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5
5장 밤하늘의 별처럼(1)
세 명으로 구성된 걸그룹 멤버들이 열정적인 무대를 마쳤다.
원래는 5인조였다고 한다. 하지만 두 명의 멤버는 팀의 실패 이후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 버렸고, 남은 세 명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무대가 2년 전이었다고 했죠?”
심사위원이 물었다. 그는 어느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있는 프로듀서였다.
“네. 2년 반 전이었습니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다음에 두 명이 곧바로 탈퇴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2년 반 동안 지금 세 명이 꾸준히 연습을 해온 건가요?”
“아뇨. 연습실도 없고, 저희 연습을 봐줄 분도 안 계셔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는 감격 때문일까. 말끝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안 좋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멋진 무대였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2년 반 동안 이런 끼를 억누르고 살았을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무대였습니다.”
이런 평가가 나오자 무대 위에 세 명은 애써 참고 있었던 감정을 터뜨리며 뺨 위로 눈물을 흘렸다. 입가를 가리고 있는 손이,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의 예선 무대였다.
한 팀씩, 또는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었고, 준비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네 곳의 회사에서 참가한 네 명의 프로듀서는 그 무대를 평가해서 자신의 멘티가 될 합격자를 선택하였다.
중고 신인 발굴 프로젝트. 그것도 현재 활동하고 있는 네 명의 프로듀서들에 의해서 발굴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넷 중에서 합격을 준 프로듀서가 있다면 참가자는 그 프로듀서의 팀으로 들어가 멘티가 된다. 여러 명이 합격을 주면 오히려 참가자 쪽에서 프로듀서를 선택할 수 있다.
멘토와 멘티는 회차가 진행될 때마다 바뀔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다른 팀의 멘티를 빼앗아 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종회까지 자신에게 남겨진 멘티들을 회사로 데리고 가서 키운다는 내용.
그리고 다음 참가자.
이번에는 팀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여성 참가자 한 명이 쓸쓸하게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력을 보니까…… 데뷔는 못 하셨네요.”
“네.”
“연습생으로만 있었나 봐요. 몇 년 연습했죠?”
“5년 했습니다.”
5년 동안 연습생으로 있었지만 데뷔를 못 했던 사람이 참가한 것이었다.
“음…… 몬스터 뮤직에 있었네요?”
“네.”
“작년에 그만둔 걸로 나와 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우리 회사에 있다가 작년에 그만두었던 연습생이었다.
“왜 그만뒀나요?”
심사위원의 질문에 참가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가수가 제 길은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일을 하려고 그만뒀었습니다.”
“몬스터 뮤직에 있었으면 비츠걸스 멤버들하고도 잘 알겠네요?”
“네. 같이 연습했었으니까요.”
“누구하고 제일 친했어요?”
“저는 승연이하고…… 나이도 같고 회사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연락해요?”
“지금은…… 연락은 안 합니다.”
그리고 불편한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지윤 씨는 비츠걸스 데뷔조에는 못 뽑혔던 건가요?”
“아…… 네.”
“왜요?”
“…….”
“왜 못 뽑힌 것 같아요? 왜 그 사람들은 됐던 거고, 왜 지윤 씨는 안 됐었는지.”
“저한테는 재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재능? 무슨 재능? 재능 탓만 해서는 결코 나아질 수 없어요. 그럼 지윤 씨는 그 회사에 있었던 동안 후회 없을 만큼 열심히 했어요? 데뷔했던 그 친구들보다 더?”
“…….”
“재능 탓을 하는 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하고 난 다음에, 그래도 안 됐을 때 하는 말이지,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저한테 죄송하다고 할 건 없고.”
심사위원들의 태도는 내내 일관적이었다. ‘아이고, 너무나 힘든 시기를 겪으셨네요.’ 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왜 실패했었나요?’ 하고 따끔하게 묻고 있었다. 지윤이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참가자에게.
지윤이는 작년 말에 회사를 그만뒀다.
-저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하려구요.
-더 늦기 전에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보고 싶어요.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 비츠걸스의 데뷔조를 뽑을 때에는 자주 거론되던 연습생이라고 했다.
남은 한 자리를 두고 승연이와 경쟁했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비슷하고 실력에도 큰 차이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결정할 수 없었던 포지션이라고 했다.
회사 내부에서도 지윤이와 승연이를 두고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둘 중 누굴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가기에는 애초에 4인조로 기획했던 것을 깨버려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선택은 승연이로 향했다.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나 외모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보면, 팀의 프론트가 될 수 있는 연화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승연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선생님께 배웠던 몇 달은 즐거웠습니다. 매일 매일 노래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끼는 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맡았던 연습생이었고, 다은이 다음으로 잘하는 애였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가르쳤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그만뒀을 때가 스물두 살.
그리고 지금 스물세 살. 지윤이는 가수가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했고 늦기 전에 다른 일을 해보겠다며 회사를 그만뒀다.
“그럼 노래 들어볼까요?”
“네.”
지윤이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선택한 곡은 나하고 자주 연습하던 곡이었다. 월말 평가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그 곡.
‘너한테는 이런 곡이 잘 어울려’라고 말해주며 내가 골라줬던 곡이었다.
단조로운 선율이 가스펠 스타일로 느릿느릿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템포가 빠르게 변하며 비트가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보컬의 음색도 파워풀하게 바뀌어야 하고,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지윤이의 장점이라고 봤었다.
그리고 이날 무대에서도 지윤이는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했다.
잘했다. 그리고 많이 늘었다.
나하고 함께했을 때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발전했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혀 1년 동안 쉬었던 폼이 아니었다. 꾸준하게 목소리를 갈고닦았다는 것이 무대 위에서 확실하게 보였다.
* * *
이 프로그램은 곡이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들이 합격을 결정할 수 있었고, 합격을 주면 심사위원이 앉아 있는 자리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식이었다.
지윤이가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는 중에 빨간 불이 하나 들어왔다. 관객들의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무대를 마친 뒤에 또다시 빨간 불 하나. 최종적으로 네 명 중 두 명의 심사위원들로부터 합격을 받은 것이다.
“잘 봤습니다.”
무대가 끝나자 100명 정도 와 있었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화면은 갑자기 바뀌며, 아마도 사전 인터뷰인 듯한 장면으로 넘어갔다.
“저한테는 가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그만뒀었는데…… 계속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늦었지만 대학에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그래도 너무 노래가 하고 싶은 거예요. 미련이 남는다기보다는 그냥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참가자들마다 이런 구성으로 스토리를 보여주곤 했다. 모두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회사에 저를 잘 챙겨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렇다고 다시 연락하기에는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그분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방 안에서 혼자 연습했어요. 노래 부를 장소가 없어서,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노래한 적도 있고…… 예전에 선생님께 배웠던 내용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면서…….”
어떻게 보면 감성팔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집이었지만, 저 사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츠걸스 잘되는 거 보면서 왜 안 부러웠겠어요. 제가 조금만 더 잘했어도 저 자리에 제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하지만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이 잘되는 걸 보니까 기쁘기도 했어요. 저 앨범도 다 샀어요. 응원해 주려고.”
그리고 다시 지윤이가 서 있는 무대로 장면이 전환되었다.
“흠잡을 데가 없는 무대였어요. 아주 어려운 곡을 선택했길래 왜 이런 무리를 두었나 생각했지만,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심사평이 나오자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두 명의 합격 표시를 보고 이미 환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지윤이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박영민 피디님하고 아주 친하거든요. 이따가 물어볼게요. 왜 지윤 씨 안 뽑았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이렇게 예쁘고 재능이 훌륭한 분을 왜 놓쳤는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김우진이었다.
두 명이 합격을 주었고 이제 선택권은 지윤이에게 있었다. 지윤이가 선택한 멘토는 김우진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박수 속에서 지윤이는 김우진의 멘티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지윤의 무대를 담은 아이돌 리바이벌이 방영되고 있던 그때, 그녀와 경쟁한 적이 있었던 사람도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드라마 의 제작진이 걸그룹 멤버 남승연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출 감독 이중학 피디는 아이돌이 연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돌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배우를 데리고는 원하는 장면을 제대로 연출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드라마의 흥행을 위해 스타 배우를 섭외하기보다는 극을 자기 힘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배우를 선호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는데…….
는 출발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거액의 출연료를 주고 데려온 여배우는 이중학 피디가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낼 역량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라 시대, 구름 위에서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던 천사가 어지러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궁중의 비파 연주자.
성공에 대한 열망이 무척 큰 인물이었다. 궁중 음악기관에 선발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정치 공작에 맞서는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차갑고 냉철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잠깐 마주친 남자 주인공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오묘한 심리를 연기해야 하는데…….
흐름이 뚝 뚝 끊어지는 듯한 연기 속에서 그런 감정선을 살리기는 어려웠다. 만약 배우 섭외의 모든 권한이 이중학 피디에게 있었다면 저런 배우는 이름도 거론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작가와 상의해서 새로운 인물을 급하게 투입하기로 했다. 여주인공의 감정선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여주인공과 투닥거리는 장면을 만들어낼 친구 역할을 극에 넣기로 한 것이었다.
대본은 빠르게 수정되었고, 배우만 구하면 되었다.
밝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도록 튀지 않는 연기가 가능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적재적소에 킬링 포인트를 넣을 수 있는 전달력.
문제는 이 정도의 연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드라마의 단역을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 것이었다.
연기력이 출중한 무명 배우 중에서 고르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치이…… 이것도 하고 싶다, 저것도 하고 싶다, 너 그러다간 평생 욕심만 부리다가 늙어 죽는다. 우리 옆집 중구네 할머니처럼.”
그리고 오늘 오디션을 보러 온 걸그룹 멤버는 그의 앞에서 대사를 읽으며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뭐? 진짜! 어떡해…… 너 어떡하려고 일을 자꾸 벌이는 거야!”
이것 봐라? 라는 생각이 드는 전달력이었다.
대사 하나하나가 모두 귀에 와서 꽂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감정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는 힘이 느껴졌다.
표정, 눈빛, 목소리, 말투, 가벼운 손짓마저.
“나는 그 사람 좀 그렇더라.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가지고……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앞에서는 실실 웃다가도 뒤에 가서는…….”
‘미주’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캐릭터.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 여주인공의 속마음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성격, 그리고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도록 순수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표현력.
예상 밖이었다. 그 미주가 눈앞에 나타나서 사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 * *
첫 번째 데뷔에서 실패를 겪고 회사를 나온 뒤,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다른 기획사에 오디션을 보고 들어갔다. 그때가 스물두 살이었나 스물세 살이었나. 아무튼 그 정도였을 때.
작은 회사였다. ‘메이커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이었다. 왜 메이커냐고 물어보니까 스타메이커로 하려다가 너무 길어서 줄인 거라고.
“가수를 왜 계속 하려는 거야?”
그 회사의 실장이 그렇게 물었다.
매니저도 하고 기획도 하고, 이거저거 혼자서 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수를 왜 계속 하려는 거냐고. 계약서를 쓰고 그다음 날이었나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비꼬는 투는 아니었다. 내 보컬 능력을 인정해 준 분이었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꼭 자기하고 일을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를 잡아준 분이었다.
“제 꿈이니까 그렇죠. 가수로 성공하는 것.”
“그저께 면접 때도 그렇고, 조금도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묻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보통 네 나이 정도 되면 갈팡질팡할 때잖아.”
스물두 살.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왔다. 열아홉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기에 대학도 가지 않았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디까지 추락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군대에 갔다 오면 20대 후반. 고졸. 음악 외에는 아무런 경력 없음.
“왜 갑자기 그런 얘길 하세요? 제가 온 거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데려왔는데 그럴 리가 있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라니까.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 알고 싶어서 그런 거지.”
사실 이 시절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책 없었던 건지, 아니면 노래 잘한다는 말에 취해서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건지, 아마도 그런 마인드가 아니었나 싶지만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했었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저는 노래하는 게 제일 행복해요. 노래를 못 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거예요.”
* * *
노래를 너무 하고 싶어서 다시 도전한다는 지윤이를 보니까 내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나한테 연락하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윤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 기대를 저버린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얼 뜻하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런 입장이었던 적이 있으니.
지윤이는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김우진 프로듀서의 뒤로.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참가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윤이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꼭 성공하기를.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김우진의 멘티로 끝까지 남아서 아이즈 컴퍼니와 계약을 하게 된다면…… 그래서 만약 김우진이 새로 구상하고 있는 팀의 멤버로 뽑히게 된다면…… 내 반대편에 나타나게 되는 건가.
내 팀과 김우진의 팀이 대결을 할 때 상대편의 멤버로.
그래도 뭐, 지윤이를 응원하는 마음은 그 정도의 이해관계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두고 온 과거를 보는 것 같아서.
오래전 내 모습이 지윤에게서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정영수 팀장의 전화였다.
“어떻게 됐나요?”
전화를 받자마자 그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승연이의 오디션이 진행 중이었고, 나는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실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그래서요? 승연이는요?”
-아직 오디션 중이에요.
뭐라고? 아직?
“아까 들어갔다면서요. 한 시간 전인가, 그때 들어가지 않았어요?”
-길어지네요.
무슨 오디션을 이렇게 오래 보는 건지.
-그런데 결과는 나온 거나 다름 없습니다. 저쪽 피디가 승연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해요.
“아, 그래요?”
-대사 몇 개를 보여주면서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갑자기 그 자리에서 디렉팅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건가 싶었는데, 말하는 걸 가만히 들으니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어땠는데요?”
-그 배역을 승연에게 주겠다고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아요. 다른 대사도 해보라고 하면서 디렉팅을 해주는데…… 아, 잠깐만요.
그러더니 사람들의 말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어왔다.
-결정됐답니다. 승연이가 그 배역 맡기로 했어요.
수화기 너머로 김민태 씨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요. 고생하셨습니다.”
-안에 계신 분들하고 인사해야 돼서 이만 끊겠습니다.
승연이에게서는 10분 정도가 지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선생님! 저 됐어요!]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어렴풋이 떠올라서 나도 같은 표정이 만들어졌다. 축하한다고 답장을 보내주었더니 귀여운 강아지가 방긋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답장으로 돌아왔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선 빅픽쳐의 새 앨범 작업이 한창이었다.
빅픽쳐의 2집 앨범 타이틀은 이란 제목의 곡이었다. 지난번에 연습실에서 들었던 곡이다.
파란 눈. 사랑하는 사람을 파란 눈으로 지켜본다는 내용인데, 가사가 중의적으로 쓰여졌을 뿐 사실상 스토킹을 뜻하는 말이었다.
파랗다는 것은 몰래 지켜본다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었다. 나는 네가 모르게 파란 눈으로 언제나 널 지켜보고 있다. 이런 의미로.
이번 2집 앨범에선 인혁이가 빠지고 그 자리에 이정인 작곡가가 투입되었다. 앨범 프로듀싱은 배민혁이 혼자 맡기로 했고 이정인 씨는 서포트해 주는 식으로 참여했다.
앨범에는 5곡이 수록될 것이고 보너스 트랙까지 합쳐서 총 6개의 트랙으로 구성된다.
이 중 4곡은 배민혁과 이정인 씨가 공동으로 작업을 한 것이고 타이틀 은 배민혁이 혼자서 만든 곡이다.
괜찮은 곡이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꽤 히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뼈대를 잘 잡아서 구성했고, 악기 선택도 탁월했다. 열아홉 살의 감각이라고 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만약 내가 손본다면 보컬의 멜로디를 살리기 위해서 좀 더 뚜렷한 라인을 만들어내고, 악기 구성은 단조롭게 할 것이다. 메인 보컬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후반부에는 전조를 일으키는 식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상당히 대중성 있는 초중반부가 매력적이었지만 금방 지치는 감이 없지 않았다. 듣는 사람의 피로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곡의 구성도 드라마틱하게 가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김인혁이 하나하나 가르쳐가며 키우고 있는 애에게 내 손을 타게 하는 건 피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아직 열아홉 살이니까.
“박영민 프로듀서님?”
곧 있으면 지윤이 방송이 있어서 그걸 보려고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더니 배민혁이 찾아온 것이었다.
“왜? 또?”
“곡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너 자꾸 왜 이러냐. 네가 알아서 쓰라니까.”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들어주세요.”
이 녀석은 벌써 몇 번째 이러는 것이었다. 자꾸 나를 찾아와서 곡을 봐 달라고 한다.
“정인이 형한테 들으니까 피디님께서 봐주시면 곡이 확 달라진다고 하시더라고요. 밍밍한 음식에 최상급 양념을 확 끼얹는 뭐 그런 거 같다고. 그래서 저도…….”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지난번에 연습실에서 봐주셨을 때 ‘아 이건 좀’ 하는 표정을 지으셨잖아요. 그게 계속 걸려요.”
눈치는 꽤 빠른 녀석이었다.
“알았어. 이따가 보자. 나 뭣 좀 볼 거 있어.”
“수정한 부분만 한 번 들어주시면 안 돼요?
“이따가 다시 오라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엄청나게 집요하길래 하는 수 없이 한 번 들려달라고 했다.
지금까지 조금씩 수정한 버전을 계속 들고 왔지만 매번 내 대답은 같았다. ‘괜찮아. 이렇게 계속 하면 돼’.
그래도 자꾸 매달리는 열정을 차마 무시할 수 없을 때에는 가벼운 어드바이스 정도를 건네곤 했다. ‘곡을 예쁘게 만들려고 하지 말고 듣는 사람이 어떤 포인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생각을 해봐.’ 이런 식으로.
“알았어. 들어보자.”
“옙!”
그런데 이번엔.
“이거 누가 손봐 준 거야?”
“아뇨. 제가 혼자 만든 곡이라니까요.”
“정인 씨가 봐준 게 아니고?”
“이 곡은 정인이 형 안 들려줬다니까요. 괜히 들려주면 은근슬쩍 자기 이름 넣으려고 할까 봐.”
인혁이는 요즘 콘서트 건으로 밖에서 일을 보느라 회사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럼 정말로 이 녀석 혼자 곡을 다듬은 건가?
“괜찮아. 잘 다듬었어.”
“에이, 그런 말씀 말고 냉정하게요.”
“이번엔 진짜야.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
굳이 말해주지 않았던 부분이 보완되어 있었다. 메인 보컬 재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귓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그래서 가장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듯 시원한 느낌이었다.
한 번 더 플레이해서 듣고 있으니 배민혁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눈치 빠른 녀석이니까 느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다는 걸.
“너무 힘이 들어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곡을 너무 화려하게 꾸미는 거요?”
“그것도 맞지만, 작곡하는 사람이 곡을 너무 잘 만들려고 하는 걸 뜻하는 거야. 단조롭게 구성해도 힘이 들어간 곡이 나올 수 있어. 잘해야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해치고 있는 거야.”
“아아…….”
이해를 한 걸까. 녀석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히 그런 시늉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상자가 맘에 드는 곡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겠어? ‘아! 이 사람 곡을 잘 만드는구나.’ 이런 생각? 아니면 ‘이 곡 너무 좋다!’ 이런 생각?”
“후자겠죠.”
“이번에 가지고 온 버전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들어. 보컬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는 구성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재희가 부르는 파트. 거길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 봐. 곡이 3분짜리라면 3분 내내 일정한 만족을 줄 수는 없어. 곡의 킬링 파트를 만들어서 인상을 강하게 하는 게 중요해. 앞으로도 이 곡을 잊지 않고 계속 찾아 듣게 하려면.”
“아…….”
배민혁은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후반부는 색다른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전반적으로 사운드의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자기 스스로 길을 찾아낸 열아홉 살짜리 천재에게,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내 쪽에서 신이 나서 한참 동안 시끄럽게 떠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어? 지윤이 누나다.”
그러는 동안 방송은 시작해 버렸다.
* * *
“야, 이제 너 가라.”
“저도 같이 보면 안 돼요?”
“너 지윤이랑 친했냐?”
“잘 알죠. 제가 그래도 이 회사에서 오래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배민혁은 “저기 나갔구나. 몰랐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방송은 두 번째 라운드의 마지막 회차였다.
예선에서 네 명의 멘토들은 각자 자기가 맡을 멘티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같은 팀이 된 참가자들, 그러니까 같은 멘토 아래에 있는 멘티들이 서로 경쟁을 해서 생존자와 탈락자를 가르는 일이 남아 있었다.
-각 멘토들은 자기 팀에서 네 명의 멘티만을 남겨둔 뒤 나머지 멘티들을 탈락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네 팀에서 네 명씩, 열여섯 명이 남게 되겠죠? 이 열여섯 명이 생방송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런 방식이었다.
“어? 김우진이네요.”
“너 저 사람 알아?”
“알죠. 곡 진짜 잘 쓰잖아요.”
김우진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 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했다.
딱 들어도 ‘이건 김우진의 곡이다’라고 할 만큼 개성이 뚜렷했고, 모험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실험적인 시도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대중적으로 히트할 수 있는 곡을 꾸준히 쓰는 건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보다 피디님이 곡을 더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아부하지 마.”
그리고 방송은 김우진의 멘티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총 여섯 명. 이 중에서 두 명이 탈락하고 네 명이 살아남을 것이다. 빠르게 스쳐 가는 화면 속에서 지윤이의 모습이 언뜻 잡혔다가 사라졌다.
-방송 출연이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프로듀서가 방송 나오는 걸 좋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저는 이 프로그램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김우진의 인터뷰였다.
-내년 초에 새로운 걸그룹을 팬들께 보여드릴 겁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에 나온 건 팀의 멤버를 보강하기 위해서입니다. 재능 있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다른 세 명의 프로듀서들은 나름대로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는 등 방송답게 임하고 있었지만 김우진 혼자서 무척 진지했다.
저 사람은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거다. 자기 팀에 재능 있는 아이를 넣을 수 있다면 자기 이미지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렇겠죠. 확신할 순 없지만…… 마지막까지 제가 데려가는 참가자라면, 아마도 저의 새로운 팀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김우진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다음으로 이어진 프로필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의 김우진.
핑크박스, 데이지, 플라지아의 프로듀서.
당대 최고의 걸그룹들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 팀들의 대표곡을 만들어낸 작곡가.
“와…… 그럼 지윤이 누나가 아이즈에 갈 수도 있는 거예요?”
“아직은 모르지.”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요. 저 누나 갑자기 나가서 말이 많았는데.”
“무슨 말?”
“비츠걸스가 5인조였으면 충분히 뽑혔을 거라고요. 데뷔할 수 있는 실력인데 운이 없어서 잘 안 풀렸다는 얘기가 좀 있었죠,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도 보컬 트레이너만 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왕 하는 거 다섯 명으로 구성하면 무대도 꽉 차 보이고 좋지 않을까 하고.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때에는 다은이도 아직 연습생으로 있었을 때이니.
하지만 회사에서 돈이 나가는 걸 지켜보는 위치에 오르고 나니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멤버 수가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돈이 더 나가게 된다. 네 명한테 400만 원이 들어간다면 다섯 명한테는 500만 원이 들어가는 식이었다.
네 명이 찍는 뮤직비디오에 한 명 더 들어간다고 업체에서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준비하는 비용이나 관리하는 비용에서 정말로 1인분이 더 나가는 걸 보며 혀를 찬 적이 있었다.
그래서 비츠걸스는 그 당시 몬스터 뮤직의 예산을 감안해서 4인조로 정해진 것이었다.
연화를 센터에 둘 수 있는 5인조로 가자는 얘기도 빈번하게 나왔지만, 그 한 사람분의 차이를 부담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오! 잘한다. 피디님, 잘하는 거 맞죠?”
그리고 김우진의 멘티들 여섯 명이 무대를 연출하고 있었다.
관객이 한 명도 없는 무대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은 무대화장을 하고서 따가운 조명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날의 미션은 플라지아와 데이지의 곡 등, 총 세 곡을 소화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섯 명이 마치 6인조 걸그룹인 것처럼.
지윤이는 두 곡에서 리드 보컬을, 그리고 한 곡에서는 메인 보컬을 맡아서 무대를 보여주었다.
“오오! 피디님. 빨간 티 봐요, 빨간 티! 진짜 이쁘다.”
“너 안 가냐? 좀 가라니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무대의 완성도는 부족해 보였다.
여섯 명의 멘티들은 오랜 연습생 생활을 했거나 한 번 데뷔한 적이 있을 정도로 기량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급조한 티가 곳곳에서 보였다.
그리고 지윤이의 퍼포먼스는…… 그 여섯 명 중에서는 준수한 편에 속했다.
연습 시간이 부족했기에 안무의 완성도는 떨어져 보였지만 가창력만큼은 여섯 명 중에서 가장 괜찮게 들렸다.
여섯 명 중에서 네 명이 생존하는 것이니, 그 네 명 안에는 충분히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
-모두 수고했어.
무대가 끝나고 여섯 명은 김우진 앞으로 모였다.
-먼저 김아름.
결과는 조금 심심하게 발표되었다. 한 명씩 호명해서 합격인지 탈락인지 알려주는 식이었다.
-아름이는 생방 무대로 같이 가자. 합격이야.
그리고 이러한 결정 권한은 오로지 멘토에게만 있었다.
-다음으로 이지윤.
“지윤이 누나다.”
“…….”
“지윤이 누나는 되겠죠? 6명 중에서 2등은 한 것 같은데.”
-지윤이도 수고했어.
“붙었으면 좋겠다. 아이즈 들어가서 훨훨 날았으면…… 근데 그렇게 되면 비츠 누나들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지윤이는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같이하는 걸로 하자.
“엥?”
-잘했지만…… 지윤에게는 어울리는 무대가 따로 있는 것 같아.
“저런 게 어딨어. 어? 그런데 피디님 왜 이렇게 좋아해요?”
“좋아해? 내가?”
“너무 티 나게 웃고 계신데요. 피디님 지윤이 누나 싫어하셨어요?”
그리고 화면이 바뀌어서 김우진의 인터뷰 장면이 나타났다.
-지윤이도 잘했습니다. 재능이 있고 열심히 연습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탈락시킨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추구하는 색깔과 맞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이 때문입니다. 스물세 살이면 아직 한창때이긴 하지만, 아이돌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예요.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와, 씨…… 나이 많다고 떨어뜨린 거네. 너무하지 않나요? 그런데 피디님 진짜 계속 웃고 계시네.”
“야, 시끄럽다. 빨리 나가.”
화면은 다시 지윤이를 비추며, 허탈하게 웃고 모습을 보여주었다. 괜찮아요, 하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눈으로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얼굴로.
“야, 너 빨리 나가. 나 할 일 있으니까.”
배민혁을 내쫓은 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어서 지윤이에게 연락했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저 방송분은 아마도 일주일 전 즈음 촬영된 것 같던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점점 조급해졌다.
신호가 열 번 정도 울린 후에야 지윤이는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지윤아. 잘 지냈어?”
이렇게 전화를 하게 되면 무슨 말을 할 건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방송 잘 봤다, 그런 데서 탈락했다고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등등.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저 입가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그 프로그램에서 탈락했다고 가수의 꿈을 접지 않았기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다시 솟아난 열정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이가 많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저렇게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노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아이라면 내가 가수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윤아.”
-네.
“다시 회사 들어와.”
-네?
“선생님이 이번에 새로운 팀을 하나 만들 건데, 거기서 노래하자.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 * *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다.
하이힐 소리만 또각또각 들리다가 두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음악이 나오면서 그 위로 멘트가 깔린다.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
그 전까지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화장품 광고, 완벽한 이목구비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배우가 아름다움을 뽐냈던 것에 비해, 오직 분위기만을 앞세웠던 광고였다.
그 광고가 크게 성공한 이후 모델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화장품 광고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델의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한 메이커를 대표하는 모델을 딱히 꼽기 어려워졌고, 투 톱 모델을 기용하는 경우도 꽤 보였다. 심지어는 모델 없이 제품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한다.
[비츠걸스 한연화, 완판녀 등극.] [스피넬, 연하와 함께한 매트 립스틱 25분 만에 완판.]그런 가운데 연화를 모델로 전면에 내세운 화장품 광고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며 연화는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연화의 화장품 광고는 지금까지 3편이 나갔다. 가장 먼저 나간 에센스 광고에 이어서 메이크업 베이스, 그리고 립스틱까지.
엄청나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이런 CF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쉬운 일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도 않다.
에센스 등의 기초 화장품에서는 모던하면서 깨끗한 이미지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메이크업 제품에서는 우아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립스틱에서는 여성스러우면서도 관능적인 모습을 어필해야 했다.
이렇게 다양한 매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연예계를 통틀어서 몇 안 될 것이다. 그것도 갓 스무 살이 된 애가.
아이돌 그룹을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가, 과감하게 이쪽 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매력 때문이었다.
연화가 중심에 서 있다면 4인조, 5인조 이런 것에 관계 없이 반드시 뜰 수 있을 거라고.
자기가 연화 덕후임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은설이는 이날도 연화 사진에 넋을 잃고 있었다. 원래 걸려 있던 화보를 최근 화장품 광고 화보로 바꾸었더니 거기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그것도 아주 황홀한 눈으로.
“연화가 그렇게 좋아?”
“아…… 선생님.”
립스틱 광고 화보였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연화의 정면샷이 깨끗하게 잡혀 있었다.
특별히 입술 쪽을 강조한 건 아니었다. 연화의 얼굴 곳곳이 뚜렷한 색감으로 살아나 있는 모습이었다. 오른쪽 아래 립스틱 제품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립스틱 광고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컨셉이라는데, 이런 목적이 잘 통한 것인지 해당 립스틱은 광고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완판되었다.
“그렇게 좋으면 지난번에는 왜 한마디도 안 했어?”
연습생들하고 비츠걸스 애들을 인사시킨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 은설이가 어떻게 할지 넌지시 지켜보고 있었는데, 얘가 말은 한마디도 못 하고 심지어는 똑바로 눈도 못 마주치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고개까지 푹 숙이고.
“저 그때 진짜 행복했어요.”
“그냥 행복해하지만 말고 가서 인사도 걸어보고, 팬이라고 말도 하고 그러지 그랬어.”
“괜찮아요. 같은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설이는 화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한 장 줄까? 회사에 여분 있는데.”
“벌써 구해서 방에 붙어 놨어요.”
그리고 그런 말을 할 때에야 내 쪽을 보며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저는 언니처럼 될 수 없겠죠?”
다시 화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은설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여기에 오면 언니하고 더 가까워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 멀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게 됐고, 가지고 있는 재능도 얼마나 컸는지 알게 됐고…… 그런데 정말 웃겼던 게요, 제가 몬스터 뮤직 간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저한테 잘될 거래요. 저도 꾸미면 연화 언니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였죠.”
“너무 연화만 따라 하려고 하지 마. 너도 계속 열심히 하면 충분히 매력 있는 가수가 될 수 있어.”
“따라 하려는 건 포기했어요. 저 같은 건 아무래 해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아직 꿈은 있어요. 반 만큼이라도. 그런 걸 셀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은설이가 회사에 들어온 후 직원들은 농담처럼 이런 말을 나한테 할 때가 있었다. 여기 가도 예쁜 애, 저기 가도 예쁜 애, 하루 종일 꽃밭에서 사는 것 같아서 부럽다고.
연습생 애들은 저마다 귀엽고 예쁜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은설이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아이였다.
팀에서 자기 위치를 잘 잡아낼 수만 있다면, 분명히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룹이란 것이 서로 부족한 면을 보완해 주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줄 수 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은설이의 경우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우월한 유전자 덕분에 비주얼에서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은설이의 어머니, 한때 충무로를 주름잡았던 대배우 김진희 씨.
그런데 마침 그날, 김진희 씨가 회사를 찾아왔고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분명하게 말씀을 해주세요.”
그녀는 결판을 내려는 전사처럼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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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이돌구 현대 판타지 장편소설
지은이 : 이돌구
발행인 : 권태완, 우천제
전자책 발행일 : 2020-11-04
정가 : 3,200원
제 공 : KWBOOKS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1길 38-9, 401호
ISBN 979-11-293-67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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