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4
4장 Sweet Day(2)
“너무 세게 나가신 거 아닙니까?”
미팅 자리를 함께했던 직원들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은 좀 위험한 발언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제 쪽에서 더 굽혀야 했다는 말씀이잖아요.”
“아까 저녁 같이 먹을 때 그쪽 에이전트 얼굴이 별로 안 좋더라고요.”
우리는 직원들과 함께 우르르 나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가볍게 술잔이 오갔고, 저메인을 호텔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저는 안 해도 됩니다. 그쪽에서 먼저 제안한 일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무리를 하면서 꼭 해야 될 일이 아니에요.”
내가 강경하게 나가자 다른 직원들도 더 이상 대꾸하지는 못했다.
호텔 로비에서 인사를 나눌 때에도 친근한 태도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내가 괜한 우려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좀 더 하다가 들어갈게요. 먼저 퇴근하세요.”
저메인 일행과 식사를 할 때에도, 이건 불고기고 이건 찌개고 하면서 광대처럼 웃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호텔에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우리 애들이 1위를 했다고 하니 그 모습을 얼른 보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어떤 무대를 보여주었을지, 어떤 얼굴로 기뻐했을지, 나에게 있어서 이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비츠걸스는 무대에서 두 곡을 들려주었다. 와 더불어서 까지 보여주었다.
“퇴근 안 하세요?”
한참 영상에 빠져 있었더니 이정인 작곡가가 노크를 하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길래 설마 아직 퇴근 안 한 건가 싶어서 확인해 본 거라고.
“정인 씨는요?”
“저는 아직 작업할 게 남아 있어서요.”
이정인 작곡가는 빅픽쳐의 다음 앨범 곡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배민혁과 공동 작업으로.
김인혁이 음악 작업에서는 빠지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나는 아까 저메인을 만났던 것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주 매너가 좋은 사람이고 느낌이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여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신경 쓰인다고.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연습실에서 우리 연습생들을 음흉하게 쳐다본 것에 조금 불쾌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알고 있었는데…… 기분이 좀 그랬어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던 이정인 씨는 그게 궁금했는지 계속 물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보다 이거 좀 보세요.”
나는 오늘 비츠걸스가 음악방송에서 라이브했던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음…….”
내가 모니터를 그의 쪽으로 향하게 돌리자, 이정인 씨는 주의 깊게 보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와 를 이어서 했던 무대를 보여주었고, 다시 앞으로 감아서 똑같은 무대를 다시 감상했다.
내가 이걸 왜 보여주는지 깨달은 것인지,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감탄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노래 잘하네요. 늘었어요.”
“그렇죠?”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화 말이에요. 이 곡을 이렇게 잘했었나요?”
역시 그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포인트를 바로 잡아냈다.
“저 이 곡, 요즘에 많이 들어요. 본부장님이 만드신 곡이기도 하고 제 취향에 잘 맞기도 해서요. 그런데 레코딩된 버전보다 더 잘하는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보여드리는 겁니다.”
늘었다. 연화의 목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이날의 방송을 모니터했던 나는, 1위를 했다는 사실보다 무대에 더욱 큰 감명을 받았다.
“레코딩할 때에도 애를 먹었던 곡이에요. 아무래도 스무 살의 감성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곡이잖아요. 사랑에 푹 빠져 있는 그런 감정을 노래로 담아내야 하는데, 사실 스무 살짜리가 뭘 알겠어요? 그것도 맨날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남자 한 번 만나보지 못한 애가요.”
자조적으로 그런 말을 하자 이정인 씨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서 레코딩할 때 고생 좀 했어요. 계속 다시 부르게 하고…… 이 곡의 연화 파트에만 세 프로(1프로 = 3시간)를 써버렸다니까요.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기 어려워서.”
마치 연기를 시키듯이 다그치면서 레코딩했었다. 이런저런 상황 속으로 몰입을 해보라는 요구도 하면서.
“그런데 오늘 무대에서는 그 감성을 제대로 보여주네요.”
“맞아요. 소리의 질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저 진짜 이 곡 맨날 듣거든요.”
역시 이정인 씨는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는 듯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를 반복해서 들었다.
캄캄한 밤이라서 그런 건가, 오늘 색다른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이정인 씨가 옆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에게나 할 수 없는 내 속마음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어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연화는 내 가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예?”
“몬스터 뮤직에서 11년을 있었던 애잖아요. 그중에서 10년은 내가 담당하지 않았었고, 제가 맡은 건 고작 1년뿐이에요.”
“아…….”
“전체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요즘 얘가 노래하는 걸 들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1년밖에 되지 않지만, 어쩌면 얘를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이 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듣기에도 본부장님이 맡기 전이랑 요즘하고는 완전히 다른 보컬처럼 들립니다.”
내 손으로 키워낸 내 가수. 이제야 그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가 본부장님보다는 몇 년 더 연화를 지켜봤잖아요. 그래서 알 수 있습니다. 본부장님이 맡으시면서 연화가 크게 발전했어요.”
“10퍼센트보다는 훨씬 더 되겠죠?”
“그럼요. 체감하기로는 거의 70퍼센트, 아니, 80퍼센트?”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그래요. 차성우 선생님이 맡으실 때만 해도 한 팀의 메인 보컬로는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음악적인 면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다은이를 올려야 할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은…….”
그는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런데 다은이도 요즘 많이 늘어서.”
“그렇죠?”
“이번 곡에서 다은이 기량이 활짝 핀 것 같아요.”
“얘는 처음부터 내 가수였죠.”
그렇게 말을 하자 이번에는 이정인 씨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높였다.
“그런 걸 은근히 따지시나 봐요.”
“그냥 재미 삼아 하는 말입니다.”
다은이는 내가 기량을 높여주어서 데뷔조에 올려보냈으니, 내가 만들어낸 목소리라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연화까지.
“전부 본부장님 가수예요. 본부장님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팀이 유지되기도 힘들었을 걸요.”
어쨌든 둘 다 좋은 보컬이고, 이번에는 특히 연화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곡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의 시장성이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라이브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 곡 또한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라이브로 들려온 의 감성은 한동안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 * *
매니저 김민태 씨는 이른 아침에 나를 찾아왔다. 출근해서 PC를 막 켜고 외투를 벗어서 의자에 걸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응접용 테이블로 안내한 뒤 커피를 타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늦잠 좀 푹 자고 오지. 아예 오후에 만나자고 시간을 정할 걸 그랬네요.”
“아닙니다.”
그의 눈에는 피로가 한가득이었다.
사실 매니저 중에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전부 피곤에 젖어 있었다.
“영화를 그렇게나 좋아한다면서요?”
“예? 아…… 예.”
“정 팀장에게 얘기를 들으니까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배우들 연기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다고 하던데요.”
“네. 제가 좋아하는 분야고,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관련 서적을 보면서 혼자서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어려운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할 말은 똑바로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누구한테 얘기할 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네?”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다. 굳이 자신의 단점을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밝힐 이유는 없잖아요?”
“조심하겠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따로 일을 시킬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이런 말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내일 저녁에 정 팀장하고, 그리고 2팀의 김종성 팀장하고 미팅을 가질 겁니다. 그전에 김민태 씨를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부른 거예요.”
나는 본론을 꺼내기 위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에게 전해주었다.
“드라마 대본입니다.”
“예.”
“두 개예요. 하나는 지금 방영되고 있는 수목 드라마, 그리고 또 하나는 다음 달에 새로 시작하는 주말 드라마.”
수목 드라마는 24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였고 현재 8회차까지 나갔다.
장르는 퓨전 사극.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하늘에서 천사가 인간의 몸으로 내려왔다는 설정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초인 같은 능력을 지닌 천사가 땅으로 내려왔고, 신라에 살고 있는 어느 평범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만약 이 드라마를 택하게 되면 여주의 친구 역으로 12회차부터 투입됩니다. 여주가 좀 딱딱한 연기를 하다 보니까 그걸 풀어주기 위해 발랄한 캐릭터를 넣는 걸로 대본이 변경된 거죠.”
“어떤 건지 알겠습니다.”
“비중이 꽤 있는 역할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주말 드라마는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였다.
평범한 여주인공이 재벌 2세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 이혼을 하고, 여주인공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어떤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그리고 찌질했던 재벌 2세가 여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전형적인 스토리가 중심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재벌가 출신의 딸이 등장해서 사각 관계를 이루고, 출생의 비밀이라는 당연한 듯한 소재가 들어가고 결국에 여주인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출세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조연을 제시했습니다. 재벌 2세인 남주와 엮이는 다른 재벌가의 딸 역할이에요.”
“아, 네.”
“사실 선택권은 저희한테 없습니다. 그저 저희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해서 대본 두 개를 보낸 거예요. 참고하라고요.”
이건 전부터 방송국과 약속이 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부터 해서 드라마 섭외까지.
“승연이한테 연기 재능이 보인다고 했죠?”
“네. 맞습니다.”
“그럼 왜 승연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두 개의 드라마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면 좋은지 판단을 해보고 내일까지 나한테 답변을 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방송국 쪽에서 요청한 내용을 그대로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섭외가 들어온 것은 주말 드라마입니다. 재벌가의 딸 역할이요. 수목 드라마는 그저 참고만 해보라는 뜻으로 저희한테 대본을 보낸 거죠. 그쪽에도 여배우를 구하고 있긴 하니까요.”
“네.”
“그리고 섭외가 들어온 멤버는 연화입니다.”
김민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 2세인 남자 주인공이 여주에게 강하게 빠져 버리지만, 그래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상대가 그 재벌 딸 역할입니다. 연출 쪽에서는 연화가 딱이라고 해요. 마스크 자체에 부티가 줄줄 흐르니까 자연스럽게 연출해도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연기에 생초짜를 조연으로 쓰려는 모험을 하려는 거예요.”
김민태는 대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승연이를 밀어주려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일단 저부터 설득할 수 있어야겠죠. 그게 가능하면 승연이의 매니저로 민태 씨를 붙여서 연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저메인의 에이전트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계약서 수정본을 보내온 것이다.
검토를 해보라는 의미였고, 우리 쪽에서 괜찮다는 의사를 보내면 에이전트가 다시 한국을 방문해서 계약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할 정도로 법률 용어가 많아서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의외로 깔끔하게 우리 쪽 요구를 들어줬네요.”
수정된 내용은 내가 요구한 것이 전부였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 그날 통역을 맡기도 했던 공연기획팀의 직원은 그쪽에서 보내온 계약서를 프린트해서 세세하게 읽어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문서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한참 동안 읽는 것이었다.
“다른 내용은 없어요?”
“네. 나머지는 그날 보여줬던 계약서 내용과 동일해요. 박영민 피디님께서 요구하신 내용만 추가 되어 있어요.”
내 요구를 들어주며 그쪽에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안전장치 같은 걸 내세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우리가 당신에게 의뢰하는 것입니다’라는 자세가 분명하게 읽히는 대처였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만약 박영민 피디님이 앨범 제작에 있어서 치명적인 장애라고 판단할 만한 일이 저메인 쪽에서 발생한다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애매모호한 표현이네요.”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요구하는 걸 순순히 들어준 것이 놀라웠다.
“그날 함께하면서, 그 사람들끼리 떠드는 얘기는 굳이 제가 통역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많았어요. 우리 쪽에 들릴 듯 말듯 작게 말해서 전부 알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약 얘기도 좀 하기는 했어요. 에이전트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고 저메인은 요구하는 대로 다 해주자고 딱 잘라서 말했어요.”
비록 이틀 동안 만났던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해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계약이나 법 같은 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유분방하게…… 자기가 음악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것. 아마 이것만을 원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대충 넘겨 버리고 내가 저 사람하고 음악을 할 수 있게 해줘.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뮤지션이면서 그런 자세를 가지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순수하게 음악만 하려고 했다간 계산 빠른 사람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곳이니까.
어쨌든 메일로 보내온 계약서는 국제 계약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률 전문가에게 의뢰를 맡겼고, 문제 되는 항목만 없으면 그대로 진행할 계획이었다. 사실 나 또한 저메인을 위한 곡을 전부터 만들고 있었다.
근사한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에게도 있었다. 계약이 성사되면 당장 그에게 곡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매니저 김민태 씨는 이날 점심에 나를 찾아왔다.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점심때에 잠깐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점심은 드셨어요?”
“아뇨. 가면서 먹으려고요.”
시간이 없는데 가면서 어떻게 먹으려는 것이냐고 물으니, 운전을 하면서 먹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햄버거 같은 걸 사서 핸들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먹으면 된다고.
그게 당연한 일처럼 얘기하길래 나는 그를 데리고 회사 앞 식당으로 향했다.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해 봐요.”
그런 말을 하며 끌고 나가자, 그는 여전히 내가 부담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점심 시간이라서 조용히 얘기를 나눌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웠다.
그나마 테이블 마다 칸막이가 쳐 있고, 구석진 곳에 빈자리가 있는 돈가스 전문점으로 선택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메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우리는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시작했다.
“승연 씨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의 미주 역할인 것 같아요.”
김민태 씨는 수목 드라마 대본을 펼치며 나에게 말했다.
세상은 너무 어지러웠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천사가 신라로 내려왔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답게 그 천사는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마법이나 염력 같은 것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천사는, 지배층의 강한 경계를 받으며 우여곡절을 겪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비파를 연주하는 음악가였다. 그녀 또한 여주인공답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연주 실력 또한 뛰어나서 당시의 궁중 음악기관인 음성서에 발탁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미모가 왕의 눈에 들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과 동시에, 땅에 내려온 천사인 남주인공과도 우연히 마주쳐서 인연을 맺게 된다는 얘기였다.
“대본만 봐서는 알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방영된 분량을 전부 봤습니다. 확실히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연결 고리가 명확하지 않아요. 그 부분에서 몰입이 되지 않았어요.”
드라마 제작팀에서도 이 점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반 캐릭터 설정은 그럭저럭 잘 이뤄냈지만 두 사람의 관계성이 모호했다. 애초의 기획 대로면 왕-여주-남주의 삼각 구도가 잘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문제를 해결하려면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확실하게 만들어내야 하는데요, 그러기에는 앞부분에서 써먹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연에 우연을 거듭했던 전개에 시청자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어서요. 또다시 그런 전개가 나와버리면 말이 안 된다는 비난을 받기 쉬워요.”
우물우물 밥을 씹으면서, 김민태 씨는 자기 이야기에 심취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캐릭터를 넣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찾아낸다는 건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그 사람이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런 대사 하나만 있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니까요. 그런 역할이라면 승연 씨가 딱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런 캐릭터는 생각 없이 말을 막 하면서도 밉지 않게 보여야 합니다. 오지랖이 넓어 보이기보다는 시청자들이 간지러운 곳을 팍팍 긁어줄 수 있는 캐릭터가 되어야 해요. 박 피디님, 이것 좀 잠깐 봐주세요.”
김민태 씨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해온 듯했다. 그는 핸드폰을 열고 동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승연이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그러면 저녁은 늘 늦게 드시겠네요?’라고 말하는 부분이요. 이건 대본에 있는 말입니다. 표현하기에 따라서 상대방에게는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거냐고 묻는 의미가 될 수 있어서요. 그런데 표정과 억양만으로 상대를 걱정하는 감정을 가득 담아버렸어요.”
나는 핸드폰을 건네 받아서 계속 돌려보았다.
“그렇긴 하네요.”
“시간이 없어서 이거 하나밖에 찾지 못했지만, 좀 더 시간을 주신다면 이런 장면을 여러 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모습을 극에서도 보여줄 수 있다면 미주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을 겁니다. 승연 씨밖에 없어요.”
설득력이 있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주말 드라마 쪽은요? 방송국에서 우리에게 요청한 건 이거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주말 드라마는 가난 속에서 어렵게 자라온 여주인공이 재벌가 남주인공을 만난다는 이야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결혼에 성공하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섭외가 들어온 역할은 여주인공의 반대편에 있는 캐릭터였다. 주인공 집안에서는 여주인공을 반대하고, 그 대신 이 사람을 만나라면서 제시하는 인물이었다. 급이 비슷한 집안 출신이며 치명적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우유부단한 남주인공은 여주를 향한 순정적인 사랑을 고집하지만, 그래도 집안에서 만나라고 한 그녀의 미모에 잠깐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마치 악역과 같은 캐릭터였다.
“이것도 제가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한 번 봐주세요.”
그러면서 민태 씨는 어떤 영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것은 승연이를 담고 있는 영상이 아니었다.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화질이 좋지 않은 걸로 봐서 조금 오래된 영화 같았다.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입니다.”
“그래요?”
“섭외 들어온 역할을 보면 완전히 악역이에요. 여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있는 시청자에게 있어서는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도 답답한데, 그런 남자 주인공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상대잖아요. 대본을 봐도 몇몇 대사는 노렸다는 티가 날 정도로 시청자들의 혈압을 오르게 할 겁니다.”
실제로 그런 역할이었다.
가진 것이 없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이입하기에 좋은 여주인공과 달리 그 역할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그런 아름다움을 지극히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영화에 보면 어려서부터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왔기에 제멋대로인 여성 캐릭터가 나옵니다. 방금 나온 장면에서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말도 막 하고 타인을 대하는 것도 서툴고 그런데, 그게 밉게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때가 묻지 않고 고민 없이 자라왔기에 순수하다는 쪽으로 표출하고 있어요.”
“그래서 승연이에게도 어울릴 것 같다, 그런 말씀이네요?”
“네. 이런 이미지라면 잘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출 쪽에서 안 된다고 하면요? 이런 이미지는 원하지 않는다, 좀 더 차갑고 재수 없는 이미지를 원한다, 이러면 뭐라고 하실 건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김민태 씨는 머리를 긁으며 고민에 빠졌다.
“대본을 보니까 이런 장면이 있었어요. 레스토랑에서 세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인데요, 여기서 그런 캐릭터성을 드러내면 좀 더 재미있는 장면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걸 가지고 연출 쪽을 설득시킬 수 있겠어요?”
“가능하다면 이 대사를 승연 씨한테 연습시켜서 직접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드라마 얘기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두 번째는 그렇지 못했다.
드라마국에서는 연화를 원했고, 이런 내용으로 승연이가 더 낫다고 어필할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에게 있어선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다. 굳이 김민태 씨를 따로 불러서 이런 요구를 한 것도 이와 같은 대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 * *
이날 오후에는 정영수 팀장과 김종성 팀장과 함께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만났다.
아직 어색한 두 사람은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예전에 비츠걸스의 매니저와 프론트 페이지의 사장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때에는 차라리 영업적인 미소라도 내보내곤 했지만 한 배를 탄 이후로는 살짝 경계하는 모습도 엿보이곤 했다.
“올해 초에 약속한 대로 저희한테 주말 드라마 조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정 팀장님은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리고 두 사람 앞에 대본을 내밀었다.
“그저께 그쪽 사람들과 제가 미팅을 가졌어요. 그리고 혹시 여배우가 또 필요한 드라마가 없냐고 물어서 이걸 얻어왔습니다.”
현재 방영 중인 수목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서로 제작국이 달라서 이거 대신 이걸로 갈아탈 수는 없어요. 애초에 약속된 건 주말 드라마 조연 자리였습니다.”
“그럼 왜……?”
“그쪽 피디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까 약속했던 걸 지키겠다는 식이 아니라, 오히려 연화를 원하고 있더라고요. 어려운 연기가 아니라서 연화가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고, 등장하는 장면도 많지 않아요. 이미지와 분위기만 가지고 극 속에 녹아들었으면 하는 거죠. 그래서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우리 쪽에서 더 원해도 되는 것 같아서 이걸 들고 왔습니다.”
“아…….”
“제 생각대로 밀고 가는 것보다는 두 분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주말 드라마 조연으로 연화를 보내고, 수목 드라마 단역으로는 승연이를 보내려고 합니다.”
“두 명 다요?”
“시기적으로도 괜찮아요. 콘서트 마치고 휴식기 들어갈 때 드라마를 통해서 계속 애들을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대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국민 아이돌 그룹, 뭐 그런 걸로 키우고 싶으신가 봐요.”
김종성 팀장은 멋쩍게 웃으며 그런 말을 꺼내곤 했다.
김종성 팀장과 정영수 팀장은 그다음 날 곧바로 방송국으로 향했다.
우리 쪽 의사를 전달할 것이고 가급적이면 이날 확답을 받아오려고 했다.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얘기가 잘되고 있어요.
김종성 팀장에게 먼저 전화가 왔다. 아마도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지게 될 것 같다는 말도 전해왔다.
각각 다른 드라마에 두 명의 멤버들은 넣으려고 하는 것이니 김 팀장과 정 팀장은 한 사람씩 맡아서 움직이기로 했다. 김종성 팀장은 연화, 정영수 팀장은 승연이를 맡는다.
-이제 들어가야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풀리고 있는 중입니다.
“네. 계속 수고해 주세요.”
연화 쪽은 저기서 먼저 섭외를 한 것이니 얘기가 잘되는 듯했다.
‘우리 애를 드라마에 출연시켜 주세요.’가 아니라 ‘그쪽 애를 우리 드라마에 데려오고 싶은데요?’ 이런 것이니까.
그래도 연기 경력이 없는 사람을 꽂아 넣는 것이기 때문에 격식은 차릴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정 팀장 쪽이었다.
이따금 핸드폰을 켜 보고, 받지 못한 전화가 있는 건 아닌가 살펴봤지만 아직도 정 팀장 쪽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한 마음에 연습실로 향했다.
“구경 좀 해도 되죠?”
연습생 애들은 안무 레슨 중이었다.
“그럼요. 들어오세요.”
안무 레슨은 연습생 A조와 B조가 함께 레슨을 받았다.
A조에는 은설이가 B조로 내려간 이후 안무 레슨을 받을 연습생이 두 명밖에 되지 않아서 따로 빼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안무 트레이너는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이라서 하나로 합쳐서 레슨비도 아낄 겸해서…….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정 팀장 연락을 기다리는 게 초조해서 애들 연습하는 거나 구경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부담을 가지진 않았으면 하는데.
이 회사의 수석 프로듀서, 그리고 연습생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연습실에 나타난 것이니…….
“어? 선생님이다!”
“웬일이세요?”
“오! 선생님 이 시간에 보니까 왠지 새로워.”
오히려 긴장하고 있던 애들이 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또 떠든다! 집중해. 집중!”
안무 트레이너가 소리를 버럭 내질러서, 애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들어 올리던 내 손도 조용히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반가운 사람 나타나면 무대에서도 이럴 거야? 춤추다 말고 ‘어, 선생님이다.’ 이럴 거야?”
“죄송합니다.”
“긴장 유지해. 나하고 레슨하는 시간은 무대라고 생각하라니까.”
“네.”
안무 트레이너는 애들을 꽉 잡아서 끌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고개!”
“아, 네.”
“고개 옆으로 돌리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팬들에게는 가장 예쁜 것만 보여줘야 하는 거야. 왜 네가 가진 예쁜 모습을 옆으로 돌려 버리는 거야? 어깨 젖힐 때에도 앞을 봐. 알았어?”
“네.”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고.
“그럴 때에는 고개를 탁, 하고 숙여. 머리가 흘러내리게.”
“네.”
“머리로 가리는 거야. 신비로워 보이게. 무슨 말인지 알았지?”
이런 걸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레슨 중에 애들에게 자율 연습을 시켜놓고 잠깐 느슨해지는 시간이 있었는데, 안무 트레이너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나에게 말해주었다.
“무대화장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정면이 예쁘게 나오는 화장이라서요.”
“무대화장이요?”
“입체적으로 예쁘게 생긴 애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데, 사실 우리 애들이 전부 그렇게 생긴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무대화장은 정면샷 받는 걸 목적으로 하게 돼요. 머리도 옆을 가리게 해서 앞에서 봤을 땐 예뻐 보이게 하고요.”
“아, 네.”
“오늘은 그걸 가르쳐 줬어요. 그렇게 예쁘게 꾸며놓고, 안무 때문에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요. 아이돌 댄스라는 건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오히려 단점을 부각시키면 안 되잖아요.”
사실 가수를 뽑을 때 ‘얘는 비주얼이 좋다’라는 것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정면에서 봤을 때를 말한다.
무대 위에서 측면샷이 잡히는 일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45도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정면 몰빵! 그렇게 하면 평범한 사람을 예쁜 사람으로, 조금 부족한 멤버도 어느 정도 준수하게 꾸밀 수 있는 것이었다.
“은설이도 그래요?”
“은설이요? 아…… 은설이는 좀 다르죠.”
우리 연습생 중에서는 가장 입체적인 얼굴을 가진 아이였다. 굴곡, 조화 등 마치 아름답게 빚어놓은 조각품 같은 마스크였다.
“맞아요. 은설이는 360도 어디서 잡아도 예쁜 아이죠. 그런데 팀으로 무대에 오르는 거라고 쟤 한 명을 위해 구도를 바꿀 순 없어요.”
“연화는 어땠어요?”
“연화요?”
안무 트레이너는 연화가 어렸을 때부터 이 회사에서 레슨을 했었다.
“연화도 마찬가지죠. 걔는 뭐…… 노메이크업으로 있어도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지는 얼굴이잖아요.”
방송국 연출 감독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배우에게 있어서 연기만큼이나 중요한 건 외모라고. 그래야지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돌 멤버를 카메라로 담으면 무대에서 보여줬던 비주얼과의 괴리감이 너무 심해서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얘기를 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예쁜 아이돌이라도 배우 옆에 가면 오징어 된다고.
얼굴의 입체감에서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정면 몰빵으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얼굴과, 일상적인 상황에서 360도 모두를 보여줘야 하는 것의 차이.
그런 의미에서 연화는 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고, 단지 그 얼굴을 가지고 극 중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이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승연이는 어땠어요?”
“네?”
“선생님이 보시기에 승연이도 정면만 잡아야 하는 애였나 해서요.”
내가 그렇게 물었더니 안무 트레이너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승연이는 만능이잖아요. 조금씩 조금씩 다 잘해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적당히 예쁘장하고, 성격도 밝고…….”
* * *
그렇게 연습실에서 애들 안무 레슨 받는 걸 한창 구경하고 있을 때 정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차하면 내가 그쪽으로 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얘기가 잘 안 된다면 좀 더 윗선에서 부탁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래서 연습실을 나서며 주차장으로 향하며 전화를 받았다.
-확정 짓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를 해봐야겠습니다.
“나중이요? 나중이라는 게 어디 있나요.”
-승연이를 데리고 와서 오디션을 보기로 했어요.
“아…….”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퓨전 사극, 그리고 여주인공의 친구 역할.
연화의 섭외가 들어왔을 때 여배우가 또 필요한 드라마가 있다면 대본을 달라고 해서 받아온 것이었다.
‘설마 연화 씨를 그쪽으로 보내시게요?’ 하는 물음에 그런 건 아니라고 했었다. 다른 멤버도 연기 쪽으로 진출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쪽 연출 감독은 아이돌 안 좋아하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었다.
-승연이를 받아줄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았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차갑게 딱 잘라 버리면 차라리 저희 쪽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은 좀 특이했습니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저희를 설득하려고 하더군요.
“그래도 오디션은 보기로 한 거 아닙니까?”
-네. 민태가 애쓴 덕분에요.
“민태 씨가요?”
-얘도 나름대로 자료를 준비해서 그쪽 말에 하나하나 반박을 했던 겁니다. 왜 승연이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오디션 보고 결정하지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겁니다.
왜 안 되는지 논리적으로 이유를 제시했던 사람이 오디션을 결정했다면…… 긍정적인 신호일 텐데.
“정 팀장님이 보시기엔 어떠세요? 가능해 보이세요?”
-오디션을 해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딱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이요.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민태 얘기 듣고 어느 정도 수긍하기는 했지만 그걸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대신 자기가 인정하면 주위에서 말려도 밀고 나가겠죠.
그렇게 되었다.
물론 오디션은 연화도 해야 했다. 카메라 테스트도 받아야 했고. 하지만 연화의 경우는 섭외가 결정된 것이고 그런 오디션을 통해서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심각한 발연기를 하게 된다면 그쪽에서도 섭외를 재고하는 일이 생기겠지만.
그에 비해 승연이는 출연 여부를 결정짓는 오디션을 보는 것이다.
깐깐한 기준이 적용될 것이고 거기서 제작진에게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 얘기는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 그리고 본인의 의사일 것이다.
아무 데나 놔둬도 그 세상에서 반드시 스타가 될 것 같은 연화에 비해서, 승연이는 아직 불안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전부 본부장님 가수예요. 본부장님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팀이 유지되기도 힘들었을걸요.
그러니…… 승연이도 내 가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일을 잘 성사시켜서 얘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 내 새끼 중 한 명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어느 연습실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유난히 나를 사로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빅픽쳐 애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지는 서정적인 사운드를 기반으로 보컬의 멜로디를 뚜렷하게 살린 곡이었다. 그에 비해 안무는 역동적으로 구성했다.
빅픽쳐 멤버들은 거울을 보며 안무를 맞춰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애들은 하던 연습을 즉시 멈추고 나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렁찬 인사 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멤버 중 한 명은 다급하게 뛰어가서 음악을 껐다.
“늦게까지 연습하네?”
다들 긴장을 한가득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나와 몇 차례 안면이 있었던 배민혁만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빅픽쳐는 다음 달에 미니 2집 앨범이 나온다.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이 비츠걸스와 교대를 해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음악은 왜 껐어? 들어보려고 했는데.”
“다시 틀까요?”
말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동작 하나하나에 나를 어렵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 회사의 수석 프로듀서이자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존재…….
“방금 했던 거, 이번 앨범에 수록될 곡이야?”
“저희 타이틀곡입니다.”
“그래?”
느낌이 괜찮은 곡이었다.
“이번 곡도 민혁이가 썼어?”
“네!”
“누구랑 같이 썼는데?”
“혼자 썼습니다.”
“그래?”
이 녀석의 음악적인 재능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다시 들어보자. 음악 틀어놓고 하던 거 계속해 봐.”
“예!”
애들은 힘찬 대답 소리와 달리 쭈뼛거리면서 대열을 만들었다.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이 마주쳤던 멤버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음악 흐르기 시작하고 빅픽쳐 멤버들은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앨범 내고 활동하고 있는 가수라고, 눈빛에는 열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음악은 복도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템포가 빠르지만 스트링이 많이 쓰이며 서정적인 느낌을 강조한 사운드.
그리고 메인보컬 재희의 가창력 또한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 정도로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김인혁이 키워낸 아이들. 김인혁의 새끼들.
실력만큼은 탑 티어에 있는 보이그룹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민혁아, 이거 혼자 쓴 곡이라고?”
곡을 나에게 보여준 빅픽쳐 다섯 멤버는 어깨를 들썩들썩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에…….”
배민혁의 작곡 능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곡에서는 물이 오른 것 같았다. 내 감각이 판단하기에도 이 곡은 아주 훌륭했다. 충분한 시장성을 갖춘 곡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긴 했다. 곡 자체를 예쁘게 만드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보컬의 개인 기량이 파고들 여지를 없애 버렸다.
빅픽쳐에는 뛰어난 메인보컬이 있으니 그것을 살릴 수 있는 구성을 취했다면 곡의 완성도가 더욱 높았을 건데.
“곡은 이대로 완성된 거야?”
“네?”
“아직 레코딩 안 들어갔잖아.”
“아…… 예. 이게 완성된 버전입니다. 이 버전으로 레코딩하려고요.”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스스로 하나씩 깨닫게 하는 것이 좋을지, 언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될지, 아니면 가장 중요한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것이 될지.
“혹시 편곡이 마음에 안 드셔서 그러신가요?”
내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배민혁은 그렇게 물었다.
“아냐. 그냥 물어본 거야.”
여긴 내 아이들 아니고, 내가 프로듀싱하는 앨범이 아니니까. 자칫하면 월권이나 참견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수고했어.”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렁찬 인사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연습실을 나왔다.
* * *
먼저 승연이를 불러서 얘기해 줬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줬더니.
“정말이에요?”
깜짝 놀라면서 묻는 것이었다.
“그래.”
“정말 저예요?”
“그렇다니까.”
“혹시 거기 피디님이 이름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 연화를 부르신 건데 이름을 잘못 알고 제 이름을 말씀하셨다거나…….”
아니라고 말해줬다. 연화는 다른 드라마를 하게 됐다는 얘기도.
“그럼 저희 팀에서 두 명이나 그런 걸 하는 거예요?”
“사실…… 연화는 이미 섭외됐어. 하지만 너는 오디션 결과에 따라서 그 드라마에 출연하게 될 수도 있고, 불발될 수도 있어.”
이 말을 어떻게 전할지 한참 고민했었다. 팀에서 누구는 그쪽에서 필요하다고 하는데, 또 다른 누구는 필요 없다고 하는 걸 억지로 설득시키기 위해 들이밀어야 한다는 얘기를.
승연이와 연화가 팀 내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처사였다. 그래서 이걸 조심스럽게 전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 건 괜찮아요. 걔는 연화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전 그것보다 저한테 섭외 들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요. 다은이도 있고 선화 언니도 있는데 왜 저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거지.”
“에이, 그래도 저는 그냥, 예쁘고 매력 있는 멤버들 사이에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그런 말까지 하길래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줬다.
“회사에서 판단한 거야. 승연이 네가 이쪽으로 재능이 있어 보인다고.”
그리고 김민태 씨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감정을 섞어서 다양하게 표현할 줄 아는 등등. 비록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경험을 쌓으면 앞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얘기를 김민태 씨가 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앞으로 현장에서 계속 함께 다닐 텐데 불필요한 부담까지 떠안을 필요는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어요.”
“만약에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그건 아니에요!”
다행스러운 것은 승연이의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해볼게요. 오디션이 다음 주라고 하셨죠?”
“그래.”
“저 열심히 준비해 볼게요.”
* * *
반면 연화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회사에서 연기자 쪽 파트를 늘리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외부에서 배우를 데리고 오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거고, 아마도 우리 회사 가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기한테 일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부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네.”
“그래서 나한테 칭찬을 듣고 싶은 거고? ‘우와, 너는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구나.’ 뭐 이런 말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회사에 오래 있었잖아요. 선생님보다 더 오래.”
그러면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는 것이었다.
“틀렸어.”
“네?”
“틀렸다고. 그런 게 아니야.”
“맞잖아요. 저 놀리려고 그러시는 거죠?”
“아니야. 정말로 틀렸어. 너를 드라마로 보내는 건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이었어.”
“거짓말 같은데요.”
“진짜야. 너희들 예능 내보낼 때부터 방송국하고 협의가 된 내용이었어. 괜히 바람 들어갈까 봐 미리 말을 안 했던 거지.”
“…….”
그리고 미리 말을 안 했던 이유는 쓸데없는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연화는 몬스터 뮤직에서 연습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그것도 손에 꼽히는 대형 기획사로부터.
하지만 그때마다 거절을 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연화가 가지고 있는 고집 때문이었다.
‘오직 가수만 하고 싶어서.’ 이게 이유였다.
큰 회사에 들어가면 가수 활동만 할 수가 없을 것이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어려운 역할은 아니야. 등장 회수도 많지 않아. 초반에 몇 번 등장하고, 그리고 중반 즈음에 잠깐 다시 나올 거야.”
우선은 배역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실제로 그 역할은 비중에 비해 출연하는 빈도는 적었다. 남주와 여주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할 때 집안에서 권하는 결혼 상대로 잠깐 나오게 되고, 남주와 여주가 이혼을 했을 때 남주의 마음을 흔들게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갈등하는 남주의 심리였기 때문에 등장하는 씬이 몇 개 있을 뿐 어떠한 사건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상 단역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연기 수업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제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요?”
체계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아서 배우로 데뷔하는 아이돌은 손에 꼽는다. 사실 아이돌의 드라마 출연은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쪽에선 아이돌 팬덤을 끌고 와서 시청률을 확보하려는 목적, 그리고 아이돌 쪽에선 연예인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발판, 이런 게 맞아떨어지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쪽에서도 너를 원하고 우리도 너를 그쪽으로 보내려는 거야.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거라고 생각해 봐. 이런 것도 네가 가수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분명히 좋은 영향을 미칠 거야.”
“그런데 저 드라마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뭐?”
“저, TV를 안 보고 살았잖아요.”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으면서도 연화라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스무 살짜리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드라마를 안 보고 살아왔다는 게.
“그런데…… 팀을 위한 일이겠죠? 이것도?”
“그렇지.”
“팀을 위한 일이라면 할게요.”
예상 밖으로 연화는 이번 일에 의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저는 앞으로 가수로 오래 노래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의 이 팀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요.”
분명히 그렇기는 했다. 비츠걸스를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부담 가지지는 말고…… 천천히 하나씩 시작해 보자.”
우선은 플로우 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우리 애들에게 연기를 지도해 줄 수 있는 선생을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연기 레슨에 들어갈 것이고, 오디션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 계획을 말해줬더니 연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그날 저녁에는 김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아마도 다른 회사 사람 중에서 나와 가장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그저 같은 업종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일 뿐.
-그런 의미에서 는 영리하게 잘 파고든 곡 같습니다. 저 요즘 이 곡 자주 들어요.
그는 비츠걸스의 곡들을 극찬했다.
특히 에 대해서 한참 동안 얘기했다. 4인조 그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팀의 코어 멤버 한 명을 살리는 선택은 탁월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주 연락한다고는 하지만 긴장을 풀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플라지아의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 또한 그걸 잘 보고 있다는 얘기, 그리고 솔로 활동하고 있는 멤버에 대해서는 곡이 좋다는 말을 하곤 했다.
상대방이 듣기 좋으라고 적당히 꾸며낸 얘기들을.
“아 참, 그리고 김 실장님 방송도 잘 보고 있어요. 아이돌 리바이벌, 이거 포맷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리고 김우진은 요즘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출연 중이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데뷔를 했지만 실패한 아이돌, 또는 아이돌을 희망했지만 사정상 다른 분야로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데뷔에 거의 가까이 갔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던 아이돌 연습생들.
이런 사람들을 잔뜩 모아놓고 경쟁을 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안타깝게 묻혀 버린 원석을 발굴한다는 의도였다.
이런 포맷은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서 팀으로 만드는 등의 기존 프로그램과는 달리, 은 연예 기획사의 프로듀서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맘에 드는 참가자를 픽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다른 프로듀서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끝까지 자신의 멘티로 참가자를 지켜내면 프로그램 종료 후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식이었다.
참가자 입장에서는 당장 팀으로 데뷔시켜 주는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별다른 메리트가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화제성만큼은 이끌어낼 수 있었다. 조작 논란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내용이었고.
-아시겠지만 저는 진지하게 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요. 괜찮은 애가 보이면 데려다가 키우려고요.
“그런 것 같았어요. 거기 참여한 프로듀서 중에서 혼자 너무 진지하시더라고요.”
-제가요? 하하.
그리고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은 이것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었다.
-저 사실, 얼마 전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중대한 결정이요?”
-제 플랜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습니다.
그의 플랜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새로운 걸그룹을 만들 것이고, 내년 말에 데뷔시킬 것이라고. 그런데 나 또한 그 시기에 걸그룹을 낼 것이니, 그의 팀과 내 팀을 경쟁시키는 프로그램을 함께하자고.
여기까지는 이미 얘기가 된 내용이었다.
-조금 앞당길 겁니다. 내년 말은 너무 늦어요. 내년 중순에 데뷔시키는 걸 목표로 할 겁니다.
몇 달 정도 앞당기겠다는 말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끝내면 곧바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들어갈 겁니다. 이건 저희 아이즈 컴퍼니 내부의 경쟁을 다룰 거예요. 우리 연습생 중에서 차세대 걸그룹의 데뷔조를 선발하는 내용을 담을 겁니다.
그는 이걸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으로 내보낼 것이라고 했다. 이미 계약까지 마쳤다고 말했다.
-8주에 걸쳐서 저희 회사 자체 경쟁을 마무리할 겁니다. 그러면 데뷔팀이 정해지는 거죠. 그래서 말인데…… 박영민 피디님의 새로운 팀도 이 무렵에 같이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서 그는, 나와의 대결에 어떤 식으로 포커스를 맞출지도 생각해둔 것이 있다고 했다.
아이즈 컴퍼니는 최근 10년 동안 걸그룹 세 팀을 연달아 정상의 자리로 올리며 걸그룹 명가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네 번째 주인공을 내보낸다는 것이었고.
우리 몬스터 뮤직에서는 제2의 비츠걸스를 데뷔시키는 것이었고, 프로듀서로 주가가 올라 있는 내가 참여하는 걸 내세우면 균형이 맞을 거라는 얘기였다.
-예상대로 진행되면 내년 2월이 될 것 같습니다. 그전에 저희 쪽에선 데뷔팀이 꾸려질 겁니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죄송해요. 안 된다고 하시면, 두 팀을 경쟁시키는 건 어쩔 수 없이 취소하고 그냥 각자 데뷔시키는 걸로 해야겠습니다.
기존의 플랜대로 한다면 8월에서 9월 정도에 이 프로그램을 내보낸 뒤 겨울에 두 팀을 데뷔시킨다는 것이었는데.
반년 정도 빨리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아이즈 컴퍼니 내부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생각해 주세요. 준비하실 것이 많으시니 안 된다고 하셔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죠.”
-네?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보이네요. 말씀하신 대로 가요. 내년 2월에 하는 걸로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대답해 주셔도 돼요.
“길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렇게 해요.”
2월이라면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그 전까지 우리 연습생 애들로 팀을 구성해서, 방송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기는 했다.
게다가 몇 팀 안 되는 가수들에도 허덕이고 있는 우리 회사의 사정을 감안하면, 여기에 걸그룹 한 팀을 더 추가한다는 건 그야말로 비명 소리가 나오는 일이기도 했고.
“그런데 무리하는 건 사실입니다. 저희가 아이즈 컴퍼니처럼 크면 모르겠는데…… 저희 인력 가지고 6개월을 당기는 건 좀 어려워요.”
-그렇겠죠.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희 회사 사정을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김우진 실장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승낙한 겁니다.”
-제가요?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부탁을 하는 건 저쪽이고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일이었다.
“어떤 걸 도와달라고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고요, 아마 진행하다 보면 어려운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도움을 요청할 일도 이미 정해놓고 있기는 했다.
-그런 거라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일하는 걸 게임처럼 여긴다고 하고, 그래서 하나하나 스테이지를 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테이지를 깨기 위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지…… 경쟁자? 또는 함께 레벨업하고 있는 동료?
-그런데요, 그저께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에 몬스터 뮤직 출신 참가자가 나왔던 거 아세요?
“예? 저희 회사요?”
-몬스터에서 연습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이라고 하던데…… 괜찮았어요. 잘하더라고요.
“누군데요?”
-누군지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스포하면 안 되는데.
우리 회사에서 그만둔 연습생?
-본방 보세요. 스포하지 말라고 작가들한테 얼마나 주의를 들었는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