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39
4장 넥스트 유닛(2)
홍보 기사의 컨셉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하게 보일 정도까지 끌어올리자는 것이었다.
[새 싱글을 발표한 빅픽처 “U5 한판 붙자”.]그래도 이런 제목은 좀 식상한 감이 있기도 했다.
[빅픽처 “작곡은 이렇게 하는 거야”.]이 제목에는 자신감이 잘 실려 있었지만 어그로는 약한 듯싶었다.
[U5 저격한 작곡돌 빅픽처, 신곡 TOP 발표.]한 문장으로 잘 요약되어 있었지만 뭔가 좀 약한 느낌이…….
그래도 이런 기사들이 쏟아지며 빅픽처가 새 싱글을 발표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반응이 좀 미적지근하네요.”
홍보팀에서는 우려 섞인 말을 그렇게 했다.
어그로를 확 끌어서 시선을 이쪽으로 주목시키자는 계획이었지만, 아직까지의 반응을 보면 홍보팀장의 말대로 미적지근했다. 저런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기사는 꾸준히 노출되고 있었지만 돌아오는 피드백은 별로 없었다.
-빅픽처가 누구?
달랑 이런 댓글 하나만 달려 있는 기사를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따금 댓글이 줄줄 달려 있는 기사도 있긴 했다.
-얘네 둘이 싸우는 거임? 이게 뭔 말?
└어떻게 된 거냐면 빅픽처라는 듣보돌이 있는데 얘가 브이앱에서…….
너무나 반갑게 느껴지는 설명충 덕분에 전후 사정이 알려지면서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국지적으로 잠시 시끄러울 뿐 대중음악의 소비층 전체가 들썩인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 된다고…… 이런 반응 속에서 티끌처럼 유입된 팬들이 하나둘 모이다 보면 언젠가는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볼 뿐이었다.
곡은 잘 뽑혔으니까.
그런데 정작 어그로는 다른 곳에서 걸렸다.
배민혁이 인스타그램 계정에 이번 싱글의 재킷 사진과 함께 올린 짤막한 말.
[들어봐.]고작 그게 전부였다. 재킷 사진 밑으로 들어봐 세 글자만을 올렸을 뿐이다.
‘오늘 오후 6시에 싱글 나올 거야. 들어봐.’ 이런 의미라면 별문제 될 것이 없었고, ‘열심히 준비했어. 들어봐.’ 이런 것이라고 해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리가 없었다.
‘내가 깜짝 놀랄 음악을 들고 오겠다고 했지? 그게 이거야. 들어봐.’
‘네가 하는 게 작곡이냐? 작곡은 이렇게 하는 거야. 들어봐.’
어그로를 끌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던 기사는 싸늘하게 묻혀 버린 반면, 배민혁의 말 한마디는 순식간에 이곳저곳으로 퍼져 버렸다.
전후 사정이 친절하게 설명된 사진과 함께 문제의 그 포스트가 스크린샷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중2병 걸린 아이돌이라고 해서 ‘미친 중2돌’이라는 제목으로 퍼지기도 했고, ‘남돌판에서 싸움 남’이나 ‘섬 넘는 아이돌’ 등등의 제목으로 퍼지기도 했다.
-아이돌 딱지는 탈부착 되는 건가 봐. 지 맘대로 아티스트였다가 아이돌이었다가
-원래 남돌은 힙합이 베이스라서 저격은 문제 안 됨
반응도 다양하게 나왔다.
“저 이거 잘못한 거예요?”
급하게 내놓는 싱글이라 프로모션이 잡혀 있지 않은 빅픽처는, 이날 나와 함께 음원이 릴리즈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못했다고 하면 어떡하게? 이제 와서 지울 거야?”
“또 사과문 올려야 되는 건가 해서요.”
“됐어. 그럴 필욘 없어.”
비록 악역 같은 이미지를 얻어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로 웹에서 퍼졌으면 궁금해서라도 눌러보는 사람들이 많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우리는 초조하게 실시간 차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6시에 음원을 발표했으니 차트에 반영되는 시간은 7시. 나는 습관적으로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 * *
빅픽처의 이 발매된 날, 오랜만에 GH 엔터테인먼트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동안 공사 때문에 시끄러웠다. 드륵드륵 무언가를 갈아 대는 소리, 그리고 쿵쿵거리며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 그런 소음 속에서 일을 해왔던 GH의 직원들은 모처럼 고요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와보셔야죠. 저희 B동 공사 다 끝났어요.] [B동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야?] [네. 원래 있던 곳은 A동, 새로 연결한 곳은 B동. 이렇게 하기로 했어요.]얼마 전 GH 엔터테인먼트는 건너편 건물까지 매입했다. 왕복 2차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8층짜리 건물이었다.
한동안 건물 외벽 리모델링을 한다고 시끄럽더니, 그 건물과 원래의 사옥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자고 해서 또 한참 동안 공사를 해야 했다.
그래도 완성해놓고 보니 그럴싸했다.
A동과 B동은 5층에서 구름다리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을 확장해서 A동과 B동 모두를 커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공사 때문에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것이다.
[B동은 연습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연습실, 트레이닝룸, 숙소까지 전부 한 건물 안에 박아 넣은 거죠.] [알아.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한 거잖아.]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은 GH 엔터테인먼트의 A&R 1팀장. 그는 A동과 B동, 그리고 구름다리까지 훤히 보이는 11층 창가에 앉아서 PC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천장과 양옆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는 비가 오는 날 저곳을 걸으면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 위로 빗줄기가 쏟아지는 걸 올려다보면서.
[언제 한 번 오셔야죠?]그리고 A&R 1팀장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은 이 회사의 수석 프로듀서였다. ‘포포’라는 가명으로 유명한 사람.
[벌써 갔다 왔어.] [네? 언제요?] [그저껜가. 한창 공사하고 있을 때 슬쩍 들어가서 둘러보고 나왔지.]포포의 존재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 회사의 창립 멤버 중에서도 포포를 직접 만난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그는 GH의 안근형 대표가 직접 모셔온 작곡가였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GH가 아직 작은 곳이었을 때에는 작업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고, 그 때문에 GH의 초창기 멤버 몇 명은 그와 몇 번 접촉한 적이 있었다. A&R 1팀장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그렇게 왔다 가는 게 어딨어요. 저한테 말 좀 하시지 그랬어요.] [너 만나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거 아니야. 저 사람이 포포인가 하고]포포가 연달아 히트 그룹을 내보내며 GH 엔터테인먼트를 크게 키웠을 때, 그제야 그는 완벽하게 숨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원격으로 지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심지어는 레코딩 모니터까지 원격으로 지시를 내렸다.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한 보컬 트랙이 실시간으로 포포에게 전송되고, 포포는 곧바로 코멘트를 전송했다.
다른 회사에 있다가 GH로 온 가수들은 ‘이게 뭐 하는 짓?’이라며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지곤 했다. 이 회사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 곡 들어봤어요? 빅픽처.] [U5 깠던 애?] [네.] [아주 U5를 제대로 깠던데.] [좀 당돌한 애 같더라고요.] [근데 좀 까여야 돼. 걔네들은] [예? 왜요?]A&R 1팀장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의아해서 고개를 모니터 쪽으로 가깝게 기울였다.
[그거 B동 있잖아. 내가 산 거다.] [?] [U5가 산 거 아니라고.] [그게 왜요?] [기사가 왜 그렇게 나갔냔 말이지. GH의 사옥 확장이 효자 그룹 U5 덕분이다, 뭐 이런 식으로 나왔잖아.]하여간 이 사람의 성격은 여전히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며 A&R 1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걔네가 산 게 아니야. 내가 산 거야. 내가 만든 곡과 내가 만든 컨셉으로 벌어들인 돈이라고. 나 그 기사 보고 진짜 기분 나빴어.] [정정기사 내놓으라고 해요?] [그러면 내가 쪼잔한 사람 되잖아!]진짜 이 인간 비위 맞추기는 너무 힘들다, 라고 A&R 팀장은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곡은 들어보셨어요?] [들어봤지.] [벌써요?] [6시 땡 하자마자 들었어.] [신경 쓰고 계셨나 보네요.] [궁금하잖아. 그 새끼 인스타에 올린 거 봤어? 나한테 하는 얘기 같았다니까. 너 들어봐. 이렇게.] [컨셉을 특이하게 잡았더라고요.] [미친 거지.]이날 GH 내부에서도 그 내용은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근데 곡이 너무 좋아. [그렇죠?]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최근 5년 동안 나온 보이그룹 곡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 같아.] [그 정도예요?]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알 거야. 기가 막히게 잘 썼어.] [그럼 그렇게 큰소리칠 만했네요. 배민혁이라는 그 아이요.] [근데 넌 아직 모르겠냐?] [네?] [그 곡을 걔가 썼다고 생각해?]A&R 1팀장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크레딧에는 분명히 배민혁 작사/작곡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박영민이 쓴 거야.] [?] [나 정도 클래스가 되면 알 수 있어. 누가 어느 정도 수준의 곡을 쓸 수 있는지 훤히 보인다고.] [확실해요?] [그 정도의 곡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딱 두 명밖에 없어. 둘 중 하나가 나니까, 남은 한 명인 박영민이 쓴 거겠지. 배민혁 걔는 아직 어려서 이 정도로는 못 써. 그 회사 뚱땡이 프로듀서는 아주 보수적인 스타일이라서 이런 곡하고는 거리가 좀 있고. 그래서 박영민밖에 없지.]1팀장은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곡의 일부분을 만져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전부 박영민 혼자서 만들었는데 이름을 그렇게 올린 걸 수도 있고…… 같은 회사니까 저작권료도 회사 안에서 정리가 될 테니 그렇게 해버린 거야. 소속 가수 기 살려주려고.] [박영민 씨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세요?] [당연하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어나더 레벨이야. 작곡에 있어서는.] [포포 님하고 같은 레벨로?] [아니. 솔직히 말할게. 작곡에 있어서는 그 사람이 1인자야. 어나더 레벨이라니까. 다른 작곡가들하고는 속해 있는 레벨 구간 자체가 달라. 그러니 저메인인가 뭔가 하는 놈이 홀딱 반한 거지.]자존심이 그렇게나 강한 이 사람이 이런 소릴 하는 건 처음 접하는 일이었다.
[나보다 더 나아. 시장에서 어떤 곡이 먹힐지 정확하게 꿰고 있어. 나도 대중들의 마음은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삐끗할 때가 있는데 그 사람은 그런 게 없어. 그 시기에 가장 히트할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내서 시장에 내놓는 식이야. 그것도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입혀서.] [그래요?]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전체적인 능력을 보면 내가 더 위에 있지. 박영민은 작곡 원툴이니까.]1팀장은 역시……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즈에 그 샌님 같은 프로듀서하고 붙는다고 하던데, 누가 이길지 모르겠어. 작곡 원툴이지만 그쪽으로 모든 능력치가 몰빵된 사람이니 어떻게 튈지 몰라서…… 아마 그 샌님도 그걸 아니까 구도를 그렇게 가져가는 거겠지.]* * *
“몇 위 정도 할 거라고 예상하세요?”
배민혁은 불끈 쥔 두 주먹을 산만하게 흔들면서 나에게 물었다.
“기대하지 말라니까. 순위는 그렇게 높게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 빅픽처가 가장 높게 기록했던 건 실시간 차트에서 31위. 그것도 브이앱에서의 발언으로 시선을 끌었을 때 가 기록한 것이었다.
아마 그것보다는 조금 높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50위 안에만 들었으면 좋겠다.”
“50위는 하지 않을까? 블루 아이가 지금 39위에 있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차트인이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빅픽처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자주 보이는 아이돌 그룹도 앨범을 낼 때마다 차트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려주면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100위 안으로 진입한다는 건 그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분 남았다.”
“아, 미치겠네.”
“시간 진짜 안 간다.”
그리고 7시가 되었다. 이번 싱글 가 발매된 지 한 시간이 지난 것이다.
“다들 핸드폰 내려놔.”
“예.”
“여기로 모여.”
차트는 내 PC의 모니터로만 확인하기로 했다.
“100위부터 위로 올린다.”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던 50-100위 페이지에서 나는 새로고침을 눌렀다.
이제 화면에는 7시 차트가 준비되었다.
마우스 휠을 천천히 위로 올리며 차트를 훑어나갔다.
곳곳에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80위권에 자리를 잡고 있는 최인환 선배의 OST 곡을 지나치니 60위권에 유미의 곡이 나왔다. 그리고 50위까지 올라가는 동안 빅픽처는 보이지 않았다.
“50위 안에 들어간 거겠지?”
“조용히 하라니까!”
1-50위 페이지로 넘어가, 50위부터 위로 올렸다.
40위까지 올라갔지만 빅픽처는 보이지 않았다.
37위에는 비츠걸스의 , 29위에는 비츠걸스의
그리고 28위에는 빅픽처의
‘헉!’ 하는 탄성이, ‘으아’ 하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리의 기대감은 점점 높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9위!”
“9위다, 9위!”
“미쳤어. 9위야. 우리가 9위라고!”
애들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섯 명이 동시에 나를 끌어안기 시작했다.
“9위! 9위! 9위! 9위!”
그렇게 구호를 외치듯이 다섯 명이 한목소리로 9위! 9위! 하면서, 나를 끌어안은 채 펄쩍펄쩍 뛰는 것이었다.
“야, 이놈들아. 가만히 좀 있어 봐.”
“9위! 9위! 9위! 9위!”
하지만 이 녀석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펄쩍펄쩍 뛰었다.
“박영민! 박영민! 박영민! 박영민!”
그리고 9위라는 구호는 내 이름으로 바뀌어서 계속 이 사무실을 울리고 있었다.
빅픽처의 은 두 시간 동안 9위를 차지하고 있다가 3시간째부터 점점 하락했다. 이슈를 타고 올라온 곡인 만큼 유지력은 강하진 않았다.
‘뭐길래 그렇게 시끄러운 거야?’ 하고 한 번 들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빅픽처도, 그리고 나 역시도 9위에 계속 머물러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곡이 매력적이라면 호기심에 한 번 들어본 사람이 또 찾아서 들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하락 폭이 적을 것이다.
“몇 위 정도에 정착할 거라고 보세요?”
그렇게 묻길래, 내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를 말해주었다.
“16위 정도.”
“정말요? 너무 높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 될 거 같아.”
“저는 쭉 미끄러져 내려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분석이라고 해봤자 사실 그렇게 정교한 건 아니었다. 그저 감각에 의지한 것이다.
“곡이 가지고 있는 대중성을 비교해 보면 그렇다는 거야.”
“대중성이요? 그런 걸 막 분석하시는 거예요?”
“어느 정도는.”
“와…….”
그렇다면 열여섯 번째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 대중성으로 피디님이 순위를 매기면 16위라는 말씀이죠?”
“그런 게 아니고…… 출발선이 다른 거야.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해서 경쟁하는 게 아니고 우리보다 훨씬 전에 출발해서 달리고 있는 거잖아. 그걸 따라잡으려면 빅픽처의 네임밸류가 높아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무명의 가수가 곡이 좋다는 이유로 갑자기 1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차트인과 동시에 1위를 거머쥐는 곡은 그만한 팬덤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곡이 몇 곡 있는데요?”
“좀 있어.”
그렇게 먼저 달리고 있는 곡이 열다섯 곡 정도…… 그래서 이 16위는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동일한 출발선에서 모든 곡들이 동시에 출발했다면 나는 를 최고로 쳐주고 싶었다. 현재 나와 있는 곡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강한 곡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애들을 돌려보내고 내 일을 볼 무렵에 의 순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9시 차트에서는 12위, 10시 차트에서는 16위.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16위.
변동은 없었다.
빅픽처의 는 16위에 자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위의 15개 중에 보이그룹의 곡은 하나도 없었다.
* * *
유아연의 새 앨범은 일본에서 먼저 발매한 뒤 수록곡을 약간 바꾸어서 한국에서 내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이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타이틀 알앤비와 힙합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곡으로 선택했다.
“자넷 잭슨하고 많이 비슷할 거야. 거의 오마주에 가까울 정도로.”
“그래요?”
“앨범 수록곡 전체를 그런 분위기로 골랐어. 90년대 뉴잭스윙하고 비슷한 쪽으로. 물론 올드하게 가겠다는 건 아니고 그중에서 세련된 느낌을 담고 있는 걸로 골랐지.”
수록곡은 11곡으로 골라보았다. 이 중에서 내가 만든 것이 3곡, 나머지 8곡은 우리 회사 작곡가들의 곡에서 선택했다.
“음악은 제가 간섭하지 않을게요. 선배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부르라는 거 부르고, 시키는 대로 하고.”
“너무 소극적인 것도 안 좋아.”
“실패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선배님의 감각을 믿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무대 위에 있을 때, 아니 꼭 무대가 아니라도 대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아연이가 꾸미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조금 선이 굵은 메이크업 때문인지 성숙해 보이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품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무대에서는 무대 화장과 의상 때문에 그런 편이었고, 평소에는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커리어 우먼’ 같은 스타일을 고수하곤 했다.
하지만 나하고 작업할 때에는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나올 때가 많았다. 여기에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아마도 유아연의 노메이크업 상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옅은 눈썹 때문에 인상이 전반적으로 선해 보이고, 아기처럼 고운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서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서클렌즈 없이도 또렷해 보이는 눈동자, 그리고 그 어떤 립스틱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생기 있는 입술.
화장기 없는 맨얼굴은 가수 유아연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런데 자넷 잭슨 따라 하면 좋은 소린 못 들을 텐데요.”
“자넷 잭슨 4집을 많이 참고했어. 따라 하기보다는 그런 스타일을 계승한다고 해야 하나. 단지 영감을 거기에서 받았을 뿐이지 굳이 말하지 않는다면 유사점을 찾기 어려울 거야. 그건 30년 전의 앨범이니까.”
“오마주에 가깝다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사운드를 따라 하기보다는 그런 스타일을 오마주했다는 거야. ‘댄스 디바’라는 걸 말이야.”
자넷 잭슨이 국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기가 없는 편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음악사에 있어서 최초의 댄스 디바로 인정받는 위대한 뮤지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마이클 잭슨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등 우리나라 정서에 잘 맞는 뮤지션들은 3대 디바라고 해서 히트곡 하나하나 다 유명한 편이었지만 자넷 잭슨은 정작 무슨 노래를 불렀던 가수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라면 전혀 달랐다.
14살 때부터 일본의 TV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자넷 잭슨의 일본 투어는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여성 댄스 솔로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로 나미에가 데뷔했을 때에도 ‘일본의 자넷 잭슨’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을 정도니까.
“음…… 일단 제 마음에는 다 들어요.”
열한 개의 곡을 다 들은 후 아연이는 그런 소감을 말해주었다.
“타이틀은 세 번째 걸로 가려고 해. 어때?”
“그렇게 해요.”
“가사 준비되면 보여줘.”
“써둔 게 좀 있는데 여기에 맞춰볼게요.”
가사는 아연이가 쓰고 싶다고 해서 전곡을 그녀가 맡기로 했다.
우리는 타이틀로 정한 곡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가이드로 넣은 내 목소리가, 여자 키를 소화하기 위해 애처롭게 가성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조금 느리면서 자연스럽게 엇갈리는 리듬이 귀에 착 감기는 곡이었다. 그걸 들으면서 아연이는 곡의 템포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좀 더 편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아연이에 대한 이미지보다 훨씬 어려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20대 초반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하고 얘의 나이 차이가 확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평소라면 오히려 편하게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그날 밤 이후 아연이를 대하는 게 불편해졌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그날의 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나와 이 공간에 단둘이 있는 아연이가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멘탈에 있어서는 얘가 나보다 한 수 위인지도 몰랐다.
“모레까지 가사 완성할게요. 그리고 다음 주에 바로 레코딩 들어가죠.”
“가능하겠어?”
“넉넉하게 잡은 거예요.”
베테랑답게, 작업 속도도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빨랐다. 지난번에 를 할 때에도 느꼈다.
발성을 잡는 일은 불과 두 번의 레슨 만에 완벽할 정도로 마무리되었고, 곡을 숙지하는 것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기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과연 탑 클래스의 가수구나, 하는 것을 얘하고 작업할 때는 늘 느끼곤 했다.
같은 양의 작업이라도 해도 비츠걸스 애들과는 한 달 가까이 붙어살며 씨름해야 하는 일을, 아연이는 며칠 만에 해내곤 했던 것이다.
“아연아.”
“네?”
“레코딩할 때 스튜디오 비워줘?”
내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연이는 그 말이 나오자 고개를 숙이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떠보는 거예요?”
“원하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야.”
“하지 말라면서요?”
그러나 모자 아래에서 나를 향하는 동그란 두 눈에는 어쩐지 도전적인 느낌이 가득 실려 있는 듯했다.
“지금 제 심정이 어떨지 모르실 거예요. 내가 믿어왔고 기대왔던 것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 듯한…… 아니, 이런 걸 말해서 무슨 소용이겠어요. 모든 게 다 저 때문인데. 다 그렇잖아요? 잘될 때도 그렇고 안 될 때도 그렇고, 전부 제가 짊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잘될 일도 안 될 거야.”
“그냥 하는 말이에요. 내가 누구한테 이런 소릴 하겠어요. 그래도 선배님이 벼랑 끝에서 구해줬는데.”
그리고 침묵이 자리를 잡은 틈으로 내가 만든 타이틀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위기하고는 맞지 않게 리드미컬한 알앤비 사운드가 따뜻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라는 대로 할게요.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고. 그럼 됐잖아요.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불편한 느낌을 애써 숨기고 있어도 이따금 드러나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연아.”
“왜요?”
“앨범 작업 끝내고 일본 가기 전에 나랑 술 한잔할래?”
“……?”
그러자 아연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웬일이에요?”
“일본 가면 한동안 못 볼 거잖아.”
“저 활동 시작하면 술 입에 안 대는 거 모르시죠? 곡 작업 들어가니까 이제부터 전 시작이에요.”
“그럼 어쩔 수 없고.”
“그래도 선배님이 원하면 하루 정도는 뭐, 시간을 내보죠.”
* * *
유아연은 다음 날 발성 트레이닝을 받으러 왔을 때 신곡의 가사를 보여주었다.
“벌써 완성한 거야?”
“써둔 게 있다고 했잖아요.”
노랫말이라는 건 문장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휘가 가지고 있는 길이나 조사의 사용에 따라서도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미리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것을 멜로디에 맞추는 작업은 쉽지가 않다.
대부분 곡을 먼저 쓰고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것도 그 두 가지의 순서가 바뀌었을 때 난이도가 훨씬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불러볼게요.”
놀랍게도 아연이는 어제 들려준 곡을 하루 만에 익혀서, 거기에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배킹 트랙 위에서, 아연이는 오랫동안 불러온 곡처럼 자연스럽게 노래를 소화해냈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전부 일본어라서.
그런데 가사보다도 아연이가 들려준 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그루브가 살아 있는 리듬 위에서, 조금은 슬픈 듯한 목소리가 얹혀졌다.
곡을 쓸 때부터 아연이의 목소리를 상상하면서,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단 하루 만이었지만 아연이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톤을 들려주었다.
애절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목소리로.
“무슨 뜻이야? 난 일본어를 하나도 몰라서.”
“히토리데.”
“응?”
“외롭다, 뭐 그런 뜻이에요.”
“아…….”
“남자가 없어서 외롭다, 이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 안 했어.”
“안 하긴 뭘 안 해요. 외롭다는 말을 하자마자 눈빛이 이상해지는구만.”
“아니라니까.”
아연이는 써온 가사를 다시 들여다보며 거기에 맞추어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외롭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혼자서. Alone. 이런 의미에요.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 없고 혼자서 모든 걸 이겨내야 하는구나, 이런 걸 은유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거죠.”
아연이가 음악에 있어서 전혀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하듯이, 가사에 있어서는 모든 걸 아연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연이는 창작에 늘 욕심을 내고 있었다.
기획팀과 회의를 거쳐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제목은 이걸로 정해졌다. 곡이 퍽 마음에 드는지 아연이는 시간만 나면 이 곡을 흥얼거렸다. 그리고 나머지 곡 작업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품에 꼭 안기는 것처럼 어긋나는 것 하나 없이 빠른 속도로 완성이 되었다.
* * *
새로운 데뷔조가 숙소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골목길에 주차를 마치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2팀을 맡고 있는 김종성 팀장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 데뷔조는 김종성 팀장이 맡기로 했다.
“보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요.”
김 팀장은 나를 보더니 눈썹을 살짝 구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근처에 파출소라도 있는 건가 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김 팀장은 넌지시 빌라 아래 주차장을 가리켰다.
새카만 수입 세단 한 대가 그곳에 있었다.
“은설이네 차예요.”
“아…….”
“어제부터 졸졸 따라다니길래 누군가 했잖아요. 그걸 보면서 은설이가 ‘어휴, 못살아.’ 이러길래 눈치챘습니다.”
“계속 저러고 있을 건가 보네요.”
“아무래도 애를 타지에 처음 내보내는 거니까 걱정되겠죠.”
은설이 어머니는 애들 숙소를 자기 쪽에서 준비하면 안 되겠냐고 제의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숙소를 쓰고 있는 팀은 비츠걸스와 빅픽처가 있었고, 이 중 막내격인 이번 데뷔조가 가장 좋은 숙소를 쓰게 된다면 반드시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은설이 쪽에서 숙소를 준비한다면 이렇게 평범한 곳이 아닐 테니까.
‘어머님께서 예전에 경험해 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너무 보호해 주는 건 좋지 않습니다.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말했더니 동의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앤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그 말이 맞긴 했다. 아직은 애다.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안으로 들어가니 짐을 정리하고 있는 애들 사이로 지민이 어머님이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는 것이었다.
“선생님만 믿습니다. 선생님 믿고 여기까지 보낸 거예요.”
지민이 어머님은 걱정이 한가득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지민이 어머님은 냉장고에 반찬통을 넣고 계셨다.
“밥은 회사에서 먹는다니까!”
“그래도 여기서 밥 먹을 일 한 번 없겠어?”
“없어. 사 먹으면 되지. 엄마는 진짜 쪽 팔리게…….”
“넌 입 좀 다물고 일루 와서 이것 좀 같이 들어봐.”
김치 냄새가 솔솔 풍기는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고 계셨던 것이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은설이와 지민이는 오늘부터 오전 수업만 받고 회사에 나오게 된다. 일단은 그렇게 계획하고 있지만 방송 스케줄에 따라서 학교를 쉬어야 하는 날도 종종 생길 것이다.
각각 고등학교 2학년과 1학년. 사실상 학업은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오실 줄 알고 있었으면 선생님 드릴 것도 준비하는 건데 그랬어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파김치 이번에 잘 됐는데 한 통 가져가실래요?”
“정말 괜찮습니다. 집에서 밥을 거의 안 먹어요.”
손사래를 치며 간신히 거절했더니 지민이 어머님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선생님도 얼른 짝을 만나셔야 할 텐데……. 인물 좋지, 돈 잘 벌지,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안 그래요.”
“눈이 너무 높으신가 봐.”
실없이 웃고만 있었는데, 다행히 지민이가 옆에서 “엄마 제발 그만 좀 해.”라며 짜증을 내주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데뷔조는 새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 * *
-새로운 팀의 이름은 ‘데이바이데이’입니다.
방청석의 가운데, 단 하나뿐인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김우진이 말했다. 그러자 무대 위에 있는 진행자가 그 말을 받았다.
-여러분, 핑크박스, 데이지, 플라지아에 이어 아이즈 컴퍼니에서 네 번째로 내놓는 걸그룹의 이름은 데이바이데이! 방금 김우진 프로듀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죠?
-매일매일, 여러분께 즐거움을 드리는 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팀 이름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데이바이데이…….”
함께 방송을 보고 있었던 데뷔조 애들은 혼잣말을 하듯이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해보았다. 데이바이데이. 우리와 경쟁을 할 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무대 위에 있는 여섯 명, 마지막까지 생존한 여섯 명 중에서, 오늘 세 명이 탈락하게 됩니다.
-세 명이요? 그럼 데이바이데이는 3인조인가요?
-아닙니다. 4인조입니다. 세 명이 탈락을 하게 되고, 기존에 탈락했던 연습생 중에서 한 명이 합류하게 됩니다.
-4인조! 방금 김우진 프로듀서께서 새 걸그룹 데이바이데이는 4인조이며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은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을, 그리고 탈락했던 연습생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진짜 많이 왔다.”
“근데 왜 탈락한 사람 중에서 한 명을 살리려는 거지?”
“그 사람 때문이겠지. ‘서아리’라는 그 사람…….”
몇 주 전부터 인터넷은 불바다와 다름없었다.
시청자 투표, 그리고 방청객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연습생 서아리가 탈락했기 때문이다.
에 참가한 연습생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음에도, 김우진이 보기에는 실력이 부족해서 계속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첫 회부터 주목을 받았던 장세은보다 더 높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던 참가자였지만, 김우진의 심사위원 점수에서 최하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서아리는 6회차에서 그만 탈락해 버렸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뜨거운 불이 미칠듯이 타올랐다.
-김우진 저 미친 새끼 기준도 없고 지 입맛대로 막 뽑네. 이거 다신 안 본다.
-프로듀서 김우진 퇴출 서명합니다. 참여해 주세요.
김우진 욕이 절반.
-아리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대로 아리를 보낼 순 없습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재심사 요청해요.
탈락한 서아리를 아쉬워하는 글이 절반.
그리고 온갖 서명 운동과 욕설, 항의 속에서도 김우진은 꿈쩍하지 않았다. 지난주 7회차에서도 탈락한 멤버를 다시 올리겠다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주 8회차.
-기존에 탈락했던 연습생 중에서 한 명이 합류하게 됩니다.
이 말에 방청객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마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 아저씨 너무 냉정해서 서아리 안 뽑을지도 몰라.”
“그랬다간 난리 날 건데.”
“서아리 씨 뽑혔으면 좋겠다. 불쌍하잖아. 그런데……. 뽑혀서 우리 상대로 나오면 그것도 걱정이긴 해. 인기가 너무 많아서.”
“아……. 끔찍하다. 나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서아리가 이처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녀의 불우한 가정사 때문이었다.
3주 차까지도 그녀는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연습생이었다. 예쁘게 생겼지만 아이즈의 연습생들은 모두 예쁘게 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지만 그건 다른 연습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평범한 연습생 1인.
장세은이 압도적으로 치고 나가며 벌써 팬을 확보하고 있을 때, 그녀는 매번 턱걸이로 간신히 생존하고 있는 참가자였다.
그러다가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한 것인지 제작진은 참가자들의 개인사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서아리는 여기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녀에게는 부모님이 계시질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돌아가셨던 것이다.
-어린이집에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저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할머니께서 나중에 오시긴 했는데……. 근데 저 그때까지도 사람이 죽으면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몰랐어요.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어서.
할머니 손에 키워졌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할머니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동생과 함께 친척 집을 떠돌며 살았지만 눈치가 보여서 어디 한 곳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돈 되는 일이라면 모두 찾아다녔다. 돌봐야 될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아이즈 컴퍼니 캐스팅 매니저의 눈에 띄어 연예인이 되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어야 하는 형편이라 그런 데엔 갈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가수가 되어보고 싶다는 꿈이 이미 자리를 잡아버렸다고 한다.
-동생 때문에……. 동생 때문에 시작하게 됐어요. 얘가 그런 말을 했어요. 언니도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동생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작년 여름 아이즈 컴퍼니의 연습생이 되었다.
일 년 반 동안의 연습생 생활, 하지만 공장 일과 병행하느라 회사에서 매일 레슨을 받을 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연습량이 부족한 편이었다.
“불쌍해.”
“맞아.”
“우리가 저런 분을 이겨 버리면……. 이겨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 같아.”
동정표를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일부분은 사실이겠지만 과장이 섞여 있을 거다, 라는 날카로운 반응이 있기도 했지만, 그다음 회차에선 그런 말들조차 쏙 들어가 버렸다.
-어……. 동생분이…….
엠씨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동생의 모습 때문이었다.
-네. 동생은 한쪽 다리가 불편해요.
그리고 그녀는 이제까지 늘 그랬듯이 밝은 미소와 함께 담담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예전에 저희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 차에 동생이 타고 있었어요. 차가 충돌할 때 엄마가 동생을 꽉 안아주었대요. 그런데 다리는 안아주지 못했는지…….
내내 평온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그녀도 동생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빨갛게 붉혔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동생은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이후 서아리의 팬층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의 시청률이 크게 오른 것도 그때부터였다.
해당 회차의 방송을, 그리고 그 이전의 사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캡쳐본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의 덕담까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것,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 매사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것 등등. 현실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증언, 혹은 응원.
아이즈 연습생들 속에서 평범하게 보였던 외모도, 그때부터는 애수가 깃든 신비한 미모로 보이기 시작했다.
슬픔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두 눈,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하는 입술, 그리고 그녀의 마음씨처럼 너무나 깨끗한 이미지의 얼굴.
그전까지 압도적으로 1위를 지키고 있던 장세은을 누르고, 그녀는 인기 투표에서 정상을 차지해 버렸다.
-그럼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전에 탈락했던 연습생 중에서 한 명을 팀에 합류시키겠습니다.
세 명의 탈락자가 나온 뒤에, 그래서 세 명의 합격자가 무대 위에 서 있는 가운데 김우진은 그런 말을 했다.
-데이바이데이. 매일 팬들에게 기쁨을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이름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가 해서 이 연습생을 데뷔 팀에 합류시키기로 했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김우진의 말을 가릴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데이바이데이의 멤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객석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가 네 번째로 선보이는 걸그룹 데이바이데이의 네 번째 멤버는……. 축하드립니다. 서. 아. 리. 저는 서아리 연습생을 데뷔 팀에 합류시키겠습니다.
생방송이라 제대로 제어되지 않은 음향은 현장의 뜨거운 함성을 그대로 담아버렸고,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방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고 있는 김우진을 지나쳐, 아까부터 함께 모여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던 연습생들의 무리에서 서아리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두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 * *
그리고 우리가 굳이 숙소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경쟁 팀에 대해 관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데이바이데이의 멤버 네 명이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데이바이데이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 최종적으로 검증을 해보는 무대가 남아 있습니다.
엠씨의 말을 김우진이 받아서 계속 이어갔다.
-요즘 걸그룹이 홍수처럼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8주에 걸쳐서 아이즈 컴퍼니의 연습생들 중 네 명을 추렸지만, 이 팀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모하게 도전을 하는 것보다 과연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 팀인지 한 번 더 검증을 거치려고 합니다.
김우진은 숨을 고르며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방청석에 있는 모두가, 그리고 무대에 있는 네 명의 멤버들도 그의 말을 기다렸다.
-2주 동안의 정비 기간을 거친 뒤 우리는 또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가할 겁니다. 그곳에서 다른 회사의 데뷔 팀과 경쟁을 펼칠 것이고, 거기서 살아남는 한 팀만이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럼 거기서 패배하면 데뷔가 무산되는 건가요?
-네. 패배한 팀은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방청석에선 야유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어떤 회사의 어떤 팀과 경쟁을 하게 되는 건가요?
-현재 최고의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비츠걸스가 속해 있는 몬스터 뮤직의 데뷔 팀입니다. 데이바이데이는 몬스터 뮤직의 데뷔 팀과 경쟁을 할 것이고, 데뷔는 둘 중 한 팀만이 하게 됩니다.
잠시 후 화면은 지난주에 촬영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지난주, 촬영팀이 우리 회사를 방문해서 가져갔던 것.
“나온다.”
“언니. 빨리 와. 우리 나올 것 같아.”
화면에는 어느 TV가 잡혔고 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TV를 바라보는 네 명의 뒷 모습이 나타났다.
-쟤네들이야? 우리가 붙을 애들이.
-잘한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우리 애들의 목소리가 나왔고.
교묘하게 가려진 구도 속에서, 우리 애들 네 명의 턱, 눈, 종아리, 뒷모습 등이 교차하면서 지나갔다.
-자신 있으세요?
-해봐야 알겠죠. 그런데 너무 잔인한 거 같아요. 두 팀 중 하나는 데뷔를 못한다는 거요.
자막으로는 우리의 애들이, 나중에 붙게 될 몬스터 뮤직의 데뷔 팀이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파이널 매치의 상대라면서.
“지금 데이바이데이 응원하는 사람들은 ‘쟤네들 뭐야? 이겨 버려.’ 이렇게 생각하겠지?”
“우리가 꼭 악역 같아.”
네 명의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최종 보스 같은 모습으로 브라운관에 모습을 비추었다.
자기들의 모습이 실루엣으로라도 잠깐 등장한 것을 보며 기뻐할 줄 알았다. 그래도 방송 데뷔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우와, 우리가 TV에 나왔어!’ 하는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을 것 같은 상대 팀의 멤버 때문에 애들은 주눅이 든 것 같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숙소 입주와 방송 데뷔를 함께 즐기려고 치킨과 맥주를 준비했지만 치킨은 식어버렸고 맥주는 밍밍해졌다. 김종성 팀장과 나는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데뷔 못 하는 건 싫은데 저 사람이 실패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애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상대에 대해 탐색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계속 지켜보라고 했더니 어느새 참가한 멤버들에게 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너무해요! 이거 왜 이렇게 잔인해요?”
지민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정부렸다.
우리 애들은 에서 탈락해도 다음 분기에 데뷔시킬 계획이었다. 3달 정도의 텀을 두고서.
하지만 애들은 아직 이걸 모른다. 보다 생생한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 팀의 리더를 맡기로 한 채아가 발 벗고 나섰다.
“안 되겠어. 우리도 스토리를 만드는 거야.”
“어떻게?”
“우리 중에서도 동정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없을까? 혹시 이 중에서 부모님 안 계신 사람?”
“…….”
“하긴 우리 중엔 없지. 그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
“…….”
“예음 언니가 있다면 가난한 걸 내세울 수도 있는데.”
“그 언니는 일부러 집의 도움을 안 받는 거고.”
그러면서 애들의 시선은 은설이를 향했다.
“안 돼. 누구 한 명이 우리들의 평균을 너무 올려 버려서 그런 걸로는 통하지 않을 거야.”
아까부터 이 좁은 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은설이는,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이거 댓글 봐봐.”
조용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윤이가 나머지 애들을 불러 모았다.
댓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있어서 애들 넷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이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럼 쟤네들 이기면 데뷔하는 건가? 데바데! 저것들도 이겨 버리고 화려하게 데뷔하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다른 회사에서 나온다는 그 팀도 똑같이 힘든 과정을 겪고 나오는 겁니다. 방송에 나오지 않았을 뿐, 그 사람들도 다를 바 없어요. 두 팀 다 벼랑 끝에 있는 기분일 거예요.
우려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이 사람 착하다.”
“이해해 주는 거 봐.”
“나 눈물 나려고 해.”
그러면서 애들은 서로의 핸드폰으로 댓글을 보내며 공유하고 있었다.
“너네들 내일부터 핸드폰 압수인 거 알지?”
“알아요.”
“급하게 연락할 일 있으면 매니저한테 부탁해서 전화 빌려 달라고 해.”
“네.”
숙소에서 함께 지낼 매니저는 이날 밤에 들어오기로 했다. 비츠걸스의 숙소를 지켰던 매니저가 이제는 이쪽으로 파견되는 것이다. 비츠걸스는 2년 동안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잘 지냈으니, 매니저 없이 있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근데 부럽다. 저쪽은 벌써 팀 이름이 있고, 사람들이 데바데라고 줄여서 부르는 거 진짜 부러워.”
“너희도 팀 이름 있어.”
“정말요?”
“확정되면 알려주려고 했지. 뭐 거의 확정된 거나 다름없기는 하지만.”
“뭔데요?”
네 명의 눈이 갑자기 밝게 빛나며 나를 향하고 있었다.
“사과소녀.”
“엥?”
“이상해?”
“선생님 장난치시는 거죠? 그게 뭐예요?”
“왜 어때서? 사과소녀. 좋잖아.”
그러자 옆에 있는 김종성 팀장이 “나는 이 이름을 반대했다. 나한테 뭐라고 그러지 마.”라면서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짜 팀 이름이 그거예요?”
“어.”
“사과…… 소녀?”
“상큼하다는 걸 강조한 거야. 사과가 상큼하니까.”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밝게 빛나던 네 명의 눈빛은 갑자기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한테 상큼하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음악이 상큼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그래도 사과소녀라니…… 줄여서 사소? 이거 좀 이상해요. 누가 정한 거예요?”
“내가.”
“아, 선생님 진짜 너무해요.”
“거의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야. 내일 인혁 사장이 사인하면 그걸로 결정되는 거야.”
“아…… 그럼 이거 막으려면 사장님을 설득해야 하는 건가.”
그러면서 네 명의 사과 소녀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빨간 사과.”
“네?”
“너네 팀 이름이라고. 빨간 사과.”
“사과소녀라면서요?”
“그건 아니고. 최종적으로 정한 이름은 빨간 사과야.”
“그럼 빨사?”
“레드 애플. 이게 너네 팀 이름이야.”
“레드 애플…….”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몬스터 뮤직에서 비츠걸스 다음으로 내놓는 새로운 걸그룹의 이름은 레드 애플(Red Apple)로 정했다.
“레애? 레플? 그럼 우린 뭐라고 줄여야 되지.”
사과소녀라고 떡밥을 던졌다가 나중에 알려줘서 그런지, 레드 애플이라는 말에는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레드 애플입니다. 이래야 하는 건가?”
“어색해.”
팀 이름 때문에 시끌벅적해진 방 안에서, 은설이는 여전히 적응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은설아. 불편해? 여기서 지낼 수 있겠어?”
“노력해 봐야죠.”
“얼굴 좀 피고 있어.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지내야지.”
“그래야 하는데…… 제 방하고 너무 달라서.”
그러자 애들이 은설이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좀 토닥여주겠다는 듯이.
“네 방은 어떤데? 방 하나가 막 30평이고 그런 거야?”
“아니야. 그런 건.”
“아님 방 안에 막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하고 그런 거?”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공주님처럼 커튼 있는 침대에서 살고 그러는 거지?”
은설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 방에 사진을 붙여 놨거든. 구석구석 빈 공간이 없게.”
“아…….”
“그런데 휑한 벽을 보니까 좀 불안해서.”
“연화 씨 사진 없어서 그러는구나.”
그러자 은설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가져다가 붙여.”
“그래도 돼? 언니는 연화 언니 싫다면서.”
“내가 언제 싫다고 그랬어? 싫어하는 게 아니고…….”
채아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내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 * *
자리에서 일어나니 애들은 벌써 이곳 주인 행세를 했다. 밖으로 나서는 김종성 팀장과 나를 배웅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밤이 늦었으니 나오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리더인 채아는 주차한 곳까지 내려와서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를 했다.
“빨리 방송 봐야 되는데.”
“방송이요?”
“어. 다은이 나오는 거.”
“아…….”
맥주 몇 잔 했다고 대리기사를 불렀는데 김종성 팀장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나도 내 쪽의 기사는 오질 않았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채아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들어가. 춥다. 난 기다렸다가 기사님 오시면 갈게.”
“괜찮아요.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가려고…… 근데 다은 씨 방송 보신다고요?”
“어. 오늘이야.”
“아…….”
“그래서 매주 목요일이면 TV만 보다가 잠들었지. 넥스트 유닛 보고 나서 다은이 거 보고, 그렇게.”
“다은 씨요…….”
다은이는 보컬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 중이었다. 네 명이 한 팀을 이루어서 경쟁하는 그 프로그램에.
다은이는 거기서 맹활약하고 있었고, 다은이네 팀은 아직까지도 탈락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아이돌 중에서 가장 가창력이 훌륭한 보컬’
‘스무 살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매혹적인 보이스.’
그 프로그램엔 다른 아이돌 팀의 메인 보컬들도 자주 나왔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을 가리지 않고서.
하지만 속된 말로 다은이가 전부 발라버렸다.
그 어떤 노래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자기 색깔을 입혀서 폭발적으로 불러 버리니 노래 좀 한다는 가수들도 다은이와 겨루는 것은 피하려는 눈치였다.
내 새끼가 밖에 나가서 인정받는 것…… 이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근원, 몸 안의 모든 울림을 모조리 파악해서 코치해 줬으니까. 그래서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다.
내 손을 거친 보컬들, 아연이와 유미를 비롯해서 다은이와 연화 그리고 채아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보컬 기량으로는 다른 이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 저하고 다은 씨 중에서 누굴 선택하실 거예요?”
“뭐?”
“그러니까…… 선생님은 저하고 다은 씨 중에서 누가 더 좋으세요?”
차에 기대어서 대리기사가 다가올 방향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더니, 채아가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처음이라면 당황스러웠겠지만 이제는 이런 질문을 종종 받다 보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너는 그런 질문 좀 그만하면 안 되냐. 꼭 그렇게 선택을 해야 돼?”
“그냥요. 재미로요.”
이제 얘 성격을 잘 알기에 이런 걸 물을 때면 적당히 듣기 좋은 대답을 해주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가 나태해지진 않았고, 자기를 칭찬하는 대답을 듣고서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듯 기뻐하는 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은이하고의 비교라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다은이는 특별해.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했잖아. 재능만큼은 확실히 타고난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 레슨을 통해 발전해서 비츠걸스에 합류하게 된 거야.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탁한 소리가 있어서 데뷔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거든.”
내가 이 회사에 처음 와서 맡게 된 제자였고, 내 손으로 발전시켜서 가수로 데뷔시켰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 아이였다. 나에게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그렇긴 했는데.
“너무해요. 진짜.”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해서 뾰루퉁해 있는 얼굴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진짜 너무해요.”
“애초에 누가 더 좋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저울질하면서 누가 더 좋다는 판단을 내리는 게 옳은 일이냐고.”
“그냥 재미라고 했잖아요.”
앙칼진 목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삐치긴 삐친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 너는 나하고 김종성 팀장님 중에 누가 더 좋아?”
“네?”
“대답하기 힘들지? 그거랑 똑같은 거야.”
“저는 대답할 수 있는데요? 저는 선생님이 더 좋아요.”
“내가 앞에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아니, 정말이에요. 선생님하고 사장님 중에 선생님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사장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 사장님이 아니라 지금은 팀장님.”
채아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이 입술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둘 다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둘 중에서는 선생님이 더 좋아요. 왜냐면 선생님은 가만히 있는 저를 찾아와서 저를 데려가 주신 거잖아요. 반대로 팀장님한테는 제가 찾아가서 오디션을 본 거고요.”
그러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인정해 주고 선택해 준 사람들이긴 하지만, 한쪽은 수동적으로 선택해 준 것이고 한쪽은 능동적으로 선택해 줬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더 좋아요. 이건 팀장님이 지금 옆에 있다고 해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둘 다 좋지만 선생님이 더 좋다고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일.”
“그래. 알았어. 고맙다고 대답하면 되는 거지?”
“그럼 선생님은요? 저하고 다은 씨 중에서 누가 더 좋아요?”
또 한 번 삐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갈 것인가, 살짝 고민을 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내가 말한 적 있잖아. 채아 너는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거 같다고. 실패를 했지만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게 내 어릴 적하고 비슷해. 그때 나한테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서 대답은요?”
“지금 나는 채아 너를 계속 발전시켜서 최고의 보컬로 만드는 것만 생각하고 있어. 그거만 생각하면서 너를 가르치고 있고 음악을 만들고 있는 거야. 알았어?”
“네.”
“대답이 됐어?”
“애매하지만 그럭저럭요.”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을 때 대리기사가 도착했다. 채아는 인사를 마치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리기사가 내 집의 위치를 네비로 찍고 있을 무렵, 빌라의 계단 센서등은 채아가 올라가는 것에 맞추어 켜졌다 꺼지곤 했다.
상반신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열려 있는 계단 창으로 채아가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