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27
133
리엘라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분명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고 숨이 턱턱 막혔다.
‘사람 살려!’
리엘라는 자신이 앉아 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장식 하나하나가 화려하고 우아하며 고풍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과하다 싶을 만큼 모든 곳이 예술품 같았지만 리엘라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왕궁이니까! 그것도 대귀족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대기실이니까!
어제 편지를 받고 나서 그대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친구에게 보내는 것 같은 편지였지만 그 밑에 써진 카르디아 71대 국왕 레이안이라는 말은 리엘라의 눈에는 ‘안 오면 죽인다’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걸까.’
하운이 서로 고백했다고 말한 걸까? 그랬으니 그가 쓰러졌을 때 자신을 데리러 온 거겠지? 그때 멀리 서 계셨다지만 아마 보고 계셨을 거고…. 잠깐, 설마 그 근처에 서 있던 기사들과 보석술사들도 다 봤나?
그날, 하운이 쓰러진 탓에 정신이 없어 주변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마차에 타고 나서도 하운이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엉엉 울었으니 그와의 관계를 국왕이 모를 리가 없다.
갑자기 땀이 흐르며 목이 탔다. 리엘라는 조금 전 왕궁의 시종들이 놓고 갔던 찻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여름이라 시원한 차를 주었음에도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왜 날 부르신 걸까.’
리엘라는 그날 본 레이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의 눈동자. 전체적으로 인상이 짙고 강한 하운과 달리 레이안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실 그건 좋게 표현한 것이고, 안 좋게 표현하자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 옅은 인상이랄까.
키는 큰 편이었지만 하운보다는 작았고, 얼굴 역시 미남이었지만 역시 하운 쪽이 강렬한 탓에 그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레이안에 대해 생각하던 리엘라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간에 돌던 하운과 레이안에 대한 말들이 생각났다. 동생에 비해서는… 동생보다 못한…. 왜 그런 말들이 돌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리엘라는 제 동생을 살려 달라며 저를 붙잡던 레이안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가 국왕이 아니었더라도 사람이라면 그 표정을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진실된 모습이었으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레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헉!”
갑자기 들어온 그를 본 리엘라가 놀라 벌떡 일어나다 내려놓으려던 찻잔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바닥으로 떨어트리지 않고 컵 받침 위에 놓을 수 있었지만, 찻잔 안에 있던 차가 출렁이며 손이 젖었다.
“이런, 미안.”
리엘라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빠르게 다가온 레이안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리엘라의 손을 툭툭 닦아 냈다. 국왕이 아니라 친한 옆집 오빠 같은 스스럼없는 행동에 리엘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다 살다 왕에게 미안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해? 일단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고 인사를 해야 하나? 닦아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야 하나?
들어오면서 시종들에게 간단한 예법에 대해 듣긴 했는데 그 기억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리엘라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허리까지 깊숙이 숙이자 레이안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그냥 편하게 하운의 형이라고 생각해.”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크게 싸운 남자 친구의 가족이라는 존재가 편할 리가 있나. 리엘라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고, 겨우 기억해 낸 예법으로 레이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한 레이안은 겨우 숨을 돌리는 리엘라에게 곧장 질문을 던졌다.
“오늘 내가 왜 그대를 불렀는지 궁금하지?”
“네!”
“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힘찬 리엘라의 대답에 레이안이 웃었다. 그 웃음에 리엘라는 긴장했다. 왕이 자신에게 무엇을 물어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왕실은 자신이 호슨 공작의 상속인이 되었을 때 이미 모든 조사를 끝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리엘라라는 사람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다 물어보다니. 도대체 무엇이 궁금해서?
“무, 무엇이든지 성심껏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마치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처럼 리엘라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 동생 어디가 좋아?”
“쿨럭!”
차를 마시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국왕 앞에서 차를 뿜는 추태를 보일 뻔했으니까. ‘하운 좋아하냐’도 아니고 ‘어디가 좋냐’는 질문이다.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국왕이 다 봤으니 부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럴 이유도 없다. 그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리엘라는 자신이 왜 하운을 좋아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왜 하운이 좋아졌더라?
“어… 잘 생겨서?”
생각만 하려고 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것뿐?”
“키도… 크고요?”
“또?”
“몸도 좋고…?”
“또?”
그런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눈치가 빠르나? 아니요.
대화가 잘 통하나? 아니요.
말을 잘 듣나? 아니요!
어쩐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예전에 친구들과 ‘남자 친구가 이러면 가차 없이 버린다!’라고 했던 조건들만 떠올랐다. 리엘라가 복잡한 표정이 되자 레이안이 어딘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없나? 잘 생각해 보면 한두 개쯤은 더 있을 거야. 힘이 좋아서 물건을 잘 든다거나 주는 대로 잘 먹는다거나….”
그렇긴 한데 그것 때문에 하운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한참을 더 고민하던 리엘라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당장 다 말씀드리기는 힘든데…. 그냥 좋은데요.”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얼빠진 대답이었다. 하지만 레이안은 리엘라의 대답에 밝은 얼굴이 되었다.
“그래? 내 동생이 여러모로 부족하긴 하지만 생긴 건 멀쩡하고 대공인 데다가 자네만큼은 아니어도 돈은 많으니 버리지만 말아 줘.”
“네, 넵.”
도대체 왜 왕궁에서 나는 이런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는 리엘라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사이 레이안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진짜 용무를 말하지. 자네, 모두에게 숨기고 있는 특별한 비밀 있지?”
그 순간 리엘라는 심장이 툭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
하운은 눈을 떴다. 푸른 하늘과 함께 밝은 햇살이 눈을 찌른 탓에 다시 감아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가 어딘지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와 상쾌한 바람과 부드러운 꽃의 향기.
햇볕에 잘 말린 침구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보송보송함도 느껴졌다. 동시에 푹신한 침대의 느낌도.
‘공작저군.’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몸에 긴장이 풀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 손끝에서 뜨뜻하고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
이건 도대체 뭔가 싶어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떴다. 그러자 침대 옆에 앉아 있던 하르메아가 그의 손을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어아에?”
‘일어났네?’라고 말 하는 것 같았다. 하운은 대답 대신 하르메아의 입에 물려 있던 손을 잽싸게 빼낸 다음 사정없이 하르메아의 머리를 후려쳤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야! 왜 때려!”
하르메아는 얻어맞은 머리를 감싸 안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하운은 머리가 웅웅 울려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하르메아가 물고 있던 손을 바라보자 침 범벅에 퉁퉁 부어 있기까지 했다. 이 새끼 드래곤이 남의 손을 대체 얼마나 물고 있었던 거야?
울먹이며 따지는 하르메아를 무시하며 하운은 눈을 깜박거렸다. 눈은 떴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르메아를 후려친 것이 마지막 힘이었던 것처럼 그저 가만히 누워 있는 것과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자기가 쓰러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창천의 토르말린을 사용했고, 꽃 축제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리엘라가 왔고….
“쿨럭!”
쓰러지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순간 헛기침이 나왔다. 리엘라가 뺨에 입을 맞춰 줬다. 분명히 그랬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카락도 잔뜩 만져 봤었고. 하운은 힘겹게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져 보았다. 한참이 지났음이 분명한데 아직도 그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날 때렸겠다! 브레스로 너도 녹여 버릴 거야!”
“…….”
“가만 안 둘 거야! 뼈까지 씹어 먹을… 내 말 듣고 있어?”
“…….”
펄펄 뛰던 하르메아는 몽롱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이고 있는 하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하운이 고장 났나 봐.
리엘라가 아침에 나가기 전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운에게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바로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그때 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분명 리엘라의 걸음 소리였다. 하르메아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리엘라! 하운 일어났어!”
“네? 정말요?”
밖에서 들려오는 리엘라의 목소리에 하운은 뺨을 만지고 있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그러자 다시 머리가 띵해지며 정신이 어찔했다. 결국 그는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누운 채 리엘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리엘라가 문 앞에 나타났다.
“……?”
고개를 돌린 하운은 리엘라의 모습에 당황했다. 도대체 어딜 다녀왔길래 양손은 물론이고 팔에 종이 봉투를 한 아름 안고 있는 걸까. 누가 봐도 잔뜩 쇼핑을 하고 돌아온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딘지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하운이 눈을 끔벅이며 바라보자 리엘라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바닥에 던져 버리고 하운에게 달려갔다.
“하운!”
그의 앞으로 달려온 리엘라는 하운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고 열이 있나 살피더니 그의 얼굴이며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아요?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아픈 데는 없고요? 힘은? 힘은 돌아온 거 같아요? 배 안 고파요?”
쏟아지는 질문에 하운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난 괜찮아.”
“다행이다….”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하운을 덥석 끌어안았다.
“……!”
“혹시나 어디 잘못되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어, 어, 그게….”
뭔가 말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것은 더듬거리는 소리뿐이었다. 하운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리엘라가 더없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는 데다가 덥석 저를 끌어안기까지 해 주고 있다. 그래서 하운은 사실 자신이 죽었고, 여기는 사후 세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뜨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하르메아의 소란을 듣고 달려온 네아가 방 안을 한 번 보더니 하운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하르메아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지자 하운은 정신을 차렸다. 꿈 같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를 끌어안았던 리엘라가 팔을 풀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체온에 아쉬움을 느껴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쉰 순간, 한쪽 뺨에 리엘라가 입을 맞췄다. 저번과 다른 쪽 뺨이었다.
“이건 그날 못 했던 것.”
조금 붉어진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리엘라의 모습에 하운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잠시 후, 복도에 서 있던 네아는 리엘라의 비명을 들었다.
“하운 님! 정신 차려요! 또 쓰러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