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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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네 사람은 새벽같이 보석의 방으로 모였다. 넷의 얼굴 전부 잔뜩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루시안의 기록을 보면 지난 며칠간, 벽 너머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는 시각은 아침 7시 30분부터였다. 그 시각을 확인하면서 리엘라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 만졌다. 언제나 호슨 공작은 그때 아침 식사를 시작했으니까.
네 사람은 방 한구석에 있는 큰 시계를 보았다. 28분, 29분, 30분!
큰 바늘이 30분을 가리키는 순간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네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벽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루시안의 기록대로라면 이제 안에서 소리가 들릴 터였다.
“…….”
“…….”
하지만 벽 너머는 고요했다. 뭐어, 조금은 늦게 들려올 수도 있지.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숨을 죽인 채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31분, 32분, 33분….
결국 40분이 되었을 때 네아가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눈을 가늘게 뜬 네아가 루시안을 째려보았다.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이, 이럴 리가….”
루시안은 제가 정리했던 기록을 보았다. 이럴 리가 없다. 지난 며칠간 소리는 매우 규칙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안 들리는데! 그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8시가 되자 네아는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전 멜다 부인 도와 드리러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제가 무슨 눈으로 봤다고 그러시는데요? 호호호.”
네아가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세 사람은 어쩐지 네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루시안이 ‘그래도 두 사람은 내 말 믿지?’ 하는 표정으로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자 하운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잠을 거의 못 잔 것 같은데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무척이나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결국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는 소리였다. 뭐라 대꾸하려던 루시안은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퀭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마치 일주일은 못 잔 것 같은 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극도의 공포와 흥분을 차례로 겪은 탓에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만 정신이 풀리면 제가 들었던 호슨 공작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고, 그 탓에 뇌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고민한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심장이 쿵쿵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하고, 몸의 오감이 깨어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루시안은 뜬눈으로 날을 샌 것이다.
“하아….”
억울한 마음에 큰 소리로 항변하려던 루시안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운의 뒤에서 리엘라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꼴이 정말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인 것 같았다. 루시안은 잠시 벽을 노려보다 고개를 떨궜다.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맥이 탁 풀려 버리며 눌러놨던 피로가 몰려왔다.
“리엘라 양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보석의 방을 비울 순 없습니다. 소리가 언제 다시 들릴지 모르니….”
“오늘은 내가 대신 있겠네. 그러니 가서 쉬도록 해.”
하운은 루시안이 적던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루시안은 그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보석의 방을 나갔다.
“…….”
“…….”
네아와 루시안이 나간 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운은 애꿎은 루시안의 보고서 끄트머리만 손가락으로 구겼다. 하운의 신경은 정작 벽이 아닌 리엘라에게 쏠려 있었다.
고백도 하고 뺨에 입도 맞춰 줬는데… 왜 이렇게 더 어색하고 부끄러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운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가 뭐 하고 있나 바라보려던 리엘라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놀란 리엘라가 휙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묶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
하운은 그 순간 멋대로 올라가려던 손에 힘을 주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그녀의 허락을 구하고 잡아 봤던 머리카락이었다. 제 손가락에 휘감기는 부드러운 감촉은 죽을 때까지 만져도 질릴 것 같지 않았다. 하운은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더 만지고 싶었다. 계속해서, 더. 하지만 이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면 변태로 몰려도 할 말이 없기에 그냥 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젠 솔직히 머리카락만 만질 자신도 없었고.
홍조가 어린 뺨도 만져 보면 부드러울 것 같은데. 그다음엔 입술도….
“흡!”
제 상상이 조금 위험해진 것을 깨달은 하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쉽사리 제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만져 보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욕망은 감각을 만족시켜야 충족할 수 있다. 만져 본 다음에는 향기를 맡아 보고 싶을 것이고, 향기를 맡은 다음에는 분명 입 안에 머금어 보고 싶겠지. 그것도 분명 달콤하고 부드러운 부분으로 한가득….
“으아악!”
하운은 미친 듯이 제 머리를 헤집었다. 방금 상상이 선을 넘을 뻔했다.
“하운? 괜찮아요?”
놀란 리엘라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새삼 리엘라가 부르는 제 이름에 하운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 리엘라를 다시 방으로 데려다주면서 하운은 더 이상 자신을 부를 때 ‘님’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 말이 항상 리엘라와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도 하운은 리엘라가 언덕 위에서 골이 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대공님도 아니고, 하운 님도 아니고 그냥 제 이름만을 부르며 리엘라가 달려왔을 때, 그녀가 화가 잔뜩 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자신도 이제 네아나 리나처럼 쉽게 불러 주겠거니 싶어서.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는 다시 자신을 하운 님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젯밤 그는 일생일대의 부탁을 하는 사람처럼 그냥 이름으로 불러 달라 부탁했다. 리엘라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웃으면서 알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잘 자라는 말 뒤에 그의 이름만을 불렀고.
어제 그 일이 꿈이 아니라는 듯 이름을 부르는 리엘라의 목소리에 하운은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너무 바보 같아 보이는 것은 막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그의 얼굴을 본 리엘라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웃음을 참으려던 얼굴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어, 그, 그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하운의 머릿속에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예전에 갔던 파르멜 영지의 저택. 거, 거기를 좀 수리해야 하나 싶어서.”
“거기를요? 왜요?”
“그, 그게 앞으로 계속 수도에 살아야 하는데 공작저에 계속 머물 수는 없으니까… 아니, 여기에 있는 게 싫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긴 사람들도 너무 많고 좀 더 조용히 만날 수 있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횡설수설 말하다 보니 무심코 진심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하운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여하튼 거기를 다시 수리하고 손볼 생각인데 혹시 정원에 대해서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조언이요? 어떤 조언이요?”
“너무 오래 방치된 상태라 정원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냥 거기에 심으면 좋은 것들이라거나….”
리엘라는 거기까지 듣더니 후다닥 테이블로 뛰어가 종이와 펜을 들고 왔다. 그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위에 파르멜 저택을 그렸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현관문을 보니 약 80년 전에 유행했던 제르핀 양식의 저택이었어요. 그렇다면 정원도 그 당시의 유행대로 만들어졌을 것이고, 크게 바꾸지 않았다면 이렇게 방사형의 형태로 가운데에 분수를 두고, 각 구역별로 돌을 깔아 정원을 나눴을 거예요. 이런 양식은 계절마다 크게 피어나는 꽃을 심는 게 일반적인데, 앞쪽의 정원을 이렇게 만들어 놨으면 후원은 반대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리엘라는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종이에 그림을 쓱쓱 그려 가며 하운에게 설명했다. 하운은 놀란 눈으로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한 번 봤을 뿐인데 꽤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군?”
“아, 그게… 요즘 리나네 가게 꾸미는 걸 도와주다 보니 좀 더 넓은 공간을 한번 꾸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시다시피 공작저의 정원은 너무 완벽해서 더 손볼 곳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이것저것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저택이 떠올라서….”
리엘라의 말에 하운의 입꼬리가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계속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거지?”
“…그, 그렇게 되나요?”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리엘라는 다시 그 저택을 떠올렸다. 폭우의 하우윈이 불러온 비가 발목을 잡은 탓에 잠시 머물렀던 곳. 낡고 먼지 가득한 저택이었지만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련함이 있었다. 정작 그곳에 살았던 것은 하운인데도.
그날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리엘라의 머릿속에 모닥불의 장작이 튀는 소리와 함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상의를 벗은 채 젖어 있던 하운의 모습이. 그때 분명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꿀꺽. 그 모습을 떠올린 순간 리엘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갑자기 왜 그 모습이 생각나? 그건 그렇다 치고 침은 왜 넘어가?
“리엘라?”
아무 말 없이 가만있던 리엘라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자 하운이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불렀다.
“저, 저, 메, 멜다 부인 좀 도와드려야겠네요!”
하운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엘라는 손등으로 황급히 제 입가를 훔친 다음 벌떡 일어나 후다닥 보석의 방을 나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하운이 황당해하고 있을 때, 리엘라가 다시 문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고 말했다.
“그 저택 수리할 거면 정원은 꼭 저한테 맡겨 주세요!”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리엘라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하운은 머리를 긁적이다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맡겨 달라고.’
나름대로 큰 저택이다. 하루 이틀만에 수리를 끝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최소 몇 주는 걸릴 게 분명하다. 정원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몇 주 정도 저택 핑계를 대고 리엘라와 따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운은 히죽히죽 웃다 주먹으로 멋쩍게 얼굴을 문질렀다. 자꾸만 머릿속에 완벽하게 수리된 저택에서 저와 리엘라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생각났다. 곧이어 네아와 루시안이 나타났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제 머릿속에서 둘의 모습을 지웠다. 너희들은 필요 없어!
그가 상상 속에서 행복해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끼익.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하운은 벌떡 일어나 벽에 뚫린 구멍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크게 소리쳐 다른 이들을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접었다. 만약 그 소리에 벽 너머의 것이 다시 조용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운은 소리에 집중했다. 걸음 소리,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듯한 딱딱거리는 소리. 그릇 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
“…….”
하운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루시안의 보고서를 넘겼다. 전부 그가 말한 대로였다. 하운은 생전 호슨 공작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습관도 함께 떠올렸다. 나이를 먹고 나서 빠르게 걷기 힘들어진 그녀였다. 그렇지만 힘이 밴 걸음걸이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터벅. 터벅.
마루를 걷는 소리는 분명 사람의 걸음 소리였고, 자신이 기억하는 호슨 공작의 걸음 소리였다. 벽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 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하운은 숨을 크게 쉬고는 구멍에 대고 말했다.
“호슨 공작, 그대인가?”
뚝. 걸음이 멈추고 소리가 멈췄다. 다시 조용해지는 건가? 하운이 생각에 잠긴 순간 타타닥! 빠른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정확히 하운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
하지만 다가왔을 뿐, 그것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치 이쪽의 소리를 숨죽여 기다리는 것처럼. 그래서 하운은 다시 말했다.
“호슨 공작, 그대가 맞나? 거기에 있나?”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운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라면 대답을 하도록. 내가 누구인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
상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하운은 버럭 소리쳤다.
“나 하운 아렐 팬드래건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너는 누구인가! 당장 대답해!”
그 순간 벽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하운 아렐 팬드래건? 당신입니까?”
그 순간 하운은 알 수 있었다. 들려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호슨 공작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호슨 공작이 아니야!’
그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