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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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하르메아
“쟤 왜 저래?”
레이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 입궁을 했으면서도 저를 보러 오지 않길래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물론 하운이 어디를 갔으며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는 매일 밤 레티시아가 알려 주었다. 덕분에 하운이 리엘라 테니어를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구나, 싶었고.
‘가넷 덕분에 확실히 마음을 자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레이안은 어딘지 모르게 풀린 표정으로 혼자 웃고 있는 하운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한 번도 제 동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다. 혼자서 실실 웃다가 잠시 멈췄다, 또다시 실실 웃고. 어쩐지 하운의 옆에 뭔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름대로 귀여워하는 동생이지만 큰 덩치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홀로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소름이 돋았다.
‘저놈, 리엘라 테니어 앞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굴고 있는 거야?’
레이안은 턱을 괴고 한참이나 하운을 살폈다. 그때 레티시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나요?”
“아니, 아직.”
“그럼 그동안 뭐 했어요?”
“하운 구경하고 있었지. 쟤 좀 봐. 하루 종일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도 재미있다니까.”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레티시아는 아프지 않을 만큼 레이안의 팔을 찰싹 내려친 다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레이안이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 가넷 언제 소르디아로 보낼 거야?”
그 질문에 레티시아는 의외라는 듯 레이안을 보았다. 지금까지 레이안은 보석과 관련해서 특별히 신경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꽃 축제가 지나고 좀 조용해지면 하운 편에 소르디아로 보내 파괴시킬 거예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요?”
“정말 무서운 보석인 것 같아서.”
“…그건 동감해요.”
부부는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턱을 괴고 하운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가넷이 없는 마음을 만든 것은 아니라지만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등을 떠밀 줄이야. 평생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하운의 얼굴에 온갖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부부는 한참이나 구경했다. 하지만 계속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둘 다 가져온 것들 확인 좀 해요.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있으니까요. 꽃 축제 전에 전부 끝내고 축제 기간에는 편히 쉬자고요.”
그 말에 하운과 레이안은 테이블 위에 쌓인 문서들을 보았다. 레티시아의 말대로 아직 남아 있는 일들이 많았다.
샤를로테는 조용히 돌아갔지만 국경 지대의 문제는 이게 겨우 회담이 끝났을 뿐, 앞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가넷의 파괴도 그중 하나였고. 게다가 에르첼라의 목걸이는 며칠 찡찡거리다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리엘라 테니어를 다시 한번 만나게 해 줘야 하나…. 그래야 조용해질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저렇게 떼를 써 대는지 모를 일이다. 도대체 그녀가 뭐가 특별하길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던 레티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서들을 바라보았다.
꽃 축제는 카르디아에서 손꼽히는 큰 행사다. 축제 기간 동안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가게 외에는 대부분 문을 닫으며 그것은 왕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왕궁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았다지만 최근에는 다들 축제 기간에 맞춰 휴가를 내기에, 결국 왕궁은 꽃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휴식에 들어간다. 그러니 그 전에 미리 일을 끝내 놓아야 했다.
하운도 정신을 차리고 레티시아가 넘겨주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레티시아와 하운이 진지해졌지만 레이안은 아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보다 슬금슬금 레티시아의 곁으로 가더니 슬쩍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올해 축제도 같이 갈 거지? 작년에도 마지막 날에 재미있었잖아.”
원래 국왕 부부의 일정은 축제가 시작하는 날, 기념 인사를 한 다음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참가자들의 출품작을 한번 돌아보고, 특별상 수상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두 사람은 다른 이들 몰래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축제에 참가했다.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이 좋았는지 레이안이 없는 꼬리를 흔들어 대며 매달리자 레티시아는 그의 앞에 서류 더미를 밀었다.
“이거 다 끝내면 고민해 볼게요.”
“…너무해.”
작년 같으면 두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을 하운이었지만 올해는 달랐다.
“마지막 날에는 뭘 합니까?”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이안이 하운을 바라보았다.
“축제 마지막 날 다들 뭘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요.”
“그야 마지막 날에는 다들 먹고 놀지. 춤도 추고, 남은 물건들도 싸게 팔고 그래. 내 테이블 위의 해바라기 모양 커다란 문진(文鎭) 있잖아? 그거 작년 축제 마지막 날에 레티시아가 사 준 거야. 예쁘지?”
“반값 할인이 아니었다면 그런 못생긴 건 안 샀을 거예요.”
레이안은 필사적으로 레티시아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행사장의 광장 서쪽에 먹거리들 파는 곳이 몰려 있는데 거기서는 술만 사. 음식이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거든. 대신에 3전시장 출구 쪽에 있는 가게들은 좀 한가한 편이니까 거기에서 사는 게 훨씬 나아. 그리고….”
레이안은 신나서 하운에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알려 주었다. 하운은 세상에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펜을 들어 레이안이 말하는 것을 종이에 적었다. 레티시아는 잘들 논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레이안은 열심히 받아 적는 하운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녀석, 아주 즐겁게 놀 생각인가 본데?
“이제 이 일만 처리하면 꽃 축제 기간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쉴….”
“전하! 안에 계십니까!”
“…수 없나 봐.”
레이안이 기지개를 피다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왕궁의 시종이 예법도 잊고 저렇게 경박하게 행동하는지. 어쨌거나 그럴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무슨 일인가?”
어느새 다시 날카로워진 레티시아가 소리치자 밖에서 시종이 대답했다.
“드래곤입니다!”
“뭐?”
드래곤이라는 말에 다시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이라니? 지금 카르디아 내에서 활동기에 들어간 드래곤은 없다. 네이판타는 오래전 호슨 공작이 쓰러트렸고, 플레노트 역시 하운에게 얻어맞고 수면기에 들어갔다. 사르지안은 아르펠트해에 몇백 년은 더 잠들어 있을 것이고.
남은 드래곤이라면 중앙 늪지대에 사는 블루 드래곤 셀비아스와 서남부에 사는 한쪽 날개를 가진 화이트 드래곤 루오스가 전부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모두 수면기에 접어든 상태다.
그사이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안은 어느새 굳은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드래곤이라는 건가!”
“그, 그게… 하르메아입니다!”
“뭐어? 그 드래곤이 여길 왜 와?”
하르메아는 카르디아에 살고 있는 드래곤이 아니었다. 대륙 서쪽의 끝에 있는 메아닌 산맥에 사는 그린 드래곤. 그게 왜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하운!”
“알겠습니다.”
레이안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하운은 곧바로 뛰쳐나갔다. 조금 전까지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진 채,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벨 것 같은 사나움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
“모두 물러서십시오!”
“보석술사들은 전부 전투태세를!”
왕궁의 중앙 정원 분수대 앞은 뒤집어졌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내려온 드래곤 때문에 사람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르메아는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더니 분수 옆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목을 쭉 빼서 찰랑이는 분수대에 입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곧 꿀꺽이는 소리와 함께 분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갑자기 나타나 분수대의 물을 바닥내는 드래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르메아. 대륙 유일의 어린 드래곤.
모든 드래곤이 창세 시대 때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했던 것과 달리 하르메아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메아닌 산맥에 나타난 드래곤이었다. 메아닌 산맥이 워낙 깊고 험한 곳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산맥의 깊숙한 곳에서 신비한 녹색의 빛이 일렁였음에도 들어가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곳의 탐사가 시작된 것은 몇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릴 적 그렇게 신비한 빛을 본 일이 있었지요.”
산맥 속 작은 마을에 사는 노인이 웃으며 말했을 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명의 보석술사가 비행의 힘을 가진 보석을 이용해 산맥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깊은 계곡 한구석에서 녹색의 비늘을 가진 채 쿨쿨 잠들어 있는 작은 드래곤을 보게 되었다.
곧 드래곤은 저를 살피러 온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하늘을 빙빙 도는 보석술사를 향해 마치 인사라도 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그걸 본 보석술사는 곧바로 마을로 돌아간 다음 자신이 속해 있는 원탁회의에 새로운 드래곤을 보고했다.
당연히 대륙 전체가 뒤집어졌다. 지금까지 보고된 적 없는 새로운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충격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체라 생각했던 드래곤이 다른 생물들처럼 유년기가 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충격은 드래곤이 인간을 보고 죽이려 드는 것이 아니라 인사를 했다는 점이었다.
1년 후, 대륙의 사람들은 모두 하르메아라 명명된 새로운 드래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메아닌 산맥에 마치 새처럼 둥지를 짓고 사는, 인간과 교류를 하는 어린 드래곤의 존재를.
하지만 하르메아 역시 본질은 드래곤이었다. 다른 드래곤과 달리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적대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 배가 고프면 인간을 보고 침을 흘렸으며, 보석술사들의 보석을 탐냈다.
그렇기에 보석술사들은 하르메아를 인간의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대신 메아닌 산맥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인간들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하르메아는 계속해서 메아닌 산맥에 살면서 처음 발견되었던 모습 그대로였고, 여전히 인간을 적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지냈다.
그런 하르메아가 뜬금없이 카르디아의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달려온 보석술사들은 “하르메아가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군요?”, “그보다 한 번에 마시는 물의 양을 알아봐야 하는데 누가 분수에 표시 좀 해 놔요!”라며 난리였다.
배가 터지도록 물을 마신 하르메아는 뒷발로 귀를 벅벅 긁으며 길게 하품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어쩐지 하르메아의 뒤에 자신의 집에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보이는 것 같아 눈을 비볐다.
그때 마침 하운이 도착했다.
“대공님!”
“저기 하르메아가!”
“알고 있어. 다들 물러나도록.”
하운은 제 보석들을 쥔 채, 하르메아에게 다가갔다. 아직까지 인간을 습격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주의해야 한다. 어떤 공격도 막아 낼 수 있도록 준비하며 하운은 하르메아에게 말을 걸었다.
“하르메아, 카르디아에는 무슨 일이지?”
그러자 하르메아가 하운을 향해 목을 쭉 뻗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이게 뭔가, 하는 동작으로 하운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하르메아의 눈이 가늘어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섬뜩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하르메아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하운의 뒤에서 용기 있는 한 보석술사가 외쳤다.
“꼬, 꽃 축제라도 구경 온 겁니까!”
그 말에 하르메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울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하르메아는 호슨 공작에게 복수를 하러 왔어.”
112յη
“조심해요! 뒤에 마차 지나갑니다!”
“이쪽에 물 좀 뿌려 줘요!”
행사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리엘라는 전쟁터도 이렇게 정신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개장 직전이 가장 바쁜 것은 다른 축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꽃 축제는 더더욱 바빴다. 살아 있는 식물을 전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분째로 전시하는 쪽은 그나마 여유가 있었지만, 꽃으로 조형물을 만들어야 하는 쪽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그쪽을 좀 더 올려! 그렇지!”
“여기 좀 붙잡아 줘!”
조형물의 뼈대가 되는 철골 구조물에 정원 관리부의 사람들이 매달렸다. 어느 정도 위치를 잡자 행사 지원을 위해 출장 나온 보석술사가 보석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붙잡고 있던 철골 구조물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이쪽에 끼우면 됩니까?”
“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이 보석술사의 손짓에 가볍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리엘라는 그 보석술사를 신경 쓰며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저택에 왔던 보석술사라면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클로에는 옆에서 그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클로에는 세간에 도는 소문들을 떠올리다 얼굴을 찌푸렸다. 리엘라가 돈으로 대회의 상을 사려 한다는 그 소문들을.
‘보나 마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트렸겠지.’
하루아침에 대륙 최고의 부자가 되어 버린 리엘라다. 게다가 그 소란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보석의 방을 열 때마다 다시 들썩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보석뿐만 아니라 금괴까지 쏟아졌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쏠렸다.
‘아무도 질투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네.’
클로에도 몇 번 리엘라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생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속에 품었던 부러움이 억울함으로, 그리고 분노로 자라는 사람들이다. 네게 주어진 행운이 내 것이었어야 한다고 믿으며, 그렇기에 너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자신들의 망상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헛소문을 퍼트렸을 것이다.
정원 관리부가 작업할 철골 구조물이 완성되자 모두가 다시 바삐 움직였다. 축제 시작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그사이에 모든 작업을 끝마쳐야 했다. 왕궁에서 기른 화분을 실은 마차가 안으로 들어오자 직원들은 재빨리 그것을 날랐다. 리엘라는 작업용 장갑을 낀 다음 제가 맡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선보일 정원 관리부의 조형물은 드래곤들이었다. 드래곤들은 각자 고유의 색이 있으니 표현하기 좋은 주제였다. 그중에서도 큰 드래곤들 사이에 있는 작은 드래곤이 리엘라가 맡은 부분이었다.
“하르메아라… 그린 드래곤이니 녹색 소재들로 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역시 꽃을 쓰고 싶다. 어떻게 하면 색이 있는 꽃을 쓰면서 녹색을 살릴 수 있을까.
“돌아가면 하르메아에 대한 것 좀 알아봐야겠다.”
저택에 가면 분명 하르메아가 그려진 책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기본적인 부분만 채워 넣은 다음에 내일 그림을 참고해서 좀 더 세밀하게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잡담을 나눌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모두가 달라붙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허리를 두드리는 사람들이 나왔다. 클로에가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다들 조금 쉬었다 해요. 이러다가 축제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들 쓰러지겠네요!”
그녀의 말에 다들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앞으로 삼십 분 동안 휴식!”
그 말에 직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갑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어휴 정말. 도대체 누가 드래곤을 하자고 한 거야?”
“그러게. 색이 다양한 건 좋은데 너무 다양하잖아? 게다가 한두 마리도 아니고.”
“내가 정했다, 이놈들아.”
“모, 모리스 경!”
어느새 온 모리스 경이 툴툴거리는 직원들의 귀를 뒤에서 잡아당겼고, 클로에와 리엘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함께 전시장 밖으로 향했다. 클로에는 리엘라의 앞에서 걸으며 이곳저곳을 설명했다.
“먼저 들어와서 작업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 주는 곳이 따로 있어요. 음식 판매를 하는 사람들도 먼저 들어와 팔기도 하구요. 마침 저기 보이네요. 저기 보이는 가게 중에 왼쪽에서 세 번째 푸른 천막이 쳐진 가게가 가장 맛있는 맥주를 팔아요. 잘 기억해 둬요.”
그녀의 행동이 처음 이곳에 들어오는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차린 리엘라는 미안한 마음으로 클로에의 뒤를 따랐다.
“원예 용품을 판매하는 쪽도 슬슬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 좀 보고 갈래요? 행사 때보다 사람이 적어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을 거예요. 정원 관리부라는 것을 알면 값을 깎아 주기도 할 거예요.”
“좋아요!”
네아가 옆에 있었다면 “그냥 그 가게를 사 버리셔도 되는데요!”라고 했을 거라 생각하며 리엘라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클로에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여어, 클로에! 오랜만이야!”
“멜라니아?”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멜라니아 로헴이었다. 클로에는 곧바로 리엘라를 가리듯 앞에 섰다. 하필 멜라니아를 지금 만날 줄이야!
이번 일에 가장 앞장서서 항의를 했다던 멜라니아였다. 경매장에서 만난 적이 있으니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다. 리엘라는 재빨리 밀짚모자를 더욱 눌러쓰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나가라, 빨리 지나가!
“무,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긴. 너 지나가는 거 보이기에 인사나 할까, 하고 온 거지. 이제 올해 한 번만 더 수상하면 나도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거 알고 있지? 기대하라고. 대회장의 입구에 내 이름을 새긴 동판이 걸릴 테니까 말이야.”
“그, 그랬지요. 이번 출품작 이름은 뭔가요? 이번에도 남다른 걸 냈을 것 같은데.”
클로에는 필사적으로 멜라니아의 관심을 돌리면서 리엘라에게 적당히 도망가라 눈짓했다.
“이번 출품작 제목은 ‘시체가 가득한 성’이야! 작년의 ‘피로 물든 침실’과 연결되는 작품이지!”
“그렇… 군요.”
작년 멜라니아가 출품한 작품은 리엘라도 잘 알고 있었다. 핏빛의 붉은 장미를 말 그대로 쏟아부은 것 같은 작품이었다. 오죽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원래의 작품 제목보다 피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렸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시체가 가득한 성이라니.
‘그래서 경매장에서 붉은 엘피안 꽃을 사려고 했었나?’
핏빛이라고 하기에는 밝고 예쁜 색이었지만 아마 그것도 멜라니아가 구매했다면 어떻게든 훌륭한 작품이 되긴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비싼 꽃이 작품에 쓰였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을 테고.
“그러고 보니 너도 이번 일 들었지?”
“이번 일이라니요?”
“리엘라 테니어 말이야. 그 상속인.”
“……!”
각오는 했었지만 제 이름이 나오자 리엘라는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제, 제가 왜요?
“생각해 보니까 왕궁에도 드나들었었지. 설마 너도 돈 받았냐? 그래서 왕궁에 넣어 줬다거나….”
“이봐요, 멜라니아. 그거 지금 엄청나게 모욕적인 말인 거 알고 있어요? 내가 리엘라 같은 부자는 아니지만 나도 어디 가서 아쉽지는 않을 만큼 버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리엘라는 소문과 전혀 다르다고요! 충분한 능력이 있으니까 모리스 경이 받아들였던 거고요!”
“아 씨,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클로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리엘라의 편을 들자 멜라니아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한마디만 더요. 정의감을 갖고 있는 건 좋은데 다음부턴 좀 더 일을 확실히 확인해 보고 나서 행동했으면 해요!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이 일에 나서라고 불을 지폈는지 좀 알아봐야겠어요.”
“내가 뭘! 그 여자가 규정을 어기고 출전한 건 맞잖아!”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험악해지자 클로에는 허리를 짚는 척 손을 뒤로 돌린 다음 리엘라에게 어서 가 버리라는 듯 손짓했다. 그 뜻을 알아차리고 리엘라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자리를 떴다. 혼자서 행사장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들키면 큰일 나겠다.”
축제에 참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좋다고 따라왔는데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참여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규정 위반은 아니라지만 다시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클로에와 모리스 경까지도.
“행사 시작 전까지만 해야지….”
아쉽지만 작업을 도와준 다음, 행사가 시작되면 이곳에는 얼씬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엘라가 혼자서 터벅터벅 작업장으로 돌아왔을 때, 왕궁의 예복을 입은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리엘라를 발견하더니 재빠르게 다가왔다.
“리엘라 테…”
“쉿! 조용히!”
그가 제 이름을 부르려는 것을 들은 리엘라는 놀라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다행히 다른 팀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그들도 대부분 쉬러 간 탓에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왕궁의 정원 관리부가 관여하는 행사라 왕실의 시종이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왕궁의 전언입니다. 리엘라 양을 찾는 사람… 이 아닌가? 어쨌든 찾는 분이 있어서 바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저를 찾는데요?”
그러자 왕궁의 시종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게… 드래곤입니다.”
***
“리엘라 테니어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정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기저기 풀물이 든 채 밀짚모자를 쓴 리엘라가 숨을 몰아쉬면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정원으로 온 리엘라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분수대 옆에 앉아 있는 어린 드래곤이 보였다.
“지, 진짜 드래곤이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시종이 자초지종을 전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대륙의 끝에 살고 있는 하르메아가 왕궁에 나타났다니? 게다가 호슨 공작에게 복수를 한다고 말했다고?
‘그런데 왜 나를 찾아?’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드래곤이 다가와 자신의 머리부터 으적으적 씹어 먹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드래곤들은 분명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들었으니까.
그때 리엘라의 곁으로 하운이 다가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하르메아는 아직까지 사람을 먹은 적이 없어. 그리고 옆에 있을 테니까, 하르메아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공격하도록 할게.”
리엘라는 대답도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르메아가 잡아먹은 첫 번째 인간이 내가 되면 어떡하지?
리엘라는 떨리는 걸음걸이로 하운과 함께 하르메아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이 이런 거구나….’
그림으로 많이 봤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본 드래곤은 리엘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경이로운 존재였다. 일단 움직이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거대한 몸이 너무도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예뻐…?’
하르메아가 큰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색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 눈동자는 보석을 박아 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짙은 색에 깊이 있는 투명감을 자랑했다. 눈뿐만이 아니라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도 마찬가지였다. 큰 녹색의 비늘은 햇살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났다.
리엘라는 하운의 뒤에서 용기를 내어 조금씩 하르메아에게 다가갔다.
“저,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네가 벨라리아 아인델 호슨의 보석을 갖고 있는 인간이야?”
“네? 네!”
오랜만에 듣는 호슨 공작의 이름이 반갑다고 생각하며 리엘라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앉아 있던 하르메아가 몸을 일으키더니 리엘라를 향해 고개를 쭉 빼고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내 보석을 돌려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예전에 벨라리아 아인델 호슨이 나에게 와서 내 보석을 가져갔어. 한 개를 땅에 묻으면 열 개가 자라난다고 했다! 자기 집에서만 그렇게 자랄 수 있다고 했어!”
“…….”
리엘라가 하운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렇다면….”
“호슨 공작이 하르메아에게 거짓말을 해서 보석을 가져온 것 같은데.”
거짓말이라는 말을 들은 하르메아의 몸이 떨렸다.
“녹색의 크고 예쁜 것. 내가 제일 좋아하던 보석인데….”
어느새 하르메아의 목소리가 젖어 들고 있었다.
“내 보석 내놔아….”
리엘라는 살면서 처음으로 드래곤이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