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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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아일리와 하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만약 누가 두 사람 사이에 종이를 던졌다면 그대로 활활 타오를 만큼 서로를 보는 시선은 강렬했다. 결국 레이안이 두 사람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자자, 서로 할 이야기는 많겠지만 일단 일부터 하자고.”
레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대륙 전도가 붙어 있었다. 저번 셀비아스 사건 때 각 지역의 기사단장들과 보석술사들이 모여 함께 보았던 그 지도였다. 하운이 소르디아로 가 있던 사이 지도에는 더욱 많은 것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 말은 셀비아스의 소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계속해서 보고가 되었다는 뜻이며, 그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소리였다.
지도에 가까이 다가간 하운은 먼저 각 지역에 있는 드래곤의 현황부터 확인했다.
“루오스가 일어나 있었군요.”
“그래. 잠깐이지만 루오스와 그 지역의 보석술사들이 대화를 나누었어.”
“대화요?”
“왜 그래. 알잖아. 보석의 힘이 좀 날아다니고 쇳소리가 좀 나는 대화.”
즉, 루오스와 전투가 있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정보가 빠른 소르디아에서 전쟁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없으니 아마 그다지 큰 규모의 대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까?”
“루오스의 뜯긴 날개가 느리긴 하지만 다시 자라나고 있는 모양이야.”
화이트 드래곤인 루오스는 원래 루길오스라는 이름의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한쪽 날개를 잃고 나서 그 당시 보석술사들이 조롱의 의미로 그의 이름에서 글자 하나를 뺀 탓에 공식 명칭은 루오스가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루오스는 감히 인간들 주제에 자신을 조롱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루오스에게 피해를 입은 그 지역의 주민들은 열과 성을 다해 공식 기록에 남아 있던 루길오스라는 이름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심지어 보라는 듯이 루오스의 레어 근처에 아주 큰 나무 판을 세워 ‘루오스의 레어(구 루길오스)’라고 써 두기까지 했다.
인간과 드래곤의 대립치고는 무척이나 유치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그 후로 루오스는 점점 소심해지더니 결국 레어 안에서 잘 나오지 않는 드래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날개가 다시 자라나고 있다니. 다시 카르디아 안에서 새로운 전쟁터가 생기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하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기 싫은데.’
그 순간, 하운은 제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왕족에, 강한 보석술사로서의 재능을 가진 그였다. 즉, 태어날 때부터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많다는 뜻이었다. 강한 힘은 위험한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었기에.
몬스터들이 나타나거나 새 드래곤이 깨어날 때, 가끔은 이웃 나라와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하운은 그 자리에 있었다. 카르디아의 사람들 모두 그가 전쟁터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하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분쟁 지역에 자신을 부르지 않으면 불쾌해할 정도였다. 그래 놓고서 이제 와 전쟁터로 가기 싫다니.
이유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파르멜의 저택에서 만나기로 했지.’
지금쯤 리엘라는 제가 버려두었던 저택으로 갔을 것이다. 아침에 먼저 그곳에 가서 정리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일을 보고 오라며 손을 흔들었던 리엘라의 모습이 생각났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침에 리엘라와 같이 그곳으로 출발하고 싶었지만 하운이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지금도 이러는데 만약 루오스 때문에 다시 수도를 멀리 떠나게 된다면….
“루오스가 회복하기 힘들도록 미리 선수를 칠까요?”
“응? 뭐? 왜?”
날개의 상태가 어떠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일단 그놈의 목을 자를까요?’라는 듯이 살기등등하게 말하는 하운의 모습에 레이안은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하운의 기세는 루오스가 아니라 잠들어 있는 드래곤 로드의 살도 발라 올 기세였다.
“루오스 성격에 날개를 되찾으면 주변 마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루오스야 어차피 드래곤 중에서 하르메아를 제외하면 제일 약한 편인 데다가 거기에는 광염(狂炎)의 아르시칸이 있잖아. 굳이 네가 가지 않아도 충분할 거다.”
“아, 그 사람이 있었군요.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별로 사이는 좋지 않지만 능력은 확실한 자였다. 하운은 그놈이 제게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생각하며 다시 지도를 보았다.
“여하튼 여기저기 문제가 생긴 드래곤들이 많아. 일각에서는 드래곤 로드가 다시 깨어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더라. 하지만 아직 아르펠트해에 뿌려진 피의 농도가 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놔두고….”
레이안은 지도 위 카르디아 북쪽에 있는 산맥들을 가리켰다.
“아일리, 이 지역의 몬스터들이 이동을 하고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급하게 이동을 하다 보니 무리에서 떨어지는 몬스터들이 많았고, 그것들이 양 떼를 습격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작년이라면 2, 3일에 한 번 정도 있었을 습격이 올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났으니까요.”
아일리는 제가 모는 수만 마리의 양들을 떠올렸다. 레인저의 일은 솔직히 아일리에게 부업이었다. 본업은 양치기요 수의사이며 레인저의 임무는 양 치러 가는 길에 같이 할 수 있어서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쪽의 수입이 더 짭짤해졌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몬스터들이 이동하는 방향은?”
“북쪽에서 남쪽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레이안은 지도를 보았다. 아일리가 온 곳은 플레노트의 레어가 있는 쪽인 북동쪽이다. 그곳은 북쪽에 큰 산맥을 두고 테티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지대이기에 사람들의 출입이 드물고, 깊은 숲이 자리 잡고 있어 몬스터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급하게 벗어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중앙 평야 지대로 내려오다니.
“여기 있는 드래곤은 플레노트인데….”
레이안이 말을 흐리자 하운이 힘주어 말했다.
“수면기에 들어간 것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플레노트가 깨어났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모르잖아. 셀비아스도 깨어났고.”
“셀비아스 같은 경우에는… 습격을 당한 것이지요.”
“그럼 플레노트가 당할 가능성은?”
“…….”
“일단은 그곳을 감시하고 있는 보석술사들이 매일 플레노트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긴 해. 그러니 셀비아스가 당했을 때처럼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제 뺨을 툭툭 때리던 레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살다 살다 드래곤 걱정을 다 해 보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던 레이안은 하운과 아일리에게 말했다.
“어쨌든 오늘 길게 이야기 좀 하자고.”
레이안의 말에 이번에는 아일리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건 좀….”
“왜?”
“그래도 제가 어찌 전하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일리는 밥만큼은 편하게 먹고 싶다는 뜻을 온 얼굴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레이안이 시무룩해져서는 대답했다.
“솔직히 내가 위엄 넘치는 왕은 아니잖아?”
사실이긴 했다. 가끔 왕답게 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끔이다. 기본적으로 레이안은 왕이라기보다는 일하기 싫다고 중얼거리는 고위 공무원의 느낌이 강했다.
“음, 뭐랄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친근하고 넉살 좋은 동네 삼촌의 느낌이긴 하지.”
사실이긴 했지만 하운과 아일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레이안이 되물었다.
“뭐야, 표정들이 왜 그래?”
하운과 아일리는 차마 ‘전하의 등 뒤에서 레티시아 왕비님이 노려보고 있는데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잠시 후 하운과 아일리는 쫓겨나듯 집무실을 나왔고, 안에서는 “자기 입으로 위엄이 없다고 말하는 왕이 어디 있어요!”라고 소리치는 레티시아의 목소리와 볼이 잡힌 채 “지금 이 모습이 위엄 있는 건 아니잖아!”라고 항변하는 레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일리는 레티시아가 나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 탓에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집무실 앞에 남았다. 하운은 저를 노려보는 아일리의 시선을 무시하며 재빨리 건물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공님!”
뒤를 돌아보니 왕실 보석의 방을 관리하고 있는 보석술사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요즘은 어떤가?”
“대공님께서 에르첼라의 브로치를 회수해 오신 덕분에 다들 바쁩니다. 그런데 정말 감탄했습니다. 역시 소르디아답다고나 할까요. 우리 카르디아도 보석 세공에 관해서는 꽤 발달해 있다고 생각했지만 에르첼라의 브로치를 그렇게 완벽하게 복원시켜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하운은 프레이에게 지불했던 보수가 얼마인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 그 돈이면… 그녀의 손녀까지는 평생 일 안 하고도 풍족하게 살 수 있으리라.
“다른 보석들의 상태는 어떤가?”
“브로치가 오랜만에 돌아오니 난리입니다. 처음에는 피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퇴근하기 전에 정리해 놓고 가도 다음 날 아침에 보면 한 군데에 다 몰려 있습니다. 계속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수다라도 떠나 봅니다. 자기들끼리도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다고.”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지요. 사실 목걸이가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데 비해 브로치는 언제나 목적도 뚜렷했었으니….”
“브로치의 목적이라면….”
“뻔한 것 아닙니까. 방문자 중에 미남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브로치도 주인을 많이 닮았잖아요.”
“…….”
“어쨌든 브로치가 돌아온 덕분인지 다른 보석들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보석의 방 담당자는 환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 정도면 에르첼라 컬렉션을 완벽하게 구동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래전, 드래곤 로드를 상대했을 때처럼요.”
***
궁에서 나온 하운은 말을 타고 재빨리 수도를 벗어났다. 한참을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파르멜 영지였다. 그는 언덕 위에 있는 제 저택을 보았다. 멀리서 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무 판을 덧대 막았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이끼와 잡초가 자라던 지붕에는 사람들이 올라가 낡은 기와를 벗겨 낸 듯했다. 이름 모를 덩굴이 붙어 자라던 벽은 깨끗해져 있었고, 저택 앞 정원에선 모두가 풀을 베어 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운은 저택을 향해 다가갔다.
“어? 오셨어요?”
앞치마를 입고 머릿수건을 쓴 채,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리엘라가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하운은 말에서 내려 리엘라의 모습을 살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옷과 앞치마에는 풀물과 흙탕물이 한데 섞여 묻어 있었다. 하운은 제 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붙은 작은 풀잎 하나를 떼 주며 물었다.
“오늘은 그냥 살펴본다고만 하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날씨도 좋고, 생각보다 사람들도 많이 왔거든요.”
리엘라는 손을 들어 저택 옆에 세워진 마차들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공작저의 문장이 붙은 마차를 비롯하여 화원의 마차, 저택 보수와 수리를 하는 업체의 마차, 정원 관리 전문 회사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워낙에 방치되어 있던 곳이라 어디 어디를 보수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전부 싹, 새로 손을 보기로 했어요. 아, 맞다. 일단 오셨으니까 이것부터 좀 봐 주세요.”
리엘라는 하운의 손을 잡으려다 망설였다. 제 손에 흙이 가득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운이 입고 있는 흰 예복에 얼룩이 묻을까 걱정스러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운은 그런 리엘라를 보더니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 더러운데!”
“괜찮아. 어차피 지금부터 나도 더러워질 거라서.”
하운은 다른 손으로 예복의 단추를 풀고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순식간에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 된 그가 리엘라와 함께 저택의 현관으로 향했다.
때마침 네아가 저택 안에서 혼자 피아노를 들고나오고 있었다.
“어, 집주인 왔네. 잘 됐다. 어서 들어와서 짐이나 옮겨.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빠서 짐 옮길 손이 없다.”
피아노를 사뿐히 놓은 네아는 저택 안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대리석 조각이 있었다. 저걸 들어 하운에게 건네줄까 고민하던 네아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저건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