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
4장 나를 가지세요
유미TV
유튜브에서 이런 걸 발견했다. 황유미가 노래하는 걸 들어볼 생각으로 검색해 봤는데 채널 하나가 제일 위에 나와주었다.
하긴. 요즘 유튜브가 대세라니까.
그런데.
구독자 19,461명
어라? 제법 구독자 수가 많았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은 편이다. 실패한 걸그룹의 메인 보컬이었던 사람이 하는 것치고는.
어떤 영상을 올리고 있는지 살펴봤는데…… 일단 황유미는 맞다. 혹시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했거든.
주요 컨텐츠는…… 딱히 말할 것이 없었다. 편집자가 따로 있는 건 아닌지 영상의 퀄리티는 조악했고
차 안에서 노래를 하는 것, 식당에서 밥 먹는 것, 자기 방 안에서 혼잣말하는 것 등등.
딱히 본격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전직 아이돌 그룹 출신이라는 걸 빼면 평범한 여자가 취미 삼아 대충 찍은 영상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업로드한 영상의 수는 무려 41개. 그중에서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건
‘걸그룹하면서 성상납을 제의받았던 썰’
‘스폰서와 아이돌의 관계. 씁쓸한 현실’
이거 두 개가 무려 4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그런 얘기였다. 자극적인 소재로 썰을 풀었던 것이 주목을 받아서, 실패한 걸그룹 멤버였던 초라한 경력에도 불과하고 거의 2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돈이 엄청나게 많다고 해봐요. 한 끼 밥 먹는 데 몇백만 원도 우습게 쓸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진짜 진짜 가진 게 많아서 우리랑은 쓰는 돈의 단위가 다른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 중에 여자 밝히는 사람이 왜 없겠어요? 돈 주고 여자 사는 게 일상인 그런 새끼들 있잖아요. 왜 없겠어요. 너무 많아서 문젠데.
영상 하나를 클릭해서 보니까 황유미는 제법 재미있게 진행하고 있었다. 방 안에서 상체를 화면에 가득 담은 구도로 혼자 떠드는 영상이었다. 억양이 재미있고 발음도 정확해서 그런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대충 훑어보고 노래하는 걸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나도 몇 분째 영상 하나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생 중에서는 진짜 가난한 애들이 많단 말이야. 차비도 겨우 구해서 회사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어떤 애들은 집안 사정 안 좋아서 돈이 새나가기도 하고, 빚이 많아서 집에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애들도 있고, 연습생 중에 유난히 그런 애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돈 많은 사람이 딱 나타나서 스폰해 준다고 해봐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돈도 넉넉하게 주고 곧바로 데뷔시켜 준 다음에 확실하게 띄워주겠다고 하면, 이게 진짜 잔인한 일이거든요.
이런 일이 정말로 있나?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는데.
-저도 브로커? 이런 사람한테 연락받은 적 있었어요. 어떤 분이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주면 만날 때마다 얼마씩 받을 수 있고, 데뷔할 때까지 어떻게 지원을 해주겠다 막 이런 얘기를 하면서, 저한테 하겠냐고 묻더라구요. 아무한테나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너 한 번 해보지그래? 하고 묻는데.
* * *
“해볼게요. 저 해보고 싶어요.”
황유미는 주먹을 불끈 쥐는 시늉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활짝 웃으면서.
직접 만나 보니 키가 꽤 큰 여자였다. 하긴 프로필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건 알아볼 수도 없었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었지만 언뜻 보아 나랑 거의 비슷해 보이니 아마도 실제 키는 170 정도? 그 정도로 보였다.
마스크는 프로필 사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특별한 매력 포인트가 없는 얼굴, 하지만 적당히 수수한 이미지, 또한 꾸미면 어느 정도 빛을 발할 것 같은 얼굴.
대신 걸그룹 사이에 끼어 버리면 ‘아, 쟤는 무조건 메인 보컬이겠구나.’ 하는 시선을 받지 않을까 하는 평범한 느낌.
그래도 아까 미팅 장소로 들어온 이후 계속 웃고 있다.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미소 짓게 할 정도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인상이 좋다고 해야 하나.
“괜찮으시겠어요? 우리 회사 프로듀싱팀에서는 관여를 안 하겠다고 해요.”
“그래도 곡 받아서 레코딩하는 거까지 해주시겠다면서요?”
“그건 가능해요.”
“그럼 해볼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오전 내내 정영수 팀장이 발로 뛰어다닌 결과 스튜디오 사용은 승인을 받아내었다. 대신 스케줄 조정은 필수고.
업체를 통해 곡을 받는 것도 얘기가 잘 되었다. 이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곡을 받아서 황유미에게 연습을 시키고, 그 목소리를 레코딩하는 일. 나로서는 이것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까.
“기획 없이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회사에서 밀고 있는 아티스트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대충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 장기간의 기획을 거쳐서 어떤 컨셉으로 갈 건지, 시장성은 어떤지, 꼼꼼하게 검토를 한 뒤 방향을 잡는다.
회사의 간부들을 비롯해서 실무자들과 아티스트가 참여해서 각자의 의견을 종합해야 하는 등 어떠한 음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하지만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서 회사에서 방치하고 있는 아티스트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이렇게 음원 하나 내보겠다고 정 팀장과 내가 붙어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감지덕지인 일이었다.
“괜찮아요. 지금 하는 게 기획 회의 아니에요? 정 팀장님하고 박 팀장하고 같이 상의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나를 자꾸 박 팀장이라고 부르는데.
난 그저 일개 트레이너일 뿐이라고 해도 계속 이렇게 부른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리고 저 있잖아요. 트로트 하고 싶어요.”
“예?”
“제 길은 그쪽인 것 같아요. 느낌이 팍 오는 거 있죠. 지금까지 제대로 안 해봤지만 막상 해보면 잘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왜 이런 재능을 이제야 발견했을까 아쉽고 막 그런 거 있잖아요.”
트로트? 너무 예상 밖의 얘기였다.
“혼자 연습해 봤는데 괜찮았어요. 진짜루요. 미스트롯 같은 거 또 하면 거기에 나가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곳에 나가는 거 회사에서 지원해 주죠? 안 해줘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저 같은 스토리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구요. 아이돌 하다가 잘 안 돼서 트로트 쪽으로 빠져서 성공하고 그런 거 있잖아요. 아니, 그러지 말고 지금 한 번 불러볼까요? 못 믿겠다는 얼굴이셔서.”
그렇게 말하길래 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황유미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세미 트로트 곡. 제법 잘한다. 테크닉이 괜찮고 목소리의 톤도 그럴싸하게 잘 만들어냈다.
“괜찮네요. 본인이 원하니까 그쪽으로 가 보죠. 정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정 팀장도 쉽게 수긍했다. 방송보다는 행사 위주로 활동을 할 것 같으니 트로트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렇게 방향은 그쪽으로 잡았고, 업체 측에도 트로트 쪽으로 샘플을 요청하기로 했다. 물론 변수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니까 다른 장르의 곡도 함께 요청하기로 했고.
“요즘 유튜브도 열심히 하시나 봐요?”
“보셨어요? 아, 보셨구나. 가수로 계속 활동을 하려면 그런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걸로 돈을 벌려는 건 아니고…… 그런데 박 팀장님 구독 누르셨죠?”
“아…… 예.”
“안 누르셨구나. 빨리 눌러주세요. 빨리.”
“알았어요. 구독할게요.”
“그냥 보시기만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같은 식구면 도와줘야죠. 구독해 주시고 좋아요도 쭉 눌러주시고. 알았죠?”
시종일관 웃고 있었고, 또한 부정적인 얘기가 오가도 신경 쓰지 않고 그걸 긍정적으로 여기려고 하고, 뭔가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이었다.
* * *
아이돌로 쓰디쓴 실패를 한 번 맛봤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
게다가 유튜브에서 채널을 만들어 방송을 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길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을 하다가 트로트라는 길을 찾아낸 사람.
올해 스물여섯이라고 하던데.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정이 갔다. 싹싹한 태도로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좋아 보였고.
하지만 회사에서는 사장이 억지로 데려온 인물일 뿐, 사실상 버림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
도와주고 싶다. 내가 도와줘서 좋은 목소리를 뽑아내고 싶다. 내가 띄워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노래를 지금보다 더 잘하게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갑자기 생긴 이 이상한 능력으로.
“헤헤…….”
하지만 내 앞에서 헤헤 웃고 있는 이 아이는 참.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냐?”
“쌤은 가끔 이럴 때가 있어요. 혼자 막 심각해지는 거.”
오후 여덟 시. 개인 레슨을 위해서 김다은을 따로 봐주고 있는 시간. 그리고 지난 월말 평가 이후로는 김다은 외에 가능성 보이는 두 명도 다른 시간대를 택해 따로 레슨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심화학습이라고나 할까.
“너는 안 불안하냐?”
“예? 제가요?”
“이러고 있는 거 안 불안하냐고?”
내가 그렇게 묻자 다은이는 ‘불안해야 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연습생 때가 제일 불안했어.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여기에 매달리고 있는데, 데뷔도 못 한 채 인생이 망가지지 않을까 해서.”
바로 옆 연습실에선 데뷔조 네 명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방음 탓에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진 않지만 쿵쿵대는 울림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데뷔를 앞두고 있는 네 명은 기대와 두려움을 가슴에 품은 채로 하루하루를 애타게 보내고 있겠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에이…… 저야 뭐 이렇게 쌤한테 계속 배우다 보면 잘 되는 날이 오겠죠. 저 요즘 너무 재미있는데 왜 그러세요?”
“열심히 하라는 얘기야. 좀 더 치열하게. 항상 긴장을 한 채로. 알겠어?”
회사로부터 실력은 인정받고 있지만 스캔들에 휘말린 사람과 친구라는 이유로 데뷔조에서 제외된 이 녀석. 아직 사정을 모르는 건가? 하긴 주변 돌아가는 것에는 둔한 스타일 같긴 하다.
“열심히 할게요. 저 진짜 열심히 하고 있다구요. 쌤은 잘 모르시지만.”
만약 그 스캔들로 붙어버린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채 계속 붙어다니면, 아무리 출중한 보컬 실력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데뷔하긴 어려워질 텐데. 이 녀석은 어떻게 해줘야 할지.
* * *
황유미와 미팅을 가지기도 하고, 정 팀장과 계속 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맡고 있는 두 조의 연습생들 레슨을 해주고, 따로 개인 레슨까지 하는 등. 이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바쁘게 보낸 날인 것 같았다.
새카만 어둠이 가득 들어차 있는 창밖, 그리고 퇴근해 버린 빈 자리를 유난스럽게 환히 비추는 사무실 조명.
하품을 길게 내뿜으며 사무실을 나왔다. 퇴근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황유미와 김다은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기. 선생님.”
기나긴 하품을 다 내뿜을 무렵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차분한 목소리.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깜짝 놀라 바라보니 거기에는 한연화가 있었다. 데뷔조의 에이스.
자체발광하는 깨끗하고 청순한 미모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예.”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아니, 그런데. 일개 연습생이 트레이너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을 건넸을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 어쩌면 얼굴이 빨개졌을지 몰라.
“무슨 얘긴데?”
“지금은 하기 좀 그렇고…… 이따가 시간 되세요?”
“이따 언제?”
“새벽 한 시 정도에.”
“한 시?”
새벽 한 시? 아무리 이 바닥이 늦은 시간까지 돌아간다고 해도.
그런데 왜 그런 거지? 얘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너무 늦는데.”
“저는 그때밖에 시간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연습이 그때 끝나서…….”
“지금 하면 안 되는 얘기야?”
“지금은 좀 그래요.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거든요.”
이건 또 뭔가. 호기심이 안 생길 수 없잖아.
“그럼 전화로. 아, 너네 핸드폰 없지?”
“예.”
얘넨 데뷔조라서 전부 핸드폰을 압수당했다. 데뷔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핸드폰 사용 불가란다. 불쌍한 것들.
“한 시라…….”
똘망똘망하면서 어쩐지 애수가 깃들어 있는 듯한 아련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기다려 볼게.”
“그럼 한 시에 저희 연습실에서 뵈었으면 해요.”
“너희 연습실? 아, 그래. 알았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흩날리는 머릿결도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였다. 얘가 이러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새벽 한 시. 그때까지 나 뭐하고 있지?
* * *
한연화.
9년 전 10살의 나이로 몬스터 뮤직의 오디션에 합격해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그때 오디션을 봤던 영상은 아직도 회사 클라우드에 보관되어 있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은 어린 애가,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자신감 있게 노래하는 모습.
비주얼은 이때부터 출중했다. 요즘 잘 나간다는 아역 모델들하고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엽고 예쁘장한 모습이었다. 가창력은 아직 어린아이다운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아마도 이 영상은 연화가 데뷔한 후에 사용할 목적인지, 최근 들어 몇 번의 보정이 가해졌다. 회사에서도 연화에 관한 것은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몬스터 뮤직의 연습생이 된 연화는 그 후 9년 동안 꾸준하게 트레이닝을 받아왔다.
회사 내에서 연화를 평가하는 말은 독종. 얘가 지난 9년 동안 어떻게 해왔는지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학교에서 오전 수업만 마친 후 곧바로 회사로 오면 오후 2시 정도. 예정된 레슨을 다 받고 난 뒤에도 끝까지 남아 매일 연습을 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성대가 상할까 봐 회사에서 보컬 연습은 제한 시간을 정해줬을 정도였다.
이걸 매일. 주말이라고 쉬는 법도 없었다.
10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금까지 이 스케줄을 계속 소화해온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었고, 회사에서 조금 무리한 연습량을 부과하더라도 싫은 티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독종.
“데뷔조가 되면 핸드폰을 회사에 반납해야 돼요. 아주 특별한 일이 있어서 핸드폰을 꼭 써야 할 때가 아니면 회사에서도 내주질 않아요. 그런데 연화는 말이죠, 아예 핸드폰이 없었어요. 데뷔조가 되었으니까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자긴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하루 종일 연습만 하면서 사니까요.”
정 팀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사실 위에서 설명한 한연화에 대한 모든 것은 정 팀장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진짜 좋아해요. 걔의 이런 면을 말이죠. 열 살 때부터 연습 말곤 다른 걸 한 적이 없었으니까 과거 행적에서 걸릴 게 없고,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나왔으니까 연애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었을 거고…… 이런 걸 모범적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쟤는 진짜 독종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뭐랄까, 진짜 좀 이상한 애잖아. 마치 스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모든 걸 갈아 넣은 것 같은 뭐 그런 거.
“열 살 때는 자기 스스로 오디션에 보러온 거예요?”
“그건 모르겠어요. 저도 이 회사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차라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열 살짜리가 회사에 들어와서 그렇게 빡쎈 트레이닝을 다 소화해냈다고? 부모가 애 잡는 건 아닌가? 아니면 부모도 모르는 거 아닐까? 회사가 쟤를 이렇게 굴리고 있는 거.
“그런데 말이에요. 진짜 중요한 게 있는데요. 어릴 때 그렇게 예뻐도 역변하는 애들 많잖아요. 어릴 때 사진이랑 비교해 보면 얘가 걔 맞는지 안 믿겨지고 그런 거요. 그런데 쟤 보세요. 그 정도로 독종인 애가 저런 마스크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건 보물이나 다름없어요. 쟤는 진짜 뜰 겁니다. 몇 년 뒤에는 쟤 혼자서 우리 회사 먹여 살릴 거예요.”
딱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 사람의 가수가 스타로 성장하기까지는 본인의 재능 외에 수많은 요소들이 필요한 법이지만.
쟤는 재능부터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뭐가 되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아이였다.
그런데.
나는 왜 보자고 하는 거지?
보컬 레슨해 달라고?
애가 독종이니까 유능해 보이는 선생한테 뭔가 조언을 받고 싶어 하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문제는 만나자고 한 시간이 무려 새벽 한 시.
뭐 독종이라니까. 데뷔조에 올라온 뒤로는 매일 새벽 한 시까지 연습을 하는 애라니까. 게다가 회사에서 엄청나게 기대를 하고 있는 유망주.
하는 수 없이 계속 기다렸다. 얼마나 독종이길래 연습을 다 끝내고 나서 또 보컬 상담을 하려는 건지 감탄을 하면서.
처음 몇 시간은 정 팀장과 노가리. 하지만 정 팀장이 퇴근한 이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황유미의 유튜브에 들어가서 몇 시간 동안 유튜브질. 아니, 이것도 일이긴 했다. 그녀의 보컬에 대해서 미리 조사를 하는 셈이니까.
그러다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저 사실 몬스터 뮤직과 계약했어요.’ 라는 영상. 이거 오늘 올라온 거다.
예전 기획사랑 결별한 뒤 몬스터 뮤직과 계약을 했다는 내용. 솔로로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곧 음원이 하나 나오니 응원을 해달라는 것.
방글방글 웃으면서, 그리고 약간 애교가 섞인 듯한 말투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봤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말투야.
그러고 있으니 어느덧 한 시가 되었다.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연습실 앞으로 다가가니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던 음악은 꺼져 있었다.
“들어가도 되니?”
똑똑 노크를 두드린 뒤 연습실의 문을 열었고
한연화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그리고 지쳤다는 것을 숨길 수 없는 듯 팔다리가 늘어진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짙은 피로로 그을린 두 눈이 매가리 없는 빛으로 나를 향했다.
“너무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냐.”
초등학교 때부터 밤 열 시까지 매일 연습. 데뷔조가 된 후에는 새벽 한 시까지 매일 연습.
아마 얘는 나하고 시간 개념 자체가 다를 것이다. 새벽 한 시가 뭐하는 시간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겠지. 보통 사람으로 치면 저녁 일곱 시 정도? 한창 일을 끝내고 난 드디어 쉬는구나 하는 시간. 아마도 그 정도가 아닐까.
“오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마땅히 얘기를 나눌 장소가 없어서 우리는 연습실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이 회사에는 얘가 나, 이렇게 단둘뿐.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퇴근했다. 나도 방금 사무실 문을 잠궈놓고 나왔다. 무슨 얘긴지만 들어보고 바로 밖으로 나가려고.
바깥은 숲속처럼 고요했다. 한껏 예민해진 내 청력으로도 들려오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새벽 한 시의 지하 연습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장소 같다.
그리고 방금까지 격한 연습을 마친 연화는 아직도 가쁜 호흡을 간신히 내쉬고 있었다. 따뜻한 입김이 볼에 와닿는 느낌 마저 들 정도였다.
* * *
연습하기 힘들지? 아뇨. 괜찮아요. 제 미래를 위한 일인 걸요. 매일 이 시간까지 하면 안 힘들어?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이런 의례적인 말들이 오갔다. 마치 빈틈없는 모범생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동안 나누다가, 한연화는 본론을 꺼내었다.
“선생님. 지금 여기에 계신 거 아는 사람 있어요?”
“아니. 없어.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면서?”
“고맙습니다.”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서,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고 하기에 나도 나름대로 조심했다. 정 팀장과 노가리를 깔 때도 그냥 일이 더 있어서 남아 있다고 둘러댔었지.
“다른 게 아니고…… 어쩌면 차성우 선생님은 저희를 못 맡으실 수도 있어요.”
“어? 차성우 선생님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이건 예상도 못 한 얘기인데?
“아마 그렇게 되면 박영민 선생님께서 저희를 맡게 되실 거예요.”
연화는 차가운 연습실 바닥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세로, 그리고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었는지 평소처럼 또렷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짓 하나, 그리고 고개의 끄덕임도 전혀 없을 정도로 그녀는 가만히 멈춰 있었다.
다만 부드러운 음성만이 고요한 연습실에 낮게 깔리고 있었다.
“내가?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아직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럼 나한테 하려는 얘기가 그거야? 새벽 한 시에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게?”
“네.”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목구비와 달리 그녀가 품고 있는 분위기는 새벽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정말 중요한 얘기거든요. 저에게 있어서, 그리고 선생님에게 있어서도.”
“그러니까, 내가 너희 데뷔조의 트레이너를 맡을 수 있으니 그걸 알고 있어라. 이런 얘기야?”
뭐랄까. 그런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이런 건 회사 간부들에게 들어야 하는 얘기지 연습생에게 들을 법한 얘기가 아니라서.
“저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이번 데뷔에 걸고 있어요. 제대로 해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선생님.”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거야? 그래. 내가 너네 팀을 맡을 수 있다면 도와줄 수야 있겠지. 그런데 그건 힘들어. 난 여기 들어온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다구. 물론 네가 나한테 따로 배우고 싶다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런 거야 해줄 수 있지.”
나한테 몰래 배우고 싶어서. 차성우가 알면 안 되니까. 그리고 회사 관계자들이 알면 안 되니까. 그래서 새벽 한 시에 보자고 한 건 줄 알았다.
독종이라고 불리는 애니까, 자신의 보컬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거라면 흔쾌히 해줄 생각이 있었는데. 나도 이런 애를 제자로 키워볼 수 있다면 언제나 환영이거든.
“김다은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주세요.”
“어?”
“이걸 부탁드리려는 거였어요.”
뭐라고?
“그 사람이랑 같은 팀을 하긴 싫어요. 저는 이번 데뷔를 위해서 제 모든 걸 다 바쳤어요. 제 데뷔를 망치기 싫고, 거기에 그 사람이 끼어드는 게 싫어요. 저는 사실 팀으로 데뷔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사람하고는 같이하기 싫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 고개를 살짝 숙인다. 나를 빤히 향하던 눈빛이 사라지고 땀에 젖은 머릿결이 살며시 흔들린다.
“다은이가 왜? 아니, 그것보다 다은이는 너네 팀에 뽑히지 못했잖아?”
“어쩌면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좋게 보셨다네요. 이사님도.”
회사 분위기에 한껏 예민한 연습생답게 이런 얘기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모르는 건가? 김다은은 스캔들 당사자와 친구라는 이유로 이번 데뷔에서 미끄러졌다는 걸.
“아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이 시간에 부른 이유가, 다은이가 올라가는 걸 막아달라는 부탁을 나에게 하려고…… 이거 때문이라 그거야?”
“그 부탁을 들어주시면 선생님이 저희 팀의 트레이너를 맡을 수 있도록 저도 도와드릴게요.”
“네가 도와준다고? 무슨 소리야?”
누군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주먹으로 퍽 때려 버린 느낌. 뭐 그런 느낌이 드네.
“야. 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냐? 그래, 나도 알어. 회사에서 너한테 기대하고 있는 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회사 인사권까지 좌우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싫다고 하면 트레이너가 하루아침에 바뀌냐고?”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 얘기가 아니면 뭐? 너 생각 똑바로 하고 살아야 돼. 그런 마인드로 데뷔해 봤자 뭐가 되겠냐. 데뷔해서 성공한다고 해도 그런 마인드로 얼마나 가겠냐고. 난 너에 대해서 좋은 얘기만 들었는데 지금 나한테 하는 얘길 들으니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욱! 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말들을 쏟아냈다.
연화는 내 말을 들으며 입술을 한 차례 훑는다. 애써 내 쪽으로 옮겨둔 시선이 톤이 높아진 내 목소리로 인해 다시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내가 틀린 말 하는 건가? 얘 너무 기고만장하잖아.
“제가 그런 것에 관여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선생님. 오해하고 계세요.”
“그럼 뭐?”
“저는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저는 어쩌다가 그분의 약점을 알게 되어서…….”
“약점?”
“저희 팀 트레이너로 계속 있을 수 없는 약점.”
“그게 뭔데?”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회사에서 알게 되면 그분은 저희 팀 트레이너를 그만둘 수밖에 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새로운 트레이너를 구하긴 어려울 거고, 회사 내에서 찾는다면 당연히 박영민 선생님밖에 없을 거예요.”
“내가? 나 보컬 트레이너한 지 이제 한 달밖에 안 되었어.”
“다음 월말 평가에서도 이번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하실 거예요. 선생님은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계시니까요.”
그러니까 얘가 하는 말은, 자기가 차성우를 잘리게 할 수 있고 그러면 내가 이득을 볼 거다.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다음 월말 평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김다은 그 사람도 올라갈 가능성이 생기겠죠. 그걸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건 못 하겠다면?”
“네?”
“내가 못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래도 차성우 씨를 잘리게 할 거야?”
만약 차성우가 잘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면…… 나는 이 회사에 내 자리를 확실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곧 데뷔하는 얘네 팀의 트레이너를 맡게 될 것이고, 앞으로 데뷔하는 친구들까지 전부 다 내가 독차지하게 되는…….
내가 꿈에 그리던 일. 무대에 올라가는 가수를 내 손으로 키워내는 것.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김다은 그 사람에게는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거니까요.”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예쁘장한 애도 내 손으로 키워낼 수 있게 되겠지. 회사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인재, 못해도 중박은 칠 것이 확실시되는 재능.
아니, 그럼 얘가 하고 싶은 말은, 김다은을 버리고 자기를 가져라. 뭐 이런 얘긴가.
연화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매니저가 올 시간이 되었다고 하길래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둘이 얘기하고 있는 거 들키면 안 된다나.
얘는 매일 이런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새벽 한 시까지 연습. 그리고 연습이 끝나면 매니저가 얘를 숙소까지 데리고 간다.
숙소에선 매니저와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연습생의 신분이지만 곧 데뷔를 앞두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매니저를 붙여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도 못쓰게 하고, 외출도 못 하고, 먹는 것도 맘대로 못 먹는다.
매니저랑 같이 잔다고? 깜짝 놀라 물었더니 여자 매니저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하여튼 매일 이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학생이니까 내일 아침이면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해야 하고, 오전 수업만 마치고 회사를 다시 찾아와서 짜여진 스케줄대로 쉴 틈 없이 계속 달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새벽까지 연습을.
나 때는 말이야.
나 때는 어땠더라?
잘 기억이 안 난다. 실감은 나지 않았고, 맨날 얻어맞았고…….
-업체로 레퍼런스 보냈어요. 마감은 일주일로 지정했습니다. 괜찮죠?
정영수 팀장은 얼굴 보기가 힘들다. 밖에서 할 일이 많아서 상의하는 건 대부분 전화 통화로 하곤 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영민 선생님한테도 참조로 보내라고 했으니까 데모 오면 들어보세요.
“그럴게요.”
여기서 말하는 업체란 뮤직 퍼블리싱 회사.
가수들이 음악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다면 작곡가, 작사가들은 뮤직 퍼블리싱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기획사에서는 어떤 아티스트의 이렇고 저런 스타일의 곡이 필요하니 일주일 안으로 데모를 보내주시오. 첨부한 레퍼런스 곡 참고. 이렇게 요청을 하면 뮤직 퍼블리싱 회사에서는 소속된 작가들에게 이러한 리딩을 보내서 곡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획사로 전송.
그게 기획사에서 채택되면 음원으로 만들어지는 거고 아니면 꽝. 대충 이런 구조다.
초보 작곡가들이 발품 팔아 기획사들 돌아다니며 ‘제가 만든 곡 한 번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러는 건 옛날얘기다. 퍼블리싱 업체에 소속되면 기회는 열려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쪽에서는 황유미라는 아티스트를 소개했을 것이고 트로트 장르의 싱글을 내려고 하니 데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퍼블리싱에 소속된 작가들은 오늘부터 일주일 안으로 레퍼런스와 비슷한 트로트 넘버 한 곡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리딩을 받은 작가 중에서 황유미한테 곡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만.
“저기 그런데 정 팀장님.”
-예?
“차성우 선생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아니, 아닙니다.”
뭘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 한연화한테 들었던 걸 묻고 싶은데.
이런 걸 속 시원히 물어볼 사람은 나한테 정 팀장밖에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는 좀.
-영민 선생님. 신경 쓰지 마세요.
“…….”
-제가 알아서 다 처리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유미한테만 집중하세요. 원래 우리 회사에 셀프 프로듀싱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것도 뭐 그런 셈이에요.
그 얘기가 아닌데.
-대신 나중에 김 이사님하고는 한잔하자구요. 제가 잘 풀어놓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 * *
선생이라는 체면도 있고. 그래서 물어보진 않으려고 했는데.
“헤헤…….”
헤헤 웃고 있는 이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호기심이 내 몸 안에서 마구 증식하는 느낌이었다.
꺼내지 않으면 계속 부풀어 올라서 내 몸을 찢어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너 한연화랑 동갑이잖아.”
“그렇죠. 여기 예은이도.”
“아, 그래.”
다른 애는 관심 없고 너 말이야. 너.
“동갑이고, 얼마 전까진 같이 레슨을 받았으니까 친하겠네?”
“연화랑요?”
“그래.”
“쌤. 왜요?”
“아니, 그냥.”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라고.
“친하죠.”
“친해?”
친하다고?
“그저께도 같이 얘기했다구요.”
“그저께?”
“저녁으로 제육볶음 나왔거든요? 그런데 옆 테이블에 연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맛있지? 하니까 응, 하면서 대답을 하더라구요.”
“그게 다야?”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저랑 걔랑.”
얘는 가끔 병신 같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막 친한 건 아니고, 가끔 얘기를 나누는 사이다, 그거지?”
안 친한가 보군.
이런 얘기를 했더니, 한연화랑 연습생 생활을 오랫동안 같이했던 애들이 한마디씩 한다.
“걔는 좀 다른 세상 사람 같아요. 처음 봤을 때,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고…… 아, 이래서 여기가 연예 기획사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걔 얼굴 보다가 거울 보면 자괴감 장난 아니에요.”
“그런데 노래까지 잘해. 미쳤어.”
어떤 성격인지 알고 싶어서 조금 떠봤더니
“회사에서 걔랑 친한 애는 없어요. 걔는 진짜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는 애라서.”
“준비된 스타잖아요. 걔는 뭔가 신비한 그런 게 있어요.”
연화랑 친한 애가 없다 보니 들을 것도 없었다.
“쌤. 그런데 왜요?”
“연습하라고.”
“예?”
“걔는 독종이라더라. 걔처럼 연습을 하라는 그런 얘기야!”
“자꾸 왜 그러세요. 저 요즘 진짜 진지한데.”
그래. 얘도 열심히 하는 건 알겠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게 내 귀로 정확히 들려오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건
-김다은이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막아주세요. 그 사람이랑 같은 팀을 하기는 싫어요.
이런 말이 왜 나오는 건지. 왜 그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물론 내 쪽에서 어느 정도 조정해 줄 수 있기는 하다. 다은이를 회사 간부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시간, 즉 월말 평가에서 얘를 망쳐 버리면 얘는 데뷔와는 아주 먼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짓을 어떻게 하나. 죽어도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나 대신, 이라고 생각하고 얘를 열심히 키우는 중인데.
* * *
그러는 사이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차성우와는 자주 마주쳤다.
면전에 대놓고 ‘저기 당신, 무슨 문제 있습니까? 여기서 잘릴 만한 그런 거?’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그저 인사만 꾸벅.
“야, 영민아. 너 요즘 잘나간다면서? 누구 디렉팅 맡았다는데?”
차성우는 큼지막한 손으로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그런 말이나 하고 있고
“그렇게 경력 계속 쌓아봐. 내가 너 나중에 좋은 데 소개시켜 줄게.”
앵무새처럼 이런 말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황유미와는 그 뒤로 만나질 못했다. 이 사람 꽤 바쁘다. 행사, 또 행사, 그리고 또 행사.
아니, 몬스터 뮤직이 이렇게 능력있는 회사였나? 아이돌 실패하고 솔로로 나온 사람한테 스케줄을 이렇게나 잘 물어다 주다니. 나 때는 포보이스 망하고 행사 돌아다닐 때 불러주는 곳이 얼마 없어서 집에서 쉴 때가 많았는데.
황유미는 그러면서도 이삼일에 한 번 꼴로 유튜브 채널에 영상을 꾸준히 올리는 것이 참 대단해 보였다.
방 안에서 썰 푸는 거, 혹은 노래하는 거, 또는 뭐 먹는 거 등등.
그리고 조회 수는 꾸준하게 3천에서 4천 정도. 자극적인 영상으로 구독자가 뻥튀기된 것이기에 구독자 수 만큼 높은 조회 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 조회 수가 꾸준히 나와주었다.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나한테 가끔 톡으로 안부를 묻기까지 한다. 박 팀장님, 식사 잘 하셨어요? 이러면서.
그러는 동안 일주일이 지났다. 우리가 퍼블리싱 업체에게 요청한 마감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총 여섯 곡. 업체 두 곳에서 보내온 데모가 모두 여섯 곡이었다. 이제 이걸 듣고 황유미에게 잘 어울리는 곡을 선정해야 한다.
데모는 믹싱까지 어느 정도 되어 있었고 가이드가 들어가 있었기에 감상하기에 편했다.
레슨이 없는 시간에는 쉬지 않고 이 곡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어떤 게 좋을지 계속 비교를 해보면서…….
그렇게 해서 추려진 곡이 모두 두 곡. 이건 정 팀장과 나의 의견이 일치했다. 나머지 네 곡은 좀 아니다 싶었거든. 차이가 확 느껴질 정도로. 게다가 그중 한 곡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좀 덜 유명한 곡을 그대로 베낀 티가 너무 확연했다.
트로트 좀 연구해 보겠다고 요즘 들어 음악을 많이 들어본 게 천만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쨌든 두 곡을 선택해서 황유미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연습을 한 뒤 만나자고 했다.
이제 시작이다. 들어줄 만한 보컬을 한 번 더 만드는 일을.
* * *
“박 팀장님.”
“저 팀장 아니에요.”
“에이, 저한테는 팀장이세요.”
연습실 하나를 간신히 잡았다. 정영수 팀장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참여를 못 한다기에 나는 황유미와 둘이 연습을 시작했다.
두 곡 중에 딱히 어느 것이 더 낫다는 느낌이 없어서 일단 두 곡 모두 맞춰보는 중이었다.
“박 팀장님. 어때요?”
두 곡을 한 번씩 불러봤다. 확실히 노래를 잘한다. 기교를 부리는 것도 능숙하다. 트로트 특유의 2박 계열 리듬을 타는 것에도 모자람이 없었고, 빠른 템포에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평균 이상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이돌을 하다가 트로트로 이제 막 솔로 데뷔를 하려는 사람이 평균 이상.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톤이 평범하다. 너무 흔하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확 끌리는 점이 없다. 내가 귀가 너무 예민해져서. 입맛으로 치면 한층 까다로워진 입맛 때문에 입이 짧아졌다고 해야 하나.
이전 소속사에서 트레이닝을 받았고, 데뷔를 해서 활동까지 했으니 기성의 느낌이 있기는 했다.
김다은과 비교하면 좀 더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나를 깜짝 놀래키는 김다은에 비교하면 너무 밋밋했다. 노래 잘하네. 그냥 이 정도.
예전에 들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황유미라는 이름을 굳이 찾아보고 싶을 정도로 귀가 번쩍 트이는 느낌을 주는 보컬이었다. 아무리 그 뒤로 내 귀가 예민해졌다고 해도.
“다시 한번 해보죠.”
내 나름대로 파악한 몇 군데에 포인트를 주는 것으로 가이드를 잡은 뒤 다시 불러보기로 했다. 이윽고 그녀는 노래를 다시 시작하는데.
생글생글 웃고 있는 눈동자.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눈빛. 그리고 리듬을 타면서 흔들흔들 몸을 흔드는 모습.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박 팀장님. 어때요? 이번에 저 진짜 열심히 불렀는데.”
하지만.
“뭔가 부족해요.”
“아아…… 박 팀장님…….”
하지만 여전히 내 귀에는 만족스럽지 않게 들렸다.
“파트를 나눠서 디테일하게 잡아보죠.”
“네에…….”
그래도 데뷔했던 기성 아티스트와 작업을 하니 나 또한 괜히 프로페셔널해진 기분이었다. 여자와 둘이서 꽁냥꽁냥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뭐든지 잘해보고 싶어 하는 황유미의 열정도 참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시켜서 무대로 올린다는 희열. 아직 무언가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일에 몰두해 본 적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 * *
몬스터 뮤직이 야심차게 내놓는 4인조 걸그룹이 데뷔하기까지는 앞으로 60일.
벌써 데뷔 날짜까지 정해놓고 디데이를 세고 있었다.
팀 이름도 정해졌고, 타이틀곡도 곧 정해질 거라고 한다. 타이틀곡 후보는 세 곡. 현재 애들은 세 곡 모두를 연습하고 있다.
“달콤씁쓸한 여자애들.”
“예? 그게 뭐예요?”
“이름이 그거라니까. 달콤씁쓸한 여자애들, 아니, 달콤씁쓸한 소녀들.”
본부장에게 팀 이름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한다. 이게 뭐야?
“그게 팀 이름이라구요? 이상한데요?”
“그렇게 정해졌어.”
“맙소사. 그러면 줄여서 달녀? 달소?”
다된밥에 재를 뿌려도 이건 정도가 지나친데. 열심히 키워놓고 이름 하나로 다 망쳐 버릴 기세네.
“Bittersweet Girls. 이거래.”
“아…….”
“우리 회사 알잖아. 절대 평범한 이름 안 줘. 뭔가 의미심장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어야 돼. 그게 몬뮤 스타일이야.”
달콤씁쓸…… 뭐 그런 이름을 듣다가 저걸 들으니까 그나마 낫다.
“줄여서 Bitts Girls.”
“아…….”
“비츠걸스. 이걸로 정해졌어. 사실 석 달 전부터 이 이름으로 밀고 있었어. 회사에선 말이지.”
실력과 비주얼을 동시에 지닌 한연화를 세상에 알릴 팀 이름. 비츠걸스. 이거군.
“그런데 왜 그래?”
“예? 뭐가요?”
“너 말이야.”
“……?”
왜 또 트집인가.
“팀 이름 듣고서 어떤가 생각해 봤어요. 이름이 부르기 편한가 그런 생각 하면서…….”
“그게 아니라 무슨 딴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여간 이 능구렁이 본부장은 귀신 같은 면이 있었다.
잠깐 딴생각하기는 했다. 연화 말대로 내가 이 팀의 트레이너를 맡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가능성이 있는 팀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느낌일까 하고.
“고민 있으면 말해봐.”
“아니에요. 그냥 뭐.”
내가 만들어낸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느낌이 어떨지, 그런 생각.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가?”
“당신을 선택한 일.”
“아니, 잠깐만!”
연습실. 나뭇결의 맨들맨들한 바닥에 부서질 듯 반사되는 하얗고 밝은 조명.
나에겐 익숙한 곳이다. 내가 애들을 가르치는 곳이고. 나에게는 일터라고 할 수 있는 곳.
그런데 내 앞에는 그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있잖아. 꿈속에 나타나서 나한테 자꾸 이상한 짓을 하는 그 여자.
나는 레슨을 해주는 것처럼 여느 때처럼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나에게 배우는 사람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서. 마치 연습생처럼.
“방금 뭐라고 했지? 잘했다고?”
“당신을 선택하길 잘했다고요.”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쉽게 도착할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머리가 멍- 하고 생각이란 걸 하기가 쉽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 또한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선택하길 잘했다니?”
“열심히 하시잖아요. 본인의 능력이 업그레이드된 걸 깨닫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고 있어요. 성급하게 행동하지도 않으시면서.”
차가운 얼굴. 어떻게 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뜩한 차가움.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희미한 웃음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당신이 수작을 부린 거잖아. 본인의 능력? 모르겠어.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당신의 능력이에요. 언젠가 당신이 도달할 경지입니다. 저는 단지 그 경지에 빠르게 도달하도록 도와줬을 뿐이에요. 그건 원래부터 당신의 능력이었습니다.”
또박또박.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이 여자의 목소리는 똑똑히 귀에 박힌다.
“그리고 누구나 청력이 예민해진다고 해서 당신처럼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요. 당신은 노래하는 매커니즘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을 솔루션해 줄 수 있는 겁니다. 이건 당신의 능력이에요.”
그녀는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두 손으로 디지털 피아노를 받친 채로 허리를 숙여 나를 가까이 바라보았다. 기다란 머릿결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기분 좋은 향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지만…….”
“……?”
“언젠가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게 될 거예요. 원래 가져야 할 능력을 빠르게 가진 것을 넘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한계까지 이끌어내야 할 때가.”
내 잠재력을, 한계까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당신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이 필요할 때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해요.”
기억하려고 애썼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을. 그리고 그 의미를. 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래서 당신은 선택하길 잘했다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척 깊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그 재능을 펼쳐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는 다르잖아요.”
* * *
원래 내가 가지게 될 능력.
계속 이쪽 일을 한다면 소리를 들어내는 능력이 서서히 발전하여 지금처럼 된다는 그런 얘긴가? 감각 하나가 더 생겨서 이제까지 못 듣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는 이런 일이.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녀가 말한 대로 전부 이루어졌으니까.
그리고 전에는 그런 말을 했었잖아. 이게 원래는 5년 정도 뒤에, 늦으면 10년 뒤에나 내 것이 될 것이었다고.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몬스터 뮤직에 운 좋게 들어왔지만 예정대로 3달 일한 뒤 나가주어야 하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 애들 가르치는 일을 했겠지. 그러다가 점점 귀가 트여서 애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명강사가…….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얻게 된 10년의 어드밴티지는 꽤 크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학원에서 명강사가 되어봤자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을 것이고 그저 동네강사의 위치에서 벗어날 순 없었겠지.
몬스터 뮤직에서 접할 수 있는 초특급 유망주들은 만나볼 수도 없었을 거고.
“안녕하세요.”
“어, 그래.”
이런 초특급 유망주. 한연화. 이런 애.
“레슨받고 나오는 거니?”
“외국어 교습이요.”
“외국어?”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고…….”
“아, 그래. 글로벌하게 준비를 해야지.”
그 뒤로 연화와는 여러 번 지나쳤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지나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둘 사이에 그 어떤 대화도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해.”
“고맙습니다.”
하지만 쟤하고 나 사이에 오간 대화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잖아.
담당 트레이너의 약점을 쥐고 있어서 자기가 갈아치울 수 있다는 말. 그러면 내가 덕을 보게 될 테니까 자기가 요구하는 걸 들어달라는 것. 함께 팀을 하기 싫은 애가 올라오는 걸 막아달라는 요구.
이런 무시무시한 대화가 오간 사이임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몰라. 진짜 하나도 몰라. 네가 무시무시한 애인 거.’ 이런 얼굴로 대해야 하니까.
반면.
이쪽은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까 화기애애 그 자체.
“나 너 진짜 응원했었다니까. 난 네가 우승할 거 알고 있었어.”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쩜 좋니. 얘 좀 봐. 완전 애기야, 애기.”
“헤헤…….”
공교롭게 시간이 겹쳐 버렸다. 김다은을 따로 레슨해 줘야 하는 시간하고 황유미하고 연습하는 시간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같은 연습실에서 둘 다 데리고.
“언니. 멋있어요.”
“내가? 어휴, 내가 무슨…….”
다은이랑 황유미는 쎄쎄쎄를 하는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본 채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 팀장님. 오셨어요?”
“나 팀장 아니라니까.”
인사를 나누고.
“헐…… 쌤. 팀장이었어요?”
“아니라고!”
그리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정영수 팀장도 이날은 모처럼 함께해 주었다.
* * *
시간이 겹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연습실에 모이게 되었다. 그래도 여유가 좀 있는 연습생 김다은에 비해 바쁜 와중에 겨우 시간을 마련한 황유미 쪽을 먼저 하기로 했다.
“다은이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많은 공부가 될 거야.”
그랬더니 녀석은 헤헤 웃는 얼굴로 구석으로 물러났고…… 아니, 진짜 공부가 되긴 할 거다. 황유미는 완성에 가까운 보컬이니까.
여기에 정 팀장까지 부른 이유는 곡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두 곡 중에서 최종적으로 한 곡을 선택해서 본격적인 레코딩 준비를 하기 위해.
그래서 데모에 맞추어 반복해서 곡을 불러봤는데.
“언니. 진짜 잘하세요. 멋져요.”
“넌 좀 조용히 하고 있어!”
“네.”
왜지? 아직도 확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없었다.
황유미는 내가 디테일하게 요구하는 걸 잘 따라주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 귀는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 그런 거지? 이유를 못 찾겠네.
“박 팀장님. 여전히 별로예요?”
이런 질문에도 쉽게 대답을 못 하겠다.
내 역할은 트레이너일 뿐이다. 가수가 부를 곡에 대해 분석을 해주고 그 곡을 잘 부를 수 있도록 가이드해 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나한테 곡을 선택할 권한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원래 곡을 선택하고 기획해야 하는 쪽에서 손을 놓겠다고 하니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만.
“어떻게 하죠? 정 팀장님?”
“글쎄요. 저는 괜찮은데요?”
이 사람도 나하고 같은 처지. 프로듀싱 쪽의 업무와는 거리가 먼 사람.
“저는 언니 노래 진짜 좋은데.”
“넌 좀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
“네에…….”
그냥 적당히 곡 하나를 선택해서 밀고 나갈까? 어차피 나야 ‘들을 만한 보컬’을 하나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지 다른 것에는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거잖아. 나야 뭐, 내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저기 유미야. 다른 노래 좀 불러보자.”
며칠 전부터 황유미에겐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계속 말을 높이는 건 저쪽에서 부담된다고 하길래.
“다른 노래요?”
“너 그거 있잖아. 유튜브에서 불렀던 거.”
“아…… 박 팀장님. 진짜 보시는구나.”
“그거 불러봐.”
나는 황유미가 유튜브에서 불렀던 어느 발라드곡을 요청했다.
그건 지난주에 올라왔던 영상. 적어도 그 곡에서는 이런 답답함이 안 느껴졌거든. 그걸 들으면서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애가 왜 내 앞에서는 그런 거지? 하고 의문스러울 정도였으니.
그렇게 황유미는 내 요청에 따라 노래를 시작했는데.
“오오!”
느낌이 다르다.
“헐…… 언니. 진짜 엄청나요!”
유튜브에서 봤을 때에도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애절하더니…… 내 눈앞에서 직접 부르는 걸 들었더니 그 느낌이 더욱 정확하게 와닿는다.
“괜찮아요?”
그녀의 성대가 울림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이 연습실의 공기를 진동시키고…… 그리고 그 소리가 내 귀로 쏟아져 들어온다.
좋은 소리다. 그 소리가 만들어지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이, 그것을 토해내려는 그녀 안에 자리 잡은 감정이, 내 가슴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래. 이 느낌이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싸구려 후크송임에도 불구하고 아련하게 가슴을 적시던 메인 보컬의 목소리.
누구지? 하는 생각으로 당장 검색을 해봤지. 그래서 알게 된 이름. 그게 황유미였는데.
“유미야. 너하고 트로트는 안 맞아. 넌 이런 노래를 불러야 돼.”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들어줄 만한 보컬을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 * *
“박 팀장님. 저는 이런 노래 안 돼요.”
“잘하잖아. 훨씬 괜찮은데.”
“이쪽에는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는 안 돼요.”
그랬더니 정 팀장도 거든다.
“영민 선생님. 그런 발라드는 시장성이 없어요. 그쪽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트로트는 아니다. 전혀 들어줄 만한 보컬이 아니라고. 맞지 않은 옷을 낑낑대며 입고 있는 느낌이야.
파이가 작다고 해서 경쟁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이쪽 분야의 내공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유미 씨는 행사 위주로 뛸 거니까 트로트가 차라리 괜찮아요. 제가 그 두 곡을 괜찮다고 한 것도 분위기 띄우기에 괜찮아서 그랬던 겁니다. 트로트로 하면 제가 스케줄도 꽤 물어올 수 있어요. 발라드는…… 에이, 안 돼요. 그런 건 유튜브에서나 부르는 거죠.”
하긴. 나한테는 곡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선택된 곡을 잘 부르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지.
그런 권한은 정 팀장에게도 없다. 굳이 이 중에서 곡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티스트 본인. 황유미의 선택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어. 그냥 내 의견은 그렇다는 거야. 유미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안 해도 괜찮아.”
나야 뭐, 일개 트레이너에 불과하니까.
가수 본인의 주장이 강하고, 게다가 매니저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의견은 이 정도로 접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보컬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시장성이나 대중성 같은 건 하나도 모르니까.
내가 이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것도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아마도 옳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세요.
꿈속에서 그 여자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
마치 내가 적극적이지 않아서 과거에 실패를 겪었다는 듯이.
나에게도 재능은 충분히 있었지만 적극적이지 않아서 이렇게 머물러 있다는 듯이.
“아까워서 그래. 너한테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내버려 두는 게 말이야. 충분히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게 꽃 필 수 있는 분야가 있는데 그걸 하지 않는다는 게 아깝잖아.”
“저한테 가능성이 있다고요?”
“그 목소리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어.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한다면.”
한 번 크게 실패를 겪었고, 그래도 가수가 되어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자기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해보며 좀 더 경쟁이 약한 다른 장르를 선택했던 사람.
언제나 미소가 깃들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고, 타인에게도 늘 상냥한 사람이지만, 그 속이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너무나 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란 건 생각 이상으로 크다. 겪어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제넘게 나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실패를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꿈속의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나에게 잠재된 무언가가 있는 거라면.
“처음 들어보네요. 그런 말.”
“응?”
“저한테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요.”
그런데 언제나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난 진심이야. 얼마 전 유튜브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에도 역시 보통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네. 고맙습니다.”
생글생글, 언제나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이 점점 옅어진다.
“아무도 저한테 그런 말을 해준 적 없었거든요. 예전에 팀으로 데뷔했을 때도…… 그전에 트레이닝받을 때에도.”
그래. 나도 안다. 좋은 소리 한마디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겪어봐서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얘기가 나와봤자 계약을 이끌어내려는 수작으로 들리기만 했겠지. 입에 발린 말은 처음에만 달콤하지 나중에는 오히려 씁쓸하게 다가오니까.
“고맙습니다. 정말로.”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박 팀장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
“이런 걸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저한테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다고 대답했다.
트로트를 할 때는 평범하게 느껴지던 톤이 애절한 발라드를 부를 때에는 감정이 풍부하게 실린 목소리로 변한다는 말을 덧붙여서.
“그럼 저 해봐도 되는 걸까요? 박 팀장님이 하라고 하시는 거.”
기분 탓인가. 연습실 조명이 그녀의 눈동자로 촉촉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저에게도 잘할 수 있는 게 있는 거라면…… 한번 해보고 싶어요.”
다른 건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의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소리를 다듬어서 가지고 있는 재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김다은의 레슨은 나중으로 미룰 정도로 열띤 대화가 오갔다.
그럼 둘 다 하면 안 돼요? 이런 황유미의 의견은 현실적인 벽에 묵살되었고, 그래도 아티스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정 팀장은 한발 물러선 모습이었고.
늦은 밤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결론은 이렇게 내려졌다.
황유미가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애절한 발라드곡을 하나 받아서 그걸 레코딩해 보자고.
내가 괜히 개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트로트는 영 아니었다. 트로트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거기에 필요한 내공이 있는 거라고.
반면 애절한 발라드를 평소에도 즐겨 부르고 모든 창법이 거기에 최적화된 황유미의 목소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전쟁터라지만 황유미라고 해서 날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업체에 다른 요청을 보냈고 기한은 마찬가지로 일주일로 잡았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가수. 프로듀싱팀에서도 버린 사람. 그 흔한 뮤직비디오 하나 만들어줄 용의가 없다고 하던데.
괜히 개입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잃을 게 없는 위치이기에 겁이 나지도 않았다.
‘한 번 더 근사한 소리를 만들어보자고.’
누군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준다면.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해도 그녀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실패라고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 * *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요청했던 데모도 쏟아질 듯 많은 양이 들어왔다. 트로트 보내달라고 했을 때에는 고작 여섯 곡을 보내주더니 발라드라고 하니까 무려 서른한 곡. 다 들어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내가 황유미에게 필이 꽂힌 건 복고풍의 애절한 발라드였으니까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 곡들은 전부 탈락. 그랬더니 열여섯 곡이 남았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황유미가 소화하기에 버거운 테크닉이 필요하다 싶은 곡들도 탈락.
너무 기교를 과하게 부리면 느낌이 죽어버리니까.
그랬더니 일곱 곡이 남았다.
일곱 곡을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애들 레슨해 주고 나서 시간이 잠깐 남으면 반복해서 또 듣고.
가이드 보컬의 목소리를 지워 버리고 이걸 황유미가 부르는 것으로 상상하면서 계속 들어보고.
서너 곡 정도를 꼽아서 다 같이 의논을 해볼까 했는데
이렇게 반복해서 들을수록 유난히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곡이 하나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던 날’
진부한 제목답게 진부한 선율.
가사의 내용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그날의 설렜던 마음과 지금의 아픈 가슴이 교차되며 노래하는 내용.
작곡가는 블루래빗? 작곡팀인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신인이거나 거의 실적이 없는 작곡가라는 얘기인데.
하지만 이제 자꾸 끌린다. 황유미가 이걸 부른다면…… 내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
그래서 난 이게 괜찮다며 정 팀장한테 들려줬는데
“너무 올드한데요? 느낌이 좀…….”
별로인가 보다.
“이건 우리 감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곡을 선택하는 일은 아무래도…… 김 이사님한테 말을 해볼까요? 여기까지는 우리 둘이서 해왔으니까 곡을 좀 골라달라고 말이죠. 그 사람 감각은 알아주잖아요.”
하지만 나는 이 곡에 꽂혀버렸다.
물론 대중들에게 먹힐 곡을 고르라면 나도 그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정 팀장 말대로 나에게 그런 감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황유미가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곡을 고른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곡을 선택한다면…… 난 이 곡 외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근사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 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오직 이 곡뿐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영민 선생님 뜻대로 할게요. 어차피 회사에서도 신경을 안 써요. 곡을 내든 말든, 그냥 무관심이에요.”
내 주장을 조금 강하게 실었더니 정 팀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의욕적이었던 처음과는 달리 정 팀장 또한 이제는 대충하고 빨리 끝냅시다, 하는 식이었다.
황유미를 바라보는 회사의 시선이란 게 그랬다.
그다지 많은 걸 투자하고 싶지 않은 아티스트. 사장이 목소리 하나 보고 데려왔다지만 투자한 걸 뽑아낼 수도 없을 것 같은 가수.
아무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쟤 여기 왜 왔어?’ 이런 시선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마음이 움직여 버리는 거지.
“이 곡이요?”
“그래. 난 이 곡인 것 같아.”
“다른 곡도 괜찮은 것 같던데…… 어휴, 그런데 전 잘 모르겠어요. 부르라고 주는 노래만 받아서 불러봤지 이렇게 제가 부를 노래를 골라본 적은 없어요.”
“그럼 이 곡으로 하자. 난 듣는 순간 딱 느낌이 왔어. 이건 네 노래야.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잘 부를 수 없고 오직 너 한 명만이 잘 부를 수 있는 곡.”
“제 노래요?”
“오늘부터 하루에 한 시간씩 나한테 시간을 내줘. 난 원래 디렉팅만 맡기로 했지만 발성까지 같이 잡아볼게. 이 곡을 완전히 네 노래로 만들어서 레코딩에 들어가는 거야. 어때?”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기분이라서 그런지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얘가 디지털 싱글을 발매한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그 흔한 홍보 기사 하나 내보내질 않을 것이다. 뮤직비디오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이 곡을 띄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 누군가 이 노래를 듣고서 ‘황유미 이 사람, 노래 진짜 잘하네.’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그건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 * *
여자 아이돌계에 있어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7인조 걸그룹 플라지아. 데뷔 3년차.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원탑이었다. 투탑, 쓰리탑과의 격차도 꽤 있었다.
언론에서는 자극적으로 기사를 쓰기 위해서 세 팀을 같이 묶어서 이 시대의 정상급 걸그룹들이라고 불렀지만 나머지 둘과 플라지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멤버 전원이 비주얼 라인. 곡마다 메인 보컬 자리를 돌아가서 맡을 정도로 가창력 또한 고르게 준수했고.
퍼포먼스의 수준 또한 아주 높은 편이었지만 그걸 라이브로 거의 완벽하게 소화를 해내는 실력파 걸그룹.
7인 7색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멤버들 각각의 매력 또한 분명했다. 누구는 귀엽고 누구는 청순하고 누구는 섹시하고 누구는 세 보이고 누구는 발랄하고…….
데뷔하자마자 대한민국은 손쉽게 정복하고 중국과 일본을 차례대로 손에 넣더니 이제는 범아시아권 그룹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미국 진출을 계획하면서 소속사의 미국 법인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하지만 가장 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멤버 한 명이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팬덤이 크게 흔들렸다.
-세븐 위크! 여섯 번째 주! 남은 참가자는 이제 세 명!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명의 참가자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문제의 멤버를 퇴출시키고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올 멤버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7 Week. 벌써 6주차의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다른 것도 그렇지만…… 얘네랑 겹친다는 게 제일 걱정이네요.”
몬스터 뮤직에서는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신인개발팀장은 이렇게 한숨 섞인 소리를 하곤 했다.
“시기가 딱 겹치죠?”
“처음부터 이게 걱정이었어요. 아마 얘네들 컴백하고 저희 애들 데뷔가 딱 겹칠 겁니다.”
플라지아가 컴백을 하면…… 팬덤은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서 자신들의 아이돌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스캔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니까.
“그럼 피하는 게 좋지 않아요?”
“아뇨. 김 이사님은 일부러 이렇게 일정을 짰어요.”
“일부러? 원탑을 이기고 우리가 원탑을 먹겠다?”
“그런 것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전부 다 이때다 싶어서 여돌팀을 내보내고 있지만, 플라지아가 컴백하는 시기에는 잠잠할 거거든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요.”
그런가.
“그리고 그런 게 좀 있어요. 김인혁 이사님이, 지금까지 미친듯한 감각을 보여줬지만 아이돌 팀은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었거든요. 아무래도 요즘 돈 되는 건 이쪽인데…… 그래서 자기도 이쪽 시장에서 먹힌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고, 뭐 그런가 봐요.”
천재 프로듀서 김인혁은 역시 아이돌 뮤직에도 탁월하다. 이런 걸 보여주고 싶은가 보다.
회사 플랜을 보니까 이번에 여돌 쪽을 시도해 보고 내년에는 남돌 쪽까지 노리는 것 같던데.
“김인혁 이사님도 그래서인지 요즘 아주 예민해요. 어제는 데뷔조 애들 연습하는 데 가서 한참 동안 애들 지켜보기도 하고…… 자기 커리어의 승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하긴 그 녀석, 요즘 연습실에 자주 나타난다. 며칠 전에는 내가 애들 가르치고 있는 곳에도 갑자기 나타나서 괜히 친한 척을 하고 돌아갔었지.
나한테 미안한 게 있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김다은을 한참 쳐다보고 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김다은 노래하는 걸 뚫어져라 보면서…… 생긴 건 꼭 마인부우 같은 녀석이.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플라지아가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고 신곡을 발표한다면 그 시기가 우리 쪽 애들과 겹치게 된다.
비츠걸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몬스터 뮤직의 기획 하에 데뷔하게 될 우리 애들과.
“애들이 걱정이에요. 너무 무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우리 회사에서 팀을 내보내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아직 체계가 없어요. 요즘 연습시키는 거 보면 이러다 애들 잡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현재 시각. 밤 아홉 시. 데뷔조 연습실은 아직도 뜨겁게 연습 중이었다.
“어쩔 수 없죠. 내일은 월말 평가고…….”
그리고 우리 애들도.
평가를 앞두고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습 중이었다.
“다은이는 어때요? 영민 선생님이 맡은 뒤로 애가 눈에 띄게 실력이 늘었잖아요.”
“다은이요? 에이, 그래도 아직은 멀었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다음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내일.
비록 황유미를 담당하느라 바빠지긴 했었지만 다은이의 목소리를 잡아주는 일에는 지난달보다 더 열심히 했었다.
하다 보니까 나도 요령이 생겨서 좀 더 능숙하게 소리를 만들 줄 알게 되었지.
그래서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나 매일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한 번 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내 손을 거치면 얼마나 크게 발전하는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그저께 잠깐 연습실에 들러서 다은이를 지켜보고 간 김인혁 그 녀석도 내내 의미심장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
“능력 있는 트레이너를 모셔왔다고 회사 안에서도 얘기가 많이 돌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게다가 이번에는 다은이 말고도 몇 명 더 개인 레슨을 해주며 목소리를 봐주었다. 내 귀에도 퍽 만족스럽게 들렸으니, 나는 어서 이 성과를 평가받고 싶어서 애가 타고 있었다.
“제가 뭐 하는 게 있나요. 애들이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죠.”
약속했던 석 달이 모두 지난 후에도 나를 내보낼 순 없을 것이다.
자신만만했다. 한껏 예민해진 내 귀가 무엇보다 정확하게 그 성과를 느끼고 있으니까.
* * *
하지만.
월말 평가 당일.
그리고 이른 아침.
김다은은 나에게 톡 하나를 보내왔다.
[쌤. 저 오늘 회사 못 가요.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