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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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도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며칠째 이어지는 비에 모두가 피로를 느끼며 일찍이 잠자리에 든 탓에 공작저의 복도에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하운은 옷을 걸치며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을 나와 마구간에 도착하자 그의 말이 주인의 기척을 알고 투레질을 했다.
하운이 말을 끌고 나오려는 순간 마구간의 입구에 걸린 램프 아래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너, 어디 가냐?”
어쩐지 저택을 나올 때부터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발소리를 알아차린 네아가 따라왔었던 모양이다. 하운은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혹시나 하르메아와 관련해 일이 생기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
하운은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꺼내 네아에게 던졌다. 네아는 웃으면서 제 앞으로 날아오는 보석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은 네아의 주먹에 부딪혀 하운의 얼굴로 곧장 날아갔다. 탁! 얼굴에 부딪히기 직전 하운의 손이 보석을 붙잡았다. 네아가 우두둑 소리가 나게 목을 돌리며 말했다.
“이게 요즘 오냐오냐해 주니까 내가 네 부하라도 된 줄 알아? 콱, 수프에 독 타 버린다?”
“…성질머리 어디 가지 않았군.”
하운은 더 말하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렸다. 하운의 모습이 빗속으로 사라지자 네아는 마구간의 문을 닫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 자식, 생각해 보니 어디 가는지 말 안 했네?”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야 하운이 어디를 간 건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네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 어디에 가는지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가 리엘라가 크게 화를 내고 난 후로는 몇 시간 이상 자리를 비울 때면 꼬박꼬박 행선지를 말하는 하운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말도 안 하고 자리를 뜬다?
“수상한데.”
수상하기만 한 게 아니라 불안하기까지 하다.
“저놈이 멋대로 움직여서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있… 나?”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허튼짓하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하는 게 나을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제가 그렇게까지 하운을 위해 움직일 이유도 없었다.
‘혹시나 또 아가씨 속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는 것뿐이지.’
그것만 아니면 하운이 무슨 짓을 하든지 조금도 관심 없었다. 네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한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더 오려나.”
수도 안과 주변을 흐르는 강들이 불어나 폐쇄된 다리가 몇 군데 있어 슬슬 통행에 지장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저택 안이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것이다. 그 탓에 안 쓰는 방의 벽지에 곰팡이가 슬었다고 멜다 부인이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가.
“이제 그만 그치면 좋겠다.”
모두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커먼 밤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비가 떨어졌다.
***
겨울비처럼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빠르게 체온을 앗아 갔다.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았다면 여름이라 해도 덜덜 떨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전쟁터를 돌아다닐 때 이렇게 비를 맞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겨우 몇 달 쉬었다고 이런 날씨가 귀찮아지다니.’
몸도 정신도 나약해진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하운은 계속해서 밤길을 달렸다. 곧, 수도 외곽에 있는 꽃 축제 행사장이 나타났다. 늦은 밤이었지만 모레로 다가온 개최의 마지막 준비를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에 말을 묶어 둔 다음 리엘라가 만든 조형물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준비가 끝난 탓일까. 어제보다도 훨씬 적은 사람들이 천막 안에 보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운은 근처에 앉아 저들이 마저 자리를 뜨기를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이제 천막에는 그와 루시안이 만들어 둔 공중 난로가 돌아다니는 소리와 빗소리 외에 다른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하운은 일어나 조형물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에 보았을 때는 이게 어떻게 꽃을 넣은 장식이 되나 싶었던 철골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안에 흙과 이끼 같은 것들이 채워지더니 이제는 꽃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크고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색이 변해 버리거나 시든 꽃잎들이 보였고, 그중에 몇 개는 슬슬 짓물러 썩으려고 했다.
‘리엘라의 말대로군.’
아무리 보석의 힘으로 온기를 유지하려 노력했다지만 개최일이 연기된 데다가 습기는 여전한 탓에 평소보다 빠르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꽃 축제는 일주일 동안 열리는 행사다. 모레 행사가 시작될 때까지는 버티겠지만 아무리 보수를 한다 해도 일주일간 계속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하운은 주머니에서 하르메아가 던져 버린 녹색의 원석을 꺼냈다. 정원의 식물들을 되살리는 힘을 다 써 버린 보석. 그는 목에 걸려 있던 로켓을 셔츠 밖으로 꺼낸 다음 열었다. 양쪽에 각각 한 장씩. 두 장의 빛나는 꽃잎. 이것이 있으면 이 보석도 힘을 되찾을 것이다.
‘그다음에 보석의 힘을 이것에 쓰면….’
행사가 끝날 때까지는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시간이 지나도 이 조형물은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아름다운 색과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하운의 머릿속에 정신없이 하르메아의 뺨에 입을 맞추던 리엘라가 떠올랐다. 그렇게 많이, 여러 번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혹시 한 번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빛나는 꽃의 힘을 아는 보석술사들이라면 당장 그의 머리를 때리며 멍청한 짓은 그만하라 타박했을 것이다. 그 귀한 것을 이런 일에 쓰냐고 소리치면서. 하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을 받았던 날 잠들기 전에 어떤 보석에 사용할지 계속 고민도 했었다. 왕실의 보석 중 잠들어 있는 보석은 많았으니까. 아니면 첫 번째 방에서 나왔던 균열의 아게이트에 써 볼까도 고민했었고.
예전이라면 무조건 그런 보석들에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모든 일의 우선이 리엘라가 되어 버린 건지. 아깝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걸 제게 버린 하르메아에게 고마울 뿐이지.
하운은 로켓 한쪽의 유리를 밀어내어 꽃잎을 꺼냈다. 접힌 곳 하나 없이 반듯하게 눌려 예쁘게 말려진 꽃잎을 보니 얼마나 신경 써서 이것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른 꽃잎 위에 무슨 색이라 말할 수 없는 밝은 빛이 맴돌았다. 하운은 꽃잎을 조심스럽게 보석에 가져갔다.
꽃잎에 머물렀던 빛이 보석으로 건너가 그것을 휘감았다. 하운은 그 광경을 조심스레 살폈다.
오래전 호슨 공작은 빛나는 꽃에 대해서 말하며 보석이 그것을 먹는다고 표현했었다.
‘아니야.’
하지만 하운은 공작의 그 표현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보석에게, 꽃잎은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 같았다.
창세 신화에 따르면 모든 빛은 멀리서 온 한 줄기의 빛에서 갈라진 것이다. 그러니 모든 빛은 원래 하나였다. 강한 빛이 원석 안에서 빛났다. 빛을 잃고 어두워졌던 보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보석이 깨어나고 빛이 머물게 된 것이다.
순식간에 끝난 일이건만 하운은 움직이지 못한 채, 제 손에 들려 있는 원석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녹색의 빛이 반짝이는 모습에서 하운은 어쩐지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말로 아끼긴 했었나 보군.”
원래 하르메아가 갖고 있던 거대한 원석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했다. 일부분이 이런데 원래의 원석은 얼마나 더 훌륭할까. 그것은 분명 이 조각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으리라. 그것을 찾게 되면….
‘내 것으로 만들까.’
아니면 왕실의 소유로 넘겨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벽 안에 하르메아의 원석이 있다면 리엘라는 분명 하르메아에게 그것을 돌려주라 말할 것이다.
하운은 원석을 들고 조형물 앞에 섰다. 보석이 힘을 되찾았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가 원석을 든 채 손을 뻗자 힘을 되찾은 보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보석에서 새어 나오는 녹색의 빛이 조형물을 감쌌다. 정확히는 리엘라가 만든 하르메아를.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허공에 떠올랐던 보석이 하운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후우….”
아직 회복이 덜 된 몸에 처음 사용하는 보석까지 쓴 탓에 하운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살짝 몰려오는 현기증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역시 기대한 대로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들어 가고 짓물러 있던 식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막 피어난 것 같은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들도, 풀도, 붙어 있는 나뭇잎 하나까지도. 이제 이것은 행사장에서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처음의 모습을 간직한 채 서 있을 것이다.
하운은 제 손에 들린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이것을 볼 리엘라의 얼굴이 기대되었다. 분명 무척 즐거워할 것이다.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겠지. 그다음엔….
하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잡았다!”
갑자기 근처 화분의 뒤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운에게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
내치려 하다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작고 마른 여자라는 것을 확인한 하운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화분 뒤에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여자의 몸에는 흙과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분명 그가 보석을 쓰기 전부터 그곳에 엎드려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더러운 꼴의 여자를 보던 하운은 기억에 있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리엘라와 경매장에 갔을 때 마지막까지 경매에 참여했다가 결국 포기했던 여자.
“멜라니아 로헴?”
“나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하운 대공!”
하운의 팔을 붙잡은 멜라니아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럴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 며칠 동안 여기서 기다렸던 보람이 있군!”
“며칠…?”
멜라니아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하운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목에 걸고 있던 호루라기를 꺼내어 있는 힘을 다해 불었다. 천막 안에 귀가 따가울 정도의 호루라기 소리가 퍼졌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천막 밖을 순찰하던 관계자들이 놀라 뛰어왔다.
멜라니아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부정행위자 잡았어요! 빨리 와요!”
멜라니아의 말에 하운은 당황했다. 부정행위자?
***
천막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모두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멜라니아 혼자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천막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곧 천막 가까이로 다가오는 마차의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리엘라가 천막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리엘라를 본 하운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자다 일어난 채로 그대로 달려온 것일까. 머리카락은 미처 다 빗지 못해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아직 피곤함과 졸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연락받고 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운 님께서….”
“시치미 떼지 마!”
달려온 리엘라에게 멜라니아가 소리쳤다.
“네가 하운 대공에게 사주해서 부정행위를 저질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