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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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하운은 놀라 리엘라를 불렀다. 부탁한 일이라니? 리엘라는 지금껏 자신에게 부탁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부탁해 주면 좋겠다고 속으로 얼마나 바랐던가. 하운의 외침에도 리엘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하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쩐지 리엘라가 다시는 자신을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 어… 그럼 전부 인정한다는 거지? 아니라고 하면 당장 기자들 불러 버릴 거야.”
예상하지 못했던 리엘라의 태도에 멜라니아는 당황스러웠다.
멜라니아는 끝까지 리엘라가 부정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리엘라가 직접 사주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니까. 그래서 날이 밝으면 자신의 팬들은 물론 기자들을 불러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한 다음에 리엘라를 압박하려고 했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면 평판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그래서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도록.
‘돈을 갖고 나니 명예가 고팠던 모양인데 웃기지 말라 이거야.’
멜라니아는 리엘라를 노려보았다. 제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도 가증스러웠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차라리 빨리 고개를 수그리고 비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멜라니아는 자신의 고달팠던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시골 출신에다 평민이었던 자신은 수도로 올라오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었으며, 수도에서 이름을 날릴 때까지는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단 하나도 편하고 쉽게 얻은 것이 없었다. 시골 출신이기에 보는 눈이 낮다느니 촌스럽다느니 하는 말들을 뒤에서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홧김에 대회에서 어차피 욕먹을 거 미친 짓이나 해 보자, 하고 만들었던 작품이 폭발적인 관심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름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멜라니아는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나 받지도 않았다. 처음 수도에 왔던 자신처럼 시골 출신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여자들만 골라 받았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기회도 얻지 못했을 거라 말하며 자신을 신 모시듯 우러러보는 제자들을 보면 멜라니아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도와주었다.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 언제부턴가 리엘라 테니어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나도 이런 행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신문에 실린 리엘라 테니어의 기사를 보며 제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보니까 우리랑 같은 플로리스트던데 왜 이렇게 처지가 달라? 이제 호슨 공작님의 저택에 이 여자의 이름이 붙겠어요. 자기 이름으로 된 정원도 갖게 되겠네요. 그곳에서 나오는 새로운 품종에도 그녀의 이름이 붙겠지요.”
“정작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인데…. 세상 불공평하다니까요.”
멜라니아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저처럼 이름이 알려지고 팬이 생겨 자리를 잡았으면 모를까,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대부분 남의 밑에서 일하며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다.
아마 그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경매장에서 리엘라를 보았다. 하운 대공이 샀다지만 그가 보석을 얻기 위해서 리엘라 테니어에게 가져다 바칠 것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모은 돈으로 큰마음 먹고 사려고 했는데 그걸 선물로 턱턱 받아? 제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불공평해.
멜라니아는 지금까지 봐 온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돈이 많으면 거기서 만족할 것이지 그걸로 기어이 명예까지 사려 드는 사람들. 그때부터 리엘라 테니어에 대한 이야기들을 유심히 들었다. 그러다 리엘라가 정원 관리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네요. 리엘라 테니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길거리 꽃집에서 혼자 일한 사람의 능력이 대단해 봤자 아닌가요?”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까. 호슨 공작의 재산이면 왕실도 움직일 수 있었겠네요.”
제자들의 한탄을 들으면서 멜라니아는 입술을 물었었다.
‘나와 클로에도 서른이 넘고 나서 겨우 신청서를 내었었다고. 그 여자가 우리와 능력이 비슷하다는 거야 뭐야?’
납득할 수 없었다. 모리스 경이야 전설이니 그렇다 치고, 클로에와 자신도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나이가 훨씬 어린 리엘라가 저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미리 도착한 꽃 축제 안내문을 보다가 리엘라 테니어의 이름을 찾았다. 정확히는 리엘라와 같은 부문에 참가한 제자가 먼저 찾은 것이지만. 제자는 리엘라의 이름을 보더니 왈칵 울음부터 터트렸었다.
“너무해요. 보나 마나 이 여자가 1등 할 게 분명하잖아요. 시작하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엉엉 우는 제자를 보면서 멜라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제 밑에서 열심히 노력했던 제자였다. 이번 꽃 축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이름을 높일 거라고 늦게까지 남아서 더 노력했던. 그 순간부터 멜라니아는 제 안에서 리엘라 테니어를 적으로 구분했다. 우리는 돈 없이 고생하며 노력하는 선량한 피해자고, 리엘라 테니어는 능력이 없지만 가진 것이 많으며 노력 없이 편하게 남들이 간절히 바라는 기회를 쉽게 얻어 가는 가해자.
멜라니아는 리엘라가 만들었다는 하르메아를 보았다. 잘 만들었다. 한 번 물에 젖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소재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보석의 힘 때문에 식물들이 싱싱해진 것을 빼고 보더라도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것.
‘이게 정말 자기 실력이라고?’
그러다 멜라니아의 시선이 클로에를 향했다. 그럴 리가 있나. 클로에나 모리스 경이 도와주었겠지.
멜라니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보석의 힘을 사용한 것은 부정행위다. 멜라니아가 노려보자 리엘라는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네, 전부 인정할게요. 제가 부탁드린 것 맞습니다. 규정대로 처분을 받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리엘라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작품 중에서 제 것만 빼 주실 수 있을까요? 왕실 사람들의 작품이 빠지면 분명 말이 나올 터이고,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열심히 참여하셨던 다른 분들께 큰 폐라고 생각해요. 저 하나 때문에 다른 분들의 노력까지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순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것만 폐기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전시했으면 합니다.”
“…어, 그건 그렇지.”
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로서도 정원 관리부의 작품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마를 짚고 있는 클로에를 보았다. 클로에는 물론이고, 모리스 경이나 다른 직원들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의 작품을 전부 빼 버린다면 무척이나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 밑의 직원들도.
어차피 목표는 리엘라 테니어 하나였다. 그러니 리엘라가 제가 잘못했다고 엎드려 빌게 되었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럼 네 출입증 반납해. 넌 여기 참가할 자격 없으니까.”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엘라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쉽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 주제에 출입증 내놓으라는 소리에 제일 크게 놀라다니. 멜라니아는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럼 이런 일을 벌여 놓고 계속 관계자로 들어올 생각이었어? 너 같은 건 그럴 자격 없어.”
“멜라니아!”
클로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려 했지만 리엘라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행사장 출입증을 꺼냈다. 리엘라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흰 장미가 그려진 나무로 만들어진 출입증.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꽃 행사의 출입증으로 보이겠지만 리엘라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것이었다.
처음으로 꽃 축제에 갔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자신의 것과 바꾸지 않겠냐고 물어봤었다. 어린 리엘라의 제안에 그 사람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것은 일반 관람객이 아닌 행사의 관계자들이 받는 것이라 바꿀 수 없다고, 갖고 싶다면 나중에 커서 꽃 축제에 참가하라고 말했다.
부모님에게 울면서 졸라 보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 크고 나면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쉽사리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렇게 다시 잃어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억울했다. 하지만 규정은 규정이고, 이 모든 일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출입증을 한 번 손으로 쓸어 만진 다음, 리엘라는 그것을 옆에 서 있던 직원에게 내밀었다. 그다음 멜라니아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반납했어요.”
“…….”
“저기… 뻔뻔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기자를 부르는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 왜? 다들 모여서 네 욕 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리고 이걸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네 왕립 협회증도 문제 삼을 거니까. 그것도 규정집 보면 분명 문제 될 게 나오겠지.”
“그냥… 축제는 다들 즐겁게 보냈으면 해서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 규정대로라면 품위를 손상하는 행동을 하면 자격 박탈인 것도 알고 있어요. 왕립 협회증도 저택에 돌아가는 대로 전부 반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남 생각할 여유까지 있을 줄은 몰랐네.”
너무도 순순한 태도에 멜라니아는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나올 거면서 그런 일들은 왜 벌였는지.
‘나도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 일로 시끄러워지는 건 싫기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이쪽 업계의 사람이다. 업계의 모두가 동경하는 가장 큰 축제가 시작 전에 추문에 휩싸이는 것은 싫었다. 그러면 결국 업계 전체가 욕을 먹게 되는 일이니까.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리엘라 테니어는 두 번 다시 이쪽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그럼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필사적으로 내는 것 같은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나왔다. 누가 들어도 울음을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였다.
“가 봐. 질질 짜는 모습으로 동정표 살 생각 말고.”
멜라니아의 말에 리엘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 천막을 나갔다. 그 뒤를 클로에가 급하게 따라 나갔다. 남은 것은 하운이었다. 제게 따지기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하운은 직원의 손에 들려 있던 리엘라의 출입증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천막을 나갔다.
“…….”
“…….”
남은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다행히 새벽이고 이곳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데다가 이 일이 외부로 새어 나가 보았자 좋을 거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들이니 축제가 끝날 때까지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이 멜라니아를 향했다. 그 시선을 느낀 멜라니아는 손가락으로 조형물을 가리켰다.
“뭣들 해요? 저거 당장 빼 버리지 않고.”
직원들은 잠시 서로 이야기한 다음 조형물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멜라니아는 어쩐지 짜증이 났다. 그때 리엘라를 따라 나갔던 클로에가 돌아오더니 분리되고 있는 조형물을 한숨 쉬고 바라본 다음, 그대로 멜라니아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쳤다.
짝!
있는 힘껏 내리친 손은 꽤 매웠고, 멜라니아는 펄쩍 뛰며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아, 씨! 왜 때려!”
“잘하는 짓이다, 멜라니아 로헴. 아주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워!”
“왜 비꼬는 건데? 너도 공범이거든!”
공범이란 말에 클로에가 멜라니아의 뺨 한쪽을 아프게 잡아당겼다. 진심이었는지 등짝에 이어 볼을 잡아당겼다 놓은 손도 매서웠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멜라니아가 얼얼한 뺨을 문지르고 있을 때 클로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멜라니아, 나 네 정의감 좋아해 진짜로. 그러니까 네 녹록지 않은 성질머리에도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고 있고.”
거짓말이 아니었다. 불같은 성격에 가끔은 짜증 날 만큼 집요하게 굴며, 예민한 멜라니아였지만 클로에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제 제자들을 끔찍이 아끼며 업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돕기 위해 나섰으니까. 그러다 보면 속이 터지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되었고, 멜라니아의 성격은 더 끈질겨지고 강해졌다.
문제는 점점 더 결벽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규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일이 규칙대로 되는 것만도 아닌데, 멜라니아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리엘라 자격 다 박탈하니까 속이 시원하니? 아주 만족스러워? 너, 저것들이 대회에 출품되는 것이 아닌 것도 알고 있으면서! 저게 잘 만들어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 볼 거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알고 있잖아?”
“피해는 없을지 몰라도 그 여자가 더 챙겨 가는 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건 미리 싹을 잘라 놔야 한다고.”
“리엘라가 이런 걸로 이름 높이고 뭔가 얻어 가려고 했으면 더 편한 방법도 많았어. 매일같이 이 빗속에 아침부터 나오지 않아도 되었고, 옷 다 버리고 손 긁혀 가면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왜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해!”
클로에는 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쳤다. 그 말에 멜라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리엘라가 만들었던 하르메아의 조형물은 직원들의 손에 들려 천막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마 행사장 구석의 어딘가에 처박히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