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3
3장 Sweet Day(1)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안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는 빽빽한 후미등의 행령이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차는 슬금슬금 기어가다시피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저녁인 것 같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음악이 계속 들려왔다. 비츠걸스의 . 그러고 보니 귀에 이어폰이 꼽혀 있었다.
곡을 만들면서, 그리고 레코딩하면서,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치면서 수없이 들었지만 다시 들어도 이 리듬은 괜찮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되는 그루브, 그리고 고음을 내지르며 떠나가지 말라고 외치는 매혹적인 보컬.
흐뭇하게 미소가 만들어졌다. 잘 키워놓은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기쁨이 이런 걸까.
“전체 중에서 56퍼센트라고 합니다.”
갑자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녀가 있었다. 내 꿈속에 나타나는 바로 그 여자.
아, 이거 꿈이구나.
“음악을 듣는 사람 중 56퍼센트가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다고 하네요.”
이어폰을 귀에서 뺐더니 중저음의 허스키한 그녀의 음성이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핸들을 붙잡고 운전하고 있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91퍼센트가 자기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해서 듣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음악을 듣고 있는 겁니다. 출퇴근길에, 핸드폰과 이어폰으로.”
그제야 잠이 확 달아났다.
아마도 이렇게 기묘한 경험을 자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꿈에서 이게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말이다.
“배경이 지하철 안이나 버스 안이었으면 그럴듯했을 텐데.”
“왜요?”
“남의 차 조수석에 앉아서 퇴근하는 사람보다 지하철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걸.”
그러자 그녀는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여기로 택했어요. 조용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저녁의 도로는 점점 어두워졌다. 오른쪽으로는 한강이 보였다. 이제는 차들이 꼼짝 안 하고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곡 쓰는 게 재미있나 봐요?”
“재미있지. 내가 만든 곡을 애들이 부르는 걸 지켜보면, 그것만큼 기쁜 게 없어.”
“그거 아세요? 원래 당신에겐 이 정도의 작곡 재능이 없어요.”
“그래?”
“어느 정도 곡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완성된 곡의 대중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지, 그걸 만들어내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가끔 이렇게 차갑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걸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당신이 말한 게 맞아. 나는 곡을 잘 만들지 못해. 완성된 곡에 시장성을 매기는 일이나 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표본을 아주 많이 준비하는 거야. 그 표본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판단하는 거지. 그러면 이 곡은 앞의 것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디가 부족한지 보이게 되고, 그런 식으로 수정과 보완을 하면 내 마음에 드는 곡이 만들어지는 거야.”
나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건 당신 말고 다른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수많은 곡을 만들어놓고, 그중에서 나은 걸 고르는 거죠. 하지만 당신은 어떨 때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잠도 안 자고, 자기 생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곡만 만들어내는 걸 보면 좀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이것에 대해선 전에도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대꾸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 타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곡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게 원래 내 능력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이다.
“당신은 원래 최고의 제작자가 될 운명이었고 그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지금의 모습은 제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다르네요.”
“내가 꼭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맞춰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조금 날카롭게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조금의 행운만 있었더라도 당신은 가수로 성공한 뒤 제작자로 정상을 차지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운이 따르지 않아서 침체되어 있던 시기가 당신을 바꾼 것 같아요.”
그녀가 애써 말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끈 대로 따라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놀랍다는 의미였어요. 가수로 실패를 겪고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대신해서 남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능력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는 그저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겠죠. 그러다가 곡을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가지게 된 것이고요.”
그녀는 핸들을 잡은 채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만들어서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겠네요.”
“왜?”
“이제 깨어나시죠. 당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어요. 이제 그 사람에게 가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잠에서 깨어나니 내 사무실의 내 책상 앞이었다. 밥 먹고 잠깐 의자에 기대어 쉰다는 것이 그만 잠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이사 온 이후 독실을 쓰게 되었더니 이렇게 되었다. 시간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밤 열한 시였다.
[선생님. 저희 9위로 올라왔어요! 보셨죠?] [선생님?] [바쁘세요?]연화에게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4위예요.] [뭐하세요?] [4위했다고요.] [선생님?]이건 두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으면서] [바빠요?] [누구랑 있어요?] [뭐하고 있는데요?] [선생님?] [미안해요. 제가 문자 너무 많이 보냈죠?] [연습생하고 같이 있어요?]연화에게서는 여기까지 온 게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한 시간 반 전.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에게 온 것이 잔뜩 쌓여 있었다.
[2위까지 올라왔네요. 박 피디님 말씀하신 대로 되고 있습니다. 역시 음악이 좋으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대중들이 선택하는 거니까요.] [쌤! 2위에요. 2위!!!] [전화 안 받으시네요. 아까 사무실에 계신 것 같았는데. 지금 2위인 것 보니까 곧 1위까지 올라가는 것도 문제없을 듯합니다.]2위라니.
[1위 축하 드립니다.] [쌤! 1위요! 1위! 우와 진짜] [박 피디님. 1위 달성하셨네요.] [역시 팬심도 대중들의 선택을 이기진 못하네요. 축하드립니다.]1위?
그걸 보고 깜짝 놀라서 음원 사이트에 접속해 봤다.
저녁 8시에 열한 개의 벽을 드디어 깨부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8시 순위는 9위.
9시 4위, 10시 2위, 그리고 조금 전 11시에 1위로 올라간 것이었다.
다른 음원 사이트도 쭉 둘러보니 모두 1위였다. 차트 올킬! 비츠걸스의 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잠을 자고 있었다니.
하긴 성적이 좋지 않아서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잤고, 지난 밤에는 특히 심했다. 자다 깨다 반복하면서 잠을 설쳤는데.
일단은 답장을 보내는 것이 급해서 한 명 한 명에게 톡을 보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이런 내용을. 그리고 같은 회사 직원들에게는 ‘사무실에서 잠들어버렸어요.’ 하고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애들에게도.
[연화야. 미안. 나 사무실에서 잤어. 그래서 너한테 온 거 지금 확인했다.]그렇게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1위 축하한다. 네 양보가 있었기 때문에 곡이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도 곧…….]다음 메시지를 여기까지 타이핑했을 때였다.
갑자기 복도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복도를 거칠게 밟으며 달리고 있는 소리.
누군가 복도를 뛰고 있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벌컥.
내 방의 문이 열렸다.
“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연화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화야.”
“…….”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활짝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연화는 가만히 서 있었다. 거친 호흡에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노크 좀 하고 들어오지.”
“아…… 예.”
“무슨 일이야?”
“저…… 연습하러 왔다가.”
“그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예.”
갑자기 문이 열렸을 때 그 사이로 보였던 날카로운 눈빛은 이렇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 * *
“잤어.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나는 내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혀 자는 시늉을 했다.
“정말요?”
“어. 저녁 대충 먹고, 잠깐만 쉰다는 게 그만 잠들어버렸어.”
“몇 시부터요?”
“몇 시였더라…… 저녁을 일곱 시에 먹었으니까 그즈음.”
“아…….”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서 연화는 내 옆에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곡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여기 이 자리에서.
“오늘 스케줄 있었잖아.”
“마치고 오는 길이에요.”
11시 20분이었다. ‘연습하러 왔다가’ 라고 대답했는데.
어떤 일인지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노크도 안 하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법이 어딨어?”
“안에 계신 줄 몰랐어요.”
“그럼 왜 들어왔는데?”
“그게…….”
얘는 아직도 말을 지어내는 것에 미숙했다.
“근데 갑자기 그렇게 잠드는 거면 건강에 이상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왜요?”
“신경 쓸 게 많으니까 그렇지.”
그러면서 나는, 신경 쓰고 있는 게 모니터 안에 있다는 듯이 그쪽을 바라보며 의미 없이 마우스를 툭툭 클릭했다.
화면에는 아직도 11시 차트가 떠 있었다.
“그럼 오늘은 편하게 주무실 수 있겠네요.”
“모르겠어. 이렇게 미리 자버렸으니까 또 못 잘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하면서 실없이 웃었더니 연화도 따라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연화와 이렇게 둘이 얘기를 하고 있으면 자꾸만 예전 일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아마도 크게 성공하실 거예요. 제 감에 의하면 그래요.
작년 이맘때였나. 나한테 할 얘기가 있다면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누가 성공하는지 누가 실패하는지 여기서 10년 동안 지켜봤거든요.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그런 말을 잘도 쏟아내곤 했었다.
“나야 오늘 일찍 자긴 글렀으니까 어쩔 수 없고. 너는 빨리 들어가서 자. 오늘 피곤했을 텐데 무슨 연습이야.”
“네.”
“그리고 나 카톡 씹은 거 아니다. 그때 자고 있었어.”
“이제 이해됐어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고. 너희들 1위 하는 것도 모르고 뻗어 있었을 정도로.”
그게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도 되었던 건지, 연화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내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해.”
“죄송해요.”
“지킬 건 지키자고. 누가 봤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말했지. 이제 사람들은 네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주시한다고.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없는 얘기 만들어서 널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어.”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나한테 진짜 혼난다.”
“네.”
* * *
매니저가 자기만 내려놓고 숙소로 갔다고 하길래 연화는 내가 태워줬다. 숙소에 내려주고 나니 자정이 지나가 있었다.
12시 차트에서도 1위. 아직 굳건했다.
변화가 있다면 나머지 순위였다.
11시에 1위를 빼앗았을 때 2위부터 12위까지는 GH 엔터테인먼트 팀들의 곡이었다. 2위부터 7위까지가 에피아, 8위부터 12위까지가 U5.
하지만 12시 차트에서는 에피아의 을 제외하고 나머지 곡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그 모든 게 허상이었던 것처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패배를 인정한 건가.
사람들이 자고 있을 새벽 시간대는 스트리밍 수가 확 줄어들기 때문에, 반대로 특정 팬덤에서 줄을 세우기는 좋은 시간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단지 음악이 좋아서 찾아 들었던 사람들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의미였고, GH가 다시 힘을 내면 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에피아와 U5의 곡은 차트에서 내려가 버렸다.
더 이상 스밍 총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녁 시간대에서 패배했는데 새벽을 다시 차지한다면 그것만큼 구차한 일도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팬심도 대중들의 선택을 이기진 못하네요.’ 정 팀장의 말이 이 모든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비츠걸스의 는 17일 오후 11시에 모든 음원 사이트 1위를 올킬한 이후, 그 자리를 계속 지켜냈다.
2위 에피아의 과의 차이는 꽤 벌어졌다. 멜론에서 집계한 점유율에 따르면 각각 49퍼센트와 31퍼센트였다.
지난 이틀 동안 있었던 일은 그새 기사로 퍼져 나갔다.
[10월 걸그룹 컴백 대전의 승리는 비츠걸스?] [음원 성적에선 비츠걸스의 압승.]음원 차트에서의 성적만으로 승리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음반 판매량에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에피아 2집의 판매량이 높았다. 그리고 음악방송에서의 순위 대결도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팬들의 집단 스트리밍으로 차트 상위권을 점령했던 일은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팬들의 스밍이야 늘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이었다. 한 회사의 모든 팬덤이 힘을 합쳐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니까.
-진짜 추했음. 지들끼리 그러고 노는 거 하루 이틀 아니라지만 경쟁 팀 하나 잡으려고 그 짓 하는 꼬락서니가 참.
-문제는 그러고도 졌다는 거ㅋㅋ
-카렌은 아무리 들어도 이게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가지 마는 듣자마자 딱 느낌이 왔어요. 이건 뜨겠구나.
-다른 거 다 떠나서 비츠걸스가 훨 이쁨.
기사의 댓글 반응도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비츠걸스의 음반 판매량도 만족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에피아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발매 3일 차에 9만 장을 넘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판매량이 줄어들기는 할 테지만 이대로 가면 초동 14만 장 정도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놓는 앨범마다 줄줄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현재 걸그룹 판도는 비츠걸스와 에피아가 탑 티어에서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고생했어.”
회의실로 들어가던 중 인혁이가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뭔가 사업가적인 미소가 녀석의 입가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른 건 못 이겨도 그거 하나로 된 거야. 우리 몬스터 뮤직은 음악 잘 만드는 회사지, 팬 관리 잘하는 회사는 아니잖아. 거기는 계속 그런 식으로 장사하라고 해. 우리는 음악 잘 만들어서 먹고살 거니까.”
모여 있는 사람들 다 들으라고 인혁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여전한 걸 보니까 저희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누군가는 우리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저희 사이가요?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보면 우리가 싸웠다가 화해하기라도 했는 줄 알겠습니다.”
그런 농담 속에서 회의실 테이블 위는 환한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싸웠다가 화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혁이와 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번 일로 그게 해소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가 구석으로 물러나며, 파랗고 투명한 어떤 형태로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차하면 다시 튀어나오겠다는 자세를 취하면서.
“회의 시작하죠.”
어쩌면 회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인혁이와 내가 이끌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건 예견되어 있었던 일인지도 몰랐다.
“정소정 씨를?”
“그래. 올해 초에 이미 나왔던 얘기야.”
“하지만 네가 굳이 정소정 씨를 맡을 이유는 없잖아.”
“그때 분명히 말했었어. 난 최인환 선배, 정소정 선배 두 사람의 앨범을 제작해 주고 싶다고 했었지.”
비츠걸스 앨범의 성공으로 분위기가 좋은가 싶다가도 인혁이와는 금방 새로운 대립이 만들어졌다.
“그럼 아연이 거 먼저 가고, 그다음에 하자.”
“그건 안 돼. 통계를 보면 비츠걸스 팬층과 아연이 팬층이 겹쳐. 아연이는 12월에 나오는 게 딱 좋아.”
또다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인혁이와 내 의견이 계속 엇갈리고, 회의 내내 둘이서 떠드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해왔던 대로 음악을 하고 싶었다. 신인을 발굴해서 키워주고, 묻혀 있는 실력자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정소정 씨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맡아보고 싶은 가수였다.
몬스터 뮤직 초창기에 활동하던 가수 중에서 인환이 형과 더불어서 내 입이 쩍 벌어지도록 만드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하지만 인혁이는 당장 성과를 내고 싶어 했다. 검증된 유아연의 앨범을 곧바로 내놓아서 확실한 실적을 쌓고 싶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자기가 왜 이 회사의 대표여야 하는지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대표가 된 이후 내놓는 앨범을 모두 성공시켜서 자신의 위치를 단단하게 굳히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배우 쪽 영업에 힘을 쏟아보는 건 어때? 지켜보니까 요즘 플로우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더라고. 우리도 그 사람들한테 배울 건 배우면서…….”
나로서는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 것이었다. 인혁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며, 새로운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서 그쪽에서도 성공을 거두면 그것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인혁이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음악 쪽으로는 간섭하지 말고 다른 일이나 해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알았어. 박 피디가 하자는 대로 할게. 비츠걸스 이번 앨범 잘된 것도 박 피디가 밀어붙였기 때문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비꼬는 투가 가득 들어간 말로 녀석은 씁쓸하게 말을 내뱉었다.
김인혁은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도 이런 건 변하지 않았다. 오래전 우리가 데뷔를 준비했을 때, 그 무서웠던 프로듀서 앞에서도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질렀던 녀석이니.
그래도 뒤끝은 없는 녀석이라서 회의실을 나서며 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럼 대신, 빅픽쳐 애들 거 좀 가끔 봐줘라. 이번 앨범은 배민혁에게 다 맡기려고 하지만 아직 불안한 게 사실이야.”
한 발자국 물러서서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정식으로 맡는 건 곤란하고 어드바이스 정도는 해줄게.”
“그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대화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 * *
비츠걸스 미니 4집 앨범의 일주일 동안 판매량은 14만 9천 장으로 집계되었다.
놀라운 성적이었다. 36만 장이라는 에피아의 판매량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역대 걸그룹 초동 판매량에 있어서는 3위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1위는 에피아의 이번 2집 앨범이 36만 장, 그다음이 플라지아의 15만 장, 그리고 플라지아의 선배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지의 14만 9천 장이었다.
비츠걸스의 이번 앨범은 데이지보다 약간 앞서서 세 번째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CF 계약을 두 건 체결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멤버 전원에게 들어온 탄산음료 CF, 연화에게 들어온 화장품 CF, 이렇게 두 가지였다.
특히 연화가 화장품 모델이 되었다는 것은 회사 내에서도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화장품 모델이란 것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모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연화 CF가 방송에 나가기 시작할 때 를 홍보해 주세요. 이 곡은 메인이 연화니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화장품 CF에서는 맑고 깨끗한 모습이 부각되어 나타날 것이고, 는 사랑에 푹 빠져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미지가 일치했다.
“CF는 우리 애들이 에피아보다 더 많이 찍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집계를 해보면 차이가 꽤 보일 정도였다.
GH 엔터테인먼트가 관리하고 있는 팬덤의 크기에서만 우리가 뒤질 뿐, 음악에 있어서 그리고 각 멤버들의 매력에 있어서는 우리가 앞서고 있었다.
광고주들이 우리 애들을 선택했다는 것부터가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 테다.
* * *
그렇게 비츠걸스 멤버들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또한 두 번의 주간 차트 1위 및 17일 연속 데일리 차트에서 1위를 지키고 있을 때, 드디어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메인 존스에게 이메일이 도착한 것이었다.
[위대한 프로듀서 박영민! 제가 이번에 일본 일정이 잡혔는데 그동안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서 한국에 가 보려고 합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부디 저에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매우 정중한 어투였다.
[추신. 이번 만남에 당신과 나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해 준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통화에서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어를 배우기까지 또는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저메인의 앨범 작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내 계획에 전혀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신인을 키우는 일이 아니었고 인환이 형처럼 파묻혀 있는 가수를 일으켜 세우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종류의 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뮤지션과 작업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건 작년 이맘때 즈음에 유아연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았던 일과 비슷했다.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아연이를 보고, 우리 애들은 왜 저런 사람을 가르쳐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보컬 트레이닝을 막 시작했던 그 시기에 국내 정상급의 보컬과 함께하며 내가 배운 것이 정말 많았다.
“우선 이틀 동안 저하고 붙어 다니면서 통역해 줄 사람을 구해주세요. 가능하면 회사 내부에서요. 일 얘기가 외부인에게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요.”
“네.”
“당일에 실수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 이번 주 안으로 통역 선정해서 저랑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우선 내가 영어를 할 줄 모르니까 통역이 필요했고.
“그다음으로 자료 조사 좀 해주세요. 그 사람 성격은 어떤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런 걸 자세히 조사해서 내가 볼 수 있도록 정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니까 8년 전에 저메인의 내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공연을 주최했던 담당자하고도 접촉해 보세요. 디테일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네.”
나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 회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손님이었기에 미리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기밀 유지해 주세요. 언론에 공개하는 건 윤곽이 드러난 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저메인하고 얘기가 잘돼서,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는 기사를 내도 되겠죠?”
“그때는 괜찮죠. 하지만 그전에 공개되긴 할 겁니다.”
“예?”
“아마 저메인 그 친구가 먼저 트위터로 발설할지 몰라요.”
찾아보니 트위터를 활발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활발한 정도가 아니라 가만 보고 있으면 하루 종일 폰을 붙잡고 사는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리트윗, 그리고 심심하면 자기 사진을 올리고, 자기가 어디서 뭘 하고 뭘 먹고 있는지 하나하나 공개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손님입니다. 이번 일을 잘 성사시키면 우리 회사의 가치가 크게 올라갈 겁니다. 그러니 힘드시겠지만 이번 일에도 신경을 써주세요.”
일의 시작은 저메인 존스가 나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의뢰한 것이었지만, 일의 진행은 회사 대 회사로 이루어진다.
저메인 존스가 소속된 레이블이 있고 내가 소속된 회사가 있으니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번 일은 저메인 존스의 레이블에서 몬스터 뮤직으로 프로듀싱을 의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몬스터 뮤직에서 이제까지 맡았던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직원들의 협조 덕에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공연기획을 맡고 있는 직원 중에 외국에서 학교를 나온 사람이 있어서 통역은 쉽게 구해졌고, 8년 전 내한 공연을 주최했던 직원과도 연결이 되어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 사람…… 여자를 엄청나게 밝힌다고 합니다. 전에 내한했을 때에도 이것 때문에 골치였대요. 자기는 하루도 여자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는데요.”
아연이에게 들었을 때에도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얘기 또한 그런 우려를 더욱 크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 *
연화의 화장품 CF 1편은 에센스였다.
깨끗한 마스크가 화사한 톤으로 클로즈업되었고, 에센스를 볼에 바르던 손은 얼굴 전체를 쓸어 올렸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손이 코끝을 가로지르는 장면에선 강한 임팩트를 안겨주기도 했다.
이제 막 노출되기 시작한 CF였지만 곳곳에서 언급되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화장품샵에 붙어 있는 화보도 바로 그 장면이었다. 검지 손끝이 코를 가리고 있는 모습.
또렷한 두 눈이 더욱 강조되어 보였고, 살짝 가린 입술은 유난히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저 지나칠 수 없게 하는 화보였다. 한 번씩 시선을 던지게 하는, 마치 빨려 들어갈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광고주 쪽에서도 매우 만족스럽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또한 연화를 중심으로 해서, 화장품 CF 못지않을 정도로 청초한 마스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갔다.
템포가 느린 곡이었기에 안무는 간결하게 가기로 했고, 무엇보다 보컬을 강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방송 활동은 와 를 동시에 하기로 했다.
* * *
저메인 존스가 우리 회사를 방문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공식 일정이 아니었기에 그는 스태프 몇 명만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우리 쪽에선 밴을 한 대 보내서 공항에서 픽업하기로 했다.
“이게 뭡니까?”
지하 주차장에서 나는 허탈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사장님께서 이렇게 준비하라고 하셔서…….”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통로 쪽에 커다란 현수막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Welcome to Korea’ 그리고 그 밑에는 ‘Welcome to Monster Music’.
“김인혁 사장이 지시를 내린 거라고요?”
“네.”
중요한 손님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아마도 녀석은 이런 종류의 의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요. 잘했습니다.”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굳이 직원들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이따금 나에게까지 들려오곤 했다.
저메인 존스의 방문은 굳이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예상했듯이 그는 트위터로 모두 떠벌리고 있었다.
‘위대한 프로듀서 Y.M Park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서 공항에서 브이 자를 만들며 셀카를 찍어 올리기도 했고.
‘왜 위대한지 알려줄까? 그럼 이걸 들어봐’라면서 유튜브에 있는 비츠걸스의 이번 곡을 링크하기도 했다.
-나 다음 앨범은 이 사람하고 함께할 거야.
아직 계약이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자유분방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고 봐야 하나.
그래도 이제까지 별다른 구설수 없이 음악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사람이었다. 단지 두 번의 이혼을 포함해서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다는 점이 좀 그렇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트위터에서 알렸기 때문에 그와 나의 만남은 또 하나의 이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회사에서는 준비해 두었던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로 보내주었다.
-박영민 피디님. 지금 태웠습니다. 네비 찍으니까 한 시간 반 걸린다고 나오네요.
공항에는 김종성 팀장이 나가 있었다. 파인애플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었다가 지금은 몬스터 뮤직의 매니지먼트 2팀장으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몇 사람이 오는 거죠?”
-스태프 둘하고 같이 왔습니다.
그럼 세 사람. 차라리 승용차를 보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기자들 많이 왔어요?”
-아뇨. 기자는 없던데요.
“사진 기자도 없어요?”
-예.
월드 스타라고 하지만 이제는 한물간 40대의 뮤지션. 게다가 한국에 오겠다는 내용의 트윗은 일본 공항에서 막 출발하면서 올린 것이었다.
급하게 달려와서 취재할 거리는 안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 * *
프로필에는 키가 193센티미터라고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군살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호리호리한 몸매, 길쭉길쭉한 팔과 다리.
걸음걸이부터 흑인 특유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만화 캐릭터처럼 커다란 눈은 까만 피부 속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마이 맨! 영. 민. 파크!”라고 말을 하면서 나를 덥석 안아주었다.
스태프가 두 명 따라왔다고 하길래 누구인가 했더니, 한 명은 매니저였고 또 한 명은 그의 에이전트였다.
매니저는 백인이었는데, 거의 인혁이만큼 뚱뚱한 사람이었다.
미국 드라마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주인공 옆에서 핫도그를 우걱우걱 먹고 있는 엑스트라처럼 생긴 사람이었다. 시종일관 웃고 있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매니저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매니저를 생각하면 곤란했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기획사 중심이고, 아티스트는 기획사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기획사 시스템이 없고, 모든 것이 아티스트 중심이다.
매니저는 비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매니저가 주도해서 방송 섭외를 따내고, 공연 계약을 하는 등의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앨범 제작이나 캐스팅에 관련된 일은 아티스트가 고용한 에이전트가 대신해 주는 식이다.
“이 사람은 내 에이전트 루크.”
저메인은 함께 따라온 에이전트를 소개했다. 딱 봐도 인텔리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저메인과 같은 흑인이었지만 40대의 나이에도 캐주얼한 의상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주는 저메인과 달리, 깔끔하게 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은 미드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변호사 같은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에이전트는 아무나 할 수 없다.
-너 운전 잘해?
-예.
-그럼 매니저 해라.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특히 법과 회계에 있어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연예인을 담당하는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쪽도 나름대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왔다는 것은 이번 만남을 통해 계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역을 거쳐야 해서 그런지 우리는 인사를 나누는 것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 * *
몬스터 뮤직에서 프로듀서 박영민이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만남을 가지고 있는 동안, 비츠걸스는 한 음악 방송에 출연 중이었다.
그리고 이 방송에는 라이벌인 에피아도 함께하고 있었다.
두 팀은 몇 차례의 리허설이 이어지는 동안 여러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에피아의 아홉 멤버들은 선배인 비츠걸스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방송국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에피아 멤버들은 비츠걸스의 대기실을 찾아가 먼저 인사를 마친 후에 자신들의 일정을 시작했다.
라이벌이라는 것, 양쪽 회사에서는 신경전을 가지며 두 팀의 우위에 대해서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멤버들까지 그런 갈등 속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에피아입니다!”
데뷔한 지 아직 반년이 되지 않은 이 신인 팀은 상큼한 동작이 가미되어 있는 인사로 선배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런데 사실 인사를 받는 비츠걸스 쪽도 데뷔한 지 이제 만 일 년이 되었을 뿐이다.
‘저 사람이 김다은……’
에피아의 메인 보컬 정인아는 그렇게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한 사람에게 시선이 꽂혔다.
현재 활동 중인 걸그룹 중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사람, 자신이 우승했던 케이팝보이스에서 먼저 우승을 했던 사람. 아니, 그런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없더라도 무대에 서는 가수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노래를 훨씬 잘한다. 아니, 저 팀 모두가 그렇다.
리허설을 할 때에도 비츠걸스가 무대에 오르면, 다른 팀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모습을 모니터하곤 했다.
어떻게 노래를 저렇게 잘하지, 하는 감탄을 하면서.
그것도 저렇게 예쁜 사람들이.
에피아의 정인아 또한 가창력이라면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GH 엔터테인먼트가 내놓았던 팀들이 실력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해, 에피아가 라이브 무대에서도 호평을 받는 것은 메인보컬 정인아 때문이었다.
회사 안에서는 비츠걸스의 메인보컬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정인아 또한 ‘그래도 나 정도면’이라고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곡을 들으면 과연 그런가, 하고 고개가 저어질 때도 있었다.
“뭐해?”
“아…….”
멍하게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 버린 정인아를 다른 멤버가 다그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스테이지. 이제 에피아는 다음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아마도 그녀가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은 지난주에도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인아는 모니터용 인이어를 귀에 꽂고 있었다. 무대에 오르는 순서는 다음이지만, 그렇다고 방금 전 공연했던 팀에게 인이어를 넘겨받을 수 없으니 이렇게 다음 팀은 또 다른 인이어를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음악방송 때마다 그랬다.
재미있는 건 백스테이지에서 준비하는 동안에도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가수의 모니터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정인아의 귀에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김다은의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바로 귓가에서 부르는 것처럼 생생하게.
‘뭔가 달라졌어.’
호흡하는 것마저 분명하게 들려올 정도로, 마이크가 잡아낸 김다은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려오고 있었다.
‘전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그다음에는 시기심이 들기도 했지만, 곡의 종반으로 접어들면 그녀 또한 한 명의 감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잘한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귀를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매력적인 톤, 그리고 그러한 톤의 입자들이 하나하나 단단하게 뭉쳐 있는 듯한 밀도, 특히 이번 곡 가지 마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는 그녀와 김다은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런 아이돌 그룹이 우리나라에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과 같은 일이라고.
이제는 시기심을 벗어나,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목소리를, 그 주인공과 더불어 단둘이 듣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지곤 했다.
“너무 좋다.”
생각 속으로 빠져 버렸던 조금 전과 같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어버렸다.
* * *
무대 위에는 이날 출연한 가수들이 모두 올라와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는 무대에서는 제멋대로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선을 그어놓은 듯 팀별로 정확하게 구분이 되었다.
의상, 스타일, 고작 몇 분 동안의 무대를 위해 애써 준비한 흔적들이 고만고만한 나잇대의 아이들을 구분 짓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세 팀이 나와 있었다.
에피아, 에이플랜. 비츠걸스.
이날의 1위 후보였다. 그리고 셋 모두 걸그룹이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며 세 개의 차트가 나타났다. 오늘의 1위를 결정지을 각종 지표가 그래프로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차트 아래로는 그 주인공의 모습을 잡고 있는 작은 화면이 배치되었다.
에피아
음원 점수 4,686
음반 점수 451
SNS 점수 3,416
시청자 사전투표 529
[사전합계 총점수 : 9,081]에이플랜
음원 점수 2,711
음반 점수 384
SNS 점수 3,281
시청자 사전투표 484
[사전합계 총점수 : 6,860]비츠걸스
음원 점수 5,500
음반 점수 462
SNS 점수 2,862
시청자 사전투표 361
[사전합계 총점수 : 9,185]그래프는 이런 수치를 보기 좋게 보여주고 있었다. 몇 주째 양강 구도를 만들고 있는 에피아와 비츠걸스가 여전히 높은 점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두 팀을 피해 지난주에 컴백한 에이플랜이라는 팀이 컴백 버프를 받아 1위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도 사전합계 점수는 비츠걸스가 높았다.
지난주에는 50포인트, 그리고 이번 주에는 100포인트 정도 벌어졌다. 정확히는 104포인트 차이.
하지만 아직 생방송집계 점수가 남아 있었다.
지난주에도 여기서 뒤집어졌다.
900점 가까이 획득하는 에피아에 비해 비츠걸스는 700점대에 머물렀다. 아무리 사전 점수에서 앞서고 있다고 해도 여기서 200포인트 정도가 벌어져 버리니 1위는 늘 에피아의 차지였다.
물론 700점도 매우 높은 점수였다. 단단한 팬덤을 구축하고 있어야만 그 정도의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10월 넷째 주, 1위 후보 결과. 화면 보여주세요!”
그리고 그래프의 가장 아래 공란으로 비워져 있는 곳에 숫자가 한 팀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피아 : 892
에이플랜 : 306
마지막으로 비츠걸스의 .
0부터 올라간 숫자는 500, 600, 700을 지나쳐 831에서 멈추었다.
“비츠걸스의 가지 마. 축하드립니다!”
다시 화면은 가수들이 모여 있는 무대 위로 바뀌었고, 공중에서는 종이 가루가 눈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기쁜 마음에 박수를 치고 있는 멤버, 깜짝 놀랐다는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멤버, 그리고 그들을 축하하는 사람들.
비츠걸스가 음악방송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탑 티어 두 팀이 동시에 컴백한 이번 걸그룹 컴백대전은, 치열했던 초중반을 거쳤지만 결말은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 버렸다.
* * *
저메인 존스는 길쭉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면서 친근감을 표현했다.
“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왔다. 부담 가지지 마라. 라고 하는데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당신이 음악 작업하는 걸 구경하고 싶다. 어떤 환경에서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하는 건지. 그것에서 영감을 얻고 싶다. 라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경계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에이전트까지 데리고 왔으니 비즈니스에 있어서 무언가 탐색해 보려고, 혹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특히 우리 회사의 스튜디오를 구경하고 있을 때는 ‘이런 곳에서 레코딩해도 될까?’ 하는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특히 이렇게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 만나는 관계라면.
“음…… 이 기타. 피치가 맞지 않아. 소리는 참 좋은데.”
그런 말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면, 그저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메인은 코드를 찾아내려는 듯 여러 종류의 보이싱을 만들어내며 기타를 만지다가, 의 코드를 잡으며 즉석에서 그 노래를 불러보았다.
흑인 특유의 꾸밈음이 섞인 기교, 그리고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색다른 느낌의 가지 마가 탄생되었다.
“아름다운 곡이야. 위대한 프로듀서와 위대한 보컬. 혹시 이 노래를 부른 보컬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지만 아쉽게도 그 팀은 지금 방송을 촬영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쉬워 했다.
일에 대한 얘기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투어가 끝난 후 온라인으로 곡을 주고 받다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이렇게 한국으로 들어와서 나와 함께 작업을 하겠다고 한다.
레코딩도 몬스터 뮤직의 스튜디오에서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프로듀서가 모든 걸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편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 정상급의 뮤지션이면서 작업 환경은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걸로 알려졌다.
그의 최고 명반이라고 꼽히는 은 어느 허름한 창고에서 제작된 앨범이었다.
저메인은 지역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브라이언 러셀의 음악에 크게 감명받았고 그와 함께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은 어느 농장 옆에 있는 허름한 창고였다.
무명의 싱어송라이터 브라이언 러셀은 그곳에서 음악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메인은 브라이언 러셀이 가장 작업하기 편한 곳에서 앨범을 만들자고 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은 100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의 수익을 낸 앨범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계약서는 좀 더 검토해 보고 서명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에이전트는 계약서를 준비해 왔지만 이날 바로 계약을 체결할 순 없었다. 이런 종류의 계약은 몬스터 뮤직에서도 처음 해보는 것이었고, 게다가 어려운 법률 용어가 영어로 등장하는 계약서를 하루 만에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무조건 다음 앨범을 당신과 작업할 겁니다…… 라고 말하네요.”
그러면서 그는 수시로 긴 팔로 내 어깨를 감으며 나에게 호감을 표시해 왔다.
* * *
-그 사람…… 여자를 엄청나게 밝힌다고 합니다. 전에 내한했을 때에도 이것 때문에 골치였대요. 자기는 하루도 여자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는데요.
-무슨 요구를 했다는데요?
-한국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네요. 자길 거기로 데려다주기만 하면 알아서 하겠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답니까?
-너무 강하게 요구해서 클럽에 데려다줬는데…… 사고 칠까 봐 그쪽 직원들도 지켜보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진짜로 거기서 여자 꼬셔서 자기 호텔로 데리고 갔대요.
그때는 저메인의 전성기 끝 무렵이라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정말 대담한 행동이었다.
한국 관객들에게 감동해서 앵콜로 열한 곡을 더 불렀다는 일화나, 팬미팅과 인터뷰에서도 늘 성실하게 임하는 등 매너 좋은 모습을 보여서 그나마 덮을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런 좋은 모습이 기사화되었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얘기가 좀 나왔을 거라고.
그런데 정말로 매너가 좋기는 했다. 우리 회사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나를 비롯해서 직원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해 주겠어’라는 건 없었고 ‘우리 같이 잘해 봅시다’라는 자세가 분명했다.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결혼을 안 했다고요?” 하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맞아요. 결혼은 지옥 같은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면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거예요. 그럼 애인은?”
“애인도 없어요.”
“정말로? 그럼 자유롭게 아무나 막 만나는 스타일?”
“아뇨. 여자는 안 만나요.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게 가능해요?”
그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자신의 세계관에서는 음악과 여자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듯.
그리고 또 하나.
“아…… 너무 아름다워요.”
연습실을 구경하던 그는 뷰티풀을 연발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리 연습생 애들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당신은 엄청나게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하고 있네요. 나도 여기서 살고 싶어요.”
몸에 딱 달라붙는 크롭티와 레깅스를 입고 있는 우리 애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건드릴 듯 말듯 가장 예민한 부분을 향해 손을 뻗어오는 것 같기는 하지만, 끝내 그 예민한 부분을 터치하지는 않아서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뭐 그런 것이었다.
선을 넘는다면 나도 분명하게 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심기가 조금 불편해진 나는 에이전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계약서에 이런 항목을 추가해 주세요.”
“어떤 걸 말씀입니까?”
“나는 이번 앨범 제작의 모든 디렉팅 권한을 가질 수 있는 프로듀서니까, 아티스트와 스탭들이 제 뜻대로 일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을 넣어주세요.”
“네?”
“저는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왔습니다.”
에이전트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저메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한참 이야기했다.
내 이력서에 엄청난 한 줄이 추가되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에 재를 뿌릴 순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일이 흐트러지게 되더라도.
하지만 에이전트의 심각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저메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의 방식을 존중합니다.”
굳이 통역을 해주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나를 당신의 악기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연주하세요. 내가 원하는 건 그겁니다.”
그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쿨한 사람이었다.
* * *
“우와, 이거 봐봐. 우리 선생님, 진짜 이 사람하고 같이하는 건가 봐.”
음악 방송 1위를 거머쥐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비츠걸스 멤버들은 승합차 안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박영민과 저메인 존스가 만났다는 건 벌써 기사로 나와 있었다. 멤버들에게는 익숙한 회사 스튜디오 안에서,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브이 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다은이가 그렇게 묻자 대답은 승연이가 해주었다.
“그 노래 알지? She said hello, tell me my baby. 이런 노래. 우리 어렸을 때 자동차 광고에 나온 거 있잖아.”
“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요.”
“그거 부른 사람.”
그러자 승합차 살내에서는 “아!” 하는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뭔지 알겠다는 듯이.
“그럼 옛날 가수네요?”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없지만, 그래도 일본에서는 잘나가나 봐.”
“아…….”
그러면서 다은이는 혼잣말을 하듯 “그래서 아까 보낸 톡에 답장이 없는 거구나.” 하고 말했다.
1위를 한 뒤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알렸지만 보낸 메시지를 아직 확인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연화도 마찬가지였다.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가 더 기쁘세요? 세계적인 뮤지션을 만난 것, 아니면 저희가 1위 한 것’.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다.
대놓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을 테지만,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니저님.”
연화는 매니저를 언제나 ‘매니저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멤버들은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지만.
“예?”
그리고 김민태는 아직 말을 놓지 못했다. 벌써 몇 달째.
“저 회사에서 내릴게요.”
“또요?”
“연습 좀 하려고요.”
그러자 승합차 안에서는 아우성이 나오고 있었다.
“야, 오늘은 좀 쉬자.”
“너 눈이 벌게.”
새벽부터 시작된 음악 방송 스케줄을 견딘 뒤, 또다시 연습을 하겠다는 말에 멤버들은 잔뜩 질린 얼굴이었다.
“곡 연습해야 돼요. 스윗 데이는 아직 라이브를 제대로 소화 못 하는 것 같아요.”
“야, 그래도 어떻게 오늘 같은 날…….”
그리고 이들을 관리해야 되는 막대한 의무를 짊어진 김민태도 이번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 생각에도 오늘은 쉬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괜찮아요. 잠깐만 하다가 들어갈게요.”
“제가 보기에도 피곤해 보여요.”
“제 컨디션은 제가 잘 알아요. 아니면…… 숙소에서 내려주면 제가 알아서 회사까지 갈게요.”
혼자 연습하다가 늦게 들어오는 일이 일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연화야, 그러지 말고 지금 숙소 들어가면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오늘은 제발 좀 쉬자. 너 늦게 들어오면 우리도 피곤해.”
하지만 연화는 뜻을 굽힐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에 대해 완전하게 해결을 할 때까지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 식이었다.
1년 동안 함께해온 멤버들이었지만 아직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남아 있었다.
사실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다. 아무리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본인조차도.
“죄송하지만…….”
만약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이날의 일은 하나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뻔했다.
핸드폰이 살짝 진동했고, 그녀의 손으로 반가운 감촉이 작은 흔들림을 만들어냈다.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쉴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어휴, 누가 진짜 독종 아니랄까 봐.”
“언니, 근데 맛있는 거 뭐 사주시게요? 어……? 쌤한테 답장 왔다.”
[그래. 1위 축하해. 빨리 들어가서 자라.]“그냥 축하한다고 하면 되지, 꼭 잔소리를 덧붙인다니까.”
그렇게 투정 어린 소리가 이어졌다.
* * *
숙소에서 멤버들을 내려준 뒤, 그리고 정겹게 인사를 마친 뒤에야 김민태는 집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고된 하루였다.
현재 시각은 새벽 한 시.
세 시에 출근해서 지금까지 일했으니 꼬박 스물두 시간을 일한 것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보람이 느껴지는 것은 이번 앨범의 성공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 현재 가장 잘나가는 걸그룹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나 비츠걸스의 매니저야.’ 하고 자랑스럽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또 하나의 자부심이라면, 현재 가장 잘나가는 프로듀서의 신뢰를 얻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외의 유명 뮤지션이 직접 찾아와서 앨범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그 엄청난 분.
“지금 퇴근하는 길입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현장 상황을 보고해 달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퇴근길에는 이렇게 전화를 하곤 했다. 물론 그의 팀장에게 먼저 보고를 한 뒤에.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1위 축하해요.
김민태는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
박영민 피디는 이런 것을 요구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때마다 높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나 비츠걸스의 매니저야’라는 것에 이어서 ‘나 박영민하고 맨날 통화하는 사이야’라는 것까지.
-김민태 씨. 내일은 유 대리하고 교체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나한테 시간 좀 내어줄 수 있어요? 상의할 일이 있는데.
“저하고요? 아, 네, 물론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 회사로 출근해서 나한테 찾아와요.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만들어지는 말이었다.
‘뭐? 네가 그런 사람하고 맨날 통화한다고?’
누가 그렇게 말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한테 상의할 게 있다면 따로 부르곤 한다니까’라고.
자기도 모르게 오른발에 힘이 꾹 들어가 버렸고, 승합차는 쏜살같이 새벽 도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