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50
맙소사.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보란 듯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인혁아. 밤늦게 미안하다.”
-어. 왜?
“전에 내가 강은진 씨 얘기했던 거 기억나지?”
-누구? 아아…… 그거?
“너 진짜 기억 안 나냐?”
-난 진짜 처음 듣는 이름이라니까. 나한테 이러지 말고 차라리 상무님한테 자세히 물어보지 그러냐.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
인혁이는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우리 프로듀서는 그 꼰대 아저씨 한 명이었잖아.”
-그렇지.
“다른 사람은 없었어. 모아 엔터에 여자 직원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는데.”
-어. 확실히 없어. 그 시절 내 친구 중에 은진이라는 이름이 있었거든. 만약 같은 이름이 있었다면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 그 은진이라는 애가 그때 나랑 많이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우리 아는 사람이야?
내 기억에도 그랬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 사람이 이 사진 속에 있는 것인가?
내 꿈속에 나타나서 나에게 능력을 깨워준 그 여자가.
왜 강은진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진 속에 있는 건가.
* * *
“상무님!”
“깜짝이야.”
이른 아침부터 임원실을 찾아갔다. 다행히 대머리 상무는 일찍 출근해 있었다.
“저랑 잠깐만 얘기 좀 해요.”
“무슨 일인데?”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소회의실을 잡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강은진이라는 사람이요.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그래. 걔가 왜?”
“그 사람이 포보이스의 프로듀서였다면서요.”
“아, 그거? 난 그렇게 기억하는데…… 아니었냐?”
전에는 그걸 기억 못 하냐면서 타박하더니 이제는 태도가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내 꿈에 나타나서 나에게 능력을 줬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 기억에는 아니에요. 인혁이도 그렇게 말하고요. 저는 모아 엔터에서 강은진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아닐 텐데…….”
“그래도 상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호기심에 찾아봤어요. 그냥 인터넷에서…… 작곡가 강은진을 검색해 봤어요. 그랬더니 저랑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지? 내 기억엔 분명히 걔가 너네 맡았다니까.”
“아니, 그건 아니었고요. 모아 엔터 관두고 방황하고 있을 때 마주쳤던 분이에요. 제 진로에 대해서 상담을 했던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저도 이름을 잊고 있었다가 사진을 보고 떠올릴 수 있었어요.”
꿈에 나타났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둘러댔다.
“그런데 이분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랬지. 젊은 나이에 참…….”
“언제요?”
“그게 언제였더라. 내 기억에는 은진이가 너넬 맡았어. 그리고 그렇게 앨범 만들던 중에 죽었나, 아니면 마치고 너네 활동하던 중에 죽었나.”
“그분이 우리를 맡지 않았던 건 확실하고요, 어쨌든 그 시기라는 거죠? 저하고 인혁이가 가수로 활동했던 그때.”
“그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돌아가신 거죠?”
“교통사고였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비보가 들려왔던 건 기억 나. 그런데 사고였었나. 이게 기억 안 나네.”
지난밤, 잠을 설쳐가며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다.
곡 하나를 남기고 떠나 버린 사람에 관한 자료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낸 것이라고는 강은진이라는 미모의 작곡가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라는 곡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이라는 것.
이것 말고 자세한 것은 알아낼 수 없었다.
사진은 를 부른 정준모라는 가수와 함께, 그리고 그 외 스탭들과 함께 찍은 것이었다.
나는 가수 정준모 씨를 찾아갈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은진이가 너네 프로듀서 아니었어?”
“아니었어요. 포보이스가 냈던 곡 어디에도 그분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상무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어떤 분이었어요?”
“은진이?”
“들려주세요. 어떤 분이었는지…… 제가 힘들었을 때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주신 분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게 죄송스럽고, 늦게나마 찾아뵙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상무는 강은진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 * *
상무가 모아 엔터로 옮기기 전의 회사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
소속 연예인보다 더 눈부신 미모로, 작곡하다 잘 안 되면 연예인을 해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사람.
싹싹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늘 호감을 샀던 사람.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창의적인 시도를 곧잘 해서 앞날이 기대되는 작곡가로 꼽히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고를 당해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만약에 그녀가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추모 분위기에 힘입어, 요절한 다른 뮤지션들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단 하나의 작품 를 부른 정준모라는 가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같은 업계에 있으니 몇 다리 건너면 연락처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지금은 가수를 그만두고 음악과는 관련 없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고, 나는 연락처를 얻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분에 대해선 왜요?’ 하고 퉁명스럽게 묻던 그는 ‘아아, 몬스터 뮤직의 박영민 씨라고요? 통화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하고 오히려 나와의 통화를 반겨주었다.
다만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서 당장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고, 퇴근 후에 다시 통화하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강은진…… 도대체 누구인지. 나하고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왜 내 꿈에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왜 상무님은 그 사람이 나의 프로듀서였다고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쌤?”
“어……?”
“쌤, 어디 아프세요?”
“아냐.”
“아까부터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셔서.”
내 앞에는 다은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다은이의 재계약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딴생각 하셨죠?”
“미안해. 잠깐 무슨 생각 좀 하느라.”
“너무해요. 제가 앞에 있는데.”
다은이는 코를 찡그리며 서운하다는 내색을 했다.
“여자 생각하셨죠?”
이번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꼬맹이였을 때 만난 다은이는 벌써 2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만큼 목소리 또한 깊어지고 있었다.
“왜? 나는 여자 생각하면 안 되냐?”
“뭐야? 진짜였어요? 누군데요?”
“있어.”
“설마 쌤…… 결혼하시는 거예요?”
“뭐가 또 결혼이야. 어디에 있는지,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구만.”
그랬더니 다은이는 눈까지 찡그리며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했다.
“몇 살인데요?”
“나이? 몇 살이더라…… 암튼 나보단 연상이야.”
“연상이요? 그럼 완전 아줌만데.”
나이를 계산해 보면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례를 범한 것이다. 여섯 살 연상인 분에게 따박따박 반말을 뱉어 댔으니.
겉보기엔 어려 보였고, 또 그때 한창 학원에서 어린 애들을 대하는 것에 익숙해 있을 때라.
“와, 이거 진짜 빅뉴스인데. 쌤, 그럼 그 사람도 가수예요?”
“아니.”
“그럼요?”
“작곡가래.”
“진짜요? 그럼 작곡 부부? 오! 이거 괜찮다. 혹시 우리 회사에 있어요?”
“아니.”
“와, 근데 뒤통수 제대로 맞네. 갑자기 뭔 결혼이에요? 예고도 없이.”
다은이는 눈썹을 꾹 구긴 채로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누가 결혼한대? 혼자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쌤이 방금 그랬잖아요.”
“그게 아니고, 돌아가신 어떤 작곡가가 있어. 여자 작곡가.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또다시 상상에 빠져 버린 듯한 다은이는 “에이, 그게 뭐야.”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 * *
비츠걸스 멤버들의 재계약은 멤버별로 다르게 이루어졌다.
연기 쪽으로 확실하게 진출한 승연이는 계약 내용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두 번째 드라마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계약을 변경하며 연장했고.
유아연의 백댄서로 먼저 데뷔를 해서 다른 멤버보다 연장 시기가 빨랐던 선하는, 회사에서 퍼포먼스 디렉터 일을 하는 것을 덧붙여서 작년에 계약 연장을 마쳤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다은이와 연화였다. 두 사람 모두 우리 회사와 재계약을 하면 비츠걸스는 문제없이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저야 무조건 몬스터죠. 쌤하고 같이 음악 하는 게 제일 행복해요.”
다은이와는 문제없이 재계약에 성공했다.
“저희 아빠도 딴 데 갈 생각하지 말고 평생 여기하고만 하래요.”
“그래? 말씀 고맙다고 꼭 전해드려줘.”
“전에는 아빠가 맨날 물어봤잖아요. 널 이상할 술자리에 데려가진 않냐. 가수 시켜준다면서 몹쓸 말을 하는 사람은 없냐. 맨날 걱정이셨는데 제가 분명히 말했어요. 우리 회사는 그런 거 하나도 없다고요. 그랬더니 딴 데 갈 생각 절대 하지 말고 여기랑만 하랬어요. 쌤 예전에 우리 집 왔다 갔을 때도 사람 선해 보인다고 진짜 좋아하셨고.”
이렇게 비츠걸스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돌 그룹에게는 ‘5년 차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아이돌 그룹, 특히 걸그룹은 데뷔 후 5년 정도가 지났을 때 멤버 탈퇴가 발생하거나 심지어는 팀이 해체하는 경우도 흔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계약 기간이 대부분 5년이니 연장 계약에 실패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데뷔를 한 멤버들이 5년이 지나면 20대 중반에 이르므로 나이를 먹으면서 원래의 컨셉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다.
힘들게 팀을 시장에 안착시켰다고 해도 반짝 몇 년 동안 활동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나 바쁘게 활동하고,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앨범을 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평생 여기서 쌤하고 같이 음악 하고 싶어요. 유미 언니처럼 멋진 솔로 가수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저도 실력 더 늘면 연습생들 가르쳐보고 싶기도 해요. 진짜 자상하게 잘 가르쳐줘야지.”
“비츠걸스도 평생 해야지. 나는 너네들 앞으로도 계속 장수하는 팀이 됐으면 좋겠어.”
“그럼 진짜 좋죠. 그렇게 돼야 하는데.”
다은이는 습관처럼 테이블로 팔을 쭉 뻗으며 거기에 엎드렸다.
“너 왜 그래? 문제 있어?”
“아뇨. 문제는 없는데요, 저는 진짜 저희 팀 사랑하고 있고요, 계속 갔으면 좋겠어요.”
“지금 잘하고 있잖아.”
“계속할 수 있겠죠?”
대화의 흐름이 어쩐지 조금 다른 분위기로 전환된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괜찮으니까 말해봐.”
머뭇거리던 다은이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화 없으면 우리 팀 깨지겠죠?”
“걔가 왜 없어?”
“몰라요.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연화와 다은이는 이전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썼고, 새로 옮긴 곳에서는 각자 따로 방을 쓰게 되었지만 이따금 같이 잘 때가 있을 정도라고 들었다. 팀이 결성되었을 때 간신히 넘었던 고비를 생각해 보면 언제 그랬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얘가 이런다는 것은 뭐가 있다는 것인데.
“왜? 연화는 계약 안 한대?”
“어? 쌤한테도 얘기했어요?”
“…….”
연화와는 내일 만나기로 했다. 재계약을 논의해 보기 위해서.
그런데 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다그쳐봤지만, 다은이는 그제야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멋진 솔로 가수가 되고 싶기도 하고…….’
다은이는 연화로부터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 * *
저녁이 되었을 때 정준모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상무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꼭 뵙고 싶었던 분이었는데 연락이 끊겼고, 돌아가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어서 찾아뵙고 싶다고.
-저도 어디로 모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발인 때 참석하기는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일산 어디의 납골당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그분의 가족들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봤지만 뾰족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저하고 그분하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가수와 작곡가의 관계일 뿐이었죠. 그런데 저는 막 데뷔를 앞둔 것이었고 그분도 그 곡이 입봉작이어서 함께 일할 때는 친하게 지냈습니다. 둘 다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얻고 싶어서 세세하게 물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것만큼은 기억납니다. 그분이 노래도 정말 잘하세요. 저를 디렉팅해 주실 때는 이렇게 노래를 잘하시는 분이 왜 가수를 안 하는 건지 의문일 정도였거든요. 만나보셨다니까 아시겠지만 외모도 배우들 뺨칠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셨고요.
“그래요. 그런 분이셨죠.”
-어느 날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직접 무대에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키워주는 일을 하고 싶으시대요. 이곳에선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회를 얻지 못해서 묻혀 버리는 일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고, 자기는 그런 사람들을 챙겨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정준모 씨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아서 많은 얘기를 해주지 못했다며 그는 미안해했다.
만약 떠오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연락하겠다고 해주었다.
-이곳에선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회를 얻지 못해서 묻혀 버리는 일이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고, 자기는 그런 사람들을 챙겨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도무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이라도 잠들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자려고 해봤지만 오히려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저와 만날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인가 살펴보니, 평소에는 전화하는 일이 없었던 상무님이었다.
“상무님? 무슨 일이세요?”
그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미안하다. 늦은 시간에.
“괜찮습니다.”
-네가 아까 낮에 은진이 얘기하던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 다른 일하고 헷갈렸던 거야.
“그럼……?”
-생각났어.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헷갈렸어. 그래. 네 말이 맞더라. 은진이가 너희를 맡은 적은 없었어.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냐면, 회사에서 은진이를 너희 프로듀서로 쓰려고 했던 건 사실이거든. 그래서 내가 착각한 것 같다. 꽤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왔던 거라서.
“처음 듣는 얘깁니다. 이건 인혁이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랬겠지. 너희들이 회사에 잘 안 나올 때의 일이니까. 가끔 행사 잡히는 날에나 매니저가 너네 데리러 가고 그랬잖아. 그때 나왔던 얘기야.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은진이가 먼저 찾아왔어. 포보이스에게 곡을 주고 싶다면서. 그때는 그런 식으로 신인 작곡가들이 발품 팔아서 자기 곡을 홍보하던 시절이니까 흔한 일이기도 했지. 그런데 나하고 은진이는 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었고, 얼마나 재능 있는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했어. 곡 받아서 포보이스 한 번 더 띄워보자고.
그런데 네가 기억하고 있던 원래 너희 프로듀서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어. 미안한 얘기지만 회사에서는 너희들을 가망 없는 애들로 여기고 있었잖아. 굳이 곡을 받아서 또 앨범을 내줘야 하나 싶었지.
그런데 은진이는 달랐어. 너희들한테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자기가 너희 앨범을 프로듀싱해 보고 싶다는 의사도 분명하게 피력했어.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이게 어떻게 논의됐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도 곡 하나 제대로 띄운 적이 있는 팀이니까 한 번 더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었을 거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포보이스라는 팀은 강은진이 맡게 되었고, 젊은 애들끼리 열심히 음악을 했었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마음이 워낙 강해서,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 그때 너희들 진짜 좋아했어. 네 목소리 좋았고, 은진이가 함께한다면 한 번 더 일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고를 당하셔서 저와 만나지 못했던 겁니까?”
-아니. 사고를 당한 건 그 일이 있은 이후야. 은진이가 너희를 만나지 못한 건 회사에서 반대했기 때문이야. 조금 전에 이게 기억 나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회사에서 그걸 반대했던 사실 말이야.
너희 네 명을 유지하는 것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포보이스는 여기까지 하자, 이런 결론으로 이어졌던 거지. 그래서 은진이에게 연락해서 이 내용을 말해줬어. 안타깝지만 이렇게 되었다,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라, 이런 말을 전해야 했던 거야.
조금 전에 기억났다는 게, 그때 은진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야. 포보이스라는 팀은 재능이 넘치는 팀이고, 누군가 그 재능을 살려주기만 한다면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팀이 될 거라고, 그때 은진이가 그렇게 말했지.
너하고 낮에 그런 말을 하고 나서 은진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까 떠올랐어. 너희의 재능을 살려주기만 한다면 너희는 위대한 팀이 될 거라는 말. 왜 이걸 잊고 있었는지…… 너무 오래된 일이긴 했지만.
늦은 시간이지만 이 말이 이제야 떠올라서 너한테 전화한 거다. 나중에 또 만났다면서? 네가 방황할 때 너한테 조언을 해줬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난 거야. 은진이가 그랬어. 이 팀의 메인 보컬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고. 그래서 나중에 너를 찾아갔던 걸 거야.
“혹시 강은진 씨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순 없겠습니까? 어디로 모셨는지, 가족들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상무님, 제발 부탁합니다.”
-나도 그게 전부라서. 장례식 때 찾아가기는 했었지만, 다른 건 잘 모르겠어.
“그리고 상무님. 강은진 씨가 저희한테 곡을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저희에게 주실 곡을 만드셨다는 겁니까?”
-그랬지? 아마.
“그 곡을 들어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어휴…… 20년 전의 일인데 그걸 어떻게.
“제발 부탁합니다. 모아 엔터에서 있었던 사람과 연락 안 되십니까?”
-된다고 해도 그게 남아 있을까? 오래전에 없어진 회산데.
“상무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알아보기는 할게. 잘 될지 모르겠지만.
* * *
그때의 일을 하나하나 더듬어서 짜맞춰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와주었다.
포보이스가 두 번째 곡을 내고 망했을 때, 그리고 지방 행사를 간신히 돌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 때 강은진 씨는 모아 엔터를 찾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모아 엔터에서는 포보이스의 가능성을 의심했기 때문에 거절했던 거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연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그 무렵에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능성을 그렇게 높게 봤다면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망 시점을 되돌아보면, 아마도 모아 엔터로부터 퇴짜를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를 당한 듯했다.
상무님에게 이것도 물어봤지만 오래된 일이라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였다.
죽은 사람이
생전에 눈여겨봤던 뮤지션의 꿈에 나타나서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렇지 못하면 괴로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 마저 드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밤이 새도록 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으로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 수 있었지만, 그날도 그녀는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 * *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 꿈속에서는 그랬다.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두 눈은 내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전 그때는, 이제 막 입봉한 초보 작곡가였으니 무언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 쉽지 않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선은 그녀가 자기 자리를 확실하게 잡아야 했을 테니까.
포보이스를 보고서,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서, 나를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라도 초보 작곡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비록 모아 엔터테인먼트에서의 만남은 불발되었지만 그녀가 작곡가로 자리를 잡게 되고, 자기가 눈여겨보는 가수를 키워줄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면.
그녀와 나의 인연은 반드시 이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당신을 이끌어줬다면,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아쉬움을 읽어내지 못했다.
어쩌면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부터였다.
포보이스가 해체되고, 다른 회사에 들어가서 데뷔를 다시 준비했지만 무산되어 버리고, OST를 불렀지만 드라마가 망하고……. 이런 과정들을 전부 지켜본 건가.
그러다가 인혁이에게서 전화가 오는 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면서 나를 찾아온 건가.
* * *
다음 날이 되어도 나는 그녀를 찾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얼마 없기도 했지만 무언가를 알아낸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나에게 나타났는지, 왜 사라져 버렸는지.
왜 내가 타고나지 않은 세 번째 능력을 나에게 주려고 했었는지, 그리고 그걸 주는 대가로 나에게 무얼 요구하려고 했었는지.
내가 어떻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
“그래. 여기 앉아.”
연화는 칼라가 목을 감싸고 있는 옅은 핑크색의 니트 티셔츠와 블랙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학생처럼 단정하게.
하지만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어버린 연화는 언뜻 봐도 한결 성숙해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드라마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20대 후반의 배역 맡아 무리 없이 소화해낸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연화의 성숙한 매력이 이질감 없이 연상의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며 칭찬을 듣곤 했지만, 바로 옆에서 연화를 줄곧 지켜봐 왔던 나에게 있어서는 아직 애처럼 보일 뿐이었다.
억지로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발돋움치는 아이를 보듯이.
그러다가 어린아이처럼 영롱한 두 눈과 소녀티가 가득한 젖살이 사라진 자리로, 기품 있는 눈동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고, 황홀감을 느끼는 대스타의 아우라가 연화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흔히들 나이가 들수록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이 얼굴의 인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화에게서는, 한 번 목표로 한 것은 반드시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착과 억센 의지가 얼굴에 새겨질 거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까웠다.
성급하게 다가서지 않고, 단숨에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느긋하게,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연화는 그렇게 한 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서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연화에게 강한 집착이 느껴진다면 한 번 목표로 했으면 오직 그곳만을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 때문이지, 억척스럽게 손에 쥐려고 하는 탐욕스러움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20대 중반의 연화는, 바라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차분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분한 모습 속에서 우수 어린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작곡가……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
“여자라면서요.”
“다은이한테 들었어?”
“네.”
한없이 청순했던 두 눈이 이번에는 쏘는 듯한 강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 왜?”
“알고 싶어서요.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딘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제법 무거운 걸음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알고 싶어요. 어떤 여자가 선생님 마음속에 있는 건지. 누군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작곡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곡을 잘 쓰는 것에 매력을 느끼신 건지.”
“나도 알고 싶어.”
“네?”
“나도 알고 싶다고.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게 뭐예요?”
“어렸을 때 잠깐 마주쳤던 분이야. 돌아가셨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어. 그래서 알아보는 중이었어. 마치 어렸을 적 은사님의 부고 소식을 뒤늦게 들어서 찾아보고 싶은 것처럼.”
“…….”
“이제 됐냐.”
하지만 연화는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차분한 두 눈 위로 못마땅한 그림자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건 그만 얘기하고, 일 얘기를 마무리 지어보자. 여기 계약 조건을 정리해 둔 문서가 있고, 이건 계약서 사본이야. 15일까지 마무리 지으면 되니까 이걸 보고 생각해 봐. 수정하고 싶은 내용이 있거나 더 요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연화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문서를 들추어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더니, 다 보지도 않고 문서 더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숙소로 가지고 돌아가서 천천히 읽어봐도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가로막으며 연화의 목소리가 나를 먼저 향했다.
“저 다른 회사 가고 싶어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팽팽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고 있었다.
“지쳤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선생님하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 가끔은 자제력을 잃어버릴 것처럼 위험한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애써 감정을 숨기려는 듯 연화는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흑요석처럼 맑게 반짝이는 두 눈은 숨길 수 없는 듯했다.
한결 짙어진 눈시울에 어느덧 아련한 애수가 깃들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지해온 밸런스가 무너지는 느낌이에요. 언제나 저울의 양팔에 똑같은 것을 올려놓고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앞에 있으면 순식간에 그 균형이 무너져 내려요. 그래서 제가 회사를 떠나려고 해요. 좀 더 일찍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생각이 길어져서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준비해 둔 말을 털어놓듯이 연화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목이 바싹 말라서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저께 다은이를 통해서 이미 예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이 가까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계약 해지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은이가 알고 있다는 것은 연화가 마음을 굳혔다는 걸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면 왜? 무슨 이유로?
그에 대한 대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나일 것이다. 오늘 연화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목표를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던 연화가 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곧은 직선을 그리며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독종처럼 살아왔던 애의 마음이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불안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무슨 말을 건넬 것인지 이미 준비를 마쳤다. 그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갈등했던 것에 이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다.
“이 앨범 들어봤어?”
“네?”
나는 연화에게, 저메인 존스의 앨범을 내밀었다.
낙엽이 지고 있는 가을 공원을 배경으로 저메인 존스의 늘씬한 체구가 한껏 멋진 포즈를 쥐하고 있는 재킷.
여섯 개의 곡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음악으로 표현한 앨범이야. 각각의 곡은 자신의 마음이 변화하는 단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Part.I, Part.II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해두었어.”
“알아요. 들어봤어요. 이 앨범.”
연화는 케이스를 열고 북클릿을 꺼내었다.
“Part.I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노래한 거야.”
“예?”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연화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습실 복도에서 너하고 처음 마주쳤을 때, 그리고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서 늦은 밤 나를 찾아왔던 일,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경쟁자를 탈락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 눈부신 아름다움 속에서 가시를 발견했던 일. 곡이 괴팍하면서 변조가 심한 건 그 때문이야.
그리고 Part.II에서는 너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노래했어. 그 이면을 살펴보니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너는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어. 남들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고, 어른들의 삭막한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너는 자아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거야. Part.II는 너를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렇게 불안한 사람을 내가 붙잡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
“이게 저에 대한 노래라고요?”
“그래.”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연화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북클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Part.III에서는 나의 감정을 깨닫게 돼.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알게 되고, 나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Just like that, I was in love.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버렸어.’ Part.III는 그런 감정을 담고 있는 곡이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 네가 살고 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마음을 숨기고만 있어야 돼. Part.IV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노래하고 있어.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목소리와,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목소리.”
연화는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서,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거기서 멈추려고 했어. 그래서 Part.V는 쓸 수 없었지.”
그때 배민혁의 사건이 벌어졌다.
다른 남자가 연화를 향하고 있었고, 어쩌면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빼앗기기 싫다.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것을 잃게 되더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서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음악에 담는 것이 고작이었어. Part.V는 너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고, 너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그리고 Part.VI는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했어.”
두 곡 모두 그 일이 있었던 그 날 밤에 완성되었다. 단 하루 만에.
“이게 그런 건 줄…… 저는 몰랐어요.”
북클릿을 내려놓는 연화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맑고 투명한 것이 촉촉하게 내려앉아 있는 두 눈.
지난 밤은 고통스러웠다.
강은진 씨에 대해 알아보느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대로 연화를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내 가슴을 고통스럽게 했다.
계약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없는 다른 곳으로 떠나가서 연화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차갑게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오늘은 이 마음을 전하기로.
밖은 어두웠다. 우리는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로는 그 어떤 소리도 끼어들 수 없었다.
무언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듯이 우리는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부탁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나는 이 자리에 이대로 머물러 있을 테니까, 너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너의 목표를 향해서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그러면 우리는 그 목적지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그리고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늦었으니까 내가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새벽이었다.
연화와는 이 시간에 함께한 적이 많았다.
처음 나를 찾았을 때도 이 시간이었고, 우리가 함께 땀을 흘렸을 때도 이 시간이었다.
모두 퇴근해 버린 회사는 어둠 속에서 적막했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오직 내 차 한 대만이 빈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저 그냥 혼자 가도 돼요. 정말이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비츠걸스의 연화가 이 새벽에 혼자 집에 가겠다고? 그랬다간 난리가 날 거야.”
그렇게 말했더니 연화는 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나는 운전석에 연화는 조수석에.
이렇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서로를 향한 감정은 가슴 속에 묻어두고서.
그렇게 곧게 뻗어 있는 길을 향해 쭉 걸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단지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겨두고서, 우리 두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시동을 걸고 변속기 위로 손을 뻗었을 때, 연화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나를 감싸 안았다.
마치 이 모든 공간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상 속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버린 것 같았다. 우리 둘만이.
나는 연화를 바라보았고 연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갔다.
달콤하면서도 황홀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그날 꿈에서, 나는 강은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곡을 팔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나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이대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 앞에서 차갑게 말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곳에서의 그녀는 격정적인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회사에서 그렇게 결정한 걸 어떡하냐.”
“솔직히 두 번째 곡도 프로모션만 제대로 됐으면 시장에서 반응이 있었을 겁니다.”
“그거야 뭐…….”
“박영민 씨의 보컬은 한 시대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니까요. 저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재능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요.”
그러자 영화의 하이라이트 필름처럼 갑자기 시간과 공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내 눈앞에서 다른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앨범 제작 일을 하고 싶었어. 내가 무대에 오르고 싶지는 않고…… 솔직히 내 목소리가 별로이기도 하고.”
작은 테이블 위로는 500㏄ 맥주잔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아마도 친구와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아, 네가 말했던 그 사람이야?”
“어.”
맥주잔 옆에는 포보이스의 싱글이 있었다. 그녀는 네 사람이 촌스러운 포즈를 잡고 있는 사진에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사람하고 음악을 해보고 싶어. 진짜 대단하다니까. 우리나라에서 이런 보컬이 태어났으면 받들어 모셔야 하는데 현실은…….”
“그럼 찾아가 봐. 가서 말하면 되잖아. 같이 음악 하자고.”
“그게 되겠냐고. ‘안녕하세요. 저는 강은진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그러면 누구냐고 묻겠지. ‘네, 저는 곡 하나를 발표한 작곡가예요. 히트하지 못해서 잘 모르실 텐데…….’ 이랬다간 수상한 사람인 줄 알고 저리 가라고 할걸.”
“그래도 진심을 전하면 통하지 않을까? 아니면 팬이라면서 다가가는 거야. 일단 팬이라고 해서 가까워진 뒤에 사실은 곡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거지.”
“아니, 됐어. 딱 2년 보고 있어.”
“뭐를?”
“2년 안에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릴 거야.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지. 작곡가 강은진입니다, 하고 말하면 곧바로 반가워할 수 있도록.”
“2년 안에 그 사람이 빵 떠버리면?”
“그러면 탑클래스와 탑클래스의 만남이 되는 거고.”
그런 말을 한 뒤 그녀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 소리를 내면서 웃었고, 마주 앉아 있는 친구도 함께 소리를 높였다.
“자신 있어. 나 진짜 괜찮은 곡 많이 썼다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곳을 나와 한참 걷던 그녀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그런 다음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늦은 시간, 주변은 어두웠다.
그리고 초록불이 켜져서 횡단보도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그녀에게로, 둔중한 SUV 한 대가 맹렬하게 다가와 그녀를 도로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그것이 그녀 삶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할 말이 많아요. 묻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서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나니, 나는 아직도 차 안에 있었다.
* * *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산의 중턱이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연화는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힌 채 잠들어 있었다. 가을의 밤바람이 차가워서 나는 내 재킷을 연화에게 덮어주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을 옅은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도어를 열려는 순간 연화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가지 마요.”
아련한 목소리로 나를 잡았다.
“깼어?”
“조금 전에요.”
나는 다시 문을 닫았다.
“나가지 마세요. 선생님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요.”
아직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었다.
그냥 꿈인 건가? 내 상상이 만들어낸 장면인가? 아니면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서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은 연화에게 설명한 내용 외에 다른 것도 담겨 있었다.
이건 저메인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강은진 씨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또 다른 미래, 내가 능력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도 나는 연화와 함께했다.
다시 음악 학원으로 돌아간 나는, 가수로 살아남는 것에 실패한 연화를 만날 수 있었다.
연화가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함께하기로 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Just like that. 그래 그렇게, 사랑에 빠져도 되는 거야. 그렇게 될 운명이니까.
그 곡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였다.
* * *
기사는 레드카펫의 끄트머리에 맞추어서 차를 멈추었다.
번쩍거리는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엉키며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들려왔다.
“준비되셨습니까?”
기사가 물었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레드카펫이 시상식장의 입구를 향해 다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TV에서 봤을 때보단 볼품이 없었다. 카펫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밟혀서 지저분하게 색이 바래 있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까만 드레스 자락이 밖을 향해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손을 뻗어 아내를 일으켜주었다.
아내는 세련된 레이스로 장식된 블랙 벨벳 드레스로 고혹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픈숄더 형태의 독특한 라인으로 섹시한 매력도 함께 어필했다.
우리는 포토라인 앞으로 가서 포즈를 취했다.
우리의 등 뒤로는 까만 배경 위로 나팔이 인상 깊게 그려진 금색의 축음기 로고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축음기, Gramophone.
지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시상식이라고 불리는 그래미 어워드의 어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포토라인을 거쳐 공연장 입구로 들어가자, 안은 파티를 하는 것처럼 시끌벅적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몬스터 뮤직의 6인조 보이그룹 러멘트(Lament) 멤버들은 벌써 안으로 들어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무대에서와는 달리 점잖게 까만 수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선생님!”
그리고 여섯 명 모두 나에게 바짝 다가와서 양옆으로 매달렸다.
한 명 한 명, 내가 선발해서 키운 애들이었다. 3년 반 동안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거쳐서 작년 초에 데뷔했던 보이그룹이었다. 그리고 나를 이 자리로 올려준 효자 그룹이기도 했다.
러멘트 멤버들이 내 옆으로 붙자 다시 플래시가 터졌다. 아이들과 나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러멘트를 인터뷰하고 있던 리포터는 곧바로 나에게 다가와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자, 여기 위대한 프로듀서 박영민 씨도 오셨습니다. 이분과 잠깐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박영민 씨.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도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수상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벌써 두 번째죠?”
“그렇습니다.”
“박영민 씨는 지금 가장 뜨거운 보이그룹 러멘트의 프로듀서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걸그룹 두 팀을 제작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메인 존스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것을 계기로 미국 음악계에 진출해서 그해에도 올해의 프로듀서 상을 수상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위대한 천재 뮤지션의 현재 진행형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브라운색의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리포터는 잔뜩 고조된 억양으로 나를 소개했다.
“그리고 박영민 씨는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 부문에서도 노미네이트되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 만약 박영민 씨가 수상을 하시게 되면 제너럴 필드에서 최초로 수상하는 아시아인이 되시는 겁니다. 어떠신가요?”
“뭐 글쎄. 아무 생각 없습니다. 저는 즐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수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저는 오늘, 제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을 만들고 갈 것 같습니다.”
내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동안 러멘트 멤버들은 홀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다른 뮤지션들과 어울렸다.
아이돌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이들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고 다들 핸드폰을 꺼내어서 팔을 쭉 펴고 우리 애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딸이 너네들의 팬이야.’
멀리서도 그런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프로듀서 박영민,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 *
그래미 어워드에는 무려 100가지 넘는 시상 부분이 있다. 짧은 시상식 동안 이 상들을 모두 수여할 수는 없으므로, 시상식 본 방송에서는 몇 가지만 추려서 보여준다.
그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본상 네 개 부문은 제너럴 필드라고 불리며, 반드시 본 방송에서 시상하게 된다.
올해의 노래(The Song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The Record of the Year).
올해의 음반(The Album of the Year).
최우수 신인상(The Best New Artist).
이 중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는 둘 다 한 곡에 대한 상이라서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올해의 레코드는 그 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상이다. 말하자면 곡의 완성도를 비롯해서 음향적인 기술을 평가하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상은 그 곡의 아티스트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와 믹싱 엔지니어 등 곡을 제작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으로 앨범 제작자를 중요시 여기는 그래미의 철학이 담겨 있는 상이었다.
올해의 노래(The Song of the Year)는 올해의 레코드와 다르게 곡 자체의 음악성만을 평가한다. 그래서 그 상은 오직 작곡가와 작사가에게만 주어진다.
나는 이날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 두 개 부문에서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다. 올해의 노래에서는 작곡가로, 그리고 올해의 레코드에는 프로듀서로 오른 것이었다.
둘 모두, 작년의 빌보드를 휩쓴 몬스터 뮤직의 보이그룹 러멘트(Lament) 덕분이었다.
올해의 프로듀서상은 공개 방송 전에 이미 수상자가 발표되었으며, 그 상은 나에게 주어졌다.
아까 리포터가 말했듯이 저메인 존스의 앨범에 이어서 두 번째로 그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윽고 시상식이 시작되었고 무대는 축하 공연으로 꾸며졌다.
그래미 어워드의 공개 방송은 하나의 거대한 콘서트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시상 외에도 그 해를 휩쓴 세계적인 뮤지션의 공연 또한 주목해야 할 볼거리였다.
그래미의 축하 공연은 출연 아티스트별로 별도의 무대에서 펼쳐지며, 세계 음악팬들이 주목하는 무대인 만큼 그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드라마틱하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된 무대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날의 시상식은 뉴욕 맨해튼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다. NBA 뉴욕 닉스와 NHL 뉴욕 레인저스의 홈구장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은 약 2만 명가량의 관객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무대가 시작되었다.
‘비츠걸스X레드애플X러멘트’의 조인트 무대.
조금 전까지 드레스와 수트를 입고 점잖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애들이 무대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처음에는 러먼트의 여섯 명이 뜨거운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나타났고, 절도 있는 군무를 계속 이어가는 동안 양옆에서 두 걸그룹의 멤버들이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크레인 위에 올라타 있는 촬영 기사가 나에게 다가와 카메라를 겨누었다.
이 세 팀의 프로듀서. 방송이 어떻게 나가고 있을지 머리에 그려졌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두 번째 곡의 마지막을 부르면서 열네 명의 아티스트들이 근사한 군무를 딱딱 맞추면서 무대를 빛내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동선 마저 아름답게 보일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으며, 그러는 내내 괴성에 가까운 관객들의 함성이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무대가 끝나고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는 동안 카메라는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훌륭한 무대였다. 내가 키운 아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끝내주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내 손으로 키워낸 아이들,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올해의 레코드 상은 캐리쉬 허벨이라는 아티스트에게, 그리고 그녀의 앨범을 제작한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에게 돌아갔다.
수상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올해의 노래.
노미네이트된 다섯 후보가 카메라에 잡히고 있었고, 시상을 하러 나와 아까부터 계속 떠들고 있었던 두 명의 뮤지션들은 이제 수상자를 호명하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럼 올해의 노래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올해의 노래는…….”
침묵이 이어졌다.
관객들도, 이곳에 모여 있는 뮤지션들도,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시상자들도 숨을 멈추었다.
“위대한 작곡가이자 위대한 프로듀서, 그리고 위대한 보컬…….”
아직도 침묵은 이어졌다.
“러멘트 의 송라이터 영! 민! 팍! 축하합니다.”
우뢰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고 이만 명의 박수 소리가 이 커다란 공연장을 울렸다.
나는 옆에 있는 아내에게 키스를 했고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무대 위로 올라갔다.
화려하게 빛나는 금색의 축음기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내 뒤로 러멘트 멤버들이 자리를 잡자 찢어지는 듯한 함성 소리가 또다시 이곳을 가득 메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이크를 타고 내 목소리가 공연장을 울리자 다시 장내는 조용해졌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 아내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자 지미집이 아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았고,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이곳을 채웠다.
“아내하고 결혼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결혼을 발표했을 때 말입니다. 그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였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욕을 먹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저는 그 무렵, 연쇄살인마보다 더 지독하게 욕을 먹었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주었다.
“특히 아내의 팬들…… 길 가다가 마주치면 저를 죽일 기세였습니다. 대단했죠. 네, 정말 대단했습니다.”
아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SNS에 들어가 보니까 그들 모두가 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모두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대부분이 말입니다. 자랑스럽다, 꼭 상을 가지고 와 달라, 어느덧 그들은 저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박수 소리가 다시 한번 장내를 채우는 동안 나는 잠시 마이크 뒤로 물러나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를 일으켜 세워준 강은진 작곡가에게도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그분이 아니라면 저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아직 묻혀 있었을 것이고, 음악을 계속하고 있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께 꼭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저는 당신이 키워낸 뮤지션입니다.”
지난날이 떠올라서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는 우리가 삶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또는 표현할 수 있더라도 음악을 통해서 보다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노래로 만듭니다. 그렇게 저의 삶 속에서 함께해 주는 모든 사람들, 저에게 영감을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곡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가입니다. 앞으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음악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추모공원의 주차장은 비어 있었다. 군데군데 세워둔 차가 몇 대 보일 뿐이었다.
“혼자 갔다 와. 나는 여기에 있을게.”
아내가 말했다.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냥 같이 가지.”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내 신경 쓰지 말고 혼자 시간을 보내다 와. 그러고 싶잖아?”
사실 연화와 함께 가면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강은진 씨의 유골함 앞에서 마치 그녀와 대화를 나누듯이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녀와는 상관이 없는 아내를 생각하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잠을 좀 설쳐서 눈 좀 붙이고 있을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나 기다리는 거 잘하는 거 알잖아.”
연화는 내 손을 꼭 붙잡아주며 그런 말을 했다.
“그래. 고마워.”
나는 트렁크에서 황금색의 축음기 트로피를 꺼낸 뒤, 그것을 들고 추모 공원 안으로 향했다.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랑하고도 싶었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납골당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간 뒤 그녀가 안치되어 있는 곳을 찾아 그 앞에 섰다. 스물일곱 살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녀의 흔적은 오직 이곳에만 남아 있었다.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면 공원에 심어놓은 울창한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어디까지 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으로 해보았다.
때로는 감상에 젖어서, 어쩌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이곳에 와서 이렇게 떠들고 나면, 기분 탓인지 환청 같은 것이 들려오곤 했다.
‘그래요. 잘했습니다.’
꿈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 등을 토닥여주는 느낌처럼 자상한 목소리가.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안에서 잠을 자고 있겠다던 아내는 밖으로 나와 차에 기대어 있었다.
연화는 나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곡을 만들고,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해서 곡을 줄 것이고, 이따금 노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삶 속에서 수많은 영감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나와 삶을 함께해 줄 사람은 나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래. 충분히 얘기하고 돌아왔어. 잘했다는 칭찬도 받았어. 나는 그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The End
알고 보니 천재 뮤지션
9권
이돌구 현대 판타지 장편소설
지은이 : 이돌구
발행인 : 권태완, 우천제
전자책 발행일 : 2020-11-04
정가 : 3,200원
제 공 : KWBOOKS
주소 :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31길 38-9, 401호
ISBN 979-11-293-6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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