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5
5장 레이시(Lacie)(1)
“수고했어.”
우리는 다시 대기실에서 모였다.
아이들은 무대 위에서 10분 남짓 서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대기실에 오자마자 소파 위로 쓰러졌다. 10분이 열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선생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이기지 못해서요.”
“괜찮아. 이제 시작이잖아.”
아이들은 자책이라도 하듯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요. 예고편에도 못 나가고 다음 주 방송에서 30분 동안 저희는 나갈 수 없대요.”
“그게 룰이잖아. 어쩔 수 없지.”
“너무 죄송해요. 저희가 선생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거 같아요.”
“아직은 괜찮다니까. 이제 시작이야.”
정말로 괜찮았다. 내 얼굴에 자리 잡은 미소는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만족스러워서 웃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더 열심히 해야 했는데. 죄송해요.”
60점 만점인 시청자 점수에서 양 팀은 38점과 22점을 얻었다.
총점은 57점 대 43점.
원사이드 게임을 예상했던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는 점수였다. 초반에는 80 대 20 정도로 확 벌어질 줄 알았는데.
“괜찮아. 다음에는 이기자고. 데뷔는 우리가 하는 거야.”
* * *
분주하게 세트장을 정리하고 있는 스탭들 사이로 빠져나가 제작진 회의에 참석했다. 인터뷰 룸에서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였던 김우진은 아직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1 대 0입니다.”
내가 그의 옆에 앉자 그는 살며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기억하세요? 이 프로그램 들어가면서 우리 두 사람의 점수를 다시 계산하자고 했잖아요.”
“그랬죠. 뭐…… 축하합니다. 오늘은 제가 졌습니다.”
“아니, 박영민 피디님이 1이고 제가 0입니다. 이번 건 제가 진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해버리면 여기에 왜 의미가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사전 투표가 15 대 5였는데 방송 중 투표에선 38 대 22. 이건 제가 진 겁니다. 100 미터 달리기에서 50미터 앞서서 출발했는데, 결승선을 통과할 때에는 10미터 차이로 좁혀 있는 거예요. 이걸 이겼다고 하기는 좀 그렇죠.”
비유 괜찮네,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이기셨잖아요. 다음 주에도 앞서서 출발할 수 있게 됐고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
“전부 제 과실이에요. 아마 점수는 더 좁혀질 겁니다.”
조 팀장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대화는 멈추었다. 조 팀장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시청률도 제법 잘 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돌아가려는 나를 김우진이 붙잡았다.
“박 피디님. 오늘 술 한잔 하실래요?”
“오늘은 안 됩니다. 돌아가서 할 일이 있어요.”
“이 시간에요?”
“곡 작업을 해야 해서요.”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시지.”
“내일은 어떠세요? 내일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는데.”
하지만 내일은 김우진이 어렵다고 했다. 내일부터 당장 애들 붙잡고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면서.
“그런데 곡 작업이요? 아! 제이제이?”
JJ란 저메인 존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원래 그 양반 거 끝내고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일정이 당겨져서 겹쳐 버렸잖아요.”
그래서 ‘세계적인 프로듀서 박영민’이라는 근사한 타이틀로 를 시작하려고 했었다. 김우진도 그걸 원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더 술 마시고 싶어지는데요. 제이제이하고 어떻게 일하는지도 듣고 싶고요. 그 사람이 그렇게 쿨하다면서요? 프로듀서가 하자고 하는 대로 다 따라준다고 하던데요.”
“편하게 해주긴 합니다. 거들먹거리는 것도 전혀 없고요.”
“여성 편력 빼고는 뒷말이 전혀 없는 사람이니…… 그래서 그렇게 롱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게다가 보는 눈이 있고요. 박영민 피디님을 한눈에 알아보는 걸 보면 아직도 감이 죽질 않은 것 같아요.”
“저야 뭐, 운이 좋았죠.”
“아닙니다. 그 사람이 프로듀서를 고르는 기준은 정말 까다로우면서도, 그가 선택한 프로듀서는 언제나 최고가 되었잖아요. 프로듀서 감별사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 말을 하며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히터로 데워져 있던 우리의 볼을 날카롭게 할퀴며 지나갔다.
“부러워요. 이럴 땐 정말 부럽습니다.”
김우진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 피디님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좋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겠죠.”
* * *
김우진의 부러움을 받으며 스튜디오를 빠져나왔지만, 저메인과의 작업은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다.
타이틀로 발라드곡을 밀어보려고 하고 있고, 저메인과 내가 듀엣으로 부르는 곡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곡들이 문제였다.
내가 만든 곡 두 개 정도가 물망에 올라 있을 뿐 나머지 곡들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본부장님. 어제 지적해 주신 부분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서 개선해 봤습니다. 첨부 파일로 송부드립니다. 한 번 들어봐 주세요.’
우리 회사 작곡가들에게서 이런 메일이 꾸준히 오고 있었다. 저메인 존스에게 곡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때로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처럼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온 메일은 내가 작곡팀 직원 중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이정인 씨였다.
핸드폰에 알림이 뜨자마자 PC를 열어서 그의 메일을 확인했다.
전자 악기의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일렉트로니카 스타일의 곡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괴팍하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트렌드를 쫓아 단순하고 멜로디컬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인정하고 있는 이정인 작곡가의 작품답게 처음 보내준 데모부터 무척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보컬이 들어갈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 곡은 저메인에게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네요. 저메인에게 곡을 주고 싶다면 그의 목소리가 들어갈 공간을 충분하게 넓혀 주세요.’라고 코멘트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보내온 버전 또한 매력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에게 곡을 주고 싶은 욕심은 이해할 수 있지만 보컬이 들어갈 곳을 억지로 만들다 보니 곡의 색깔이 무뎌졌다. 뚜렷한 장점이 보이지 않은 흔한 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메인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에게 파일을 보내봤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더 평범해졌어. 나는 이 곡에서 아무런 인상을 받지 못하겠어. 차라리 고치기 전의 것이 더 나아. 게임 음악에 딱 적당하네. 적당히 게임에 몰입하게 해주도록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신나는 음악 말이야.]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것 외에 밤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에게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그와 나는 음악을 느끼는 레벨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곡을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도 일치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날은 김우진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와서인지 괜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건 우리의 앨범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곡이지만 한 번 들어보세요.]나는 그에게 어떤 곡의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내주었다.
[아, 이 곡? 알고 있어. 일본어 버전으로 들은 적이 있어.] [그래요?]김우진이 작곡한 곡을 보내주었더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귀여운 애들이잖아. 그리고 귀여운 애들 사이에 아주 핫한 여자들도 끼어 있어. 난 이거 너무 사랑해. 의상이 정말 마음에 들어. 딱 자극적인 곳까지만 보여주는 것이 매력적이야. 우와 이 허벅지!] [음악은 어때요?] [귀여운 음악이지.] [이 제작자를 평가한다면?] [4.3점] [높은 거예요?] [높은 거지. 5점이 만점이야.]프로듀서 감별사라면서?
[그럼 나는?] [나의 영민팍은 5점] [장난하지 말고요.] [가끔 4.9?]가끔? 어떨 때를 말하는 거야?
[아니다. 그 사람의 점수를 정정해야겠어.] [몇 점으로?] [4.3은 너무 낮아. 4.5] [왜 올라갔어요?] [음악만 떼어놓고 보면 4.3인데 저 핫한 걸들을 모아놓고 저기에 어울리는 귀여운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건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일이야. 저 모든 걸 종합적으로 본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줘야 하는 거야.]이번에는 GH 엔터 아이돌 그룹의 곡을 몇 개 보내주었다. 에피아도 포함해서.
[오, 마이 맨. 나를 시험하는 거야?] [아니에요. 당신의 소감을 듣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영민팍의 라이벌?] [한국 정상급 프로듀서들의 작품이에요.] [라이벌 맞네.]그는 음악을 듣고 있는 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 들었어.] [어때요?] [이 사람은 점수를 매길 수 없어.] [왜요?] [이 사람의 음악은 꼭 케이크 같아. 시애틀에 가면 말이야. 블루버드라는 록클럽이 있어. 너바나가 공연을 한 적이 있어서 유명한 곳이지. 펄잼, 그리고 사운드가든도. 그런데 블루버드 맞은편에 이름 없는 케이크 가게가 있어. 정말로 이름이 없어. 간판에 Cake라는 글자만 써 있거든. 꼭 거기서 파는 케이크 같은 음악이야.]이 양반은 또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그 케이크 안 먹어봐서 몰라요.] [아주 맛있어. 특히 크림이 기가 막혀. 적당히 입에 감기는 질감이면서 잠이 확 달아날 정도로 무척 달아. 방금 들려준 곡들이 그렇다는 얘기야. 한 입 먹었을 때는 ‘세상에 이런 케이크가 존재한다고?’라면서 감탄하게 되지만 두 조각 이상 먹을 수 없어. 너무 달아서.] [그래요?] [반대로 영민팍의 음악은 루치아노 비스킷 같은 음악이야.]이건 또 뭐길래.
[처음 하나를 입에 넣었을 때 깜짝 놀라게 되고, 그래서 계속 입에 집어넣게 돼. 나는 인간에서 벗어나서 비스킷을 흡입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느낌이라구. 쉴 새 없이 입에 넣는 거야. 엄마가 말릴 때까지. 이해할 수 있겠어? 내가 그래서 당신을 선택했어.]인혁이의 곡을 하나 들려주려다가 관두었다. 어쨌든 나하고 보는 시선이 비슷하니까 굳이 이것까지는.
[하지만 영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벌써 우리의 앨범에 들어갈 곡이 네 개나 준비됐잖아. 반년에 4개가 만들어졌으니 1년에 8개. 그럼 2년도 안 되어서 곡을 다 준비할 수 있어. 느긋하게 생각하자고.]그는 롱런하고 있는 아티스트답게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봐도 앨범 하나를 만드는 것에 2년에서 3년 정도 시간을 들이곤 했다.
서너 달 만에 앨범 하나를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나라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음악이 아이돌 위주이고, 아이돌은 전성기가 짧고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노출되어야 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기간에 계속 앨범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요.’ 또는 ‘2년 동안 앨범 하나를 제작할 정도로 여유롭진 못합니다’라는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타이핑해 놓은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지워 버렸다.
몬스터 뮤직에서의 싸이클을 맞추면서 저메인 존스와 함께 작업을 하기는 어려웠다.
‘본업은 아이돌 음반을 제작하는 거고 부업이자 취미로 해외 뮤지션의 음반을 제작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가끔 손대는 거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저메인 존스와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원하는 만큼 치고 나가기 어려울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확실하게 잡고 갈 필요는 있었다.
[JJ. 언제 한국 올 수 있죠? 우선 픽스된 4곡부터 시작합시다.] [나야 투어 끝내고 쉬는 중이니까 언제든지 가능하지.] [그럼 여기로 오세요. 스튜디오 스케줄 잡아서 바로 들어갈 겁니다.]하나의 앨범을 오랜 시간에 걸쳐 작업한다고 해서, 각각의 곡들을 분할해서 작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마스터링은 반드시 전체 트랙이 모두 준비된 이후 한 번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시간을 쪼개기 어려우니 일단 할 수 있을 만큼 쳐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저메인 존스를 한국으로 부른 것인데.
느긋한 이 아저씨와 작업을 하다가 나는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나게 되었다.
* * *
아이즈 컴퍼니의 연습실에선 데이바이데이가 안무를 맞추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다.
김우진의 하얀 와이셔츠로 연습실 조명이 화사하게 비치고 있었다.
방송에 나갈 것을 대비해서 준비한 그레이 톤의 슈트는 등 뒤의 간이 의자에 걸쳐놓았다.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 상대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내내 그의 얼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게임이라면. 그래서 지금 판을 대충 끝내 버리고 이전에 세이브해 둔 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도 김우진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가장 먼저 멤버 구성을 다시 손볼 것이고, 방송 포맷도 지금과는 다르게 할 것이다. 여러모로 후회가 가득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시즌을 게임 스테이지로 인식하는 김우진은, 지금까지 매번 실시간 게임을 즐겨왔다.
세이브 같은 건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쨌든 저질러 놓은 상황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죄송합니다.”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서아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20분 지각.
“정말 죄송합니다.”
먼저 호흡을 맞추고 있던 세 명은 하던 동작을 멈추었고 음악만이 공허하게 이들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김우진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왜 멈춰? 누가 멈추라고 했어?”
김우진의 무거운 음성이 음악 아래로 깔리자 먼저 와 있던 세 명은 다시 동작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 멈춘 동안 흐름이 깨져서인지 리듬을 제대로 타지 못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리는 종아리가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청바지와 네이비색의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기에 땀으로 젖은 이마가 연습실 조명에 번들거렸다.
언뜻 보면 고생 하나 모르고 자라온 부잣집 따님 같은 얼굴이었다.
지극히 동양적이면서 우아하고 청순한 느낌이 가득한 마스크였다.
그녀의 사연이 공개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속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지나친 보호 속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아온 사람처럼 깨끗하면서도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알려지자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렷하면서 청순한 눈동자에는 어쩐지 진한 슬픔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고, 밝게 웃는 모습조차 아픔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것이 언뜻 엿보이고 있었다.
아리가 스타덤에 오른 것은 단지 부모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걸 감당해내는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데이바이데이 네 명 중에서 가장 잘 웃는 편이었다.
어찌나 환하게 웃는지, 그걸 보고 있기만 해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였다.
‘저 괜찮아요.’
‘저 이겨낼 수 있어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미소였다.
“서아리.”
“네.”
“30분 늦겠다고 했다면서?”
“아…… 네.”
“공장에서 일이 늦게 끝나서?”
“죄송합니다.”
아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네.”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은 아리는 서둘러 데이바이데이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날 아이즈 연습실에서의 촬영은 원래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시작되었다. 촬영 때는 연습이 느슨해지곤 해서 부족한 연습량을 채우기 위해 김우진이 요청한 것이었다.
아리에게는 갑자기 당겨진 연습 시간이 곤란했다. 회사를 빠질 수 없었던 그녀는 최대한 일찍 일을 마쳐보겠다고 했고, 그래도 30분 정도는 지각할 것 같다고 통보해 온 것이었다.
“그만큼 절실하지 않다는 의미겠지?”
곡 하나가 끝났다. 열띤 안무를 소화한 네 명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거, 언제까지 할 거야?”
김우진은 아리를 도전적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 달까지 하고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번 달…… 그럼 생방송 들어갈 때 즈음에 그만둔다는 얘기네? 그때부터 열심히 하겠다 그런 얘기야? 데뷔 물 건너가고 다 끝난 다음부터 열심히 하게?”
“죄송합니다.”
아리는 고개를 숙였다. 격한 안무를 하는 동안 머리끈에서 빠져나온 한 가닥이 그녀의 이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절실하지 않으면 시작하지 말라고. 이거저거 계산적으로 재지 말고, 이쪽으로 뛰어들 거면 확실하게 그만두고 한쪽에 올인해. 내가 말 안 했어?”
김우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높아지고 있었다.
“공장을 그만두긴 할 건데, 바로 그만두면 그쪽에 손실이 발생하니까 바로 못 그만둔다…… 이게 말이 되니? 그 공장 사람들에게 피해주기 싫어서 거길 더 다니겠다는 거잖아. 그럼 너 때문에 데뷔 못 하게 되는 나머지 셋한테는 피해주는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너 한 명 때문에 다 엉키고 있잖아! 방금 전까지 너 없이 세 명이 할 때는 잘되던 게, 왜 네가 오고 나서 안 되는 거냐고!”
내내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김우진의 목소리가 결국 터져 버렸다.
“최소한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죄송합니다.”
“나머지 셋도 잘한다는 거 아니야. 얼마나 연습이 부족하면 한 명이 더듬는다고 금방 거기에 말려들어버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아이즈 컴퍼니의 A&R 본부장이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빨리 나오라고.
그리고 카메라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연습하고 있어. 이따 다시 와서 볼 테니까.”
“네.”
* * *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 데서 뭐 하는 거야?”
“상관없다니까요.”
“김 실장은 이런 게 잘 안 돼. 나긋나긋하게 해봐. 억지로.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지난 부터 김우진은 악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데이바이데이를 응원하고 있는 팬들마저 김우진을 악독한 사람으로 여길 정도였다.
“상관없어요. 제작자가 맘에 안 든다고 떠나가는 팬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방금 그거, 그대로 나가면 또 욕먹을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요. 제가 욕먹는 거하고 이번 프로젝트가 잘되는 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김우진은 인터넷 반응도 꼼꼼하게 모니터하는 편이었다.
데이바이데이에 관련된 것을 찾아보다 보면 자신에 관한 온갖 악플이 넘쳐났지만, 그런 걸 볼 때마다 마치 남일 대하듯이 넘길 뿐이었다.
그의 인격은 물론이고 그의 애미애비까지 들먹이며 욕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한 번 대충 훑어보고 그 자리에 잊어버렸다.
중요한 건 대중들이 데이바이데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었고 자기에 대한 욕은 그의 멘탈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
“방송 그대로 나가도 됩니다. 어차피 한 번은 겪고 지나갈 일이에요.”
“뭘 겪어?”
“아리 말이에요. 거품이 끼어 있으면 그걸 걷어내고 가야 합니다. 데뷔하기 전에 이런 프로그램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쳐낼 건 쳐내고, 그게 아니라면 지킬 건 확실하게 지킵니다. 그 라인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파악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장면은 3주차에 그대로 전파를 탔다.
세 명이 연습을 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아리가 늦게 들어오는 것, 그리고 김우진이 호통을 치고 연습실을 나가는 것까지.
-저 새끼 또 x랄이네. 프로듀서 못 바꾸나요? 상대 팀하고 너무 비교되잖아.
-그럼 너네가 생활비를 주든가. 당장 동생하고 생활할 돈이 없으니까 아직 공장 다니는 거잖아.
-그래도 이건 아닌 듯. 다른 세 명한테 피해 준다는 건 맞는 말임
-아리 욕하지 마
-아리 너무 불쌍하다. 다른 애들은 편하게 연습만 하면 되는데 아리는 먹고 살기 위해 힘든 일을 계속 해야 되고. 빨리 데뷔해서 음악만 할 수 있게 되길
-저러면 안 되죠. 연습생 되었을 때부터 공장하고 얘기를 해놨어야죠. 언제 갑자기 데뷔할지 모르는데ㅉㅉ 그동안 대책 없이 있었다는 거네요. 대비를 하나도 안 하고
그리고 그 장면으로 인한 파장은 꽤 커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진행된 데이바이데이와 레드애플의 두 번째 대결은 지난주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사전투표 점수 14 대 6
심사위원 점수 5 대 15
시청자 점수 34 대 26
총 점수는 데이바이데이가 53점, 레드애플이 47점.
지난주 14점까지 벌어졌던 차이가 이번에는 6점으로 줄어들었다는 변화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인터뷰 룸을 나와서 세트장을 지나치는 동안 김우진은 몬스터 뮤직의 레드애플 네 명과 마주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상대 팀 프로듀서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곁을 지나치는 애들을 김우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개처럼 레이스가 펄럭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채아에게, 김우진의 시선이 멈추었다.
만약 이것이 게임이라면. 그래서 세이브해 두었던 포인트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쟤를 붙잡지 않았을까.
그때는 놓쳤지만 그래도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자기 주변에 충분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도 보다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던 장세은이 그의 곁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놓쳐 버린 사람은 일 년 사이 괴물이 되어서 눈앞에 나타나 버렸다.
이날의 무대 또한, 김우진의 입장에서도 상대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채아가 훌륭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퍼포먼스에서는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메인 보컬의 기량에서 완패였다.
내가 키웠어도 저만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철없는 바람 속에서,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이었다.
그 사람이 했던 걸 자기도 해낼 수 있을지, 사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인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대기실로 들어가자 데이바이데이 네 명의 얼굴은 모처럼 밝았다. 하찮은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김우진도 이번만큼은 굳이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희 이겼어요!”
“봤어.”
모든 것에 있어서 완벽한 점수를 줄 수 있다고 여겼던 연습생 장세은이 들뜬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4인조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 아이 때문이었는데.
만약 그 사람이 이 아이를 맡았다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잠재력까지 모두 이끌어냈을까.
두 번 연속으로 승리했다는 성취감이 끼어들 자리도 없을 정도로, 김우진의 머리는 복잡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날 또한 웃음기가 조금도 없는 얼굴을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
* * *
그저께 점심에 도착한 저메인 존스는 시차 적응이 필요하다며 우리 회사에도 들리지 않은 채 곧바로 호텔로 들어갔다.
나는 인사라도 할 겸 호텔에 들리려고 했지만, 저메인은 오지 말라고 유난히 강조했다.
[you busy!]서로 디엠을 주고받을 때에도 늘 그랬듯이, 그는 내가 딱 알아들 수 있는 영어로 말해주었다. 일본에서도 영어 못하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서 이렇게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그리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사람답게 그는 하루 만에 시차 적응을 마치고 회사로 찾아와 주었다.
전에 한 번 사용했던 Welcome to Korea 현수막을 이번에도 똑같은 위치에 걸어두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그 길쭉한 팔로 나를 휘감으며 ‘마이 맨, 미쓰 유’를 반복하며 정겹게 인사해 주었다.
이곳에서 그는 준비된 네 곡의 보컬 트랙을 레코딩할 것이고, 그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미리 언급해 주었다.
* * *
를 시작한 이후 내내 가라앉아 있었던 김우진의 목소리가 이날 만큼은 유난히 밝게 들려왔다.
-내일 저녁 아홉 시 어떠세요?
“그렇게 늦게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애들 중에는 낮에 일하는 애가 끼어 있어서요.
“아…….”
4주차의 내용에는 양쪽 프로듀서가 상대의 팀 멤버들을 캐어해 주는 것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일정을 잡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넉넉하게 열 시로 잡죠.”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괜찮아요. 원래 늦은 시간까지 일하잖아요.”
누군가 지각하는 걸 카메라에 또다시 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시간을 더 늦추어버렸다.
“그럼 김 실장님은 모레 다섯 시에 그대로 오실 거죠?”
-그래야죠. 저는 언제든지…… 그리고 무조건 원하시는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나는 내일 밤 아이즈 컴퍼니를 방문해서 데이바이데이와 함께할 것이고 김우진은 그다음 날 우리 회사에 오기로 했다.
-저기 박 피디님.
“네?”
-모레 가면 볼 수 있는 건가요?
“보다뇨?”
-제이제이요.
“아…….”
나는 제이제이 쪽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창가 쪽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럴 거예요. 아마.”
-혹시 지금도 같이 있어요?
“네.”
-역시.
“여기 있는 동안은 저하고 계속 작업해야 하니까요.”
-어때요? 문제는 없어요?
“잘되고 있어요. 양보할 건 양보하고, 서로 배려해 주면서 계속 작업하고 있습니다.”
-둘 다 탑 클래스의 뮤지션들이니 척척 맞아떨어지겠죠.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
“뭐…… 지금까지는 잘되고 있습니다.”
-저기, 아실지 모르겠지만 은 제 인생을 바꾼 앨범 중 하나입니다.
은 저메인이 시골의 트럭 운전수와 만들었던 그 앨범이다.
“그 앨범 좋아하세요?”
-맨날 들었어요. CD로 들었던 시절인데, 얼마나 CD 플레이어에 넣었다 뺐다 했는지 CD 표면에 붙어 있는 제이제이의 얼굴이 다 긁혀나가고 없을 정도예요.
“알았어요. 무슨 소린지 알겠습니다. 모레 오시면 두 분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볼게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김우진과 통화를 마칠 때까지 저메인은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창틀에 발을 올려놓고 그쪽으로 쭉쭉 엎드리기도 하고, 팔을 쫙 펴고 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누가 보면 곧 트랙을 달려야 하는 육상 선수로 알 것 같았다. 탄력적인 피부와 늘씬한 몸매도 그렇고.
어쨌든 그와는 서둘러 작업을 마쳐야 했다. 나에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헤이, 제이제이!”
그렇게 불렀더니 그는 창틀에 올려놨던 다리를 그제야 바닥으로 내린 뒤 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의 일 얘기를 합시다.]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번역기를 거친 문장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저메인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오케이 사인을 보내주었다.
아직 영어가 부족해서 의사소통은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번 통역이 가능한 직원을 옆에 둘 수도 없으니.
“디스…… 앤드 디스…… 유어 보이스. 오케이?”
“오케이!”
모니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저메인이 한국에 온 지 3일째, 그래도 곡 작업은 제법 진도를 보이고 있었다.
* * *
현재까지 준비된 곡은 모두 네 곡이었다.
그리고 이 네 곡은 모두 사랑에 관한 노래였다.
“여자? 아니면 남자? 혹은 인류 모두를?”
저메인은 그렇게 물었다. 나는 당연히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노래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자?”
“그래요. 여자.”
“오.”
그는 흡족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네 곡은 한 여자에 관한 곡들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노래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그는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앨범은 전체 수록곡이 하나의 컨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곡은 그녀를 처음 만나는 느낌을 노래로 표현했다.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을.
두 번째 곡은 그렇게 만난 낯선 사람을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을.
그리고 세 번째 곡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에 푹 빠져 버린 감정을 노래한다.
“세 번째 곡이 타이틀입니다.”
“타이틀?”
그가 생소한 말을 접했다는 듯이 묻자, 나는 싱글로 발매할 곡이라고 정정해서 말해주었다.
외국은 앨범과 싱글의 개념이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타이틀곡이라는 말이 없다. 우리나라에선 앨범을 내고, 타이틀곡이라는 이름으로 이 앨범에서 어떤 곡이 메인인지 표기하지만 외국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싱글로 따로 빠져나오는 곡이 있을 뿐이었다.
“뭔지 알겠어.”
“제일 먼저 보내준 그 곡이에요.”
“발라드라고 했던 거?”
“맞아요. 그거.”
그리고 네 번째 곡은 저메인과 내가 듀엣으로 부르는 곡이다.
“이 느낌을 잘 표현해야 합니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지려고 하는 것이고, 나는 그걸 막는 겁니다.”
“나는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그걸 막는 친구, 뭐 그런 건가?”
“아뇨. 둘 다 자기 자신이에요. 내면의 목소리가 둘로 나뉘어져서 갈등을 하는 거죠.”
“얼굴 양쪽에 뜨는 천사와 악마, 뭐 그런 거?”
“비슷해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고 노래하고, 당신의 목소리는 ‘오, 그건 안 돼!’ 하고 막는다는 거지?”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일단 여기까지 곡이 준비되었다. 이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선 새로운 곡이 필요했다.
“그런데 난 이해할 수 없어. 왜 사랑에 빠지는 걸 막아야 하지? 그것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사람에게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까요.”
“무슨 사정이길래?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세상인데 그걸 왜 막아?”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상황에 있는 건 아니에요.”
“혹시 자기 가족이라서? 엄마라던가, 아니면 여동생?”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서?”
“아니에요.”
나는 아니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No! No!
“그렇다면 나에겐 너무 어려운 노래야. 그 감정이 뭔지 이해할 수 없어. 왜 사랑에 빠질 수 없는지. 그렇다면 세 번째 곡도 마찬가지야. 결국은 사랑에 빠졌지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노래하는 거잖아.”
“잘 이해하고 있네요.”
그런 것이었다. 세 번째 곡은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다가 마침내 자각하는 것을, 그리고 네 번째 곡에서는 남자의 내적 갈등을 노래하는 것이다.
“영민! 혹시 이건 당신의 이야기야?”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이해하기 어려워. 이런 게 한국의 정서인가.”
그러면서 그는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연습을 꽤 한 것인지 제법 능숙하게 멜로디를 소화하고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런 건 아닐 테고…… 왜냐면 내적 갈등이라는 건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잖아. 결정권이 내 자신에게 있다는 거니까.”
“그렇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아름다운 여자가 내 앞에 있다? 그럼 그 사람을 사로잡을 궁리를 해야지, 왜 머뭇거리는 거야?”
어쩌면 가수의 성향과 앨범의 컨셉이 안 맞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되지? 다섯 번째 곡은 뭘 노래하는 건데?”
그는 까만 얼굴 속에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곡이 없어서 알 수 없습니다. 앞일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 * *
플레이보이를 위한 곡을 만들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쁜 여자라면 다 좋아’라는 내용을?
하지만 이건 내 쪽에서 곡을 만들기 어려웠다. 어떤 소리로 그런 걸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즈 컴퍼니를 찾아가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다. 그래서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나는 기분 좋게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아무튼 영민이 말하고 싶은 걸 이해해 보도록 노력할게. 난 내년 즈음에 결혼을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어쩌면 영민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결혼이라는 건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지. 그걸 앞두고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고민하게 돼.
저메인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세 번째 결혼이라고 한다.
그의 여성편력은 예전부터 유명했고 두 번의 결혼을 포함해서 그와 만났던 여자들은 대부분 유명한 연예인들이었다.
그쪽 세계에서 대놓고 ‘나 바람둥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널렸지만, 그의 여성편력은 유난히 유명했다. 언제나 한결같은 그의 여성 취향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디카프리오가 언제나 25세 이하의 늘씬한 모델과 사귀는 것에 비해, 저메인 존스는 강한 여성 스타일에 푹 빠지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중들에게 공개된 첫 연애 상대이자 첫 번째 부인이기도 했던 사람은 배우였는데,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로 나온 걸 보고 홀딱 반했다고 한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짧은 머리, 그리고 뺨에 깊게 새겨진 칼자국, 뭐 이런 거에 반했다고.
일본에서 방송 출연을 할 때에도 스탭들에게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유아연에게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졌다고 하니 그의 취향은 정말로 확고했다.
어쨌든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인 만큼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도 쉽게 이해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쪽에서 공감대를 이끌어내긴 어려웠다.
-맘에 드는 여자가 눈앞에 있는데 왜 고민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일단 사랑에 빠지고 보는 거야. 이런 건 고민할 이유가 없어.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라고. 이성적으로 뭘 재보고 그러는 건 아니야.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기 때문인지 아이즈 연습실에는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김우진은 얼른 내려와 나를 반기며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카메라는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좀 기다려야 되는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일찍 온 거잖아요.”
직원들의 퇴근 시간과 겹쳐 버려서 건물 안은 조금 분주한 분위기였다.
TV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었던 익숙한 얼굴의 보컬 트레이너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내 쪽을 지나쳤다.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세은이 좀 먼저 봐주실래요?”
김우진은 그런 말을 하며 연습실 안에 있던 장세은을 불러냈다.
앳된 얼굴의 세은이는 복도로 나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요 몇 주 동안 진한 무대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맨얼굴을 보니 전혀 다른 아이를 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무대에 올랐던 것은 큰 언니,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애는 막냇동생. 그런 식으로.
“세은아. 나 기억하니? 너 저번에 대기실에 가방 두고 갔을 때 나랑 마주쳤잖아.”
“아, 네. 그때…….”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아주 부끄럽다는 듯이 세은이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김우진과 나는 세은이를 데리고 보컬 레슨실로 이동했다. 복도를 지나치는 아이즈의 직원들은 힐끔거리며 이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따금 나를 보고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오늘은 좀 정신이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조금 뒤에 보시게 될 테지만 팀 멤버를 한 명 바꿀 거라서요.”
“팀 멤버요?”
“데바데 데뷔조에서 한 명을 교체할 겁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저희가 질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면서 김우진은 내 쪽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이제 와서 멤버를 바꾸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저도 가능하면 그대로 가려고 했지만……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 아니고 저번 프로그램에서 선발된 애들이라서 그런지 조합이 맞질 않아요. 그래서 고심 끝에 결정했습니다. 참, 이렇게 해도 되는 거 아시죠? 마지막 날까지 멤버 변동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런 룰이 있기는 했다. 마지막 날까지 누가 데뷔할지 알 수 없다는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막방이 고작 열흘 남아 있는 이때?
“시청자들이 수긍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상관없습니다. 저는 또 욕을 먹겠죠. 하지만 이 팀을 1년, 2년 반짝 활동시키고 접을 게 아닌 이상 처음부터 확실하게 잡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의 여론이 무서워서 향후 10년을 망칠 순 없잖아요.”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옆을 걷고 있는 세은이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세은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마치 자기가 무언가를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주 방송 초반에는 멤버 교체에 대한 내용이 나갈 겁니다. 이거 승인받느라고 제가 고생 좀 했어요.”
* * *
-4인조로는 팬들이 원하는 캐릭터를 다 소화해낼 수 없어요. 우리가 왜 일곱 명, 여덟 명씩 떼거리로 내보는데요. 4인조는 언제적 방식인지…… 몬스터는 그래서 좀 고리타분한 그런 게 있어요.
스튜디오에서 김우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다.
옆에 앉아 있는 내가 몬스터 뮤직의 직원인 것을 모르고, 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사람인 줄 알고 그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린 것이었다.
-초면에 실수가 많았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몬스터는 워낙 음악을 잘하는 회사니까…… 저희 같은 장사꾼이 질투를 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때요?”
김우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세은이는 무대에서 봤을 때에도 뛰어난 기량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이였다. 목소리가 잘 다듬어져 있었고 퍼포먼스와 무대 매너 쪽에서도 흠잡을 것이 없었다. 오랜 기간 성실하게 트레이닝 받아온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파트를 소화하는 모습을 보다가 내 앞에서 솔로 곡을 부르는 걸 보니 이 아이의 목소리가 더욱 자세히 들려왔다.
두성을 섞어서 소리를 부드럽고 가볍게 만드는 요즘 트렌드와는 달리, 세은이는 자기 목소리를 힘으로 밀어 올리는 벨팅 창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이건 아이즈 컴퍼니 메인 보컬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이그룹, 걸그룹을 가리지 않고 아이즈의 메인 보컬들은 진성으로 힘 있게 내지르는 발성을 무기로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계보라도 할 수 있는 연장선에 세은이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하네요. 소리를 그저 예쁘게 만들어서 내보내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들으니까 그런 점이 더 잘 들려요.”
그리고 그런 계보 속에서도 유난히 밝은 빛이 느껴질 정도로 세은이는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즐기면서 노래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연습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막상 노래를 시켜보니 어깨를 들썩이며 무대에서처럼 자연스러운 눈으로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부족한 점이 보이면 전부 말씀해 주세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촬영팀은 이곳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에서 김우진과 인사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계속 붙어 다닐 것 같았지만 연습실에는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미리 얘기가 되었다는 건데…… 그렇다면 안 좋은 소리를 할 거면 지금 하라는 걸로 들리기도 했다. 이따 방송에 내보낼 분량을 만들 때에는 좋은 소리만 해달라는 것으로.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내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카메라를 꺼놓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달라고.
“괜찮아요. 이대로 계속 성장하면 훌륭한 보컬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따끔하게 지적해 주세요. 오늘 하루만큼은 박 피디님 연습생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다른 트레이너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발성을 내 멋대로 지적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깐 지켜본 것에 불과하고, 이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 트레이너는 좀 더 길게 보고 하나하나 조금씩 쌓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걸 김우진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테고.
“아마 지금 세은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목소리에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성대를 조이는 연습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때 울림을 풍부하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트레이너가 지향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 나름대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노하우를 덧붙여서.
“이해하기 쉽도록 내가 예를 들어줄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양한 발성법으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아이즈 컴퍼니의 연습실을 내 목소리로 가득 울리게 하는 건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세 가지 발성으로 노래를 불렀잖아. 이 중에서 어떤 게 세은이하고 잘 맞을 것 같아?”
“네?”
“공명점을 다르게 둔 게 안 느껴져?”
“아…… 그게…… 노래를 너무 잘하셔서.”
“……?”
“모르겠어요. 너무 잘하셔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세은이는 오히려 감탄 어린 얼굴로 굳어 있었다.
“와, 박 피디님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데 진짜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요. 그러지 마세요.”
“몬스터 가수들이 왜 노래를 잘하나 했더니, 딱히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매일 이런 목소리를 듣는다면 저절로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요.”
이런 건 카메라가 좀 담아야 하는데.
아직 촬영팀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가수 하셔야겠네. 아니면 이 정도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시던가요.”
* * *
“세은이는 이제 들어가고, 가서 영선이 좀 여기 오라고 해.”
“네.”
장세은이 그렇게 자기 연습실로 돌아가고,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이 다른 연습생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얘는 베키라고 합니다. 데이바이데이 데뷔조에 새로 합류하게 된 멤버예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본명은 정영선, 하지만 이름이 올드하다며 ‘베키’라는 활동명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영선아. 박 피디님 앞에서 랩 한 번 해봐.”
처음 보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지 잠시 머뭇거렸던 영선이는 목을 가다듬은 후 바로 랩을 시작했다.
아마도 니키 미나즈의 곡인 듯싶었다. 톤을 변화시키며 풍부한 성량으로 벌스를 들려주는 것이 거의 니키 미나즈의 성대모사처럼 들릴 정도였다.
랩퍼로서 개성이 떨어진다는 결점을 안고 있는 셈이었지만 아이돌 그룹에서 이 정도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실력이었다.
“잘하네요. 우리 팀에도 이런 랩퍼가 있다면 곡을 훨씬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을 텐데…….”
“안무 실력도 괜찮아요.”
“그럼 누가 빠진 거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물어봤다.
“유나라고 아시죠?”
“아…… 유나요? 그 키 큰 애?”
“일단 걔를 빼기로 했습니다.”
유나는 데이바이데이에서 랩을 맡고 있는 멤버였다.
“유나는 아직 연습이 부족해요. 힙합씬에 있던 애를 데려온 거거든요. 얼마 안 됐어요. 우리 연습생 된 지. 특히 댄스 쪽은 이제 막 시작한 거라서 따라오는 속도가 제일 늦어요. 우리 연습생 중에서도 2군 정도로 분류되던 애인데 넥스트 유닛 때 시청자 득표가 가장 높아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던 거죠. 아리처럼 말이에요.”
나는 아리가 빠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김우진이 넷 중 한 명을 뺀다면 아리가 당연히 그 대상이 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감안하면.
“아리는 한 번 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포지션에서 대체할 연습생이 마땅치 않아서요. 유나 같은 경우는 영선이가 워낙 잘해서 고민 없이 교체할 수 있었지만 아리 포지션은 애매해요. 아리가 지금 구멍인 건 맞지만요.”
“한 번 더요? 그럼 막방 때 또 바뀔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죠.”
인재풀이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는 건가.
“아리는 뜨거운 이슈 속에서 있어서 건드리기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이번 방송 보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떤지 파악해 보려고 해요.”
* * *
반응은 예고편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멤버 교체를 알리는 내용이 예고로 나가자 시청자들의 반응은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누가 교체되는 건지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측성 댓글이 절반 정도, 그리고 남은 절반은 아이즈 컴퍼니와 김우진을 욕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시작된 4주차 방송은 김우진의 인터뷰로 시작되었다. 왜 멤버를 교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보다 높은 수준의 무대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언급도 강조되었다.
탈락한 멤버의 인터뷰,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열심히 연습해서 언젠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 등등의 내용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슬픈 얼굴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 다음에 새로운 멤버 베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이날은 생방송이 있는 회차였고, 무대 또한 생방으로 그대로 나가기 때문에 연습 과정을 다루는 분량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전에는 무대를 반복 편집으로 내보내며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대결을 하는 무대의 분량이 꽤 길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의 연습 장면 또한 제법 긴 시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고 신인이요? 아! 데뷔를 예전에 했었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채아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밝은 대낮이었고 야외였다.
-맞아요. 데뷔를 한 번 했었죠.
그리고 이어지는 프론트 페이지의 뮤직비디오. 채아가 맡고 있는 파트가 잘 편집되어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준비가 잘 되지 않았어요. 정말 영세한 기획사여서…… 사장님하고 같이 동대문에 의상 사러 다니고, 멜론에 우리 노래 올라오면 박수 치면서 좋아하고 그랬었죠.
-그래도 방송에 나간 적은 있었지?
조 팀장의 목소리가 화면 속으로 끼어들었다.
-두 번이요. 음악 방송에 나갔던 적이 있어요. 2년 활동했는데 1년에 한 번씩 나간 셈이죠. 그거 말고 행사도 몇 번 해보고. 여섯 번인가.
-여섯 번? 그럼 그게 전부였어?
-네. 정말 웃기죠? 2년 동안 8일 활동했어요. 그때 진짜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그렇고 같이 있었던 언니들도 그렇고.
-힘들었겠네.
-그때는 연습실이 따로 없어서 스케줄이 없을 때 모일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밖에서 우리끼리 모였지만 앞날이 희망적이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다운되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고…… 이러다가 내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막 들고.
그런 얘길 하면서도 채아는 내내 밝은 얼굴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환하게 웃고 있는 채아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 요즘 진짜 행복해요. 맨날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있고, 노래하고 춤추는 거 매주 방송으로 나가고.
-져도 괜찮다고 말한 게 그래서 그런 거야?
-네? 그거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채아는 카메라 쪽으로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기기 위해서 애쓰는데 제가 그런 소릴 해버리면…… 그런데 진짜로, 저는 만족해요. 이렇게 방송 나올 수 있는 게 어디예요. 아까 저한테 고작 두 번 방송 나가고 행사 여섯 번밖에 안 했냐고 놀라셨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앨범까지 냈는데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거예요. 학교도 안 다니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러자 카메라는 그 옆을 걷고 있는 지윤이 쪽을 비추었다.
-너도 동의해? 얘는 져도 된다는데?
-저요?
지윤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저희 선생님 화내실 것 같은데.
-박 피디님? 별로 안 무서운 분이잖아.
-그래도 승부에 되게 집착하세요.
-그건 몰랐네.
-근데 저도 지금 너무 만족해요. 비츠걸스 데뷔조에서 탈락하고 진짜 죽고 싶었어요. 사람이 이래서 우울증에 걸리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상대는 너를 탈락시킨 심사위원이었어.
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윤이는 그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김우진에 의해 탈락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내가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인데 나를 탈락시켰어? 그런 걸 보여주면서.
-그런 쪽으로 몰고 가지 마세요. 저는 다 잊었어요.
지윤이는 이번에도 입을 가리며 웃었고,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채아는 지윤이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며 ‘진짜야? 아닌 거 같은데?’ 하고 물었다.
-그때는 혼자였잖아요. 비츠걸스 데뷔조에서 탈락했을 때에도 혼자였고. 그냥 혼자 모든 걸 다 짊어지고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팀 멤버들이 있고, 의지할 수 있어서 마음에 훨씬 편해요. 지금 당장은 지더라도 얘네들하고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이 지난 회차에 비해 길게 편성되어서 그런지, 이렇게 점심을 먹으러 밖에 나갔다 오는 장면부터 연습실을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넷이 장난을 치는 장면까지 모두 방송으로 나갔다.
-져도 된대요?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요? 미친…… 최선을 다해서 이길 생각을 해야지. 어휴, 저 늙은이들 진짜.
팀의 막내 지민이 쪽으로 카메라가 다가가자 대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언니들 쪽으로 전해졌는지 카메라 앞으로 스트레칭볼이 마구 날라오기 시작했다.
-아 쫌, 그만 좀 던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짐볼이 날아오더니 지민의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치워 버렸다.
두 팀의 연습 장면은 교차하면서 계속 이어졌고, 잠시 후 화면은 웅성웅성 떠들고 있는 관객석을 비추면서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먼저 무대에 오른 우리 애들은 지난주보다 더욱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미션은 두 가지였다. 8090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오래전 가요를 지금의 스타일로 편곡해서 다시 부르는 것, 그리고 외국곡을 하나 선택해서 부르는 미션.
일주일 만에 두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은 아직 연습생인 아이들에게 있어서 버거운 일이었다.
편곡에서 소요되는 시간을 빼고, 방송 당일까지 제외한다면 실제로 연습을 할 수 있는 날은 사흘에서 나흘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두 곡을 준비하는 것은 베테랑 아이돌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애들에게는 이런 것에 있어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지금의 멤버 구성으로 연습을 해왔으니 연습생답지 않게 호흡이 척척 맞는다는 것이 첫 번째 강점,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연습을 해오면서 소화해낼 수 있는 레퍼토리가 많다는 것도 또 하나의 강점이었다.
8090 미션, 외국곡 미션 두 가지 모두 언젠가 월말 평가 때 했던 곡으로 선택했다.
안무까지 연습한 적이 있었던 곡이기 때문에 연습은 수월했다. 자기들끼리 짐볼을 던지면서 놀고 있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맞춰본 적이 있는 곡인가 보네요.”
옆에 앉아 있는 김우진은 금방 눈치챘는지 그런 말을 했다.
“저희는 작년부터 저 멤버 구성으로 계속 연습을 시켰거든요.”
“하긴 그렇게 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애들은 합숙을 하게 되면서 팀워크가 더욱 탄탄해진 듯싶었다.
아직까지도 막내 라인 애들이 언니 라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는 비츠걸스에 비해서, 얘네들은 연습을 시작했던 초기부터 서로 말을 편하게 하더니 요즘에는 치고받고 장난을 치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무대 위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대견하게 보일 정도였다.
“선곡도 괜찮고…… 편곡은 박 피디님께서 하신 거예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곡 모두 EDM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원곡의 분위기를 새롭게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무대였다. 생방송에 참여한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하지만 내가 정작 놀란 것은 이어진 데이바이데이의 무대였다.
데바데는 뉴잭스윙에 영향을 받은 90년대 가요를 힙합 비트로 편곡해서 다소 매니악한 사운드로 무대에 올랐다.
그런 리듬 위에서, 이번에 새로 합류한 베키의 랩은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무대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개성으로만 보면 힙합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는 전 멤버가 더 나았지만, 외국의 유명 래퍼들을 모방하고 있는 베키의 플로우가 보다 귀에 잘 들어온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쪽 지점에서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멤버가 있어서 그런지 팀의 메인보컬인 세은이의 목소리도 이전 무대와는 달리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무도 급하게 연습한 티가 나서 동선이 꼬이거나 대열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종종 보였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자연스럽게 흐름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와. 이거…… 랩은 창작해서 넣으신 거죠?”
“그렇죠. 원래 랩이 없는 곡이잖아요.”
내 표정이 카메라에 계속 잡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탄 어린 얼굴이 만들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4분의 1을 보강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밸런스가 잡히면서 무대의 퀄리티가 높아졌다.
그렇다면…… 보다 나아진 무대로 시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관건이었다.
* * *
무대 위에는 공연을 마친 두 팀이 나와 있었고 진행자가 양 팀의 사이에 서 있었다.
마치 음악방송의 피날레를 보는 듯했다. 관객들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무대 위는 이제 곧 정리를 해야 한다는 듯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점수 집계가 끝나고 1번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무대 위에는 딱딱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번 주부터 점수의 산정 방식이 달라졌다. 심사위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방청객 점수가 대신한다.
총점 100점 중에서 사전 투표 20점, 방청객 점수 40점, 시청자 점수 40점, 이걸 양 팀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자, 이제 점수가 모두 집계되었습니다. 시청자 투표가 방금 종료되었구요, 지금 이곳에 자리를 해주신 방청객들의 점수가 모두 합산되었습니다.
엠씨는 점수가 정리된 종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양옆에 자리한 두 팀의 멤버들이 초조한 듯 마른 입술을 훑으며 그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먼저 사전 투표 점수.
레드애플은 8점, 데이바이데이는 12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앉아 있는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줄어들었다. 멤버 교체의 여파가 없을 순 없었다.
-그다음으로 방청객 점수입니다.
화면의 절반은 양 팀의 점수가 그래프로 표시되고 있었고 그 아래에 멤버들의 얼굴이 돌아가며 잡히고 있었다.
그래프는 한 팀씩 서서히 올라갔다.
레드애플 24점. 데이바이데이 16점.
총점수는 32점 : 28점
점수가 발표될 때마다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김우진이 처음으로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한 손으로 턱을 받혔다.
-32점과 28점, 4점 차이가 나고 있는데요,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시청자 점수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리드를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 애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며 나타나고 있었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엠씨는 눈썹을 꾹 구기며 진지한 표정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 * *
방송이 끝나고 김우진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듯이 소파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미팅 들어가셔야죠.”
오히려 내 쪽에서 그런 말을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박 피디님 축하드립니다.”
“아직 과정일 뿐이잖아요.”
“아뇨. 이대로면 다음 주는 안 봐도 결과가 뻔해요.”
시청자 점수는 우리가 31점, 데이바이데이가 고작 9점. 이번 일에 있어서는 김우진이 시류를 완전히 잘못 읽었다는 것이 점수로 드러났다.
총점은 63 대 37으로 우리 레드애플의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 최대 점수 차이였다.
회의실로 이동하는 동안, 평소라면 핸드폰을 열고 게시판과 SNS의 반응을 살펴보기 바빴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회의실의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을 때에도 김우진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깍지 낀 두 손 위에 이마를 얹어놓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김 실장님.”
“…….”
“김 실장님?”
“…….”
“김 실장님!”
“어? 나 불렀어?”
자다가 방금 막 일어난 사람처럼 그는 흐린 눈빛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 멤버 교체 또한 김우진이 거의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이라고 했다.
힘겹게 승인을 받아낸 거라고 앓는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 이곳의 분위기가 그렇듯이 그는 아이즈 컴퍼니 내에서 기획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추진하는 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은 없어 보였다.
회사의 임직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일에 있어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확실했던 그가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옆에서 보기에 불안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 * *
그래도 이긴 건 이긴 거라고, 회의실을 나오면서 제작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마지막에 역전을 하셨어요. 제일 중요한 시점에. 이제 다음 주 예고편에 레드애플만 계속 나오고 막방 분량도 제일 많이 차지할 거니까 승부는 결정된 거 같아요.”
아이즈 프로덕션의 직원 한 명이 유난히 살가운 척을 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라도 이미 결정 난 거나 다름없지만. 시청자 반응 보셨어요? 난리에요. 김 실장님은 유나 정도를 빼는 건 반향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본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사람이 때로는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래도 이번엔 너무 큰 실수를 하셨어요. 감각 하나만큼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는데 어쩌다가 그런 오판을 하셨는지.”
대기실로 돌아오니 애들은 환한 대낮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던 애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겼어요! 보셨죠?”
“축하해.”
“저희가 진짜로 이겼어요. 세상에!”
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크게 벌린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언제나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은설이도 기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듯이 정신 사납게 대기실 안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오늘 잘했죠?”
채아는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와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는 두 눈으로 물었다.
“잘했어. 오늘 최고의 무대였어.”
칭찬을 해주자 움찔거리던 입이 금세 환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그렇게 애들을 격려해 준 뒤 지하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수시로 타이어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다가오며 힘찬 엔진 소리를 여운처럼 남긴 뒤 사라졌다.
시동을 켜자 이곳으로 올 때 듣고 있었던 저메인 존스의 노래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따뜻한 알앤비 사운드였다.
바로 출발하기엔 이곳에 꼭 무언가를 두고 가는 느낌이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은 카톡, 문자 메시지 등이 수십 개 쌓여 있었다.
그걸 확인해 보는 건 뒤로 미루고 시청자들의 반응부터 살펴봤다.
-레드애플은 안정적이라서 편하게 감상하게 되는데 데바데는 틀리는 게 많아서 불안해요. 아리가 인기 많은 건 알겠지만 오늘처럼 음정 다 틀리면 가수라고 하기엔 좀.
-저 꼰대 피디가 저렇게 하자고 하는 걸 옆에서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게 더 신기함. 아니, 말리는 사람 있었는데 걍 혼자서 고집부린 건 아니겠지?
└없었을 거임. 아이즈 다니는 내 친구가 그러는데 회사 안에서 혐우진 의견에 태클 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함
-내 눈엔 다 잘하던데. 둘이 합쳐서 8인조로 나오면 안 되나.
-욕하긴 했는데 막상 아리가 지는 걸 보니까 마음이 편하진 않네.
└나도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댓글은 유난히 내 눈을 사로잡았다.
-대중 예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다들 저래. 아무리 감각이 좋고 트렌드를 잘 파악해도 10년 정도 지나면 감이 뚝 떨어지더라고. 오늘 저거도 자기가 멤버 짜를 때는 이렇게 될 걸 생각도 못 했을 걸. 왜냐면 지금까지 자기 머릿속에 번뜩이는
└영감 같은 걸로 일을 밀고 나가면 항상 성공했잖아. 그러니까 뭐든지 자기한테 떠오르는 건 잘 될 거라고 믿게 되는 거야. 나중 돼서 결과가 나온 다음에 정신 차리고 보면 그때 내가 뭐에 홀렸던 건가 후회하게 되는 거지. 소설가들이나
└작곡가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10년 정도 지나면 감이 떨어져서 자기 복제만 엄청 해대던가 저런 식으로 뇌절쳐서 말아 먹고 추락해 버림.
그 밑에 나도 답글을 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10년이나 버틴다는 게 쉬운 일인지 압니까? 라고.
차를 출발시켜서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도로 위에서 창문을 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따뜻한 공간 속에 있다가 차가운 바람에 휩싸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언젠가는 감이 떨어져서 퇴물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오려나. 만약 그녀에게서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면 평생 감을 잃지 않고 정상에 있을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긴 인혁이도 10년 동안 창작을 했더니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하던데.
그래서 녀석은 무리하지 않고 착실하게 자기 위치를 다져놓았기에 지금은 회사의 대표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듯했다.
가끔 나하고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영민아.
그리고 다음 날.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 같아.
녀석과 나의 의견이 어긋나는 일은 또다시 찾아왔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건 오바하는 거야. 여기까지만 하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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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이돌구 현대 판타지 장편소설
지은이 : 이돌구
발행인 : 권태완, 우천제
전자책 발행일 : 2020-11-04
정가 : 3,200원
제 공 : KWBOOKS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1길 38-9, 401호
ISBN 979-11-293-6799-0
이 책은 KWBOOKS가 저작권자와의 계약에 따라 전자책으로 발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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