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6
1장 레이시(Lacie)(2)
무대에서는 그렇게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베테랑 뮤지션이지만, 연습을 할 때의 자세는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저메인은 훈련소를 막 마친 이등병처럼 각이 딱 잡혀 있는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소리를 컨트롤하려면 이 자세가 가장 편하다고 했다.
“그게 아니고…… 좀 더 텐션을 높여야 해요.”
“여기서 더?”
“조금 더 감정적으로.”
“알았어. 다시 해볼게.”
그는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고, 나는 평소 레슨할 때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키보드 앞에 앉아 반주를 연주하고 있었다.
일단 저메인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먼저 준비된 네 곡의 작업을 마무리 짓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사는 내가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영어가 자연스럽지 않았는지 저메인의 손을 거쳐서 일부분이 바뀌기도 했다.
“금지된 사랑 같은 건가? 감정을 잡기 너무 어려워.”
준비는 다 되었지만 바로 레코딩에 들어갈 수 없는 건 그의 목소리가 아직은 곡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메인은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듯했고 나 또한 원하는 느낌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애가 타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 인간이 아닌 존재?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느낌은 어때?”
“그런 건 아니지만…… 시도해 볼 만하긴 하네요.”
나는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담아낸 느낌이 감상자에게 전달될 때에는 의미가 바뀔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아저씨와 나는 같은 감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너무 미지의 존재 같은 걸로 생각하면 안 되고요,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다음 곡에서 저하고 듀엣을 할 때 제가 그 사랑을 막아서는 게 통하는 거예요.”
“알았어. 한 번 해볼게.”
부동자세를 하고 있는 저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당신 주변에 있지만 천사처럼 고귀한 존재라서 당신이 다가가지 못하는 거예요. 이런 건 어때요?”
“오케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어.”
어쩐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것이 내 눈에도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피아노 반주가 다시 시작되고, 그 위로 그의 목소리가 얹혀졌다.
미지근한 맹물 같았던 그의 목소리에 어떠한 열정 같은 것이 스며들면서 느낌이 살아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소리, 자신의 내면을 붙잡지 못해서 혼란스러워하는 소리.
연필로 스케치한 것에 색이 채워지듯, 내가 원하는 느낌이 노래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번 거 괜찮아요.”
“좋아. 이런 느낌이라는 거지?”
“하지만 너무 드러내진 않는 거예요. 적당히 숨기면서. 왜냐면 이건 내 삶 속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어야 하니까요.”
그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차렷 자세를 풀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생각에 푹 잠긴 듯이.
“나는 진짜 창작에 관여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거 하나만 더 바꾸자.”
“뭘요?”
“여자 이름.”
“이름이요?”
“레이시. 이걸로 바꾸자. 그럼 내가 진짜 근사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어.”
가사에는 ‘에일린’이라는 여자의 이름이 등장했다. 저메인은 그걸 ‘레이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발음 때문에 그래요?”
“아니. 내 옆집에 살았던 진짜 근사한 여자애의 이름이야.”
실존하는 인물의 이름을 쓰겠다는 건데…… 이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거 문제 되지 않겠어요? 비슷한 이름으로 바꾸는 게 좋아 보이는데요. 레이지, 데이시, 이런 걸로.”
“그럼 안 돼. 그렇게 하면 내 감정을 노래에 담을 수 없다고. 그 애는 레이시여야 하거든. 아, 그리고 Lacie는 꽤 흔한 이름이야. 걔가 뭐라고 하면 ‘네 얘기 아닌데?’라고 해버리면 그만이지. 어쨌든 곡은 내가 쓴 게 아니니까.”
이 앨범은 한 여자에 관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그래서 제목 또한 에일린 Part I, 에일린 Part II, 에일린 Part.III…… 이런 식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Lacie Part I, Lacie Part II…… 어감은 마음에 들었는데.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는 거죠?”
“그랬지.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자였어. 조깅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와 이건…… 내가 지금 죽은 건가? 그래서 이곳은 천국이고 내 앞에 있는 건 천사? 뭐 이런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옆집에 살았고요?”
“바로 옆은 아니었고 같은 블록이었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서 다가갈 생각은 못 하고 있었지. 그러면서도 혼자 있을 때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와이프가 있었기 때문에 말 한마디 걸어볼 수 없었지.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
그때가 떠올랐는지 그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쨌든 그 느낌을 내가 알겠다는 거야. 이 사람에게는 접근하면 안 된다, 그런 거.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해. 이곳은 천국이고 저분은 천사고, 나는 사실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더러운 남자라고! 이런 거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지만 비록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만 잘 도착할 수 있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레이시.
아마도 이 이름이 이번 앨범의 제목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인혁이가 연습실을 찾은 것은 그때였다. 저메인과 내가 화기애애하게 컨셉을 정리하고 있었던 그때.
“오! 마이 팻 맨!”
인혁이가 들어오자 저메인은 얼른 다가가 안아주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마주치며 꽤 가까워진 듯 보였다.
* * *
인혁이는 저메인과 내가 연습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적인 뮤지션의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 찾아온 건가 싶었는데, 우리가 어느 정도 연습을 마치고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녀석은 슬그머니 용건을 꺼내었다.
“어제 이겼더라.”
인혁이는 의 어제 방영분 얘기부터 꺼내었다.
“이겼다고 하기는 좀 그래. 김우진 실장이 실수를 했어. 그것 때문에 그쪽이 점수를 까먹어서 어부지리로 우리한테 점수가 몰린 거지.”
“그것참…….”
“감각이 좋은 사람이니까 금방 회복할 거야. 아마 다음 주에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봐.”
“그렇다면 다행인데.”
인혁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김우진이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프로듀서야. 나하고는 같은 시기에 제작자로 활동했잖아. 그래서 나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었지. 연습생 키워서 아이돌 그룹 만드는 건 천재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를 정도야.”
“대단한 사람이지.”
“똑같은 걸 반복하지도 않고 매번 새로운 걸 보여주면서……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게 안 보여. 어제 실수를 했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전부터 불안했어. 언젠가 한 번 터질 것 같았지.”
“그래?”
인혁이와 나는 조금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우리의 둘의 사이로 저메인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내 쪽을 한 번 그리고 인혁이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런 뒤 우리의 표정을 흉내 내면서 뒤로 스르륵 빠져주었다.
다시 대화가 이어지자 저메인은 연습실 구석으로 가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쫓기고 있는 사람 같았어.”
쫓기고 있는 사람…… 그건 현장에서 늘 함께하는 내가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아주 무서운 존재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고. 그래서 뭔가 급해. 거의 모든 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져 버리듯이 흔들리는 모습이 많이 보였어. 내가 김우진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시대에 활동했던 제작자로서 보이는 게 있는 거야.”
갑자기 왜 이곳을 찾아왔나 의아했다. 저메인을 보러 온 건 줄 알았는데 나를 붙잡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고…….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뻔히 보였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사장이나 되시는 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곧 있으면 트랙을 힘차게 달릴 것처럼 몸을 풀고 있는 저 흑인 아저씨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까.
“다음 주에는 우리가 져주자고. 그쪽이 이겨서 그쪽 팀이 데뷔하라고 해.”
“뭐?”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는 건 오바하는 거야. 여기까지만 하자.”
인혁이는 조금도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왜?”
“너도 알잖아. 우리는 들러리야. 이건 저쪽 회사의 파티야. 우린 거기에 초대되어서 놀아주고 있는 거라고. 여기서 우리가 이겨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다음 주에는 우리가 지는 걸로 하고, 우리 애들은 좀 더 준비해서 5월에 데뷔시키자고.”
“알고 있겠지만…….”
“그래. 이번 건의 권한은 너한테 있지. 솔직히 너도 고민하고 있잖아. 그래서 그 고민을 덜어주려고 내가 온 거야. 이번에 지고, 아연이하고 아이즈 재팬하고 지금처럼 계속 갈 수 있게 해주고, 비츠걸스도 아이즈 재팬을 통해서 일본에 진출하는 거야. 이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야. 우리는 앞으로 계속 그 회사의 도움을 받아야 돼. 사소한 승리 때문에 앞으로의 일을 전부 망쳐 버리지 말자고.”
이 녀석은 내가 애써 숨기고 있는 감정을 슬쩍 건드려서 울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사소하다고? 뭐가 사소해? 나하고 우리 애들은 모든 걸 여기에 걸고 있는데.”
“지금 걸고 있는 거 몇 달 미룬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야…… 너하고 내가 그런 소리 믿고 기다렸다가 망했던 사람들이야. 너는 곧바로 잘 풀려서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뒤로 13년을 지옥에서 살아왔어.”
“영민아…….”
“너는 모르지. 나보다 노래를 못하는 놈들이, 그리고 나보다 무대를 장악하지 못하는 놈들이 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걸 계속 지켜봐야 했다고. 그것도 13년 동안! 그 패배감을 너는 모를 거야. 그 사람들이 빛나고 있을 때 나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속을 앓고 있었어. 그런데 이게 사소하다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난 이기려고 이걸 하는 거야. 여기서 이겼다고 그 회사와의 관계가 멀어져서 앞으로의 비즈니스가 어려워진다면…… 그럼 또 이기면 돼. 걱정하지 마. 내가 계속 이겨줄게. 나한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고, 충분히 해낼 수 있어.”
“…….”
“나하고 똑같은 애들이야. 채아 봤지? 나 어릴 때를 보는 것 같더라고. 자기가 더 노래를 잘하는데, 자기가 더 매력 있는 무대를 만들 수 있는데, 하지만 한 차례 실패를 해서 두 눈이 패배감으로 젖어 있더라고. 그런 애한테 어떻게 또 지라고 할 수 있겠어? 걔가 지는 건 내가 지는 거하고 똑같아. 내가 그 시절에 느꼈던 그 감정하고 완전히 똑같은 거라고.”
내 목소리가 꽤 컸는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저메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한 집단의 대표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리고 지고 싶다고 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적당히 조작해서 넘어가자는 말을 하고 싶나 본데, 그게 쉽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조작하자는 게 아니고…… 무리하지 않고서도 질 수 있는 방법은 또 있어. 우리 쪽에서 그걸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어쨌든 나는 지고 싶지 않아. 네 눈에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 미친놈으로 보여.”
“지난 십몇 년 동안 나는 매일매일 지면서 살아왔어. 네 덕분에 여기에 와서 제작 일을 하면서 속에 가득 쌓여 있는 패배감을 어느 정도 희석시키고는 있었지만…… 그걸로는 해소되지가 않아.”
“…….”
“얘네들은 나랑 닮은 애들을 모아서 내가 만든 팀이야. 지게 하고 싶지 않아. 계속 이기게 해주고 싶어. 내가 그렇게 해줄 거야.”
“그건…….”
“너도 봤잖아. 우리 애들이 훨씬 잘해. 내가 그렇게 키워냈어. 왜 더 실력 있고 매력 있는 애들이 힘의 논리에 의해서 져야 되냐고. 너하고 내가 그랬잖아. 우리가 딱 그랬었어. 그리고 나는 몇 번이나 그런 벽 앞에 막혀서 십 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던 거야.”
그러자 저메인은 우리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길쭉한 팔을 쭉 뻗어서 인혁이와 내 등을 동시에 툭툭 두드려주었다.
“Don’t fight, boys!”
그는 새하얀 이가 잘 보이게 활짝 웃었다.
“Peace!”
* * *
의 마지막 주 대결 내용은 ‘양 팀이 데뷔곡으로 준비해 왔던 곡을 무대에서 보여주기’였다.
그리고 이기는 팀은 스포트라이트를 그대로 받은 채로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게 된다.
기대 이상으로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덕분에 주목도가 높은 것은 물론이고 제작진이 약속한 혜택들, 음방 스페셜 무대와 주요 예능 프로그램 출연, 그리고 데뷔 쇼케이스를 특별 편성해 주는 등 데뷔 프로모션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몬스터 뮤직뿐만 아니라 아이즈 컴퍼니에서도 시도하기 어려운 규모의 프로모션이었다.
‘우리가 데뷔한다’라는 것을 이렇게 시끄럽게 대중들에게 노출하는 경우는 이제까지 몇 번 없었다.
반면 여기서 패배하면.
마지막 대결에서 노출한 곡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단 한 번 노출한 것이니 나중에 다시 데뷔할 때에 그 곡을 그대로 사용해도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신곡이라는 것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신선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신인 팀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 프로그램이 두 프로듀서의 전쟁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비장의 카드로 만들어놓은 곡을 버려야 한다.
나는 물론이고, 김우진 또한 이번 일에 자존심을 걸고 있으므로 준비하고 있는 데뷔곡 또한 이제까지 해왔던 작업 중에서 가장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이번 대결의 의미는 남달랐다. 그와 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서 곡을 만들었고 그런 곡을 가지고 대결을 하게 된다.
여기서 진다면…… 둘 중 한 명은 앞으로 제작자로 계속 일을 하는 동안 커다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있어야 할 것이다.
* * *
나는 레드 애플의 네 명을 결성하면서 이미 곡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중 두 곡은 꾸준히 애들에게 연습을 시켜왔다.
우리 쪽은 멤버 교체 없이 네 명으로 쭉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애들은 꽤 높은 완성도로 곡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둘 중 어떤 곡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곡은 라는 제목을 붙인 곡이다. EDM의 전자 악기를 전면에 사용하여 클럽 음악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거기에 세련된 멜로디를 얹어놓았다.
곡의 구성 또한 오랜 시간 동안 손을 봤기에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어 보일 정도로 촘촘하게 다듬은 곡이었다.
두 번째 곡은 .
경쾌하면서 신이 나는 빠른 템포의 곡이다. 첫 곡과는 분위기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무난한 구성 속에서 인상적인 멜로디가 반복되는 흔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대신 멤버 네 명을 염두에 두고 곡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딱 맞아떨어지는 장점이 있었다.
두 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다음 주 대결에 나가야 하는데.
문제는 두 곡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상반된다는 것 외에, 두 곡이 가지고 있는 대중성 또한 차이가 난다는 것에 있었다.
의 경우는 지극히 무난한 아이돌 음악이었다.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력이 분명한 만큼 그 한계 또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비츠걸스처럼 이미 높은 궤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이라면 그 한계 너머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할 수 있겠지만 신인팀에게 줄 곡으로는 너무 평범하다는 결점이 있었다. 신인팀은 데뷔곡으로 팀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게 될 테니까.
반면 은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사운드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곡의 흡입력이나 대중성을 보더라도 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곡이었다.
두 곡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이겠지만.
문제는 저 곡을 노출했음에도 대결에서 패배해서 한동안 묵혀 버려야 한다면.
그래서 곧바로 시장에 뛰어들었다면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음에도 신선함을 잃은 채로 다시 들고 나와서 애매한 성적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이 곡을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공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두 가지 무기가 있다. 아주 강력한 무기, 그리고 적당히 쓸 만한 무기. 그리고 각각의 무기는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최후의 결전에 어떤 무기를 들고 나갈 것인가?
만약에 나에게 흐름을 읽어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모든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면 내가 어떤 곡을 선택하는 것이 정답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모든 것을 읽어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우진이 흔들리는 것부터 이런 상황에 오기까지.
-저는 이미 말했습니다. 처음 두 가지는 원래 당신이 타고난 재능을 깨워준 것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당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주는 거라고요. 그리고 세 번째는 조건부입니다. 당신도 나에게 무언가를 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이겨봤자 내가 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박영민이라는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어야만, 지난 13년 동안 쌓여온 패배감이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민! 아 유 오케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내 파트를 놓쳐 버렸다.
저메인 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안해요.”
“오케이. 그럼 다시!”
우리는 를 연습 중이었다.
Part I, Part II, Part III의 레코딩은 무사히 끝났다.
저메인은 정말로 천재라고 해야 할지…… 믿기지 않는 속도로 곡을 완벽하게 마스터했고, 스튜디오에서는 연습할 때의 200퍼센트 기량으로 목소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게 세계적인 클래스인가? 하고 줄곧 감탄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외국에서도 이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보컬은 몇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천재 뮤지션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이제는 연륜이 쌓여서 장인의 반열에 올라왔다고 할 수 있으니.
이제 남은 곡은 였다. 저메인과 내가 듀엣으로 부르는 곡.
“편하게 하자고. 릴랙스!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그는 하얀 이빨이 훤히 보일 정도로 활짝 웃어주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비즈니스 때문이야?”
“네?”
“팻맨 때문에?”
그러면서 그는 두툼한 허리를 양손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음…….”
“미안해요. 조금만 쉬었다가 하죠.”
“오케이!”
* * *
에서 보여준 그의 목소리는 감탄이 나오는 정도를 넘어서 아주 신성한 무언가를 접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스튜디오 작업을 하고 있었던 엔지니어는 ‘얼어붙을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너무나 훌륭한 목소리를 바로 앞에서 듣고 있으니 얼음 같은 무기로 공격을 당하는 것 같다고.
목소리의 질감 자체가 우리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 같았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수없이 톤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음악을 해오면서, 그리고 앞으로 음악을 계속 하면서, 이렇게 수준 높은 클래스의 보컬을 접할 기회는 다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와 내가 함께 불러야 하는 였다.
처음 듀엣을 제안받았을 때,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뭐, 우스꽝스러운 그림이나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쉬는 동안 연습실 구석에서 발성 연습을 하고 있었더니 저메인은 가까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그의 두툼한 팔을 올렸다.
“편하게. 자연스럽게.”
“알고 있어요.”
“나는 영민의 목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신감을 가지고 부르라고. 당신은 세계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세계 최고의 보컬이야.”
“고마워요.”
“당신이 데모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놀랐다고. 곡이 어떻다는 걸 판단하기 전에 가이드로 입혀진 보컬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 목소리에 흠뻑 빠졌었어. 진짜야. 난 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수많은 작곡가들을 접해왔고 수많은 데모를 들어온 저메인의 말이었다.
흔히 말하길, 외국 작곡가와 국내 작곡가들의 차이점이라면 데모의 퀄리티를 들곤 한다.
믹싱의 퀄리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가이드로 입혀진 보컬의 수준이었다.
살벌할 정도로 뛰어난 보컬이 가이드로 부르고 있으니, 사실은 같은 수준의 곡이라도 외국 작곡가들의 곡에 더 끌리게 되는 것이다.
핑계라면 핑계일 수 있지만…… 케이팝에서도 외국 작곡가를 더 선호하는 이유로 이러한 점을 거론하는 관계자들이 무척 많다.
가이드 보컬의 수준 때문에 외국 작곡가들의 곡으로 손이 가게 된다면서.
그럼에도 저메인은 가이드로 입혀놓은 내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인데.
“너무 욕심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나는 레이시와 사랑에 빠지려는 거고 영민은 그걸 막으려는 거야. ‘안 돼! 그 사람은 천사야. 너처럼 더러운 녀석이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이걸 노래하면 그만이잖아.”
“알았어요. 다시 해볼게요.”
Part.III를 할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는 내가 이 엄청난 보컬에게 내가 원하는 걸 마구 요구하곤 했었는데.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만들어가는 거야.”
“시간 없어요. 내일이면 가실 거잖아요.”
“나는 뭐 그렇게 되겠지. 오늘 저녁에 내 파트를 레코딩할 거고…… 그러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잖아. 나머지는 영민이 알아서 해봐. 당신 파트니까. 그 뚱뚱한 친구하고 상의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 * *
그런 말을 남긴 후 저메인은 그날 저녁 자신의 괴물 같은 목소리를 뽐내며 불과 15분 만에 네 번째 곡의 레코딩을 마쳤다.
딱 세 번 불렀을 뿐이다. 그런 뒤에.
“세 개 중에서 맘에 드는 거 골라 써. 세 개를 막 섞어도 좋고. 어쨌든 프로듀서는 당신이니까.”
그런 말을 남겼을 뿐이다.
하루 정도 더 있다가 가라고 해봤지만 다음 날 중요한 파티가 있다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원한다면 난 영민을 그 파티에 데려가고 싶지만…… 안 되겠지? 엄청나게 바쁘니까?”
“그렇죠, 뭐.”
“좀 더 릴렉스하자고. 영민은 거의 완벽해. 훌륭하다고. 내 생애를 통틀어 만나본 뮤지션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거야. 하지만 당신은 너무 굳어 있어. 딱딱하게. 그게 좀 아쉬워. 풀어질 때는 뒷일 생각 안 하고 확 풀어지는 게 좋아. 우리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말이야.”
그런 말을 한 뒤 그는 떠나갔다.
나는 인혁이가 애써 준비한 [Goodbye JJ]라는 현수막 아래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는 우리 회사의 밴에 올라타서 창문을 열고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네 번째 트랙이 완성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후였다.
나는 내 자신을 트레이닝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나에게 시도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졸려서 하품을 뻑뻑 해대는 엔지니어를 붙잡고 새벽까지 스튜디오에서 씨름을 했다.
‘안 돼.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불행해질 수 있어. 그녀에겐 그녀의 인생이 있는 거야.’
내 목소리가 들어간 완성본을 JJ에게 메일로 보내주었다.
[오! 마이 맨.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우리는 다시 트위터의 DM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우리가 이번에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것 같아.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듀엣곡 중에서 이 정도로 엄청난 물건은 처음 들어봐. 우리는 사고를 친 거야.]믹싱이 막 끝난 파일을 들은 그의 소감이었다.
의 작업은 만족스러웠다.
서정적인 스트링 위에서 저메인 존스가 흑인의 필링을 마음껏 뽐내며 음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던 에 이어, Part.VI에선 다소 정적인 노래를 들려주었다.
느린 템포의 발라드곡인 Part.III보다는 조금 빠른 미드템포, 그리고 베이스와 드럼이 리듬을 담당하고 기타와 피아노가 소리를 채우는 고전적인 구성의 사운드였다.
인트로는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로크 위에서 하모니카가 구슬픈 선율을 노래한다. 약간의 텐션이 가미되어 있는 보이싱이었기에 컨트리와 흡사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런 뒤에 저메인 존스의 목소리가 매우 낮은 음에서 무거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And I love her……’
Part.III의 마지막 가사를 그대로 이어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느릿한 발라드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듯이 아름다운 애드리브를 구사했던 Part.III의 후반부와 달리, 같은 가사임에도 Part.IV의 시작은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가지고 싶고, 그래서 나는 이제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해.
어쿠스틱 기타의 스틸현이 탄력 있는 스트로크를 들려주는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저메인 존스는 찌를듯한 고음을 가성으로 높이며 노래를 이어갔다.
다시 스트로크가 이어지는 중에 피아노의 풍부한 소리가 청명한 존재감을 알리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피아노가 등장하자마자 그 위로 내 목소리가 얹혀졌다.
-다시 생각해 봐. 그녀는 거기에 있어야 하고 너는 여기에 있어야 해.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야.
흑인 특유의 자유로운 느낌이 가득한 저메인 존스의 노래에 비해, 내 목소리는 지극히 정적이었고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이었다.
저메인이 나비처럼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게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면, 나는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새와 같았다.
고민 끝에 만들어낸 목소리였다.
장인의 경지에 올라 있는 저메인과 같은 스타일로 불러서는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음 하나하나 또박또박, 마치 연필로 꾹 눌러 쓴 글씨처럼, 나는 정직한 창법으로 내 목소리를 트랙에 담아보았다.
그것은 마지막 후렴 부분까지 이어졌다.
스트링이 나오며 웅장하면서도 격정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저메인과 나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해야 돼. 아니, 하면 안 돼. 두 사람의 목소리는 다투듯이 엇갈리며 곡의 대미를 장식했다.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듀엣곡 중에서 이 정도로 엄청난 물건은 처음 들어봐. 우리는 사고를 친 거야.’
실은 나도 저메인 존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아직 믹싱을 마친 단계였지만, 이 곡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흡입력에 나도 놀라울 정도였다.
* * *
저메인 존스의 앨범에 내 목소리가 들어간다는 것은 금방 소문이 나버렸다. 물론 외부까지 퍼진 것은 아니고 우리 회사 안에서.
“그럼 우리 본부장님, 가수로 컴백하시는 거예요?”
이런 질문은 스무 번 정도 들은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냥 일회성입니다”라고 넘겼고.
“언젠가는 노래를 하실 줄 알았어요.”
이런 말은 열 번 정도.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번 기회에 맺혔던 한을 다 풀어보려고요”라고 대꾸했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다가 한 번 불러본 것에 불과해요”라고.
“우리 회사에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가수가 나온다면 아마 아연 씨가 아닐까 했습니다. 아니면 비츠걸스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 본부장님이 첫 테이프를 끊는 걸 수도 있겠네요. 몬스터 뮤직에도 빌보드에 진입한 세계적인 가수가 있다! 그 사람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컬 강사를 하고 있었던 박영민 본부장! 이거 스토리 괜찮은데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두 명.
한 명은 홍보팀장이었고, 또 한 명은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 이 녀석이었다.
“우리 본부장님, 언젠가는 이렇게 되실 줄 알았다니까요. 빌보드 1위! 박! 영! 민!”
“시끄러!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본부장님이야?”
“우리 회사의 본부장님, 뭐 이런 뜻이에요.”
배민혁은 오랜만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서 응접용 테이블 위에 엎드리며 그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 바쁘니까 그런 소리 할 거면 다음에 찾아와라.”
“그 노래 한 번 더 듣고 가면 안 돼요? 진짜로 좋아서 그래요.”
“아직 작업 중인 곡이야. 한 번 들려준 것도 큰맘 먹고 해준 거라고.”
“저는 맨날 들려드렸는데.”
배민혁은 빅픽쳐의 다음 앨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에 레드애플이 이번에 데뷔하게 되면 빅픽쳐는 다음 분기에 컴백하게 되고, 레드애플의 데뷔가 불발되면 빅픽쳐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이 녀석은 곡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상태였고, 레코딩을 위해 멤버들과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 머물러 있는 이 녀석과는 종종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저희 선생님…… 아, 그러니까 사장님이요. 저희한테 맨날 그러셨어요. 자기가 지금까지 만나본 보컬 중에서 괴물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세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본부장님이라고요.”
“세 명?”
“네. 세 명이래요.”
“그럼 나머지 두 명은 누구야?”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암튼 그러셨어요. 그 당시, 스물한 살이 낼 수 없는 감성을 보여주셨다고.”
“인혁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네가 지금 지어낸 게 아니고?”
“뭐 조금 과장을 하긴 했습니다.”
애들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서 지금 회사에서 난리라니까요. 전설의 보컬이 재야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이런 거잖아요.”
“난리는 뭐가 난리라고.”
“게다가 솔로곡으로 컴백하시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노래를 하셨으니…… 저 진짜 그 곡 들어봤을 때 본부장님이 그 흑인 아저씨한테 하나도 안 꿀리더라고요. 목소리에 내공이 있으세요. 진짜로.”
“그것도 좀 과장한 거지?”
“그렇게 들리세요?”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나 했는데.
“저 그런 의미에서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요.”
“뭔데?”
결국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아티스트 관리는 본부장님께서 다 하시는 거잖아요.”
“그런데?”
“모든 권한이 전부 본부장님께 있는 거고요.”
“나 바쁘니까 빨리 용건만 말해.”
“그게 다름이 아니고…….”
배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 바로 앞에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말을 이었다.
“데뷔하고 나서 1년 동안 핸드폰 사용 금지, 3년 동안 연애 금지, 이건 계약서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빨리 용건만 말하라니까.”
“저 그러니까…… 핸드폰 금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요, 연애 금지는 1년만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서 녀석은 애처로운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왜?”
“3년은 너무 깁니다.”
“5년 동안 금지인 회사도 있어.”
“아니, 뭐, 저도 몰래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본부장님과 회사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요. 연애를 하더라도 떳떳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럼 아이돌을 하지 말았어야지. 왜 그렇게 금지하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저도 알고는 있는데…… 팬들에게는 들키지 말아야겠죠.”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배민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이상한 놈이 여기에 있을까? 하는 눈빛으로.
이런 걸 허락받겠다고 하는 거나,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거나. 하여간 정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3년을 2년으로 줄여달라?”
“넵.”
“차라리 지금 당장 연애할 수 있도록 풀어달라고 하지 그랬냐.”
“그것까지는 무리인 것 같고요. 1년만 줄여주시면 충분합니다.”
“왜?”
“그게 실은…….”
배민혁은 혀를 쭉 내밀며 부끄러워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누가 있어요. 저한테.”
“누구?”
“그런 사람이 있는데…… 진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부장님은 이해해 주셔야 돼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게 얘기해 봐.”
“저한테 누가 있는데요, 그 사람 덕분에 제가 곡을 쓸 수 있는 거라고요. 저의 뮤즈 같은 분이에요. 본부장님은 아시잖아요. 곡을 쓸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그런 사람이요. 그 사람이 없으면 절대 곡을 쓸 수 없고 그런 거요.”
“그러니까 그거하고 2년, 3년하고 뭔 상관인데?”
“내년부터 그분하고 만날 겁니다. 진짜예요. 제 인생을 걸고 놓치기 싫은 사람이에요.”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배민혁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한테는 이 1년이 정말 중요해요. 잘못하면 놓쳐 버릴 수 있어서요.”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본부장님이 우리 회사의 아티스트들을 관리하시는 분이시고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니…….”
“알았으니까 나가 봐.”
“어? 그럼 들어주시는 건가요?”
녀석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아니. 생각 좀 해보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고.”
“아…….”
“나는 네가 지금 왜 이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어.”
“진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부장님은 이해를 해주셔야 돼요. 창작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나가 봐.”
그러자 녀석도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3년 동안 연애 금지.
이건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이라서 어길 경우 자체적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고 심할 경우 퇴출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겁 없이 공개 연애를 선언했다가 계약 위반으로 회사에서 퇴출당한 아이돌도 있었다.
심지어는 자사의 아이돌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일도 있었다. 계약을 어기고 연애를 했기 때문에 매출이 감소했다면서.
몬스터 뮤직에서도 마찬가지로 3년의 제한 기간을 두었는데, 그러니까 이걸 2년으로 줄여달라…… 자신의 창작을 위해서.
웃긴 녀석이다. 바쁘지만 않았으면 붙잡아놓고 잔소리를 더 했을 것이다. 그럴 궁리를 하고 있을 시간에 연습이나 더 하라고.
* * *
한쪽에서는 한가롭게 연애를 언급하고 있을 때 다른 쪽에서는 마지막 전투를 위해 1초도 허비할 수 없다는 듯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의 마지막 대결. 무대 컨셉과 의상, 메이크업 등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어떤 곡을 할 것인지 고민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봤지만 뾰족한 답은 찾아낼 수 없었고, 직관적으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은 .
강력한 무기와 평범한 무기 중에서 강력한 쪽을 선택했다.
이걸 사용하고도 져버리면, 평범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평범한 그룹으로 위치가 낮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이 곡으로 간다. 이번 주는 바쁠 거야.”
“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기서 만족해하지 말고. 대중들의 관심이라는 건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차가워. 보이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갑게 잊혀져 버리는 거야.”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서도 우리 애들은 똘망똘망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주, 여기서 양 팀의 희비가 엇갈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