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s out I was a genius musician RAW novel - Chapter 7
7장 데뷔했습니다
김인혁이 몬스터 뮤직에 들어온 이후 최고의 성과라고 하면 당연히 유아연을 발굴하고 키워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10년 전. 김인혁은 막 회사에 들어온 작곡가였고 유아연은 15살짜리 연습생이었다.
유아연의 재능을 알아본 김인혁은 자기가 전담하다시피 해서 유아연을 트레이닝시켰고 다음 해 솔로 가수로 세상에 내보냈다.
그리고 데뷔하자마자 세상을 정복…… 까진 아니라고 해도 하여튼 여자 솔로 가수 중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또한 그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모두 성공. 덕분에 매번 그녀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타이틀곡을 만들어낸 김인혁의 주가도 이때 크게 올라갔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아연은 3년 뒤 일본으로 진출했다. 활동명은 이름의 한 글자를 뺀 ‘유아’.
일본 진출 초기에는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거기서도 마침내 탑을 찍어버렸다.
현재 10년 차 가수 유아연은 여전히 정상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월드 스타이자 역대 최고의 여솔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대단한 인물.
몬스터 뮤직에 있어서 매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아티스트였다.
나도 이제 몬스터 뮤직에서 일을 한 지 몇 달 지났기 때문에 그동안 유아연과는 몇 번 마주쳤다.
처음 마주쳤던 것은 연습실에서.
우리 애들 레슨이 유아연의 연습 시간 바로 다음 타임이라서 운 좋게 그녀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170의 훤칠한 키,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몸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얼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귀여운 마스크.
와…… 유아연이다. 하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녀와의 첫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스캔들 터진 거 보면서 너도 조심 좀 하라고.”
“무슨 조심이요?”
“남자! 남자 말이야. 너, 계속 그러다간 한순간에 망한다.”
와. 유아연이다. 하는 감탄을 계속하고 있을 무렵, 그녀 곁에 서 있는 우락부락한 남자는 그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유아연의 매니저였다.
“애들 보면서 정신 좀 차리라고. 남자 잘못 만나서 인생 망가진 거 봐봐.”
그러자 유아연은 ‘하아!’ 하는 소리를 내며 썩소를 날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남자 잘못 만나서 인생이 망가지다니…… 그럼 그게 여자애들 책임이라는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아니, 남자 여자 서로 좋아서 뒹굴어놓고 책임은 여자 쪽에 씌우시네. 그리고 그게 여자애들 잘못이에요? 얘기 들어보니까 남자애들 그쪽이 아주 질 안 좋은 애들이었다던데. 그것들이 꼬시니까 넘어간 거지, 그게 왜 여자애들 책임이에요. 그렇죠?”
여기서 마지막 말 “그렇죠?”는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실컷 둘이서 티격태격하다가, 유아연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면서 묻는 것이었다. ‘그렇죠오?’ 하고.
이게 그녀가 나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안녕하세요.’가 아니었고 ‘누구시죠?’도 아니었고 ‘그렇죠?’.
대답을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고. 조심하라는 말이야.”
“그런 얘기가 아니면요?”
“……?”
“사과하셔야죠.”
그러자 매니저는 마지못해 사과했다.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앞으론 말조심할게.”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그런 사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런 뒤 유아연의 관심은 갑자기 연습실에 들어온 내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
하고 감탄사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보컬 트레이너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박영민 씨……?”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회사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가.
“박영민 씨 맞죠?”
“아, 예.”
“와…… 신기하다. 박영민 씨도 우리 회사에 있었구나.”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니까 새로 들어온 사람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닌 듯한데.
“반가워요.”
“예, 저도 반갑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는 거지? 하는 궁금증이 내 몸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꿈틀꿈틀대고 있었지만, 감히 대스타 앞에서 초면에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좀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거 있죠.”
“예?”
“김 이사님이 보지 말라고 하도 난리길래 궁금해서 찾아봤거든요. 포보이스.”
“아…….”
“맞죠? 거기서 고음 쭉쭉 올라가던 분. 제가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나를 보고서 반가워했다. 대스타가 나를 보고서. 이거 뭔가 뒤바뀐 거 같은데.
그런 뒤 나는, 얼마 전 이 회사에 보컬 트레이너로 들어왔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었다.
“요즘은 보컬 트레이너하시는구나. 나중에 저도 잘 부탁해요.”
그런 말을 끝으로 유아연은 어서 연습실을 비워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 옆에 서 있던 애들은 ‘우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특히 김다은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었지.
어쨌든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 매니저는 그날 저녁 해고되었다.
* * *
“어머.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 뒤로는 호칭이 조금 바뀌었다.
유아연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하긴 따지고 보면 선배가 맞긴 하지.
“오늘은 한가하신가 봐요?”
자칫하면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몸을 푹 기대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마 만에 편하게 쉬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걸그룹 가르치신다고 하시지 않았나?”
“오늘은 뮤비 찍으러 갔어요.”
“아아…….”
그래도 일은 일이라고 애들은 뮤직비디오 찍으러 떠났다. 가기 전까지도 분위기가 그렇게나 안 좋았다지.
리더를 맡고 있는 선하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는 애들을 새벽에 깨워서 얘기 좀 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쌓인 거 있으면 대화로 풀고, 지금 이 상황에서 넷이 가는 건 바꿀 수 없으니, 자칫하다가 데뷔가 엎어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보자고.
그래도 연화는 할 말 없다며 쌩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원래 다은이하고 방을 같이 쓰고 있었지만 그날부턴 바뀌었다지. 나한테 자꾸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고 조르는 승연이라는 애로.
이것 참…….
“가창력을 발전시키고 싶으면 박영민 선생님을 찾아가라. 누가 이런 말을 하던데요?”
“누가요?”
“있어요. 나한테 그런 말 해준 사람이.”
유아연은 깔끔한 화이트 셔츠와 데님 팬츠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패션이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으니 어쩐지 세련되게 느껴졌다. 핏이 좋은 거겠지. 몸 구석구석에서 연예인이라는, 스타라는 아우라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도 봐주세요. 시간 되실 때.”
“그럼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바쁘시면서…….”
그러면서 그녀는 싱긋 웃었다.
“걸그룹 애들 데뷔하고 나면 시간 많이 남으시죠?”
“그럴 거예요. 아마.”
“저도 일본에서 돌아오면 그즈음 될 거예요. 그때 부탁 좀 드릴게요.”
그때 얼핏 그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내 허락 맡고 일해야 돼.
뚱뚱한 그 녀석이 했던 말.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다. 내가 이겼잖아. 차트에 오르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그래요. 시간 맞춰 보죠.”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런 대가수의 트레이닝을 맡게 된다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미숙한 연습생을 하나의 가수로 키우는 일이었지만, 이건 또 얘기가 다르다. 이런 탑 아티스트의 트레이너를 맡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까.
* * *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더니 온갖 소리들이 들려왔다. 예민해진 내 귀가 듣고 있는 소리들은…… 돈 깨지는 소리.
“환장하겠어. 업체에서 추가비 발생했다고 공문 내려왔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나에게 이런 푸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본부장이었다.
‘영민아. 너 오랜만이다.’ 이런 말을 인사처럼 하면서 내 책상에 걸터앉더니 이렇게 앓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뮤직비디오 컨셉을 일부분 수정했더니 곧바로 추가비 내역서가 날라왔다면서.
“요즘 내가 잠을 잘 못 자. 이대로 가면 투자 받은 거 아슬아슬하게 지킬 것 같긴 한데, 자꾸 변수가 발생해서.”
처음으로 아이돌 그룹을 런칭해 보는 몬스터 뮤직은 여러모로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뮤직비디오에 돈이 나가는 건 물론이고, 의상 제작비도 들어가고 재킷촬영비도 들어가고…… 물론 이런 작업은 다른 아티스트들을 내보내면서 노하우가 쌓였다지만 4인조 그룹은 처음이었으므로 예상치 못한 돈이 자꾸 나간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얼마 전부터 스타일리스트 따라다니고 있었지, 활동 반경도 넓어졌지, 본부장이 앓는 소리를 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진짜로 돈이 새나가는 건 이제부터다. 홍보비가 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그래도 그나마 웬만한 건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을 하기에 이만큼 선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곡은 김인혁이 쓰고, 스튜디오도 회사 안에 있고, 심지어는 안무까지 따로 안무가를 고용하지 않고 팀의 리더인 윤선하가 짜놓은 걸 그대로 쓰기로 했다. 뭐 트레이너까지 나 같은 전속 직원에게 모든 걸 의지할 정도니.
“그런데요. 본부장님. 제가 좀 걱정이 되는 게, 다은이하고 연화 사이가…….”
그랬더니 본부장은 얼굴을 갑자기 굳히며 “쉿!” 하면서 검지 손가락을 입에 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춘 뒤
“말조심해. 그거 우리만 알고 있는 거야.”
하고 고개를 내 귓가에 가져다 대며 말하는 것이었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걔네가 그렇다고 무대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고 그러겠냐.”
“에이, 아이돌은 그렇지 않다니까요. 팬들이 얼마나 귀신같이 알아채는데.”
“그러는 너는 아이돌을 얼마나 안다고.”
소곤소곤 떠드는 것이 불편해서 우리는 아예 장소를 옮겼다. 달달한 커피 믹스가 담겨 있는 종이컵을 들고서.
“안 그래도 위에서는 한참 그 얘기 중이었다. 너는 애들하고 붙어사느라 몰랐겠지만 우리도 신경 많이 쓰고 있다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돈 나가는 소리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행여나 망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데뷔시키고도 한동안은 외부 노출 자제할 거야. 브이앱 같은 거 우리는 일절 없어. 하더라도 한 명씩 단독으로 내보내든가 해야지.”
몬스터 뮤직에서 내린 결정이라면 이런 것이었다. 최대한 애들의 감정선이 읽히지 않도록 노출을 자제한다는 것.
“아…… 그러면 방송에는 걔만 내보내세요. 승연이 있잖아요.”
“승연이?”
“애들 예능 같은 것에도 내보낼 거죠? 그러면 승연이 내보내 보세요. 걔 잘할 것 같아요.”
“그래?”
“준비를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말을 했더니 “그래 볼까.” 하면서 본부장은 맨들맨들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이건 회사의 미래가 걸려 있는 일이었다.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최소한 2, 3년 정도는 탑 티어에서 놀아야 한다던데…… 그러지 못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적자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회사는 어쩔지…… 플라지아 같은 정상급 걸그룹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면.
제법 큰 돈을 굴리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쪽도 연습생들 모아서 데뷔시킬 때에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걔네들도 안에서는 싸우고 그러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박영민 팀장님 맞으시죠?
“예. 그런데요?”
팀장은 아니지만 이름은 맞으니 뭐.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아이즈 컴퍼니의 김우진이라고 합니다.
김우진? 그때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봤던 사람?
“아, 예. 기억합니다.”
-요즘 어떠세요? 바쁘시죠?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전화를 한 거지? 그것도 내가 플라지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딱 맞춰서…… 혹시 나한테 있는 잠재력이라는 것이 이런 예지 능력?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그때 명함을 안 주셔서 힘들게 번호 알아냈어요. 누군지 말씀은 못 드리지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낸 겁니다.
나를 팀장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까 아는 사람이 누군지 얼핏 짐작이 갔다.
-언제 시간 좀 내주시죠. 명함 주셔야죠. 그거 받으러 찾아뵐게요.
“회사로요?”
-아뇨. 회사라뇨. 시간 먼저 맞추면 적당한 장소를 잡아볼게요.
이 사람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길래.
“누구야?”
통화를 마치니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본부장이 물어봤다.
“아니, 제가 누구랑 통화하는지 보고 드려야 되는 거예요?”
“일 얘기 같아서 그러지.”
“일 얘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 *
플라지아의 컴백 일정이 발표됐다. 예상하고 있었듯이 우리 쪽과 겹쳤다.
음원 및 뮤직비디오 공개는 우리와 하루 차이가 났고, 컴백 쇼케이스는 비츠걸스의 데뷔 쇼케이스 다음다음 날, 그리고 컴백 방송은 같은 날 같은 방송이었다.
우리 애들이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플라지아 또한 컴백 무대를 가지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화제성이나 규모 면에서 보면 비교가 되질 않았다.
플라지아는 이미 뮤직비디오 티저를 공개했고, 첫날에만 200만 조회 수를 기록하는 등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스캔들 여파 같은 건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여전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서 소녀 같은 풋풋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일곱 명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 또한 경쟁 상대라는 걸 잊어버리고 괜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더군.
아…… 우리 애들이 이런 애들과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건데.
이런 와중에 나는 김우진 실장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즈 컴퍼니 소속의 작곡가. 플라지아의 북클릿에도 이름이 여러 번 올라갈 정도로 플라지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나를 보자고 하다니…… 머릿속이 내내 복잡했다.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를 만나려고 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단순히 동종 업계의 관계자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는 직감 같은 것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그래서 가는 내내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는데.
1. 심심해서 나를 만나러 온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자기 회사의 핵심 아티스트가 곧 컴백을 앞두고 있는데 보나 마나 정신없이 바쁠 거 아냐. 그렇게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낸다는 건 이 만남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 텐데.
2. 나를 스카웃하려고?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누굴 빼가려고 했다고.
가능성이 없진 않은 얘기다. 어쩌다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보컬 트레이너가 부족해서 나를 데려가려고 한다면…… 게다가 플라지아는 북미권 진출을 앞두고 있다니까 그쪽 활동을 하는 동안 후속 걸그룹을 준비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추측 가능한 대목이었다. 그래서 잘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그런데 굳이 보컬 트레이너 한 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그렇게나 바쁜 김우진 실장이 움직일 이유가 있나? 그것도 학원에서 보컬 강사하다가 연예 기획사 트레이너는 석 달밖에 하지 않은 부족한 경력의 소유자를.
그래서 이것도 아닌 듯하고.
3. 견제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스캔들이 있었으니 회사 내부적으로는 플라지아의 컴백에 여러 위험 요소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기에 같은 시기에 데뷔하는 걸그룹을 견제하기 위해서.
내부 관계자들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렇다고 속에 구렁이 한 마리씩을 넣고 다니는 매니저들을 만나볼 순 없을 것이고, 비츠걸스를 기획했던 실무자들을 대놓고 만날 수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내가 적당한 인물이겠군.
회사 사정과 애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회사에 속한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아 소속감이 강하지 않은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래. 아마도 이런 이유인 것 같다. 이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나보고는 싶었다. 무슨 얘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서.
* * *
“박 팀장님. 반갑습니다. 얼굴 좋아지셨네요.”
“좋아지긴요. 요즘 바빠서 죽을 맛이에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회색빛의 깔끔한 슈트를 입고서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이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악수를 청해오며 이런 인사말을 건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전에 너무 미안해서, 꼭 한 번 직접 만나 뵙고 사과를 하려고 했어요.”
“아이구, 뭘요.”
나를 만나는 표면적인 이유는, 지난번 스튜디오에서 몬스터 뮤직에 대해 막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는 것.
“소주 한잔하실래요?”
“아뇨. 전 됐습니다.”
“가볍게 한 잔만 하죠.”
“전 술을 못 마셔요.”
“아…… 차 가지고 오셨나.”
“아뇨. 몸이 안 좋아서.”
그는 나에게 술 한 잔 사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괜히 술을 마셨다가 내가 말실수라도 해버리면…… 그건 안 되지.
“요즘 바쁘시죠?”
생각 외로 말수는 적은 사람이었다. 지난번 스튜디오에서 혼자 떠들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의외였다.
어떤 때는 둘 다 아무 말이 없이 뻘쭘하게 밥만 먹기도 하고, 안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 조용해져 버린 식당에 이렇게 있으니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밥을 먹는 동안 나누었던 얘기라곤 별거 없었다. 둘 사이의 공통된 화제라면 우리가 마주쳤던 마스터링 스튜디오라고 할 수 있으니, 거기 실장이 일을 꼼꼼하게 잘한다는 얘기나, 경력은 오래된 사람이지만 요즘 감각에도 뛰어나다는 그런 얘기, 하지만 작업 시간이 길어서 1분 1초가 아까운 우리 같은 사람은 애가 탈 수밖에 없다는, 그런 얘기나 주고받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가끔 연락하고 지내요. 혹시 압니까. 우리가 같이 일을 하게 될지.”
“그래요.”
식당을 나서며 인사처럼 우리는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저는 박영민 팀장님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저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계실까 봐 바쁘신 거 알면서도 연락드렸습니다. 얘기 들어보니 이거저거 다 하신다면서요? 전에 그 곡 괜찮더군요. 스튜디오에서 잠깐 들었던 곡…… 찾아보니까 차트에도 진입했던데.”
“기대 이상이었죠.”
그렇게 우리는 인사를 마친 뒤 각자의 갈 길로 가려고 했는데
“박 팀장님이 그 팀도 맡고 계시다면서요? 이름이 뭐더라…… 비 무슨 걸스였는데.”
“제가 보컬 레슨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고생 많으시네요. 이번에 데뷔하는 것 같던데.”
한 가지 걸리는 건, 아마도 나를 팀장으로 부르는 거 보니까 황유미한테 내 연락처를 받은 것 같았다.
전에도 황유미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황유미한테는 내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애들 사이가 안 좋다고. 그날 새벽에 누구에게라도 상의를 해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것인데.
에이, 설마.
“애들 다루는 게 어렵죠?”
“아뇨. 어려울 것까진 없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학원에서 오래 일을 해왔으니까요. 그 또래 애들은 많이 겪어봤어요.”
“아, 하긴. 그러시겠네요. 거의 입시생들 위주였을 테니…… 그래도 아이돌하겠다는 애들은 좀 별나지 않나요? 자기들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감정싸움이 대단할 텐데요.”
“아뇨. 저희 애들은 팀워크가 장점이라서요. 이번에 꼭 성공하겠다고 지들끼리 똘똘 뭉쳐 있어요.”
“그거 좋네요.”
“플라지아는 애들 사이가 좀 그런가 봐요?”
그러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이번 컴백이 좀 특별합니다. 이번 활동 끝나고 미국 시장에 꼭 진출을 시키려고요.”
“그렇군요.”
“안 좋은 모양새로 해외진출을 하고 싶진 않거든요. 스캔들이 터지고…… 그것 때문에 국내 인기가 주춤해서 도피성으로 외국을 나간다는 소린 듣고 싶지 않아요.”
“아직 건재하던데요.”
“아뇨.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여줄 겁니다. 왜 플라지아가 최고인지…… 그리고 역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미국 시장으로 보낼 겁니다.”
역대 최고. 우리랑은 지향점이 다르군.
“아, 죄송합니다. 별 얘기를 다 하네요. 비츠걸스도 잘될 거예요.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맡고 있는 팀이기도 하고.”
“저희야, 시장에 안착하기만 해도…….”
“어려운 일 있으시면 부담 가지지 마시고 연락하세요. 그래도 저희 회사가 걸그룹 키우는 것엔 노하우가 많아서 분명히 도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꾸벅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길로 향했다.
* * *
뮤직비디오 촬영은 3일 밤낮을 꼬박 새우고서야 끝날 수 있었다. 애들은 저마다 눈가에 시커먼 그늘을 하나씩 달고서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 데뷔까지는 디데이가 5일. 음원과 뮤비가 같은 날 발표되고 그다음 날 데뷔 쇼케이스를 가진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주에 음악 방송 출연.
사무실 중앙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화이트 보드에, 비츠걸스의 이름이 커다랗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스케줄도 제법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라디오도 몇 개 출연하고, 음악 방송도 꾸준히 나가고, 인터뷰도 잡혀 있는 등등.
이제 이 팀과 관련하여 내가 할 일은 점점 마무리되고 있었다.
쇼케이스 때 할 곡을 봐주는 것까지 해주면 내가 할 일은 끝난다. 이제 애들은 매니지먼트팀에서 붙여준 매니저 손에 끌려다니며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달에 새로운 싱글 발매. 그렇게 텀을 주고 연이어 싱글을 발매한 뒤 이것을 하나로 묶어 첫 번째 미니 앨범으로 한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비츠걸스를 반드시 시장에 안착시켜서 팬덤을 형성하겠다는 것. 이것이 목표였다.
내가 할 일은 그렇게 싱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애들 보컬 레슨을 해준다는 것이 전부였고.
-박 팀장님. 고생하셨어요. 드디어 애들 데뷔하네요.
“그러게.”
-뿌듯하시죠?
“시원섭섭해. 기분이 꼭 딸들 시집보내는 것 같네.”
애들 연습을 봐주고 나니 늦은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황유미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실 거예요. 우여곡절이 참 많았으니.
하지만 그런 기분과는 달랐다.
내가 기획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팀. 멤버 선발도 김다은의 기량을 올려서 합류시킨 것 외에는 내 손이 전혀 닿지 않았었고.
내가 발굴해낸 인재도 아니었고, 데뷔 후에는 김인혁의 곡을 부르며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럼 내가 원한 게 이런 거였나? 왜 내 손으로 키워냈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 거지?
“유미야. 너 그런데, 전에 누구 만난 적 있어? 아이즈 컴퍼니의 김우진 실장이라고.”
-아, 맞아요. 그 사람이 팀장님 전화번호 물어보더라구요. 할 말이 있다면서.
“별 얘기 안 했지?”
-제가요?
혹시나 유미가 무슨 말실수를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없었다고 한다. 내가 회사에서 뭘 하는지, 유미의 곡에 내가 어떤 관여를 했는지 가볍게 물어본 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그쪽에서 우리 애들을 견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고.
그쪽에서 우리와 관련된 안 좋은 정보를 입수한 뒤, 그걸 루머처럼 퍼뜨려 버리면 우리가 입게 될 피해는 클 테니까.
-에이, 걱정 마세요. 제가 그 정도 눈치 없을까 봐요.
그러면서 나에게 말해주길.
-만약 그 사람이 저한테 그런 정보를 원했다면 그게 더 큰 일이죠. 제가 그 사실을 회사에 말해버리면 어떡하라고. 그럼 그 사람이 더 난처해지겠죠.
“하긴 그렇겠네.”
가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얘가 나보다 더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팀장님. 저 저녁 아직 안 먹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지금 회사 근천데.
“난 집에 거의 다 도착했어.”
-어딘데요? 제가 거기로 갈까요?
“아냐. 난 아까 먹었어. 그것보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제가 팀장님을요?
“아까 본부장이 나 불러서 말하더군. 너 두 번째 싱글 준비해야 돼.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전담하기로 했어.”
그렇게 정해졌다. 이번에도 내가 곡을 선정해서 레코딩을 하게 되었다. 음원이 출시될 때까지 모든 것을 내가 관리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프로듀싱.
본부장은 나에게 그런 오더를 내리면서 ‘우리 회사는 한 사람이 이거 저거 다 해야 돼. 작은 회사라서 어쩔 수 없다.’ 하고 말을 했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반가웠다.
-진짜예요? 또 하는 거예요?
“처음 만난 그 날에는 차트에서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어. 다음 활동 준비해야지.”
그래도 차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50위권으로 진입해서 한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서서히 하락해서 현재는 80위권.
그리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황무지 같은 상황에서 그런 성적을 낸 공로를 인정받아, 나는 또다시 제작에 손을 대게 된 것이었다.
“스케줄 없는 날, 나한테 찾아와. 이번에는 기획부터 제대로 할 거야. 회사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거든.”
그런 말을 해주었더니 황유미는 한참 동안이나 푼수처럼 웃어댔다.
* * *
뮤직비디오는 잘 뽑혔다. 비교적 저예산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싸구려 느낌은 별로 없었다.
세 가지 컨셉의 씬이 계속 교차하는 식이었고, 네 명의 멤버들은 각각 캐주얼한 의상과 베이비돌 원피스 등 배경에 맞춘 컨셉으로 의상을 맞춰 입고 발랄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나로서는 맨날 연습실에도 보던 애들이 화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달라 보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압권은, 다은이와 연화가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장면.
저것만 보면 둘도 없는 친구끼리 함께 노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지.
-어차피 실체는 상관없어. 만들어낸 이미지가 중요한 거야. 실체는 서로 칼 들고 싸울 정도로 원수 사이라고 해도, 다정하고 사이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그것만 대중들에게 공개하면 그만이야. 우리는 어차피 이미지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이잖아.
본부장은 지난번에 이런 얘기를 하곤 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았다.
어쨌든 일정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데뷔 쇼케이스를 마치고, 인터뷰와 함께 홍보 기사가 쏟아지고 있던 그 무렵, 애들은 마침내 처음으로 방송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비츠걸스의 데뷔 무대 녹화가 있었던 것이다.
* * *
김다은은 마땅한 장소를 찾아봤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신인 주제에 방송국을 헤집고 다닐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기실 구석에 처박혀서 목소리를 조금 높일 뿐이었다.
-예. 박영민입니다.
“쌤. 저예요.”
-어……? 다은이야?
“네.”
-난 또…… 이 시간에 매니저가 나한테 전화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네.
김다은은 매니저에게 핸드폰을 빌려 박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컬 트레이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니 문제 삼지는 않았다.
“회사세요?”
-아직. 이제 나가려구.
오전 11시. 박영민은 아직 출근 전이다.
“저 방금 드라이 리허설 끝냈어요.”
-그래? 힘들지?
“피곤해요.”
-나도 음악 방송은 많이 해봐서 알어. 죽을 맛이었지. 너네,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지?
“네.”
잠을 제대로 못 잔 정도가 아니라 한숨도 자지를 못했다.
리허설 시작은 아침 7시.
그때 일어나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7시부터 리허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새벽 3시부터 메이크업을 받았다.
세상에…… 새벽에도 이렇게 샵이 돌아간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컨디션 조절을 하라면서 전날 애들을 일찍 재웠지만 첫 방송을 앞두고 쉽게 잠에 빠질 수는 없었다.
계속 설치다가 네 명 모두 잠잘 시간을 놓쳐 버렸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 매니저는 출발해야 된다면서 애들을 불러냈다.
-계속 대기만 하고 있지?
“맞아요. 죽겠어요.”
신인이라는 이유로 단독 대기실은 쓸 수 없었고, 다른 팀과 대기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함께 대기실을 쓰는 팀 또한 신인이었고, 그 때문에 이들 두 팀은 리허설을 조금 전에 마쳤다.
데뷔 연차 순서대로 리허설 무대에 올랐기 때문에 7시부터 10시까지 꼼짝없이 대기실에 갇혀 있다가 겨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떨리지?
“아뇨. 떨리진 않아요. 저 방송 많이 해봤잖아요.”
-아, 하긴.
떨리진 않았다지만 불안한 마음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소리라도 들어보고자 박영민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이제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는 카메라를 켜고 하는 리허설을 한 번 더 하고, 사전 녹화와 본녹화까지 마치면 한밤중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고생하면 방송에 3분 정도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다은이 박영민과 통화를 마쳤을 때, 반가운 인물이 대기실을 찾아왔다.
김인혁 이사가 두 손 가득히 무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애들 먹을 것 좀 사 왔어. 오 대리 꺼도 같이.”
“아이구, 고맙습니다.”
“여분으로 몇 개 더 사 왔으니까 스탭들이랑 나눠 먹어.”
김인혁 손에 들린 것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도시락과 음료수와 과자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봉지.
그리고 김인혁은 모처럼 깔끔하게 슈트를 입고 있는 차림이었다.
“너희들 말이야. 잔소리 같지만 인사 잘하고 다녀야 된다. 너네는 오늘 데뷔하는 거야. 이 방송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네보다 선배라는 얘기야. 누가 보인다 싶으면 누군지 파악하기 전에 인사부터 해. 알았지?”
김인혁이 그렇게 잔소리를 하자 네 명의 아이들은 입을 모아 “예”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오 대리는 애들 밥 먹이고 나서 나하고 시간 좀 맞추자고. 여기 피디한테 애들 좀 따로 인사시키려고.”
“알겠습니다.”
김인혁 프로듀서가 이처럼 음방 녹화 현장을 찾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김인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신이 제작한 첫 아이돌 그룹.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 최고의 프로듀서로 발돋음하기 위한 첫 관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지금도 탑클래스이지만, 비교 대상이 없는 최고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김인혁의 무기가 되어주어야 하는 비츠걸스는 방송 데뷔를 위해 대기와 기다림으로 기나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네 명 모두 초조한 눈으로. 지독하게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꾹 참아내면서.
* * *
그래도 인사를 잘하라는 말은 네 명 모두 가슴에 새겨두고 있었다.
심지어는 방송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외부인에게도, 마주치는 즉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녕하세요. 비츠걸스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함께 무대에 오르는 동료 가수에게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김인혁이 말했듯이 여기서 비츠걸스보다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아티스트는 단 한 명도 없는 셈이니까.
“어? 인아야.”
그런 와중에 비츠걸스의 리더 윤선하는 아는 사람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웬일이야. 너 데뷔하는 거야? 오늘?”
예전에 언급을 했듯이 윤선하는 댄스팀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그때 함께 팀을 했던 동료와 만난 것이었다.
“나 떨려 죽겠어.”
“신기하다. 너 데뷔한다는 거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인아’라는 사람도 걸그룹에 속해 있었다. 활동명은 엘리. 팀에서 메인 댄서를 담당하고 있었다. 윤선하와 마찬가지로.
“우리 대기실 가자. 내가 인사시켜 줄게.”
아직 방송국 복도를 걷는 것이 어색한 윤선하는 유난히 꽉 붙잡고 있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어느 대기실 앞에 도착했다. 나머지 세 명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리더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이곳에서 가장 큰 대기실.
문 앞에는 플라지아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비츠걸스가 배정받은 대기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넓은 공간, 그리고 휴식을 위해 길쭉한 소파가 놓여 있었고, 어쩐지 자연스럽고 한적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여기 멤버들은 편안하게 대기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츠걸스의 대기실은 이것의 반도 안 된다. 그 마저 다른 팀과 나누어 쓰고 있었다.
인아가 인사를 하라고 눈짓을 주자, 네 명의 멤버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안녕하세요. 비츠걸스입니다!”를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야?”
“오늘 데뷔하는 애들.”
“왜 데리고 왔는데?”
“인사나 하라고.”
그러자 주스팩을 빨대로 쪽쪽 빨고 있던 멤버 하나가 “어디 애들인데” 하고 물었다.
“선하야. 너네 회사 어디지?”
“몬스터 뮤직.”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어디서 ‘풋’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네 오늘 데뷔하는 거야?”
“예.”
“메인 보컬이 누구야? 너네 중에?”
멤버들의 시선은 한연화에게 모아졌고. 연화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너야?”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쟤 예쁘다.
“너 노래해 봐.”
“네?”
“노래해 보라고. 얼마나 잘하나 보게.”
연화는 잠시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을 했다. 인사를 잘하라고 했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하지만 데뷔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이 분야에서 탑에 있는 인물들이니까.
한 걸음 앞으로 나온 한연화는 데뷔곡을 불렀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은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10년 동안 계속해온 일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받고, 그런 일들.
“별론데?”
“…….”
“너네 중에 누가 댄스 담당이야?”
“전데요.”
“아, 너야? 그럼 너는 쟤 옆에서 춤 춰봐. 얼마나 하나 보게.”
야, 애들 좀 그만 괴롭혀. 왜 그래. 재밌잖아. 하여간 성격하고는. 이런 얘기들이 이들 사이에서 오갔다.
팀의 리더 윤선하는 스물두 살. 플라지아의 멤버들과 비슷한 나이였다.
하지만 팀의 데뷔 시기로 선후배를 가르는 이 바닥의 규율에서, 윤선하는 까마득한 후배일 수밖에 없었다.
“왜 안 해? 고작 열댓 명 앞에서도 못 하는 거야? 얘네들 큰일 났네.”
이번에는 소파에 발을 쭉 뻗고 비스듬이 누워 있는 멤버가 그렇게 말했다. 쯧쯧 혀를 차면서.
그리고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대기실을 메우기 시작했다.
“언니. 그냥 다 같이해요.”
선하가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다은이가 앞으로 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하는 거 넷이서 다 같이하자고.
그렇게 네 명은 데뷔곡 Open your eyes를 반주 없이 안무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선배들의 대기실에서. 그리고 처음 보는 스태프들 앞에서.
“어휴, 그만해. 노래 따분하다.”
“왜? 난 괜찮은데?”
“그런데 너 김다은이야? 너 예전에 무슨 프로그램 나갔었지? 봤던 거 같은데.”
이들은 아까 전에 리허설을 마치고 나왔기 때문에 가슴팍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하얀 A4 용지에 커다랗게 인쇄된 자신의 이름을 모두 보기 좋은 곳에 매달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다은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고.
“너 노래 잘하는 애 아니야? 그런데 네가 메인 보컬 아니라고?”
“예. 저는 팀에 늦게 합류해서.”
“아…… 그러니까 네가 먼저 팀에 뽑혔으면 쟤가 아니라 네가 메보라는 거지?”
쟤도 노래 시켜봐. 누가 더 잘하나 보자. 이런 말을 하면서 뒤에서 거드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지? 너도 노래해 봐. 우리가 평가해 줄게. 둘 중에 누가 더 잘하는지.”
김다은은 하는 수 없이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치 마이크를 잡고 있다는 듯이 주먹을 꾹 쥐고 그것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노래를 하려는 순간.
“야, 플라지아. 너네 매니저 어딨어?”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비집고 누군가 들어왔다.
청바지에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어떤 아저씨가.
“몰라요. 뭐 사러 나간 것 같은데요?”
“전화해 봐. 빨리 오라고 해.”
“급한 일이에요? 멀리 갔을 건데.”
“10분 내로 내 방으로 튀어오라고 해. 그런데…… 이건 누구야?”
그는 비츠걸스의 네 명을 힐끔 쳐다보고서 말했다.
“오늘 데뷔하는 애들이래요.”
그리고 비츠걸스 네 명은 그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만 벌써 수십 번은 반복한 그 멘트와 함께.
“뭐야? 이건?”
피디는 고작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너희가 오늘 데뷔하는 애들이구나.’ 하는 다정한 말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어, 그래.’라는 평범한 대답도 들어볼 수 없었다.
뭐야 이건? 이 음악 방송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피디에게 있어서 이런 신인 그룹 따위는 자기 발밑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조롱을 당한 뒤에야 간신히 플라지아의 대기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 놀러와. 노래 연습 좀 더하고. 야 너네 코디 누구냐. 너무 촌스러워. 인사를 하고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그들의 떠드는 소리는 유난히 귀를 따갑게 했다.
뭐라고 푸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점심이 지나 분주하고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복도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비츠걸스입니다.
대기실로 돌아올 때까지 수없이 인사를 했지만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 그래. 알았어. 귀찮게 그만 인사해. 하는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멘탈을 챙기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 * *
“쟤네 팀, 원래 저러는 거야?”
“완전 무시당한 기분이에요. 아 진짜…….”
“두고 봐. 성공해서 꼭 갚아줄 거야.”
“어떻게요?”
“방송 나가서 오늘 있었던 일 썰 풀어야지. 데뷔했던 날 어떤 선배 그룹을 만났는데, 누군지 밝힐 수는 없고 어쨌든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럼 눈치 빠른 사람들이 우리 데뷔 방송 찾아내서 누군지 추측하겠지.”
한바탕 당하고 왔지만 대기실에서 소곤소곤 떠들며 그나마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디와는 잠시 후 또 마주치게 되었다. 청바지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고, 흰머리가 드문드문 나 있는 그 피디.
김인혁이 매니저와 함께 애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아! 오셨어요? 오늘 애들 데뷔시킨다면서요?”
“다 피디님 덕분이죠.”
비츠걸스 네 명은 저 사람이 아까 그 사람이 맞는지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이건 뭐야? 하고 눈을 매섭게 뜨며 벌레 보듯 바라봤던 사람이, 이제는 아! 오셨어요? 화사한 얼굴로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신경 좀 써주세요. 우리 회사에서 공들여 키운 애들입니다.”
“아이구, 당연히 그러겠죠. 몬스터 출신이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하하.”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이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고작 3분 동안의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 때로는 수천만 원 상당의 로비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 피디는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서 아이돌 그룹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분야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수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이 경우에는 음악 방송 측에서 먼저 모시고자 애를 쓴다.
컴백 방송을 우리 방송에서 해주셨으면 하고…… 때로는 굽신거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현재 최고의 여성 솔로 가수인 유아연 같은 아티스트.
그리고 그녀를 키워낸 김인혁 프로듀서.
이런 인물이라면 제아무리 음방 피디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귀한 애들을 우리 쪽에 먼저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워낙 피디님이 잘하시니까요.”
“그런데 아연이는 일본 갔다구요?”
오직 인기가 위치를 만들고 서열을 만드는 세상. 이런 전쟁터에 비츠걸스의 네 명이 끼어들게 되었다.
애들의 데뷔 방송은 다 같이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애들은 ‘우와. 우리가 TV에 나오고 있어!’ 하고 감탄 어린 얼굴을 하고 걸 옆에서 구경하고, 나는 격려도 해주고.
다른 직원들도 다 같이 모여서.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하지만 애들은 다른 음악 방송 녹화가 있느라 새벽부터 현장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고, 직원들도 저마다 모두 바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땅콩이랑 맥주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 혼자 방송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본방사수. 내가 손을 대준 애들이 마침내 무대에 오른다.
하지만 바람이 한차례 스쳐 지나간 것처럼 짧은 시간.
애들의 데뷔 무대는 그렇게 지나갔다.
HOT DEBUT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화면을 메우고, 네 명의 프로필 사진이 요란한 그래픽과 함께 차례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네 명이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이윽고 어두운 무대가 조명을 밝히며 비츠걸스 네 명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3분 정도 이어진, 데뷔곡 Open your eyes의 무대.
다이나믹한 카메라워크와 이따금 클로즈업되는 네 명의 뽀샤시한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3분이 3초처럼 짧게 지나가 버렸다.
어? 벌써 끝났나?
데뷔 무대를 지켜본 내 감상은 그 정도.
라이브를 한 것이었지만 평소만큼 실수 없이 잘 해냈다. 다시 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순 없었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땅콩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맥주를 입안 가득 넣어서 목으로 넘겼다.
스쳐 지나간 장면들을 애써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원샷을 가장 많이 받은 건 연화였다.
맨날 눈앞에서 봤었지만 무대 화장을 하고 조명을 받은 모습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나도 이렇게 느낄 정도인데 시청자들은…….
분명히 반응이 있을 거야. 비주얼 쇼크. 쟤 누구야? 이런 반응이.
그런 생각을 하며 SNS와 포털을 뒤지고 있을 무렵, 따가운 환성 소리가 귀를 때렸다.
플라지아의 컴백 무대.
오, 그래. 이것도 봐줘야지.
그런데 이건 편성의 질부터 달랐다.
플라지아가 새로운 멤버를 선발하기 위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쳤다는 내용이 짤막한 영상과 함께 나왔고.
당시 하이라이트 장면이 교차하며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다음 환하게 밝아오는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플라지아의 일곱 멤버들.
객석에서는 고함에 가까울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애들이 노래를 할 때는 이게 없었구나. 관객들의 함성 소리. 어쩐지 뭔가 비어 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플라지아의 컴백 무대가 시작했다. 먼저 히트곡 메들리.
지난 3년 동안 활동을 해오며 대중들의 귀에 지겹도록 박혔던 곡들이 이어졌다.
무대의 연출과 구성에는 흠을 잡을 것이 없었다. 일곱 명의 멤버가 마치 뮤지컬처럼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또 그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객석에서는 떼창을 하느라 난리였다.
그런 뒤 무대는 다시 어두워지고, 컴백곡이 시작되었다.
우리 애들과 같은 시기에 음원을 발표했지만, 발표 당일 차트 1위를 거머쥔 곡답게 관객들도 모두 그 곡을 알고 있었다.
팬덤의 파워를 자랑하듯 요란한 떼창이 브라운관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우리 애들의 무대와는 달리, 플라지아는 10분 동안 꽉 찬 구성의 무대를 선보이며 자신들의 컴백을 화려하게 알렸다.
얘네들은 엔딩샷까지 한참을 잡아줬다. 만족감이 어려 있는 멤버들의 얼굴을 훑듯이 서서히 지나치면서.
굉장하네.
플라지아의 컴백 무대를 지켜본 내 소감은 이랬다.
“괜찮아. 너네들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거야. 이제 막 시작한 거니까.”
땅콩을 한 주먹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맥주 몇 잔의 취기가 뜨뜻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 * *
비츠걸스는 이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맨날 보던 애들을 이제는 TV에서나 봐야 하니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애들한테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전화 한 통 할 수 없었고.
하지만 이 회사에서 일을 하려면 이런 것에 적응이 되어야겠지. 나는 애들이 데뷔할 때까지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도 황유미의 경우는 달랐다.
얘는 내가 전담해서 다음 싱글을 내기로 했으니 단순히 트레이닝만 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곡을 선정해서 레코딩을 한 뒤 음원으로 내는 일까지를 해주는 것.
제작 쪽에도 어느 정도 손을 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 팀장님. 저 죄송해요. 방송 들어가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그런데 얘도 쉴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곡이 어느 정도 알려졌기에 방송도 몇 개 잡을 수 있었고 라디오에도 꽤나 자주 출연했다.
공중파에 이름 있는 프로그램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자기를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에는 꼬박꼬박 나가는 듯했다. 행사를 계속 뛰는 것 또한 여전했다.
“정 팀장님이 실력 있거든요.”
“아…… 정영수 팀장님이요?”
“무려 2년 만에 팀장 자리를 따낸 사람이에요. 영업력이 장난 아니에요. 위에서 힘써주지 않아도 자기가 척척 스케줄을 물어오거든요.”
다행스럽게도 정영수 팀장은 황유미를 소홀하게 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푸쉬해 주는 것 같았다. 전화 한 통 하기 힘들 정도로 애를 바쁘게 굴리고 있는 걸 보니까.
“그럼 영민 선생님 의견대로 간다면, 황유미는 이번에도 발라드를 내겠다는 말씀이네요?”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제가 느끼기에, 황유미는 발라드에 최적화된 보컬이에요.”
기획팀과 함께하는 사전 회의. 여기서 황유미의 다음 활동 방향이 정해진다.
나는 제작자의 자격으로 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죠. 영민 선생님 의견이 워낙 확실하시니.”
아이돌 그룹에서 실패를 겪은 뒤 행사 돌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인 아티스트를 데리고, 차트 50위권에 안착시킨 뒤 방송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활로를 만들어냈다는 이유로.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된 것에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곡을 밀어붙여서 이루어낸 것이고, 오직 나 한 명만이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곡을 수집해 주세요. 제가 하나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유미한테 어울리는 곡이 어떤 건지 감을 잡고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음원 발매와 동시에 뮤비도 공개되고, 홍보 쪽에도 힘을 써보기로 했다.
지난번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 회사에서도 황유미에게 적게나마 기대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 * *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3주 정도가 지났다. 비츠걸스가 데뷔를 한 이후로.
이제 가시적인 성과가 보여야 하는 시기였음에도
결과는 참담했다.
꾸준히 방송에는 얼굴을 내밀었다. 각종 음방에 모두 출연해서 데뷔곡을 알렸다. 게스트가 여러 명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김인혁과 함께 나가 홍보를 하기도 했다. 분량은 많이 뽑아내지 못했지만.
홍보 기사도 이 정도면 대형 기획사 못지않게 내보낸 거 같고, 은근슬쩍 댓글부대도 투입해서 여론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활동 3주차.
모든 음원 차트에 차트 인 실패.
팬카페 회원 고작 1,280명.
뮤직비디오의 유튜브 조회 수는 만을 겨우 넘겼다.
아직 3주차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너무 심하게 반응이 저조한 편이었다.
몬스터 뮤직보다 더 아랫급이라고 할 수 있는 소형 기획사에서 내보낸 아이돌 그룹도 이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니 이게 말이 되나? 비주얼에서는 탑급이라고 자부하는 멤버가 있고, 몇몇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실력파 멤버가 있는 정예그룹인데.
연화 같은 경우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팬을 끌어모을 거라고 생각했다. 온갖 인터넷 사이트가 연화의 사진으로 도배되고, 남자들은 예쁘다면서 난리를 칠 것 같았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소한 차트에는 오를 거라고 봤었는데. 우리 회사에서 이 정도로 투자한 아티스트 중에 차트에 못 오른 사람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회사 분위기도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Open your eyes. 눈을 뜨라고! 왜 아무도 눈을 안 떠주는 거야.
“김 이사님이 이번에는 완전히 패착을 두셨어요.”
회사에서 찾아낸 문제점은 플라지아의 컴백과 겹쳤다는 것.
김우진 실장도 그러지 않았는가. 역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그런 각오가 가득 실린 채 방송을 휩쓸고 다니니 대중들의 시선은 그쪽으로 넘어가버렸다. 우리 애들에게 주목을 하는 건 정말 극소수였다.
이따금 웹에서의 반응을 보면 연화를 보며 ‘예쁘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좀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이제 막 데뷔를 해서 자기들을 알리려는 팀과, 컴백을 해서 이제까지의 위상을 계속 이어가려는 팀은 활동 반경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둘이 비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분석 내리는 비교가 아니라, 같은 시기에 두 그룹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되니 어느 한쪽의 강렬한 인상을 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 쌓여온 노하우로 대중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이미지를 예쁘게 포장해서 만들어놓은 팀과.
처음이라는 이유로 어설픔이 묻어 있는 미숙한 이미지와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에 반응하는 팬덤의 차이도 비교가 되질 않았다. 비츠걸스 쪽은 팬덤이라는 것이 아예 전무한 상황이니까.
“김 이사님은 책임을 지셔야 할 거예요. 너무 무리했어요.”
김인혁의 잘못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플라지아의 컴백과 우리 애들의 데뷔를 같은 시기로 정했다는 것.
최고를 꺾어버리고 최고가 되겠다는 건 만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지, 서른다섯 살의 회사 이사가 결정한 내용으로는 너무 어린 애 같은 면이 없지 않았다.
회사에서 내린 결론은 시기를 잘못 잡았다는 것이었다.
오직 음악 하나로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던 김인혁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겠지만.
“이제 방송 섭외도 잘 안 잡힙니다.”
“그럼 어떻게 할 계획이죠?”
“후속곡을 내본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되면 이제 행사라고 뺑뺑이 돌려야죠. 얘들한테 들어간 투자금이 한두 푼이 아니에요.”
그래도 아직 실패라고 낙인을 찍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이제 3주차. 후속곡을 가지고 뛰어들면 반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막 데뷔했던 시기에는 주춤했지만 활동을 계속 하면서 뛰어오르는 아이돌 그룹은 한두 팀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우리 애들의 포텐셜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오픈 유어 아이즈는 망했어요. 이제 후속곡 정해서 들어갈 겁니다. 영민 선생님도 애들 빡쎄게 트레이닝시키세요. 두 번째 곡까지 망하면 진짜로 답이 없어요.”
이러다 회사가 삐끗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비츠걸스가 실패를 하고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한 이때
나는 꿈을 꾸게 된다.
꿈속에서는 그 여자가 나타났고, 이번에는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이제 나에게 두 번째 능력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면서.
나의 새로운 능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가 드디어 온 것이라고.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