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5
5장 귀가 예민하시네요
유튜브를 보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말해봤자 안 믿을 거 아냐. 너희들끼리 소설 쓰고 난리 났던데. 나 그거 봤어. 너희들 하는 얘기를 보니까 나는 마약에 취해서 그 남자들하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한 미친 여자가 되어 있더라고.
그녀는 당당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그런 짓을 진짜로 했다면 또 어쩔 거야. 내가 내 인생 살겠다는데 왜 간섭이냐고.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유튜브에 들어왔다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잠깐 보고 지나친다는 걸 계속 보게 되었다.
-마약 검사? 안 했는데? 몰라. 하라는 얘기 없었어. 그거 주사기 뭐냐고? 몰라. 주사기가 있었나?
화면에는 뽀샤시한 효과를 잔뜩 뒤집어쓴 어여쁜 여자가 이런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탱크탑. 습관처럼 옷매무새를 만질 때마다 새하얀 살결이 흔들리며 도저히 거기로 시선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여자의 직업은…… 현재는 유튜버. 하지만 전직 걸그룹 멤버.
남자 아이돌들과 한바탕 진하게 어울려 놓았고, 그것 때문에 팀을 공중분해 되게 만들어버린 대단한 인물.
그런 사람이 자기 경험담을 풀고 있었다. 아마도 실시간 방송으로 했던 것인 화면 옆에선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보는 건 그 요약본인 듯했다.
대단하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제 연예인 인생은 끝장나 버린 상황, 문란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린 상황, 남들 같으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할 거다. 쪽팔려서 바깥을 돌아다니기도 힘들겠지.
게다가 그 사진. 멍청한 그놈이 자기 인스타에 공개한 그 사진에서 이 사람은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것도 카메라 렌즈가 있는 곳을 향해서.
이 사람은 ‘그게 뭐 어째서?’라는 식으로 이렇게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보니 이거 가지고 돈 좀 만지는 것 같았다. 화끈하게 썰을 푸는 건 기본이고 아찔한 의상을 입고 섹시댄스를 추는 것도 하고…….
진짜 멘탈 대단하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이렇게 당당하게 인터넷 방송을 하며, 그래, 나 막 나가는 여자야 라고 외치고 있다. 물론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렇게 추락해 버린 자기 신세를 비관하기도 했다.
내가 몬스터 뮤직에 들어오게 된 이후 두 번째 월말 평가가 있던 날. 그리고 그 날의 아침, 아니, 정확히는 그 날의 새벽.
수연이라는 사람이 자살했다.
그녀는 스캔들이 터진 시점부터 잠적을 했고 팀에서는 그녀를 퇴출시켰다.
외부로는 어떠한 심경도 노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들려온 소식. 자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
수사가 진행 중이라 정확한 사망 경위가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유서와 함께 다량의 약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
유서의 내용은 며칠이 지난 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본인이 그러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족들도 동의했다.
자기는 그렇게 문란한 사람이 아니며, 이제까지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
자신의 팬들을 비롯해서 상대 보이그룹의 팬들까지 쉬지 않고 공격적인 댓글을 보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얘기까지, 이것을 A4 세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기는 단지 선배들을 따라 참석했다가 술에 취하고 정신을 잃어 사진이 찍히는 줄도 몰랐다고, 그러니까 자신의 본질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해명이 유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먼저 언급했듯이 수연이라는 사람은 김다은의 절친.
다은이는 이런 메시지 하나를 나에게 남긴 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 * *
탑 티어 걸그룹의 메인 보컬이었던 사람. 수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녀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전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팬이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녀를 더럽다고 욕했던 사람들도, 그리고 그녀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단지 젊은 여자가 삶을 비관해서 죽음을 택했다는 것 때문에 마치 지인의 죽음인 것처럼 슬퍼하는 사람들도, 모두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연예인의 죽음이란 것이 그렇다.
사실은 더 슬픈 스토리가, 더 안타까운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지만 그들보다는 유명인의 죽음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큰 법이었다.
나의 두 번째 월말 평가는 그런 가운데 진행되었다.
업계 종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슬픔도 잠시, 이곳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쉬운 건 이번 전투에서 나의 주력 무기를 잃었다는 것. 김다은은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번 평가에는 불참이다.
회사 간부들과 관련된 직원들이 모이고, 트레이너들도 참석하고. 그리고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평가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알게 되어서 그런 건지. 손동하 사장과 김인혁이 나란히 앉아 있는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여전히 농담을 주고받으며 밝은 얼굴로 서로를 대했지만 속내는 아니라 이거지.
그리고 커다란 체격으로 우뚝 서 있는 차성우도 자꾸 눈에 들어오고.
무슨 약점이 있길래 연습생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거냐. 당신이 퇴출될 수도 있다는 말.
이제 입사 7주차. 알면 알수록 여기는 참 희한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마냥 똘똘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말이야.
“지윤아. 잠깐만.”
그리고 지난번처럼 날 선 혹평들이 줄줄 이어지던 중 뜻밖의 이야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너, 키가 좀 올라간 것 같다. 그렇지?”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애. 김다은 다음으로 잘하는 녀석.
“느낌이 확 달라졌는데? 네가 여기서 연습한 게 언제부터였지. 4년 정도 됐나?”
“예.”
“키가 올라간 거 맞지? 너 전에는 어디까지 됐더라?”
보름 전이다. 지윤이 음역대가 올라간 게.
김다은에 이어서 지난달 내내 저녁 시간을 할애해 개인 레슨을 해주었다.
다은이를 만졌던 방식 그대로 지윤이의 발성을 세밀하게 잡아주었고, 지윤이도 열심히 따라와 주었다.
그랬더니 음역대가 올라가더군. 예전에 낼 수 있었던 음에서 무려 5도나 높은 음이 가능해졌다. 그것이 힘이 가득 실린 단단한 소리로.
그렇게 음역대가 올라가니 전혀 다른 보컬로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지적하면 바로 받아들이는 다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인지 열심히 하는 애들은 나에게 레슨을 받은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 열심히 했구나. 잘 들었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요. 내가 가르친 겁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지.
그리고 그다음으로.
“상당히 리드미컬하게 곡을 잘 소화했네. 괜찮았어.”
윤희라는 아이. 얘 역시 내가 따로 봐주었던 애다.
“전반적으로 힘을 빼고 불렀음에도 듣기에 참 좋았거든? 계속 열심히 해봐. 이제 보니 윤희는 이런 스타일을 잘하는구나.”
또다시 호평이 이어졌다.
“곡은 누가 고른 거지?”
“선생님께서 골라주셨어요.”
“박영민 선생님?”
“예.”
신인개발팀의 직원 몇 명이 내 쪽을 돌아보며 빙긋 웃는다.
나도 따라서 웃어주고.
“박영민 선생은, 무슨 마법 같은 걸 부리나 봐. 물론 애들이 열심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 박 선생 오기 전하고 오고 난 후하고 너무 차이가 나는데. 눈에 확 띌 정도로.”
“말씀드렸잖아요. 이 친구 실력만큼은 제가 보증한다구요.”
“일 잘하는 거야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제는 나도 배우고 싶어지네. 하하.”
입가에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것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 * *
이윽고 비츠걸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뷔조 애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타이틀곡이 정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그 곡 하나만 죽어라 연습하고 있다고 하더군.
제목은 Open Your Eyes. 눈을 떠서 예쁜 나를 바라봐. 뭐 이런 간지러운 가사를 가지고 있는 곡이다.
작사/작곡 김인혁.
이제까지 수많은 히트곡을 써왔던 천재 작곡가가 이번에는 아이돌 뮤직에 손을 댔다.
상큼한 느낌을 가득 품고 있는, 템포가 조금 빠른 곡이었다.
김인혁이 만든 곡답게 멜로디 라인이 뚜렷하고 약간은 드라틱한 느낌마저 주곤 했다.
중심이 잘 잡혀 있는 베이스 라인, 아직 데모임에도 충분한 공간감이 느껴지는 사운드. 내가 느끼기에도 곡은 참 괜찮다.
그리고 이제는 메이크업을 받는 것에 능숙해져서 제법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는 네 명이 연습실 가운데로 나타났다.
준비해 둔 카메라가 돌아가며 애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고, 데뷔조 네 명의 퍼포먼스는 곧 시작되었다.
재능이 넘치는 네 명과 이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의 만남. 이렇게 보고 있으니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곡은 발랄함 그 자체였지만 느껴지는 완성도가 그렇다는 얘기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네 명의 보컬, 그리고 단단하게 균형이 잡힌 퍼포먼스.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흐트러지는 법도 없었다.
동선이 시시각각 변해도 중앙에서 화려한 미모를 뽐내고 있는 한연화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이 곡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느낄 수 있었고.
그 기대에 부합하듯 깨끗한 페이스로 매력적인 표정을 만들어내는 연화의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수고했어.”
데뷔까지는 이제 한 달 남짓. 몬스터 뮤직의 모든 직원들은 이 회사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아이돌 그룹의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 * *
김다은은 3일 뒤 회사에 나왔다.
발인까지 내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쌤. 죄송해요.”
그래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헤헤거리던 눈빛에는 짙은 그림자가 하나 씌어져 있었다.
그런데 다은이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좀 있는데, 확실히 두 차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기 때문인지 얘는 어느 정도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긴 나도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얘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 쟤 김다은이네.
-김다은 뭐해? 데뷔했나?
└어디 연습생으로 들어갔다는데요.
어느 기사에서는 펑펑 울고 있는 다은이의 모습이 잡혀 있었고, 그걸 보고 몇몇 사람들은 댓글로 언급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쨌든 어린 여자 연예인의 자살은 연일 기사화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이 무렵 그녀의 유서도 공개되었다.
그로 인해 동정 여론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그 떼쎅이 두 번째였다고? 쟤 남친도 없었음?
-처음은 누구였을려나?
-ㅇㅇㅇ이랑 썸 탄 걸로 알고 있는데 진짜 두 번째일 리가.
-님들. 적당히 좀 하세요.
-ㅁㅁㅁ 그 씹새끼가 개새끼네. 순진한 애 데려다가 뭔 짓을 한 건지ㅉㅉ
유서를 공개한 여파는 생각 이상으로 여론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다은이의 경우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회사로 돌아온 후 며칠 동안은 기운이 없다는 것이 눈에 띄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을 크게 쉬는 일이 늘어났고 나에게 장난기 어린 말을 하는 것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친구의 죽음. 그것도 함께 가수의 꿈을 키웠던 친구의 자살.
단지 노래하는 것이 즐겁고 여기서 연습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해도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 그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회의감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트레이너로서 그런 다은이를 가르치며 느끼는 것은, 어쩐지 목소리가 이전보다 깊어졌다는 것.
그리고 감정이 풍부해졌다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표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디테일하게 코칭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내뱉듯이 흘려보내는 구절에도 전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실려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예술가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건가.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련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그런 와중에.
나는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황유미의 레코딩이 있던 그 날. 나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노래가 끝난 후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부스 안에 있는 황유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냈다는 듯이, 그래서 서 있을 기운도 없다는 듯이 지친 기색이었고.
컨트롤룸에 있었던 나와 엔지니어는 노래가 주는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3분이 조금 넘는 노래를 하나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이 뜨거운 온도가 되어 내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하지만 헤어졌고,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던 중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는 그 감정이.
레코딩이 시작된 지 고작 30분 정도가 지났다. 세팅을 마친 후 이제 세 번째 불러본 것. 하지만 이것 이상의 결과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유미는 완벽하게 곡을 소화해냈다.
여기서 더 해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첫 디렉팅 작업은 어쩐지 30분 만에 끝나 버린 것 같았다. 물론 레코딩을 하기까지 꾸준히 트레이닝을 해오긴 했지만.
“박 팀장님. 저 이제 목이 좀 풀린 것 같아요.”
“그래. 한 번 더 해보자.”
가수 입장에서는 레코딩을 할 때 자신의 목소리가 날 것 그대로 모니터링되므로 평소 연습할 때의 컨디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레코딩에 능숙하지 않으면 음정과 박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보컬 트랙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디테일한 부분부터 전반적인 방향까지 이끌고 가주는 것이 디렉터의 역할.
스튜디오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면서 ‘그만. 거기 다시 해보자.’ 하면서 곡을 끊는 그런 사람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게 보컬 디렉팅이라고 할 수 있다.
레코딩이 진행되는 동안 가수의 컨디션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가수가 긴장을 하고 있으면 그걸 풀어주기도 하면서, 또한 이렇게 레코딩된 보컬 트랙이 나중에 믹싱될 것까지 감안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코딩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총 3시간. 이걸 스튜디오에서는 프로라고 부른다. 한 프로, 두 프로, 이렇게.
“박 팀장님. 어때요?”
하지만 이번에도 흠을 잡을 것이 없었다. 감동적이었다.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내가 디렉터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 사랑을 했고,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촉촉한 비와 같은 소리.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어디론가 빨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지난 추억을 꺼내어 보게 되는……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내 추억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어우, 얘 노래 잘하네요.”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스튜디오 엔지니어도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그렇게 감탄 어린 소리를 하곤 했다.
몬뮤의 내로라하는 보컬들을 수없이 경험했던 이 사람에게도, 그렇게 들렸단 말이지?
중간에 끊기는 법이 없이 원테이크로 네 번을 연달아 불렀다.
스튜디오의 한 프로, 즉 세 시간. 그중 처음 한 시간 정도는 목을 풀고 레코딩 환경에 적응을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적응을 하고 나면 두 시간째에 비로소 컨디션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어가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컨디션은 하락…… 잠시 쉬었다가 세 시간이 되기 전에 막판 스퍼뜨를 한 번.
내가 예전에 레코딩을 했을 때에도 그러한 흐름을 타고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어 보였다. 고작 몇 번 불렀을 뿐인데.
곡을 선정한 이후 지금까지 함께 연습을 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호흡 하나하나, 그것을 음절 단위로 세세하게 잡아주었다.
나는 곡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밀하게 톤을 잡아주었고 황유미는 그것을 잘 따라주었다.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더 할 필요가 없겠는데?
“영민이 여기 있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스튜디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 여기 있네.”
본부장. 그 대머리 본부장. 능구렁이 같은 인간 말이야.
“왜요?”
“야, 왜 전화 안 받냐?”
“저 지금 일하잖아요”
전화를 했었나? 진동으로 해놓고 레코딩에 집중하고 있었더니 나에게 전화가 온 것을 못 느꼈나 보다.
“급하게 좀 할 얘기가 있어.”
“본부장님. 저 지금 레코딩하잖아요. 왜 그러세요. 애써 집중하고 있는데 흐트러지게.”
“아, 그래. 그건 미안하고. 이거 끝나고 나 좀 보자.”
“알았으니까 이따 얘기해요.”
소스가 잘 뽑혀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창 궁리하고 있었구만.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하네.
“비츠걸스 데뷔조 말이야. 걔네들 앞으로 네가 맡아야겠어.”
“알았으니까 이따가 좀.”
“끝나고 나 좀 보자.”
“알았어요.”
본부장은 꾸벅 인사를 한 뒤 나가버리고.
나는 내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엔지니어와 유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니, 진짜. 스튜디오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저러는 사람이 어딨어.
“진짜 미안하고. 지금 정말 괜찮거든? 나는 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야. 한 번 더 해보면서 지켜보고, 어지간하면 방금 했던 걸로 가자고.”
그런데.
잠깐만
뭐라고?
내가 쟤네들을 맡아? 저 데뷔조 애들을?
쟤네들을 맡는다…… 그러니까 내가 쟤네들을 가르친다는 그 뜻 맞겠지?
그제야 본부장이 떠들고 간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맙소사!
* * *
“차성우 씨한테 사정이 생겼어. 그래서 급하게 대타를 투입해야 돼.”
시끌벅적한 사무실. 그리고 구석에 마련된 응접용 테이블. 본부장과 나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서 마주 앉아 있었다.
“영민아, 미안하지만 너 좀 바빠질 거야. 하던 일 계속 하면서 일을 더 받는 거니까.”
“차성우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데요?”
그렇게 물어봤지만 능구렁이 같은 이 본부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뒤에야 “나도 잘 몰라.” 하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저희 회사 일은 안 하신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면요?”
“그냥 이번 일에만 빠지는 거야.”
아무래도 이 사람은 자세히 말해줄 것 같지가 않다. 나중에 정 팀장한테 따로 물어봐야지.
“애들 타이틀곡 들어갔거든? 아, 알고 있지? 지난번에 봤으니까.”
“예.”
“그거 연습시키면 돼.”
이건 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원.
한연화한테 이렇게 될 거라고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너한테 기대 많이 하고 있다.”
“저한테요?”
“능력 있다고 소문이 자자해.”
“에이, 능력은요. 무슨…….”
당연히 능력이야 있지. 내가 손대는 애들마다 전부 가창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으니.
“네가 가르치는 애들이 유난히 늘었잖아. 가창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어.”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직원들 모이면 그런 얘기 많이 해. 애들이 열심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 새로 온 트레이너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한 거 아니냐고.”
“그럼 그래서 제가 저 애들 맡게 된 거예요?”
“그런 것도 없진 않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차성우 씨한테 사정이 생겨서.”
도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짚이는 건 딱 하나. 한연화가 했던 말.
차성우는 자기들을 맡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자기가 그걸 알고 있다는 말. 그래서 자기가 움직이면 차성우를 쫓아낼 수 있고 나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러면서 내건 조건도 있었다.
김다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것.
그럼 그래서인가? 김다은이 지난 평가에 불참했기 때문에 올라올 수 없는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자기와 내가 했던 약속이 지켜진 것이라고 판단한 건가?
다은이가 불참한 건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
“그리고 김다은 말이야.”
“다은이요?”
“그래. 다은이.”
본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숱도 별로 없는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겼다.
“얘 이번에 데뷔조로 올려보낼 거야.”
“예? 뭐라구요?”
“얘 이번에 데뷔시킬 거야. 비츠걸스 멤버로.”
어? 하고 입을 벌린 채 놀란 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은이 데뷔 안 시킨다면서요?”
“그렇게 결정했어.”
“그럼 5인조 되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게 뭐예요?”
“한 명 내릴 거야. 그 자리로 다은이 올려보낼 거고.”
한 명을 내려? 설마……
“한연화가 내려가는 거예요?”
그렇게 물었더니 본부장은 푸핫 하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펄쩍 뛰었다.
“그게 말이 돼? 우리가 걔 믿고 이번에 팀을 내보내는 건데.”
“남아 있다는 거죠?”
“당연하지. 랩 하는 애를 내리기로 했어.”
이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생각도 못 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김다은 고 녀석도 갑자기 데뷔를 앞두게 되었다.
* * *
“여기는 뭐라고 써요?”
“모르겠으면 비워 놔.”
“비워도 되는 거예요? 나중에 나한테 막 불리한 내용 채워지는 거 아니죠?”
“아니라니까. 표준계약서야 그거.”
졸지에 회사와 계약서까지 쓰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몬스터 뮤직의 정식 직원이 되어버렸거든.
차성우의 빈자리를 임시로 땜빵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역할을 내가 맡게 되었다.
몬스터 뮤직의 여자 연습생들을 가르치는 전속 트레이너.
맙소사.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다니던 학원이 망해 버려서 앞이 막막했었는데.
“황유미 싱글은 잘 돼가?”
“보셨잖아요. 아까 보컬 트랙 레코딩했어요.”
“그거 곡을 네가 골랐다면서?”
“그렇죠. 회사에서 안 해줘서.”
“잘되면 좋겠네.”
“아니, 잠깐만요. 혹시 그거 잘되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무슨 계약?”
“이거요, 이거. 제가 지금 회사랑 하고 있는 계약.”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지금이야 ‘연습생들의 기량을 발전시킨 능력 있는 트레이너’의 조건으로 계약을 하는 거지만 만약 황유미가 터지게 되면 거기에 ‘곡을 고르는 안목’과 디렉팅 능력까지 추가되는 건데.
“네가 열심히 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써서 줘라. 뭘 그렇게 꾸물대냐?”
또 딴소리.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얘기기는 하다. 회사에서 아무런 푸쉬를 못 받는 황유미의 싱글이 뜬금없이 터질 리는 없으니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시나 잘되면 차트 역주행이라는 말을 들으며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까 레코딩한 결과물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뜨진 못해서 일단은 인정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거다.
황유미가 노래를 아주 잘하는 보컬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어줬다는 것. 이번 싱글 발매의 목적은 그것이다.
사장은 나에게 그런 보컬을 만들어보라고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물이 사장 마음에 들면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겠지. 나에게나, 그리고 황유미에게나.
“다은이도 그렇게 꾸물대더니.”
“다은이가요?”
“걔도 아까 계약서 작성했거든.”
하긴. 연습생들도 데뷔조로 올라가면 회사랑 정식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그 전까지, 그러니까 그냥 연습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는 프리한 위치에 있는 거지만 데뷔가 확정되면 본격적인 노예계약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안 한다고 하더라고.”
“뭘 안 해요?”
“자기는 데뷔 안 하겠다고.”
데뷔를 안 해? 다은이가?
“자기는 그 팀에 합류하기 싫대.”
“다은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한참 실랑이했다니까. 너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 사람이랑 같은 팀을 하기는 싫어요.’ 그날 밤 한연화가 나에게 했던 말과 겹치면서.
그리고 아까 왔던 톡 두 개
[쌤. 지금 바빠요? 상의할 거 있는데.] [아 맞다. 레코딩 가셨지.]김다은에게서 온 메시지였는데 이따 얘기하면 될 것 같아서 답장은 보내지 않았었다. 내가 스튜디오에 있을 때 왔던 거라서.
“김 팀장이 걔 불러서 말해줬다는데, 안 하겠다고 하더래. 당연히 펄쩍 뛰면서 좋아할 줄 알았지. 설마 안 한다고 할지 누가 알았나.”
김 팀장이란 신인개발팀의 팀장.
“자기는 아직 데뷔하기 싫고, 연습을 더 하고 싶다더군. 그 팀에 들어가기도 싫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섰어.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데뷔시켜 주겠다는 걸 거절하는 연습생이 세상에 어디 있어?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자세히 캐물었지. 그랬더니 정말로 뭐가 있긴 있더군.”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그 팀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우리 회사가 싫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을 제대로 안 해주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달라졌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요.”
“너를 가르치는 박영민 선생도 그 팀을 맡게 됐다고 했지.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나온 소리야. 얘가 차성우 씨를 싫어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런데 그 말을 하니까 애가 표정이 확 달라져.”
그러면서 김다은은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다고 한다. 팀에 들어가서도 나한테 계속 배울 수 있는 거냐고.
“그렇게 설득한 끝에 겨우 싸인 받아냈어.”
기특한 녀석. 애쓴 보람이 있군.
“계속 너한테 배워야겠다는 거야. 맙소사. 그런 이유일 줄 누가 알았겠어. 애가 좀 엉뚱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내가 고 녀석을 열심히 가르치긴 했지. 매일 따로 불러서 연습을 시켰으니까.
“저녁에 일대일로 배웠던 것도 계속할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뭐 할 수 있겠지 하고 대답했어.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안 돼. 너도 안 된다고 딱 못을 박아. 안 그래도 멤버 교체돼서 걔네들 뒤숭숭할 텐데 한 명만 따로 신경 써주는 거 티 나면 흐트러진다. 너도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런 건 저도 알아요. 저도 데뷔 준비해 봤잖아요. 옛날에.”
“그래. 그런 거야.”
어쨌든 원하는 대로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잘 풀리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나는 이 회사의 전속 트레이너가 되었고 다은이는 곧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내가 만들어놓은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을 원 없이 할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다은이가 잘 버틸 수 있을까? 팀 안에서 불화를 겪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 차성우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긴. 그 팀에서만 물러나고 다른 일은 계속 할 거야. 그 정도 급을 우리가 함부로 내칠 순 없으니까.”
본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차 싶었는지 흘깃 내 눈가를 곁눈질했다.
함부로 내쳐? 한연화 말대로 정말 약점 같은 것이 있었던 건가.
“비츠걸스 잘되면 보이그룹까지 계획에 잡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보낼 수도 있고…….”
“남자애들한텐 남자 트레이너 안 붙인다면서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또 애매한 대답. 이 양반한테는 뭔가 딱 부러진 걸 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됐으니까 열심히 해보고. 어려운 점 생기면 나한테 말해. 너무 다은이만 챙기지 말고. 문제 안 생기게 하자고. 그 나잇대 애들은 어디로 튈질 몰라.”
다른 팀원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너무 신경 써주지 말란 얘긴가?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라, 이렇게 강조하는 걸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한연화하고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넌 실력 있으니까 잘될 거야. 솔직히 나도 놀랐어. 두 달 만에 이렇게 자기 자리 확실하게 만들어낼 줄은.”
본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유난히 따갑게 내 귀를 자극했다.
* * *
‘너 내가 좋은 곳 소개시켜 줄게’ 이런 말을 습관처럼 하던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데뷔 멤버 한 명이 팀에서 탈락하고 그 자리에 다은이가 올라갔다.
이런 일이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이 걸린다.
차성우에게 약점이 있다는 말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다은이의 경우는 최근에 여론이 조금 변했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것보다는 남자 트레이너와 여자 연습생이 동반 퇴진. 언뜻 짐작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에이, 설마.
어쨌든 이러한 일은 나에게 두 가지 생각을 상기시켜 주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자리로 올라왔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언제든지 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나를 조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연습실 앞.
다음 달이면 데뷔를 할 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심호흡을 크게 내쉰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건, 헤헤 하고 웃고 있는 김다은 녀석.
아니, 그런데 뭐지? 내가 방금 본 것.
문이 열리는 동안 내 시야에 얼핏 들어왔던 모습. 아주 잠깐 동안 내 망막에 머물렀다가 사라진 김다은의 얼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치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내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문이 열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오니 녀석은 나를 발견하고서 헤헤 하고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어? 엄마 어디 갔지?’ 하며 울상을 지으려던 어린아이가, 마침내 엄마를 발견하고서 활짝 웃는 웃음. 뭐 그런 거.
“안녕하세요!”
여자아이들 네 명이 뿜어대는 인사 한 번 우렁찼다. 하긴 직전까지 그 무서운 차성우에게 레슨을 받았었으니.
그런데 얘네 넷 서 있는 꼴이 참.
3 대 1. 아주 노골적으로 다은이는 무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 그래. 그럴 수 있지. 이제 첫날이니까. 멤버가 갑자기 바뀐 것이고,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해도 괜히 서먹할 수 있는 일이지. 그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과 팀을 하고 싶지 않아요.
왜 자꾸 그 말이 생각나냐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차성우 선생님은 사정이 생기셔서 다른 일을 맡기로 하셨어.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맡게 되었다. 데뷔할 때까지는 나하고 계속 연습을 해야 돼.”
입을 꾹 다물고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애들. 분위기는 적막하다 못해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레코딩까지는 한 달 남았지? 이 한 달 동안 너희 타이틀곡을 나하고 연습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발성부터 하나씩,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기초를 잡아보려고 해. 그게 내 스타일이거든.”
내가 가진 능력으로 얘네 넷의 보컬 능력을 눈에 띄게 상승시켜야 하니까.
“멤버 한 명이 바뀌었으니까 파트도 바뀌게 될 거야. 그래서 오늘부터 곡 연습을 들어가진 못하겠고…… 오늘은 우리가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이제 곧 무대에 올라설 애들을 내 손으로 키우는 일.
“우리는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지? 그러니까 노래 이상으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씩, 나에게 노래를 들려줘 봐.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너희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건지. 그걸 나에게 들려줘 봐.”
그리고 나는 반드시 이 자리에 살아남을 것이다.
* * *
레슨을 마치고 연습실을 나서고 있을 때 누군가 내 팔뚝을 꽉 붙잡는 것이었다.
“쌤…….”
다은이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저녁에 저 레슨해 주시는 건 그대로 하실 거죠?”
그래도 두 달 동안 이 녀석이랑 매일 봤었는데. 오늘은 처음 보는 표정을 자주 접하는군.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걱정 어린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
“저기 다은 씨.”
“예?”
다은이를 그렇게 부르는 건 한연화.
“이제 팀에 들어오셨으니 팀으로 움직이셔야죠.”
얘네 아직 말도 안 놓는 사이인가. 팀이 편성되기 전에는 같이 연습했을 건데. 그것도 2년 동안이나.
“저는 따로 배우는 게 있었어요. 저번 달부터, 아니, 저저번 달부터.”
“설마 저희 스케줄 무시하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건 아니죠?”
연화는 살짝 웃고 있다.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은 청순한 얼굴이 살며시 웃고 있으니 일단 눈에 들어오는 건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이었지만, 저 말이 지니고 있는 속내를 생각해 보면 보이는 대로 볼 수가 없네.
“저희는 레슨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제 배우기만 하는 위치가 아니니까요. 저녁까지 스케줄이 풀로 꽉 차 있어요.”
“아아…….”
“배우기만 하실 거였으면 팀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하는 거죠.”
순식간에 눈가에 시커먼 어둠을 드리우며 풀이 죽어버린 다은이도 그렇고, 애써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연화도 그렇고, 가만 보고 있기가 참 그랬다.
“연화 말이 맞아. 이제 한가하게 개인 레슨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거야.”
“알았어요. 쌤.”
“하지만 네가 원하면 시간은 만들어볼게.”
“예? 그럼 되는 거예요?”
“너네 일정 끝나고 늦은 시간에라도 할 마음이 있다면 내가 해줄 순 있어.”
“진짜요?”
또다시 엄마 발견한 표정.
“선생님. 회사에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던가요?”
이번에는 한연화 쪽의 얼굴이 굳어 있다.
“너희들 보컬 레슨은 나한테 위임했으니까 이 정도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
“…….”
“그리고 연화 너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너도 따로 레슨을 할 거니까 일정 끝나고 시간 비워놔. 나머지 두 명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거야.”
그런 말을 했더니 연화의 입꼬리가 움찔한다.
“왜? 하기 싫어?”
“아니에요. 가능한 거라면 부탁드리려고 했었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자.”
“오늘부터 해주세요.”
“오늘?”
“데뷔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요.”
아이고.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그럼 몇 시에?”
“열 시 이후면 괜찮아요. 저희 일정이 열 시에 끝나거든요.”
“그래. 알았다.”
젠장. 이제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군.
“쌤. 그럼 저는요?”
“너는 팀에 적응부터 하고 있어요.”
“저도 해주셔야죠?”
며칠 정도는 팀의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버거울 테니 일단 적응하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 팀에 녹아드는 것.
너는 아직 모르나 본데 얘는 너랑 같이 팀 하기 싫어한다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우렁찬 인사를 받으며 간신히 연습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그 이후에는 김인혁과의 미팅.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타이틀곡 작곡자와 보컬 트레이너의 관계로 만나는 것이었다.
이 녀석이 곡을 썼으니까. 작곡가의 의도대로 애들을 끌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스튜디오로 직행해서 황유미 보컬 트랙을 레코딩했고, 그거 끝나자마자 본부장에게 끌려가서 미팅을 가졌고, 그런 다음 데뷔조 레슨, 이제는 작곡가와 미팅. 이거 끝나면 나머지 연습생들 레슨해 주러 가야 한다.
바쁘다. 바뻐. 그러고 나면 숨 좀 돌릴 수 있으려나. 아니, 뭐가 또 있겠지. 밤에는 개인 레슨해 주기로 했고.
“영민아. 축하한다.”
“다 네 덕분이지, 뭐.”
“이제 계속 같이 가는 거야. 알았지?”
이 녀석 속내는 알 수가 없다. 마인부우 한 마리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활짝 웃고 있는데. 저번에는 나보고 왜 실수를 했냐며 몰아세우질 않나.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이거 좀 들어봐. 곡을 좀 바꿨거든.”
몬스터 뮤직의 프로듀싱팀 작업실.
테이블 몇 개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테이블마다 건반이 길게 늘어선 키보드가 하나씩 있었다.
청소를 자주 안 하는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곳이었다. 게다가 담배 연기까지 이리저리 흩날렸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고.
바닥에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연습실에 있다가 여기에 오니까 절로 눈썹이 구겨졌다.
“랩하는 애가 빠졌으니까 랩 파트를 대폭 줄일 거야. 대신 여기에서 여기까지를 더 반복하고…….”
작업실에는 김인혁 외에 두 명의 직원이 더 있었다. 그런데 인사도 안 한다. 내가 들어온 건지 만 건지 신경도 안 쓴 채 헤드폰을 쓰고서 자기들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다은이 파트로, 그리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연화 파트로.”
멤버가 바뀌었으니 파트 배분도 다시 들어갔다.
이전 버전에서는 연화가 거의 모든 고음 파트를 담당했다면 이제는 다은이와 나눠서 부르게 되었다. 분량으로 치면 반반.
“여기가 포인트야. 두 보컬이 교차하면서 다른 색을 지닌 생명력이 느껴져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생생하게. 어리고 젊다는 것이 확 와닿는 그런 톤으로.”
이렇게 가이드를 잡아주기도 했고.
기분이 참 묘했다. 십몇 년 전, 파트를 가지고 팀 내에서 그렇게나 싸워댔던 녀석과 이제는 키우는 애들을 놓고 파트를 나누고 있으니.
그나저나.
뭔가 먹구름 같은 것이 하늘을 잔뜩 가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그런 기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시커먼 먹구름이 비를 쏟아내고 싶어서 움찔움찔하고 있는 그런 느낌마저 드는.
파트 배분을 보면 연화가 하던 것의 상당 부분을 다은이에게 빼앗기는 모양새였다.
난리가 나겠군.
“다은이가 들어와서 다행이야. 보컬 파트에 힘을 더 줄 수 있게 되었어.”
아는지 모르는지, 이 녀석은 이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
김인혁과의 미팅을 마치고 애들 레슨 해주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했다.
사무실 의자에 파묻혀 버리니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박영민 씨가…….
-……그럼 박영민 씨는…… 예전부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뮤직의 사무실은 무척 넓다. 여덟 개 부서의 직원들이 모두 한 사무실에 모여 있다. 부서는 그저 파티션으로 구분을 해놓았을 뿐.
나한테 배정된 자리는 사무실 후문에서 직선으로 쭉 끝까지 들어오면 있는 창가 자리. 신인개발팀의 직원들이 모여 있는 위치다.
-역시…… 박영민 씨한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더럽게 예민해진 내 청력은 저런 걸 전부 귀로 담을 수 있게 되었고, 게다가 하필이면 내 얘기를 하고 있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면 누가 떠드는 것인지 알 수 있겠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눈을 지긋이 감고, 소리에게 귀를 더 기울여본다.
“김 이사가 김다은한테 지적했던 거 있잖아. 탁한 소리가 섞여 있다는 거. 박영민 저 사람이 맡고 나서 한 달 만에 그게 사라졌다는 거야. 2년 동안 그렇게나 잡아보려고 했지만 안 잡히던 게 말이야.”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한 번 들으면 딱 안다더라. 너는 톤을 어떻게 잡아야 이쁜 소리가 나는데 지금 발성에 이런 이런 문제가 있어서 그 소리가 안 나온다고. 그리고 그걸 자기만의 훈련법으로 고쳐 버린다는 거야.”
그래. 저 목소리는…… 누군지 알겠군. 그 유명한 떠벌이들.
“그러니 차성우는 게임이 안 되는 거야. 나중엔 활동하는 애들까지 전부 저 사람한테 맡길 것 같던데.”
“옛날에 노래를 그렇게나 잘했다고.”
“김 이사랑 같은 팀이었다잖아.”
“가창력 하나로 완전히 평정했었다더군. 왜 그 있잖아. 한 곡은 히트 쳤다던데.”
“그럼 왜 이렇게 늦게 데려온 거야? 일찍 데려왔으면 좋았잖아.”
“그거야 차성우가…….”
얘기를 들으며 픽 하고 웃고 있었는데, 차성우 얘기가 나오자 나도 아차 싶었다.
전화라도 한 통 해줘야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 그래. 박영민이.
목소리는 밝았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얘기 들었지? 나한테 사정이 좀 생겼어. 네가 대신 수고해야 할 거다.
나를 향해 날카로운 기색도 없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애들을 끌고 왔는지 지켜봤으니까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거기…… 오래 있을 곳은 아니더라고. 너도 좀 하다가 옮겨. 내가 좋은 데 소개시켜 줄게.
얘기를 들어보니 그래도 차성우는 몬스터 뮤직에서 맡고 있는 가수들이 좀 있어서 앞으로도 오가며 가끔 마주칠 거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보니 마음에 없는 얘기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선배님만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들.
-그래. 어려운 점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그런데 이건 꼭 명심해. 거기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사람 믿으면 안 돼. 사람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어. 이 바닥에서는.
행여나 자기 자리를 빼앗아간 사람이라고 나를 적대시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쫓겨났다고는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한테 빼앗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너 옛날에 처음 봤을 때 뭔가 터뜨릴 줄 알았어.
여기서 처음 마주쳤을 때 차성우가 나에게 했던 말도 떠오르는군.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그럼 차성우는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 더러워. 그 사람.”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더니 또다시 떠벌이들의 말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 * *
“선생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공간감이 느껴지는 청아한 음색. 나긋나긋한 억양. 게다가 발음도 정확하고.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소리야.
그런데 누가 말하는 거지? 바로 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는데.
“응?”
“이제 갈 시간이 되어서요.”
“간다고?”
연화였다. 내 데스크 옆에 우뚝 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위를 올려다보는 식으로 그 애를 바라봤는데.
예쁘다. 얘는 앵글이 이렇게 들어와도 괜찮을 것 같아.
“몇 시지?”
“12시 28분이요.”
“어?”
뭐라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고?
정말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제 막 8자가 9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12시 29분.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없었다. 사무실 조명 또한 다른 곳은 꺼져 있고 오직 내 쪽만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
“어휴, 내가 졸았나.”
잠들어버렸군.
“미안하다, 연화야. 나 기다렸니?”
얘하고 개인 레슨을 하기로 했던 건 10시였다.
“아까 열 시에 안 오시길래 사무실에 와봤어요.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진 않았습니다. 괜찮아요. 내일부터 해주셔도 돼요.”
두 손으로 내 뺨을 때렸다. 잠에서 빨리 깨려고. 짝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하긴 피곤하긴 정말 피곤했다. 오늘 하루는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으니.
“미안해. 피곤해서 잠깐 눈 좀 감고 있는다는 게 그냥 잠들어버렸네.”
또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야겠군. 지난번에도 이 녀석이랑 얘기를 하다가 차를 다 놓쳐서 택시 타고 들어갔는데.
아니, 12시 반이면 막차가 남아 있을지도. 지금 사무실을 뛰쳐나가 죽어라 달려가면 간신히.
“연화야.”
그런데 오늘은 30분 빠르네. 얘가 집에 간다는 시간이 말이야. 평소에는 언제나 새벽 한 시라고 했다. 매니저도 그때 얘를 데리러 온다고 했고.
“연습 다 끝난 거야?”
“네.”
속내가 훤히 보였다. 왜 30분이 남아 있음에도 연습을 끝내고 굳이 여기에 올라왔는지.
“여기 좀 앉아봐.”
할 얘기가 있다는 의미겠지.
“잠깐 시간 되지?”
안 그래도 얘랑 나는 할 얘기가 남아 있으니까.
* * *
“차성우 선생님은 네 말대로 너네 팀을 맡지 않기로 했어. 네가 지난번에 말한 대로.”
그리고 원래 데뷔 멤버였던 한 명도 팀에서 탈락했다.
데뷔 멤버에서 내려왔으면 당연히 내가 가르치는 연습생들 쪽으로 와야 한다. 하지만 그 애는 오늘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상실감이 커서 안 나온 게 아닌가 싶었지만 신인개발팀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니 단지 그것뿐만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이 회사에 영영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바보가 아닌 담에야 이 두 가지 건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성우가 물러나면서 함께 팀에서 쫓겨난 여자아이. 그리고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
“네가 말한 대로 되었지만 이건 어쩌지? 내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다은이는 너희 팀으로 들어왔지.”
그리고 김다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것. 얘는 자기 팀에 한 자리가 비어버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월말 평가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위로 올려보냈다는 건 회사의 입장이 확고하다는 것이겠죠. 저나 선생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내 옆자리에 앉아서, 그리고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연화는 그런 말을 했다.
시선은 나를 똑바로 향하지 않고 비스듬히 데스크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었으니까 너도 받아들여 봐. 네가 무슨 일 때문에 다은이를 멀리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희 둘은 같은 팀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였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다은이를 동료로 받아들여 봐.”
하지만 연화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내 책상 위만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는 데뷔를 망치기 싫다고 했잖아. 팀워크가 깨지면 손해 보는 건 너야. 불화가 있는 팀은 오래가지 못하거든. 네가 너의 가수 커리어를 제대로 시작해 보고 싶다면 팀원들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어.”
오늘 하루 종일 이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녁에 연화에게 개인 레슨을 해주면서 이 말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둘 사이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마치 따돌림을 당하듯이 세 명에게서 떨어져 있던 다은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선생님.”
그리고 연화 또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데스크 위에 걸쳐 있던 시선이 이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내 눈빛과 그대로 교차했다.
“저는 이 회사에서만 10년을 연습했어요. 그런데 고작 2년 동안 연습한 사람이 저와 같은 출발선에 선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나.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어 서로의 눈만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다은이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게 그런 이유였어?”
“…….”
“얼마 연습하지 않은 애가 네 옆으로 나란히 서는 게 싫어서?”
그러자 연화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애들은? 너희 팀의 나머지 두 명도 연습 기간은 너보다 짧잖아.”
“그 사람들하곤 달라요. 김다은은 제 자리를 빼앗을 겁니다. 아마도.”
“그러니까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거야?”
또다시 끄덕끄덕.
그리고 연화는 흔들림 없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무언가 답을 내려주길 기다린다는 듯이.
하지만 아무도 답을 내려줄 수 없다. 나라도 그랬을지 모른다. 당연히 10년의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겠지.
“오늘 말이야. 아까 전에…… 너네 데뷔곡 파트 분배하는 걸 다시 했거든. 너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다은이 파트가 꽤 많을 거야. 네가 원래 부르던 부분도 걔가 꽤 많은 부분을 가져갈 거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곡의 메인 보컬은 너야. 중요한 파트는 변함없이 네가 부르기로 했어.”
“데뷔곡은 그럴 거예요. 저한테 맞춘 곡이니까요. 김 이사님이 곡을 설명해 주실 때에도 그러셨어요.”
“그러면 문제없잖아?”
“하지만 김다은 그 사람이 저보다 더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잖아요. 당장 준비된 곡은 제가 차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한 곡이 나올 수도 있겠죠. 저보다 더 잘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다은이는 얘보다 한 클래스 위의 보컬이다.
“제 자리는 사라질 거예요. 김다은 그 사람이 팀의 목소리를 담당할 거고, 저는 그저 비주얼 포지션으로 내려앉겠죠.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려고 10년 동안 이 회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연화는 다시 시선을 책상 위로 돌리나 싶었지만, 다시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제가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 * *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유튜브에 올릴 거 편집하고 있었어요. 아까 하나 찍었거든요.
편집을 해? 편집도 하는구나. 영상 퀄리티가 조악해서 손보지 않고 그냥 올리는 줄 알았는데.
-박 팀장님 얘기도 좀 나올 거예요. 기대하세요.
“내 얘기?”
-오늘 레코딩한 거 썰 풀었거든요.
아까 허겁지겁 스튜디오를 나선 뒤 별다른 인사도 못 했기에, 황유미에게 수고했다고 톡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화가 걸려오더군.
-박 팀장은 아직 안 주무세요?
“나 아직 사무실이야.”
-예? 퇴근 안 했어요?
“그렇게 됐어.”
새벽 1시 15분. 연화는 매니저가 왔다며 아까 전에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남겨졌다.
“그런데 말이야.”
낮에 레코딩했던 얘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누구에겐가 이걸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너도 예전에 팀으로 활동했잖아. 그때 팀원들이랑 사이 어땠어?”
-저요? 뭐 그때…… 그냥저냥 잘 지냈죠. 방송은 안 잡히고, 맨날 지방으로 행사 불러다녀서 다들 불안했어요. 이러다 우리 쫄딱 망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나 맨날 하고.
그러면서 황유미는 팀으로 활동할 때의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주었다.
얘 은근히 투머치토커라니까. 말이 진짜 많아.
-왜요? 애들 사이가 좀 그래요?
그리고 눈치 또한 더럽게 빨랐다.
“어. 안 좋아.”
-원래 안 좋았던 거예요, 아니면 오늘 안 좋아진 거예요?
진짜 눈치 빠르네.
“오늘.”
-다은이 때문이죠?
“어.”
-이름이 한연화였나. 그 애가 그런 거예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에이, 편하게 생각하세요. 원래 데뷔 앞두고는 그래요. 그러다가 데뷔하게 되면 다 같이 잘되야 하니까 서로 도울 수밖에 없어요.
“그럴까?”
-그러다가 좀 잘되고 나면 다시 기 싸움하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만약에 멤버 중에 더 잘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이에요. 그런데…… 에휴, 다은이 걔 진짜 착하던데. 애기잖아요, 애기.
모르겠다. 그냥 다 말하고 싶어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태도.
모든 걸 내 입장에서 생각해 주는 황유미의 모습 때문인지 그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 마저 욕망처럼 내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진짜예요? 와…….
지난번에 연화가 나를 따로 보자고 했던 일, 그때 나누었던 얘기. 그걸 말해주니까 반응이 이렇다.
-노골적으로 다은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거네요.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달라니.
“나도 깜짝 놀랐었다니까. 애가 참 당돌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물론 10년 만에 데뷔하는 거라니까 자기가 그려놓은 그림대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까지. 전부 말해버렸다.
이따금 아스팔트 바닥을 긁으며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 그리고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새벽 한 시 반.
시끌벅적했던 이곳이 놀랍도록 고요했다.
-당돌하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구요. 그 애도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이었나 보네요.
“그래. 그럴지도.”
-왜냐면 회사에서는 그거 몰라요. 알면 다은이를 올려보내지 않았을 거거든요. 박 팀장님 말씀대로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 그렇겠지. 모를 거야, 아마.”
-모르죠. 당연히. 지금 회사에서 둘 사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박 팀장님 한 명밖에 없을 거예요.
“나밖에 없으려나.”
-회사에서 그 팀에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는지 저까지 알 정도라니까요. 그런데 무리수를 두겠어요? 사이가 안 좋은 둘을 붙여놓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회사에서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그 애가 속마음을 보여준 건 박 팀장님이 유일하다는 거예요. 아마 10년 동안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당돌한 게 아니라는 말이 이런 건가. 당돌한 게 아니라.
-박 팀장님한테 의지하는 거죠. 절박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고 오직 이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뭐 그런 거.
“에이, 무슨 소리야. 걔랑 나랑 그전에는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마도 그 애는 줄곧 박 팀장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앞뒤가 안 맞거든요.
어이쿠,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잘 이끌어보세요. 그 애는 별명이 독종이라면서요? 초딩 때부터 밤늦게까지 연습만 하던 애라고…… 친구 하나 없을 거 아니에요. 마음 열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계속 나눈 뒤 통화는 끝났다. 통화를 마치니 시간은 두 시를 향하고 있었고.
내가 멘토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불안한 멘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애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이 회사에 막 들어왔을 때에는 이렇게 바쁘지 않았다. 점심 즈음에 출근을 했고, 오후에 잡혀 있는 연습생들 두 조의 레슨을 해주면 끝이었다. 시간이 남아도니 저녁에 다은이를 따로 봐줄 수 있는 여유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데뷔 팀을 맡게 되어서 일이 두 배로 늘어난 느낌이고, 황유미 건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물론 애들은 나보다 훨씬 바쁘다.
타이틀곡 레코딩을 준비해야 하고, 뮤직비디오도 찍어야 하고, 프로필 촬영, 나중에는 티저 촬영, 쇼케이스 준비까지. 그리고 그러는 동안 메이크업, 의상을 준비하는 시간도 애들을 지치게 할 것이다.
몬스터 뮤직의 웹페이지와 SNS에는 벌써 애들의 프로필이 올라왔다.
거기에는 다은이 또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언제 찍었는지, 귀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진이.
홍보팀에서는 보도 자료도 뿌린 것 같았다. 비츠걸스로 검색하면 벌써부터 기사가 몇 개 뜨기 시작했다.
[몬스터 뮤직의 걸그룹 ‘비츠걸스’ 이번 10월에 런칭.] [4인 4색 프로듀서 김인혁이 선택한 4명의 요정들.] [몬스터 뮤직에서 이제는 아이돌 그룹을? 4인조 신인 걸그룹 데뷔 임박.] [김인혁의 보석함이 또 열린다. 이번에는 아이돌.]기사에는 네 명이 예쁘장하게 포즈를 잡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찍은 건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왜 차성우가 데뷔팀에만 집중한다고 하고, 다른 연습생들을 맡을 트레이너를 따로 구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타이틀곡 레코딩 준비는 당연히 내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줘야 했고, 쇼케이스에서 선보일 나머지 곡들의 연습도, 그리고 애들 연습하고 있는 중에도 틈틈이 연습실을 방문해서 점검도 해야 했다.
그런 중간 과정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잠깐 숨 돌린다 싶으면 또 회의. 그리고 회의, 또 회의.
이러면서 배워가는 거겠지, 하는 마음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일정을 계속 소화했다. 하나 끝낼 때마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파 왔지만.
“쌤. 오늘은 저한테 시간 내주실 수 있죠?”
“그래.”
바쁜 건 다은이 쪽이 더 심했다. 뒤늦게 데뷔 팀에 합류한 만큼 익혀야 할 것이 산더미 같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다은이가 그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기다려줄 수가 없다. 당장 나머지 멤버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연화와 다은이 사이가 어떻고 하는 걸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다은이는 무척 지친 기색이었고 소나기라도 흠뻑 맞은 사람처럼 볼 때마다 축 늘어져 있었다.
눈가가 벌건 것을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았다.
“저녁에 몇 시에 볼까? 너희 일정이 언제 끝나지?”
“모르겠어요. 지금 뭘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냥 시간이 막 빨리 지나가요. 정신없을 정도로.”
오늘도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군.
“그래. 끝나면 나 찾아와.”
“네.”
그리고 비실비실. 솜인형처럼 흐느적거리는 뒷모습을 보이며 다은이는 다음 일정을 위해 연습실을 떠났다.
안타깝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빡빡한 일정을 쫓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 * *
이날 저녁에는 마스터링 스튜디오를 찾았다.
황유미의 곡은 몬스터에서 믹싱을 마쳤다. 이제 음원을 다듬는 최종 작업인 마스터링. 아쉽게도 몬스터에는 마스터링 스튜디오가 따로 없기에 언제나 외주를 준다고 했다.
지하로 향하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우리 회사와 계약한 마스터링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철문 위로, 어울리지 않는 산뜻한 폰트의 간판. SHC 스튜디오. 아마도 SHC란 여기 사장의 이니셜이 아닐까 추측되는 이름이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어제 여기 엔지니어와 나눴던 통화 때문이었다.
-오늘 레코딩하신 거네요?
“예.”
-그런데 벌써 믹싱을 마쳤어요?
아무리 믿고 듣는 몬뮤의 음악이라고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대충 만드는 거라고 알려주는 꼴이라고 해야 되나.
트랙이 전부 레코딩되면 믹스 엔지니어가 믹싱 작업에 들어간다. 몬스터 뮤직의 경우는 스튜디오 레코딩 엔지니어가 믹싱을 겸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조정하고 보정과 이펙팅을 하는 작업. 물론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지만 대개는 프로듀서와 작곡가의 입김이 들어가며 이들이 계획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게 된다. 결코 금방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뚝딱 끝내서 마스터링 스튜디오로 넘겼으니 ‘날림으로 대충 만든 거예요.’ 하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지.
그 때문인지 마스터링 쪽에서 나보고 오늘 와달라는 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쪽에서 대충 만드는 거니까 우리도 대충했어. 하루 만에.’ 뭐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보컬 트랙 때문에 상의 좀 하려구요.”
락커처럼 장발을 치렁치렁 기르고 있는 마스터링 엔지니어는 나를 보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보컬이요?”
“요구하신 사항이 이거잖아요. 보컬 트랙은 너무 눌러 버리지 말고 살려두라구요.”
“그렇죠.”
내가 요구했던 내용이었다. 근사한 보컬을 만들어보는 일. 그래서 레코딩 때 원테이크로 갔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믹싱 자체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고, 제가 손을 대려고 하니까 거기도 건드릴 수밖에 없어요. 어느 선까지 건드려도 되는지 알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휴유- 하고,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만에 대충 끝냈으니까 최종 모니터링을 해달라는 게 아니었군.
그 뒤 엔지니어와 나는 열띤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마스터링 작업을 지켜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 앨범을 냈을 때에도 보컬로 레코딩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지 후속 과정에 대해선 지나가는 이야기로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푹 빠졌다. 단지 그가 제안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레코딩이 완료된 결과물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믹싱이란 메이크업과 코디로 그 사람을 빛내주는 것, 그렇다면 마스터링이란 온갖 포토 에디팅으로 보정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 맞으려나.
가장 중요한 건 모델이 되는 사람의 매력이겠지만, 때로는 보정 작업을 거쳐서 평범한 사람도 화려하게 빛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귀가 참 예민하시네요.”
그렇게 한바탕 작업을 끝냈더니 엔지니어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요?”
“아주 작은 변화도 확실하게 캐치하고 계세요.”
“저야 뭐, 이 곡을 많이 들었으니까요.”
멋쩍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내 귀가 예민하기는 하지.
“하도 신기해서 방금 말씀 안 드리고 여기 7번 트랙 하이를 아주 살짝 높여봤거든요. 역시나 바로 캐치하시네요.”
“그런가요? 스트링 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져서…….”
“이런 거 보통 사람은 못 들어요. 저도 그렇고요.”
칭찬인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프로듀싱팀에 계세요?”
“아뇨.”
“그럼 작곡 쪽?”
“아닌데요.”
“그럼…….”
“명함 내일 나온다니까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요. 저는 보컬 트레이닝을 맡고 있습니다.”
“아아…….”
의외라는 듯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다시 끄덕끄덕한다.
“그래서 보컬 쪽에 신경을 쓰시는군요.”
“그런 셈이죠.”
이놈의 인색한 회사는 내가 계약직일 때는 명함의 명 자도 꺼내지 않았고, 회사의 직원이 된 이후에야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아까 인사를 나눌 때에 내 쪽에선 빈손이었지.
“귀가 참 예민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각도 참 좋으시네요.”
* * *
마스터링을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지는 합의를 보았고, 엔지니어는 살짝 손을 대서 중간 결과물을 보여줄 테니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걸 내가 오케이 하면 이틀 뒤에 최종 완성본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작업 시간은 약 30분 정도. 나는 스튜디오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묻고 간만에 휴식을 즐겼다.
이제 이걸 마치고 돌아가서 애들 한 번 다시 봐주고, 다은이 따로 한 번 봐주고. 아직도 할 일은 잔뜩 남아 있었다.
“실장님. 저희 거 다 됐죠?”
갑자기 스튜디오 문이 벌컥 열리고, 인사도 생략하고 그런 말을 쏟아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저 갑자기 미팅 잡혀서 시간이 없어요. 빨리 이것부터 끝내고 가야 돼서.”
새끈하게 슈트를 갖춰 입은 정장 차림. 그리고 그런 핏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늘씬한 체구. 훈련소 조교처럼 매섭고 차가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나이는 아마도 30대 정도.
“거의 다 됐어요.”
“빨리 좀 해주세요. 저야 모니터 한 번만 하고 가면 되니까 지금까지 하신 거 보여주시던가요.”
그가 엔지니어에게 다가오자 진한 향수 냄새가 내 쪽까지 찌를 듯이 퍼져왔다.
“먼저 하고 있는 게 있어서.”
“급한 거예요?”
“금방 해요.”
그는 내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굳이 이쪽으로 관심을 둬야 할 필요성은 못 느꼈는지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사람. 어디서 봤는데.
“10분이면 끝나요.”
“10분? 알았어요. 빨리 좀 해주세요. 저희 거 컨펌하고 바로 가야 되거든요.”
그러더니 그는 엔지니어 옆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서 작업하는 걸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 사람 어디서 봤더라. TV에서? 아니, 그건 아닌 거 같고. 아마도 실물로 직접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몬스터?”
“…….”
“아, 이거 몬스터 거예요?”
“예.”
“그런데 누구지? 황유미? 황유미라면 걘가? 에이, 모르겠다.”
그는 모니터 구석의 파일명을 실눈을 뜬 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라니까 말인데…… 실장님 그거 알아요?”
“……?”
“몬스터에서 걸그룹 낸대요.”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뭐예요? 몬스터가 아이돌을 낸다니까요. 그 몬스터가.”
그러면서 그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낄낄낄 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왜들 그러나 몰라. 스캔들 하나 터졌다고 뭐 먹을 거 있다고 달려드는지.”
“…….”
“아이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줄 아는 건지. 그런 회사가 해봤자 투자한 돈도 못 건지고 쫄딱 망할 게 뻔한데.”
모니터에 옅게 비치는 엔지니어의 눈길이 잠시 내 쪽에 머물렀다. 엔지니어는 주의를 주겠다는 듯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다들 그렇게 시작해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예쁘장한 애들 몇 명 모아서 내보내면 본전은 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쉽나. 우리 회사도 아이돌 그룹 하나 내보낼 때마다 전 재산 꼬라박는 식으로 밀어붙이는데.”
“…….”
“게다가 4인조래요, 4인조. 김인혁 그 양반이 이번에는 뭔가 헛다리를 짚는 것 같아.”
“4인조인 게 왜 문제죠?”
“우리가 왜 일곱 명, 여덟 명씩 떼거지로 내보는데요. 이렇게 내보내면 이 중에 한 명은 네 마음에 들 거야. 뭐 이런 식이거든요. 4인조는…… 어휴, 언젯적 방식인지. 몬스터는 그래서 좀 고리타분한 그런 게 있어요.”
다시 한번 모니터로 비치는 엔지니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실장님, 웹툰 보세요?”
“웹툰이요?”
“꼭 그런 것 같다니까요. 옛날에 종이책 시절에 잘나가던 만화 작가가, 요즘 웹툰이 뜬다니까 거기에 도전하는 그런 것 같다니까요. 그것도 극화체 그대로 하나도 안 바꾸고.”
“…….”
“몬스터를 무시하는 게 아니구요, 그냥 자기들 잘하는 거나 하면 되지…… 그런데 실장님. 더 기다려야 돼요? 나 빨리 가 봐야 되는데.”
슈트를 깔끔하게 입고 있는, 하지만 더럽게 재수 없는 말을 쏟아낸 그 남자는 스튜디오 데스크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시간을 재촉했다.
“거의 다 끝났어요.”
“알았어요. 저 모니터링만 하고 가면 돼요.”
“들어보실래요?”
“아, 저희 거요? 그래요. 빨리 좀.”
“아니. 이거요.”
엔지니어는 웨이브 주파수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요?”
“몬스터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길래.”
“아이, 관심 없어요. 그냥 뉴스 떴길래 하는 말이지. 아니, 그럼 한 번 들려줘 봐요. 황유미라면 걘데.”
우리 걸 노출하겠다고? 아니, 이건…… 내가 나서서 막아야 되나.
“오…….”
“여기까지만 들려드릴게요.”
“이게 황유미예요?”
“그렇다고 하는군요. 몬스터에서.”
“아…… 왜 들어보라고 하신 건지 알겠네. 한 번만 더 들려줘요. 조금만 더.”
그러자 엔지니어는 아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동의를 구한다는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잖아. 이게 황유미예요? 하고 묻는 게.
“얘…… 잘하네.”
“어때요?”
“아니, 제가 얘 목소리 알거든요? 비너스 캐슬이랑 우리 애들이랑 활동 기간이 겹쳐서. 내가 얘 라이브하는 것도 많이 봤는데.”
“그때랑 달라요?”
“많이 다른데요. 얘가 몬스터 들어갔구나. 그러면 차성우…… 그 양반이…… 아, 아니다. 거기 보컬 트레이너 바뀌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늘었나.”
“바뀌었대요?”
“그렇다네요. 제가 거기서 누구 좀 빼 오려고 하다가 들은 건데…… 그런데 한 번 더 들어봐도 돼요? 얘 괜찮네.”
그러자 엔지니어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더 이상 오픈하는 건 무리인 거 같네요. 저기 뒤에 계신 분이 허락하시면 모르겠지만.”
“뒤에……? 아…….”
그제야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몬스터에서 오신 분인가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 직원이신 줄 알고.”
갑자기 말투를 공손하게 바꾼 그가 나에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아이즈 컴퍼니의 김우진입니다. 처음 뵙는데 제가 실수를 했네요.”
“아, 예. 저는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아이즈 컴퍼니. 걸그룹 플라지아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
“저는 몬스터 뮤직의 박영민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다음에 뵈면 명함 드릴게요. 저는 몬스터에서 보컬 트레이닝을 맡고 있습니다.”
“보컬…… 아…… 그렇군요.”
그런데 김우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계속 내 쪽을 신경 쓰는 것이 엿보였다. 엔지니어와 대화를 하면서도 내 쪽을 힐끔거리고.
“초면에 실수가 많았습니다. 아까 했던 얘기는 잊어주세요. 사과하겠습니다. 몬스터라면 색다른 아이돌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예요.”
“예. 괜찮습니다.”
“워낙 음악을 잘하는 회사니까…… 저희 같은 장사꾼이 질투를 했다고 생각해 주세요.”
자기 일을 마친 김우진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정중하게 사과를 해왔다.
못 받아줄 건 없었다. 이 사람이 틀린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시장에선 우리를 그렇게 바라본다는 거니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바닥에서 적을 만들면 나중에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태도는 아까 엔지니어와 떠들 때에 비해 완전히 딴 판이었다.
아이즈 컴퍼니 A&R 센터의 김우진 실장. 그리고 아이즈 퍼블리싱 소속의 작곡가.
이날은 그와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