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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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누얀은 한숨을 쉬며 제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 네아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더운 지방의 술답게 아주 화끈한 독주였건만 네아는 망설임 없이 잔 안에 가득 있던 술을 한 번에 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누얀… 한 잔 더 주세요.”
“그만 좀 마셔요! 플라워 컷의 술을 전부 다 거덜 낼 일 있어요? 하필이면 그것도 30년 이상 숙성한 좋은 술들로만 골라서 마시는 이유가 뭔데요?”
“슬픈 날에는 좋은 술이죠.”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하지 말구요!”
누얀이 술병을 옆으로 치우자 네아는 급히 손을 뻗어 병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제 잔을 가득 채웠다.
제일 비싼 술들이 바닥나는 것을 본 누얀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저거 정말 귀한 건데! 나중에 정기 보고 때 다섯 병이나 사라진 것에 대해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누얀은 아직 마개를 열지 않은 바닥의 술병을 발로 슬슬 굴려 숨기면서 네아에게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어차피 처음부터 아가씨가 거짓말한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자 네아가 탕, 하는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잔으로 내려쳤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유리잔에 금이 갔다. 웬만해선 쉽게 깨지지 않는 잔에 금이 가는 것을 보며 누얀은 마음속 피해 장부에 술 다섯 병에 잔 하나를 추가했다.
네아는 일어나 새로운 술잔을 가져온 다음 다시 술을 따랐다.
“당연히 알고 있었죠! 우리 아가씨, 물건 흥정할 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는 분이지만 저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으면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운 놈이 뭐라 속삭이자마자 뻣뻣하게 굳은 리엘라가 갑자기 안에 놓고 온 물건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때 네아는 슬쩍 리엘라의 주머니를 살폈다. 얇은 소르디아의 옷은 리엘라의 주머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잘 드러내 주었다. 리엘라가 놓고 왔다고 말하는 진주 팔찌가 분명했다.
하지만 네아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아이디얼 컷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슬쩍 돌아보니 하운이 리엘라를 거의 집어 들듯 데리고 미친 듯이 달려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하운 새끼 죽일 거야…. 감히 아가씨를 들고 튀어…?”
사실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디얼 컷에서 서류에 서명을 하는 내내 하운이 지나가면서 저를 살피고 갔으니까.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불꽃놀이가 있는 날이고, 두 사람이 소르디아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까.
“어쩌겠어요. 연애할 시간도 없이 와서 일만 했는데. 우리 눈치 없는 늙은이 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요.”
그 말에 네아는 누얀을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누얀 씨, 발로 숨기고 있는 술 한 병만 더 따 주실래요.”
“…들켰군요.”
누얀은 혀를 차며 애써 숨기고 있던 술병을 발로 톡 차올렸다. 술병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네아의 앞으로 떨어졌다. 네아는 술병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잡아 뽑았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참이나 끙끙거렸을 것을 가볍게 힘으로 처리하는 모습에 누얀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하지만 네아는 감흥 없는 얼굴로 제 잔에 술을 따르더니 이번에는 누얀의 앞에 있는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사실 들킨 건 저예요. 언제부터 알았어요?”
네아의 말에 누얀은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요. 솔직히 네아 씨도 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긴 하지만….”
네아는 누얀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하운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네아는 누얀에게서 옅은 짐승의 냄새를 맡았다.
“제 별명이 괜히 북해의 미친개가 된 게 아니니까요.”
“개가 아니라 늑대 아니에요? 냄새가 조금 다른데.”
“어머, 거기까지 눈치챘어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던 누얀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런데… 네아는 뭐예요?”
“…….”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네아는 냄새도 거의 없고…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난단 말이죠.”
네아는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누얀이 아직 드래곤을 만나 본 적이 없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뭐어… 하르메아와는 완전히 다른 냄새였으니 맡았어도 몰랐을 것 같긴 한데.’
처음 하르메아가 나타났을 때,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나 싶었지만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숲에 사는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하르메아에게서는 풀과 나무 그리고 꽃과 물의 냄새뿐이었다.
네아는 제가 갖고 있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피, 썩은 물, 부러진 뼈. 호슨 공작 덕분에 이제 그 냄새들은 사라졌다고 해도 블랙 드래곤 특유의 비린내 같은 것이 저에게 남아 있다.
네아가 더 대답하지 않자 누얀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이제 누얀의 마음속 피해 목록은 술 여섯 병과 잔 하나로 바뀌었다.
펑! 펑!
어느새 불꽃놀이가 시작된 모양이다. 강변 위 하늘에 거대한 빛의 꽃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밤하늘에 펼쳐지는 불꽃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잠시 후 네아가 말했다.
“한 병 더 까죠?”
***
플라워 컷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이곳의 주인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온 것이다. 플라워 컷의 하인들은 떠나는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어제 밤늦게 돌아온 리엘라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리엘라와 같이 돌아온 하운은 벌써부터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뢰한 물건을 받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프레이는 하운의 앞에 유리를 끼운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에르첼라의 브로치였다. 가운데에 있는 큰 보라색 보석을 시작으로 밑에 달려 있던 작은 보석들은 물론, 금으로 된 장식까지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하운은 프레이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어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우우웅!
그러자 테이블 위에 있던 상자에서 큰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하운은 프레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복원된 것 같군. 에르첼라의 목걸이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말이야.”
상자 안에서 덜걱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에르첼라의 목걸이가 풀어 달라 아우성치는 모양이다. 그가 상자를 열자 목걸이는 새장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은 새처럼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브로치 위를 빙빙 돌다 그 위로 툭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르첼라의 브로치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 딸 생각나네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잘 있었냐는 인사로 시작해서 몇 시간은 거뜬히 떠들던데….”
“…….”
정말로 딱 그런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붙잡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뭐 하고 살았냐, 별일은 없고?’라고 물어보는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어쩐지 어제 리엘라의 목에서 순순히 떨어진다 했더니.’
그동안 리엘라의 목에 계속 걸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떼어 놓으려고 하면 죽어도 안 떨어지겠다는 듯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고분고분하게 제가 알아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보니 브로치가 복원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자기들끼리 웅웅거리던 보석들이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에르첼라의 목걸이가 ‘이쪽이야.’라고 말하듯 앞장서 날아갔다. 그 순간 하운은 번개같이 움직여 두 보석을 원래의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덜그럭덜그럭, 쾅쾅.
‘놔라! 날 풀어 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하운은 흔들리는 상자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이것들이 리엘라 자는데 어딜… 가만히 있지 못해?”
보나 마나 에르첼라의 목걸이가 브로치를 끌고 그녀에게 가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하운은 각각의 보석을 케이스에 넣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그 케이스를 더욱 큰 나무 상자에 넣고 잠가 버렸다.
“…그렇게 막 다뤄도 되는 겁니까?”
“알 게 뭐야.”
국보가 아니라 어디 동네의 말썽꾸러기 꼬마를 대하는 것 같은 하운의 태도에 프레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운은 잠시 방 안을 살핀 다음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들이 담겨 있는 케이스를 꺼냈다. 그가 그것들을 손에 올리고 힘을 끌어내자 문이 잠김과 동시에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도록 주변에 보석의 힘을 쓴 것이다.
“부탁한 일은?”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프레이는 제 가방의 밑을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단단한 공구 가방 아래가 열리며 숨겨져 있었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프레이는 그 안에 들어 있던 작은 나무 상자 두 개를 꺼내 하운에게 건넸다.
하운은 그것 중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밀가루보다 더 곱게 갈린 것 같은 붉은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무게부터 확인해 보시죠.”
“됐어. 믿고 맡긴 것이니 더 이상 확인할 필요 없지. 그리고 어차피 자네가 날 속이려 들면 무게 정도야 쉽게 속이고도 남지 않나.”
“그렇긴 하네요.”
하운은 가루가 되어 버린 욕망의 가넷을 잠시 바라보았다. 샤를로테가 소동을 일으킨 탓에 저도 모르게 마음대로 움직여 버렸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얼마나 난리가 났던가. 사실 에르첼라의 목걸이도 생각해 보면 자신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지금 다시 곱씹어 봐도 그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눈치채지 못하고 샤를로테가 보석을 쓰는 대로 당하기만 했다면….
“…큰일 날 뻔했군.”
“뭐가 말입니까?”
“아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수고했어. 한 달 내로 카르디아 대사관을 통해 자네에게 공임비가 지급될 걸세.”
“넉넉하게 넣어 주십시오.”
“카르디아 왕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금액이 갈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하운은 가넷의 가루가 담겨 있는 상자를 덮고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나?”
그의 질문에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운이 아직 열지 않은 나무 상자를 눈짓했다. 그 안에는 검은 돌 조각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운이 맡겼던 헤마타이트였다.
“성공했습니다. 보내 주셨던 헤마타이트의 조각은 성공적으로 붙었습니다. 그중에 두 개를 이용해 실험한 결과, 힘도 복원이 되었고요.”
“…그래, 알겠네. 카르디아로 돌아가면 나머지 조각들도 하나씩 자네에게 도착하도록 해 두겠네. 그러니 잘 부탁해.”
하운은 케이스를 닫고 다시 프레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하운이 내민 것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더니 결심을 한 듯 그에게 물었다.
“…대공님, 반역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그 귀찮은 것을 왜 하나? 반역을 해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뭔데?”
해 봤자 귀찮은 일만 늘어난다. 그러면 리엘라와 같이 있을 시간도 줄어들고. 그런데 왜 반역을 해?
하운이 진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자 프레이는 맥이 풀린 듯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대었다. 아무리 하운의 의뢰라고 하더라도 카르디아 같은 큰 나라의 반역에 휘말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양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운은 정말로 반역 같은 것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연인을 만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을 때니 당연한 일인가.
“그렇다면 왜 이것을 복원하려 하시는 건데요? 아니, 그보다 이 보석을 어디에 쓰실 겁니까? 호슨 공작님 다시 되살려 보시게요?”
“미쳤나?”
하운은 질색을 하며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걸 어디에 쓰시려고요? 호슨 공작님도 아니고, 대공님 성격 보아하니 본인을 복제하려는 것도 아닐 테고….”
“딱히 지금 누구를 복제하려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어쩐지….”
하운은 제 손에 들려 있는 케이스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필요해질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