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4
4장 MYTH(2)
음악 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건 내가 스물일곱 살이었을 때였다. 겨울이었으니까 스물일곱 살에서 스물여덟으로 막 넘어가려고 했던 그때.
이거 해도 안 되고 저거 해도 안 되고, 그래서 군대에 갔다 왔다가 다시 도전을 해보려는 참이었는데, 돈은 벌어야 할 것 같아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소개받게 된 학원이었다.
내 딴에는 빨리 가수가 되어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기에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나이에 돈 한 푼 못 번다는 자괴감도 무척 심했기 때문에 꾹 참고 일을 했었다.
그래도 학원에서는 나름대로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가수로 데뷔했던 경력이 있고 게다가 히트곡도 한 곡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 곡의 후렴을 부르면 ‘아! 이거! 정말로 이거 부른 가수예요?’ 하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드라마 OST를 부른 경력도 있으니 동네 학원의 보컬 강사로서는 굉장한 하이 스펙이었던 것이다.
보컬반에 처음 배정되었던 날, 원장이 나를 데리고 가서 학생들에게 소개했었던 일도 아직 생생했다.
“여기 박영민 선생님은 포보이스라는 팀의 메인 보컬을 맡았던 분이고…….”
아이들은 동경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 마치 용의 꼬리를 포기하고 뱀의 머리가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학원 일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박영민 선생님은 그런 쪽에 좀 둔한가 봐.”
“예? 뭘요?”
“아니, 진짜…… 하나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야?”
기타반의 선생님이었다. 헤비메탈밴드 출신이라서 고운 생머리를 가슴팍까지 기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날 유난히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뭔데요?”
“방금 걔 말이야.”
“수진이요?”
“어, 그래. 진짜 모르는 거야?”
“수진이가 왜요?”
“여기 들어올 때부터 두 눈에 하트를 그리고 들어오는데 진짜로 감이 안 와? 왜 이렇게 둔해?”
수진이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었다. 스물두 살. 수강생의 절반 이상이 실용음악과 입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학생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수진이가 왜? 아까 나눠준 교재에서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다면서 질문하러 온 거였는데.
“난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답답하네. 수진이가 영민 선생님을…… 아니, 됐다. 설마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안 해본 건 아니겠지?”
“저요? 저야 뭐…….”
그런 건가? 하고 생각해 봤다. 수진이가? 정말로? 난 까맣게 몰랐는데.
“둘이 은근히 잘 어울려. 한 번 잘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수강생하고 무슨.”
“어휴, 진짜 왜 이렇게 답답하냐. 수진이 정도면 얼마나 괜찮아. 이쁘고 착하고. 둘이 몇 살 차이 나지? 다섯 살? 그럼 딱이네.”
그런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수진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어서인지, 얘가 나를 어떤 감정으로 대하는 것인지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을 때, 이따금 나를 찾아올 때에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만약에 내가 학원 강사라는 자리에 만족하고 여기에서 내 인생을 다시 출발시키려고 했다면 연애를 하는 것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가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학원에 있는 것은 단지 움츠리고 있는 동안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니, 어서 이곳을 떨치고 나가 날아오를 수 있기 만을 바라고 있었다.
[진짜예요?] [어.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냐?] [진짜 여자 친구 없으신 거예요?] [그렇다니까.] [ㅋㅋㅋㅋㅋㅋ] [왜?] [아뇨, 그냥] [쌤 그럼 이번 주말에 뭐해요?] [왜?] [그냥요] [인영아.] [네?] [선생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주말 잘 보내고.] [쌤 잠깐만요] [왜] [전 그냥 쌤하고 더 친해지고 싶어서] [월요일에 보자.]이런 일은 그 뒤로도 종종 있었다.
누군가에겐 부러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는 별로 달가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른을 넘어서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오오…….”
“왜요?”
“7년 전이었나, 영민쌤 우리 학원 들어왔던 거.”
“그렇죠. 7년 전인가, 8년 전.”
“그때는 사람이 진짜 허술해 보였는데.”
“또 왜요? 무슨 소리를 하려고.”
“지금은 철벽 치는 거 장난 아닌데.”
“…….”
“애가 선을 넘으려고 하는 순간, 그때 딱! 철벽 치는 거 봐. 그 둔했던 박영민 선생 맞아?”
“저 또래 애들은 다 비슷비슷한 거 같아요.”
여기에 안주하기로 오래전부터 결심한 기타 선생과는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되기도 했다.
“근데 영민 쌤 아직 애인 없잖아.”
“그건 또 왜요?”
“쟤…….”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교복 입고 다니는 애랑 무슨 짓을 하라고.”
“내년이면 졸업하잖아.”
“그냥 혼자 미치세요.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나는 싱글이었다. 연애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이 고개를 숙이며 꺾어지고 있을 때였고, 대신 다른 사람이라도 무대로 올릴 수 있다면 내 절망감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러다가 몬스터 뮤직으로 들어와서 제작자가 될 수 있었다.
내 손으로 가수를 키워서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위치가 되었는데.
“정신 차려.”
연화는 열이 오르고 있는 사람처럼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꾹 깨물고 있는 모습이, 이제까지 수없이 봤던 것이지만 유난히 애처롭게 느껴졌다. 내 말에 돋아 있는 가시가 오히려 내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오늘 얘긴 못들은 걸로 할게.”
* * *
메인 스튜디오 현장에는 여덟 명의 연습생들이 모여 있었다. 데이바이데이 네 명, 레드애플 네 명. 그리고 MC는 무대에 서 있는 애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자, 이제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갑니다.”
MC는 공중파 아나운서였다가 얼마 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 사람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몇 개를 진행한 경력이 있어서 진행 능력은 이미 신뢰를 얻은 사람이었고, 아나운서답게 발음이 또박또박해서 그의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 입술을 꾹 다문 채 긴장감이 주는 무게를 간신히 견디고 있는 여덟 명과 대비가 되어서 그런지 MC는 유난히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여러분들의 데뷔는 마지막 다섯째 주의 대결 결과에 따라서 결정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대결들에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가 진행되는 동안 매주 두 팀 간의 대결이 있을 것이고 이 결과에 따라 승자에게는 혜택이, 패자에게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놀란 아이들은 그 감정이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토끼처럼 커다랗게 뜬 두 눈으로 같은 팀 멤버를 마주 보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먼저 승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각 회사에서 지원을 나온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가 여러분들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꾸며주고 있었는데요, 앞으로 있을 대결에서 승리를 한다면 저희 제작진이 섭외한 특별한 전문가들이 여러분들의 스타일을 꾸며줄 것입니다.”
그러면서 MC는 여기에만 제작비가 수억 원 투입되어 있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스페셜리스트들이 투입될 것이고, 의상 제작비에도 충분한 비용이 잡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쉽게 말해서, 대결에서 이긴다면 한눈에도 차이가 보일 정도로 매력적인 스타일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이들은 ‘오!’ 하는 얼굴로 감탄을 하고 있었지만 반응이 생각보다는 밋밋했다. 이 혜택이 얼마나 큰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 회사와 아이즈에서는 스탭들을 투입해서 애들을 꾸며주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 팀의 스타일을 결정짓는 것만 해도 회의를 반복하며 여러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일인 만큼, 매주 대결이 펼쳐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애들을 완벽하게 꾸며주는 일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걸그룹의 명가라고 불리는 아이즈의 스탭들은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이 역시 며칠 만에 아이들의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건 버거운 듯 보였다.
하지만 이걸 돈으로 해결한다면…… 당장 패션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거장이 참여하는 것부터 군침이 당기는 일이었다.
아이즈나 GH에서도 한 번 모시기 위해 공을 들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의상 제작비까지 넉넉하게 지원된다는 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메리트였다.
메이크업과 의상에서 출발선이 달라져 버리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특히 걸그룹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마치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을 비교하는 것처럼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패배한 팀에게 주어지는 페널티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다음 주에 펼쳐지는 첫 번째 대결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패배한 팀은 예고편에서, 그리고 그다음 주 방송의 초반 30분에서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아이들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서 같은 팀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지? 하는 듯이.
“예고편과 그다음 주 방송의 초반부에서, 패배한 팀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송은 한 주에 두 시간 분량으로 나가게 된다.
이 중 30분에서 지워진다는 것은 4분의 1이 날아가는 것이다.
남은 4분의 3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건 노출도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목도가 가장 높은 예고편에서 아예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건…… 패배하면 그냥 찌그러져 있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두 시간의 방송 분량에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분량은 미리 녹화를 해둔 것이 나간다. 두 팀이 연습을 하는 과정, 이것에 대한 프로듀서들의 인터뷰 등등.
남은 시간은 두 팀의 무대가 펼쳐진다. 대결을 위해 일주일 동안 준비한 것을 보여주는 무대. 그리고 그다음에는…….
“먼저 말씀드렸듯이 승패는 사전 투표 20점, 심사위원 점수 20점, 시청자 점수 60점으로 결정이 됩니다.”
실시간으로 점수가 집계되며 그걸 바라보는 양 팀의 모습은 생방송으로 나가게 된다.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3주차까지는 이렇게 승패가 결정되고, 방청객들이 입장하는 4주차와 마지막 회에서는 심사위원의 점수가 빠지고 오직 팬들의 점수로만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MC는 잔인한 사실을 한 번 더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팀만이 데뷔를 하게 됩니다.”
* * *
아이즈 프로덕션의 조 팀장은 그늘이 짙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조사를 좀 해봤는데, 아직은 균형이 안 맞아요. 몬스터 뮤직 쪽에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아직 멤버 네 명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데이바이데이는 멤버 네 명 캐릭터가 벌써 잡혀 있고 팬층도 깊어요. 초반에는 8 대 2 정도의 차이에서 간격을 점점 좁히다가 마지막 회에서 박빙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이러다간 원사이드 게임으로 끝날 수 있겠습니다.”
이건 처음부터 우려하고 있던 부분이라 의 초반은 우리 애들을 노출하는 것 위주로 가려고 했다. 내가 요청하지 않아도 제작진에서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게 오히려 후속 프로그램인 에게는 악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치트키를 좀 쓰죠. 비츠걸스 좀 데려와 주세요. 원래 구성안으로 가면 3주차에서 선배들의 도움을 받는 걸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간 레드애플에게 너무 불리하겠어요. 비츠걸스 후속 그룹이란 걸 강조하면서 연화가 전면에 나서면 주목도가 달라질 겁니다. 요즘 제일 핫하잖아요. 비츠걸스하고 연화가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비츠애들은 콘서트 준비 때문에 회사에 계속 있으니까 시간 맞춰볼게요.”
“잘됐네요. 섭외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섭외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옆 방에서 연습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다른 것에 있기는 하지만.
“그럼 내일 곧바로 몬스터 뮤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비츠걸스도 같이 시간 잡아주시면 좋겠어요. 사전 미팅에 참석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 *
“그래서 이번 주 금요일에 하려고. 괜찮겠냐?”
“무조건 시간을 내야지. 우리 뚱뚱이 사장님께서 집들이를 하신다는데.”
인혁이는 굳이 내 방까지 찾아와서 그런 부탁을 했다. 금요일에 집들이를 할 거니까 와 달라고.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를 내 옆으로 당겨와서 앉아 있었는데, 이 녀석이 앉아 있으니 의자가 위태로워 보였다. 아래로 힘을 주면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을 정도로.
“너하고, 우리 직원들 몇 명만 부르려고.”
“그래.”
인혁이는 얼마 전 이사를 했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다가 독립하게 된 것이었다.
분당에 집을 얻었다고 했다. 회사하고 가까워지니 출퇴근이 편해질 것 같다면서,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는 어떻게 되어가냐? 잘될 것 같아?”
인혁이는 의 포스터를 보며 물었다.
“스타트 라인이 똑같으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봤는데…… 상대가 너무 거대해졌어.”
“내가 보기에도 그렇더라고. 그저께 방송 보니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기는 한데.”
“정 안 되면 이번에 진 다음에 5월 데뷔로 가자고. 여기서 인지도 쌓은 걸 기반으로 몇 달 동안 애들 노출 더 시키고 그러면, 5월 데뷔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어.”
“빅픽처를 한 번 더 돌린 다음에?”
“그렇지.”
김인혁은 의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다가 벽에 걸려 있는 빅픽처의 브로마이드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가능성은 있어. 데이바이데이는 아이즈에서 나온 애들답지 않게 이번엔 완성도가 떨어져.”
“좀 그렇긴 했어.”
“메인 보컬 한 명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나긴 한데, 나머지 셋은 아직 더 연습해야 되는 애들이야. 아이즈에서 자체 분류한 기준에도 1군 연습생에 들어가는 애들은 아니었나 봐. 지난 프로그램에서 스토리를 잘 타서 여기까지 온 거지.”
“걸그룹이야 메보 하나만 잘해도 되잖아.”
“우리 애들하곤 비교가 될 거야. 지난번 방송 봤다니까 알 거 아냐. 우리 애들은 포지션도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고 조합이나 밸런스에서 상대보다 훨씬 좋아. 근데 상대는 그냥 4위까지 커트해 버린 거라서 팀으로 보면 단점이 많더라고.”
“하긴 두 팀 번갈아서 무대 올린 거 보니까 차이가 확 나긴 하던데.”
김우진이 당장 뛰어 내려가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 이해될 정도로 데이바이데이의 퍼포먼스는 형편없었다.
팀의 에이스인 장세은이 너무 뛰어나긴 했지만 그것도 받혀주는 멤버들이 있어야 할 때 빛이 나는 법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거긴 여자애들 키우는 데 도가 튼 회사잖아. 뭐 생각이 다 있으니까…….”
“남일 대하듯이 말하지 말고.”
“아니, 우리는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잖아. 우리 애들 그냥 데뷔시켰으면 묻혀 버렸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먼저 나서서 경쟁해 주느라 인지도를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 회사에서 일본 쪽으로 길을 열어줘서 아연이 잘나가고 있고…… 너 이번에 큰일 했어. 인정한다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난 대만족이야.”
부우 녀석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이 웃을 때에는 눈이 사라진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따라 웃게 되어버린다.
“그쪽 프로듀서하고 어울리는 것 같길래 왜 그러는 건가 했는데…… 이 정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적당히 단념하고 우리 애들은 5월에 내보내자?”
“거기서 이겨 버리는 것도 그림이 좋진 않아. 그쪽에선 우리를 파트너로 생각하고 이 정도로 도와주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이겨 버리기까지 해서 그 회사 앞길에 재를 뿌려 버리면 그것도 좀 그렇잖아.”
“뭐가 재를 뿌리는 거야. 만약에 데이바이데이가 져서 서아리가 데뷔 못 할 일이 생겨 버리면 들고 일어나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걸.”
“아, 걔…… 사정 참 딱하더라.”
“아즈사인가 걔도 귀엽다고 난리가 났고…… 김우진 씨는 졌을 경우 데뷔 안 시키겠다고 딱 잘라 버렸지만 그랬다간 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박본 너는 이겨 버리고 싶다는 거 아니야. 내가 만든 애들이 더 뛰어나다. 뭐 이런 거?”
“더 뛰어난 게 사실이야. 실제로 그래. 훨씬 더 잘하고 훨씬 더 매력 있어.”
“그거야 우리 박본이 심혈을 기울여서 하나하나 모았던 애들이니…….”
그러면서 김인혁은, 계속 이 얘기를 하는 것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인지 거기서 이 얘기를 끝내 버렸다.
“아무튼 금요일에 꼭 와라.”
“간다니까.”
“자고 가도 돼. 너 어차피 혼자 사니까 괜찮잖아.”
“그래. 아…… 그런데 나 잘 데는 있냐? 오피스텔 아니야?”
“아파트로 들어갔어.”
“그래?”
아파트에? 그러고 보니 전에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결혼도 생각해야 하니까 독립하는 김에 아파트로 들어간 거지.”
“결혼? 여자도 없으면서 집부터 장만하면 어떡하라고.”
“아…… 금요일에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녀석은 우물쭈물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나 만나는 사람 생겼어.”
“아, 그래…… 뭐? 잠깐만, 뭐라고?”
“그때 오면 자세히 얘기해 줄게. 오랜만에 밤새 떠들어보자고.”
“누군데?”
“그날 얘기해 줄게.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너한테 말도 못 했다.”
부우 녀석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데스크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 * *
비츠걸스는 이번 콘서트 준비를 하면서 의 안무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
안무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지구력이 필요한 콘서트에서는 무리일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은 몽환적인 곡의 사운드와는 달리 안무는 전반적으로 파워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곡이 느슨한 만큼 안무에서 힘을 실어주는 동작을 만들어서 곡의 리듬감을 살려보려는 것이었다.
자반뒤집기처럼 공중으로 뛰어올라서 몸을 접으며 한 바퀴 돌려서 내려오는 동작도 있었고, 손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바닥을 짚고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도 들어가 있었다.
으로 활동할 때에는 이런 고난이도 안무 때문에 실력파 걸그룹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지만 콘서트에서는 장시간 공연을 하다가 이런 어려운 동작을 하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동작을 간소화하고 좀 더 쉽게 가는 쪽을 선택했는데.
“너희들은 그 안무를 완벽하게 보여줘야 돼. 지난 월말 평가 때도 했던 거니까 할 수 있겠지?”
레드애플에게는 원곡 그대로의 안무를 요구했다. 다음 주에 대결을 펼칠 곡으로 우리는 을 선택했다.
“네!”
“대답만 잘하지 말고, 연습을 똑바로 하라고.”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선생님, 애들 봐주지 말고 엄하게 연습시켜주세요.”
안무 트레이너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번 주부터 가 끝나는 주까지, 안무 트레이너에게는 페이를 더 주면서 특훈을 요청했다.
매일 두 시간씩, 별도의 레슨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5초 안에 승부가 나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동작 몇 개를 보여준 것만으로 시청자들을 확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네!”
“대답만 크게 하지 말고.”
경연 순서는 데이바이데이가 먼저 하고 그다음에 우리가 하기로 했다.
경연 특성상 나중에 보여주는 팀에게 어드밴티지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제작진 쪽에서 우리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중에 나온 우리가, 동작 몇 개를 보여준 것만으로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어지는 보컬에 대해서는 오히려 걱정이 없었다. 청량감이 느껴지는 연화의 보컬과는 달리 허스키한 톤의 채아가 그 자리를 메우니 곡의 느낌이 전혀 달라져 버렸다. 소속사 선배의 곡을 커버한다는 걸 보컬로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매일 점검해 줄 거니까, 내일 이 시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해봐.”
“어? 선생님 내일도 출근하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주말이라고 쉴 틈이 어디 있냐.”
이날 저녁에는 인혁이 집들이가 있었고, 녀석은 밤새 놀아보자고 벼르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단 하루도 그냥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애들 좀 빡세게 연습시켜 주세요.”
“걱정 마세요. 저도 이겨보고 싶어요.”
그렇게 자신 넘치는 대답을 해준 안무 트레이너를 믿고서, 나는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자! 자! 시작할 거니까 다들 여기 모여봐.”
그리고 복도에서도 잘 들리는 트레이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 좋게 들려왔다.
* * *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주소를 받고 지도에서 찾아보니 나도 모르게 관심은 거기로 가버렸다.
인혁이 녀석이 오늘 집들이를 위해 찾아오라면서 주소를 나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분당에 위치한 브랜드 아파트, 그리고 면적이 145.9제곱미터. 이 정도면 얼마나 큰 거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세는…….
속물처럼 그런 걸 검색해 본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대략 파악해볼 수 있었다.
나도 뭐, 대출 조금만 받으면 이 정도야.
아니, 아연이 일본 앨범 건을 정산받으면 가지고 있는 현금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영민아, 그러면 이따 와라.”
“그래. 그런데…… 가면 볼 수 있는 거야?”
“뭐를?”
“예비 신부 말이야.”
“예비 신부?”
녀석은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숙여 한참 웃었다.
“아직 결혼 얘기 나오지도 않았어.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니까.”
“너는 결혼 생각이 있는 거 아냐. 집까지 장만하고.”
“나야 뭐……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저녁에 도착하니 신축 아파트 단지라서 그런지 조경이나 구조가 깔끔하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초저녁이었지만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캄캄해진 하늘 아래로 단지 안은 가로등이 내려앉아 화사한 빛이 밝히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곡팀 직원이 보였다.
여덟 명을 초대했다고 하던가. 대부분 인혁이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1팀장처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초대하지 않은 듯했다.
“웬 기타예요?”
내가 트렁크에서 하드 케이스를 꺼내고 있었더니 작곡팀 직원이 다가와서 그렇게 물었다.
“집들이 선물이요.”
“엥? 선물로 기타를 하시는 거예요?”
“뭐, 비싼 건 아니고요.”
“어쿠스틱 기타?”
“네.”
나일론 기타였다.
전에 인혁이가 나왔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집 안의 모습이 살짝 보였던 적이 있는데, 스틸 기타는 있는데 나일론 기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좀 의미가 있죠.”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나하고 인혁이한테는 나름대로 추억이 있는 악기라서 이걸 준비하고 있었다.
현관 앞까지 찾아갔더니 그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뚱뚱한 녀석이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자마자 안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혹시 애인도 와 있나 해서. 오는 내내, 도대체 누구하고 만나는 건지 애가 탈 정도로 궁금했다.
여자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어? 저 사람인가?’ 하며 주의 깊게 봤지만 전부 다 우리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건 뭐야?”
“기타.”
“기타는 왜?”
“집들이 선물.”
“이게?”
그래도 퍽 마음에 들었는지 녀석은 화색을 밝히며 케이스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열어보며 광이 번쩍번쩍한 바디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야, 진짜 고맙다. 이거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뚱뚱한 녀석이 기타를 배에 올리고 연주하는 시늉을 하고 있으니 꼭 우쿨렐레 같아 보였다.
“지금이야 연습생들도 원하면 DAW를 접할 수 있잖아. 와서 배우고 싶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하지. 근데 우리 때는 그런 게 없었어. 시퀀서 프로그램 어디서 구해서 몰래 혼자 배우고 그랬다고.”
부하 직원들 앞에서 김인혁은 라떼는 말이야 라고 실컷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연습실에 기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이런 거였어. 나일론 줄이었다고.”
인혁이는 바닥에 앉은 채로 기타를 배 위에서 끌어안고 줄을 퉁퉁 튕겨보았다.
“이걸 가지고 영민이랑 둘이서 곡을 만들었던 거야.”
“아…… 아까 박 피디님이 의미 있다고 하셨는데 그런 이유였군요.”
“소리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멜로디도 부드럽게 뽑혔어. 대신 신나게 스트로크를 할 수 없으니까 리듬은 좀 약했지. 그래서인지 완성된 곡도 전반적으로 부드러웠어.”
“그 곡이……?”
“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히트곡.”
그러면서 녀석은 어설픈 솜씨로 그 곡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했다. 후렴의 멜로디를 느릿느릿, 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곡은 두 분이 같이 쓰신 거예요?”
“거의 그랬지. 작업 방식이 좀 특이했는데, 보이싱을 먼저 마쳤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멜로디도 같이 작업했는데 내 마음에는 안 들었던 거야. 그래서 회사에 와서 영민이한테 들려줬어. 나일론 기타를 튕기면서. 이런 곡인데, 멜로디 뭐 기똥 찬 거 없을까? 하면서.”
“그래서 멜로디는 박 피디님이……?”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리길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맥주잔을 비웠다.
“멜로디는 70퍼센트 이상을 영민이가 만들었지.”
“아, 역시…….”
“그래서인지 보컬 파트도 얘가 다 가져갔어.”
“그 곡 들어 봤어요. 박 피디님이 거의 다 부르시더라고요.”
얘기가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내가 끼어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고요, 그때 프로듀싱을 해준 분이 파트 분배를 맘대로 했어요. 원래 인혁이랑 제가 반반씩 나누어 가졌는데 내 쪽으로 더 몰아줬던 거죠.”
“그때는 얘가 나보다 노래를 더 잘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야?”
“아니, 뭐…… 노래는 확실히 네가 더 잘했지.”
그러면서 이 녀석은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프로듀서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원래 우리 팀의 컨셉은 네 명의 하모니를 내세운 보컬 그룹이었는데, 그때 프로듀서는 한 명이 메인을 맡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나 주길 원했던 거지. 그런데 그게 맞았어. 그래서 그 곡이 히트했던 거고.”
“그럼 두 번째 곡은 왜 망했어요?”
“야,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거 아니야?”
인혁이가 정색을 하면서 발끈하자, 그게 웃긴지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넓은 거실에 커다란 상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차린 음식은 솔직히 초라했다. 전부 배달시킨 것이었다. 혼자 사는 이 녀석에게 특별한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비 신부가 있다면 둘이서 뭘 준비하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두 번째 곡은 좀 달랐지. 회사에서 우리의 작곡 능력을 인정해 줘서, 그때는 악기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줬어.”
“두 번째 곡도 두 분이 같이 쓴 거예요?”
“그러려고 했지.”
인혁이는 그 곡도 연주를 해보겠다는 듯이 기타 줄을 건드렸지만, 잘 안 되는지 금방 관두었다.
“영민이가 멜로디를 쓰고 내가 트랙을 만들고 그랬는데…… 형편없는 곡이 나왔어. 얘하고 나하고 그때는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았거든.”
“그거 너 혼자 만들지 않았었냐? 그랬던 거 같은데.”
“같이하자고 했는데 너도 좀 미적지근했어. 그래서 마무리를 나 혼자 해버렸던 거지.”
“그랬나?”
둘이 말 한마디 섞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데뷔곡을 히트시킨 20대 초반 어린 아이들은 철없는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
“곡이 잘 안 뽑히기도 했고, 초반 반응이 안 좋으니까 회사에서도 성급하게 접어버렸고. 뭐 그랬지.”
“뭐 때문에 두 분 사이가 안 좋았는데요?”
“파트 분배 때문에.” 하고 내가 대답했다.
“맞아. 파트를 다시 나눈 게 화근이었지.”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분이 멀어진 거예요?”
“그때는 그게 심각했어. 파트를 다시 나눴는데…… 그렇게 되니까 원래 내가 불렀던 걸 얘가 부르게 된 거잖아. 진짜 재수 없을 정도로 잘하더라고. 내가 불렀던 거보다 훨씬 잘해. 와 진짜 내가 이 새끼는 못 이기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인혁이는 실실 웃으면서 맥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그때부터 이 새끼가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지…… 그게 해소되는 데 5년 정도 걸린 것 같아.”
“5년이나요?”
“그 5년 동안 이 뚱뚱이 녀석은 저한테 수시로 전화를 해서 자랑질을 해댔어요.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야, 너는 아직 강사 하는 거야? 왜?’ 이러면서 저를 놀리고.”
내가 그런 얘길 했더니 인혁이는 자기 무릎을 때리며 웃었다.
“그랬었지. 그래도 그런 일이 없으면 너를 여기에 부를 일도 없었어. 그런 걸로 앙금이 씻겨 나갔으니까 부른 거지.”
이 녀석은 내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두 분이 계속 사이가 좋았다면, 엄청났겠네요.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 두 명이 한 팀에 있는 거잖아요. 내놓는 앨범마다 명반이 되어서 그 시대를 완전히 주름잡았을 거 같은데요.”
작곡팀 직원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도 인혁이도 쉽게 대답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우리 둘 다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 *
“그래서 난 네가 여기로 불렀을 때 날 엿 먹이려는 건 줄 알았어.”
“여기로? 집들이하는 거?”
“아니. 회사로 나 부른 거 말이야. 보컬 트레이너 자리 비었다고 나 불렀던 거.”
“아아…….”
“나 불러서 ‘이거 봐라. 난 이만큼 성공했다’라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해주려는 건가 했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한 번 염세적으로 변하면 되돌아오기가 힘들어져. 그래서 실패도 적당히 해야 하는 거야. 아픈 게 청춘이다? 웃긴 소리지. 한 번 더 아팠다간 미쳐 버릴지도 모르는데 뭐가 청춘이야.”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했었지. 많이 아파서 미쳐 버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여기서 몇 년 있어봐서 알지만, 여기가 그럴 수나 있는 데냐? 뭐 하나 잘못 보이면 그걸 물어뜯으려는 사람들이 벼르고 있는데…… 특히 1팀장 같은 인간.”
사람들은 돌아가고 나는 인혁이와 둘이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 우리는 안주도 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그래도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가졌기 때문인지 소주가 쓰지 않았다.
“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예상이 되지 않냐. 비츠걸스 데뷔 실패했을 때 사람들이 날 가만히 놔뒀겠냐고. 회사의 대표가 되기는커녕…… 아마 내 발로 걸어 나와야 했을 거다.”
내가 이 회사에 입사했던 초반만 하더라도 인혁이가 나를 이렇게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었다. 비츠걸스의 두 번째 싱글이 내 손을 거쳐 성공한 이후로, 이 녀석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도대체 누구야?”
“어?”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봐. 누구냐고?”
“아…….”
인혁이는 조금 남은 병을 탈탈 털어 한 잔을 만든 뒤 그걸 입에 털어 넣었다.
“너만 알고 있어.”
“알았어.”
“우리 회사 사람인데…….”
“누구? 가수야?”
“누굴 거 같아?”
“아이 씨,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좀 말해봐.”
“회사 안에서 몰래 만나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르더라고. 알면서 그러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진짜 모르는 눈치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가수야, 아니야? 이것만 먼저 말해봐.”
그랬더니 뚱뚱이 녀석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혼자서 낄낄 웃고 있었다.
“너도 눈치 참 없다.”
“왜?”
“선아 씨.”
“어?”
“나 선아 만나.”
“뭐? 선아 씨라면 방금 여기에 있던 그 사람? 작곡팀 신입 선아 씨 말하는 거야?”
“어.”
김선아. 올해 초에 입사한 신입 사원이었다. 방금까지 내 맞은편에 앉아서 조용히 웃음을 흘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런 미친…….”
“뭐?”
“선아 씨가 올해 몇 살이더라. 스물셋?”
“스물넷.”
“야 그러면 열두 살 차이…….”
“나이가 뭐 중요한데? 선아가 생각보다 속이 깊어. 나하고 말도 잘 통해.”
“그래도 인마, 이제 대학 갓 졸업한 애를.”
“넌 왜 그렇게 고리타분하냐. 나이가 뭐 대수라고.”
그러면서 인혁이는 새 병을 하나 가지고 와서 뚜껑을 열었다. 비어 있는 내 잔을 채워주었다. 나는 그걸 받자마자 목으로 넘겼다.
“좀 이상하다곤 생각했지. 선아 씨가 여기 왜 온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진짜 이상하잖아. 신입 사원이 왜 회사 사장의 집들이에.”
“원래 오늘 모인 사람들한테 밝히려고 했는데 선아가 아직은 말하지 말자고 하더라고.”
김선아 씨는 키가 작고 체구도 아담한 사람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축구공 옆에 야구공.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웃음이 픽 하고 터져 버렸다.
“양가 부모님도 다 알고 계셔. 조만간 상견례할 거야.”
“예비 신부 맞네.”
“선아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실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막상 나를 보시고는 반가워하시더라고.”
인혁이 이 녀석의 재력이야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딸 가진 부모님 입장에서도 이렇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 나이 스물넷.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은데.
설마…….
“야, 너 혹시……?”
인혁이는 빙긋 웃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친!”
“12주인데, 그래서 좀 고민이야. 식을 먼저 올릴지, 아니면 나중으로 미룰지.”
“야, 이거 진짜 미친놈이었네.”
“그래서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니까. 초음파 찍으면 얼굴이 보이는데, 와 이게 진짜…….”
나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반복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고개를 숙인 채로 한참을 웃었다.
* * *
“그런데 너도 이제 여자 좀 만나야 하지 않겠냐.”
“뭐 사람이 있어야지.”
“일단 만나봐. 고르려고 하지 말고 일단 만나고 나서 생각을 해보라고.”
“그래야 하는데…….”
술에 취해 거실 안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 들었던 나일론 기타의 선율이 아직까지 귓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조용한 거실 바닥에 앉아 있으니 다시 오래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이 녀석하고 내가 연습실 바닥에 앉아서 낑낑대고 있었던 그때로.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하나 있어.”
“오, 그래?”
“뭐 마음을 빼앗겼다 이렇게 말할 정도는 아닌데…… 자꾸만 신경이 쓰여.”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런 순간에도 떠오를 정도로.
“산을 같이 오른 적이 있었는데.”
“산? 등산하다가 만난 거야?”
“어. 뭐, 그런 셈이지.”
“산악회?”
“비슷한 거야.”
“아…….”
“근데 그날 이후로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그날 그 사람한테 어떤 특별한 느낌을 받은 건 아니고…… 그 전부터 계속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마음을 내가 자각하게 된 것 같아.”
“아…… 뭔지 알지. 그런 거.”
“그런데 이 감정의 정체를 내가 모르겠어.”
삶 속에서 든든한 기둥이 없었던 애에게 내가 그런 기둥이 되어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가 어딘가라도 좋으니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길 바라고 있는 것인지.
“얼마 전에 무슨 얘길 들었는데…… 나는 딱 잘라 버렸지. 그런데 그 뒤로 더 혼란스러워.”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날 정도로. 아니 지금이 아니라 언제라도.
“일단 만나라니까. 만나보고 생각하는 거야. 야, 너 그렇게 미적대다가 이도 저도 안 된다. 사랑이란 건 정도 들고 싸우기도 하고 뭐 그러면서 완성되는 거야. 혼자 끙끙 앓는 게 아니고.”
“그런데 그런 게 좀 있어. 그 사람하고 나는 만나선 안 되는 관계야.”
“뭐?”
“내 이성으로는 허락할 수 없는 거라고.”
“이런 미친!”
“……?”
“미친놈은 이 새끼였네.”
“…….”
“유부녀냐?”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진짜 이런 거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산악회라는 거에서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줌마 아저씨들 산 타다가 눈 맞는다는 거 얘기만 들었는데 내 옆에 있는 놈이 그럴 줄이야.”
“어휴…… 그냥 그렇다고 하자.”
“너 그러지 말고, 내가 선아한테 소개 좀 시켜달라고 할게. 너 무조건 내 말 들어. 너 임자 있는 사람 건드렸다가 인생 말아먹는다.”
인혁이는 손오공하고 싸우려고 폼을 잡는 마인 부우처럼 씩씩 화를 내며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소개해 줄 거니까 무조건 만나라고. 마치 머리 위로 스팀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녀석은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 * *
의 두 번째 주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아이즈 프로덕션의 조 팀장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아침부터 싱글벙글이었다.
“사전투표 수가 꽤 높게 나왔어요.”라는 것이 이유였다.
의 첫 번째 대결 사전투표는 총투표 수가 4만 3천 대로 집계되었다.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공중파 음악방송의 사전투표 수가 7만에서 8만 정도, 팬덤이 큰 팀들이 몰릴 때에는 10만까지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두 팀이 붙는 것에 4만 3천의 투표 수가 나왔다는 것은 기대 이상으로 높은 것이었다.
물론 논란을 막기 위해 본인 인증을 엄격하게 거치는 공중파 음악방송 투표 수와, 그보다는 접근성이 편한 음악 채널의 투표 수를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기, 조 팀장님.”
나는 양 팀 표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지 물어봤다.
이번 대결에서 사전투표 점수는 총 100점 중에 20점을 차지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데이바이데이의 인지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이 20점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점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18 대 2 정도? 잘하면 17 대 3?
여기서 벌어진 점수를 심사위원 점수 20점에서 메꾸는 것이 목표였고, 그렇게 두 무대를 지켜본 시청자들의 점수 60점에서 승부를 내보자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아마도 첫 대결부터 이기긴 힘들겠지만 계속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점점 우리 쪽으로 점수가 주어질 것이다…… 뭐 이런 계획이었는데.
“점수는 프로듀서님들에게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이따가 점수 공개할 때 프로듀서님들의 표정을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서요.”
“압니다. 그래도 궁금해서…….”
“아시겠지만 사전투표 점수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당연히 그렇겠죠.”
“아, 이거 진짜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데.”
내 쪽에서 조르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조 팀장 쪽에서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식이었다.
“이거 혼자만 알고 계세요.”
“제가 어디서 얘길 한다고요. 듣고 싹 잊어버릴 겁니다.”
“레드애플이 5점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전투표에서요.”
5점?
그럼 15 대 5?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점수였다.
“괜찮게 나왔네요.”
“그렇죠? 그래서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데…… 어휴, 제가 진짜 성질이 너무 급해서.”
5점이나 가져갔다는 건 만 표 정도나 우리가 얻었다는 건가?
“사람 심리가 그래요. 저쪽에서 아리하고 아즈사가 빵 터지면서 사람들을 끌고 가버린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잘나가는 게 있으면 그걸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프로그램할 때마다 느낍니다. 없는 꼬투리도 일부러 만들어서 잡아요. 단지 인기가 많아지고 잘나간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꽤 많죠.”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네요. 저쪽으로 쏠리는 시선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 쪽에 표를 주는 거라면요.”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지금은 레드애플이 언더독이잖아요. 사람의 심리란 게 또…… 도전하는 쪽을 응원하고 싶어 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이 프로그램의 총지휘를 맡은 사람은 그런 분석을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원사이드 게임으로 넘어가 버릴 수 있는 대결이, 잘나가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약자를 응원하려는 마음 덕분에 그나마 붙어볼 만한 게임이 되고 있다고.
어쨌든 15 대 5. 상대가 10점 더 높았다. 만약 심사위원 점수에서 우리가 10점을 더 가져갈 수 있다면 이 핸디캡은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럼 심사위원 점수는……?”
심사위원들의 점수도 이미 집계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방송 관계자, 제작자들, 작곡가들로 구성된 집단에 두 팀의 무대를 보고 매겨놓은 점수.
“그건 저도 몰라요. 저희가 점수를 미리 알면 편집에 영향이 갈 것 같아서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심사위원 점수는 저희도 점수 공개될 때 알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요?”
“어쨌든 두 팀 다 잘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이런 걸 하죠.”
* * *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
“…….”
대기실 안. 짧은 인사가 오간 뒤 이곳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여기 카메라 없어.”
“진짜겠죠?”
“없으니까 안심해. 너희들 리액션까지 지난번에 다 따갔잖아.”
그렇게 말해주니 그제야 아이들은 “휴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습실에서는 사방에서 카메라가 노려보고 있었고, 숙소 거실에도 천장과 사이드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롯해서 매니저들도 애들을 볼 때마다 ‘말조심해라’, ‘표정 관리 잘해라’, ‘말 한마디 할 때 꼭 생각 한 번 더 해보고 내뱉어라’, ‘말실수 한 번 잘못 한 게 방송에 나가면 끝장이다.’ 등등의 잔소리를 쉬지 않고 들었으니 카메라에 노이로제가 있는 것도 이해되는 일이었다.
“가만히 모니터만 하고 있으면 되니까 편하게 있어.”
대기실은 그런 용도로 있는 곳이었다.
두 팀의 무대는 실시간으로 나가는 듯 보이지만 음악방송의 사전녹화처럼 이미 떠놓은 녹화를 내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두 팀의 퍼포먼스가 나갈 때에도, 우리는 이곳에서 방송을 모니터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수가 발표될 때 무대로 올라가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을 연출하면 된다. 나하고 김우진은 인터뷰 룸에서.
방송은 지난주 마지막 장면, 양 팀이 미션을 받는 것부터 다시 보여주었다. 선배 그룹의 곡을 커버하기. 각 팀이 소속된 회사의 선배 그룹을.
그리고 이번 대결의 결과로 얻게 될 혜택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도 반복되었다.
“나 왜 얼굴 크게 나오는 거야!”
“조용히 좀 해봐. 안 들리잖아.”
“표정 봐. 좀 웃고 있을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기실 안에 카메라가 있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애들도, 자기들이 화면에 나오자 그쪽으로 바짝 몰려서 방송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 * *
그다음으로 소속사 선배에게 도움을 받는 에피소드가 등장했다.
연습실을 지나치던 선배가 자연스럽게 후배들의 연습을 지켜보며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두 회사의 선배들은 언뜻 보기에도 태도가 전혀 달라 보였다.
아이즈 컴퍼니의 플라지아 멤버들은 선배답게 자연스럽게 후배들을 대해주었다. 말투부터가 반말이었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들려주었다.
“절실해야 돼. 절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잠깐 쉬어가도 될까? 하고 생각했다간 그 자리를 남한테 빼앗길 수 있어. 농담 같지? 하지만 정말로 여긴 전쟁터야.”
이런 식의 얘기를 전하곤 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회사의 선배들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로 일관했다.
“잘하시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 그랬고, 선배랍시고 으스대는 모습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좋게 보면 겸손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건 두 팀이 안 친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비츠걸스 애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윤이밖에 없었는데, 지윤이는 자기들과 나이가 비슷하고 같이 연습했었으니 후배로 대하기에 애매했다. 그리고 지윤이를 제외한 나머지 셋과는 몇 번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우리 애들의 분량은 대부분 안무를 가르쳐주고 그걸 배우는 장면들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 잘 안 되는 동작이 나오면 마주 본 채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등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보다 더 잘하는 분이라서 제가 뭘 가르쳐드린다고 하면 부끄러워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저희 비츠걸스보다 훨씬 더 잘하세요.”
마무리도 훈훈했다.
현장에 있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만들어졌지만, 방송에 그 말이 그대로 나오자 이번에도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저 말은 연화가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에서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는 채아를 바로 앞에 두고서.
‘정신 차려. 오늘 얘긴 못들은 걸로 할게.’
지난번의 그 말 이후로 연화와 나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나도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연화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몇 분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연화는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제자리로 옮겨놓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내 방을 나갔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일부러 늦은 시간을 택해서 연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대로 지나가 버리면 또 다른 상처를 내 쪽으로 주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 괜찮아요. 제가 아는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뭘 기대하고 했던 말은 아니에요.]내 쪽에서는 판에 박힌 말이 줄줄 나왔다. 마치 무언가를 보고 읽는 것처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지금은 이곳에서 네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라, 잠깐이라도 흔들리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 건너갈 수도 있다 등등.
그러고 난 다음에 사전 미팅에서 연화를 다시 만났고 연습실 촬영에 들어갔다.
연화가 채아를 신경 쓰고 있는 건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어떻게든 이 촬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저보다 더 잘하는 분이라서 제가 뭘 가르쳐드린다고 하면 부끄러워요.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오히려 제작진에서는 선배답게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연화는 내내 자기를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로 후배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력자가 되길 자청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방송에서 그 모습이 보였을 때에도 흐뭇한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 * *
그런 다음 두 팀의 무대가 이어졌다.
그들의 무대에 환호하는 관객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연습한 만큼, 가르쳐 준 만큼 잘 해낼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는 두 프로듀서,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심사위원들. 그런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였다.
압박감이 대단할 것이다. 나중에 객석을 꽉 채운 팬들의 열렬한 환호 앞으로 나아가려면, 일단 여기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먼저 무대에 오른 쪽은 데이바이데이였다. 선배 그룹 플라지아의 곡을 커버한 무대였다.
현장에서 지켜봤을 때에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눈에 띌 정도로 발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발성에 있어서는 내가 남들보다 더 깊은 부분까지 들을 수 있으므로 이 아이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산만하게 들려왔던 소리가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내 귓속을 파고드는 메인 보컬 장세은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처럼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노래뿐만 아니라 안무의 수준 또한 전반적으로 한 단계 올라갔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냥요.”
그런데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채아는 모니터에 관심 없다는 듯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나를 보고 있냐고.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좀 있으면 저희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저를 어떤 눈으로 보실 건지 알고 싶어서요.”
“무슨 소리야?”
채아는 아직까지도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번이나 웃으셨어요.”
“뭐?”
“같은 장면에서 똑같이 웃으셨다고요. 전에 촬영할 때 한 번, 아까 모니터할 때 한 번.”
얘가 무슨 소릴 하나 했다.
“연화 씨가 나오는 장면에서요.”
“야, 그게 무슨…….”
“거기서 똑같이 웃으셨어요. 저는 알아요. 선생님 웃는 거 종류별로 다 구분할 수 있어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실소가 터졌다.
“그래서 저를 볼 때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보고 싶어서요. 얼마나 다를지.”
“그만 좀 쳐다봐. 사람 무안하게.”
‘그거보다 더 환하게 웃으셔야 돼요’라고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일부러 얘가 나오는 장면에서 인상을 팍 써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골려주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박영민 프로듀서님. 이제 인터뷰 룸으로 이동해 주세요.”
“벌써요?”
“네.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아, 이거 봐야 되는데…….”
FD가 호출하는 바람에 그런 장난도 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 *
비츠걸스 네 명은 콘서트 준비를 하다가 멈추었다. 의 방송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선배의 자격으로 방송에 참여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회사의 후배 그룹이 나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나 같으면 저거 못 할 것 같아. 저건 월말 평가에서 난이도가 백 배는 올라간 거잖아. 그것도 전 국민이 다 보고 있고.”
연습하다가 넷이서 우르르 휴게실로 들어가긴 곤란했는지, 아이들은 벽에 기댄 채로 핸드폰을 꺼내어서 방송을 보고 있었다.
“우리도 데뷔는 진짜 어렵게 하긴 했는데…….”
승연이는 데뷔하기까지의 과정이 떠올랐는지 눈썹을 지긋이 구겼다.
열일곱 살, 고1 때 몬스터 뮤직의 연습생이 되어 4년을 연습 후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면 평균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사자가 겪은 4년은 불안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몬스터 뮤직에서는 그동안 신인 팀을 고작 하나 냈을 뿐이고 그마저도 듀오였다. ‘이 회사는 정말로 나를 데뷔시키긴 할 건지…….’ 하고 눈치를 보며 아무런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4인조 걸그룹을 결정한다는 발표가 나고 연습생들 사이에선 피 말리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어제까지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하는 일은 어린 나이에 큰 상처로 다가오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을 그저 무작정 걷고 있었던 4년…… 그런데 힘들다고 말하기도 그랬다. 옆에는 그보다 두 배가 넘는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 있었으니.
“연화야.”
“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재작년에 데뷔를 못 했고 거기서 더 기다리고 했으면 넌 이거 계속 했을 거야?”
승연이는 그렇게 물으며 “했겠지? 연화니까.”라며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저는 계속 기다렸을 거예요.”
“그렇지?”
“그만둘지 계속할지 매일 고민했겠지만…… 그래도 기다렸을 거예요. 전 기다리는 건 잘하잖아요.”
“연화 너는 언젠간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니까.”
“저요? 별로 그런 건 없었어요. 계속 기다리다가…… 그래도 주어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지고 말겠다는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너는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일 텐데.”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방송에 비츠걸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저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장면이 몇 초나 반복되며 요란한 자막이 밑에 깔리고 있었다.
뜨거운 인기, 최고의 걸그룹, 보기만 해도 낯간지러워지는 그런 말과 함께.
“저렇게 보니까 우리는 저 팀하고 안 친한 게 너무 티 난다. 저쪽 회사 팀들은 진짜 선배 같아서 멋있었는데.”
“안 친한 게 사실이잖아.”
연습실에서 안무를 가르쳐준 것도 잠깐뿐이었지만, 방송에서는 비츠걸스가 그 곡을 불렀을 때의 무대와 교차되며 그럴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연화야. 너…… 쟤 싫다고 하지 않았니?”
“저 사람이요?”
연화와 채아가 잡히는 투샷이 길게 이어지자, 선하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렇게 물었다.
“왜요?”
“저거만 보면 동생 자상하게 챙겨주는 언니 같은데?”
“동생 아니에요. 저랑 동갑이에요.”
“그건 나도 알지.”
연화와 채아는 팔을 쭉 뻗으면서 옆으로 이동하는 동작을 함께하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허리를 숙여가며 환하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지난번에 있었던 일은 연화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무렵에서 안이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딜 가나 자기 얘길 하고 있고, 어딜 가나 자기를 반기고, 마치 세상의 모든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변한다면 보통 이 시점에서 변하게 된다.
별로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연화는 성공에 대해 보다 강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좀 더 위로 올라간다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웃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가수가 되자. 무대 위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가수가 되자. 이것 하나만을 생각하며 10년을 버텼다면, 이제는 ‘스타가 되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미 스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 정도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
자기를 꼬마라고 불렀던 어떤 선배처럼 한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대결 시작하네. 누가 이길까.”
“괜히 나까지 긴장돼.”
그리고 TV에서는 아직 ‘가수가 되자’라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 * *
화면 속에선 데이바이데이의 네 멤버가 춤과 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뭐…… 원래 여덟 명이 하는 걸 네 명이 소화한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죠.”
“그렇게 본다면 나쁘진 않네요.”
심사위원들은 현장에서 무대를 지켜봤지만 점수를 매기기 위해 영상을 다시 한번 보고 있었다.
“글쎄요. 저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프로듀서 김우진 씨는 생각을 잘못하신 거 같아요.”
“왜 그렇죠?”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싶다면서 4인조를 선택했는데, 그렇다면 한 명 한 명의 실력과 매력이 아주 뛰어나야 하잖아요. 각자 따로 솔로로 나왔다고 해도 먹힐 정도로요. 그런데 저기 네 명 중에는 아직 준비가 안 된 멤버들이 끼어 있어요.”
그래도 네 명이었기에 단조롭고 듬성듬성 비어 보였던 무대가 카메라 워크로 꾸며지자 그럭저럭 봐줄 만하기는 했다. 이따금 단독샷에 잡힐 때에는 깜찍한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심사위원이라는 자리에서 봤을 때에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듯했다.
“평균적인 실력을 봐도 플라지아가 데뷔했을 때에 못 미칩니다. 부족한 점이 있어도 여덟 명 안에 묻어버릴 수 있었던 플라지아와 비교를 해도 말이죠. 지난 프로그램에서 너무 감성적으로 가버린 탓에 실력 없이 화제성만 있는 멤버들이 끼어버렸어요. 저도 좋은 점수를 못 주겠습니다.”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몬스터 뮤직의 레드애플이 나왔다.
어두운 무대에서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 네 명은 그림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환한 조명이 비추자 리드미컬한 인트로 위에서 역동적인 동작이 시작되었다.
“오!”
“역시.”
심사위원들은 대번에 탄성을 내질렀다.
현장에서 봤을 때에도 감탄이 나왔던 부분이었지만 영상으로 보니 리듬감이 더욱 확실하게 와닿았다.
심사위원 몇 명은 그들의 춤동작에 맞추어서 어깨를 흔들며 리듬을 즐기고 있었다.
“얘네들 잘해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몬스터 뮤직에서 무슨 아이돌을 만든다고 하나 의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두 번이나 우릴 놀라게 하더니 세 번째에도 기가 막힌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어요.”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에도 난이도가 높은 안무를 구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호흡 속에서도 발음과 음정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각자가 맡은 파트를 확실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프로듀서 박영민 씨가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이렇게 된 거죠? 몬스터 뮤직이 아이돌 그룹으로 계속 성공하고 있는 게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홀연히 나타나서 판도를 바꾸어버렸어요.”
그리고 메인 보컬의 파트가 시작되었다.
심사위원들은 그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현장에서, 그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들려온 신비한 목소리.
카메라 워크로 영상 속의 안무는 더욱 화려해 보였지만 사실 보컬의 목소리는 그때의 감동을 제대로 전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이게 아이돌의 가창력이라고?’라면서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뜨고 무대를 바라봤던 그 감동을.
“신채아라고 하는 앤데…… 저는 얘를 좀 알아요. 프론트 페이지라고 지금은 해체된 걸그룹의 멤버였죠.”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어디에서 나온 애들이더라.”
“노래를 잘해서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던 보컬이었어요. 팀이 깨졌다고 했을 때에도 아쉬웠고 저 목소리라면 어디에서라도 반드시 노래를 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다시 나타난 신채아는 괴물이 되어 있네요.”
“프로듀서 박영민 씨가 원래 보컬 트레이너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김다은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보컬에서 그냥 압살해 버리네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속에서 채아는 곡의 하이라이트인 고음 파트를 소화하고 있었다. 거친 음색이 강력한 힘을 받아 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 양반한테 노래나 배울까.”
“해주겠어요? 요즘 제일 잘나가는 프로듀서라서 바쁠 텐데.”
영상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의 눈은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어떻게 점수를 줄 것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데이바이데이를 바라보던 차갑고 싸늘한 눈빛은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몸을 흔들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 곡도 박영민 씨 곡이죠?”
“그렇다네요. 그것도 단독 작곡이에요.”
“진짜 대단한 사람입니다.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멜로디를 얹혀 놓는 스타일이 정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요. 그런데 귀에 쏙 들어온단 말이죠.”
그리고 무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몬스터 뮤직 주식이나 빨리 사둬야겠어요.”
“아직 상장 안 했을 걸요.”
“곧 하겠죠. 머지않아서. 아마 몇 년 후에는 몬스터가 3대 기획사, 4대 기획사 이런 거에 꼽힐 겁니다.”
“전 이따 내려가면서 박영민 씨 손이나 한 번 더 잡아보렵니다. 나중엔 잡아보고 싶어도 못 할 거예요.”
* * *
무대 위에는 데이바이데이 네 명과 레드애플 네 명이 서 있었다. 마치 조금 전 공연을 마치고 허겁지겁 올라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하고 김우진은 인터뷰 룸에 있었다. 또다시 여기에 앉아 있어야 했다. 금 테두리가 부담스러운 왕좌 같은 의자에.
-그럼 심사위원 점수를 발표하겠습니다.
녹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래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던 김우진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프로듀서들의 표정을 담겠다고? 그 말이 신경 쓰여서 얼굴을 더욱 굳히고 있게 된다. 이상한 모습이 나갈까 봐.
-사전투표 점수는 방금 발표했듯이 15점과 5점이었는데요.
점수를 미리 들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을 것이다. ‘우와, 우리가 5점이나!’라는 듯이.
겨우 5점에 만족하는 프로듀서라니…… 얼마나 없어 보일까. 하지만 점수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일 걸 예상하고 있었어’ 라고.
-심사위원 점수는요.
그럴듯한 그래픽으로 점수가 발표되면 멋질 듯했지만, 3주까지는 그냥 엠씨가 점수를 발표하는 식이었다.
-레드애플 16점, 데이바이데이 4점! 여섯 명의 심사위원들은 두 팀에게 이런 점수를 주었습니다.
“우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쳐 버렸다.
16점? 이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우리가 앞설 것은 알고 있었지만 12점에서 13점 정도가 아닐까 했는데 무려 16점!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총점에서 우리가 1점 높다는 것이었다.
아차차…… 불끈 쥔 주먹을 계속 흔들고 있다가, 그제야 카메라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청차 투표 점수입니다. 시청자 투표 점수는…….
모니터 화면에서도 웅장한 음악이 깔리며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작점. 무대 위의 여덟 명도 잔뜩 긴장한 눈으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