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1
1장 세 번째 능력(2)
그녀는 나에게 또 다른 능력을 주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는 세 번째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커다란 선물을 주겠다는 듯이 그 능력에 대해 설명해 줬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쉽게 말하면,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세 번째 능력은 그런 것이었다.
“음악을 비롯해서 모든 문화는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왔고 그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겁니다. 그걸 읽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앞으로 무엇이 유행하게 될 것인지, 지금의 그림대로 흘러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걸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음악하고는 관련이 없다고 했었잖아.”
“네. 맞습니다. 왜냐면 음악에 있어서는 그보다 더 예민한 감각으로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야겠죠.”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중성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이것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현재를 파악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일과 직접 닿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읽어낸 것을 토대로 당신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천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뭘 말하는 건지는 알겠어.”
“문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영화 한 편이 있을 때, 대중들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흐름을 읽어서 그 영화가 어느 정도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지 알게 됩니다. 배급사의 상황과 어느 정도의 홍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파악해서, 그 정도의 관객이 정말로 극장을 찾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내가?”
“공부를 해야겠죠.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일본의 음악에 무지했었고 일본에서 통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낼 순 없었어요. 하지만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면서 일본 음악에 대한 감각을 키웠고, 그것을 두 번째 능력과 연관시켜서 일본에서 통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유아연의 이번 앨범이 바로 그런 맥락 속에 있는 거죠.”
살며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이따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뿌옇게 흐려지기도 했다. 마치 보고 있는 영상이 화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유아연의 이번 앨범이 어느 정도로 통할 수 있을지 당신은 예측할 수 없어요. 아직 흐름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감각에 의해 수록곡들을 대중적으로 잘 만들어냈어요. 막연하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그런 건 알 수 없습니다. 아직 흐름을 읽지 못하니까요.”
막연하게, 성공할 순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도 아니었다.
“세 번째 능력을 가지게 되면 달라집니다. 문화가 변화하는 흐름을 읽어낼 수 있게 되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 흐름의 구조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방금 만들어낸 음악이 어느 정도로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지, 이 가수는 언제까지 폼을 잃지 않고 정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이 연습생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으며 그 재능의 끝은 어디인지,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무슨 말인지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요?”
“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지 납득할 수 없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파악하는 능력. 그래, 이건 수긍할 수 있어. 나는 오랫동안 노래를 해왔고,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가르쳤어. 발성에 대해서도 꾸준히 연구해 왔어. 내가 이쪽에 재능이 있다면 그 정도의 경지에는 오를 수 있다고 납득할 수 있는 거지.”
그녀도 그렇게 말했었다. 첫 번째 능력은 자기 도움 없이도 곧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두 번째, 음악의 대중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이건 여러모로 의문이 드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 감각을 몸에 익히고 나니 수긍할 수 있게 됐어. 만약에 내가 포보이스에서 크게 성공한 뒤 꾸준히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해왔다면…… 그래서 예민한 감각으로 높은 수준에서 음악을 계속해왔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는 거야. 내 과거가 실패로 얼룩지지 않았다면 가능했다는 식으로.”
이것 또한…… 내가 원래 타고난 재능이라고 그녀는 늘 말해왔으니.
“하지만 세 번째는 이해할 수가 없어.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흐름을 읽어서 미래를 예측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고, 내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그걸 발전시켰다고 해도 거기까지 다다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 영화 대본을 척 보고서 ‘이건 8백만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작품이네’ 이렇게 감각적으로 파악한다고? 그건 박영민이 아니야.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래서 말했잖아요. 처음 두 가지는 원래 당신이 타고난 재능을 깨워준 것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당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주는 거라고요.”
“나에게 거절할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거야?”
“네?”
“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지 않아. 진심이야.”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억지로 웃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 * *
“김우진이라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하려고? 그래서 세 번째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뒤를 받쳐주고 있는 규모나 가지고 있는 자원을 볼 때 그 사람을 이기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에요. 그럼에도 무모하게 싸움을 건 겁니다. GH하고는 또 어떤가요? 한 번 이겼다고 마음 놓고 있지 마세요. 그쪽은 사자와 같은 존재고, 사나운 강아지가 매섭게 덤비길래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뿐입니다. 마음먹고 싸우자고 나서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지면서 배우는 게 있겠지. 싸움을 걸었다고? 이걸 싸움이라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야. 내가 어디까지 이길 수 있는지 배운다면 그걸로 됐어. 지금까지는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보고 도전했던 거야. 이기기 위해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진 말아줘.”
“하지만 당장 이번에 들어갈 프로그램부터 문제가 생길 텐데요? 김우진에게 패배하면 당신의 아이들은 이제 어떡하죠?”
“그렇게 되면 그다음 분기에 데뷔시킬 거라니까.”
“그 차이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이번에 이겨서 화려하게 데뷔하는 것과, 패배한 뒤 다음 분기에 조용히 나오는 것. 이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당신이 그렇게나 무리를 해서 끌고 온 아이들의 미래가 이번 승부에서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도.
“두 번째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유미의 곡에 그걸 적용했었지. 그리고 1위를 거머쥐었어. 무명 가수였던 사람을 내 손으로 정상에 올려놨다는 성취감이 있었지만, 그런 성취감이 커질수록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도 함께 커지고 있었던 거야.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의 인생이 나로 인해서 바뀌게 된 게 아닌가 해서.”
그렇다고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투철한 도덕심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치트를 쓰는 게 싫었다. 마치 약물을 사용한 선수가 잘나가는 것처럼.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에서 우연이 이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이, 원래 정상에 있어야 할 사람을 악역으로 몰아버리며 눌러 버리는 것처럼.
“만약에 그런 능력을 얻어서 원래대로면 이길 수 없는 김우진 씨를 내가 이겼다고 치자고. 김우진 씨가 나한테 ‘당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고 말하는 걸 기분 좋게 들어야 하고, 우리 애들은 ‘선생님 덕분에 데뷔할 수 있게 됐어요’ 하고 기뻐하는 걸 흐뭇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잖아. 하지만 그건 치트를 쓰는 거고 약물 먹고 경기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언제나 나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만약에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안 받고 싶어.”
“거절해도 됩니다.”
“두 번째 능력을 얻은 뒤에도 그랬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재능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 시점에서는 숨겨져 있는 것이었잖아. 그래서 그게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지금도 미친 듯이 일하고 있는 거야. 마치 숨겨져 있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꺼낸 것처럼 여길 수 있도록.”
“거절해도 된다니까요. 그럼 가지지 마세요.”
그녀의 새카만 드레스가 방 안의 밝은 빛 속으로 묻혀 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형상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제가 예전에 말했던 걸 기억하세요. 세 번째 능력은 조건부입니다.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당신도 나에게 무언가를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제시하는 걸 말하기도 전에 거부하려고 하니, 얘기를 시작할 이유도 없겠네요. 거절하세요. 그럼 없었던 일이 됩니다. 그래도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의 능력은 그대로 당신에게 머물러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얀빛 속에서 모래알처럼 부숴지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대신 이걸 보고 나서 다시 얘기를 해보죠.”
그 말이 끝나면서 그녀의 모습은 침대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영민아. 그동안 수고했다.”
대머리 본부장이 환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우리 회사가 좀 여유로우면 너하고 계속 같이 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좋은 곳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 몸 안에 들어와 있었지만 내 입은 제멋대로 말을 내뱉었고, 움직이는 것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듣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이 환각과 같은 것이라는 걸, 그러니까 꿈속의 그녀를 만나지 않은 세상의 일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민아.”
마인 부우 녀석도 짐을 정리하고 있는 나에게 찾아왔다.
“미안하다.”
“아냐.”
“이렇게 보낼 거라면 애초에 오라고 하지도 않는 건데.”
“괜찮다니까.”
“자리 잡으면 연락해. 술 한 잔 하자.”
“그래.”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공기조차 다른 것 같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지만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몬스터 뮤직에서 임시직으로 세 달 동안 일한 직후의 일을 보여주었다.
나는 우리 애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서 보고 싶었지만 내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 세상의 박영민이 움직이는 것에 그대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 * *
차성우는 1층 현관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수고했어. 그 학원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좀 있더라고. 잘 말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고맙습니다.”
내가 3개월만 일을 하고 이곳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과 더불어서, 차성우가 잘리지 않았다는 것 또한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차성우가 비츠걸스 데뷔조 멤버 한 명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연습생도 데뷔조에서 탈락하고 다시는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변해 있었다.
아마도 불미스러운 그 일은 벌어졌던 것 같다. 다른 점은 둘 다 잘리지 않고 회사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 역량으로는 데뷔조를 맡기 힘들 것이라고 회사에서 판단한 것 같았고, 다은이는 데뷔하기에 이르다고 봤을 것이다. 내 보컬 트레이닝 능력이 발전하지 않은 세상의 이야기니까.
* * *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어.”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처럼 몬스터 뮤직에서 3달만 일을 하고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이걸 나에게 보여주려는 것일 테다.
그 뒤로 시간은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나는 몬스터 뮤직에서 소개해 준 어떤 학원에 소속되어서, 그곳의 강사로 몇 년을 일했다.
“선생님…… 이게 제 목소리 맞아요?”
“거봐. 내가 시킨 대로 연습하니까 되잖아.”
“신기해요. 어떻게 제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건지.”
‘첫 번째 능력’은 새로운 학원에서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금방 열려주었다. 마치 제작도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소리의 원리가 자세히 보였다. 이 분야에서 오래 일을 했으니 좋지 않은 발성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저기, 박영민 선생님.”
“네?”
“잠깐 할 얘기가 좀 있는데.”
원장이 나를 따로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요즘 일을 하는 것이 어떤지 묻다가, 작년에 입시 결과가 괜찮게 나와서 한동안 학원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것 같다는 얘기도 하고, 힘든 점은 없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부른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었다.
“영민 선생님 급여 말이야, 다음 달부터는 30퍼센트 올려줄게. 고생하는 거 가만히 지켜보기도 그렇고, 열심히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그리고 한 반에 열 명까지…… 열 명을 기본 인원으로 보고 거기서 추가로 들어오는 애들 거는 영민 선생님 인센티브로 넣어줄게.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얼마 전 다른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원장이 그걸 전해 들었는지 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애들을 두고 어떻게 떠나 버리라고.
“서운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알았지?”
이 학원으로 들어올 때부터 기본급을 높게 잡아서 왔기 때문에, 거기에서 30퍼센트가 붙는다면 전혀 서운할 것이 없는 금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내 또래의 연봉과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었다.
학원은 규모가 꽤 큰 곳이라서 안정적이었고, 이만하면 나도 괜찮은 직장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냐고 하면 결코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학원 사무실의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습관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봤다.
‘비츠걸스’. 이 네 글자를 지금까지 수없이 검색란에 넣어보았다.
결과는 늘 같았다.
몬스터 뮤직에서 데뷔한 4인조 걸그룹 비츠걸스는 싱글 두 개와 미니 앨범 한 장을 내고 사라져 버렸다.
방송 출연은 고작 세 번, 음원 차트에는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려보지 못했다.
반년 정도 활동을 했고, 그 뒤로 2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게다가 몬스터 뮤직의 간판 스타인 유아연의 9집 앨범 마저 부진해서, 그곳은 회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츠걸스’
‘한연화’
다른 곳에서 검색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데뷔 첫해에는 그래도 행사를 좀 뛴 것 같았는데 그다음 해에는 그런 소식 또한 들려오지 않았다.
연화가 있는데 이렇게 망한다고?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검색 결과를 보면서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김다은’.
다은이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도 나오는 건 동명이인에 관한 것뿐, 내가 알고 있는 다은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수로 데뷔하질 못했다.
몬스터 뮤직의 사정은 좋지 않으니까 거기서 데뷔하는 건 어렵다고 해도, 왜 다른 회사로 가지 않는 거지? 아니면 다른 회사에 들어갔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그러고 있는 건가?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검색 결과를 계속 뒤로 넘기면 ‘케이팝보이스 1회 우승자 김다은’이라는 기사가 몇 개 보일 뿐.
“영민 선생님, 수업 안 들어가세요?”
“저 이번 타임에는 수업 없어요.”
“아…….”
드럼반을 맡고 있는 강사가 친근한 척 굴며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심각하세요?”
“저요? 제 얼굴이 심각해 보여요?”
“인상을 팍 쓰고 계신데.”
나는 검색 결과가 나와 있는 창을 꺼버렸다.
“옛날 제자들 때문에요.”
“아…….”
“괜찮은 가수가 될 줄 알았는데, 영 신통치 않네요.”
“실력 있는 제자들이 좀 있었나 봐요?”
“있었죠. 진짜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죠. 아무래도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실력 이상으로 운이 필요한 곳이잖아요.”
“운이요?”
고작 운 같은 것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에서는 운이 있었고, 이쪽에서는 운이 없어서? 그럼 그 운이라는 게 내 능력을 말하는 것인가. 내 능력과 아이들의 재능이 만난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당신은 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타고난 두 가지의 재능이 묻혀 있었던 겁니다. 조금만 운이 따라주었다면, 그리고 당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재능은 수면 위로 올라와 당신을 정상으로 올려주었을 것입니다.
* * *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나는 학원에서 보컬 강사를 계속했고, 비츠걸스는 망했으며, 다은이는 가수가 되지 못했다.
아연이는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고, 빅픽처는 데뷔를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몬스터 뮤직이라는 회사는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휘청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사무실로 누군가 들어왔고, 그녀가 들어오자 이곳의 공기가 따뜻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느낌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 혹시 박영민 선생님 계신가요?”
그 질문을 받은 학원의 직원은 나를 손으로 가리켰고,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나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다.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나에게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을 하고 있지. 어떻게 잊을 수 있나.
매일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보는 사람인데.
“나 기억력 그렇게 나쁘지 않아. 너를 어떻게 잊어버리겠냐.”
그렇게 대답했더니 그녀는 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연화야. 어떻게 지냈니?”
다음 타임에 수업이 없었던 나는 연화를 데리고 학원 건물 1층의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밀린 얘기를 나누었다.
연화를 데리고 카페로 들어가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아졌다. 그 시선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우리 쪽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연화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본다고. 이쪽을 향하는 표정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어디에 계신지 한참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의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회사에서 이 학원을 소개해 줬다는 걸 왜 모르고 있었는지. 회사에 물어보니까 바로 답이 나오더라고요.”
표정은 밝아 보였다. 연화는 반가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눈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러나 몬스터 뮤직에 있을 때 연화와 나의 접점은 얼마 없었다. 언젠가 한 번 찾아와서 다은이에 관한 것을 물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 사람이 데뷔조로 올라오면 아마도 제 자리를 빼앗을 것 같아요.
그것이 두려워서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지나치다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그리고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당돌하게 여겨져서 한바탕 따끔하게 혼을 내버렸다.
부끄러운 듯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한테,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 버렸던 것이다.
그걸로 이 아이와의 관계는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연화는 며칠 뒤 찾아와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데뷔를 앞두고 벼랑 끝에 내몰린 듯해서 그릇된 생각을 한 것 같다고.
연화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단 두 번의 마주침. 연화는 데뷔를 했고 나는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찾아올 만큼 각별한 관계였나 하고 물으면, 그렇지 않았다는 대답이 얼른 나올 정도였다.
“제가 찾아와서 이상하시죠?”
본인도 그걸 아는지 그렇게 물었다.
“아니야. 찾아와 줘서 고맙지.”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단 두 번의 마주침이 전부였던 사람에게.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왜?”
“그냥요.”
나한테 배운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무언가를 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날 사무실에서 저를 막 혼내셨잖아요.”
“아, 그때.”
“이상하게 힘들 때마다 그 말씀이 떠오르는 거예요. 가수가 된다는 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처신 제대로 못 하면 주저앉게 될 거라고, 저 혼내셨던 거요.”
“설마 복수하려고 찾아온 거야? 감히 네가 나를 혼내? 뭐 이런 걸로.”
“아니에요!”
연화는 마시고 있던 아이스티를 황급히 내려놓으며 손을 저었다.
“그때의 울림이 참 오래 남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아무도 저한테 신경을 안 써줬잖아요. 회사에서는 알아서 잘하는 애라며 그냥 내버려 뒀고, 부모님도 제가 꾸준하게 하면 잘될 거라면서 마치 남 일 대하듯이 말씀하셨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느낌이었어요. 저 혼자 탈 수 있는 배를 타고서, 잔잔한 물 위에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어디론가 가 보겠다며 노를 저어봤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바람이 불면 거기에 의지해서 둥둥 떠다니는 거예요. 어쨌든 어디에는 닿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며 연화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던 음영 속에서 깨끗한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가 다시 가려졌다.
“단지 한 번 혼난 것뿐이었지만, 느낌이 달랐어요. 이분이라면 저를 단단하게 이끌어주실 텐데. 아무것도 고민 안 하고 이분이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올바른 항로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계속 생각났어요. 데뷔하고 나서 활동이 어려워질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
“팀은 어떻게 됐어?”
“깨졌어요.”
“해체한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저는 탈퇴했거든요.”
“아…….”
“그것 때문에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소송 걸어서 법적으로 다툴 것 같고…… 저는 계약 기간이 남아 있잖아요.”
계산을 해봤다. 3년 계약을 했다면 이제 남은 기간은 반년 정도?
“다른 곳으로 가는 거야?”
계약이 반년 남았는데 소송을 걸었다면 이런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연화를 좋은 조건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몬스터에서는 남은 기간이 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문제를 삼고.
아무래도 연화만 한 재능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서로 붙잡으려고 붙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뇨. 저 가수 안 할 거예요. 지긋지긋해요. 다시는 그쪽 세상으로 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일이 아니었다.
연화는 얼마 전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은 뒤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왔다.
* * *
“정말이야?”
“네.”
맙소사,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처음에는 저희를 도와주려는 것처럼 접근한 사람이었어요. 잘될 것 같은 팀인데 뜨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면서, 저희를 후원하고 싶다는 식이었죠. 갑자기 비싼 선물을 숙소로 보내와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좋은 말 해주는 걸 보고 저희도 편하게 생각했어요. 그때는 뭘 해도 다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라서, 작은 칭찬 하나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어요.”
연화는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을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렇게 식사 자리에 몇 번 나가고, 선물도 계속 받았어요. 저는 그게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랐어요. 옷이나 화장품을 제가 사본 적은 없었잖아요. 메이커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나중에 알게 된 후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포장을 풀지도 못했어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다가 언젠가 한 번, 가볍게 밥을 같이 먹자는 자리가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술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던 연화는 그런 장소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매니저가 찾아와서 나머지 셋을 데리고 나가고, 연화에게는 좀 더 남아 있으라고 했다. 그때 느낌이 딱 왔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그런 거구나, 하고.
“그 사람하고 저하고 둘이 남았는데…… 갑자기 울음이 막 터졌어요. 결국 이런 곳에 오기 위해서 열 살 때부터 쉬지 않고 해왔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아무도, 진짜 단 한 명도 저를 이끌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요.”
연화는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지긋이 구겼다.
“혼자 남은 그 자리에서 펑펑 울다가, 화장이 다 지워져서 고치고 오겠다고 했는데 나가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제 손목을 꽉 붙잡고 놔 주질 않아요. 그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되는 대로 말을 막 내뱉으면서 빽빽 소리를 질렀어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어요. 저 자신한테, 그리고 그 상황 때문에도. 그랬더니 나가는 저를 막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도망가 버렸죠.”
테이블 위 한구석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연화는, 그때의 그 광경에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가수를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팀에서 탈퇴하겠다고 통보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그만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너무 싸늘하게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알았다.’ 하고 딱 한 마디만 하셨는데 거기서 더 이상은 제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고 이런 걸 견딜 순 없다는 말도 하고 싶었는데, 그런 얘기는 꺼낼 수도 없었어요. 아마 뜨지 못했으니까 힘들어서 관두려는 걸로 아셨겠죠.”
“원래 그렇게 대화가 없었어? 어머니하고?”
“저는 회사에만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아빠하고는 더 서먹해요.”
연화의 아버지는 얼마 전까지도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제야 조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화의 어머니는 대기업에서 무역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시기에도 강사에 머물러 있었던 아버지 때문에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짊어지고 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독종 같은 집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취해내는 사람이었다.
업무량이 많은 걸로 알려진 종합상사에서,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부장을 달았다고 하니 사회에서 어떤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가정에서는 어떤 어머니일지 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짐작을 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만두려고 했었는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이런 얘길 선생님께 한다는 게…….”
“괜찮아. 편하게 얘기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고 한다. 팀을 탈퇴하겠다고 했더니 회사에서는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앞으로 비츠걸스를 어떻게 할지, 연화에게 어떤 지원을 해줄 것인지 나름대로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서 10년 동안 쌓아온 것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사람과, 10년 동안 투자한 것이 있어서 쉽게 놓아줄 수 없겠다는 쪽과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연화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람 말이에요. 저한테 접근한 그 이상한 사람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회사로 연락을 할 때 본부장님을 찾았다고 해요.”
“아, 그 대머리 본부장님?”
“예.”
그리고 그 대머리 본부장에게는 어려운 가정사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점점 쪼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선에서 일을 처리해 주는 대가로 아마도 무언가를 받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확실해? 그 얘기?”
“네. 그 사람한테 직접 들은 얘기예요. 자랑처럼 저한테 떠벌렸어요.”
목구멍까지 욕이 차오른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진짜 아무도.”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연화의 두 눈이 점점 촉촉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분이 아닐까. 그나마 그분을 알게 된 것이 이 회사에서 얻게 된 유일한 소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선생님을 떠올렸어요. 우습죠? 겨우 두 번 정도 얘기를 나눴던 게 전부인데요.”
“그래서 나한테 온 거야?”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건 아니고, 무언가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단지 선생님을 만나서…….”
“어떤 건지 알아.”
“그냥 왔어요. 여기로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요.”
“잘 왔어.”
잘 왔다는 말밖에는 해줄 수 없었다.
“그래. 잘 왔어.”
* * *
환상에서 빠져나오며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왔던 일도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그 사람은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서 본부장을 찾았다. 내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 대머리 본부장 이름을 대면서 나를 찾은 것이었다.
내가 능력을 인정받고 본부장의 자리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전화를 대머리 본부장이 받게 되었다면 이렇게 된다는 얘긴가?
본부장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아내가 아프다고 했던가. 그래서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있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팔아먹어? 아직까지도 속에서 끓고 있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환상처럼 내 눈앞에 보였던 이야기는 거기서 조금 더 진행된 후 끝나 버렸다.
그곳에서의 연화는 스물세 살, 이곳에서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새로운 걸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연화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기 인생이 나아갈 길로 단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으니,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연화는 내가 있던 그 학원의 강사로 들어왔다. 연습생을 오래 했던 것과 한 차례 데뷔했던 경력이 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그 학원에서의 내 입지는 무척 탄탄했기에 내가 꽂아 넣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즐거운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연화와 나는 자주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럴 때마다 연화는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야경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서 둘이 함께하고 있는 시간은 얼마 전의 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전부야?”
“더 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다은이는? 다은이는 어떻게 됐어?”
“가수를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공부를 했죠.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방금 봤던 그 시점까지 입학은 못 했지만요.”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린 거야?”
“쉽다고 말하지 마세요. 남의 인생이라고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겪었던 고민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어요. 그래도 한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우승했다는 추억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 버린 거예요.”
“알잖아? 아이돌 보컬 중에서 다은이 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이 살아온 현실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당신을 만나기 전에도 다은이는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었어요. 죽었던 그 친구는 다은이의 삶에서 단 한 명뿐인 친구였습니다. 여기서는 그걸 딛고 일어서서 자기 목소리를 완성하고 있지만, 그럴 수 있는 동기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에너지를 잃은 가냘픈 소리밖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겁니다.”
“유미는? 왜 유미 얘기는 나오지도 않은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황유미의 일을 맡게 된 박영민은, 몬스터 뮤직에 들어오자마자 두각을 드러낸 박영민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그녀를 맡아줄 사람은 없어요.”
“그럼…… 채아는?”
“당신하고는 만날 일도 없었죠. 비츠걸스는 완전히 망했어요. 채아가 있었던 프론트 페이지가 차라리 더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건 현실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마치 주문을 걸듯이 속으로 되뇌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이지만, 지나쳐온 모든 일이 생생하게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내가 그걸 실제로 겪은 것처럼. 그런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건 당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자신이 알고 있었다.
떨쳐 버리고 싶은 현실감이 소름처럼 내 피부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면 남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일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방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는 사족을 붙이듯이 그런 말을 꺼내었다.
“영민 씨, 저는 당신을 도우려는 겁니다.”
* * *
카톡! 그리고 카톡! 카톡! 카톡!
그 소리가 잠을 깨웠다.
[그래서 저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너무 속상해서.] [선생님?] [주무세요?] [오늘은 일찍 주무시네요.]연화에게서 온 메시지가 줄줄 이어져 있었다.
대화창을 열자 연화의 메시지 뒤에 붙어 있는 1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 확인하셨네요.] [어.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PC 앞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꿈의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인지, 두들겨 맞은 것처럼 등이 뻐근했다.
메시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드라마 촬영 중인데 연화의 대사 몇 개가 부자연스러워서 그 씬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화가 맡은 역할은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라서 표정은 그냥 굳히고 있으면 돼서 어려울 것이 없는데, 대사 처리가 미흡해서 자꾸 재촬영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분량으로 치면 얼마 안 되는 걸 가지고 계속 끙끙대는 것이라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고 했다. 어쩐지 스탭들과 다른 배우들도 다소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서.
[제가 깨운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아니야.]시간을 확인해 보니 자정이 한참 지나 있었다. 몇 시부터 시작된 촬영인지 모르겠지만, 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끝나서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 그러면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문자로 대화하면 어떤 느낌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내가 전화할게.]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었을 때, 연화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받았다. 아마도 주위를 의식한 듯싶었다.
조금 전까지 카페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스물세 살의 연화와는 느낌이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