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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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아라면 아가씨와 함께 외출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집사가 당황하며 되묻자 하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평소라면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고 네가 뭔데 보석들을 가져가느냐고 했을 텐데 웬일로 조용하길래 물어본 것뿐일세.”
하운의 말에 집사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확실히 네아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말만 했겠는가. 주먹도 날아갔겠지.
“정말 그것뿐입니까?”
“…….”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집사의 말에 하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호슨 공작이 일러둔 것이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뭐라고 했나.”
“‘보석이 공작저를 벗어나면 네아를 잘 달래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몰라서 보석이 왜 공작저를 벗어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만 정말로 그런 날이 오고 말았군요.”
집사는 허허 웃더니 하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네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괴력에, 민첩함.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거의 없다시피 한 수면 시간. 그것만으로는 확신을 얻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집사는 어둠이 깔린 복도를 걸어오던 네아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었다.
그 순간 그는 똑똑히 보았었다. 저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발걸음,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긴 동공.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눈동자.
네아가 다가오는 동안 그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네아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왜 그러냐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는 숨조차 함부로 내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쩐지 네아가 그대로 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아서.
그때를 떠올리던 집사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네아는 그에게 있어서 함께 호슨 공작을 모셨으며 이 저택을 지켜 내고 있는 가장 든든한 동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 느꼈던 공포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공포는 본능이 그의 뇌리 깊숙이 새겨 둔 것이었으니까.
“하인들도 많이 놀랄 것 같으니 죄송하지만 저는 가 보겠습니다. 저택이 이렇게 뒤숭숭한 것을 집사로서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지요. 보석의 운반도 도우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집사의 태도에 하운은 그 역시 네아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보내 주었다. 어차피 그도 시간이 없었다. 하운은 곧바로 보석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에는 그를 기다리는 보석술사들과 기사들이 있었다. 감히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보석의 방의 문을 하운은 가볍게 열고 들어갔다.
한번 받아들인 이에게는 더없이 관대한 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제가 설치해 두었던 보석의 힘을 풀었다.
“들어오게.”
하운이 명령했음에도 이곳에 처음 온 보석술사들은 주춤거리면서 쉽사리 발을 들여놓지 못했고, 이곳에 와 본 적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익숙한 척을 하며 하운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운이 목록에 있는 보석을 지정해 주면 집사와 함께 공작저의 사람들이 반출 기록을 작성하고, 보석술사들은 보호의 힘을 걸었다. 그다음에는 기사들이 보석을 조심스레 마차로 옮겼다. 긴급한 사항인 데다가 서로 손발이 잘 맞은 덕분에 작업은 빠르게 끝났다. 하운은 일단 보석으로 채운 마차의 절반 정도를 먼저 왕실로 보냈다. 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곧 마부를 대신해 말을 몰고 있는 네아가 보였다.
“야, 이 도둑놈아아아아아아아! 공작님 보석 놔두지 못해애애애애애애애애!”
올 게 왔군.
짧게 한숨을 내쉰 하운은 담담하게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예쁘게 리본으로 묶인 선물 상자 하나가 그의 얼굴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
“엉망이 됐네….”
리엘라는 한쪽이 우그러진 선물 상자를 보았다.
공작저로 들어올 때, 갑자기 우르르 나가는 왕실의 마차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놀라는 사이 네아와 아일리가 내려 그들을 막아선 다음 상황을 들었다. 그러더니 네아는 그대로 마부를 대신해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미친 듯이 몰았다. 심지어 아일리도 태우지 않고 그대로 내달리더니 쌓여 있던 선물 상자에서 “이게 제일 무거웠지!”라며 쇠로 된 문진이 들어 있는 상자를 냅다 하운에게 집어 던지는 게 아닌가.
물론 하운은 가볍게 그것을 막아 내었다. 당장이라도 하운의 목을 딸 것 같던 네아는 하운이 가까이 다가가 무어라 말하자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조용해졌다. 저 멀리서 “이것들이 나만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라고 소리치며 아일리가 달려오는 사이 하운은 리엘라에게 와서 말했다.
“여기, 왕실의 전언입니다. 레이디 리엘라 테니어.”
평소와 달리 리엘라를 부르며 절도 있게 인사의 자세를 취한 하운은 봉인이 된 편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리엘라가 넘겨받자 그는 피곤한 얼굴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올라가자. 가서 설명해 줄게.”
리엘라는 앉아 왕실의 문장이 찍힌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길어 보이지만 사실 담긴 내용은 단순했다. 국가 비상사태에 현재 카르디아에 등록되어 있는 보석들은 그 쓰임에 따라 언제든지 왕실이 무상으로 대여해 갈 수 있으며, 분실이나 파손에 대한 배상은 하나 그 힘이 소진되어 생기는 문제에 있어서는 배상의 책임이 없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리엘라는 또 다른 서류를 보았다. 그곳에는 왕실에서 요구하는 호슨 공작의 보석 목록이 길게 적혀 있었다. 얼핏 세어 보았더니 그 종류가 200종이 넘었다.
‘대부분 강한 보석들이네.’
보석의 방을 열면서 얻게 되었던 보석들은 현재 많은 수가 대여 중이다. 하지만 무기로 쓸 수 있는 힘을 가진 것들은 원탁회의에 몇 개 대여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작저 안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왕실이 원하는 보석들은 그것들이었다.
그 보석들을 정리할 때, 하운과 루시안이 열심히 그 보석들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서 말해 주었기에 리엘라는 그것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부 전투에서 활약했던 보석들이야.’
그것들이 모두 소집된다.
새삼 리엘라는 정말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실감했다. 리엘라는 어두운 얼굴로 왕실이 보낸 문서를 책상 위에 정리했다. 그녀가 다 읽기를 기다리고 있던 하운은 리엘라를 쫓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올라갈 수 있을까.”
“어디를요?”
“그대의 방.”
“네에?”
리엘라가 놀라 목소리가 높아지자 하운은 제가 너무 다짜고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는 그대의 방에 붙어 있을 개인 공간! 거기!”
리엘라는 그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한동안 빛나는 꽃들을 놓아두었던 곳이다.
“그런 곳이 있는 걸 알고 계셨어요?”
“예전에 호슨 공작이 말한 적이 있거든. 비밀스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오랜만에 이 보석, 저 보석의 힘을 같이 쓰려니 머리 아프다고.”
호슨 공작과의 추억에 젖는 것인지 하운의 얼굴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보고 대신 하라고 했지.”
“…….”
“주먹을 내 앞에 내밀면서 일주일 내로 못하면 화끈한 맛을 볼 거라고 하더군. 다시 생각해도 대공에게 하기에 참으로 불경한 행동이야.”
“…….”
아련함의 종류가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 거리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방을 나선 두 사람은 리엘라의 방으로 향했다. 앞서서 복도를 걷던 리엘라는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하운에게 말했다.
“저기, 네아에게 뭐라고 하신 거예요?”
도대체 하운이 뭐라고 말했길래 그렇게 살기등등하던 네아가 갑자기 조용해졌을까.
“아, 그거.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하니…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이제 네아는 공작저를 벗어날 수 없어.”
“네? 어째서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네아가 공작저를 나가면 안 된다니? 그러다 예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네아는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수도 밖으로 나갈 때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네아가 파르멜 저택을 오가며 일을 도와야 했을 땐 하운이 따로 왕실의 허가를 받아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공작저 안에만 있으라니.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네아가 과거 적국의 스파이였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 전쟁의 상대는 드래곤이다. 네아가 드래곤과 손을 잡을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사실 처음 의논되었던 것은 추방령이었지만, 지금까지 네아가 호슨 공작에게 바친 헌신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내고 있음을 인정받아 그나마 공작저 안의 구금으로 타협된 거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말 안 해 주실 거죠?”
“안 해 주는 게 아니라 못 해 주는 거야.”
하운은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아에 관계된 것은 기밀이거든. 이제 호슨 공작이 세상을 떠났으니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부 다 해 봤자 다섯 명 정도인가.”
“루시안 님도 알고 계세요?”
“아니, 루시안도 몰라.”
원탁회의의 의장인 사람도 모르고 있는 일이라니. 리엘라는 네아와 관계된 일이 제 생각보다 더 급이 높은 기밀 사항임을 깨닫고 더 캐묻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알려 주지 못할 것이고….
‘네아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어지간한 것이라면 제가 묻기도 전에 네아가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은 알려 주기 싫다는 뜻이니 굳이 캐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둘은 곧 리엘라의 방에 도착했고, 리엘라는 호슨 공작이 만든 작은 공간으로 하운을 안내했다. 하운은 문 앞에 잠시 서더니 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고, 하운은 재빨리 제 손을 거두었다.
“좋아, 첫 번째 통증은 이 정도인가.”
아팠을 텐데 신음 소리는커녕 책을 읽듯이 나직하게 말한 하운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더 큰 불꽃과 함께 살이 타는 듯한 냄새가 올라왔다. 하운은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않더니 기어이 문 너머로 손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듯 그는 뒤로 물러났고, 하운의 손은 마치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듯 여기저기 그을린 흔적과 함께 벌써부터 화상의 흔적인 수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미쳤어요?”
리엘라는 미친 듯이 손을 내저어 타는 냄새를 날린 다음 하운의 손을 살폈다.
“괜찮아. 치료의 힘이 있는 보석을 가져 왔으니까.”
“아니, 낫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프잖아요!”
“앞으로 자주 겪을 텐데 빨리 익숙해지는 게 나아. 네이판타의 브레스는 아마 이보다 독할 것이고.”
하운은 멀쩡한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상처를 치료했다. 화끈거리는 기운이 남긴 했지만 상처는 순식간에 나았다. 그는 조금 전 보석의 힘이 흘러나왔던 곳을 찾아 방의 문과 그 주변의 벽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무래도 만든 지 시간이 흘러 위력이 좀 약해진 모양이군. 죽을 각오로 들어가면 뚫을 수 있겠어.’
그렇다면 좀 더 보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운이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언니 말 들어야겠어요.”
그는 울먹이는 리엘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응?”
그가 놀라 바라보자 리엘라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가기 전에 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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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헤어져요. 가기 전에 헤어져요. 가기 전에 헤어져요.”
리엘라의 말이 하운의 귓가에서 무한히 메아리쳤다. 차라리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면 되물어 보기라도 했을 텐데, 하운의 머리는 그 말을 한 번에 너무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 말은 하운에게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오래전, 그가 북부 전선에서 플레노트를 상대하고 있을 때 그의 휘하 보석술사 한 명이 수도에 휴가를 나갔다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평소 일 처리가 완벽했던 그녀였는데 그 후로 정신을 놓고 있기 일쑤였고, 임무에 실수가 늘어난 데다가 밤만 되면 술병을 끌어안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라며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상관인 하운이 따로 그녀를 불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애인과 헤어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얼굴로 힘겹게 대답하던 그녀의 모습에 하운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친족이 사망한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애인과 헤어졌다고 지금 이 난리라는 건가?”
세상에 너같이 한심한 인간은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하운이 싸늘하게 말하자 그 보석술사는 아예 엎드려 펑펑 울었다.
“대공님께서 사랑을 아세요? 모르시잖아요! 지금 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조금도 모르실 거라구요!”
그녀는 항명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하운을 향해 빽 소리치더니 엎드려 엉엉 울었다. 결국 밖에서 그 소란을 다 듣고 있던 다른 보석술사들이 양해를 구하고 들어와 그녀를 달래며 데려갔다. 뭐라 혼낼 기분도 들지 않아 하운이 그저 혀를 차고 있자 나이 지긋한 다른 여자 보석술사가 이해하라는 듯 그에게 말했다.
“10년이나 사귄 사이인데 헤어져서 상심이 큰 것 같습니다. 계속 함께하면서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인연이 아닌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요. 어쩌다 편지 한 번 오면 다음 편지가 올 때까지 그걸 보고 또 봤는데….”
그 말에 하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었다.
“10년이든 100년이든 끊어지면 끝인 것. 개인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공적인 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지금 이곳이 전쟁터라는 자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자 다시 밖에서 “대공님은 사랑을 몰라아아아악!”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나이 든 보석술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10년이나 기다려 주었으니 연인이 제 처지를 이해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상대는 10년이나 참고 있었던 거지요. 들어 보니 플레노트를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를 했던 모양인데 상대는 그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그게 왜? 자랑스러운 무훈이 아닌가.”
“우리들에게나 그렇지요. 상대에게는 항상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초반 몇 년 정도까지는 자랑스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중요한 순간에 제 옆에 없는 연인에게 지쳐 갔을 것이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것은 자신은 물론 상대조차 가벼이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헤어지자고 했을 거구요.”
“…이해 되지 않군.”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대공님도 알게 되실 거예요.”
하운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리엘라를 보았다. 지금 이 순간, 하운은 울며불며 난리 쳤던 보석술사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로 끌고 오지 말라고? 지금 숨도 못 쉬겠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는 남아 있는 정신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아 겨우 입을 열어 리엘라에게 말했다.
“왜, 왜…?”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걸 신경 쓸 여유 따위 그에게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리엘라가 저런 무서운 말을 한 이유부터 알아야 했으니까.
하운이 덜덜 떨며 이유를 물어보자 리엘라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죽은 사람하고 연애하는 취미 없어요!”
“나 아직 안 죽었는데!”
“곧 죽을 거 같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한 소리 좀 하겠다고 두 사람을 따라온 아일리는 열린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문을 닫아 주었다. 알아서 잘해 봐라. 나는 모르겠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호슨 공작 때문인지는 몰라도 리엘라는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다. 물론 그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문제긴 하지만, 어쨌거나 리엘라는 그 말을 꽤 싫어하는 사람에 속했다. 그런데 그가 곧 죽을 거 같다고 말하다니. 어지간히 화가 나지 않고서야 내뱉지 않았을 터였다.
하운은 제 말과 행동 중에 어느 것이 리엘라의 심기를 저렇게 건드렸는지 되짚어 보았다. 다행히 그동안의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는 금세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과거 나이 든 보석술사의 말도 생각났고.
자신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상대 또한 가벼이 여기는 것이라고.
하운은 이제 그을음이 조금 남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고통에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인데, 그런 제 태도가 리엘라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하운이 머뭇거리는 사이 리엘라는 밖으로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운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만!”
“놔요!”
“내가 실수, 아니 잘못했어!”
그 말에 리엘라는 노기 가득한 젖은 눈으로 하운을 노려보았다.
“뭘 잘못했는지 진짜 알고 있어요?”
***
한 시간 후, 하운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리엘라 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할 수 있어요? 난 하운 님이 전쟁터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한데 어떻게….”
다행히 하운은 리엘라가 화가 난 이유를 정확히 맞힐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화가 쉽사리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 고통을 참으신다구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겠지. 리엘라가 화를 낼 만큼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된 하운은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리엘라의 화를 고스란히 들었다.
한참 후,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최대한 다칠 일은 피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리엘라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니 하운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뭔가요? 아니, 그보다 이 방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직접 구동하는 걸 봐야 좀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거든.”
“이런 방을 더 만들려는 건가요? 전쟁터에서 이용할 수 있게?”
“아니야. 전쟁터에서 이런 공간은 솔직히 사치에 불과하고… 만들어 두면 안 돼.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은 몸을 사리게 되거든. 게다가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지.”
“…….”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리엘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자 하운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북부 전선에서 이용할 생각으로 알아보려 한 게 아니야. 이건….”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르멜 저택의 온실에… 설치해 볼까 해서….”
“거기에요? 왜요?”
그 온실에 뭐가 있더라? 리엘라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채소는 대부분 텃밭으로 옮겨 심었고, 그곳에 있는 것은 소르디아에서 사 왔던 더운 지역의 식물들과 공작저에서 가져간 화분들 그리고 요즘 새로이 취미를 붙인 작은 선인장 화분들이 있었다. 그 외에 연못에서 길렀다가는 전부 잉어 밥이 될 것 같아서 큰 수반에 따로 떠 놓은 수생 식물들이 있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렇게 엄청난 힘으로 지킬 만한 게 없는 곳이다. 설마 별생각 없이 썼던 삽이나 곡괭이가 실은 금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었겠지?
“그냥, 내가 여기 없으니까… 위험하니까….”
더듬거리는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그 온실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다. 하운이 이런 일까지 벌이면서 그곳에 보석을 두려 하는 것은 바로 그 온실 안에서 일하는 그녀를 지키려 함이었다.
“…….”
그런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었으니 당황할 법도. 물론 연유를 알았다고 해서 화를 안 낼 것은 아니었지만.
“준비할 것도 많은데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네아도 있고… 아, 네아는 못 가는군요.”
네아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네아는 이제 그곳에 갈 수 없다.
“하지만 네아도 이 방과 비슷한 힘을 가진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 안심하겠네요. 조금 있다 살짝 말해 줘야….”
“하지 마.”
하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아에게는 하지 마.”
무척이나 진지하고도 심각한 목소리였다. 리엘라는 갑자기 바뀐 그의 분위기에 움츠러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엘라가 제 태도에 겁을 먹은 것을 알아차린 하운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네이판타가 깨어난 것 때문에 그것의 피를 나누어 받은 네아도 꺼림칙한 상황이다.
드래곤이 새끼를 낳은 적은 없었다. 드래고니안을 드래곤의 새끼라고 보아야 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드래고니안은 어디까지나 드래곤의 부산물일 뿐, 완전한 드래곤이 될 수는 없다.
드래고니안을 만들어 낸 드래곤도 희귀하고, 살아남은 드래고니안도 거의 없기에 둘 사이가 어떠한지 알아보는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네아가 유일한 표본이었다.
‘호위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보석술사들이 오긴 하겠지만….’
그들도 네아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 채, 드래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이 저택에 머물면서 네아를 감시할 것이다. 하운이 부탁하고 또 부탁해 왕궁에 남은 보석술사 중 특별히 유능한 자로 파견될 수 있도록 했다.
레티시아가 왕의 호위에 쓸 인력이라 곤란하다고 했지만 레이안이 손을 내저으면서 “저기가 더 위험하잖아? 만약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공작저에서 맞서는 것이 왕궁도 준비하기 편하지 않을까?”라고 말해 준 덕분이었다.
하운은 조금 굳어 있는 리엘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아가 알면 시끄러울 거라서 그래. 보나 마나 또 놀려 댈 거고.”
그 말에 다시 얼굴이 밝아진 리엘라가 피식 웃었다.
“깜짝이야. 난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 이유라면 뭐… 비밀 지킬게요.”
알겠다는 듯 한쪽 눈을 깜빡이는 리엘라의 모습에 하운은 좀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그의 입술이 리엘라의 귓가를 스치며 속삭였다.
“내가 떠나기 전에 파르멜 저택에서 하루만 자고 가 줄 수 있어?”