멜론에서 듣는 거 아니에요] [멜론 아니라도요. 총공 기간 동안만 참아주세요. 제발요.] [박영민이 능력자이긴 한 듯] [곡 뽑아내는 능력은 인정해 줘야 돼요] [이거 어쩌면 머글들이 듣기 시작하면 우리가 먹힐지도] [것보다 이번에 연화 너무 이쁘게 나왔음] [원래 여돌 비주얼 원탑이잖아요] [아니 이번엔 진짜 뭐랄까. 보고 있으면 막 빠져듬] [나도 연화 때매 갈아탈 뻔했는데] [아 진짜 님들 왜 자꾸 이러시나요. 자꾸 이러시면 이 방도 타돌언급 금지합니다.] [ㅈㅅ요]사실 팬매니저도 곡이 좋다는 것에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비츠걸스의 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곡 전체를 들은 것은 아니었고 ‘컴백대전’ 이라는 내용을 담은 스페셜 영상에서 짧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곡의 후렴, 비츠걸스의 메인 보컬이 애절한 톤으로 열창하는 부분 만을 들었다. 영상에서는 그 부분만 짧게 소개했었기에.
그런데 잠깐 들은 그 파트가 잊혀지지 않고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에피아의 음악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음악 자체가 끝없는 메아리가 되어 가슴 속에 머물러 있는 일.
‘딱 한 번만 들어볼까?’
그저께부터 계속 그녀의 가슴을 흔들고 있었던 충동이었다.
‘그래. 딱 한 번만 들어보자. 그래봤자 고작 1을 올려주는 것뿐이니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과감하게 무언가를 클릭했다.
비츠걸스
‘딱 한 번만 들어보고 다시는 듣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인트로부터 너무나 매력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한 이온음료 같은 소리였다.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렸지만 물이 없어서 혀가 메마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차가운 이온 음료를 한 모음 입안으로 머금은 것만 같았다.
차갑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듯했다.
‘아 진짜 박영민 이 사람…… 곡은 너무 잘 만든다.’
이런 사람이 에피아의 곡을 써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후 사라져 버렸다.
비츠걸스의 수준 높은 보컬이 곡을 이끌고 나갔다. 귀에 착착 감기는 이 목소리에, 그녀는 너무나 황홀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곡의 중반에 이르러, 메인 보컬의 후크가 화살처럼 날아와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영상에서 잠깐 들었던 그 부분…… 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듣고 있으니 그 감동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GH의 음악도 완성도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 곡은…….
‘한 번만 더 들을까? 딱 한 번만.’
참기 어려운 충동이었다. 마치 그녀의 몸이 본능처럼 음악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걸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거라고.
[팬매님!] [팬매님!] [큰일 났음]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헐] [망했다] [팬매님! 뭐해요? 빨리 와요] [빨리] [무슨 일인데 그래요?] [빛걸 9위] [일 났음] [예?]그와 동시에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GH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녀를 찾는 전화였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슨 소릴 들을지 뻔했기 때문에 그녀는 도저히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빨리 스밍 독려하세요.] [빨리]진동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붙잡고, 그녀는 다급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카페에 제가 올릴 거니까 빨리 갤하고 트윗에 올리세요] [아 그리고] [지금부터 밤 12시 사이에 스밍 인증하는 사람한테 상품 준다고 전달하세요.] [상품 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암튼 빨리 올려요] [빨리]손을 쓰기에는 늦었다고 해야 하나, 그것보다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10월 17일 오후 8시
비츠걸스의 는 GH 엔터테인먼트가 쌓아둔 열한 개의 벽을 차곡차곡 부수기 시작했다.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기세였다.
그리고 오후 9시
무려 4위까지 올라와 버렸다.
U5의 곡들을 모두 제쳐 버리고, 에피아의 곡도 고작 3개만이 버티고 있었다.
팬매니저의 전화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고, 팬들도 우왕좌왕하며 이 현상에 놀라고 있었다.
오후 10시
에피아의 만이 홀로 남아 진격하며 올라오는 거인에게 맞서고 있었다.
비츠걸스가 그리고 있는 실시간 점유율 그래프는, 가파른 곡선을 만들어내며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