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6
1장 밤하늘의 별처럼(2)
40대 후반, 곧 50을 앞두고 있는 나이,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내 또래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아니, 나보다 어리다고 해도.
김진희 씨는 나와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함께 따라온 사람들, 운전기사인지 수행원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많이 바쁘시죠?”
어색한 공기를 깨고 그녀는 그렇게 말을 건네왔다. 웃음기가 약간 어린 얼굴로, 그리고 자상한 말투를 만들어내면서.
“뉴스 보니까 이제 세계적인 프로듀서가 되시는 일도 멀지 않은 것 같아요.”
오래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는 퇴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배우였다. 반항적인 모습도 종종 보여주곤 했다.
부드럽고 깨끗한 마스크를 보면 어떻게 그런 역할을 맡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연기에 능했다.
청순가련한 모습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튀어나오는 도전적인 눈빛, 그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배우였다.
당대에 잘나가는 배우 두 명과 함께 트로이카로 묶이곤 했지만 연기력만큼은 그중 탑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만 할 수 있었던 다른 둘과는 달리 김진희 씨는 악역까지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기의 폭이 넓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에 결혼. 만약 커리어가 끊기지 않았다면 정말로 대단한 배우가 됐을 것이다.
“은설이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녀는 그렇게 몬스터 뮤직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습생의 부모가 회사를 찾아와서 자녀의 미래를 상담하는 일은.
회사의 계획을 알고 싶기도 할 것이고, 우리 애를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일도 있었고,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잦았다.
연습생의 부모와 상담하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익숙한 일 중 하나였다.
“여기까지 시키는 게 맞겠죠?”
“은설이를요?”
“이 정도면 해볼 만큼 한 것 같아요. 여기까지 시켜보는 게 맞지 않은가 해서 찾아온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본부장님께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영화 대사를 치는 것 같은 정확한 딕션. 그리고 어절마다 미묘하게 강세를 다르게 두면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전달력. 말의 내용보다는 그런 게 더 귀에 들어왔다.
“은설이는 잘 하고 있습니다. 계속 발전하고 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B조로 강등되었다고 하던데요.”
“아, 그거요.”
그녀는 유난히 ‘강등’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마치 후시녹음을 담당하는 성우가 과장된 억양으로 영화 대사를 녹음하는 것처럼.
은설이는 두 달 전 B조로 강등되었고, 그다음 월말 평가에서도 아직 A조로 올라오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다듬어야 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달이나 다음 달 정도에, 나는 은설이를 A조에 합류시키려고 했다.
김우진의 팀과 경쟁을 하려면 서둘러서 내 팀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비주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야 될 은설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계속 나아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곧 A조로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이쪽 업계에 오래 있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길게 펴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력적인 얼굴과 다르게 그녀의 손등에는 자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도 잘 알아요. 재능 없는 사람이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이 얼마나 추한 건지. 그래서 저는 은설이한테 안 되는 걸 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해하진 마세요. 잘 봐달라고 부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가능성이 없는 것 같고, 이제 그만두게 하려고 합니다. 그전에 확인하러 온 거예요. 최고의 프로듀서가 평가하는 은설이의 재능이 어떤가 알고 싶어서요.”
아마도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에 이곳을 찾아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희가 사놓은 걸 가져가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김진희 씨는 그런 말을 하며 또 한 번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가 사놓은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공기청정기부터 시작해서 정수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화장실 비데까지 갑자기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전부 비싼 것들이라고 해서 부담되는 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딸이 생활하는 곳을 이렇게 바꾸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딸을 향한 애정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년 중반 즈음에 새로운 팀을 내려고 합니다. 은설이는 그 팀의 멤버로 데뷔하게 될 거예요.”
우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제가 들어봐도 그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래를 아주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러 명이 모여서 팀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멤버가 노래를 잘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것 말고 다른 매력이 있어도 충분히 가수로 성공할 수 있는 얘기와 함께.
“우리 은설이가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프로듀서 밑에서 반년 동안 배웠다면 이보다 더 값진 경험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년에는 고3이니 여기서 결정을 내리고 싶어요. 가능성이 안 보인다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여기서 그만두게 하는 게 맞다고 보입니다.”
연습생 부모님 중에서 이런 의사를 전하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안 될 것 같으면 차라리 깨끗하게 포기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미련을 가지고 매달렸다가 아이의 인생이 망가질까 봐 그런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 태도 중 하나를 취하게 된다. 회사에서 봤을 때에도 데뷔와 거리가 멀어 보이면 냉정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대놓고 포기하라고 하면 상처를 주는 것이니 적당히 돌려 말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지만 가능성이 보여서 회사에서도 꼭 데리고 싶은 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때는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회사에서 이 아이를 어떻게 관리해서 어떻게 데뷔시킬 것인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박영민 본부장님 말씀을 들어보고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은설이의 오빠는 학업 성적이 뛰어나고 품행도 바른 편이라서 집안에서 꽤 기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오빠 쪽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인지 은설이는 연예인 쪽으로 키워보고 싶은 것 같은데.
어쩌면 김진희 씨가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투영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
“어떻게 됐어요?”
얘기를 마치고 김진희 씨가 돌아가고 나니 신인개발팀장이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 아마도 이쪽에서 더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연습생들을 직접 관리하는 쪽이니.
“얼마나 오래 얘기한 거죠? 시간 확인할 여유도 없었어요.”
“두 시간 정도 안에 계셨던 거 같아요.”
두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김진희 씨가 수긍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에.
“은설이를 포기시키려고 오셨더라고요. 여차하면 바로 그만두겠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았어요.”
“그렇겠죠. 이 바닥이 어떤 곳인지 잘 아시는 분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말했습니다.”
내 계획을 자세하게 말해줬다.
새로운 팀을 만드는 것과, 내년 중순에 데뷔시키는 것,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다른 회사의 팀과 경쟁을 하며 데뷔하게 될 거라는 것도.
김진희 씨는 그 얘기에 흥미를 보였다. 이슈가 있어야만 주목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 또한 그녀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기 그만두게 하고 연기자 시키려는 거 아니었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왜냐면 대화를 나누면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기가 있었던 영화판이 얼마나 지저분한 곳인지, 그때를 잊을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딸에 대한 기대로 풀어보려고 하고…… 여성 연기자로 그때를 겪었던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면 딸이 가수 쪽에서 성공하는 걸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제가 만드는 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어요. 오히려 자기 쪽에서 도와줄 게 없겠냐고 묻더라고요.”
“오! 그쪽에서 도와주면 우리야 좋은 거잖아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고…… 단지 은설이가 가수 하는 걸 반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제 은설이는 놓치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노래를 특별히 잘하는 것이 아니고 춤도 그렇게 잘 추지는 못했지만.
“저는 피디님이, 그냥 은설이 보내버릴까 봐 걱정했어요. 사실 은설이는 피디님이 뽑은 애가 아니잖아요.”
연습생 오디션 때 나는 오히려 반대하는 쪽이었다. 얼굴 예쁜 것 하나 가지고 가수 하려는 사람이라면 필요 없다고.
하지만 내가 맡아서 가르치면서 느끼게 되었다.
김진희 씨가 오래전 보여주었던 그 모습, 청순한 아름다움 속에 반항적인 눈빛을 숨기고 있는 것, 그게 은설이에게서도 보였던 것이다.
만약 그 모습을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게 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무기를 가지고 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예쁘잖아요. 예쁜 사람이 팀에 한 명은 있어야 한다면서요?”
대충 그렇게 둘러 말했지만 신인팀장도 내가 하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새 팀은 정말로 박영민의 아이들이 되어버렸네요.”
“무슨 말이에요?”
“피디님이 책임지고 끌고 나가셔야 하는 아이들이 되어버렸잖아요.”
지금 새로운 팀의 멤버로 키우고 있는 애들 네 명은 모두 그렇다는 말이었다.
다른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를 억지로 데려와서 이 회사의 연습생으로 만들었고.
학원 없어진 후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애한테 오디션 보라고 해서 연습생으로 만들었고.
회사 그만두고 다른 일 하다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간 애를 다시 데리고 들어와서 팀의 멤버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니가 찾아와서 그만 데려가겠다는 걸 막았다.
“얘네 넷은 피디님이 꼭 살려내셔야 하겠어요.”
“그래야죠.”
“실패하면 넷 다 피디님 원망할 걸요.”
“에이, 그런 애들 아니에요. 얘네들이 얼마나 착한데.”
“착한 거야 저도 잘 알죠.”
“그리고 실패할 일도 없을 겁니다.”
곡 작업을 하면 틈틈이 새로운 팀에게 줄 곡도 손을 대고 있었다. 팀 이름도 생각해 둔 것이 있었고…… 이제는 멤버들도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내년 중반에 데뷔, 그전에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인다는 계획, 거기에 맞추어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 * *
그러는 동안 회사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안 된다는데요?”
유아연의 일본 쪽 매니지먼트 회사로부터 회신이 돌아왔다.
유아연은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몇 가지 조건을 붙여서 그쪽에 요구했더니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었다.
재계약을 할 거면 자기들한테 맞추고, 그게 아니라면 자기들도 재계약을 할 마음이 없다, 이런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대처였다.
“이 사람들…… 예전하곤 너무 딴판입니다. 그때는 아연 씨 데리고 가고 싶어서 여기까지 와서 도장 받아가더니. 이제는 필요 없으니까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라, 뭐 이런 뜻이네요.”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유아연의 눈에는 차가운 서리 같은 것이 내려앉은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됐어요. 일본 활동 안 하면 되잖아요. 저도 이런 대우 받으면서 하고 싶진 않네요.”
그러면서 아연이는 토라진 듯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연아. 나하고 같이 일본 가자.”
토라져 있는 아연이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매니저팀 데리고 같이 가는 거야.”
“선배님하고 가서 뭐하라고요?”
“내가 가서 계약하게 해줄게.”
“할 마음 없다니까요.”
“일정 잡아. 나하고 같이 가자고. 생각이 있어서 그래.”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와 함께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이건 유아연에게 있어서,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도, 또한 몬스터 뮤직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 * *
그날은 하필 승연이의 첫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승연이가 등장하는 씬이 이날 방영분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을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순 없는 일이고…… 오늘 밤은 호텔에서 묵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방송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 승연이 봐야 되는데.”
나는 그런 말을 하면서 탑승 수속을 밟고 있었다.
이번에 함께하는 사람은 유아연과 매니저 1팀장, 그리고 통역을 담당하는 직원, 이렇게 셋이었다.
유아연은 일본어가 능숙한 편이니 굳이 통역이 필요 없었지만, 계약 관련해서 말을 옮기는 것은 민감한 사항이니 통역이 반드시 필요했다.
아티스트 본인이 회사와 회사 사이의 말을 전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유아연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는 ‘소우타 사무소’는 도쿄 신주쿠에 위치해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니 소우타 직원 한 명이 커다란 푯말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박영민 선생님. 주식회사 몬스터 뮤직.]친절하게 한글로 써 있는 푯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인천공항에서는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출국했는데, 오히려 시끄러운 곳은 이곳이었다.
주먹만 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유아연은 익숙한 듯이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유아! 유아…… 곳곳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유아연의 일본 활동명을 부르며 모여들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을 치른 뒤에야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를 ‘박영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우타 사무소 직원을 따라서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피디님은 일본이 처음이시죠?”
1팀장이 물었다.
“전 외국 나온 게 처음이라니까요. 여권도 얼마 전에 만들었잖아요.”
하네다 공항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우리는 드넓은 바다와 마주했다. 공항은 도쿄만에 인접해 있었다.
바다라는 것이 꼭 외국을 나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접하는 첫 풍경이라서 그런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어쩐지 파란 색감도 조금 이질적인 것 같고, 내리쬐는 햇살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신주쿠 도심으로 들어서니 휘황찬란한 일본어 간판들이 가득한 거리를 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명동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주로 큰길을 따라 달리고 있어서인지 종로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소우타 사무소에 도착하니 오전 열한 시. 그리고 나를 박영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얼른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 * *
소우타 사무소가 유아연과 함께 일을 한 것은 7년 전이었다. 유아연의 일본 진출을 도왔고, 그 이후로도 두 번의 연장 계약도 무리 없이 이끌어냈다.
특히 지난 계약에서는 유아연 쪽으로, 정확히는 몬스터 뮤직 쪽으로 주어지는 인센티브를 상당히 높게 잡아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금전적으로는 서운하지 않게 대우했다는 것이 이쪽 관계자의 평이었다.
하지만 이번 계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 쪽에서 새롭게 요구하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앞으로 유아연의 일본 앨범도 몬스터 뮤직 쪽에서 프로듀싱한다.’
이 요구 하나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대답은 간단하게 돌아왔다.
‘그 조건이 포함되면 계약을 체결할 수 없음.’
지금까지 유아연이 일본에서 7년 동안 활동해오면서, 앨범은 늘 소우타 사무소와 계약된 코다 프로덕션이라는 레이블에서 만들었다.
“아마 소우타하고 코다하고의 관계 때문에 그럴 겁니다. 코다에서는 우리 곡을 앨범에 안 넣으려고 해요. 자기들 거만 넣으려고 하죠. 수록해 준다고 해도 타이틀로는 절대 안 쓰고요.”
1팀장의 말이었다.
“박영민 피디님이 얼마 전에 아연이 1위 만들어준 곡이요, 그게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코다에서 아연이의 경쟁력을 낮게 보고 앨범 작업이 지지부진하던 때였어요. 한국에서 곡 가지고 와서 싱글로 낸다고 했을 때 평소 같으면 안 된다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그렇게 때우자는 식으로 승인을 한 거죠. 결과적으로는 크게 성공해서 우리가 한 방 먹인 꼴이 되어버렸지만요.”
그런 이유로 다음 앨범의 프로듀싱을 우리가 맡겠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돈 되는 건 프로듀싱이라서…….”
1팀장은 씁쓸하게 말을 맺었다.
일본 연예계에서는 놀랍게도, 아티스트와 기획사가 연봉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앨범이 잘되고 안 되고 상관없이 아티스트는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앨범을 크게 히트시키고, 온갖 방송 프로그램을 돌며 힘들게 활동을 해도 정해진 월급만을 받는 것이다. 그나마 계약 조건에 인센티브가 들어간 경우에만 성공의 결과를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조금.
그럼 앨범이 많이 팔려서 얻게 되는 수익은…… 앨범을 제작한 레이블과 매니지먼트 회사가 고스란히 먹게 되는 구조였다. 그러니 절대로 앨범 프로듀싱은 이쪽으로 내어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다. 돈 되는 건 그쪽인데 그 돈줄을 우리한테 내어줄 수는 없다고.
“아우, 짜증 나. 그럼 안 해요, 안 해! 나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미팅 장소에서는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고집할 뿐이었고 도무지 타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랬더니 급기야 유아연은 소리를 높이며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야 뭐야. 그러면 계약 안 하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필요 없다는 거잖아요. 아저씨, 그냥 나가요. 얘기할 필요도 없어요. 안 하면 되지 뭐.”
그녀는 시끄럽게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릴 정도로 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바닥을 발로 걷어차는 듯한 소리가 안에서도 크게 들려왔다.
소우타 사무소 측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더구나 유아연이 무척 화가 난 것은 자기 때문에 몬스터 뮤직에서 사람이 움직였는데,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 물러서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절충안을 제시하거나, 그 정도의 움직임만 있어도 유아연이 저렇게 화를 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회사의 수석 프로듀서와 매니저 팀장이 왔음에도 이러는 것은 유아연을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었다.
“팀장님. 그냥 가죠.”
나도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 척하고 나를 박영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높여주는 듯했지만 그건 일종의 가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일 뿐, 속으로는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말 속에서 느껴졌다.
‘우리는 무리를 해가며 유아를 붙잡고 싶은 생각이 없다.’
‘유아가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상관없다.’
이런 그들의 속내가 말 속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왜 그렇게 배짱을 부리는 것인지, 이왕이면 한 명이라도 더 붙잡아서 회사에 이익이 가져올 생각은 없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응이었다.
이것에 관해선 다음 장소로 이동했을 때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어떡하죠? 정말로 아연이 일본 활동은 접어요?”
1팀장이 물었다. 유아연은 씩씩거리며 소우타 사무소에서 자기 일정을 관리하는 매니저에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아뇨. 일본 활동을 접기엔 아깝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안 좋게 헤어지면 다른 곳과도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기는 어렵습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얘기가 된 회사가 있습니다.”
“예?”
“지금 곧바로 거기로 가죠. 제가 그랬잖아요. 오늘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여기는 예의상 들린 거고 계약은 다른 곳이랑 할 겁니다.”
“어딘데요?”
“아이즈 재팬이요.”
아이즈 컴퍼니의 일본 법인, 아이즈 재팬.
“유아연은 거기랑 계약을 할 겁니다. 미리 약속 잡아 놨으니까 어서 가시죠.”
* * *
여기까지 오기 전에 김우진과는 이미 얘기를 마쳤었다.
지윤이 얘기로 시작한 통화는 일본 쪽 계약 문제로 이어졌다.
‘전에 제가 김 실장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이겁니다.’
유아연의 매니지먼트를 아이즈 재팬에서 맡아주는 것, 그리고 앨범 제작은 몬스터 뮤직에서 하며 아이즈 재팬에서는 일본 쪽 유통과 매니지먼트를 담당해 주는 것, 이것이 내 요구 사항이었다.
‘그런데 아이즈 재팬은 제 영향력 밖입니다. 저희 애들 일본 활동 때문에 같이 일한 적은 있지만 제가 마음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한발 물러서면서도 그는 내 요청을 그냥 넘기지는 않았다.
김우진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현재 팀을 구성 중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슈가 중요하니 그는 데뷔부터 화려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요즘 가장 잘나가는 비츠걸스의 후속 그룹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내용으로 주목을 끌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 쪽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호응을 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저희는 아이즈처럼 큰 회사가 아닙니다. 걸그룹을 또 한 팀 만들면 회사가 전부 소화를 못 해요. 일본 쪽으로 활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그 계획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립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새로운 팀을 내보내려면 지금 활동 중인 비츠걸스를 일본 쪽으로 옮겨놓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츠걸스는 일본으로, 그동안 한국에서는 새로운 팀으로.
그러니까 유아연의 이번 계약은 좀 더 나중을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비츠걸스 또한 일본에서 문제없이 활동하려면 아이즈 재팬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게 안 되면 애써서 키운 애들을 소우타 사무소 같은 곳으로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고.
‘글쎄요. 쉽지 않은 문제라서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
김우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김우진 정도 되는 사람이 회사 내에서 이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아이즈 재팬에서도 군소리 없이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김우진 자신이 이 내용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자신의 새로운 팀을 위해 경쟁자 포지션을 확실하게 만들어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비츠걸스의 덩치를 키워주는 일은…… 그의 계산기는 바쁘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본 가시는 날짜 정해지면 말씀해 주세요. 미리 얘기해 두겠습니다. 일이 잘 성사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가 된 후에야 나는 일본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아이즈 재팬이요? 우리나라에 있는 그 아이즈요?”
“맞습니다. 아이즈는 일본에 법인을 가지고 있어요. 그쪽 그룹은 일본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아…….”
“거기랑 약속을 미리 잡아 놨어요. 그러니 저기서 소리 지르고 있는 유아연 좀 그만 데려와 주세요.”
얼굴이 벌게져서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유아연을, 1팀장은 끌고 오다시피 해서 겨우 데리고 왔다.
소우타 사무소에서는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길래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만 넌지시 말해주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 때문에 이동하는 것을 저쪽에서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아이즈요? 그거 우리나라 회사 아니에요?”
“맞아. 거기랑 계약할 거야.”
“무리할 필요 없어요. 이제 우리 회사의 얼굴은 선배님이라고요. 굽히고 들어가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니야. 무시당했으면 갚아줘야지. 다음 앨범 멋지게 내서 제대로 갚아주자고.”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즈에서 보낸 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나토에 있는 아이즈 재팬으로 향했다.
우리를 픽업하러 온 사람은 자다가 방금 막 일어났는지 너저분한 머리를 하고 있는 30대 남자였다.
“점심은 드셨어요?”
“아뇨.”
“쟤네들, 밥도 안 사줘요?”
“같이 식사하자고 하는데 그냥 나왔어요. 빨리 아이즈에 가고 싶어서.”
무엇보다 한국인이라서 말이 통하니 편했다. 소우타 사무소 사람들하곤 통역을 거쳐서 대화를 해야 하니 여러모로 소통이 어려웠다.
안 그래도 중의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비즈니스 자리에서 상대방이 무슨 뜻을 전하는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건 그 무엇보다 답답한 일이었다.
“그럼 회사 들어가시기 전에 같이 드시죠.”
“아뇨. 그렇게 하실 건 없고 아이즈에 식당 있으면 거기서 먹죠.”
“저희요? 저희 식당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한참 웃었다. 아이즈 재팬은 연습실 하나, 사무실 두 칸이 전부인 곳이라면서.
한국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오는 아이즈 컴퍼니의 아티스트들을 관리하는 곳이니 규모가 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관리 사무소 정도의 개념으로 있는 곳이라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일이 별로 없어요. 아이즈 애들이 전부 한국 아니면 동남아 쪽에서만 활동하잖아요.”
그는 푸념을 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 * *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아이즈 재팬 사무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정말로 작은 곳이었다. 도시 외곽의 낡은 6층 건물 중 한 층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연습실이 딸려 있는 곳이라고 해서 있을 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가볍게 안무를 맞춰볼 수 있는 공간 정도, 그것도 우리가 갔을 때에는 불이 꺼져 있어서 더욱 초라해 보였다.
“몬스터 뮤직이 처음 시작했을 때 딱 이랬었는데…….”
1팀장은 옛날 생각이 나는지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회의실로 쓰고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박영민 프로듀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30대 후반 정도, 나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는 이곳에서의 업무를 모두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이 좁은 사무실의 연매출이 200억은 넘습니다.”
그는 마치 방어하듯이 인사를 하자마자 그런 말을 꺼냈다.
사무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어서 이렇게 작을 뿐이지, 앨범 판매와 콘서트 등의 핵심 사업이 이곳에서 지휘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대부분 일본 현지 업체에게 외주를 주는 방식이라서 아이즈의 인력이 필요한 일은 없을 뿐이었다.
사무실에는 실장과 우리를 여기까지 태우고 온 직원 외에 일본 직원이 두 명 더 있었다. 그리고 아이즈 아티스트들의 일본 활동이 시작되면 아이즈 컴퍼니의 직원들이 이쪽으로 건너와서 일을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게 왜 그런 거나면요, 플라지아로 예를 들면, 플라지아는 한국에 베이스를 두고 일본에서는 짧게 활동하고 돌아가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일본 쪽 활동을 지원하는 매니저를 상시로 두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일본 매니저 따로, 한국 매니저 따로 있으면 일본 매니저는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을 거잖아요.”
그렇지만 유아연은 예외로 두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연 씨는 저희와 계약하면 이쪽 매니저를 따로 구해서 붙여드릴 겁니다. 누가 뭐래도 유아연이잖아요. 일본 넘버원 여솔!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일 제대로 못 하는 사람하고는 같이 못 해요. 구하실 거면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해오세요.”
“물론 그렇게 해드려야죠.”
유아연은 미팅 자리에서도 내내 당당하게 굴었다.
여기까지 오는 차 안에서도 아연이는 아이즈하고 같이 일하기는 어려울 거라면서 우려를 표시하곤 했다.
아무래도 일본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한국에서 건너온 아이즈의 그룹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지켜 봐왔으니 현실적으로 자기가 이쪽이랑 계약을 해도 일이 제대로 진행되겠냐고 걱정했던 것이다. 제대로 못 할 바엔 안 하는 게 낫다면서.
그래도 김우진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계약을 논의하는 과정은 무척 매끄러웠다.
아이즈 재팬에서는 자사의 뮤지션들을 관리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 유아연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할 것이고, 일본에서는 치프 매니저 한 명과 로드 2명이 한 팀을 이루어 유아연의 활동을 지원하기로 했다.
앨범 제작은 몬스터 뮤직에서 모든 권한을 가지기로 했고, 유통 및 배급은 아이즈 재팬과 계약이 되어 있는 유니버셜 재팬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수익 배분에 대해서는 아이즈 컴퍼니의 표준 계약을 따르되, 유아연이 11년차 정상급 아티스트라는 것을 감안하여 서운하지 않은 조건을 내걸었다.
눈치 빠른 1팀장이 즉석에서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하였고, 아이즈 재팬의 실장은 내내 웃는 낯으로 우리 쪽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주었다.
너무 일이 매끄럽게 풀려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우진 실장님이 강력하게 부탁하셨죠. 무슨 일이 있어도 박영민 프로듀서님과의 계약을 꼭 성사시키라고요.”
우리가 가계약서에 서명을 마쳤을 때,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 * *
“원래 그래요. 우리나라는 양호한 거라니까요. 왜냐면 우리나라에선 신인 때나 박박 기는 거지, 좀 크면 소속사 앞에서도 갑이 되잖아요.”
어쩌다 보니 저녁 식사까지 아이즈 사람들과 함께하게 됐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반갑다면서, 정말로 사람이 고팠던 것처럼 우리를 붙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1팀장과 나는 여기까지 끌려오게 되었다.
통역을 맡았던 직원은 자기 볼일을 보겠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도쿄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하니 여기에 지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유아연은 사람 많은 곳이 싫다면서 호텔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중견급 연예인을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됩니까? 연예인 쪽에서도 가만히 안 있죠. 법으로 붙잖아요. 소속사 대표를 막 고소하기도 하고…… 그런데 일본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에요. 그랬다간 매장입니다. 고소요? 그건 연예계 생활 정리할 각오를 해야지만 가능한 겁니다.”
아이즈 실장은 자기가 집게를 잡고서 고기를 구우며 그런 말을 했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반갑다면서, 그래서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자면서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사실 나 또한 계약이 잘 성사된 것이 기뻐서 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게 일본 사람들 습관 같은 건가요? 강자한테 기죽어 사는 거?”
내가 그렇게 묻자 실장은 입안 가득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요?”
“여기는 연예기획사들끼리 전부 한통속이에요.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로 그래요.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는 듯이, 왜 이제야 물어봤냐는 듯이 술술 이야기를 꺼내었다.
“A라는 회사하고 문제가 있었던 가수가 있다면 말이죠, 그 가수는 B라는 회사하고도 일을 못 하고 C라는 회사하고도 일을 못 해요. 그게 일본 연예계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이즈하고 싸워서 나간 애를 몬스터에서도 받아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식인 겁니다.”
그리고 술 한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유아연 정도 되는 가수라면 프로듀싱에 개입해도 되잖아요. 우리나라의 상식으로는 그래요. 내가 이 회사의 이 프로듀서랑 일을 하고 싶다,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게 안 돼요. 회사하고 가수는 종속적인 관계입니다. 월급 주고받잖아요. 고용해서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월급 받고 있는 사람이 그런 요구를 한다? 이건 절대 안 먹히는 얘기예요.”
그는 소우타 사무소와 유아연 사이의 일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아연 씨가 소우타 사무소하고 마찰이 생겨서 그쪽과 연장 계약을 하지 않는다…… 이건 그 사람들의 카르텔을 건드린 겁니다. 이건 알아주셨으면 해요. 우리도 상당한 리스크를 안게 되거든요.”
“마치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가수를 받아준다는 말씀 같네요.”
“아뇨. 그런 얘기는 아니고…… 이쪽 시스템이 그렇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장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듯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마 어지간히 앨범이 많이 팔리지 않는다면 방송 활동이 어려울 거예요. 대놓고 압박을 하거든요. 소우타 사무소는 그렇게 큰 곳이 아니지만 이쪽이 그런 식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그걸 뚫고 나가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SMAP 아시죠? 그 정도 거물급도 소속사하고 붙었을 때 ‘저 사람들 이제 TV에서 못 보겠구나’ 하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라니까요.”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리고 그런 것에 어지간히 시달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는 우리에게 그런 말을 전해주었다.
* * *
“어디 가세요?”
아이즈 사람들과 술자리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1팀장은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어디론가로 향하는 것이었다.
“여왕님 심부름이요.”
“아연이요?”
“맥주 좀 사오라네요.”
그러면서 그는 혼자 다 들고 가기 어려울 정도로 캔맥주를 한가득 사는 것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세요? 이걸 혼자 다 마신다고요?”
어쩔 수 없이 나도 거들어 줘야 할 정도였다.
“제가 아연이하고 11년을 같이 일했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죠.”
“……?”
“나 맥주 좀, 이라고 문자가 왔단 말이에요. 여기서 ‘아, 아연이가 맥주 마시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서 몇 개 사 가지고 가면 된통 깨지는 겁니다. 센스 없다고요. 저한테 막 그러진 않지만 우리 애들한테는 그런다는 얘기죠.”
“거 참…….”
“피디님하고 저는 실컷 배를 채우고 술까지 마시고 들어가는데 자기는 혼자 있다, 그렇다고 내가 혼자 있고 싶은 건 아니니까 빨리 들어와라, 이런 말이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맥주를 사 가지고 와라…… 같이 마시자는 거죠. 그럼 셋이 실컷 마실 수 있는 만큼 가지고 가야 하는 겁니다. 마른안주도 알아서 여왕님 좋아하시는 걸로 가지고 가야 하고…….”
참 힘들게 사시네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방은 두 개를 잡았다. 1팀장과 내가 한 방을 쓰고 아연이가 혼자 쓰는 것이었다.
들어가는 길에 전해주듯 가지고 온 맥주를 그녀에게 건네자 아연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저씨랑 선배님도 같이 한잔하죠.”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맨날 회사에 틀어박혀서 곡 작업만 하고 있던 사람이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피곤하기도 했지만, 갈증이 나서 나도 맥주가 생각나던 참이었다.
아까 아이즈 실장한테 어두컴컴한 얘기를 실컷 들었더니 목이 꽉꽉 막혀왔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유아연은, 마치 자기 집에 초대한 사람처럼 우리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화장을 지운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피부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오히려 화장을 지운 모습이 더욱 매력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배님은 기분 좋으신가 봐요. 저는 안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저럴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하루 이틀 같이했던 사이도 아니고.”
회사의 입장에서는 원하는 조건으로 다른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도 좋았지만, 유아연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회사가 차갑게 자기를 잘라낸 기분일 테니.
가지고 온 맥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부터, 1팀장은 눈을 껌뻑이더니 급기야 소파에 기대어 코를 골기도 했다.
승연이 봐야 한다고 틀어놓은 TV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더니, 자기는 더 못 마시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피디님. 몇 호인지 아시죠?”
“네.”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일어난 1팀장은 그런 말을 하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국 방송을 간신히 잡아놓은 TV에서는 아직 승연이의 모습이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선배님. 그런데 있잖아요.”
“……?”
“소우타 사람들이 그러는데, 저랑 선배님이랑 사귀는 거냐고 묻네요.”
“그게 뭔 소리야?”
“그렇게 보였대요.”
“무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진짜 조심해야 돼요. 여기 말이죠. 우리나라 찌라시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인간들이 있는 곳이에요.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자기들 망상을 덧붙여서 그게 사실인 양 기사로 써내는 인간들이 많아요. 그러면서 아님 말고, 그게 다예요.”
그러면서 그게 아주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유아연은 뒤로 몸을 젖히며 웃었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발이, 그리고 새빨간 발톱이 공중을 차듯이 위로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보였나 봐요. 여기선 회사가 가수를 그런 식으로 챙기는 일이 없다 보니까 그게 특이하게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람들 눈에는 다른 그림이 보였을 수도 있고.”
목이 다시 바싹 말라와서 나는 캔 하나를 더 땄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맥주가 열렸다. 아까부터 계속 술을 마신 탓인지 기분 좋게 몸이 늘어지고 있었다.
“선배님. 그러지 말고 우리 진짜 한 번 만나볼까요?”
“뭔 소리야.”
“난 괜찮은데.”
“됐어.”
“나 은근히 괜찮은 여자예요.”
나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웃음으로 대신했다.
“난 선배님 좋아요. 진심이에요. 만나보고 싶어. 어떤 느낌일지.”
신기할 정도로 새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붉은빛을 가득 띄우고 있었다. 쏘아보듯이 또렷했던 두 눈도 흔들리는 것처럼 초점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입술에서는 어쩐지 생기 가득한 입김이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하얀 가운이 흐트러져 있는 사이로 매끄러운 종아리가 언뜻 드러나 있었다.
“자기도 마음 없었으면 아까 아저씨 일어났을 때 같이 나갔겠지.”
머리를 두르고 있던 수건을 옆으로 내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쏟아지듯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뜨거운 한숨과 함께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한차례 훑었다.
* * *
전에는 TV가 휴게실에만 있어서 뭣 좀 볼 게 있으면 직원들이 좁은 휴게실을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회사를 옮긴 이후에는 대회의실에 커다란 TV를 하나 들여놓았다.
뭐하러 이런 걸 여기에 두냐고 했더니 이렇게 하면 있어 보여서 좋다고. 그래도 쓸데없어 보였던 이것도 막상 있으니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것만 보고 들어갈 거예요.”
하품을 계속 하고 있었더니 옆에 앉아 있던 직원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회사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 좀 하다 보니까 벌써 밤이었다. 하품 몇 번 하니까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잠을 잘 못주무셨나 봐요?”
“제가 잠자리 바뀌면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라서요.”
“하긴, 창작하는 사람들은 그렇더라고요. 예민해서.”
창작하는 사람.
아직도 이런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오! 승연이 나왔네요.”
드라마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연이가 모습을 보였다.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있는 모습이 동생 돌잔치에 따라온 대여섯 살 누나처럼 귀여운 느낌이었다.
우리가 승연이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비록 작은 역할이지만 이번 드라마를 잘 소화해내어서 다음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 이 정도였다.
사실 개인적인 바램이나 다름없었다. 열심히 하는 애니까 잘되길 바라는 그런 마음.
팀에서 다른 세 명에 비해서 인기, 인지도가 확연하게 떨어지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승연이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다른 팀이었다면’이라고. 너무 노래를 잘하는 애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럴 때마다 승연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넘겼다.
-다른 팀이었다면요? 저 같은 건 데뷔도 못 했을 걸요. 팀에 뽑히지도 못했거나.
하지만 그런 말이 그저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 것은 아니다.
프로듀서로서 내가 얘를 살리지 못하는 게 아닌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다른 분야지만, 그래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인지도를 쌓아 올리면 언젠가는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그래서 작은 바램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할을 잘 소화하기를. 좋은 평가를 받아서 다음 작품으로 잘 이어질 수 있기를.
“안타까워요. 제대로 연기를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드네요.”
우리 회사의 작곡팀 직원. 드라마 를 1회부터 봐왔다고 한다. 게다가 승연이가 출연하게 되어서 더욱 열심히 보게 되었다고.
“우리 회사가 처음 아이돌 그룹을 만들려고 했을 때 그런 얘기도 있었어요. 연기도 가르치고 외국어도 가르쳐야 되지 않나 하는 얘기요. 외국어는 가끔 강사 불러다가 가르치기도 하고 하던데 연기는 레슨비가 비싸서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승연이가 등장할 때마다 그렇게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승연이가 드라마에 모습을 보인 건 어제부터였다. 강한 존재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몫은 잘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을 때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느낌, 한복을 단아하게 입고 있는 승연이는 의외로 그런 고전적인 이미지가 잘 어울려 보였다.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는 모습도, 음영을 살짝 살렸을 뿐 어떠한 색조화장도 없는 수수한 모습도 승연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잘 살리는 듯했다.
등장한 씬은 길지 않았다.
여주인공의 고향 친구 역할로 나와서, 오랜만에 여주를 보고 반가워하는 장면, 그리고 시골에서만 살다가 휘황찬란한 경주를 보고 천진난만하게 놀라워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나 진지하게 보고 있었는데 쟤 나오는 장면부터 뿜었어
-저기 친구로 나온 사람 누구예요? 디게 귀엽네
-아이돌이래요 비츠걸스 멤버
-아이돌이라서 그런지 딕션이 영 별로네
-와…… 그래도 표정연기 대박
-아 너무 귀엽다ㅠ
-현실친구ㅋㅋ
-내가 남자라면 저런 애교에 살살 녹을듯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난리가 날 정도로 강렬한 데뷔를 해버린 것이었다.
해당 장면만 따로 편집한 영상이 곧바로 유튜브에 올라왔고 벌써 조회수는 200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정작 드라마는 시청률 3퍼센트 중반대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어제 일본에 계시느라 몰랐죠? 실시간 검색어 순위 탑 텐에 승연이만 세 개가 올라와 있었어요.”
“그거 봤습니다. 애들이 사진 찍어서 저한테 보내줬어요.”
승연, 남승연, 비츠걸스 승연. 이렇게 세 개가 각각 2위, 3위, 8위에 올라와 있는 걸 애들이 나한테 보내준 것이었다.
“연기를 제대로 배웠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안 배워도 저렇게 잘하는데…….”
그리고 이날도 승연이는 화면 속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별것 아닌 대사였지만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정감 어린 톤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 어제 왜 그렇게 화제가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 * *
그리고 그다음 날.
-선생님. 제가 조만간 꼭 찾아뵙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승연이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전부 선생님 덕분입니다. 우리 승연이가 그 회사에서 인생의 은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하하.
고작 이틀 동안 방송에 나갔을 뿐이지만 승연이 아버지는 이게 그렇게나 기쁜 모양이었다.
모든 게 내 덕분이라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을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이었다.
“승연이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죠.”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그런 기회를 얻을 수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잘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수요일 방영분에 이어 목요일 방영분이 나갔을 때에도 승연이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애교가 한 가득이면서 전혀 밉게 보이지 않는 연기, 나도 모르게 따라서 같은 표정을 짓게 만드는 다양한 표정 연기 등, 고작 5분 남짓한 출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시청률은 소폭 상승해서 3.8 퍼센트. 여기에 승연이의 활약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데요? 승연이 누나 아버지?”
“어.”
“역시…… 아버님, 아버님 하시길래 그런 줄 알았죠.”
“넌 별 게 다 관심거린가 보다?”
“제 옆에서 통화를 하시니까…….”
또다시 곡을 평가해 달라며 나를 찾아온 배민혁은, 나한테 바싹 붙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곡을 듣는 중에 전화가 걸려와서, 바로 옆에서 통화를 했더니.
“쓸데없는 얘긴 그만하고…… 곡 얘기 하러 왔으면 이것만 하자고. 어?”
“알겠습니다.”
배민혁이 이날 가지고 온 것은 그저께 보컬 레코딩을 마친 파일이었다. 아직 믹싱 들어가기 전에 내 의견을 듣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이 곡 너 혼자 만들었다면서?”
“네. 그렇죠.”
“그럼 레코딩할 때 디렉도 네가 봤겠네?”
“그럼요. 제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뒤에 나는 말을 이었다.
“너 똑바로 안 할래?”
“네?”
“재희라고 했지? 내가 얘 목소리를 아는데 이것밖에 못해?”
“아…….”
“둘이 친하니까 대충대충 넘기자, 뭐 이렇게 했던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이게 뭐야? 잠자는 애 막 깨워서 노래 부르라고 시켜도 이 정도는 하겠는데?”
“아직 믹싱이 안 된 거라서…….”
“핑계 대지 말고! 내가 그것도 모를 거 같아?”
“죄송합니다.”
전부 마음에 드는데 메인 보컬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
“당장 스튜디오 일정 잡아서…….”
다시 레코딩하라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말았다. 간신히 말을 눌러 담았다.
“아니…… 프로듀서는 너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보컬 다시 녹음해야겠죠?”
이 녀석이 너무 만만하게 느껴져서 말이 마구 튀어 나와버렸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빅픽쳐의 이번 앨범은 이 녀석이 프로듀싱하는 것이고 내가 함부로 찍어 누를 순 없는 일이었다.
“조언해 달라면서? 만약에 내가 맡은 앨범이었다면 보컬 레코딩 다시 할 거야.”
“또 한다고 하면 기사님 화내실 것 같은데요.”
“나 같으면 그렇게 하겠다는 얘기야. 싫은 소리 몇 번 듣는 게 겁나서 앨범 망쳐 버릴 거야?”
“그 정도예요? 보컬 때문에 앨범 망할 정도로요?”
말을 좀 심하게 했지만 그 정도로 아쉬웠다. 빅픽쳐의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재희의 기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좋은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 그런 것 때문이었다. 가능하다면 재희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아서 발성도 잡아주고 싶었다. 더 나은 결과물을 위해서.
“판단은 네가 해.”
“하긴 저도 레코딩 끝나고 들어보니까 좀 아쉽긴 하더라고요.”
“그럼 다시 해야 하지 않겠어? 네가 프로듀선데.”
“알겠습니다.”
“다시 할 거야?”
“그래야죠.”
“그러면 말이야…… 소리를 너무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만 치중하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이를 편안하게 내려고 두성을 많이 쓰면 듣기에 편안하기는 하지만 개성이 없어져. 요즘에는 다들 이런 톤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니까.”
그런 말을 해줬더니 배민혁은 모처럼 진지한 눈을 만들어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코딩할 때는 조금 질러보는 것도 좋아. 체스트보이스, 믹스보이스 이런 거 배웠지?”
“네.”
“라이브 때 매번 지르면 성대에 무리가 오지만 레코딩 때 하루 정도 체스트보이스를 강하게 내보는 건 괜찮은 시도야.”
실제로 위대한 보컬이라고 불리는 몇몇 대가수들은 고집스럽게 생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해볼게요.”
그리고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리는 빅픽쳐의 2집 타이틀 를 계속 듣고 있었다. 조금은 부족하게 들리는 재희의 목소리가 이곳을 가득 채웠다.
“그럼…… 곡에 대해서는 따로 코멘트하실 게 없으신가요?”
“곡에 대해서? 뭐?”
“지난번에 코멘트해 주신 대로 수정한 버전인데요. 지금 듣고 계신 거요.”
“내가 코멘트하면 이제 와서 다시 수정하게?”
“해야 되면 해야죠.”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 빤히 보여서 피식 웃음이 터져 버렸다.
‘괜찮아. 손댈 곳 없이 완벽해.’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은 거겠지.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대답만.
“괜찮아. 손댈 곳 없어.”
“정말요?”
“어.”
“전에 피디님께서 말씀해 주신 느낌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했거든요.”
“이번엔 정말 괜찮아.”
하지만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완벽했다.
누군가의 음악을 듣고 완벽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굳이 보컬을 다시 레코딩하라고 요구한 것은, 유난히 거슬리는 하나의 티끌을 없애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음악이 사람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가만히 앉아서 음악을 들은 것뿐이지만, 이 곡을 듣기 전의 나와 듣고 난 후의 내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마치 내가 음악으로 인해 변화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전에 들었을 때에는 괜찮은 수작이 나왔다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으스스한 소름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이 곡이 가지고 있는 흡입력이 너무 커서.
정말로 완벽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보컬만 다시 레코딩해 봐. 더 괜찮아질 거야.”
“알겠습니다! 멋지게 다시 해서 들려드릴게요.”
아직 열여덟 살. 그전까지는 희한한 녀석이 회사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이 순간, 이 음악을 들은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몬스터 뮤직의 미래가 이 녀석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 * *
앞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아연이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그때 나는 이 회사에 갓 들어온 보컬 트레이너였고, 아연이는 이 회사를 혼자서 끌고 오다시피 했던 몬스터 뮤직 최고의 아티스트였다.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전임 보컬 트레이너였던 차성우가 그랬던 것 같다.
-걔 앞에서는 무조건 과묵하게 있어야 돼. 자기한테 거슬리는 말이 한마디라도 튀어나오면 그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니까.
안하무인, 성격이상, 뭐 이런 이미지를 알려주며 나한테 주의를 줬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크게 성공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있고, 모두가 자기를 떠받들어주고 있으니 그런 게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면서.
-걔는 위아래가 없어. 자기보다 열댓 살 많은 사람한테도 바락바락 소리 지르면서 대드는 게 일상이라니까. 그러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라고. 험한 꼴 보지 않으려면 차라리 이게 나아.
운동선수처럼 체격이 좋은 차성우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의아해서 ‘그러면 한 마디 하면 되잖아요. 저야 그럴 짬이 안 된다지만 선배님은 하실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인상을 팍 구기는 것이었다.
-걔가 혼자서 이 회사를 먹여 살리는데 내가 무슨…….
그때까지도 아연이의 보컬 트레이닝은 차성우가 맡고 있었기에 아마도 쌓인 것이 꽤 많은 듯 보였다.
그런 다음에는 다른 직원에게서도 아연이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열여섯 살에 데뷔를 했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가수 활동을 시작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실컷 귀여움받기는 했겠지만 이 바닥이 어떤 곳인데 언제까지나 오냐오냐해 줬겠어요. 나이 어리다고 무시당하는 일이 잦아지니 자기 나름대로 기믹을 잡은 거겠죠. 나 만만한 애가 아니다, 뭐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나 한 성격 하니까 만만하게 보고 건드리지 마, 이런 거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여기서 레슨받으며 연습할 때에는 애가 예의도 바르고 상냥한 성격이었나 봐요. 그때 있었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 말이죠. 그렇다고 원래는 순한 애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구요, 그런 독한 모습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거라고 해도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거겠죠. 그리고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그게 제 성격으로 굳어진 건지도 모르겠고요.
이 회사를 지탱하고 있는 인물이라서 그런지 아연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연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왔던 1팀장은 아주 단순하게 그녀를 표현했다.
-얘가 그래도 뒤끝은 없어요.
11년 동안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여기까지 함께해온 사람의 의견이니, 짧은 말이지만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뭘 그렇게 쳐다봐?”
10분 정도 지났을까.
10분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연이의 눈빛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눈빛이 따갑게 느껴진다.’ 이 표현이 너무나 적절했다.
정말로 따가웠다.
“그냥요.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게 궁금해서.”
나도 따라서 눈을 마주쳐도, 빤히 내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있으면 다른 세상 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듯.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는 건 내 쪽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는 됐어. 하나씩 들어보자.”
아연이의 다음 앨범은 정규로 나가는 것인 만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지난번처럼 싱글 하나 내는 것과는 일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준비해 놓은 곡은 충분히 있었다. 작곡팀에게서 받은 곡들도, 그리고 협력업체에서 보내온 곡들도.
하지만 데모 단계의 곡은 만지는 방법에 따라서 그 어떤 색깔로도 바뀔 수 있었다. 아연이를 옆에 앉혀두고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이 곡을 아연이에게 주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비츠걸스에게 줄지, 내년에 데뷔할 새로운 팀에게 줄지.
그리고 서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건 유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니면 이걸 아연이에게 줘서 변신을 꾀할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다. 하나의 곡을 가지고도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이 사람이 불렀을 때의 느낌, 저 사람이 불렀을 때의 느낌, 데모에 얹혀진 가이드를 지우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우리끼리 어느 정도 방향을 잡은 다음에 회사 사람들하고 얘기해 보자고.”
“우리끼리요?”
“그래. 그것 때문에 부른 거야.”
“우리?”
“이 앨범을 프로듀싱할 사람과, 이 앨범에서 노래를 부를 가수.”
“그러니까 우리?”
장난을 치듯 살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에서 많은 것이 읽혔다.
그래도 일 얘기에 있어서는 흐트러지지 않는 듯했다.
“저는 좀 가벼운 스타일로 가고 싶어요.”
“어떤 거?”
“무리하게 변신을 시도하지 않고, 그렇다고 계속 해왔던 걸 반복하지도 않고, 부담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부담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 그렇다면 부르는 사람도 힘을 빼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곡. 그런 느낌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선배님 생각은 어떤데요?”
“네가 말한 스타일도 괜찮아. 편한 음악. 듣기에 편하고, 가수도 자연스럽게 자기를 표현하는 음악. 이런 거 괜찮긴 하지. 하지만 나는 네 색깔은 분명하게 가져가고 싶은 거야. 듣기에는 편했는데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르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 그런 거.”
하지만 이렇게 말로 해서는 어떤 걸 표현하려고 하는지 분명하게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언어가 전하는 것은 같을 수 있어도 서로 생각하는 건 다를지도 몰랐다.
나는 몇 개의 곡을 그녀에게 들려주었고 서로가 느끼는 것을 주고받았다. 아연이는 무대 구성까지 머리에 그리고 있는 듯, 그런 것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잘하고 있는 건가? 한 마디의 말을 맺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게 잘하는 건가?
그날 밤의 일은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알았어요. 선배님 뜻이 그러면 뭐…… 저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나 싫다는데 뭐.’
‘그런 게 아니라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으니까 그만하세요.’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아무튼 난 그래.’
‘…….’
‘잘 자고, 한국 돌아가면 나하고 앨범 얘기 좀 하자.’
‘근데요.’
‘……?’
‘그럼 오늘 하루만 미쳤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
‘누구에게나 평생에 한 번 미치는 날이 있는 건데, 그게 우리 둘 다 오늘인 거예요.’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겠으니까, 곡을 좀 더 준비해서 다시 얘기해 보자.”
“그래요.”
이날의 미팅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내 방을 나서며, 아연이는 유난히 발걸음을 길게 끌었다.
“근데요 선배님.”
“응?”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오늘처럼?”
문 앞에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리고 레이스가 화려한 블라우스와 새카만 튤립 스커트. 유난히 아연이가 작게 느껴졌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억지로 만들어낸 듯한 미소가 아연이도 입가에 머물다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 *
연화의 드라마 출연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대사는 단 두 개, 그리고 단역처럼 얼핏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몰고 온 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 보였다.
그전에도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었다. 드라마의 제작발표회 때의 일이었다.
현재 20대 배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꼽히는 임주은과 연화의 투샷은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아무리 화려한 가수의 비주얼이라고 해도 배우 앞에서는 안 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편견을 깨버리듯이, 사진 속에서 연화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은 채 당당한 모습이었다.
미의 기준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는 연화가 임주은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빛나고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폭풍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시끄럽게 지나간 일이었지만, 드라마에서 연화의 모습이 나가자 또다시 시청자들의 반응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2회차 방영분이었다.
드라마의 초반은 잔잔하게 시작되었다. 딱히 파격적인 전개는 없었고 남주와 여주,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재벌가에서 귀하게 자라온 남주, 그리고 드라마답게 온갖 악조건 속에서 꿋꿋하게 성장해 온 여주, 그 두 사람의 모습이 교차하며 진행되었다.
연화가 맡은 역할은 어느 재벌가의 딸이었다.
남주의 집안에서 내심 며느리를 삼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양가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도 슬쩍 내비치곤 했다.
그리고 가벼운 친목 자리인 듯싶으면서도, 있는 사람들 특유의 무게감이 가득한 곳에서 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단아한 A라인 스커트, 그리고 카라가 없는 심플한 재킷.
매끈한 종아리를 잡기 시작한 카메라는 음흉한 시선처럼 연화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 속으로 들어온 얼굴. 진한 색조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었지만 눈가와 입술에 포인트를 줘서 우아한 느낌을 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하선입니다.
첫 번째 대사는 이거였고.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두 번째 대사는 이거였다.
대사는 이렇게 두 개가 전부였다.
연기는 썩 잘했다고 볼 수 없었다. 도도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등장해서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남주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할 때 살며시 웃음을 흘렸지만 그다지 자연스럽다고는 볼 수 없었다.
출연한 시간은 2분 남짓. 그중에서 연화가 화면에 잡힌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여느 배우가 이 정도의 역할을 받아서 스쳐 지나갔다면 시청자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웠을 테지만
-미모 미쳤네
-연화 나오는 장면에서 숨이 딱 멈췄음
-20살 맞음? 왤케 늙어 보이지?
-와 비율…….
-비주얼도 미쳤는데 목소리 톤이 진짜 사기임.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짧은 장면에서 보여준 분위기가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고혹적이면서도 티 없는 순수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듯한, 그리고 얼음조각처럼 차갑고 투명한 듯하면서도 생기 있는 빛을 가득 품고 있었다.
여주인공보다 더 돋보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기사에서도 ‘안방극장의 비주얼 쇼크’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고 있었다.
짧은 등장이었지만 파급력만큼은 그 어떤 주인공보다 화려했다.
-선생님. 운전하시는 거 아니에요? 통화 괜찮으신 거예요?
“어. 괜찮아. 핸즈프리.”
-네.
다음 날 월요일 출근길에 연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보셨어요?
“당연히 봤지.”
-아…….
“왜?”
-창피해서.
드라마 촬영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연화는 힘들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쉴 수도 없다고 한다.
어떤 날은 아침 6시에 시작된 촬영이 다음 날 새벽 4시에 끝났다고 한다. 주연들의 분량이 제대로 안 끝나서 연화는 꼬박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면서.
-그런데 혼자 나와 있는 게 더 힘들어요. 맨날 팀으로 함께 다니다가 혼자 있으니까…… 어떨 때는 무서워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너를 막대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혹시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찾아가서 난리를 칠 테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다들 친절하세요.
“그럼 다행이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던 연화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싶었다.
-근데 진짜 저한테 무슨 일 생기면 이쪽으로 오실 거예요?
“그럼. 당연히 가야지. 당장.”
웃음기가 묻어 있는 숨소리가 수화기를 툭툭 때렸다.
-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저 이렇게 선생님한테 전화하는 건 괜찮죠?
“괜찮다니까.”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여기가 너무 무섭게 느껴지고 그래서…… 선생님 목소리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 나한테 전화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이러는 선생님 잔소리도 그립고……
“잔소리도 실컷 해줄게.”
-아, 저 이제 가 봐야겠어요. 불러서.
그러면서 땅을 박차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꽥꽥 고성을 내지르는 사람들의 소리도 다가오는 듯하다가 전화가 뚝 끊겼다. 그리고 갑자기 텅 비어버린 자리로 방금 들었던 연화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다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