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48
3장 Two Voice(1)
공항의 자동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매니저가 앞장을 섰다.
그리고 하얀 야구모자, 하얀 티셔츠, 짙은 청색의 스키니진을 입고 있는 유아연이 그 뒤를 따랐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며 그녀의 선글라스를 반짝거리게 했다.
평범한 스타일이었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늘씬한 몸매, 그리고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화려한 브릿지의 머릿결 때문에 탑 연예인이라는 아우라가 그녀의 주위를 환하게 감싸고 있었다.
“유아연이다.”
“오…… 진짜 유아연이야?”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발판을 받쳐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기자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유아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었다.
그녀는 ‘그래. 내가 왔어.’라고 말하는 듯한 도도한 얼굴, 당당한 걸음걸이로 기자들을 지나쳤다.
“유아연 씨. 여기 좀 봐주세요.”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자 그쪽을 살며시 바라보며 손을 한 번 흔들어주었다.
게이트를 빠져나가자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왜 왔어요?”
“나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야?”
“아이즈에서 회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요. 회사에다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난 못 들었어. 아니, 우리 여왕님 오시는 날이라고 해서 회사에 들르지도 않고 부랴부랴 나온 거야.”
1팀장은 과장된 손짓을 하며 웃었다.
“나 오늘 일정 빼고 왔어.”
“차 어딨는데요?”
그러는 동안에도 유아연은 내내 빳빳하면서도 도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다가오고 나서야 아주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유아연은 아이즈에서 마중 나온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1팀장의 차를 선택했다.
어제까지 쉬지 않고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가로수가 아직 눈에 젖어 있었다. 바닥도 아직 미끄러운지 차들도 유난히 느릿느릿 공항을 빠져나갔다.
“엄청나게 바빴다면서?”
“그랬죠.”
“아이즈가 일을 더 잘하나 보다. 일 물어다 주는 거 보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앨범 성적이 특히 좋았으니까요.”
초동 19만 장, 총판은 현재까지 약 38만 장이 팔렸다. 그녀가 일본에서 발매했던 앨범 모두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성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2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을 경우에만 수여한다는 플래티넘 음반에 선정되었다. 그 전까지 21만 장을 팔았던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제2의 전성기가 왔다고, 아니, 어쩌면 전성기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호들갑 떠는 기사들이 연일 쏟아졌다.
“그래서 바빴어요.”
얼마 전 어떤 기사에서는 그녀에 관한 특이한 내용을 가지고 와서 소개해 주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일본 지상파 방송국에서 유아연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날은 31일 중 불과 6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려 25일 연속으로 그녀는 매일 TV에 나타났다.
아침 방송과 심야 방송을 가리지 않고, 쇼핑을 하거나 프로모션 비디오를 제작하는 과정, 또는 인터뷰를 하는 중에 아나운서가 그녀에게 춤을 배우는 시시콜콜한 장면까지.
이날 또한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을 한 뒤 한국으로 향한 것이었다. 능숙한 일본어로 진행자와 재치 있게 토크를 한 뒤 팬들과 전화 연결까지 마친 후에야 공항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잘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어떤 여성 팬의 목소리가 아직도 그녀의 귀에 남아 있었다.
“그것보다…… 프로듀서가 바뀐 게 더 컸어요. 앨범 퀄리티가 비교 불가로 확 올라가서.”
“프로듀서? 아, 영민 본부장? 그 양반이야 뭐.”
1팀장은 부럽다는 듯이 입맛 다시는 소리를 일부러 냈다.
“여기 소식 들었어? 그 양반이 팀을 새로 냈는데 그것도 계속 1위야.”
“알아요. 얘기 들었어요.”
“돈이 막 쏟아져 들어와서 정신없을 거다. 네 앨범에 그 애들 거에, 비츠 애들 거에…… 그리고 요즘에는 노래한다고 스튜디오에서 마이크 붙잡고 있다던데.”
“노래요?”
“그거 있잖아. 어떤 흑인 가수 앨범 내주는 거. 거기서 그 양반이 노래도 한대. 제작만 하는 게 아니라.”
“그래요?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유아연은 호기심이 생겨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박영민 노래. 박영민 보컬 등등을 넣어서 찾아봤지만.
“그분…… 진짜 노래 잘하세요.”
오래전, 유아연은 김인혁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김인혁을 향해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이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일까? 예전에 가수였다고 하는데 무슨 노래를 불렀던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 내지는 의구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포보이스. 4인조 보컬 그룹. 여기까지는 알아냈지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 한다! 찾아보지 마. 별로 참고할 만한 것도 못 되니까.
마치 흑역사를 대하듯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저렇게 나오니 호기심은 점점 증폭되었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면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선생님의 가수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활동 당시의 영상을 기어코 찾아냈다.
어떤 음악 방송에서 가졌던 라이브 무대. 촌스러운 폰트의 자막에서 한 번 웃음이 터졌고, 생각보다 뚱뚱하지 않았던 선생님의 몸매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오! 노래 잘하는데? 하는 생각이 웃음을 멈추게 해주었고, 그다음으로 튀어나온 다른 멤버, 메인 보컬이라고 하는 사람의 풍부한 성량은 그녀의 입가에 남아 있는 웃음기를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뭐지? 누구야? 이 사람은? 곡을 끝까지 들었을 때는 이미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영상을 앞으로 돌려서 이름을 확인해 봤다.
박영민. 이 사람이 이 팀의 에이스였구나.
“숫자를 넣어서 검색했어야 되는 거였어요.”
“무슨 소리야?”
“한글로 포보이스, 영어로 Four Voice,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어요. 정작 찾아보니까 ‘포(4) 보이스’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용케 찾아냈네.”
“찾아낸 건 아니고 유튜브에서 포보이스로 검색한 다음에 페이지를 뒤로 한참 넘기면 나와요. 그 네 글자가 들어간 것 중에서 조회 수가 높은 순으로 나오니까 뒤로 한참 넘겨야 됐던 거죠. 그 영상은 조회 수가 낮았거든요.”
첫음절을 듣는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부드러운 음색. 그리고 높은 음으로 올라갈수록 그 음색이 단단해지면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노래 잘 부른다는 사람들을 이제까지 여럿 만나왔지만 그 정도로 유니크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겨준 목소리는 몇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바로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줬었는데.”
“응?”
“그분하고 저하고 처음 만났을 때요. 회사에서.”
“자꾸 알 수 없는 말을 하네. 우리 여왕님이.”
“그런 게 있어요. 하여튼 그분, 지금도 여전하세요. 보컬 레슨받을 때마다 기가 죽었다니까요. 제가요.”
“실력만큼은 엄청난 사람이잖아.”
“변태 흑인 아저씨하고 붙어도 꿀리지 않을 거예요. 어떤 노래일지 들어보고 싶은데.”
“회사에 들어본 사람들 있던데, 다들 기가 막히게 노래 잘했다고 하더라.”
“그래요? 그럼 아저씨는 못 들어본 거예요?”
“나야 뭐, 회사 들어가면 한가하게 있을 수가 없잖아.”
두 사람은 영종도를 빠져나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대교로 들어섰다.
한 차례 눈이 쏟아진 뒤의 하늘은 유난히 밝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바다가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에 그분이 우리 회사 안 들어왔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본부장님이?”
“저는 추락했겠죠, 아마. 한국에서는 연속으로 앨범 말아 먹고, 일본에서는 계약 해지 돼서 다시는 갈 일이 없을 거고…… 그럼 저는 뭐 하고 있을까요?”
“나하고 같이 지방 행사 돌아다니고 있겠지. 그러다가 어떤 팬이 그걸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유아연 진짜 망했구나. 이런 댓글이나 달리겠지.”
“그거 너무 심한 말 아니에요?”
“난 그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는 얘기야.”
언짢은 빛이 잠시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국어로 실컷 말을 쏟아내고 있어서 그녀의 기분은 퍽 나쁘지 않았다.
“뭔 각오예요? 그만둔다고 했으면서.”
“마누라한테 그 얘기 꺼냈다가 맞아 죽는 줄 알았어. 그만두긴 어딜 그만두냐고.”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가 사르르 녹으며 환한 미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언니는 요즘 어때요? 뵈러 가야 하는데.”
남편에게는 아저씨, 아내에게는 언니라고 부르는 기묘한 호칭과 함께 두 사람은 가족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함께해온 세월이 긴 만큼 대화는 끊이지 않고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 *
이날 아침부터 은설이의 어머니, 김진희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요하게 의논할 이야기가 있으니 미팅 시간을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중요하게 의논할 이야기?
몇 가지 언뜻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긍정적인 것, 또는 부정적인 것.
양쪽 다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당장 약속을 잡았다. 이날 점심. 그랬더니 그녀는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회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한정식집. 약속 시간은 열한 시 반. 하지만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서둘렀더니 약속 시간을 20분 남기고 와버렸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직원에게 내 이름을 대니 그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빈방에 혼자 앉아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인혁이를 데려왔어야 했나. 하지만 지난 그 일 때문에 인혁이 녀석과는 또다시 데면데면해졌다.
만약 부정적인 얘기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여기까지 이뤄낸 것을 나 또한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김진희 씨가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기다리시게 했네요.”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일찍 온 겁니다.”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얼굴,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기품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내 눈을 마주 보며 살며시 웃고 있는 표정에서는 편안한 여유 같은 것도 느껴졌다.
“갑자기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급하게 미팅을 부탁드린 겁니다.”
* * *
“저도 그렇고, 우리 애 아빠도 그렇고, 은설이는 좀 힘들 거라고 봤어요. 집에서 노래 부르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죠. 그런 쪽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방 안에 가득 붙여놓은 그 사람 때문에 잠깐 정신이 나가서 이러는 건가 싶기도 했어요.”
테이블 세팅이 완료된 후 김진희 씨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었다.
“얘가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말을 처음으로 꺼낸 것이라서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하다가 관두겠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 경험을 쌓는 것이 나쁘진 않을 거라고 보기도 했어요.”
나는 은설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가능성이 많은 아이인지를 언급했다. 부모가 보는 시선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맞아요.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행운이 따라줬다고 해야 하나요. 좋은 회사를 선택했고 능력 있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방송 프로그램에 나갈 때까지만 해도 확신이 들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매일 밤 걱정했습니다. 카메라는 총 같은 것이잖아요. 그걸로 사람을 겨누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일 수도 있어요.”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내리는 정의였다.
“그런데 능력 있는 선생님 덕분에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 밑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우리 아이의 미래가 밝을 수 있다는 기대도 하게 되었어요. 오늘 미팅을 잡은 건 이 때문입니다.”
서론은 여기까지. 그녀는 이후 본론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을 더 잘 발휘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약간의 도움을 드릴까 합니다.”
그들의 계열사 중 하나인 유성 LPS에서 몬스터 뮤직에 투자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유성 LPS는 유성기획을 전신으로 하는 광고기획사였다. 우리 몬스터 뮤직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기 전에 은설이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오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딸의 활동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 우리 회사를 서포트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이 잘 풀린다면 이것만큼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자금을 돌리느라 늘 애를 먹고 있는 우리 회사에 있어서 대기업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숨통이 확 트이게 된다.
아니, 숨통이 트이는 정도가 아니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경영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골치 아파지지만.
“은설이가 속해 있는 새 팀이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서둘러 찾아뵌 것입니다.”
늦기 전에 분명하게 하고 싶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 * *
여기에 차를 놔둬도 되는 건가? 신입 매니저는 고민에 빠져 버렸다.
시골길.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승합차가 여길 막고 있으면 다른 차들은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남아 있는 폭이 좁아서 사람도 지나가려면 몸을 틀어서 옆으로 걸어가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거기 세워두세요.”
이대로 세워도 되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신입 매니저에게, 최인환은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
“이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요. 특히 이 시간에는.”
그 말을 듣고서야 매니저는 차에서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재형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아직 준비가 안 돼서 그런데, 안으로 들어와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입사한 지 딱 두 달 된 신입 사원이었다. 그는 이날 처음으로 사수 없이 차를 몰고 여기까지 왔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최인환의 집으로 가서 그를 차에 태우고 행사장까지 가는 것. 그리고 행사가 끝난 후 다시 최인환을 집으로 모셔줄 것.
일단 여기까지 오는 것은 성공적이었다.
매니저는 대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낡은 가옥. 하지만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너저분해 보이진 않았다.
“신입 매니저라고요?”
“네. 두 달 전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 그래. 팀장님은 어디 가셨나 보네?”
“네. 공항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매니저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가수. 오래전에는 아무런 통보 없이 잠수를 타버려서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는 가수.
하지만 이날의 최인환은, 조카를 대하는 듯한 자상한 미소로 그를 대해주었다.
“운전만 해주면 돼. 전주까지. 그래서 자네를 나한테 보낸 걸 거야.”
“아, 네.”
“나한테 차가 있었으면 내가 혼자 차 몰고 갔다 와도 되는데…… 이따 가면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넵!”
신입 매니저는 힘차게 대답했다.
여유를 두고 출발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인환이 나갈 채비를 하는 것에는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매니저는 대문 너머로 바깥에 세워놓은 차를 흘깃 바라봤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안 된다니까.”
“얌전히 앉아 있을게. 진짜로.”
최인환이 늦는 것은 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고 집에 있어. 점심은 냉장고에 있는 거 꺼내 먹고.”
“나 혼자 있기 싫다고!”
여덟 살? 아홉 살? 그 정도로 보이는 딸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나 데려가면 왜 안 되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잠깐만 지켜봐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일하러 나가겠다는 것이고 딸은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매니저는 최인환이 아내와 사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큰 애도 아내와 함께 떠나 버렸다는 것도.
“집에 있어. 아빠 금방 갔다 올게.”
“그저께도 금방 온다면서 늦게 왔잖아.”
매니저는 잠시 망설였다. 말을 할까 말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을까.
나설 것인가, 아니면 있는 듯 없는 듯 오늘을 보낼 것인가.
아마 그가 좀 더 세상을 살게 되면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는 절대 나서지 말라는 교훈을 체득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그걸 알기에는 어린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당장 나서고 싶은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신입 사원이었다.
말을 하자. 그리고 나서는 거다.
“재형 씨.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금방 애 달라고 나갈게.”
“저기 선생님.”
“선생님?”
“네.”
“선생님이 뭐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무리 그래도 형이라고 부를 순 없었다.
“선배님. 혹시 아이를 데려가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 애를?”
“아이를 왜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하러 가니까 얘를 두고 가려는 거지.”
“그런 이유라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애 보는 건 정말 잘하거든요. 선배님이 무대에서 노래하시는 동안 애기하고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습니다.”
“자네가?”
나서기로 결심한 순간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이걸로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거다. 그는 과감하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카를 대할 때처럼. 그렇게 하면 되겠지.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
“…….”
“이름이 뭐야?”
“최. 지. 수. 입니다.”
“그래 지수야. 아저씨랑 같이 아빠 일하는 데 가볼까?”
“예?”
“아저씨는 운전하는 아저씬데, 오늘 아빠를 모시고 가기로 했어. 지수도 같이 갈까?”
“진짜요?”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만들어지며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두 볼에 가득한 젖살이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았다.
“대신 아빠 노래하는 동안에는 아저씨랑 있어야 돼. 괜찮아?”
“네!”
힘찬 대답과 함께 상황은 쉽게 해결되었다.
* * *
“제 조카도 그래요. 차만 타면 곯아떨어집니다.”
“그래? 조카가 몇 살인데?”
“다섯 살이요. 지수보다는 좀 어리죠.”
뒷좌석을 혼자 차지한 아이는, 어디를 가는 거냐, 점심은 뭘 먹냐, 언제 돌아오는 거냐, 시끄럽게 계속 질문을 던지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시트에 기대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으고서 그것을 베개 삼아 베고 있었다.
“저 예전부터 선생님 팬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
승합차는 시원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 달 동안 운전은 지겹도록 해왔기에 이제는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아무튼 팬이었습니다. 선배님 2집 앨범은 아직도 집에 있어요. 저 중학생 때 산 거였는데.”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이날 매니저는 처음으로 소풍 가는 어린 학생처럼 새벽부터 들뜬 마음이었다.
빅픽쳐 애들을 태우고 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했던 그가 처음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맡게 되었고, 그것도 이 회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를 태우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전주까지 운전하는 일이 전부이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선 온갖 공상들이 떠다녔다.
자기가 최인환의 전담 매니저가 되어서, 이렇게 행사를 도는 가수에서 메인스트림의 꼭대기로 띄워 올리는 상상을 수십 번은 한 것 같았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해보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말이죠. 이쪽 일을 시작하면서 그 정도 꿈은 가지고 있어도 되잖아요.”
그리고 자기를 자상하게 대해주는 최인환의 태도에 감명받아, 공상 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입 밖으로 꺼내보기도 했던 것이다.
“됐어. 난 여기에 만족해. 계속 노래할 수 있고, 노래해서 돈 벌 수 있고, 그래서 지수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고, 이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잖아?”
“그래도 더 큰 무대에 오르실 수 있는 분이잖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나한테는 기적이야.”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 매니저 옆에서, 중년의 가수는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영민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지도 못했어.”
“본부장님이요?”
“그래. 영민이가 좋은 곡을 써줘서, 그리고 자기 발로 뛰어다니며 드라마에 넣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그게 차트에서 몇 위까지 했다더라. 하여튼 그 뒤로 일이 많이 들어와.”
“그 곡 진짜 좋더라고요. 저 요즘도 자주 들어요.”
“행사 무대 설 때도 그래. 그런 축 처지는 곡을 그런 곳에선 원래 안 좋아하잖아. 하지만 막상 부르면 다들 따라 부르면서 좋아해. 그래서 일이 끊이지 않는 거지.”
그런 말을 하다가 최인환은 혼잣말을 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옛날에 처음 만났을 때는 진짜 꼬장꼬장했는데” 하고 말을 했다.
“본부장님이요?”
“그럼 누구겠어. 진짜 꼬장꼬장했어.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린 게……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거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 같았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회사에 들어와서 본부장님 뵌 적이 몇 번 안 돼요. 유명하신 분이라서 회사 들어올 때부터 기대했었지만 인사 몇 번 드린 것이 전부예요. 그런데…… 선배님은 잘 아는 사이신가 보네요.”
“예전에. 오늘 우리가 가는 무대 같은 거. 그런 데 같이 가곤 했었거든. 술도 같이 자주 마셨고.”
매니저는 아아, 하는 입 모양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참 희한했어. 남자들끼리 술 마시면 여자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건데, 그 녀석은 시종일관 음악 얘기야. 술에 취해서도 노래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둥, 진정한 뮤지션이라면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건지, 그런 얘기밖에 할 줄 몰랐지.”
“그때도 지금처럼 곡을 잘 쓰셨어요?”
“그건 모르겠어. 자기가 만든 곡을 들려주진 않아서…… 하지만 노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했지. ‘쟤는 분명히 성공할 거야.’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었어. 무대에서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막 느껴져서.”
매니저는 쓰읍, 하고 소리를 내며 숨을 마시더니 “우리 선배님을 위해서 곡을 더 써주시면 참 좋을 텐데요.” 하고 아쉬운 듯 말했다.
“쓰고 있다고 하더라고. 나한테 줄 곡이 하나 있대. 조만간 회사 한 번 들르라고 하던데.”
“그래요?”
신입 매니저 유재형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또다시 공상으로 빠져 버렸다. 이 가수를 자기가 전담해서 관리하고 있는데 최고의 프로듀서로부터 곡을 받아와서 그 곡을 가지고 영업을 다니는 상상.
‘영민이가 좋은 곡을 주기도 했지만 자네 아니었으면 이런 무대에는 서보지도 못했을 거야.’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떠올리기도 해보고.
두 사람이 시끄럽게 떠드는 중에도 뒷좌석의 아이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두 눈을 꼭 감고서 새근새근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한 아빠는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걸치고 있었다.
* * *
“정말이야?”
부우 녀석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작은 눈에서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타났다는 건 정말 크게 놀랐다는 뜻이다.
“투자 형태로 지원을 하겠다는 거야. 규모는 추후 협의를 해야겠지만 일단 나하고 밥 먹을 때 나온 얘기로는 50억 원 정도를 잡고 있는 것 같아.”
“50억!”
이제는 눈동자가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흰자위까지 드러났다.
“대신 투자는 레드애플에게만 하는 걸로.”
“그렇겠지. 자기 딸 때문에 그런 거니까.”
“하지만 레드애플 쪽이 여유로워지면 우리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그렇지.”
인혁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와서 어깨를 꽉 붙잡아주었다.
“그래. 수고했어. 역시 네가 하는 일은 뭐든지 잘 풀린다니까.”
이날 따라 유난히 인혁이는 나에게 호의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저께 매니저 유 대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 이후로 사장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본부장님 나가는 건 막아야 한다고요. 본부장님 나가시면 우리 회사 1년도 못 버틴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 대리하고 배민혁을 회사에서 퇴출시키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런 말을 하면서, 정말로 나가실 건 아니죠? 하고 묻기도 했다.
-사장님한테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본부장님 진짜로 다른 곳 가실지도 모르는 분이라고요. 능력은 입증됐고, 큰 회사에서도 거액을 주고서 서로 모시려고 할 텐데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 남아 계신다면 그만한 대우를 해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드렸어요. 그러니 이참에 주도권을 꽉 잡아버리세요. 사실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
물론 퇴출까지는 가지 않았다.
오 대리는 일정 기간 동안 감봉, 그리고 배민혁은 앞으로 더욱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될 것이고 한 번 더 비츠걸스에게 접근하면 그때는 더 강한 징계가 내려질 것이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인혁이는 나에게, 마치 자기가 죄를 저지른 것처럼 경직된 얼굴로 이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음악 만드는 것만 담당하기로 했지 돈 문제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봐. 김진희 씨도 앞으론 네가 만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그건 내가 해볼게.”
“나는 음악 쪽만 하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아티스트 관리하는 것도.”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었다. 물론 세상일이 모두 그렇듯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언제나 딱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투자받는 것 말고도 그쪽 회사랑 잘 이어지면 여러모로 우리 쪽에 유리해질 것 같아.”
“그래. 유성 LPS라면 그쪽 업계에서 손꼽히는 곳이니까.”
“우리라고 계속 이렇게 있으란 법은 없잖아. 혹시 알아? 나중에 우리가 규모를 크게 키워서 4대 연예기획사 이런 것에 들어가는 날이 올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야.”
그 말이 기분 좋게 들렸는지 인혁이는 통통한 얼굴 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저메인 존스는 2박 3일의 일정을 잡아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영민! 어때? 한 번 더 해볼까?”
스튜디오 부스 안에서 그는 장난스럽게 내 쪽으로 팔을 흔들며 그렇게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세 번 불렀다. 세 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라고 했다. 아니면 마음에 드는 파트를 잘라내어서 마음껏 편집하거나.
“한 번만 더 해보죠.”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냥 한 번 더 담아보고 싶어요.”
이번 앨범의 마지막 트랙 의 레코딩이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까? 이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바로 앞에서 들을 수 있는 일이 또 생길까? 이런 생각에 한 번 더 요청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고 싶어서.
“좋아요. 좋은데…… 한 번만 더.”
“오우. 영민이 이번에는 무척 까다로운데.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해볼까?”
“그냥 방금 했던 것과 똑같이요.”
“소스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
“그럼 셈이죠.”
그는 또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 위로 피아노의 청명한 선율이 입혀지며 맑은 날씨의 아침을 연상케 하는 밝은 느낌을 연출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러 간다는 컨셉이었다.
저메인 존스는 이 감성을 곧바로 이해했고 자신의 풍부한 표현력으로 곡을 완성시켰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 설레는 가슴을 안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듣고 있는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만들어질 정도로 순수한 느낌 그 자체였다.
“좋아요.”
“이제 된 거야?”
“아주 좋았어요.”
그렇게 해서 그와의 시간도 종료되었다.
내가 맡은 것은 이 앨범의 제작이었고, 이제 이 결과물은 음반사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나의 역할도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걸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되지?”
나는 번역 앱을 두드리며 문장을 찾고 있었고,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나온 저메인 존스는 얼굴을 내 옆으로 바짝 붙이며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 지켜봤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걸 영어로 옮겨도 ‘Thank You’라는 건조한 말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Thank You.
Well Done.
Good Job.
다른 번역을 찾아봤자 이 정도. 나는 이 중에서 어떤 말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영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어.”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해주었다.
* * *
우리나라에서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뮤지션에 관한 모든 것을 관리해 주고 수익을 발생시켜 준다면, 미국에서는 이것이 각각의 역할에 따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법률적인 대리인이 되어주는 에이전시, 스케줄 관리 및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 해주는 매니지먼트, 그리고 음반을 팔아주는 음반사, 크게 보면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이 모든 것을 전부 해주는 셈이다.
그래서 에이전시를 통해 계약을 하고, 매니저의 관리를 받으며 레코딩을 마무리했고, 이제는 앨범 발매를 위해 음반사와 의견 조율을 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반 발매는 별도의 음반사가 담당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통의 개념이고, 저메인 존스와 계약이 되어 있는 소니 뮤직 같은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는 앨범을 팔아서 수익을 내야 하는 집단이니, 프로듀싱에도 상당 부분 개입을 한다.
-마스터링은 소니 뮤직이 지정한 스튜디어에서 진행할 것.
-각 트랙의 제목을 Part로 구분하지 말고 각각의 제목을 붙여줄 것.
이번 앨범에 대해서도 두 가지 코멘트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둘 다 양보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SHC 스튜디오. 몬스터 뮤직에서 발매하는 앨범의 마스터링은 전부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다.
바로 그곳이다. 김우진과 내가 처음 만났던 그곳.
“자기들이 지정한 곳에서 작업을 하라는데 저는 절대 못 한다고 했죠.”
“영광이네요.”
“저는 실장님하고 작업해야지 제일 편하니까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난 이 앨범 못 낸다, 이렇게 박박 우겼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메인 존스도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었고, 그래서 소니 뮤직도 두 손 들고 알아서 마스터링을 해오라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런 것도 영광이지만 결과물의 퀄리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저메인 이 사람 앨범, 솔직히 전 별로 안 쳐줬거든요. 명반이라는 몇 개만 뛰어나지, 전반적으로 보면 졸작이 너무 많아요. 신인 프로듀서를 너무 파격적으로 기용하다 보니까.”
그러면서 그는 최근 앨범들도 영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 박영민 피디님의 손을 거치니까 이 사람이 그 사람 맞았나 싶을 정도로 바뀌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메인이 이렇게 노래를 잘했나 싶기도 하고.”
“원래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목소리를 제 눈앞에서 들려주는데…… 노래 듣다가 울컥해서 눈물 나올 뻔했어요.”
SHC의 실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말을 들어주었다.
이제 이 사람과는 3년째 함께 일해서인지 언제나 편하게 느껴졌다. 일을 진행하는 것도 수월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금방 이해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보여준다.
음원의 가장 마지막을 다듬는 일이기 때문에 마스터링 과정에서 이런 호흡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졌다.
“박 피디님 목소리도 그에 못지않아요. 이거 4번 트랙…… 깜짝 놀랐다니까요. 진짜로 깜짝 놀랐어요.”
“어휴, 립서비스는 적당히 하세요.”
“아닙니다. 진짜예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접했던 가장 위대한 보컬과 두 번째로 위대한 보컬이 이 한 곡 안에 모두 들어 있어요.”
평소에는 칭찬에 인색했던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박 피디님도 이제 상업적으로 노선을 확 틀어버리셨네요.’, ‘어우, 이건 지난번 거보다 별론데요?’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던 사람이라서.
“그런데 이건 박 피디님한테만 슬쩍 알려드리는 건데…….”
그는 빠른 속도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모니터를 채우고 있던 창을 꺼버렸다.
새로운 폴더 하나를 불러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파일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어?”
음악을 들려주는 일까지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회사의 작품들이니까. 그는 나에게 파일 목록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데이바이데이?”
“김우진 피디님이 그저께 맡긴 겁니다.”
“아…….”
“다음 달 중순에 내보낼 거래요.”
“나한테는 뭐 절대 데뷔 안 시킬 거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더니…….”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명 추가해서 5인조로 나올 거래요.”
목록에는 의 마지막 주 경연에서 보여주었던 이라는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화해서 놀리고 싶은데…… 그러면 실장님 입장이 난처해지겠죠?”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 넉넉하다고 너무 늘어지시면 안 돼요.”
“당연하죠. 누구 작품인데요. 그런데 타이틀곡이 표기되어 있지 않네요?”
“그쪽에서는 타이틀이라는 개념이 없더라고요. 대신 싱글로 커트되는 곡이 몇 개 있습니다.”
“어떤 건데요?”
“3번하고 4번 트랙이요.”
“역시…… 그거 두 개가 귀에 쏙 들어왔었죠.”
“곡 제목도 바꾸라고 난리예요.”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자기들이 지정한 곳으로 하라는 요구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답변을 보냈고 이것은 수용되었다.
각 트랙의 제목을 Part로 구분하지 말고 각각의 제목을 지정하라는 요구 또한 앨범의 컨셉과 맞지 않는다는 답변을 보내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까지는 수용할 수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다.
전부 바꿀 수 없다면 싱글로 나올 곡 두 개만이라도 바꾸라고, Part 뒤에 또 다른 제목을 넣는 식으로라도 수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계 3대 음반사라고 불리는 그들의 입장에서 ‘Part’라는 제목으로는 곡이 팔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나도 받아들여 주었다.
Lacie Part.III (Just Like That)
Lacie Part.IV (Two Voice)
싱글로 발매될 두 개의 곡은 이런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Just Like That. 그냥 그렇게.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의미로.
Two Voice. 이건 말 그대로 두 명의 목소리. 단지 그런 의미였다.
* * *
레드애플의 음악 방송 데뷔 무대는 우리 회사에서 런칭한 그 어떤 팀보다도 화려했다.
의 제작진이 약속한 대로 우리 애들의 무대는 스페셜 무대로 꾸며졌다.
방송국이 제공하는 메인 무대와는 별도로 특별 무대를 제작해서 사전 녹화로 이루어진 것이다.
특별 무대는 비츠걸스도, 빅픽쳐도 못 해본 것이었다. 회삿돈을 들여서 무대 제작을 별도로 해야 한다. 무대 디자인부터 해서 제작 인건비까지 해서 전부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제작비는 천차만별이지만 적게는 2, 3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까지.
시청률 1퍼센트가 나오지 않는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고작 몇 분 동안 노출되는 시간을 위해 그런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몬스터 뮤직은 ‘그런 거 안 해도 음악이 좋으면 경쟁력이 있지 않겠나’라는 올드스쿨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회사였으므로 특별 편성무대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승리한 덕에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드애플의 특별 편성무대는 시야각에 따라 다양한 빛의 색감을 연출할 수 있는 다이크로익 필름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음악에 어울리는 화려하면서도 미래적인 스타일로 꾸며졌다.
‘HOT DEBUT.’
이번 미니 앨범에 수록된 곡과 에서 경연 때 했던 곡을 메들리로 보여준 뒤 조명이 어두워지며 다양한 색감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무대 디자인은 조명 쇼라고 부르곤 한다. 이번 특별 무대 역시 조명 연출에서 화려하게 컬러의 반전을 일으키며 입체감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
지난 한 달 동안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고 우리 애들은 신입답지 않게 제법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정적인 라이브, 실수 하나 없는 군무, 그리고 눈빛이나 표정까지.
[데뷔 축하드립니다.] [대형 신인의 등장이네요. 엄청난 팀을 만들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계속 좋은 음악을 만들어주세요.]우리 애들이 무대에서 내가 만든 곡을 부르고 있는 동안, 메시지는 나에게 쉴 새 없이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제작자로 일한 지 꽤 되었다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7분 정도.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신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준 무대가 끝이 났다.
시청률이 1퍼센트도 나오지 않는 방송이라지만, 직접적인 소비자들만이 지켜보는 방송이므로 오늘의 7분이 만들어낸 파급력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할 것이다.
지난주에 음원을 발매한 덕에 단숨에 1위 후보로 올라버린 레드애플이 데뷔 첫 주에 1위를 차지해 버린 그 순간, 이날의 방송분은 빠르게 편집되어 유튜브에 곧바로 뿌려졌다.
음방 편집팀은 출연 가수의 무대가 끝나면 20분 안에 편집본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려야 한다.
그러면 국내 방송을 실시간으로 볼 수 없는 외국 팬들이 찾아서 보게 되는 것이다.
고작 몇 분의 방송을 위해 수천만 원을 투자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Is this a new group? awesome debut performance.
-their dance so crazy, i love it
-so sexyyyyyyyyyyyyyyy
-oh this girlband producered by y.m.park
그리고 대형 신인이라고 불리는 우리 애들은 벌써부터 뜨거운 호응 속에 빠져 버렸다.
* * *
비츠걸스의 콘서트 3일차.
이날은 콘서트 관람을 위해 다른 일정은 모두 취소했다.
직원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다녀올지 아니면 조용히 혼자 보고 올지 고민을 하다가, 혼자 다녀오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안경까지 썼다. 출발하기 전에 거울을 슬쩍 봤지만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콘서트장의 주인은 우리 애들이어야 하니까, 나는 그저 관객의 한 사람으로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다.
내가 키워낸 애들, 내가 만든 음악을 순수하게 감상하는 자리를 가져보고 싶어서.
창피한 얘기지만 프로듀서라는 사람이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는 처음 가 보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콘서트까지 찾아다닐 만큼 어떤 그룹에 푹 빠졌던 적이 없었다. 평소 존경하던 외국 뮤지션이 내한하면 그런 거나 가끔 보러 다녔지.
그래서 비츠걸스의 콘서트에 간다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은 아저씨가 혼자 있으면 확 튈 텐데. 그런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막상 입장을 기다리는 대열에 속해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딱 봐도 내 또래거나, 아니면 그 이상인 듯 보이는데 혼자 와서 아무렇지 않게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물론 대다수는 30대 이하의 여성 팬층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혼자 온 사람들은 꽤 눈에 띄었다.
“이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앞에서부터 무언가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다.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 곡 끝나고 하는 이벤트예요. 참여해 주세요.”
그러면서 나눠주고 있는 것은 슬로건이었다.
‘빛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사랑스러운 요정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걸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은 팬클럽 회원들이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나도 하나 받았다.
나에게 슬로건을 건네주고 있던 팬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 하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쪽을 지나쳐서도 계속 이쪽을 흘깃거리며 바라보았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슬로건을 바라보았다.
앞면에는 ‘빛으로…….’라는 문구가, 그리고 뒷면에는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면 하는 이벤트라고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기대감에 젖어 들뜬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사람들, 인증 사진을 찍으며 깔깔 대며 웃는 사람들, 그렇게 떠들썩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나도 공연이 시작되기 만을 기다렸다.
* * *
내 좌석은 측면이었다.
무대는 T자 형태로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날개처럼 양옆으로 치솟아 있는 무대의 바로 앞이었다.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지루할 정도로 오래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장내가 어두워졌고 그제야 관객들의 웅성 대는 소리가 잦아졌다.
귀를 때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화려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었고, 음악 소리는 몽롱한 전자 악기의 소리로 바뀌며 의 인트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의 인트로가 나올 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관객들은 비츠걸스의 네 명이 무대에 모습을 보이자 이 커다란 실내체육관이 떠나갈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으로 이곳을 가득 채웠다.
무대의 중앙과 양옆, 그리고 정면의 돌출 무대.
어둠이 걷히자 그 네 곳에서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천사처럼 하얀 의상을 입고 있는 네 멤버는 고개를 숙인 자세로 가만히 있었고, 의 인트로가 한 번 더 반복되자 안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승연이의 파트를 시작으로 비츠걸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막이 터질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다시 한번 이곳을 뒤덮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펄쩍 펄쩍 뛰면서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까지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였다.
공연장 상단에는 대형 스크린 다섯 개가 넓은 가격을 두고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사실 무대가 너무 넓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스크린을 바라볼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멤버들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서 스크린에 나타날 때면, 내가 이 현장에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3일 차 콘서트라서 그런지, 비츠걸스의 네 멤버들은 능숙한 멘트와 함께 무대를 확실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 * *
[선생님. 오늘 안 오셨어요?]1부가 끝났을 때 뜬금없이 연화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콘서트 중에 톡 보내면 어떡하냐.] [안 오신 거예요?] [왔어.] [진짜요?] [어. 계속 보고 있어.] [안 보이던데.] [뭔 소리야. 네가 무슨 수로 객석을 뒤져본다고.] [선생님 계시면 눈에 딱 들어올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진짜 안 보였어요.]나는 그 자리에서 무대 사진을 찍어서 연화에게 전송했다.
[아…….] [됐지?] [어디에 계신지 알겠어요. 의심해서 죄송해요.]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여성 팬이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예?”
“박영민 피디님. 핸드폰으로 무대 찍으시면 안 돼요.”
“아, 예.”
“그거 걸리면 쫓겨나요.”
그녀는 내 귀에 대고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콘서트 초보인 걸 이렇게 또 티 내버렸다.
“그런데 저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니까 알겠는데요?”
“…….”
“비츠걸스의 아버지시잖아요. 저희가 모를 수 없죠.”
비츠걸스의 아버지. 듣기에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곧 시작된 2부 공연에서 연화는 내가 앉아 있는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자신의 동선이 이쪽을 지나칠 때에는 나와 아이컨택을 하고 지나가곤 했다.
특히 솔로 무대에서 를 부를 때는 내 앞으로 와서 한참 머물러 있기도 했다.
커다란 앰프가 연화의 목소리를 이 공간 곳곳으로 보내주고 있었지만, 이렇게 연화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 눈을 맞추며 노래를 부를 때면 이 공간 속에 우리 둘만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착각 마저 들곤 했다.
“피디님.”
조금 전 내 팔을 톡톡 두드렸던 여성 팬이 한 번 더 나를 찾았다.
“예?”
“피디님 덕분에 저 연화 씨하고 눈 마주쳤어요.”
“아, 네.”
그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벤트는 이날의 세트 리스트가 모두 끝난 후에 시작되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불이 꺼지자, 객석 한 구석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츠걸스의 미니 앨범 2집에 수록된 라는 곡이었다.
아까 입장 대기를 하고 있을 때 팬클럽에서 나눠준 슬로건, 그 뒷면에 가사가 적혀 있는 곡이었다.
타이틀곡이 아니라서 대중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곡이겠지만, 비츠걸스가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긴 곡이라서 팬들은 잘 알고 있는 곡이었다.
‘힘들고 외로워도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줘.’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게.’
팬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한 이벤트였다. 이제 국내 활동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나는 비츠걸스에게, 이번에는 팬들이 노래를 들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우리가 너의 곁에.’
‘우리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해 줘.’
공연장 안에 들어와 있는 만 명의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런 반주 없이.
그리고 무대의 조명이 다시 들어오자 커다란 환호성이 노래와 함께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감격에 젖어 있는 네 명의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두 눈을 찡그린 모습,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 그리고 팬들의 목소리 위로 비츠걸스의 목소리가 얹혀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체조 경기장에서 3일 동안 열린 비츠걸스의 콘서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네 명의 아이들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 * *
비츠걸스의 첫 일본 앨범은 몬스터 뮤직에서 제작하고 아이즈 재팬에서 매니지먼트와 유통을 맡기로 했다.
국내에서 발표했던 곡 중 아홉 곡을 추려서 일본어 버전으로 다시 작업했고, 라는 신곡이 타이틀로 선택되었다.
은 복고풍의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메트로 디스코 풍의 곡이었다. 비츠걸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최대한 담아낸 곡이었다.
그렇게 비츠걸스의 일본 앨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저메인 존스의 앨범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곡을 더블 타이틀로 밀었고, 뮤직비디오는 만 공개되었다.
Just like that. 그냥 그렇게. 별다른 이유 없이. 혹은 나도 모르게.
Just like that, I was in love.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버렸어.
앨범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화자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는 내용을 담은 발라드곡이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뮤직비디오예요? 장난치는 거 아니죠?] [그래. 이거야.]공개된 뮤비를 보자마자 나는 저메인 존스에게 그런 말부터 내뱉어버렸다.
저메인 존스의 유튜브 공식 계정, 그리고 ‘Part.III (Just Like That) Official Video’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조악해도 너무나 조악했다.
저메인 존스와 어떤 흑인 여성이 함께 등장했고, 싸우는 장면, 드라이브하는 장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 쓸데없이 둘이 손을 잡고 벌판을 달리는 장면 등등.
폰카와 영상 편집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였다.
이게 세계적인 뮤지션 저메인 존스의 뮤비라고?
[돈을 도대체 어디에 썼길래 이런 비디오가 만들어진 거예요?] [영민!] [왜요?]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그 말을 들으니 입을 크게 벌리고 익살스럽게 웃는 저메인 존스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다.
[돈을 어디에 썼냐고 묻지 마. 우리에겐 애초에 돈이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민! 이게 비즈니스야. 그래서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 거야.]이번에는 까만 얼굴 속에 있는 하얗고 커다란 그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나는 음악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야. ‘아직도’ 노래를 할 수 있는 건 축복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야. 아무도 내가 큰돈을 벌어다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그 말을 듣고서 나는 도저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저메인이 이 앨범의 상업적인 성적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길래,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런 거야. 나는 아직까지 나에게 무대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 그리고 영민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어.]나 또한 어느 정도 이런 시각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앨범을 통해 어떤 성과를 거두기 바라는가? 하는 질문에는, 그저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하곤 했으니까.
내심 흥행하길 바랐던 것은 제작자로서 가지게 되는 당연한 기대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요. 이번 앨범은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당연하지. 이 앨범의 선장은 영민이었잖아.]이미 나는 앨범 제작에 관한 계약금을 받았고 일이 완수되면 작곡료 또한 받게 될 것이다. 앨범의 흥행과는 상관 없이 그건 계약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감각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수록된 곡들 모두가, 특히 타이틀로 내세운 두 곡은 그 어떤 곡보다 흡입력이 강한데 이게 묻히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앨범이 발매된 지 일주일이 지나 차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때, 아직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싱글 차트인 빌보드 핫100과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는 저메인 존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소 차트 중에서 R&B/Hip-Hop Digital Song Sales에서 이 97위, Adult Pop Songs에서 100위로 진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차트는 그 성과를 조금도 인정받을 수 없는 마이너 차트일 뿐이었다.
[괜찮아. 아직 내 이름이 저런 곳에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일단 시작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